사법 과오의 기록ㅡ국가별 비교 심층 리포트
독일 · 프랑스 · 영국 · 미국 (일본 대만은 첨부파일)
사법권력은 왜 스스로 청산하지 못하는가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 AI 동료들
민들레뉴스 기고문(2026.04.23) 외국 사례 상세 분석
서론 — 왜 네 나라인가
이 리포트는 민들레뉴스에 발표된 칼럼 「'잘못된 판결 백서'의 간행을 제안한다」(이원영, 2026.04.23)에 소개된 네 나라의 외국 사례를 국가별로 상세하게 재구성한 것이다.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은 모두 근대적 사법 제도를 갖춘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사법 과오를 청산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달랐다. 독일은 형사적 도구가 있었으나 작동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청산 기구를 만들었으나 흐지부지됐다. 영국은 30년의 시민 캠페인 끝에 독립 기구를 얻었다. 미국은 시민과 학술 기관의 협력으로 개혁의 증거를 축적했다.
네 나라의 경험을 가로질러 하나의 명제가 도출된다. '청산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청산 대상과 같은 집단에 속할 때, 청산은 실패한다.' 이 리포트는 그 명제를 구체적 사실로 채우는 작업이다.
제1장 독일 — 도구는 있었으나 칼날은 무뎠다
1-1. 뉘른베르크 법관 재판(1947)
1947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뉘른베르크에서는 이른바 '법관 재판(Jurists' Trial)'이 진행됐다. 미군 군사법원 주도로 나치 시대 법관과 검사 16명이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로 기소되었다. 이 재판은 '법복을 입은 자도 국제법 차원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원칙을 처음으로 확립했다는 점에서 법사학적 의의가 크다.
재판에서는 나치 최고인민재판소(Volksgerichtshof)의 오를란트 테어라크 총재, 롤란트 프라이슬러의 전임자이기도 한 법관들이 피고석에 섰다. 10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4명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핵심적 한계가 있었다. 이 재판은 미군이 주도한 점령 당국의 심판이었다. 독일인이 독일인의 사법 범죄를 심판한 것이 아니었다. 독일 스스로의 청산은 전혀 다른 경로를 걸었다.
1-2. 법왜곡죄(Rechtsbeugung) — 있으나 쓰이지 않는 칼
전후 독일은 형법 제339조에 법왜곡죄(Rechtsbeugung)를 명문화했다. 법관, 중재인, 또는 기타 공무원이 법률 사안을 지도하거나 결정하는 과정에서 한쪽에 유리하도록 고의로 법을 왜곡한 경우, 1년 이상 5년 이하의 자유형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나치 사법부의 반성에서 비롯된 제도적 안전장치였다.
그런데 이 조항은 정작 나치 법관들에게 단 한 번도 적용되지 않았다. 독일 법원이 채택한 논리는 이러했다. '나치적 법적 확신(nationalsozialistische Rechtsüberzeugung)에 기해 판결했다면 법왜곡의 고의(Vorsatz)가 없다.' 자신이 당시 법질서로 믿은 것에 따라 판결했으므로 범죄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이 논리의 결함은 명백하다. 법정형이 징역형인 범죄에 대해 사형을 선고한 것, 인종법을 근거로 유대인을 재산 몰수한 것까지도 '신념'으로 면죄되었다. 법관의 내면적 확신이 법적 객관성을 대체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중 잣대였다. 통일 이후 동독 판사들은 같은 법왜곡죄로 처벌받았다. 동독 체제하에서 정치적 판결을 내린 법관들이 형사소추된 것이다. 그러나 나치 법관들은 '독립된 법관'으로 면책되었다. 패전국의 법관에게는 칼을 들고, 자국의 나치 법관에게는 방패를 들었다.
1-3. 나치 법관들의 전후 복귀
기록되지 않은 것에는 책임도 따르지 않았다. 나치 시대에 수백 건의 사형을 선고한 법관들이 전후 서독 법원에 복귀해 계속 판결을 내렸다. 1957년 시작된 연방법무부의 '나치 법관 색출 조사'(브라운슈바이크 스캔들)는 약 1만 5000명의 법관 중 상당수가 나치 시대 재판 관여자임을 밝혀냈으나, 아무런 법적 조치로 이어지지 않았다.
전후 서독 사법부의 첫 연방대법원장이었던 헤르만 바인카우프는 나치 군사최고법원의 선임검사 출신이었다. 그는 수천 건의 사형 판결에 관여한 전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1950년대 서독 최고 사법 수장의 자리에 앉았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4. 기록의 공백 — 2020년에야 나온 첫 오판 연구
1990년부터 2016년까지 독일의 형사 오판 사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연구가 처음 발간된 것은 2020년이었다. 마티아스 쾨벨(Matthias Köbel) 등의 연구팀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26년간의 재심 무죄 사례를 분석하며, 기록 자체가 부재했음을 가장 큰 문제로 지목했다. 오판이 드물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록하려는 시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나치 청산의 모범 사례로 종종 거론된다. 뉘른베르크 재판, 아이히만 재판, 홀로코스트 기념관, 반나치 교육 과정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사법부 내부의 청산은 그 반대편 극단에 있었다. 외부의 역사는 기록했지만, 내부의 역사는 침묵했다.
1-5. 한국에 대한 시사
독일의 경험이 한국에 주는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 형사적 도구의 존재가 청산을 보장하지 않는다. 한국에도 직권남용죄, 허위공문서 작성죄 등 사법 과오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다. 그러나 나치 법관들처럼 이 조항들이 사법부 내부에 적용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둘째, 이름이 기록되지 않으면 책임도 따르지 않는다. 독일이 나치 법관의 이름을 공식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결과, 그들은 전후에도 판결을 내렸다. 인혁당 판사들, 긴급조치 판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제2장 프랑스 — 청산은 했으나 끝을 보지 못했다
2-1. 비시 정권과 프랑스 사법부의 협력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고 비시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프랑스 사법부는 대부분 새 권력에 협력했다. 비시 정권이 반유대인 법령('유대인 신분에 관한 법률', 1940년 10월)을 공포했을 때 법원은 이를 적극적으로 집행했다. 유대인의 직업 박탈, 재산 몰수, 추방 과정에서 판사들은 법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1941년 비시 정권은 판사들에게 '마레샬(Maréchal) 페탱 원수에 대한 충성 맹세'를 요구했다. 전체 판사 중 단 한 명만이 이를 거부했다. 나머지 거의 전원이 서명했다. 이 사실은 해방 이후 청산의 아킬레스건이 된다.
2-2. 에퓌라시옹(Épuration) — 청산의 시도
1944년 8월 파리 해방 이후 프랑스는 부역자 청산(Épuration légale)에 착수했다. 전국적으로 약 30만 건이 조사되었고, 약 9만 700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중 767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실제 처형된 숫자는 약 770명으로 추산된다.
사법부에 대해서는 별도의 중앙숙청위원회(Commission d'Épuration de la Magistrature)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전체 판사의 약 10%에 해당하는 약 270명을 조사했다. 최종적으로 33명이 형사 처벌을 받았고, 나머지는 직위 강등이나 조기 퇴직 등 행정 제재를 받았다.
숫자만 보면 상당한 규모의 청산이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구조적 모순이 드러난다.
2-3. 청산의 모순 — 누가 청산을 집행했는가
중앙숙청위원회를 구성한 판사들 자신이 비시 정권에 충성 맹세를 한 전력이 있었다. 단 한 명만이 서명을 거부했다는 것은, 청산을 집행할 사람들 거의 전원이 청산 대상과 같은 전력을 공유했다는 의미이다. 이 근본적 모순이 청산의 깊이를 제한했다.
처벌 기준도 모호했다. 명시적으로 나치 협력에 가담한 경우, 즉 레지스탕스 대원을 사형에 처하거나 유대인 추방에 직접 관여한 판사들은 처벌받았다. 그러나 비시 법령을 '그냥 따른' 다수의 법관들은 '법을 준수한 것'으로 면책됐다. 독일의 '나치적 확신으로 인한 고의 부재' 논리와 구조가 동일하다.
2-4. 두 차례 사면법과 청산의 종결
1951년 제1차 사면법(loi d'amnistie)이 통과되었다. 비시 정권 협력자들 중 중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들에 대한 처벌을 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1953년 제2차 사면법이 다시 범위를 넓혀 사실상 대부분의 부역자 처벌을 종결시켰다.
이 사면법들의 배경에는 냉전 체제 속에서 국민 통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드골 이후 정치 세력의 판단이 있었다. '프랑스는 모두 레지스탕스였다'는 신화가 정치적으로 요청되었고, 부역의 역사는 적극적으로 지워졌다.
2-5. 80년 후의 고백
2024년 프랑스 파기원(Cour de cassation)의 명예 재판장이 한림원(Académie française)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시 점령기에 사법부가 담당했던 역할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이 지배했다.' 해방으로부터 80년이 지난 후의 고백이었다.
프랑스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비시 시대 역할을 성찰하는 데는 80년이 걸렸다. 그나마도 자발적인 역사 청산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학자들과 언론이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기록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2-6. 한국에 대한 시사
프랑스의 경험은 공식 청산 기구가 갖는 내재적 한계를 보여준다. 기구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청산 집행자들이 청산 대상과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한, 청산은 철저해질 수 없다. 한국의 과거사위원회들이 진실을 규명하면서도 책임자 처벌에 소극적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사면법의 교훈도 중요하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청산이 중단될 때, 그 부채는 다음 세대로 이전된다.
제3장 영국 — 시민의 30년 캠페인이 제도를 만들었다
3-1. IRA 테러 수사의 오심들
1970년대 북아일랜드 분쟁(더 트러블, The Troubles)이 격화되면서 영국 본토에서도 IRA 폭탄 테러가 잇따랐다. 1974년 11월 버밍엄 시내 두 곳의 술집에서 폭탄이 터져 21명이 숨지고 180명이 다쳤다. 같은 해 길퍼드와 울위치에서도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수사 당국은 강압적 방식으로 신속하게 용의자를 특정하고 자백을 받아냈다. 재판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오판이 구조적으로 생산될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3-2. 버밍엄 6인 사건(1974~1991)
휴 칼라거, 패트릭 힐, 제라드 헌터, 리처드 맥일케이니, 윌리엄 파워, 존 워커. 이 여섯 명의 아일랜드계 이민자는 버밍엄 술집 폭탄 테러의 범인으로 체포되었다. 강압 수사로 받아낸 자백과 논란이 많은 과학적 증거(ESDA 검사 조작)를 토대로 1975년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종신형이 선고됐다.
이들은 처음부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항소는 번번이 기각되었다. 영국 언론도 처음에는 이들을 '살인자들'로 규정했다. 변호인들과 시민단체만이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1991년 마침내 항소심이 유죄 판결을 뒤집었다. 16년의 억울한 복역이었다.
재판 후 조사에서 경찰이 자백 조서를 사후에 변조했다는 증거, 무죄를 입증하는 진술을 수사 당시 은폐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검사가 무죄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은 것도 확인되었다.
3-3. 길퍼드 4인 사건(1974~1989)
폴 힐, 패트릭 암스트롱, 제라드 콘론, 캐롤 리처드슨. 이 네 명은 1974년 길퍼드와 울위치 폭탄 테러의 범인으로 체포됐다. 마찬가지로 강압 자백을 근거로 1975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패트릭 암스트롱의 무죄를 증명할 경찰 기록이 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1989년 항소심이 이들의 유죄 판결을 뒤집었다. 제라드 콘론의 아버지 주세페 콘론은 테러와 무관했음에도 아들의 '공범'으로 함께 투옥되었다가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 가족의 이야기는 영화 '나의 아버지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 1993)로 만들어졌다.
3-4. JUSTICE — 시민단체의 30년 캠페인
영국 시민법률단체 JUSTICE는 1957년 창설된 유서 깊은 인권 단체다. 버밍엄 6인, 길퍼드 4인 사건이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JUSTICE는 형사사법의 오심 문제와 독립적 재심사 기구의 필요성을 꾸준히 주장해왔다.
이 단체가 전략적으로 선택한 방식은 개별 피해자 지원, 의회 로비, 학술 연구 지원의 세 축이었다. 개별 사건을 구제하면서 동시에 제도적 문제를 공론화하는 방식이었다. 버밍엄 6인, 길퍼드 4인 사건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뒤집혔고, 의회 내부에서도 독립 기구 설치 논의가 본격화됐다.
3-5. CCRC 설립(1997) —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제도
1997년 형사사건 재심위원회(Criminal Cases Review Commission, CCRC)가 설립되었다. 영국 왕실의 칙허(Royal Charter)에 의해 독립 기관으로 설치된 이 위원회는,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사건을 독립적으로 재심사해 항소심에 회부하는 권한을 가진다. 정부가 위에서 만들어준 것이 아니었다. 시민의 요구가 30년에 걸쳐 아래에서 밀어올린 결과였다.
CCRC의 구조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위원들은 판사나 검사 출신이 아니라 다양한 배경의 시민으로 구성된다. 사건 재심사는 해당 사건을 처리한 법원과 독립된 팀이 맡는다. 재심사 결과 실질적 이의 제기 근거가 있다고 판단되면 항소심에 사건을 회부한다. 검찰이나 사법부 내부의 판단을 거칠 필요가 없다.
3-6. CCRC의 성과와 한계
설립 이후 CCRC는 수천 건의 사건을 재심사했다. 항소심 회부 사건 중 약 70% 이상에서 원래 유죄 판결이 뒤집혔다. 시민 주도의 독립 기구가 사법 오류를 교정하는 기능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그러나 CCRC 자체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2019년 독립 검토 보고서는 CCRC가 항소심 회부 기준을 지나치게 높게 설정해 청구 사건의 3% 미만만 회부한다는 점, 또한 CCRC 자체가 내린 결정의 오류를 인정하는 데 소극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독립 기구도 자기 성찰의 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같은 함정에 빠진다는 교훈이다.
3-7. 한국에 대한 시사
영국의 경험에서 한국이 배울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독립적 재심사 기구는 위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시민과 시민단체의 장기적 캠페인이 없으면 제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국의 과거사 재심 기구들이 정권 교체에 따라 설치되었다가 사라지는 것과 대비된다. 둘째, CCRC의 한계는 한국판 독립 재심사 기구 설계에서 보완해야 할 지점을 알려준다. 기구 자체의 자기 오류 인정 메커니즘, 그리고 회부 기준의 투명성이 핵심이다.
제4장 미국 — 기록이 개혁을 이끌었다
4-1. DNA 기술과 오판 가시화의 계기
1980년대 후반 DNA 분석 기술이 형사사법에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이미 선고된 판결들을 검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모발, 혈액, 정액 등 생물학적 증거를 재분석하면 범인 여부를 과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사법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미 확정된 판결'이 과학적으로 뒤집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초기 DNA 무죄 확정 사례들은 개별적으로 뉴스가 되었다. 그러나 누가 이것들을 모아 패턴으로 분석하고, 제도 개혁의 근거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4-2. 이노센스 프로젝트의 탄생(1992)
1992년 뉴욕 카도조 법과대학원(Cardozo School of Law)의 피터 뉴펠드(Peter Neufeld)와 배리 섹(Barry Scheck) 두 변호사가 이노센스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를 설립했다. 시작은 소박했다. 재소자들의 편지를 검토해 DNA 재분석으로 무죄를 입증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들을 찾아내는 작은 클리닉이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처음부터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다. 개별 사건의 구제와, 그 사례들을 데이터로 쌓아 제도 개혁을 이끄는 것이었다. 억울한 사람 한 명을 구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지 그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는 것을 조직의 핵심 사명으로 삼았다.
4-3. 이노센스 프로젝트의 방법론과 성과
이노센스 프로젝트의 방법론은 세 층위로 구성된다. 첫째, 개별 사건 재심사다. DNA 증거가 보존된 사건에서 재분석을 통해 무죄를 입증하고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다. 둘째, 원인 분석이다. 무죄 확정된 사건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해 오판의 공통 원인을 추출한다. 셋째, 정책 캠페인이다. 분석된 원인에 기초해 경찰 수사 절차, 증거 보존 규정, 증인 진술 방식 등에 대한 제도 개혁을 입법부와 사법부에 요구한다.
이노센스 프로젝트가 분석한 주요 오판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목격자 오인(eyewitness misidentification)이 가장 빈번한 원인으로, 무죄 확정 사건의 약 70%에서 나타났다. 허위 자백(false confessions)이 그 다음으로 많았다. 또한 범죄수사관의 증거 오용 및 조작, 부실한 국선 변호인 제도, 전문가 증언의 과학적 부정확성(bite mark 증거 등)도 주요 원인으로 분석됐다.
2025년 기준 이노센스 프로젝트는 250건 이상의 무죄를 확정했다. 이를 통해 석방된 사람들의 평균 억울한 수감 기간은 약 14년이었다. 이들이 잃어버린 삶의 총합은 3000년을 넘는다.
4-4. 전국 이노센스 네트워크
이노센스 프로젝트의 성공 모델은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현재 미국 전역에 60개 이상의 이노센스 기관(Innocence Organization)이 활동하며, 이노센스 네트워크(Innocence Network)로 연대하고 있다. 캐나다, 영국, 호주,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도 유사한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하나의 법대 클리닉에서 시작된 것이 국제적 운동으로 확산된 것이다.
4-5. 국가 무죄선고 기록소(NRE, 2012)
이노센스 프로젝트가 DNA 재분석을 통한 '사건 구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국가 무죄선고 기록소(National Registry of Exonerations, NRE)는 '기록의 집대성'에 초점을 맞췄다. 이 리포트 원문 필자가 '구상하는 백서와 가장 가까운 외국 선례'라고 명시한 기관이다.
NRE는 2012년 미시간대 법학대학원, 미시간주립대 법학대학원, UC어바인 법학대학원이 공동으로 설립했다. 운영 자금은 대학 연구비와 공익재단 후원으로 충당된다. 정부 예산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은 독립성의 핵심이다.
4-6. NRE의 데이터베이스 구조
NRE는 1989년 이후 미국에서 발생한 모든 무죄선고(exoneration) 사례를 집대성한다. 2025년 기준 3698건이 등록되어 있다. 각 사례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사건명, 피고인 이름, 소재지
판결 법관 및 기소 검사 이름
오판 원인 유형 분류(목격자 오인, 허위 자백, 증거 조작, 전문가 증언 오류, 무죄 증거 은폐 등)
판결 연도 및 무죄 확정 연도
억울한 수감 기간(년수)
피고인의 인종, 성별, 연령
재심 청구 주체(이노센스 기관, 본인, 가족, 언론 등)
이 모든 정보는 누구나 무료로 검색하고 다운로드할 수 있는 공개 데이터베이스로 제공된다. 연구자, 언론인, 시민, 입법자 모두가 이 데이터를 인용해 정책 논쟁을 벌일 수 있다.
4-7. 그로스 교수의 철학 — 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일
NRE 공동 창설자인 새뮤얼 그로스(Samuel Gross) 미시간대 법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들은 우리가 모르는 훨씬 더 많은 비극들을 가리키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 발언은 NRE의 존재 이유를 압축한다. 기록된 무죄선고 3698건은 실제 오판의 전부가 아니다. DNA 증거가 없는 경우, 변호인을 선임할 능력이 없는 경우, 재심 청구를 포기한 경우, 이미 수감 중에 사망한 경우 — 이 모든 경우들은 기록에 잡히지 않는다. 3698건은 빙산의 수면 위 부분일 뿐이다. 기록은 보이는 것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4-8. 경찰 조직 비위 전담 데이터베이스
NRE는 경찰의 조직적 비위로 집단 무죄 처리된 사건들을 별도로 집계하는 '그룹 억울 수감(Group Exonerations)' 데이터베이스도 운영한다. 개별 경찰관의 일탈이 아니라, 특정 경찰서 또는 수사팀이 조직적으로 증거를 조작해 다수의 피해자를 만든 사건들이다. 시카고 경찰의 조직적 고문과 허위 자백 강요로 수십 명이 억울하게 수감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별도 데이터베이스는 개인의 오판이 아닌 '제도의 실패'를 기록하는 도구가 된다.
4-9. 미국 경험의 핵심 — 이해관계 없는 주체
미국의 이노센스 프로젝트와 NRE가 독일·프랑스·영국의 공식 청산과 다른 결정적 이유는 무엇인가. 기록하는 주체가 기록 대상과 이해관계가 없었다는 점이다. 법대 교수들이 경찰과 검사를 조사했다. 시민단체 변호사들이 법원 판결을 재검토했다. 이들은 법원 예산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경찰 청탁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검사의 경력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기록은 살아남았고, 반박될 수 없었고, 개혁의 증거가 되었다.
4-10. 한국에 대한 시사
미국의 경험이 한국의 '잘못된 판결 백서'에 주는 시사는 직접적이다. 첫째, 데이터베이스 형식이 인쇄 백서보다 강력하다. 누구나 검색하고 인용할 수 있는 공개 데이터베이스는 기록을 살아있게 만든다. 둘째, 오판 원인의 유형화가 핵심이다. 개별 사건을 나열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강압 수사·증거 조작·권력 개입·법리 왜곡 등의 원인 유형을 분석해야 같은 오판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셋째, 법학 기관과의 협력이 기록의 신뢰성을 높인다. 한국의 경우 법학전문대학원과 시민사회가 협력하는 독립 기록 기구가 가능한 모델이다.
제5장 비교 종합 — 무엇이 청산을 막았는가
네 나라의 경험을 가로질러 하나의 패턴이 반복된다. 청산을 집행하는 주체가 청산 대상과 같은 이해관계 집단에 속할 때, 청산은 반드시 실패한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역사의 법칙이다.
미국의 경험이 다른 세 나라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청산의 주체 때문이다. 법대 교수와 시민단체 변호사들이 경찰과 검사를 기록했다. 이들은 사법부 예산으로 운영되지 않았고, 법원 인사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기록은 살아남았다.
친일인명사전이 해낸 것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이해관계 없는 시민과 연구자들이 독립적으로 기록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 기록은 반박될 수 없었고, 역사가 되었다.
결론 — 기록이 먼저다
네 나라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최종 교훈을 세 문장으로 압축한다.
첫째, 제도 없이 기억이 사라지고, 기억 없이 제도는 공허해진다. 독일은 법왜곡죄라는 제도를 가졌지만 나치 법관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법관들은 전후에도 판결을 내렸다. 프랑스는 청산 기구를 만들었지만 사면법으로 기억을 지웠다. 같은 집단이 다시 사법부를 장악했다.
둘째, 어느 나라에서도 기록 없이 청산은 없었다. 영국에서 30년 캠페인이 성공한 것은 피해자들의 사건이 시민단체의 기록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3698건의 데이터가 반박 불가능한 근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셋째, 청산의 주체는 청산 대상과 이해관계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네 나라의 경험이 한국의 '잘못된 판결 백서'에 보내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다. 법관이 법관을 기록해서는 안 된다. 검사가 검사를 기록해서는 안 된다. 시민이, 연구자가, 이해관계 없는 손이 이름을 적어야 한다. 그래야 그 기록은 살아남고, 역사가 되고, 개혁의 무기가 된다.
시작은 오늘 할 수 있다. 이름들은 이미 그곳에 있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AI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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