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 편찬의 경위 — 43년의 여정
이원영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 AI Claude Sonnet 4.6
1. 씨앗 — 임종국의 외로운 작업(1966~1989)
이야기는 한 개인에서 시작된다. '친일파'라는 단어 자체가 임종국이 1966년 출간한 《친일문학론》에서 처음 나왔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체결된 이듬해인 1966년 7월 출간된 이 책은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으며, 1970~80년대 암울했던 독재정권 시기 옥중 필독서로도 읽혔다.
임종국은 이후에도 혼자서 자료를 모으고 책을 썼다. 《일제하의 사상탄압》, 《밤의 일제 침략사》,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역대 독재 정권 아래에서 금기였던 친일 문제를 혼자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임종국의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임종국이 남긴 자료를 물려받은 것을 계기로 친일파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반민족문제연구소'를 1991년 2월 27일에 설립하였고, 이후 이 연구소는 1995년에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하였다. 한 사람의 죽음이 조직을 낳은 것이다.
2. 조직화 — 편찬위원회 발족(1999~2001)
1999년 8월 11일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 대학교수 1만인 선언'을 기반으로 2001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편찬 사업을 시작하였다.
2001년 12월 2일, 개인 1850명과 185개 단체가 발기인으로 참여한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이 출범했고, 당일 여러 분야의 120여 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재단 산하 특별 위원회로 발족했다.
편찬의 기준도 이때 확정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을사늑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한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 친일파를 규정했다.
방법론에서도 엄격한 원칙을 세웠다. 편찬위원회는 객관성과 엄밀성을 사전 편찬의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 삼았다. 엄격한 증거주의 아래 집필하였으며, 기록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친일행위를 한 인물들의 경력·행적 등 사실관계만을 담아 가치 판단과 주관적 서술은 가능한 한 배제하기로 했다. 주간 연구소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인물 정보의 집적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공문서·신문·잡지 등 문헌자료를 1차 분석 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후의 신문기사·회고록·증언 등은 방증으로 채택하였다.
3. 위기 — 국회 예산 삭감과 시민 성금(2004)
편찬 작업이 가장 위기에 몰린 것은 2003년 겨울이었다.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예산조정소위원회는 여야 협의로 사전 편찬 기초사업인 '일제단체인물연구'에 대한 지원 예산 5억 원 전액을 삭감했다. 한나라당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좌초할 뻔한 친일인명사전을 구해낸 것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네티즌 한 명이 제안한 국민모금운동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의 공동캠페인으로 시작된 지 불과 11일 만에 목표액인 5억 원을 넘기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3만여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탠 것이었다.
정부는 이 모금 자체마저 막으려 했다. 행정자치부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에 공문을 보내 이 모금 운동이 '기부금품모집규제법'에 저촉된다며 모금 운동 중단을 요구했으나 4시간 만에 철회했다. 여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4. 반발 — 이적 행위 시비와 발행 금지 가처분(2005~2009)
2005년, 일부 시민단체 등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이적 행위로 적시하고 비판적인 기자회견, 시위 등을 벌이자 민족문제연구소는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을 이적 행위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수록 예정자 명단이 2005년 8월 발표되자 해당 인물들의 후손들이 발행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그러나 2009년 법원은 모두 기각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긴 여정에서 법적 공방은 그 자체가 사전의 정당성을 검증하는 과정이 되었다.
5. 완성 — 2009년 11월 출간
2009년 11월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전 3권)에는 일차로 4,389명의 친일행위자를 수록했다. 1966년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으로부터 43년, 민족문제연구소 설립으로부터 18년, 편찬위원회 출범으로부터 8년의 결과였다. 편찬위원회에는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각 분야의 교수·학자 등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참여했으며, 이들을 포함하여 180여 명이 집필위원으로 위촉되어 이 역사적 사업을 완수하였다.
이 과정이 말해주는 것
한 가지 구조가 눈에 띄네. 국가는 세 번 방해했다. 예산을 삭감했고, 모금을 막으려 했으며, 수록 예정자들의 법적 공세 뒤에 사실상 서 있었다. 그럼에도 사전은 완성됐다. 완성시킨 것은 임종국이라는 개인의 외로운 선구, 그리고 3만 시민의 11일짜리 모금이었다.
부록
편찬위원회의 구성과 작업 과정
1. 편찬위원회의 구조
세 층위의 인력 체계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였다. 즉 편찬위원(결정권) → 집필위원(서술) → 자료 연구자(발굴)의 3단 구조였다. 총 관여 인원이 400명이 넘는 셈이다.
위원장은 윤경로. 윤경로는 한성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경실련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낸 인사다. 진보 색채보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중간에 위치한 인물을 내세워 정치적 중립성을 설계한 것이다.
보수 학자도 포함시켰다.
오영섭 교수와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처럼 보수로 분류되는 학자들도 사전편찬에 참여했었다. 이것이 의도적 설계였음을 중립성 논란에 대한 방어 방식이 보여준다. 실제 사전에는 임헌영 소장의 대학 시절 정신적 스승이었던 교수 백철을 과감히 수록했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선구자였던 임종국의 부친 역시 수록했다.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의 연고인조차 예외로 두지 않은 것이다.
2. 자료 수집의 규모
총 3천여 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하였다.
사료의 위계도 엄격히 설정했네. 인물 정보의 집적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공문서·신문·잡지 등 문헌자료를 1차 분석 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후의 신문기사·회고록·증언 등은 방증으로 채택하였다. 당대의 1차 사료가 없으면 수록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네. 기억이 아니라 기록만을 증거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3. 수록 기준의 설계 — '차등의 윤리학'
단순히 친일 행위를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친일이냐**를 정밀하게 분류했네. 선정 기준으로는 일제에 협력한 자발성과 적극성, 반복성과 중복성, 지속성 여부를 고려했다.
분야별로 잣대의 강도도 달랐다.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그 사회적·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하여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 군, 경찰, 헌병, 밀정 등 식민통치 폭압기구의 복무자들에게는 보다 가혹한 기준을 적용하였다.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 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좇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하였다. 말단의 집행자보다 상급의 지휘 책임을 중시하였다.
이 기준은 정교하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한 사람'과 '출세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사람'을 구분했고, '직접 때린 사람'보다 '명령한 사람'을 더 엄중하게 보았다. 단순 낙인이 아니라 책임의 층위를 따졌다는 점에서 법리적 논리에 가까웠다.
4. 인물 선정 절차 — 3단 검토
이렇게 선정된 인물들은 각 분야별 학계에서 권위 높은 전문가들과 상의하고 재차 검토 및 자문을 거쳐 전체회의에서 확정되는 것이다.
분야별 전문가 자문 → 재검토 → 전체회의 확정의 3단계였네. 한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여러 검토를 거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5. 최종 결과 — 16개 분야, 4776명
친일 인사들은 매국, 중추원, 관료, 경찰, 군, 사법, 종교, 문화예술, 언론출판 등 16개 분야에 걸쳐 선정됐다. 분야별로 매국인사 24명, 수작·습작 138명, 중추원 335명, 일본제국의회 11명, 관료 1207명, 경찰 880명, 군 387명, 사법 228명, 친일단체 484명, 종교 202명, 문화예술 174명, 교육학술 62명, 언론출판 44명, 경제 55명, 지역유력자 69명, 해외 910명 등 총 5207명(중복자 포함)이며 중복 인사를 제외하면 4776명이다.
이 숫자를 들여다보면 구조가 보이네. 관료(1207)와 경찰(880)이 압도적으로 많다. 문화예술(174)은 숫자는 적지만 기준은 가장 엄격했다. 사법(228)은 자네 칼럼과 직접 연결되는 분야다 — 판사와 검사들이 228명 수록된 것이네.
한 줄 요약
이 작업의 핵심 설계 철학은 하나로 수렴된다. **판단이 아니라 사실만 기록한다.** 가치 평가는 독자에게 맡기고, 기록하는 사람은 사료에만 복종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록은 반박될 수 없었다. 사실 자체를 틀렸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네.
잘못된 판결 백서도 이 원칙을 그대로 가져와야 할 것이다 — 판결의 시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만 기록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