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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삼하)

죄를 대하는 다윗의 태도, 불편하신 하나님 (삼하 11:22-27)

작성자김병화|작성시간26.06.09|조회수0 목록 댓글 0

제목 : 죄를 대하는 다윗의 태도, 불편하신 하나님
성경 : 삼하 11:22-27

(사무엘하 11:22-27)
"전령이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이 그를 보낸 모든 일을 다윗에게 아뢰어 이르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오므로 우리가 그들을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니 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사무엘하 11장 마지막 절(2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행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이 때 ‘악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의 본래 뜻은 ‘불쾌하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불쾌하다’는 표현은 다윗의 죄의 심각성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에 번역자들이 ‘악하다’는 단어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국어적 개념과 히브리어적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이 단어가 히브리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풀어서 이해할 때, 우리는 다윗의 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훨씬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한 사람의 죄를 이렇게 세밀하게 다루신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성경은 다윗의 죄를 시작부터 세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이것을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11장에서 그 죄의 발단과 경과를 낱낱이 서술하고, 13장부터 20장에 이르기까지 무려 일곱 장에 걸쳐 그 죄가 초래한 결과를 기록합니다. 성경이 죄를 이처럼 진지하게 다루는 방식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감정: 사랑과 기쁨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을 대하실 때 품으시는 감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감정이고, 또 하나는 기쁨의 감정입니다. 이 근거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동일하게 들린 하나님의 음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이 두 감정은 성격이 다릅니다. 사랑의 감정은 우리의 행동이나 태도와 무관하게 변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선언한 것처럼,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음에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한 언약을 파기하거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감정은 다릅니다. 기쁨의 감정은 우리의 삶의 태도와 모습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을 보시는 하나님의 감정은 바로 그 불쾌함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확신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또 하나의 감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도 있지만 기쁨이 되지 못하는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되지 못하는 우리들의 삶을 보실 때 하나님의 감정은 '불쾌함'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시고 굉장히 불쾌한 감정을 가지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불쾌한 감정을 드리는 삶이 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분을 언짢게 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11장에서 다윗의 죄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다윗을 악하게 보셨다고 하니까 나는 다윗처럼 간음하지 않았고 살인하지도 않았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악하게 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렸다면 내가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은 다윗의 죄를 간음과 살인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보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아니야.'
'나는 다윗과는 달라.'
내가 그 정도는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만 자기를 다윗과 분리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다윗의 죄가 얼마나 악합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했기 때문에 그의 행위가 악하다고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다윗을 악하다고 하셨을까요?
죄를 대하는 다윗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살인과 간음을 우리는 크게 보기 때문에 다윗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대하는 다윗의 태도를 보면 나는 간음하고 살인하지 않았지만 우리 또한 다윗과 같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부분을 말씀을 통하여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악’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대하는 다윗의 세 가지 태도

우리는 다윗의 죄를 흔히 간음과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행위를 악하다고 보신 까닭은 간음하고 살인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죄를 대하는 다윗의 태도에 있습니다.
25절과 27절을 통해 그 태도를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죄를 축소합니다

전령의 보고를 받은 다윗은 요압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말합니다.
“이 일로 걱정하지 마라.”
즉 ‘이 일 때문에 낙심하거나 근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압이 스스로 잘못된 전략을 사용하여 군인들을 죽게 하고 우리아를 죽게 했는지, 그래서 다윗에게 혼날까봐 걱정하지 말라는 표현입니다.
지금 다윗은 우리아가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문제를 덮어버리료고 합니다.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니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태도였습니다.
‘큰 문제 아니야, 걱정할 것 없어.’
죄를 짓고도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는 태도, 이것이 죄를 대하는 다윗의 첫 번째 모습이었습니다.

둘째, 죄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깁니다

다윗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입니다.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일종의 사고이니 감수해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죄를 어쩔 수 없는 실수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의 결과로 바라봤습니다. 보는 것, 다윗의 다윗이 죄를 대하는 두 번째 태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실수야.'
'어쩔 수 없는 사고야.'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죄를 이렇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를 불가피한 것이라고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바라보는 것!
전쟁을 하는데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이 논리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죄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바라보는 태도와 같습니다.

셋째, 죄를 선으로 덮으려 합니다.

죄를 바라보는 세 번째 시선이 다윗의 죄의 절정이라고 여겨집니다.
이것이 다윗의 간음이나 살인보다 더 큰 죄이고 심각한 죄라고 여겨집니다.
27절을 보면 다윗의 모습은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너무 쉽게 목격되어지는 일들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장례가 끝나자 과부가 된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아내로 삼았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고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에서 과부는 절대빈곤입니다.
성경은 과부를 도와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과부와 고아를 도와주는 시스템을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과부를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성도가 살아야 할 마땅한 선한 삶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나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남편을 잃은 과부가 된 아내를 왕이 아내로 삼아주는 것,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이 일은 더없이 훌륭한 처사처럼 보입니다. 연금이나 포상금이 아닌 왕비의 자리를 내어준 것이니, 다윗의 관대함처럼 보이는 이 일은 실로 칭송받을 만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진실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한 진실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다른 손으로 덮어버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죄를 다른 손으로 덮어버리는 방식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후원으로 죄를 덮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자리에서는 봉사와 경건의 모양으로 죄를 감추려고 합니다.

'죄를 선으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죄에 대한 다윗의 세 번째 태도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죄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다!
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더 큰 선으로 죄를 덮을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세 가지 태도 때문에 불쾌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간음하지 않았고 살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윗과 다릅니까?
죄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나는 과연 다윗과 다릅니까?
본질적으로 나도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똑같은 사람 아닙니까?

죄를 대하는 태도는 똑같습니다.
다만 그 죄에서 나오는 양상이 다를 뿐입니다.
죄를 축소하려고 하고, 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고, 죄 짓고 나면 다른 것으로 다른 것으로 덮어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나 역시 다윗과 똑같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자입니다.
때문에 나 역시 하나님 앞에 악한 자인 것입니다.

죄를 대하는 성경적 태도 죄를 바라보는 성경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첫째, 죄는 아무리 작아도 심각하게 보아야 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22)
악의 흉내조차 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죄는 그만큼 심각합니다.

둘째, 불가피한 죄는 없습니다
죄의 실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롬 6:14)
즉 죄가 우리를 억지로 죄 짓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칙)"(롬 8:2)
성경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옭아매던 죄의 법칙은 더 이상 우리에게 작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가피한 죄, 실수로 지은 죄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수로 짓는 죄는 없음이 성경이 보는 입장입니다.

셋째, 죄는 선으로 덮을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
죄는 오직 사망으로만 덮입니다.
천일을 기도해도 만 번의 헌신도 죄를 덮지 못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이 말씀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는 삶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죄와 타협하지 않는 삶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
고린도후서 6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리요”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죄하고 손잡고 타협하면, 죄에게 양보하면 곧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절대로 죄와 타협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 5:9)
죄는 좁쌀 같은 누룩 한 점이라도 허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와 타협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는 사실 핑계입니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는 나중에 생각하고 적어도 죄와 타협하지 않겠다고 하는 노력이라도 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노력도 하지 않고 될지 되지 않을지부터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죄와 타협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말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될까 안 될까’를 먼저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공부합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그와 같습니다.
완벽하게 성공하느냐보다 먼저는 노력을 시작하는가 입니다.

교회 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에서 뭔가 하자고 하는데 본인은 하기 싫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합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그게 되겠습니까?"
안되는 것이니 거기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자고 하는 그 말이 얼핏 들으면 얼마나 합리적이고 옳은 소리처럼 들립니까?
말은 맞습니다.
안 되는 것, 해봐야 실패가 자명한 것을 왜 시작하는가, 거기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합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두는 아니겠으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 가운데 그 마음은 하기 싫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짜 하고 싶은 사람은, 그 일이 되었으면 좋겠고 이루어보고 싶은 사람은 그냥 합니다.
그것을 저는 노력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죄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삶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내릴 결론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바라보는 입장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노력은 해야 하겠다는 그 노력이 우리의 신앙을 살아있게 합니다.
우리가 죄와 타협하지 않겠다고 노력하면 적어도 우리의 신앙은 이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다른 것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하나님은 불쾌하다고 느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확신하십시오. 성경에 아예 확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가룟유다를 향한 사랑, 베드로를 향한 사랑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가 그렇지 않는가는 우리의 삶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뀌어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이 달라졌기 때문에 불쾌하셔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가 성경에 계속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지 않고 언약을 파기하셨기 때문에 징계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언약은 유효합니다. 파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다윗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다윗의 인생을 징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애써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내가 너 때문에 기쁘다!"
하나님께 이 말을 진리 안에서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에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속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보다 에덴에 있는 것들을 마음대로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늘 속삭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보다 배부르고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삶을 더 크게 보게 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풍요롭게 살아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한다면 불행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여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면 굶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보고자 노력이라도 해보는 오늘이 되면 어떨까요?
그럴 때 우리 안에 예기치 못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믿음의 길을 잘 가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앞에 섭니다. 다윗의 죄를 보면서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았다는 사실 뒤에 숨어, 죄를 축소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선한 행위로 덮으려 했던 나의 태도가 얼마나 다윗과 닮아 있는지를 이제야 봅니다. 주님, 저의 죄를 덮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뿐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음을 감사드리며, 이제는 그 사랑에 기대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게으름을 회개하며, 오늘부터 작은 것부터 타협하지 않는 삶을 시작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실제 적용점

1. 나의 죄를 ‘별거 아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하는 말이 입에서 나올 때, 그 순간을 의식적으로 멈추고 기록합니다. 한 주간 얼마나 자주 그런 말을 했는지를 점검함으로써 죄를 축소하는 습관을 인식합니다.

2. 열심한 봉사, 헌금, 기도 등 경건한 활동을 ‘면죄부’처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선한 행동이 죄를 덮는 수단이 되고 있다면, 그 동기를 주님 앞에 솔직하게 내어놓고 회개합니다.

3. 이번 한 주, 죄와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올 때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따지기 전에 먼저 거절하는 연습을 합니다. 작은 거절 하나를 기록하고 감사로 마무리합니다.

4.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목표로, 하루를 마치며 ‘오늘 나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는가, 불쾌함을 드렸는가’를 짧게 돌아보는 저녁 묵상을 실천합니다.

5. 로마서 8장 38~39절을 암송하거나 필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 위에 서서, 그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애쓰는 동기를 새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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