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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작성자자견심|작성시간14.02.06|조회수302 목록 댓글 0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강사 전승창님은 도자사를 전공하시고 현재 삼성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 계십니다.
오늘 거의 세시간에 걸쳐 열정적으로 강의해 주셔서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청자, 분청사기, 백자, 흑자, 도기등 다양한 도자기가 만들어졌다.  이중
제작량이 가장 많고 고려 청자와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분청사기와 백자에 대해
강의해 주셨다.
토기와 고려 청자에 대해서는 내년 2월 22일에 강의할 예정이다.

1. 분청사기(粉靑沙器)
  1941년 고유섭선생에 의해 명명된 粉粧灰靑沙器(분장회청사기)의 줄임말로, 분청자로 부르기도 한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 상감청자의 제작전통의 바탕 위에 등장 했으며,  시대에 따라 종류와 형태, 표면의 장식 수법이 변화하였다.  여기서 ‘분장 ’이라함은 말 그대로 청자의 표면에 흰흙(白土)을 바르는 것을 의미하며, ‘회’는 탁한색을 ‘청’은 녹색을 말한다. ‘사기’란 자기와 같은 뜻이다.  분청사기의 기법을 시대적으로 살펴본다.
1) 상감기법
15세기 초의 기법이며, 청자의 칼로 파낸 자리에 흰흙이나 검은 흙을 채우고 유약을 바르고 구운 자기이다.  어룡무늬의 매병이나 자라 편병(양쪽을 두드려 납작하게 만든)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모란 무늬와 같이 면을 상감한 것이 많이 나타난다.
2) 인화기법
1430년~1460년 사이에 크게 유행한 기법으로 상감을 할 때 칼 대신 도장을 사용하는 것이다.  처음엔 일부분에만 사용하던 것이 점점 더 많이 그리고 촘촘하게 도장을 새김으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고급품이었다.  그릇에 관사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 많아 제작연대의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지역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1460년 이후 15세기 말까지는 왕실이나 관에 납품을 하지 않게 됨으로 도장이 꼼꼼치않고 여백이 많으며, 대충 만든 것이 많다. 그 이유는 1467,8 년 경에 광주에 왕실용 백자 가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3) 조화기법
  분청 후(백토를 입힌 후) 음각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분장회청사기의 개념에 맞는 기법이라 하겠다.  1470년 전후로 전라도는 조화, 박지기법을, 경상도는 인화기법을, 충청도는 철화기법을 주로 사용한 분청사기를 만들게 된다.
4) 박지기법
  백토를 입힌 후 음각을 하고, 배경의 백토를 긁어내어 색의 대비와 높낮이를 나타낸 기법이다. 예로 장군 모양의 술병이 있으며, 15세기 후반 전라도 지방에 많다.   분청사기의 해학이 잘 나타나며, 흙의 질이 떨어져 고급품이 아닌 일반인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5) 철화기법
백토 입힌 후 철분이 많이 함유된 안료를 붓으로 찍어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15세기
후반 충청도 계룡산 주변에서 많이 나오므로 ‘계룡산 분청’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한
흑백의 대비와 속도감있는 붓질이 특징이다.
6) 귀얄기법
16세기 백토를 입힐 때 붓으로 대강 입히게 되는데, 귀얄이란 도자기에 쓰는 붓의 명칭
이다. 이때에는 백자가 급격하게 발달하므로 분청의 수요가 줄었기 때문에 장식을 다
생략하고, 붓자국 자체를 장식으로 삼았다.
7) 덤벙기법(분장기법)
16 세기 도자기를 백토물에 덤벙 담갔다가 꺼내므로 간단하게도 하고, 백자처럼 보이게도 하는 효과를 내었다.모양까지도 백자의 형태를 모방하였다.
이같은 7가지 기법이 보이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분청이 사라지게 된다.  즉 15~16세기
분청사기와 백자가 양대 산맥을 이루다가 이후 백자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2. 백자
백자는 고려시대에도 제작이 되었으나 청자와 함께 구우므로 백자에 필요한 충분한 고열을 얻지 못하여 ‘연질 백자’라 불리는 것을 생산 하였다.  13세기의 백자 매병이 유물로 있
으며,  1466년 경상도 언양에서 제작된 묘지(墓誌) 도 있다.(리움 박물관)  묘지란 묘비와 같이 죽은자의 신상을 기록한 것으로  묘앞에 묻었다.
이후 15세기 중반 조선의 사옹원의 분원이 광주에 설치되면서 크게 발전하여, 상감 백자
와 함께 눈 같이 흰 경질 백자가 제작되는 한편, 양질의 백자와 청화 백자를 본격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시기별로 백자의 특징을 살펴 보자.
1) 16세기 전반 ; 광주 도마리와 우산리 유물을 통해 백자와 청화백자의 생산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백자나 금속기와 유사한 형태의대접, 항아리, 병, 잔, 합 등 다양한 종류를 제작했다.  장식은 매화, 대나무, 소나무, 용 등이 그려지는데, 이때 사용하는 코발트 안료는 수입품으로 금보다 비쌌다고 한다.   회회족이라 불리는 페르시아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회회청이라고도 불리었다.  고가이므로 거의 왕실용으로만 사용 되었다고 한다.
2) 16 세기 중반 ; 중국의 여향인 보조 문양이 사라지고, 조선의 그림으로 채워진다.
3) 16세기 후반 ; 매화에 새가 등장한다. 철화 백자가 나오며, 주로 항아리 장식에 사용.
4) 17세기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화안료의 수입이 어려워지자 철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으며, 색도 연회백색을 보이고, 대접과 접시등 일상생활용이 많이 제작된다.  
5) 18세기 전반 ; 광주 금사리 등에서 질이 좋은 유백색의 백자가 생산되었다. 조선후기 최고품인 ‘달항아리’, 표면에 모깎이 장식을 한 병이나, 청화로 난초와 대나무등을 간략하게 그린( 여백이 있는 문인화풍의) 병, 항아리, 접시, 등이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6) 18 세기 후반 ; 땔감의 공급을 위해 10년 주기로 이동하던 관요가 광주 분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1780년부터 분원리 가마 특유의 담청백색 백자가 제작 되었으며, 1790년대에는 음각, 양각, 투각, 상형 장식이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또 그 이전의 문인화풍의 함축적이고 생략적인 그림 장식은, 항아리의 경우 어깨와 밑둥에 연판문이나 여의두문이 장식되는 등 내용과 구성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장식의 주제도 산수, 매조, 인물등으로 다양해졌으며, 표면을 육각 혹은 팔각으로 각지게 깎은 병, 항아리 등을 비롯, 필통, 연적등의 문방구 제작도 이루어졌다.
7) 19 세기 전반 ; 순백자와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음각, 양각, 투각, 상형장식의 백자가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제작이 활발했던 연적의 경우 개구리 잉어, 금강산, 사각, 팔각,
  등 도양이 다양화되었으며,  표면엔 십장생, 운룡, 운봉, 모란이 즐겨 장식되었다.
8) 19 세기 후반 ; 분원이 민영화되고, 왕실의 몰락으로 왕실백자의 제작전통이 사라지고
  왜사기의 유입으로 마침내 분원의 제작이 중단되고,  각지에서 만들어지던 투박한 조선백자의 전통도 왜사기의 영향으로 변형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 18세기 중국과 일본은 서양의 영향으로 채색자기가 크게 유행하였으나 우리는 청화백자를 고수하였다.  이것은 유교의 영향으로 화려한 것을 피하고, 검소함을 추구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박물관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도자기들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
       리움박물관 www.leeum.org
       국립중앙박물관 www.me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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