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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흑유다완 예술적 차문화 시대의 다기(茶器)- 3 ~~~~~~~~~~~김 성태님

작성자자견심|작성시간11.06.24|조회수64 목록 댓글 0

예술적 차문화 시대의 다기 (茶器)-3

북방의 흑유다완

 

김 성태 

 

 

 

금대 자주요 유적 흑유다완(金代 磁州窯 油滴 黑釉茶碗)

 

 

 

 

 

 

 

 

북방의 흑유 (磁州窯계통의 黑釉)

 

자주요(磁州窯)는 북송시기(北宋時期)부터 명대(明代)까지 중국의 하남(河南), 하북(河北), 산동(山東), 산서(山西)등의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북방 민요계의 가마들을 총칭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자주요 라는 이름은 하북성(河北省) 자현(磁縣)의 옛 지명인 자주(磁州)지방의 지명에서 명대(明代)부터 유래 되었다 전해진다.

때문에 자주요는 남방의 가마처럼 한 지역에 국한된 뚜렷한 특징을 지닌 가마가 아니며 각양각색의 도자기를 만들었던 많은 가마들을 포괄적으로 정리한 이름인 만큼 그 다양성의 범위도 매우 넓다.

이 지역은 북조(北朝), 당(唐)시기를 거쳐 북송(北宋) 이외에도 요(遼), 금(金), 원(元) 등 북방의 이민족이 번갈아 통치를 했었던 지역으로서 정치적 상황뿐 만 아니라 도자기 문화 또한 남방의 도자문화와는 크게 대비된다.

 

 

 

금대 하남 배촌요 흑유다완(金代 河南 배村窯 黑釉茶碗)

 

 

 

 

 

 

 

 

 

금대 하남 배촌요 흑유다완(金代 河南 排村窯 黑釉茶碗)

 

 

 

 

 

 

이 지역에서 한족이 이미 이루어 놓았던 도자문화에 기초하여 이들 북방민족의 정서가 반영된 도자기를 만들게 되면서 두 문화가 융합되어 이전과는 다른 이색적 도자예술이 창출되어 갔다.

자주요 도자가 시작된 북송시기와 마감되는 명대 사이를 채우는 요, 금, 원 등 북방에서 내려온 이민족의 통치기간 동안 제작된 도자의 비중이 매우 큰 만큼 자주요는 실상 이민족의 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시기 북방도자의 한계는 우선 정치적으로 불안했으며 도자기의 고급 수요층이 적었다는 점인데 물자가 풍부했던 남방에 비해 경제적으로 궁핍했으며 따라서 고비용이 소요되는 태토의 고질량 가공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근본적으로 남방 도자에 비해 뒤처질 수 밖에 없었다.

자기질화 된 단단한 태벽과 맑고 투명한 유약의 높은 결속력으로 이루어진 남방 도자에 비해 자주요 도자는 도기(陶器)질에 가까웠으며 거칠은 태토는 정교하고 치밀한 조형을 만들 수 없었을 뿐 만 아니라 마음껏 자유로운 기형을 구사할 수 도 없었다.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정제되지 못한 태토에는 많은 광물의 잡 성분이 섞여 있으므로 만들어진 도자기에 잡티가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두꺼운 분장(粉裝)을 하는 것이 거의 통상적인 과정 중 하나였다.

요로(窯爐)의 형태 또한 북방 자주요 계통의 가마들은 평지에 반원형의 구조로 지어진 석탄을 연료로 하는 만두요(饅頭窯)로서 경사면에 비스듬이 길게 축조한 남방의 용요(龍窯)에 비해 작고 구조적으로도 달랐다.

 

 

 

 

금대 하남 요변 흑유다완(金代 河南 窯變 黑釉茶碗)

 

 

 

 

 

 

 

 

북방의 도자기에서는 이러한 단점을 감추고 극복하기 위하여 많은 기법들을 개발하여 사용하는데 남방의 도자기 장식에 사용되었던 공예와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흑유에 있어서 기본적 장식방법은 성형된 배체에 분장토로 발라진 기초유 위에 산화철을 안료로 사용하여 원하는 문양을 시문한 뒤 흑유를 시유하고 소성하면 철 안료가 바탕의 검은빛 흑유를 뚫고 자주빛 문양으로 비추어 올라오는데 흑유장채(黑釉醬彩)라 하며 흑유다완에도 이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또 다른 기법은 성형된 배체위에 백색의 분창토를 바르고 그 위에 흑유를 시유하여 마르게 한 후 문양의 윤곽선을 그려 도안의 일정부분 흑유를 긁어내면 백색의 바탕이 드러나면서 흑색의 문양을 얻는 방법으로서 흑유척화(黑釉剔畵)라 한다.

백유의 경우는 백색의 분장토와 백유를 시유하여 산화철 안료로 문양을 그린 다음 투명유를 발라 소성하는 방법으로 백유유하흑채(白釉釉下黑彩)라 한다.

이러한 공예기법에서는 한결 같이 숙련된 도공들에 의한 대담하고 빠른 속도의 붓과 칼을 활용한 능란한 기교에 의하여 유려하고 힘찬 선을 지닌 문양을 얻을 수 있었다.

문양이 정교하지는 않지만 세련된 구도의 균형을 갖추며 자유롭게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날에도 자주요의 공예는 매우 높은 회화적 예술로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많이 사용된 색채는 흑색과 백색으로서 대부분의 자기에는 흑유나 백유를 바르고 각화나 채회를 통해 문양은 흑 백 대비를 이루는데 살펴보면 자주요는 흑 백의 묘미를 가장 잘 살려낸 흑 백의 예술이라 말 할 수 있다.

또한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던 삼채(三彩)는 계속적으로 전승 되어 사용되었으며, 유약위에 홍색과 녹색의 두 가지 색료를 사용했던 홍녹채(紅綠彩)가 금대(金代)에 개발 되었는데 이것은 이후 명. 청대 경덕진에서 크게 유행하는 유상채자(釉上彩瓷)의 훌륭한 모태가 되었다.

 

 

 

금.원대 하남 자주요 홍녹채완(金.元代 河南 磁州窯 紅綠彩碗)

 

 

금대  하남 흑유개완(金代 河南 黑釉蓋碗)

 

북방의 차문화

중국의 역사 속에서 양자강 이북의 화북지방은 항상 한족과 북방의 소수 이민족이 서로 번갈아 차지하며 벌인 전쟁의 무대였다.

바다나 큰 강의 깊은 물을 접해보지 못했던 북방민족들은 한족들이 공들여 쌓은 만리장성은 일격에 넘을 수 있었지만 물에 대한 두려움이 심했던 북방민족들은 언제나 양자강에서 그들의 진군을 멈췄으며 양자강을 분할로 남북을 가르며 각기 다른 왕조를 꾸려 나갔다.

그러므로 한족들에게 양자강은 만리장성보다도 더 그들을 보호해준 튼튼한 담장이되어 주었던 셈이 될 것이다.

 

 

금대 하남 흑유다완(金代 河南 黑釉茶碗)

 

 

 

 

 

 

문화적으로 그토록 동경해오며 한족에 대한 열등감을 지녔던 북방민족들은 그들이 정복한 땅에 남겨져 있는 발달된 한족문화를 별다른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누렸으며 한족문화에 동화되어간 그들은 나태해져 곧이어 멸망하는 역사의 반복이었다.

대부분 최 북방 초원의 유목민 이었던 이들 정복자들은 일찍이 화북지방에 내려오기 이전에도 북송의 차 전매사업 이었던 차마교역(茶馬交易)을 통해서 차를 접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농업 생산이 없었던 이들이 접해 왔던 차는 한족들이 누렸던 품격 높은 차문화와 비교하면 근본적으로 다른 생존음료로서 차를 통하여 그 속에 포함된 식물성 영양소를 섭취하여 질병으로부터 강해져 수명을 늘리기 위함이 전부였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는 고향이었던 곳에도 광활한 땅이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농업활동을 할 수 없는 매우 춥고 척박한 영토였기에 그들은 남하하여 따뜻하고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에서의 문화생활을 꿈꾸며 틈만 나면 한족들의 영토를 탐내오던 민족들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염원해 왔던 화북지방을 차지했을 때 그들의 눈에 비친 당 송 시대부터 이미 자리 잡고 있었던 발달된 한족들의 화려한 차문화는 그들이 살기 위해 마셔오던 저급한 차문화에 비해 경이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정복자들은 더 이상 생존음료로서의 차는 필요가 없었으며 지배계층을 위시한 신흥 귀족층에서부터 예술적이고 과시적인 한족의 차문화를 답습하기 시작하며 차를 통하여 그들의 신분과 위상을 과시하기 시작하였다.

 

 

 

북송 정요 장유금채다완(北宋 定窯金彩茶碗)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북송 정요 장채흑유다완 (北宋 定窯 醬彩黑釉茶碗)

일본 만노미술관 소장.

 

 

북송 정요장유개완(北宋 定窯醬釉蓋碗)

 

 

 

 

 

 

 

정요 요지 출토 장유완.                                           

정요 요지 출토 흑유완.

                  

 

 

 

당시의 정복자들은 한족보다도 더 한족스럽게 한족의 문화에 젖어 들었다 한다.

화북지방에서는 차가 생산되지 못했으므로 이 땅에 잔류했던 한족들은 대치상황 속에서도 남방에서 생산되는 차와 유행하는 고급 다구들을 화북으로 수입하여 공급하였으며 차츰 자주요의 대부분 가마에서도 남방의 도자 다구를 모방한 기물들을 제작하게 되면서 자주요에서 생산된 기물들로 대체된다.

그러나 당시 이들이 축적됨 없이 흉내 내었던 차문화의 실상은 짧은 통치기간동안 에 행하여 졌던 한족문화의 답습 형태였으며 그들만의 새로운 차문화를 창출하지는 못하고 끝난다.

이 기간 동안에 전개되었던 이민족의 북방 차문화는 당, 송 한족들이 이뤄 놓은 차문화의 한 지류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북송 정요계 인화문흑유다완 (北宋 定窯係 印畵紋黑釉茶碗)

 

 

 

 

 

 

 

흑유도자

 

북방의 자주요에서 흑유가 널리 사용된 이유 중 하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태토의 결점을 숨기기 가장 좋은 유약이 바로 흑유였으며 손쉽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방의 건요, 길주요에서의 흑유는 대부분 다완에 사용하기 위함이었지만 자주요 에서 흑유의 사용은 당(唐)시기부터 그 유물들이 나타나므로 흑유다완을 만들기 위하여 흑유가 개발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이전 시기부터 축적되어온 흑유기술의 바탕위에서 분명 남방 건요의 영향으로 어렵지 않게 흑유다완은 제작될 수 있었다.

자주요 지역의 가마에서는 唐시기 제작된 차구들이 많지만 다완은 백자에 편중되어있었으며 唐시기 흑유다완은 그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그러한 상황은 북송 중기까지 이어진다.

남방 건요의 토호문(兎毫紋)과 유적(油滴) 그리고 요변(窯變)을 통한 효과까지 건요에서 개발된 도자 기법들을 모방 하였으며 초기에는 기형과 크기까지 건요의 흑유다완을 따랐다.

자주요계의 가마에서 흑유다완을 제작했던 요장은 매우 광범위 하다.

흑유다완을 만들었던 요장은 두 개의 큰 범위로 나눠지는데 하남성의 지역적 특색을 뚜렷하게 지니는 하남흑유다완(河南黑釉) 그리고 유약과 제작기법이 공유되어 혼재하는 하북, 산서지역의 흑유를 자주요흑유(磁州窯黑釉)로 구분하여 부른다.

자주요 지역에 속하는 산동지역에도 흑유를 생산했던 치박요(淄博窯)가 있으나 대부분 생활용기에 편중되어 있으며 흑유다완은 소량 제작되었다.

 

금대 산서 자주요 흑유다완 (金代 山西 磁州窯 黑釉茶碗0

 

 

 

 

 

 

 

금 .원 자주요 유적 흑유다완 (金. 元 磁州窯 油滴 黑釉茶碗)

 

 

 

 

하남흑유 다완 (河南黑釉 茶碗)

하남성지역에서 흑유다완을 생산했던 요지(窯址)는 학벽요(鶴壁窯), 노산요(魯山窯), 안양요(安陽窯 ), 공현요(巩县窑), 팔촌요(扒村窑), 보풍요(宝豊窯), 임여요(臨汝窯), 밀현요(密縣窯)등 많은 곳에서 다양한 흑유다완을 만들었다.

하남지역에서 생산했던 흑유다완의 특성은 우선 맑고 눈부신 흑색과 단단한 유질, 그리고 깨끗하고 하얀 태토와 날렵하고 세련된 조형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산서, 하북 지역에서 만들어진 약간 거칠은 흑유다완들에 비하면 완성도가 높고 재질에서도 우수한 질량을 유지하고 있어 고급 수요자들을 겨냥해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북송의 도읍이 하남에 있었고 많은 귀족들이 거주했던 하남지방에서 오랫동안 고급질량의 관요를 생산했던 여요(汝窯), 균요(均窯)가마들의 축적된 도자기술이 주변 가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면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당, 송의 도읍이 있었던 하남은 전통적으로 귀족적 문화가 깊숙하게 뿌리내린 곳이며 당, 오대 시기 백자의 생산이 시작된 곳으로 도자의 기본적 토대가 뿌리 깊은 곳이므로 북송 시기까지는 북방도자문화를 이끌어 갔지만 북송이 멸한 후에는 급격하게 그 질량이 낮아져 갔다.

따라서 하남의 흑유는 북송시기와 이민족의 통치 시기인 그 이후를 구분지어 이해하여야 한다.

 

 

원대 산서 자주요 흑유다완(元代 山西 磁州窯 黑釉茶碗)

 

 

 

 

 

 

원대 자주요 요변 흑유차배

 

 

 

 

 

 

 

 

    정요 흑유다완 (定窯 黑釉茶碗)

하북의 곡양(曲陽)에는 그 유명한 북송의 관요였던 정요(定窯)가 만들어 졌던 곳으로서 정요에서도 황실과 귀족층을 위한 최 고급의 흑유다완이 제작되었다.

흑유는 주로 북송 시기 제작 되었는데, 정요에서 만들어진 흑유다완은 기타 다른 자주요계에서 제작된 다완은 물론 남방의 건요 길주요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우수하다.

충분한 고온소성과 정제된 원료를 사용하므로 그 빛깔이 요염하고 눈부시며 기형은 날렵하고 매우 세련되며, 태토의 기벽은 희고 얊으며 유면은 옥 질감을 띈다.

흑유는 소성과정에서 일정 온도 이상을 올리면 장유(醬釉)로 색상의 요변이 나타나는데 장유는 남방의 건요에서도 많이 보이지만 건요의 장유는 소성과정에서 온도조절에 실패한 색상으로서 고온으로 인하여 유약이 녹아 흘러내려 대부분 갑발 안에 붙어 버려진 상태로 요지의 퇴적층에서 발견 되고 있다.

그러나 정요에서는 완성도가 매우 높은 의도된 장유다완도 제작되었으며 금채로서 문양을 넣은 기물도 전해지고 있다.

 

 

 

금대 관대 자주요 흑유다완(金代 觀垈 磁州窯 黑釉茶碗)

 

 

 

 

 

 

하북, 산서(河北, 山西)의 자주요 흑유다완

자주요의 고향이라 일컫는 하북성 한단(邯鄲)일대의 팽성(彭城), 관대(觀台)에 포진되어 있는 자주요 중심 군의 큰 가마에서도 비교적 높은 질량의 흑유다완을 만들었는데 유적(油滴), 요변(窯變)다완의 제작지로 유명하다.

산서성의 임분요(临汾窯), 곽주요(霍州窯), 장치요(长治窯), 평정요(平定窯), 양곡요(阳曲窯), 진성요(晋城窯), 대동요(大同窯), 휘원요(輝源窯)등 현재까지 보고된 흑유자기를 만들었던 산서지역의 요지만도 20여소가 넘는데 산서에서 제작된 흑유는 대부분 귀족사회에서 필요시 되었던 고급제품이 아니었으며 산서지방의 일반 수요자들을 위한 서민적 풍격의 민간흑유도자 였다.

때문에 북송시기의 흑유다완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금대에 번성하며 원대 이르러 원의 배후 주거지로서 몽고의 귀족들이 많이 머물던 내몽고 지역에 다완의 수요가 증가 하면서 질량도 우수해지는데 진북(晉北 산서북부)의 가마들에서 대량의 다완을 생산하였다.

북송 후기에는 황제는 물론 귀족층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적 차문화를 즐겼는데 다완속에 피어나는 흰색의 차 거품과 다완의 대비되는 미감을 즐기며 차를 마셨으므로 거기에 걸맞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고급 흑유다완이 가장 선호되었다.

 

 

북송 자주요 흑유차호(北宋 磁州窯 黑釉茶壺)

 

 

 

자주요 만두형 가마

 

 

요지 분포도

 

 

- 다음호에는 서북지역의 흑유다완을 연재 합니다-

 

유물 소장자이지 글쓴이 김성태 님은 동양차문화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출처:월간 다도(茶道)   201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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