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청의 유래 (역사적 배경)
[출처] 1. 단청의 유래(역사적배경) (단청14) |작성자 연화머리초
목 차
1. 단청이란
2. 단청의 기원
3. 신석기 시대
4. 구석기 시대
5. 고대인 들은
6. 중국 서한 시대
7. 고대 단청은
8. 우리나라 단청
9. 중국의 단청
10. 단청이란 용어
11. 중국 전한의 회남왕
12. 한국 단청의 역사
13. 고려 시대의 단청
14. 조선 시대의 단청
15. 고대 단청 양식
16. 북한의 고분벽화
1. 丹靑(단청)이란
붉은 색과 푸른 색의 대비를 의미한다.
단청은 아주 오래전 신석기시대 즉 약 일만년 전 부터 인류는 자연적으로 자연환경에서 쉽게 구하기 쉬운 목재를 이용하여 주거생활공간을 만들게 되었다. 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따듯한 곳을 따라 옹기종기 촌락을 이루어 마을을 만들고 건축 자제를 나무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나무가 습기와 해충에 약한 것을 보호 하느라 자연에서 얻어진 고운 색체를 사용하다보니 자연적으로 아름다운 단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사용한 건축물의 기둥과 지붕 형성이 인류의 최초의 목재 건축물 양식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 사용한 돌가루나 흙이나 나무 약초 열매 등 자연에서 나온 색체 재료들이 최초의 단청 재료들이다.
2. 단청의 기원
단청의 기원에 대하여는 현전하는 고대의 단청의 유물을 찾아 볼수 없어서 아직 까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현 사료들과 고대 단청의 유구들을 통하여 근접된 단청의 기원을 가늠 할수 있을 것으로 본다.
3. 신석기 시대에는
움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움집들은 모습은 지표면에서 오늘 날의 반지하 처럼 한질정도 파 내려가서 그곳에다 기둥을 세우는 방법이며 지층의 열의 변화로 인하여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듯하게 보낼수 있는 특징이 그것이다.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유적지 “수혈주거” 방법이 발견 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4. 구석기 시대에는
식량을 저장 하거나 익혀 먹기 위한 그릇 즉 토기를 만들어 농경 수렴 하는데 발전된 생활을 보였다.
5. 고대인들은
나무의 부족한 면을 감출수 있고 부식하거나 우기의 습기와 병해충의 변질 등을 막아주는 자연에서 얻은 천연의 자료를 체취하여 색을 칠하여 줌으로서 고도의 아름다운 문양과 색체까지 얻어지는 부가 가치로서 정신적인 영혼을 달레기 위한 정신적인 면 까지도 달렐수 있는 각종 생명의 영원을 위한 문양을 만들어 장식하게 된 것이 목재건축물의 단청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대인들은 건축물의 수면연장, 풍해, 건습, 부식 을 방지하여 내구성을 강화하였으며, 권위와 위풍, 장엄의 목적으로 절대 권력과 왕건확립을 위하여 궁궐 대궐을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0. 불교에서도
첫째는 건축물의 보존을 위해서이고 사찰의 장엄한 위상을 위하여 불교사원, 도교사원 등의 건축물에 단청을 칠하여 무안한 영적인 평안을 추구하여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전시효과 목적으로 사용하여 일반, 건축물과 구분화 하였다.
6. 중국 서한 시대의
묘의 부장 품 이었던 가옥형 토기에 단청의 흔적이 발견 된 것으로 본다. 이때 사용한 색체로는 적색, 백색, 흑색 등을 사용 하였다. 석가레 부위의 주두, 벽 등에 기하형의 단순한 문양을 장식 하였다. 바로 이 유물은 고대 건축에서 문양이 장식 되었다는 것을 추정케 해 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7. 고대 단청의
본격적인 유물은 4세기 중반부터 조영되기 시작한 중국 간쑤 성 둔황현의 불교 석굴 유적에서 발굴된 크고 작은 600 여개의 석불 중에 단청이나 벽화가 도체된 동굴이 무려 489 개의 장소나 확인 되었다한다. 북위시대 발굴된 석기만 해도 22개 장소에 달했는데 그중 254 개 굴 같은 곳에는 천정과 사방, 벽, 불상, 불단등에 화려하게 장식된 단청이 그려 있었다 하니 이만해도 단청의 유래를 짐작할 수가 있다.
0. 우리 나라에서도 고대 단청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본격적인 유물로 조영 되었다.
8. 우리 나라 단청
유물로는 고구려 357년 (고국원왕 27)에 조성된 황해도 안악의 “안악3호분” 의 고분은 초기 벽화 무덤이다. 이 무덤은 석실 벽면과 천장에는 각종의 그림이 체색되어 있었으며 목조 건물의 기둥과 공포부제가 석체로 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주두에 도체한 귀면문과 천정의 연화문 건물의 창방에 해당되는 부분의 당초문등은 이미 당시의 건축 단청양식을 유감없이 보여준 설례이다. 지금까지 약 90 여 가지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들은 4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 당시 고구려 단청의 면모를 추정 할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8. 중국의 단청과
관련된 가장 오렌 기록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진(秦)나라 여불위(呂不葦),? bc235)가 편찬한 성씨춘추(姓氏春秋), 계춘(李春記)“제 3 법” 5편에서 찾을수 있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사(工師)가 백공(百工)에게 명하기를 다섯 창고의 망을 살펴 금철(金鐵), 피혁근(皮革筋), 각처(各處) , 우전간(羽箭幹)등 불량한 것이 없도록 하였다.
0. 여기서 주교 단칠은 곧 체화의 재료를 가리키는 용어 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서는 전환 시대로 내려오면서 예기(禮記)자가 틀리지 않게 기록 되었으며, 희남자(오고지령(五庫之玲), 의 글자만 빠진체 그대로 인용되었다. 또한 여춘추(呂氏春秋)의 다른 내용 가운데 장인(巨工)들을 믿지 못하면 그릇과 도구, 단칠염색(丹漆染色)의 부정(不貞)이 정청록이 있다. 여기서 단칠(丹柒)은 체색이며 염색 (染色)은 곧 체화의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다.
9. 단청이란 용어가
가장 처음 등장하는 서로는 중국 전한(前漢)의 희남왕(禧南王), 유안(bc797-bc122)이 저술한 태족훈(泰族勳)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이다.
0. 수 화 목 금 토 (水化木金土)의 곡물은 그 종류가 다르나 모두 임(任)무가 있고 자(啫)거와 저울과 먹줄 (준축줄)어느 모로나 모두 사용되고 단청(丹靑)과 아교의 칠(漆)이 같지 아니하나 모두 사용되는 것은 각기 적소에 제 물건이 있기 때문이다.
상기의 내용은 몆가지 중요한 점을 사서해 준다. 우선 전술한 바와같이 단청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 하였다는 데에 큰 비중을 준다. 그런데 희남자의 모든 가사 내용이 주 나라 때로 부터 전해지는 각종의 기록들을 모아서 제 편집한 것을 전제 한다면 단청 전의 유산임을 추산 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따라서 희남자의 기록은 단청의 역사를 전환시대 이전으로 올려 보낼 수 있는 자료가 될수 있는 것이다.
0. 또 하나의 단청 고칠이란 기록으로 이것은 단청과 칠이 분명 다른 종류임을 깨닫게 해 준다. 단청과 칠의 합성어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역시 이것에 비추어 그 이전의 기록인 여씨춘추 의 지교단칠 이란 내용의 지, 교, 단청 , 옷칠, 의 각기 다른 네 종류가 병립으로 열거된 문장임을 깨닫게 된다.
0, 당시 이러한 자료들은 국가적으로 관리되는 매우 중요한 산물 이었다. 따라서 국가가 관리하는 다섯 창고 가운데 한곳을 칠 창고로 사용 하였으며 장인들의 우두 머리인 공사가 그 제자인 백공에게 불량함이 없도록 소중히 살피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0.그런데 단청이 단청과 칠의 두 종류임을 뒷받침 해 주는 유물이 우리 나라에서 발견되어 크게 주목 받고 있다. “ 백제2분” (625년)사이에 출토된 왕과 왕비의 두침과 족화는 각기 칠과 단청으로 도체되었다. 왕의 것은 옷 칠을 사용 하였고 왕비의 것은 붉은 색으로 단청 되었는데 이것은 단청보다 칠이 더 소중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바로 이것으로 칠이 단청과 다른 자료 임을 알수 있게 되었다. 그 시대 단청이 일반 기물에 까지 쓰여 젔음을 확인 할수 있는 사료이다.
0. 한편 칠은 중국에서는 이미 선사시대 유적에서 사용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 1974년 중국 절강성 항주만 남안에 위치하고 있는 하모도춘 신석기 문화 유적에서 놀라울 만한 유물들이 출토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레된 칠완, 견갑골, 호미, 칠도통 등의 각종 칠 공예품이 발굴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중국의 칠기 편년사는 이미 올라가 선사시대부터 사용 되었던 것으로 비정 되었기에 이르른 것이다. 또한 전국시대(bc401-251)의 고분에서는 최 상품의 자, 쟁반, 통의 각종 칠 공예 품들이 발견된바 있다.
0, 우리 나라에서도 기원전 1세기경 유작으로 추정되는 경남 의창군 다호리에서 술잔, 칠붓, 칠검 등 다량의 칠기들이 출토 되었으며 낙랑시대 체험 총의 체회 칠협, 신라 호우총, (5세기) 목심칠면 ,백제 무령왕릉(6세기), 체화족자, 천마총의 새 모양 칠잔, 안압지의 각종 칠그릇, 등이 출토 되므로서 옷칠 공예의 끈임 없는 맥을 확인 할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쓰임새로 발달한 옷 칠은 특히 나무의 표면에 칠하면 미려할 뿐만 아니라 영구성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생활도구의 주된 자료로 사용 했던 고대인들에게 옷 칠은 보배로운 것이었음을 쉽게 추정 할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포괄적 의미에서 칠이 단청의 일종임을 전제 한다면 단청의 기원은 상고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유구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전술한 바와 같이 이미 신석기 시대의 유물에서 칠의 사용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고대인에게 있어서 옷 칠은 대량 생산으로 염과 같은 부작용이 따랐기 때문에 목조건물 전체를 도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발달한 칠기가 소형의 공예품에 한정되고 있는 것 만을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수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목조건축물을 다룰수 있고 대량생산도 가능 하였던 안료와아교를 체취하여서 채색하였음을 추정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재료가 즉 자연에서 구할수 있었던 붉은 색과 푸른 색이었다. 특히 고대인들에게 붉은 색은 주술, 샤마니즘 의 상정성이 절대적으로 체색으로 기호 이상의 것이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바로 여기서 단청과 기원이 칠의 폭 넓은 발달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었음을 알게하는 것이다.
10. 중국 전한의 회남왕 유안 (bc 1792-bc122).이 저술한 제20원 “태족훈”에 단청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 하였다.
0. 대체로 동양의 단청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는 고대 문명의 문화 흐름을 볼 수 있다. 중국의 단청은 다소 어둡고 한국의 단청은 화려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우아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하여 일본의 단청은 적색과 검정색 그리고 황금색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화려 하지는 않다.
한국의 단청은 불교문화와 왕실문화로 유입 되어 보존 유지 관리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사는 오래 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생각된다. 단청의 색조는 천연 광물에서 체취한 것은 100년을 가지만 화학 안료로 된 것은 색감은 아름답지만 무거운 맛이 없고 수명도 짧으며 공기의 오염 도가 심하여 쉽게 퇴색된다. 안악 제3호 천정에 그려진 연은 고분 벽화에 있는 연화문이다. 즉 불교 유입과 함게 들어온 것이 연화문이고 이것들이
0. 단청 문양의 유래가 되는 것이다. 연꽃은 한국 미술 무늬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이용되는 무늬이다. 연은 불타의 무늬를 시각적으로 나타내 주는 연은 여성, 풍요, 진리를 나타내며 겹꽃은 보상화문이라고 한다.
특히 덕화리,1호분 연꽃 무늬는 고려시대의 단청 양식으로 고려 중기에 송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나라에 정착 한 것이며 봉정사 극락전은 이 양식의 과도기적 양식이며 부석사 무량수전은 정착된 양식으로 볼 수 있다.
11. 한국단청의 역사로는
0.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 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제48권 솔거 조라 하겠다. 신라24대 진흥왕 (540-576)때의 화가 솔거는 태어 나면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솔거는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려 놓았는데 소나무가 살아있는 생 소나무 인줄 알고 새들이 날아와서 황룡사 벽화에 부딪치어 허둥대다가 떨어지곤 하였다 한다. 후에 채색이 낡고 퇴색되자 절의 스님이 단청으로 보수하였는데 그 후로는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0. 또한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이 일본에 건너 갔을 때 담징 실력이 뛰어나 단 소문을 듣고 일본 법륭사에서 담징에게 사찰벽화에 단청을 부탁하였는데 당징이 이를 승낙하여 조건을 걸었다, 그 조건은 담징이 그림을 다 그리기 전 까지는 내부를 들여다 보지 말라는 조건 이었는데 범륭사 승려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 담징을 이상하게 여겨 혹시 하는 의심이 생긴 범륭사 승려가 들여다 보자 벽화를 그리던 담징이 새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한다.
하여 그 벽화는 아직도 미완성 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0. 위의 이야기는 한국의 단청이란 용어 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표현된 최초라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야기 가된다. 이 대목에서 단청 문양 뿐만 아니라 벽화의 개념까지도 포괄적으로 사용한 의미 있는 글이다.
12. 고려시대의 단청의
문헌사료로는 “선화봉사고려도경” “고려사 ” “고려사절요” 등 고려 인종(1123)에 송나라 서궁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궁궐 건물의 난간은 銅花(동화)를 장식하였으며 단청이 장엄하고 화려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0. 또한 “고려사“제18권세가 18,(의종)毅宗편에는 병자10년 (1156)에 왕이 대궐 동쪽 벽에 정각을 세우고 ”충허각“(充虛覺)이라 이름하고 충허각에 금벽(金碧)단청이 선명 하였다 라는 내용이 있다.
0. ‘고려사“ 제12권에도 ”열전제15“ 유승단 편에는 “몽고 대군이 경기 지방 가까이 침범 했을 때 수도를 강화도로 옮길 일을 의논 하였는데 그때는 무사태평 한 시기가 이미 오래 되어 경도(서울)의 호수가 10만호에 이르렀으며 거리에는 단청으로 채색한 큰 집들이 줄을 이었다”
이 내용은 고려시대에 단청이 일반 사가에 까지 크게 유행 하였음을 파악 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0. ‘고려사“ 제36권 ’세가제36” 충혜왕 편에도 1344년 기록을 보면 “새 궁전을 세우는 건축 공사장에 깃발을 꽂고 북을 울리면서 (왕이)몸소 담장에 올라가 공사를 감독 하였고 궁궐이 준공 되,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데 기한을 누추면 몇 곱의 배를 벌로 받았다.
13. 조선시대의
사료에는 “조선왕조실록“ 과 ”증보문헌비고“에는 태종 12년(1411) 철종 9년(1857)까지 무려 159건에 이르는 단청 관련 기사가 수록 되어 있다. 조선초기의 궁궐 단청은 고려의 양식을 계승해서 금벽 단학 체화 진체로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다.
0. 철종 9년에는 ‘경국대전“ 예전 편에는 도화서의 보직은 선화 1명 선희 1명 화사 1명 회사 2명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소속 관사는 15명의 화학 생도가 있었는데 그 직위는 선화종 6품 :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 중에 가장 높은 지위이며 선희종 7품, 화사 종 8품, 회사종 9품 이다. 안견은 종 6품 벼슬인 선화에서 체아직인 전4품 호군으로 승진 하였다. 이는 조선 초기 화원으로 종 6품이 된 최초의 화원의 벼슬이다. 겸재 정선은 17세기 도화서화원 (1676-1759)도 양천 현감을 지냈으며 김홍도 도 18세기의 17세기 도화서 화원 직급 부사맹(종8품)으로 기록 되어있다.
0. 조선시대 단청장의 전승과 활동은
서울 남대문의 숭례문 3층 중도리 상량문의 묵서에는 성화15년(성종10년-1479)중수 시에 화원 김직급 부사맹(종8품)으로 기록 되어있다. 인조 25년(1637)에 중건된 창경궁 저승전의 단청은 김명국(생몰미상)으로 되어있다. 조선 시대에는 극단적이 배불 정책으로 인하여 사찰의 단청은 점차 줄어 들었지만 궁궐과 왕십차원의 불사 단청은 지속 되었다.
0.조선왕조실록 단청기록 가운데 상당수가 사찰의 값비싼 진체 단청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지속적인 상소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인지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궁궐을 재외한 모든 건물의 단청에 값비싼 진체의 사용을 금하라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당시 왕실에서 발원한 사찰 단청의 화려함을 밝혀주는 “세종실록” 30년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불당이 이룩되니 경찬회를 베풀고 5일 만에 파하였다. 불당의 제도가 사치와 화려함이 지극하여 금과 구술이 눈이 부시어 햇빛에 빛나며 붉은 비단으로 재봉하여 기둥에 입혀서 주의라고 이름하여 더렵혀짐을 방지하고 향나무 로 만든 금부처 세구를 그 가운데 안치하였으니, 그 금부처는 안평대군이 일찍이 성녕대군의 집에서 감독하여 조성한 것이다.
당시 궁궐 단청이 화려함을 수식하거나 지적하는 내용도 상당수 기록 되었는데 “인조실록” 원년(1623)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궁궐이 산위에 빙 둘러서 있는데 현란한 단청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 했습니다. 상께서 바야흐러 정성을 펼치시려는 이때에 혹 사치스러운 마음이 생기리라고 걱정하는 바는 아닙니다마는 궁실은 후대에 전해줄 것인데 만약 이세에서 사치스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초기의 궁궐 단청의 양식은 고려의 양식을 계승하여 금벽 진체로 화려하게 장식 하였음이 기록 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와는 달리 불교의 배타적 특성으로 인하여 사찰의 진체 단청을 금지하라는 유생들의 상소가 기록돼 대부분의 니는 중국으로부터 수입 되었다는 점도 일부의 원인이 된다. 다음의 기록들은 이러한 기록들을 잘 설명해 준다.
0.“광해군 실록 8년 (1615)” 창경궁 건축에 필요한 당체색의 조달을 위해 회원을 요동으로 보낸다. 선수 도감이 이를 건축 할 때에 사용할 당체색을 무역해 오는 일은 지난 4월1일 별도로 화원을 지정하여 값에 해당하는 은을 주로 보냈는데 강을 건너도 된다는 유서가 없어서 마음 되로 강을 건너지 못하여 이곳 진강 등에는 체색이 있는 곳이 한군데도 없고 요동에서 요명정선과 문성진 두 곳의 단청은 바야 흘러 칠을 시작 하였으나 체색이 부족하여 무역해 오기만을 날마다 의주에서 보고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체색을 때 맞추어 들여오지 못하면 장차 단청 일을 정지해야 할 형세이다. 매우 민망합니다. 이러한 뜻으로 의주 부윤에게 하유하여 도감이 화원을 요동으로 급히 보내 제 때에 무역해 오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니 윤허 한다고 답하였다.
0. 상기의 내용에서 알수 있듯이 단청에 사용된 진체 안료 대부분이 중국으로부터 고가에 수입 되는 것이다. 신진 관료들은 이것을 사치로 규정하였고 급기야 궁궐의 단청 까지 호화스러운 치장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끈이질 않았다. 병자호란 이후 당시 중국에서는 청대 금벽 단청의 화려함이 정상을 이룬 시기였다. 반면에 청과의 굴복 외교를 강요 당했던 시기에 체색을 수입하기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지불 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조선 중기 이후 부터는 점차 궁궐의 단청 양식이 시들기 시작 하였으며 역시 실록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는 사실이다.
0. 수원 화성의 단청은 1796년에 완성된 단청으로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화사46명 가운데 승려가 있었으며 승려화원의 계보는 조선후기 영조대왕 재위(1724-1776)시절에 도화서 화원으로 상겸 화상으로부터 시작 그후 조선말기 에 이르기까지 의겸, 유성, 수백, 청담, 금호, 대호, 보웅, 예운등의 화승들이 단청을 전승 하였다고 되어있다.
0. 그 뒤를 이어 일재 감정기 부터 해방 광복 이후 금융, 만봉, 월주, 등 3인의 화승이 활약하였고 최근엔 만봉 금어가 맥을 이어가고 있다.
14.고대의 단청 양식으로는
만주 진안 현 일대에 벽화고분 23기, 평양 안약 일대에 68기 등 총 91기 가 발견되었고 중국 만주 진안 현에 분포된 고구려 고분은 대략 1만 2,000 여기이며 그 가운데 발굴된 고분은 극소수이며 당국의 무관심으로 서서히 훼손 되 가고 있다.
15. 북한의 고분 벽화 관리는 철저한 편이다. 철문으로 고분입구를 봉하는 중국과 달리 북한은 고분유리벽을 설치하고 온도 습도 조절장치와 입구 조정 등을 통해 벽화를 보존하고 있다.
이상으로 단청의 유래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찰 연구 보고서를 재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