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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21) - (7) 3․1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비열하고 무자비한 학대

작성자김동훈 5|작성시간26.06.12|조회수15 목록 댓글 1

5. 1919년 기미년 3독립 운동
⑴ 3운동의 힘을 고양시켜 준 신민회와 105인 사건
⑵ 3독립 운동의 기폭제
⑶ 3독립 운동 정신의 집약기미 독립 선언문
⑷ 전국적으로 확산된 3독립 운동의 불길
⑸ 어린이기생거지까지 만세 대열에 동참
⑹ 천안 아우내 장터 유관순 열사의 독립 운동과 그 희생
⑺ 3독립 운동 이후 일제의 비열하고 무자비한 학대
⑻ 3독립 운동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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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31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비열하고 무자비한 학대

예기치 못한 거족적인 만세 시위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극에 달했습니다. 1,542회에 걸쳐 전국 218개 군 가운데 211개 군에서 2,023,098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중에 7,509명이 살해되고, 15,961명이 부상을 당하고, 46,948명이 투옥되었으며,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는 715채나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일제는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을 비롯한 송진우, 현상윤 등 배후 인물과 수많은 사람들을 내란죄의 명목으로 검거하였고, 검거된 자들은 하나같이 뼈를 깎는 고문을 겪어야 했습니다. 특히 송진우는 일경에게 붙잡혀 옷이 갈기갈기 찢긴 채로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갇혔는데, 이때 일제가 풀어 놓은 사나운 개가 사지와 몸뚱이를 물고 할퀴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도 만세운동에 참가만 해도 시위자들을 눕혀 놓고 작두로 목을 자르거나, 살이 찢겨지다 못해 뼈가 하얗게 노출되는 참혹한 몰골이 될 정도로, 쇠로 만든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치곤 했습니다.

일본측 기록을 보아도 31일부터 1030일까지 8개월 동안 재판을 받은 피고가 17,990명에 이르고, 그 중 5,156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대부분 감옥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아, 두 평도 못 되는 좁은 방 안에 20-30명씩 수용되어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한 채 육체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강영준 등 젊은 여학생 31명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무수한 난타를 당했습니다. 일경은 심지어 쇠꼬챙이로 유방을 지지는가 하면 체모(體毛)에 고약을 녹여 붙였다가 그것이 굳은 다음 급히 잡아떼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를 갈지 않고는 도저히 회상할 수 없는 생생한 실화였습니다.

이렇게 일단 일제에 검거되기만 하면 원시적이고도 극악한 고문을 견뎌야 했습니다. 빨갛게 단 철봉으로 손가락을 지지고, 벌거벗기고 채찍질하거나, 집게로 생손톱을 잡아 뽑고 혹은 콧구멍에 뜨거운 물이나 고춧가루를 쏟아 붓고, 손톱 밑에 대못질을 하고, 수없이 태형을 가해 끝내 목숨이 끊어진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성기에 종이 심지를 꽂아 놓고 불을 당겨 불구자로 만드는 등 잔악한 고문을 예사로 자행하였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충분한 치료와 조섭(調攝)을 하지 않으면 폐인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제의 만행이 무자비하고 극악무도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꺽지는 못했습니다. 투옥된 지 8개월 만에 일본 재판장이 판결에 앞서 피고들에게 앞으로도 조선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한용운은 의연하고 당당하게 그렇다! 언제든지 이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그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답하여 일제 앞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한용운은 일제가 참회서나 굴복서를 쓰라고 할 때도 끝까지 거부하였으며, 옥중 선언을 통해 우리의 독립은 산상(山上)을 떠난 둥근 돌과 같아 목적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그 세()가 그치지 않을 것이니 조선 독립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라고 굳은 자신감을 밝혔습니다. 이에 일본 검사도 감탄하여 더 이상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8) 31독립운동의 영향

31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비폭력으로 절대 독립을 요구한 온 겨레의 하나 된 함성이었습니다. 실로 조선이 독립국임을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살아있는 우리 민족혼의 저력을 확인하였을 것이고, 우리 민족은 그 정신을 집약하여 민족 독립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31독립운동의 첫 열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우선 독립을 선언한 이상 주권국가로서 독립된 정부를 세우는 것이 당현한 일이고, 독립운동을 끝까지 조식적으로 이끌어나갈 핵심 주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31독립운동 직후 러시아, 상해, 서울 등 여러 지역에 임시 정부가 세워졌는데, 19199월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815일 해방 때까지 상해를 비롯한 중국 각지에서 외교활동과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자주 독립운동에 큰 영향

31독립운동은 세계 약소민족 국가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첫째, 1919년 중국에서 북경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54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5.4운동 선언문을 통해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한 대한민국을 본받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상해에서는 중국인 학교 교장들이 한인들의 5.4운동 지원에 감사하다며, 한인청년독립단 간부들을 초청하여 다화회(茶話會)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둘째, 19194월 인도에서 마하트마 간디를 중심으로 일으킨 비폭력무저항의 사티야그라하(인도어로 진리수호라는 뜻) 운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영국에 대한 독립운동이었는데, 이들의 독립운동 정신은 31독립운동처럼 비폭력운동이었습니다.

셋째, 19196월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마닐라 대학생들과 영국 식민지였던 이집트의 카이로 대학생들의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만주 연해주에서의 독립군 무장투쟁

31독립운동 직후 평화적 시위 보다는 무력(武力)에 의한 조직적인 독립운동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1940년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 만주연해주 지역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20년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입니다.

191931독립운동 이후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재정비, 또는 새로 편성된 독립군은 주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전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들 독립군은 간도의 일본인들에게 큰 위협 세력이 될 정도였습니다. 간도 지역의 각 독립군 부대들은 그 소속 단체별로 거점을 확보하여 세력을 길러나갔는데 북간도 각지에서 지회를 둔 대한국민회, 만주 일대의 대종교도들과 의병들을 규합하여 발전한 북로군정서, 연길현 명월구에 본영을 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왕청현 봉의동에 본영을 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서간도 한족회가 조직한 군정부를 개편한 서로군정서, 구한말 의병장들이 주동이 된 대한독립단,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에 의해 조직된 광복군총영(대한광복군 사령부)등이 대표적입니다.

 

봉오동 전투(192067)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등이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192064일과 6, 두만강을 넘어 간도 지역으로 진입한 일본군 아라미 중위의 남양수비대를 삼둔자 지역에서 격파하고 봉오동 지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에 삼둔자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나선 야스가와(安川) 소좌의 일본군 19사단과 격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독립군은 봉오동 주민을 모두 대피시킨 후, 험준한 사방 고지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유인하여 기습공격으로 대승을 거두는데, 일본군 157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 독립군은 재빨리 대한국민회의 활동 거점인 의란구 지역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정비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독립군에 의해 기습을 받아 손실만 입었을 뿐, 독립군 토벌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부녀자와 노약자 등 20여 명 한인을 살상한 채, 두만강을 건너 철수하였습니다.

 

 

청산리 전투(19201021-26)

봉오동에서 대한독립군 부대에 크게 패한 일본군은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전 병력을 삼도구-안도(安圖) 통로인 청산리 계곡으로 급히 이동시켰습니다.

106일부터 이미 간도 지역에 병력을 투입시키기 시작한 일본군 아즈마() 지대(支隊)10-11일 사이에 지대 병력의 대부분을 용정촌에 집결시켰습니다 지대장보다 먼저 용정촌에 도착한 제 73연대장 야마다(山田) 대좌가 보병과 기병 일부 병력을 이끌고 용정촌에서 두도구로 이동하여, 13일 새벽에 이도구-삼도구 일대에 정찰을 실시하였으며, 15일에 지대장 아즈마 소장이 용정촌에 도착함으로써, 지대 병력의 집결이 완료되었습니다. 17일 밤,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 rAPrhr에 아직도 잔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용정촌의 지대 사령부에서 그들을 섬멸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접전을 회피한다.’라는 묘령 회의 결정에 따라 분산된 활동을 하기 위하여, 홍범도 부대는 득미동 부근으로 이동하고, 김좌진 부대만이 청산리 계곡에 남게 되었습니다. 김좌진 부대는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전투 준비에 돌입하였습니다. 우선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독립군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사기가 떨어져 허둥지둥 도망갔다.’라는 허위 정보를 퍼뜨린 후 백운평 골짜기에 매복하였습니다. 이범석이 지휘하는 제 2제대원 600여 명이 계곡 좌우에 위장을 철저히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이를 알아채고 1021일 오전 8시경부터 첫 공격에 나섰지만, 오전 9시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고 야스가와 소좌의 전위부대 200여 명은 교전 시작 20분 만에 전멸되었습니다. 곧이어 도착한 일본군 야마다(山田) 토벌 연대본부는 산포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하고 독립군을 공격하였지만 완전히 엄폐되어 있는 독립군 반격에 9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거의 진멸하고 말았습니다.

전투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꼬박 6일 동안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 1,200, 부상자 2,100명이었고 독립군의 경우는 전사자가 60명에 부상자 90명으로 독립군 사상 가장 큰 격전이면서 최대의 승첩(勝捷)이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 병사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고, 또 지휘관들은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한 유격전술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만행으로 고통당하는 전 민족에게 뜨거운 구국충절의 정신을 불어넣는 크나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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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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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송장출16 | 작성시간 26.06.12 힘겹게 이긴 봉오동, 청산리 전투와
    태평양 전쟁 승리로 쟁취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북한 김정은 집단과 토종좌파의 선전선동에 의해
    대한민국이 멸망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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