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태-중요무형문화재 제34호인 ‘강령탈춤’

작성자dari|작성시간10.04.09|조회수372 목록 댓글 0



황해도 일대에서 놀아오던 대표적 탈놀이

남부메릴랜드 한인회(회장 이태미) 는 내달 2일 메릴랜드 월도프에 위치한 노스 포인트 고교(2500 Davis Rd.)에서 ‘제3회 한국 설 기념문화축제와 제1회 문화예술경연대회 및 문학 장학금 공모전’을 개최한다. 이날 공연예정인 중요무형문화재 제34호인 ‘강령탈춤’과 출연진을 소개한다. 유래 강령탈춤이란 황해도 일대에서 놀아오던 탈놀이 가운데 내륙의 평야지대인 황주, 서흥, 봉산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봉산탈춤과 해주, 옹진, 강령(海州, 壅津, 康翎)등 해안지대를 대표하는 해주탈춤형인 강령탈춤으로 양대별(兩大別)되는 황해도의 대표적인 탈춤이다.

황해도 탈춤 중 해주형의 대표격인 강령탈춤은 또 하나의 대표적인 봉산탈춤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초80~90년 전 전성기를 가졌었는데 그것은 해주와 많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강령은 해주에서 남서 쪽으로 80리가량 떨어진 약 삼 백호 내외의 작은 읍(邑)이었으나 이조 말 한일합방과 더불어 해주감영(海州監營:황해도 감사가 직무를 행하던 곳)소속의 가무인(歌舞人)들과 그곳에 집결 되어있던 탈꾼들이 해산되자 그 일부가 강령에 집결되었으며 또 강령은 그 부근에 오랜 전통을 가진 재인부락(才人部落:광대들이 모여 사는 큰 동네)이 있어 광대들의 협력도 많았다는 것은 탈춤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통이 편리하고 평야지대이며 주변에 산업시설이 많았던 봉산 처럼 흥행화(興行化:구경꾼을 모아놓고 연극을 하게 함)하여, 다른 지방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으며 지방민의 오월단오 놀이에 연중행사(年中行事)로서 행하여져 오다 1939년 10월 중앙공연을 갖기 위해 처음으로 서울에 진출, 당시 경성 부민관(부민관:태평로에 있음. 현재로 하면 세종문화회관 격)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 비로소 지상에 소개되었으며 그때의 동아일보(東亞日報)는 1939년10월13일자(제65197호)와, 14일자(제65200호)에서 논평(論評)을 통해 연기(演技)와 춤에 있어서는 봉산이 강령에게 일주(一籌:주는 산대로 샘을 치는 것, 하나의 산대)를 사양(辭讓:받을 것을 안받거나 남에게 내어줌)하여야 되고 재담(才談)은 강령이 봉산에게 일주를 사양해야겠다는 호평(好評)까지 받은바 있다.

또한 꾸준히 지방행사에서 명맥(命脈)을 이어오다가 일제의 전쟁 도발로 중단되었으나 1945년 8월15일 해방되어 조국이 광복되자 옹진군 내에 있는 4개면의 치안 유지회가 주동이 되어 일제 말에 중단되었던 탈춤을 부활시키려는 노력하에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행사에서 공연되었으며, 1950년 6월20일 (당시 단오절)21일양일간 단오절에 놀았던 탈춤을 마지막으로 본고장에서의 전승은 6.25동란으로 인하여 끊기고 말았다.

그후 1969년 강령탈춤을 복원하기 위해 문화재 위원인 이두현(李杜鉉)박사에 의해 강령에서 탈놀이에 참여하였다가 월남한 고 오인관(故 吳仁寬)선생을 찾게 되어 비로소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1970년 7월에 무형문화재34호로 지정 받기에 이르러 그후 많은 보완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6.25동란 전의 강령은 38선 이남 이였으므로 행정상 대한민국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돼 있었음.

특징 강령탈춤의 특징을 보면 봉산탈춤과의 차이(差異)로서 첫째, 강령탈춤은 보다 사실적인 얼굴로 이른바 인물 탈인데 비해 봉산탈춤은 귀면형(鬼面型)의 목탈이 주요(主要)한 배역을 맡고 있고, 둘째 의상(衣裳)을 보면 강령탈춤에서는 주로 칡베장삼을 입고 그 소매 홍태기는 길어서 팔을 내치면 땅에 닿을 정도인데 비하여 봉산탈춤은 원동에 소매를 단 더그레를 입는다. 셋째 무법(舞法)에서 보면 강령탈춤은 느린 사위로 긴 장삼 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동작의 장삼춤을 추는 데 비해 봉산탈춤은 한삼소매를 휘어잡고 뿌리는 동작의 깨끼춤이다. 극본(劇本)에 있어서도 놀이과장의 순서와 등장인물에는 차이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주제가 비슷하다

등장인물 중 강령탈춤에서는 마부, 말뚝이가 각 2명씩이고 사자도 2마리가 등장하나 봉산탈춤에서는 각 1명씩이고 사자도 1마리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강령탈춤 대사의 내용에서 말뚝이와 양반의 재담은 매우 독창적이며 우리 말의 묘미를 구사하고 있고 강령의 지방색도 보이고 있다. 미얄 할멈의 재담에서 물레를 돌리는 대목은 봉산에는 없다. 강령탈춤도 황해도의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오월 단오절에 놀아 왔으며 단오가 지난 후 10일만에 뒷풀이라고 하여 이 놀이가 다시 연희되고 그 후는 모든 탈을 태워 버렸다고 하나 근년에는 보관하였다가 다시 사용하기도 한다. 강령탈춤은 모두 7과장으로 구성된다.

사자춤•말뚝이춤•목중춤•상좌춤•양반과 말뚝이춤•노승과 취발이춤•영감과 할미광대춤..... 순서로 진행된다. 등장인물은 모두 스무 명이며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양반계급에 대한 모욕, 일부처첩의 삼각관계와 서민의 생활상을 다루고 있다. 강령탈춤은 느린 사위로 장삼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장삼춤”이 주가 되고 장단은 도드리, 타령, 자진굿거리가 주로 쓰이며 소리의 사설이 30여 가지나 된다. 현재 예능보유자로는 이번 설 공연에 출연하는 송용태씨를 비롯, 김실자, 김정순, 이정석, 등이 지정이 돼 있다.

출연진 소개 ‘취발이’ 역-송용태

송용태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탈춤을 시작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도 계속 탈춤 활동을 하면서 탤런트로서는 첫 번째로 중요무형 문화재 제 34호 강령 탈춤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78년 11월에 서울 시립 뮤지컬 단의 1기로 뮤지컬 계에 발을 들여, 현재 활동하는 배우 중 동갑인 이인철과 더불어 최고 선배 배우로 꼽힌다. 한국 뮤지컬의 역사와 함께하는 그의 배우 이력 시간이 흐를수록 다방면으로 활동영역이 넓어져왔다. 수사반장, 한 지붕 세 가족, 태조 왕건 등 인기 TV드라마에 줄 곧 출연하기도 하고, ‘쉬리’,’오버 더 레인보우’, ‘실미도’ 등 영화에도 자주 연 하였다. 그리고, 뮤지컬 애니메이션 더빙에도 계속 참여 하였는 ‘라이온 킹’의 멧돼지 품바 역부터 시작하여, ‘노틀담의 꼽추’, ’인어공주’ 등 다양한 뮤지컬 애니매이션에서 노래와 대사를 모두 커버하는 몇 안 되는 중견 성우로 활동했으며, 최근 KBS 대하 사극드라마 ‘대조영’에서 당 태종 이세민 역을 맡아 열연했다.

연기경력: 서울시립 뮤지컬단 수석배우(1978~1985), ‘지붕위의 바이올린’, ‘포기와 베스’, ‘판타스틱스’, ‘돈키호테’, ‘아리랑 아리랑’, ‘아리송 하네요’, ‘님을 찾는 하늘 소리’, 랑과 배비랑’, ‘성춘향’, ‘템피스트’, ‘장길산’, ‘애니깽’, ‘한 여름 밤의 꿈’, ‘크리스마스 캐롤’ 外 다수.

‘미얄 할미’역-백은실 강령탈춤 교수이자, 한양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강령예술 아카데미 교수도 맡고 있다.

‘노승’역-오영준 강령탈춤 교수이자 충북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상좌’약-장정희 강령탈춤 교수이자 인천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상좌’역-김주남 강령탈춤 교수 겸 인하대 교수이다.

‘피리 연주’-박근형 강령탈춤 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사자’역-이준희 강령탈춤 조교이자 성균관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강령탈춤 조교이자 대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말뚝이 또는 사자’역-최효열 강령탈춤 조교이자 미림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다.

 

   TV 탤런트, 뮤지컬 배우, 강령탈춤 예능보유자 ‘천의 얼굴’ 송용태

 


수천 수만 개의 얼굴을 가지는 게 배우라지만 그야말로 그 앞에서는 ‘카멜레온’도 울고 갈 듯하다. 우리에게 추억의 드라마로 꼽히는 ‘수사반장’에서부터 최근 사극인 ‘태조왕건’, ‘서울 1945’ 등 TV브라운관에서 단골 조연으로 낯이 익은 그다. 얼마전 인기리에 종영한 KBS대하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당 태종역을 맡았다.

바로 연기파 배우 송태영씨. 선 굵은 얼굴과 묵직한 목소리의 중견배우인 그는 ‘실미도’ ‘분신사바’ ‘공공의 적2’ 등에 출연, 한국 영화계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든든한 버팀목이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인 ‘라이언 킹’에서 멧돼지 품바, ‘아나스타샤’에서 악령 등 성우로 분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송씨의 카리스마가 한껏 뿜어져 나오는 것은 뮤지컬 무대 위에서다. 그는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을 수차례 거머쥔 베테랑이다. ‘햄릿’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등 수많은 뮤지컬 고전에 출연했고 몇차례 파격적 변신을 선보이기도 했다.

남부MD 설기념 문화예술축제 참여 이처럼 화려한 경력을 가진 송씨지만 그가 국보(國寶)라는 사실은 좀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34호 ‘강령 탈춤’의 예능보유자이다. 이름하여 인간문화재인 것. (강령탈춤은 봉산탈춤과 함께 황해도의 대표적 탈춤이다.) 지난 2월2일 메릴랜드 월돌프에서 개최된 ‘한국 설 기념 문화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송씨는 “미국에서 탈춤 공연을 선보이게 돼 너무 뿌듯하고 기쁜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공연일 이틀전에 만난 그는 기분이 한껏 고조돼 보였다. 강령탈춤보존회 소속 회원 8명과 함께 워싱턴을 찾은 송씨는 “지난 1984년부터 우크라이나, 터키, 일본, 캐나다 등 세계 각지에서 공연을 펼쳤지만 미국은 처음”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송씨가 탈춤에 입문한 것은 1970년 안양예고 2년때다. 우리것을 살려보자는 취지의 연극을 했는데 탈춤을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부터 전통문화 전수의 코스(전수자-이수자-전수조교-인간문화재)를 밟게 된 것이다. “당시 탈춤을 처음 배울 때 힘든 점이 많았다. 탈이 집안에 있으면 귀신이 못들어오니까 조상 제사도 못지낸다며 집안 어른들에게 온갖 괄시를 다 받았으니까. 원래 대양을 항해하는 마도로스가 되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둘까하는 생각도 종종 했었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를 몸소 전하는 귀한 책무를 버릴 수 없었다.” 송씨는 “스위스나 덴마크 등 유럽에서 공연을 하면 동양의 신비로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며 “그런 모습을 보면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안양예고 시절 탈춤 입문 …38년째 그는 “그러고 보니 탈춤을 해 온 게 어느새 38년이나 됐다”며 “인간문화재가 된 것은 2002년인데 내가 잘나서라기보다 후세에 전수하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 동아리에서나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는 등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추세여서 후계자 양성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 송씨의 하소연이다. 전국 중고교에 국악교사 배치 등 제도적 활성화가 마련되지 않으면 전통문화의 생존 자체가 힘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든다고. 그래서 그는 전통과 현대의 크로스 오버, 소위 퓨전화에 반대하지 않는다. 박물관 도자기처럼 묶어둘 필요는 없다는 것. 전통 그대로 보존하는 일도 필요하고 대중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는 작업도 필요하다는 논리다. 그는 “흑백논리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며 “물론 크로스오버가 지나쳐서 본연의 정신이 훼손돼서는 안되겠지만 다양한 시도는 나무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형태 달라도 ‘연기’라는 공통점 있어 어쩌면 그가 인간문화재이면서 동시에 탤런트,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 등 많은 장르를 섭렵하고 있는 것도 다양한 시도를 위한 몸부림일지 모른다. 여러 장르를 하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송씨는 “형태는 조금씩 달라도 ‘연기’라는 공통된 맥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많은 장르를 경험할수록 캐릭터 창출이 쉬워지고 온전해진다는 것. 넘치는 열정때문일까. 송씨는 56세의 나이에는 아랑곳 않는다는 듯 만학에 열심이기도 하다. 그는 청강문화산업대 뮤지컬과 겸임교수를 하면서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 석사과정중에 있다. 아무일 않고 쉬게 되면 오히려 병이 난다며 일을 하는 것이 쉬는 것이라고 태연스럽게 말한다. 탈춤이든 현대극이든 작품을 하면서 원기를 되찾는다고. “인간문화재라고 별 것 없다. 하지만 우리 한국에서 인간문화재에 대한 처우는 일본과 대만과 비교해 아직 갈 길이 멀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해 힘든 길을 고집스럽게 가는 사람이라는 점을 기억해주면 고맙겠다.” 전통문화 지킴이들은 한국의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남극에 가서 펭귄과 함께 춤이라도 출 수 있는 각오가 돼있다며 송씨는 힘찬 응원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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