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원조인 여진족(女眞族)]
함경도와 두만강 위의 만주 지역에 살았던 만주족.
여진은 말갈이라 불리는 북방 민족의 하나로, 발해의 지배 아래 있다가 발해가 멸망하자 고려와 거란을 상국으로 받들었다. 그들은 스스로 국가를 이루지 못하다가 12세기에 들어서 북만주에서 일어난 완옌부의 추장이 부족을 통일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고려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여진족은 정주까지 내려와 고려군과 충돌했다. 기병을 주력으로 삼는 여진족을 고려의 보병만으로는 막아내기 어려웠다.
윤관은 여진 정벌을 대비해 별무반을 편성했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었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함경도 쪽으로 진격하여 여진을 북쪽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1107년 동북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았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은 끊임없이 이 지역을 돌려줄 것을 애원하기도 했고, 고려를 침입하기도 했다. 여진족은 조공을 바칠 것을 조건으로 동북 9성의 반환을 요청하자 고려는 9성을 쌓은 지 1년 만에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여진은 세력을 좀 더 강화하여 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1115년 여진족은 금을 건국한 후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거란을 정복하였으며, 송나라를 공격하여 양쯔강 유역까지 차지하였다. 그 후 금나라는 고려에 압박을 가하며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다.
당시 고려의 집권 세력인 이자겸 등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금 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이것은 그 동안 고려가 추진한 북진 정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 후 고려 사회의 성격은 보수적으로 흘러갔다. 금나라는 13세기 원나라에 멸망하였으나 1616년 다시 후금을 건국하였다.
조선의 여진 정벌과 동북 4군 6진
가. 태종의 여진족 관리
조선은 1403년(태종 3) 명나라가 여진족을 다스리기 위해 그 거주지역에 건주위를 설치하자, 그 해 강계부(江界府)를 설치하여 여진을 통제하는 한편, 1406년에는 함경도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조공무역 ·국경무역을 허락하는 등 여진족에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폈다.
두만강 ·압록강 북안(北岸)의 산간부에서 농업 ·수렵 ·목축 등으로 생업을 영위하던 건주여진은, 관직 ·주택 ·토지를 주며 귀순을 장려한 조선의 회유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변방을 자주 침범하였다.
나. 세종의 여진족 관리
4군 6진은 세종 때 여진족을 물리치고 개척한 지역이다.
조선의 대외 정책은 사대 교린 정책이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 교린(事大交隣)을 실시하였고, 일본과 여진족에 대해서는 교린 정책을 실시하였다.
교린 정책이란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행하여 실시하는 정책이다. 4군 6진 개척은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이고, 사신 파견, 북평관 설치 등은 회유책이다.
1433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은 군사 약 1만 5천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소탕하고 4군을 설치했다. 같은 해 김종서도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여진족을 물리쳐 두만강 유역에 6진을 설치했다. 김종서가 형조판서로 승진해 중앙정치에 복귀할 때까지 만 7년 동안 국토확장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 우리나라의 국경이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선으로 확장되었다.
세종은 이 지역에 백성들이 없으므로 남방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고, 그 지방의 사람을 그 지방의 관리로 임명하는 토관 제도(고려의 사심관 제도와 동일)를 실시하였다.
다. 세조의 여진족 관리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조선이 설치한 4군 6진을 철폐한 뒤로는 더욱 침범이 심하였다.
명나라도 변방에서 준동하는 그들을 통제할 수 없어 조선에 여진을 정벌하자는 제의를 하게 되었다.
마침 1467년(세조 13)에 함경도 길주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토벌군이 북진하였는데, 그 병란이 진정되었을 무렵 명나라에서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를 협격(挾擊)하자고 제의해왔다.
이에 세조의 명을 받은 강순, 어유소, 남이 장군 등은 군사 약 1만을 이끌고, 길주에서 북상하여 건주위의 본거지에 이르러 여진족을 쳐서 성을 함락시키고 이만주 부자(父子)를 죽였다.
라. 성종의 여진족 관리
그러나 그 뒤에도 여진족은 수시로 조선의 북쪽 국경을 침입하였는데, 1479년(성종 10) 서북 방면의 건주여진이 침입하자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하여 군사 4,000이 공격하였으나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91년에는 동북방면의 여진족이 회령에 침입하여 도원수 허종이 물리치는 등
여진족은 조선의 북변에서 크고 작은 소란을 피웠다.
마. 인조와 청나라 관계
이 여진족 중의 일파인 건주여진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1616년에 여진을 통일하여 다시 후금을 건국하였다. (금나라는 13세기 원나라에 멸망하였다)
누르하치는 후금의 초대 칸으로(1616~1626) 등극하였으며, 누르하치 사망 후 8남인 홍타이가 2대 칸으로(1626~1636) 통치를 하다가 1936년에 후금을 청나라로 개명을 한다.
홍타이는 아버지 누르하치를 청나라 태조로 추승하고 자기는 2대 황제로 1643년 까지 청나라를 이끈다.
조선과의 관계는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이 원인이 되어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었고, 1636년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과 군신 관계가 성립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조선의 정치적 간섭을 하였다.
(앞으로 2대 홍타이와 조선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