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원자폭탄에서 살아남은 피폭나무
나는 히바쿠주모쿠가 뭔지 몰랐다. 몇 년 전, 일본 기타큐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중 우연히 그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도시는 내 친구 가와노 토모노리 교수가 이끄는 국제식물신경생물학연구소의 일본 지부가 있는 곳으로, 수년간 일본과 일본 문화를 접하는 내 개인적 통로였다.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어 내가 사는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이 나라에 대해 새로운 것을 경험해보려고 애썼다. 내가 즐겨 했던 일은 일본 로컬 식당에서 점심이나 저녁에 '혼밥'을 하는 것이다. 말하기와 쓰기가 가능한 숫자와 아주 간단한 인사말 말고는 실제로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데도 말이다.
일본 요리는 종류가 다양하고 세련되어 그 매력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나만의 주문 절차는 이렇다. 일단 방에 자리 잡고 앉아 메뉴판의 요리명이 쓰인 문자의 생김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무작위로 선택하여 주문한다. 보통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은 앙증맞은 크기의 예술 작품으로 변신하여 접시에 담겨 나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나의 주문 방식은 도박의 짜릿함을 안겨주지만, 이탈리아인의 취향과 다소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위험도 감내할 필요가 없다. 이제 발견의 즐거움이 시작된다. '이건 뭐지? 재료는 뭘까? 어떻게 요리한 거지?'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음식 접시를 앞에 두고 수수께끼 같은 이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골몰하고 있었다. 라비올리[치즈, 채소, 고기, 생선 등의 다양한 재료로 속을 채워 만든 네모 또는 반달 모양의 이탈리안 파스타] 크기에 흰색 주머니 모양의 요리였다. 살짝 튀긴 음식이었는데, 크림 같은 물질이 들어 있고 생선 맛이 났다. 맛은 좋았다. 그렇게 1인분을 다 먹고 나서 심층연구를 위해 1인분을 더 주문했다. 이탈리아 요리와 어딘지 모르게 비숫하긴 한데 정확히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한참 그 요리와 사투를 벌였지만, 끝끝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웨이터와 대화도 시도했지만, 일본에는 사실상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말이 안 통하자 지쳐 포기하고, 체념하듯 궁금증을 남겨둔 채 음식을 그냥 먹기로 했다. 이것이 내가 일본에서 혼밥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음식을 막 입에 넣으려던 그때, 옆 테이블의 노신사가 내게 말을 걸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오랜 세월 일본을 왕래했지만, 일본에서 상대방의 의향을 묻지도 않고 내게 말을 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완벽하고 우아한 이탈리아어를 구사하는 게 아닌가! 그가 갑자기 말을 하다 잠시 멈추었다. 아마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을 보고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고 일러주고 싶은데, 그 음식에 딱 맞는 이탈리아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보시게, 선생. 우리는 종족 번식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오." 뜬금없는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비록 서방에는 우리 문화가 공격적인 면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일본에는 범심론[범정신론이라고도 하며, 만물에는 각기 마음이 있다는 설]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요." 그는 정확히 '범심론'이라고 말했다. 나는 예의상 일본의 공격적인 이미지가 퇴색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며 그를 애써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는 난처해하는 내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 먹는 요리가 범심론과 무슨 관계가 있지?' 하는 표정 말이다. 그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만물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전통적으로 동물의 모든 부위를 소비하려 합니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말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선생님이 드시고 계신 그 음식은 물고기의 이리입니다. 저 역시도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지요. 다양한 해양 어종 수컷의 생식선에서 생산되지요."
"수컷 생식선이요? 그렇다면.. "
"음, 이탈리아어로는 뭐였더라?"
"정액입니다."
"바로, 그거예요."
그는 내가 시라코라는 음식을 먹으면서 생각날 듯했던 그 이탈리아 요리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참치 또는 방어의 정낭을 재료로 만든 시칠리아의 명물, '라튜메'였다. 생선의 난소를 이용한 보타르가에 맞먹는 요리다. 나는 새로 사귄 밥 친구에게 이탈리아에서도 물고기의 그 고귀한 부위를 먹는다고 알려주었다. 사실 여기에는 범신론보다 물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믿지만 말이다.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그는 은퇴한 외교관이었다. 재직 기간에 이탈리아에서 영사로 오래 복무했는데, 그때 이탈리아어를 배웠다고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즐거이 대화를 나눴다. 작별 인사를 나누기 전에 그 신사가 내게 물었다. "교수님, 우리 히바쿠주모쿠(피폭나무)를 방문하실 기회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나는 약간 뜸을 들이다 히바쿠주모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죄송하 다고 덧붙였다. 히바쿠주모쿠가 무엇이든 간에, 일본에서는 사과없이 무언가를 무시하듯 말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라고 배웠다. 영사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은 식물 연구를 하시는 분이 아닌가요! 그러니 히바쿠주모쿠를 꼭 만나셔야 합니다." 그는 콕 집어 '만나다'라는 표현을 썼다. 나는 그가 쓴 단어 '만나다'로 유추해볼 때, 히바쿠주모쿠는 어떤 식으로든 식물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뒤이은 그의 말에 내 예상은 이내 빗나갔다. "히바쿠주모쿠는 원자폭탄의 피해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우리의 생존자입니다.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몸소 보여주어 찬가의 대상이 되는 존재지요." 일본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피해 생존자들이 잔혹 행위를 겪은 산 증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그가 어떤 연유로 내가 원폭 피해 생존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을 거라고 단정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모호하던 히바쿠주모쿠의 존재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원자폭탄에 노출된 나무입니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존경심을 표하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히바쿠주모쿠를 사랑합니다. 그러니 교수님께서도 아셔야 합니다. 제안
하나 드려도 될까요? 히로시마는 이곳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제가 며칠 동행해 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시면 말씀하세요. 저는 아내와 사별 후 시간이 남아돈답니다." 나는 진심 어린 감사의 뜻을 표하며 그 신사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틀 후, 두 여행 동무는 각자 제법 그럴싸한 벤토를 지참하고 히로시마로 가기 위해 이른 아침 코쿠라역 앞에서 만났다. 불과 1시간 30분 만에 히로시마역에 도착했고 그로부터 10분 후에 나는 히바쿠주모쿠 앞에 서 있었다. 영사는 폭탄에서 생존한 세 그루의 나무를 '만날' 수 있는 멋진 정원으로 안내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곳 정원의 이름[히로시마시 나카구에 있는 회유식 정원 슛케이엔으로 추정됨]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일본 전통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 종류의 나무로 은행나무, 곰솔, 푸조나무였다. 은행나무는 도심 쪽으로 상당히 많이 휘어져 있었고 곰솔의 몸통에는 많은 상흔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했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나무여서 경외심은 커녕 아무 감흥도 없었다. 그보다 그 나무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애정이 생겼다고나 할까! 부부로 보이는 두 노인이 은행나무 앞에 휴대용 의자를 나란히 놓고 앉아 나무와 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산책하던 소년 하나가 멈춰 서더니 그 은행나무를 보고 와락 껴안고는 가던 길을 다시 갔다. 그 나 무들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나무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히바쿠주모쿠가 다른 나무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면 바로 나무마다 노란색 표찰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영사에게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물어보았다.
"번역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원자폭탄의 폭격을 맞은 피폭나무 앞에 서 있다.' 대충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식물의 종과 폭심지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적혀 있습니다." 영사는 손으로 강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폭발은 여기에서 정확히 1370미터 떨어진 곳, 강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저쪽에서 일어났어요."
그날 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무방비 상태인 일반인을 대상으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장소로 서서히 접근해 들어가면서 히로시마의 많은 히바쿠주모쿠를 만났다. 원자폭탄 폭심으로부터 1130미터 떨어진 곳의 호센보 사찰 정면에 서 있던 멋진 은행나무 한 그루를 기억한다. 그 나무는 절의 돌계단 밑에 U자형으로 에워싸여 있
었다. 그리고 반경 1120미터 거리의 히로시마 성곽 내부에 있는 녹나무, 반경 910미터 거리의 성 안에 있는 먼나무, 반경 890미터 떨어진 절 혼쿄지에서 자라는 놀라운 모란 등이 있었다.
원자폭탄 투하지에 가까워질수록 히바쿠주모쿠는 점점 줄어들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폭심지 지표면 온도는 섭씨 4천 도를 훌쩍 넘어, 어쩌면 섭씨 6천 도까지 치솟았을 것이다. 당시 마흔두 살이던 미츠노 오치 부인이 스미토모 은행 입구의 돌계단에 앉아 있다가 갑작스럽게 투하된 원폭에 증발하면서 남긴 검은 흔적인(말 그대로) 그림자를 영사와 함께 보러 가던 참이었다. 그 파괴력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애초에 버려야 했다. 나는 그 말을 영사에게 꺼냈다. 그러자 영사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믿음이 약한 자. 생명은 언제나 승리하는 법! 저를 따라오세요." 모퉁이를 돌자 작은 강 혼카와치가 나타났
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원폭 참사 당시 폭심지 인근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은 외부 조형물로,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으로 보존된 히로시마 원폭 돔이 강 저쪽 불과 40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우리 앞의 강변에는 땅속에서 살아남아 뿌리에서부터 다시 움을 틔운 히바쿠주모쿠계의 챔피언 수양버들이 가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수양버들의 표찰에는 폭심지에서 370미터 떨어져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날 기타큐슈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영사는 집 근처 지인이 하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일본에서 친구들 사이에 종종 있을 법한 술자리처럼 우리는 술도 거나하게 마셨다. 히로시마 히바쿠주모쿠와의 '만남'을 주제로 한 대화가 오가던 중,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영사는 히바쿠주모쿠에 대해 말할 때마다 '원폭을 겪은 나무'라고 표현했는데, 굳이 이렇게 풀어서 표현하는 게 어색하게 들렸다. 그것 말고는 이탈리아어를 자유자재로 완벽하게 구사 했으니까. 나는 결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말을 꺼냈다. "실례지만. 영사님. 히바쿠주모쿠를 굳이 '원폭을 겪은 나무'라고 하시는 이유가 뭐죠? '생존자'처럼 한 단어로 쓰는 게 간단하지 않을까요?"
영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친애하는 교수님, 이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주어진 모든 이름은 생존자에서 비롯됩니다. 일본어로 히바쿠샤는 말 그대로 '피폭자', 즉 '폭탄에 노출된 사람'입니다. 의미를 알 수 있는 이 단어를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용어는 생존자 대신에 선택되었습니 다. 생존자라는 용어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찬양하는 말이니, 역으로 비극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가 불쾌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연유로 히바쿠주모쿠 역시 히바쿠샤와 같은 방식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저는 모든 히바쿠샤가 이 단어 선택에 흡족해할 것이고 자신을 생존자라고 부르는 것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탈리아어로 '레두치[어민 분야의 베테랑. 전쟁에 참전했던 재향군인, 백전노장의 뜻]'라는 단어를 제안했다. 영사는 그전까지 그 단어를 몰랐다가 알고 나서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데요. 우리의 베테랑 동지들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나는 영사에게 댁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말했다. 영사는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지만, 여든이 넘은 고령인데다 얼큰하게 취했기 때문이었다. 극구 사양하던 그분은 끝내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짧은 산책을 하듯, 나는 그분을 댁에 모셔다
드렸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영사는 오랜 세월을 이탈리아에서 보내서인지 일본식이 아닌 이탈리아식 인사로 나를 안아주었다. 그분은 내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히바쿠주모쿠에 대해 이야기하고 널리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또 찾아와주세요." 그러고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히바쿠샤입 니다. 원폭은 제 가족 모두와 제가 알던 모든 사람을 제 곁에서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일곱 살이었어요. 제가 공부하던 초등학교 교실이 나무 가림막으로 보호받아서인지 저는 무사했습니다. 저와 4명의 친구만이 그 학교의 유일한 베테랑입니다. 120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말이지요."
그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마지막으로 내게 미소를 지으며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중에서
스테파노 만쿠소 지음
임희연 옮김
신혜우 감수
그리샤 피셔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