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ata hidetoshi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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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77년 1월22일 |
출생지 |
일본야마나시현 고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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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
175.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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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 |
O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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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 |
부모님,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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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미드필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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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교 |
니라사키 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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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벨마레히라츠카(J리그)-페루자-AS로마-파르마-볼로냐-피오렌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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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데뷔 |
95년,J리그 벨마레히라츠카 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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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데뷔전 |
95년3월25일 제프이치하라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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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매치데뷔전 |
96.5.21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기념시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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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매치 첫 득점 |
96.6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1차예선 마카오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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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사항 |
노련한 자리싸움, 넓은 시야와 수준높은 볼배급 |
- 월드컵 대표
- 아시아 최우수 선수 수상
- 98 fifa 1차 선정 세계 올스타
- 98~99 시즌 세리에A의 페루자에 3백30만달러에 이적.
- 이적 직후 유벤투스와 벌인 세리에A 데뷔전에서 2골을 기록해 파란을 일으킴.
- 이후 98/99시즌 동안 33회 출전해 10골을 기록.
- 99 '아시아 최우수 선수'를 또 다시 수상해 이 상을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선수가 됨.
- 99/00시즌 들어 AS로마 이적전까지 페루자에서 2골 기록.
- 2000년 1월, AS로마로 5년계약에 이적료 3백억리라(한화185억원)의 몸값으로 이적
- 2001년 AC파르마 4년계약체결, 이적료 1,850만 파운드(약 340억원)이적
이탈리아에서 활약중인 나카타는 일본 축구의 자랑이며 희망이다. 축구가 단지 좋아서 시작했던 초등학교 3학년생이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까지 |
초등학교 3 년부터 사커를 시작하고,중학교 3년때,U-15일본대표에 선발된다.니라사키 고등학교 입학후는 ,고교간의 경기,전국 고등학교 선수권,U-17이나 U-19의 수많은 국제 시합에서의 활약이 인정받고,J 리그 12 구단 중(당시),11 구단이 획득에 나섰다. 그리고,그것들의 제안의 중에서 「쇼난 벨마 레 히라쯔카」를 선택하고,졸업과 동시에 1995년 입단.당초로부터 ,신인 선수인 것 같다고 플레이로 평판을 부르었지만 ,올림픽 일본 대표에게 과거최 연소(19세)으로 선출된 것이고 ,또한 많은 사커 팬의 주목을 받게 됐다.
당시에 신인답지 않은 플레이로 팬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었으며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판를 받았다. 나카타의 존재가 차츰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바로 96 美아틀란트 올림픽이다. 일본축구계가 28년 만에 출장권을 획득한 올림픽에 19세라는 최연소로 선출된 것이었다. 대표팀 선배격인 마에조노, 죠 쇼지, 가와구치와 함께 팀일원이 되어 2승 1패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 일조를 했다.(아쉽게도 팀은 브라질을 꺽는 등 분전했으나 이대회 우승국 나이지리아에게 0-2로 패배하는 바람에 2회전에 진출하지 못한다)
올림픽 대표로는 ,수많은 격전을 거치고 28년만의 돌파를 정한 아시아 예선,역사적인 승리가 됐던 애틀란타 대회 전쟁 초기의 대립 브라질 싸움에도 출전.전황을 날카롭게 읽어내고,정확한 패스를 내는 플레이 스타일을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의 사커 팬에게 인상을 남겼다.
세계 무대로의 진출 |
98프랑스월드컵 직후 J리그 벨마레 히라쓰카에서 세리에A의 페루자로 이적했을 때 그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스타로 대성할 것을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재능은 있지만 신체의 선이 가늘어 몸싸움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평가.
그러나 데뷔전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2골을 터뜨리며 맹활약,강한 인상을 남겼다. 처음에는 플레이스타일이 에릭 칸토나를 닮았다고 해서 ‘동양의 칸토나’로 불렸으나 갈수록 자신의 개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팀의 플레이메이커로 자리잡았다. 결국 첫시즌 10골의 대성공.
97년 5월 한국과의 경기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했던 나카타는 세리에A 데뷔 1년만인 지난해 9월 도쿄에서 벌어진 한일올림픽대표팀 평가전에 출전했다. 28개월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달라진 그는 한국에 참패를 안겨줬다.
최근에는 AS로마가 페루자에게 3백억리라(2백억원)의 이적료에 러시아 대표를 비롯한 주전선수 2명을 얹어주는 조건으로 나카타의 이적을 제의했다. 마침내 대망의 2000년,AS로마에 거금에 트레이드된 나카타. 우리나라의 유망주들을 저뒤로 떨어뜨리면서 몸값 1600만불의 귀하신 몸으로 떠버렸다. 세계최강의 리그에서도 명문클럽들이 욕심을 낼 만큼 스타 대접을 받고있는 것이다.
나카타의 존재 가치,아시아의 자존심 |
그를 빼놓고 아시아선수의 세계화를 논할 수 없다. 꿈의 무대라는 이탈리아 세리에A(1부리그)에서 당당히 베스트멤버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21세기 아시아축구의 희망이자 모델이다.
세리에A 데뷔 2년째,나카타는 최근 이탈리아 유력 스포츠지인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가 발표한 세리에A 전 선수에 대한 평점에서 6.45를 마크,251명 가운데 10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했다. 나카타는 미드필드부문에서는 랭킹 3위를 차지,세계 최고의 선수들의 모이는 최고봉의 리그에서 최고 선수인 것이 증명됐다. 이 성적표는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가제타 델로 스포르트,토토 스포르트 등 전국 스포츠지 3사의 평균 평점으로 그 권위와 정확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나카타의 천재성은 같은 일본국가대표로서 올시즌 베네치아로 이적한 나나미의 성적과의 비교에서 잘 알 수 있다. 나나미의 점수는 5.78로 전체 198위,미드필드부문 75위다.
그렇다. 나카타는 해외로 뛰는 아시아선수 중 단연 선두주자다. 유럽에 진출한 아시아선수는 총 20명이나 되지만 그는 단연 돋보이는 태양이다. 정교한 패싱력과 넓은 시야,예리한 센터링과 킥력으로 무장한 그는 유럽의 거센 힘의 축구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플레이메이커다. 작은 체구의 핸디캡을 기술력으로 보기좋게 커버한 셈이다.
나카타의 맹활약은 일본인들,나아가 아시아선수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고,유럽에선 나카타로 인해 동양선수들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다.시드니올림픽 최종예선에선 일본을 간단하게 본선에 올려놓았다. 이탈리아 진출 후 기량이 몰라보게 일취월장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였다.
2002년의 나카타는 ? |
그가 한 인터뷰를 보면 그는 단지 축구가 아직까지는 재미있기 때문에 선수로 뛴다고
말했다. 축구가 재미없어지면, 회계사나 할 생각이라고도 한다.
아시아 최고의 미드필더!
개성있는 외모의 게임메이커로써의 천재적인 기질, 일본의 부동의 중원! 노련한 자리싸움, 넓은 시야와 수준높은 볼배급, 센스있는 플레이로 일본축구계의 큰별로 떠오른
나카타. 타고난 천재성에 일본이 엄청난 자원을 투자해서 생긴 선수!
한때 한국에서 나카타를 평가절하하는 이들이 많았었다. 축구에서 일본만큼은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구세대에서 신세대에게 까지 되물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 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일본 축구문화의 사각지대인 한국에서까지 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누구도 그가 뛰어난 미드필더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 봤던 나카타와 지금 현재의 나카타의 모습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어떻게 아시아의 한 선수가 저렇게 커갈수 있는지.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했던 한국도 이제는 일본에게 배워야 할때가 온 것인가? 경쟁자적인 한국의 축구가 그를 그토록 무섭게 바라보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새천년이 된 올해 그의 나이 고작 23살. 아직 젊기에 그에게는 화려한 과거보다 더 찬란하고 무궁무진한 미래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나카타의 운명적인 무대, 98 프랑스 월드컵 |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역시 월드컵 예선전이다. 날카로운 패싱과 넓은 시야로 게임메이커의 역활은 맡은 나는 때때로 터지는 중거리슛으로 골게터를 자임하고 나선다. 나카타의 플레이는 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일본 대표에 데뷔한 1997 년 5월의 대 한국전 이후는 ,팀의 중심 선수로서의 포지션을 확립.월드컵·아시아 예선에서 괴로운 싸움을 이기는 원동력의 한 사람이 됐다.특히,월드컵 첫 출전을 걸었던 이란 대표와의 최종전에서는 ,3 골의 전부에 얽히는 일을 보이고,일본 사커계 비원의 본전 첫 출전에 대단히 공헌했다.
월드컵·프랑스 대회는 ,예선 리그 3전 전패에 끝나고,결승 토너먼트 진출은 되지 않았지만,그 센스 있는 플레이는 해외의 사커 관계자나 스포츠 미디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유럽 각국의 클럽에서 이적을 바라는 제안이 잇따랐다.
[98프랑스월드컵 조예선 아르헨티나戰]
한일월드컵 또하나의 도전사 |
나카타에게 있어 2002년 월드컵은 나자신의 위치보다 日本축구의 현주소가 궁금했던 자리였기도했었다. 그의 목표는 이기는것 더욱멀리 가는것 , 기쁨을 맞보는것이였다. 일본의 홈팬들은 그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고 일본은 월드컵 도전사2회만에 16강진출이라는 그이전에 월드컵에서의 첫승을 맛보는 쾌거를 거두었다.
16강전이후 그는 말했다."처음 목표였던 대로 16강에 올라온 것만도 벌써 훌륭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 싸웠고 이기기를 진심으로 바랬기에 오늘 승리는 실망스럽다. 이제부터는 세계가 일본을 다른 눈으로 봐주었으면 한다. 물론 우리도 더욱 힘들여 노력해야 할것이다. 세네갈과 터키가 4강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처음이고 훌륭한 경기가 될 것이다.지금은 공동 개최국인 한국의 경기에 행운이 함께하길 바랄 뿐이다"
그는 앞으로도 日本축구 더나아가 세계축구사에 한페이지를 차분히써나갈것이다.
[레알마드리드 100주년 기념경기에 참가한 나카타,FIFA세계올스타]
축구를 즐길줄 아는 플레이어 |
현재는 일본의 미드필더는 오노라던가 나카무라같은 인재들이 많지만 그들보다도 더 전에 사령탑의 시대를 연 사나이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나카타 히데도시....
어린 나이에 월드컵 지역예선을 종횡무진하며 일본을 사상 첫 월드컵 본선에 올린 1등공신.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월드컵 아시아 와일드카드전에서 이란과의 경기에서 경기전체를 지배하는 카리스마 특히 내 뇌리에 아직도 박혀있는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아시아 최고의 GK이라는 평을 받던 이란의 아베드자데가 왼팔을 부상당하자 그는 집요하게 왼쪽으로 공을 보내 공격루트를 만들어갔다.난 그당시 고통스러워하던 아베드자데의 표정을 잊을수가 없다.그리고 연장 집요한 공격끝에 사령탑은 직접 중거리슛을 때렸다. 역시 골키퍼의 왼쪽이었다. 아베드자데는 간신히 쳐냈지만 거기서 달려들던것은 교체투입되었던 당시 일본최고의 준족이라던 FW오카노였다. 그리고 오카노는 가볍게 골을 성공시켰다.그런 긴박한 경기상황에서 여유로이 잔인하게 골키퍼의 약점을 집요하게 노리는 그의 모습은 전율스러웠다.
하지만 더 빛나는것은 그의 그런 플레이어로서의 재능보다는.....그의 축구인으로서의 의지와 도전이었다.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99년 일본에서 한국올대를 불러들여 4-1로 대승을 거두던 날... 물론 그 당시 일본 올대는 최강이었다. 히라세나 나카무라 이나모토 미야모토등 오늘날의 톱스타들이 대거 포진했었으니 허정무는 나카타에게 4명의 수비와 미드필더에게 나카타의 집중력과 스태미나를 고려 시간대별로 교대로 마크를 하도록 지시했다. 무려 4명과의 싸움이었지만 이미 그당시 월드컵과 세리에A를 경험한 그에게는 상대가 되지않았다. 그와중에 정말 잔인할 정도로 많은 반칙을 당했지만 그는 엄살도 피우지 않고 바로 일어나 웃으며 자신의 다리를 공격한 상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 장면을 보고 저것이야말로 정말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이구나란 생각을 했다. 그경기는 나카타가 무려 4명의 수비를 아래 까지 유인후 공격의 지휘를 나카타 코지와 나카무라순스케에게 양도하여 4-1대승을 거둔 경기였다. 실력과 매너 모든 면에서 승리할 수 있는 축구를 보여준 선수는 아마도 내 기억에선 나카타가 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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