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체험과 초기 사역을 술회하면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신적(神的) 기원 및 독자성」을 천명했다(갈 1:1-24). 다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들과 벌였던 최종 담판을 술회하면서, 그는 어떻게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로부터 자신의 사도직을 공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는가를 밝혔다(갈 2:1-10).
본 단락에서 우리는 그가 사도로서 가졌던 확신을 기술해 놓은 것을 본다. 여기서 바울은 베드로와의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사도 자격을 극적으로 변론하고 있다. 바울의 이러한 논증은 자신의 사도직이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탁월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베드로와 충돌한 바울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라디아서 2:11-14).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그리스도인이요, 사도였다. 그리고 둘 다 온 교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그러한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여기 보면, 그들 사이에 불일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1절의 ”면책하였노라”(opposed)는 말에 주목해 보도록 하자. 본래 그것은 ”반대 입장에 선다”(혹은 반대하다. to set oneself aga-inst)는 뜻으로서, 상대방이 먼저 어떤 공격을 해오면 그것을 방어하는 입장에 선다는 의미로 통상 사용된다.
바울의 눈에는 베드로가 하는 것이 은혜의 복음을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실상 베드로의 입장에서 그것은 바울이 생각했던 것처럼 은혜의 복음을 공격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다만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권위를 방어하려는 뜻으로 이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의 체험 이후(행 10장 참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일(친교를 나누는 일)을 시작했다. 갈라디아서 2장 12절의 ”먹다”(used to eat)라는 말은 동작이 계속되는 미완료 시제로 쓰여 있다. 베드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례적(異例的)으로 한 두 끼만 함께 식사한 것이 아니라, 계속 그런 습관을 가져 왔었다. 베드로는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막 7:19/ 행 10:9-18 참조).
과거의 유대인들은 결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대하지 않았었다.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구약의 규례들은 그 같은 것을 금해왔다. 또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제약들도 랍비들에 의해전수되어 역시 그 같은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이방인과 더불어 식사를 한 유대인은 자연스럽게 사악한 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금지 조항을 폐하셨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무너지고 교회는 하나가 되었으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없이 모두가 다 사랑의 애찬과 성찬(the love feast and communion)에 참예할 수 있게 되었다. 베드로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처음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이 하나(unity)가 되는 대열에 즉시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는 이제 그들 모두가 한 형제이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며 우리 주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는 경건한 사람이어서, 그러한 조화가 있는 곳에 결코 혼돈을 야기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야고보가 보내서 왔다면서 안디옥에 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했지만(12절), 사실은 유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할례자들이요, 율법 체계(legal system)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하려 했던 유대주의자들이었다. 지난 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에 의해 거절당한 바 있는 안건들을 제출한 자들이 바로 이 유대주의자들이었다(행 15:19 참조).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안디옥에 와서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 이러한 요구는 베드로를 어쩐지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그 할례주의자들의 주장이 잘못임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여 물러나 이방인 신자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그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된 것이다.
자기 자신의 행동 때문에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미술관에 가서 유명한 걸작을 보고 ”웬지 그림이 포근한 감이 없고 으시시하기만 한데”라고 했다 하자. 그 행동은 그 그림을 정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나 자신을 정죄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나의 언행은 예술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한 가지 더 들어 보자면, 어느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대교향곡을 듣고 난 후 그 연주장을 빠져나오면서, ”어휴, 무슨 음악이 이렇게 시끌벅적하담”이라고 말했다면, 또 다시 나는 그 곡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정죄하는 셈이 된다. 그것은, 나의 그러한 행동은 도무지 음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행동은 베드로 그 자신을 정죄하였다. 그는 아마도 왜 자신이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먹을 수 없는지에 대해 구구한 변명을 늘어 놓으며 그 자리를 물러났을 것이다.
12절의 ”물러가매”라는 말은 군사 훈련의 작전 용어로 쓰이는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미완료 시제로 쓰여 점차적인 후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그 자리를 물러날 때 단호히 물러가지 않고 엉거주춤 머뭇거리며 서서히 물러간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떠나”라는 말 역시 미완료형으로서, 베드로가 우물쭈물 그 자리를 피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베드로는 이방인들로부터의 초대에 응하는 것을 중지하고,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간 것이다.
베드로는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그는 유대주의자들과 반목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또한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동지들에게 자신에 관한 나쁜 얘기를 전하는 것도 꺼려했었다. 베드로는 분명 유대인 중에서의 명성과 인기를 유지하려는데 관심을 두었고, 그러한 동기에서 그 같은 행동을 보였던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의 그 같은 행동을 은혜의 복음에 관한 심각한 공격행위로 보았다. 그때 베드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음식을 먹는 일(아마도 식사뿐만 아니라 애찬을 나누는 일이나 성찬까지라도 포함하여)을 거절하므로써 즉시 유대주의자들이 계략에 빠져들었다. 베드로의 그 같은 거부에 주의 만찬이 포함됐다는 것은 사태를 훨씬 심각하게 만들었다(고전 10:17 참조).
오늘날도 극도의 성결(Super-holy)과 성별(super-separated)을 위해 독립적인 교제를 갖기 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그 옛날 베드로가 행했던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세상에 대해 왜곡된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베드로의 이탈 결과, 안디옥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베드로를 따라 위선적인 행위를 하게 되었다. 여기 13절의 「외식」(hypo-crisy)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감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식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한다면 ”...아래서 대답한다”는 뜻으로서, 이는 연극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연극 배우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배우들은 극중 인물을 나타내는 가면을 쓰고 연기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외식하는 자”라는 단어는 자신의 진실된 생각이나 감정을 감추는 자, 즉 사기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나바조차도 위선에 빠지게 되었다(13절 참조). 바나바의 이탈은 안디옥 교회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는 격이었다.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pastor) 중의 한 사람인 바나바도 교회가 반쪽으로 쪼개지는 일을 거들었다니! 이는 아름다운 사랑의 연합을 이룬 안디옥 교회에 발생한 지극히 슬프고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제 그들은 모두 율법주의의 외식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비록 위대한 복음의 사역자라 할지라도 심각한 실수를 범할 수가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결코 오류가 없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인간에게 무오성(無誤性)의 옷을 입혀 주는 행위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다. 우리는 베드로의 경우를 통해서,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즉, 「우리는 기꺼이 복음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은혜와 구원 및 자유의 진리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도 싸우고 있다. 14절에서 바울이 ”베드로와 그 나머지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한다”고 했을 때, 그는 그들이 ”똑바른 걸음으로” 걷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진리와 같은 방향에 머물지 않았다. 베드로는 그 진리를 알았고, 또한 그것을 믿었다. 이는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을 그의 행위로써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가 범한 이 외식의 문제를 그들 모두 앞에 내놓고 있다. 일찌기 어거스틴은 공적으로 저지른 잘못을 은밀히 바로잡는 것은 별로 이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의 견해는 옳다. 공적인 죄는 공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처리해야만 한다(마 18:17 / 딤전 5:20 참조). 교회의 신임성(credibility)은 행동이라는 토대 위에서 확립되어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성결과 경건과 순결에 대해서 설교하면서도 권징(혹은 치리 : discipline)에 대한 규정을 정해 놓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가볍게 여길 것이다. 바울은 이 경우에 있어 교회를 위한 고무적인 본보기를 확립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는 한 사람의 외식의 가면을 공공연하게 벗겨 낸 것이다.
14절에서 사실상 바울은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분명 유대인의 율법을 버리고 이방인처럼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이제 갑자기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은듯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하는 까닭이 뭐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