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최초의 대학 족구팀, 한세대학교 족구단이 창단되었다. 이들의 창단은 단순한 족구단의 창단이 아니었다. 생활체육에 불과한 우리 족구에서 그것을 생업으로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한세대학교의 창단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는 막연하지만 작게나마 쏘아 올린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선수들에게 '족구만 잘해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와 졸업생들이 여러 기업으로 취업에 성공하는 시스템이 정착만 된다면 이를 토대로 엘리트 종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시스템이 서서히 정착되어 가는 듯 했었다. 졸업생 대부분이 각각 기업체에 순조롭게 취업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는 흐지부지해 지기 시작했다. 기업체 입장에서 '족구단'은 그저 단순한 '홍보'의 목적이었을 뿐이었고, 선수들은 그야말로 '말단직원'일 뿐이었다. 졸업 후 삼성전자에 취업한 이광재는 예전에 회사에 이런 요청을 했다고 한다.
'우리 족구 선수들도 삼성전자의 홍보에 공헌을 하니 우리에게도 인센티브와 연습시간을 좀 주십시오.'
하지만 인사 담당자의 반응은 싸늘했다.
'우리 삼성전자의 광고모델은 김연아 선수이니 족구선수들은 그냥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
우리가 생각했던 그 이상은 단순한 이상일 뿐이었고,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2017시즌을 끝으로 한세대학교 족구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그 곳 출신 선수들이 전국적으로 흩어져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공식적인 대회에서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이름을 볼 수 없다.
지금까지 칼럼을 쓰면서 이렇게 쓰기 싫어 머뭇거린 적은 처음이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부디 이 칼럼에서 전하는 내용이 잘못된 내용이기를 바라면서 쓴 것도 처음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언젠가 이 글에 대한 정정글을 쓰며 기뻐하고 있을 내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한세대학교 족구단이 다시금 대회에 나올 일도 없을 것이고, 이전과 같은 활동을 할 일도 없다. 이제 우리는 이들을 응원했던 누군가에겐 좋은 추억들, 또 다른 팀들을 응원했었던 누군가에겐 그다지 좋지 못했던 추억들을 선사했던 한세대학교 족구단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이대로 얌전히 보낼 수는 없다. 이들이 지금까지 족구에 공헌한 업적이 얼마인가. 그러니 누군가는 이들의 행적과 업적을 글로라도 남겨 한세대학교 족구단을 알지 못 할 후배 족구인들에게 전해야만 한다. 부족한 줄 잘 알고 이들의 책 한 권으로 써도 모자랄 그 동안의 행적들을 보잘 것 없는 칼럼 하나에 모두 담을 수는 없겠지만 부디 우리 후배 족구인들에게 '우리 시대에는 한세대학교 족구단이 있었다'는 사실이라도 알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칼럼을 쓴다.
1. 최초의 대학 족구단 창단
2004학년도 대학입시, 당시 한세대학교는 파격적으로 '족구특기생'을 신입생으로 선발하겠다고 발표했다. 목적은 하나였다. 기독교 단체인 재단의 한세대학교가 세계 각지에 선교를 하기 위함이었다. 과거 다른 여러 교회단체에서 태권도를 통해 세계 각지에 선교를 했었던 것처럼 한세대학교는 조금은 다르게 대한민국 고유의 전통 구기종목인 '족구'를 통해 선교를 하려는 목적으로 족구단을 창단한 것이다.
선수단은 2003년 겨울에 벌어진 '제8회 전국 족구연합회장기' 청소년 부서에서 우승, 준우승을 한 팀의 선수들 중 지원자들로 꾸리기로 했다. 그 대회의 결승에 오른 두 팀은 '평창진부고'와 '평창고'였다. 진부고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이광재, 이승호, 권혁진이 있었고, 평창고에는 강구민, 강성준이 있었다. 경기에서는 진부고가 승리를 거두었고, 앞서 언급한 5명의 멤버, 이광재, 이승호, 권혁진, 강구민, 강성준이 당시 강원도 족구연합회 강승호 사무장의 인솔 하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스포츠선교학과에 입학하여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시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단 창단 멤버 구성원이 공격수 2명(이광재, 강구민), 세터 2명(이승호, 강성준), 수비수 1명(권혁진)으로 구성되어 한 팀이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이광재, 강구민이 공격과 좌수비를 번갈아가면서 맡았고, 이광재가 공격을 할 때는 이승호가, 강구민이 공격을 할 때는 강성준이 각각 번갈아 가며 세터를 맡았다. 그런데 그나마도 강구민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1학기도 마치기 전 자퇴를 했고, 자신의 전담 공격수가 없는 상황이 된 강성준은 곧바로 군 입대를 하였다. 그리하여 남은 선수는 3명, 그래서 결국은 강승호 감독이 감독 겸 선수로 경기를 해야 했었다. 그렇게 첫 해를 마치고 이듬해, 박수훈, 김동휘가 입학하며 제대로 된 선수 구성이 가능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보였지만 속사정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었고, 그 시작은 어느 팀이나 마찬가지로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후 '최초의 대학 족구팀'이라는 특이한(?) 타이틀 덕분에 방송에도 출연했고, 족구단은 물론 덩달아 학교까지 홍보가 되며 교내에서 족구단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학교에서는 유니폼, 대회 참가비는 물론이고 교수들의 배려 하에 훈련 시간을 할애받기가 더욱 쉬워졌으며, 훈련 끝나고 먹는 간식, 마사지까지 많은 지원을 받았다. 게다가 학교 근처 33평 아파트를 하나 받아 선수들끼리 생활하기도 했었다. 이광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까지 운동을 해 오면서 그렇게 행복했던 시간들은 없었습니다. 정말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지원 속에 어린 선수들의 기량은 빠르게 향상되어 갔다.
2. 다크호스에서 최강자로
이들이 등장했었던 2000년대 중반은 족구가 지금보다 더욱 활성화 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지금처럼 한두 팀 정도가 절대강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최강이었던 현대자동차를 필두로 삼성전자, GM대우, It's, 현대파워텍, 이천아스텍, 신창전기 등 여러 팀들이 정상권의 자리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런 와중에 한세대학교의 등장은 그 다툼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런 강자들과의 대결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대회를 거듭할 때마다 눈에 보일 정도의 성장을 거듭했던 그들은 어느덧 강력한 다크호스로 부상했고, 그들을 일컬어 이렇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저들이 족구계를 지배할 것이다.'
그 머지않은 날의 시작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창단 1년 뒤였던 '2005년 영월동강배'였다. 이 대회에서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한 이후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타이틀을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영원할 것만 같았던 현대자동차의 시대는 이들의 정상등극과 함께 막을 내렸고, 이들은 전국족구연합회 랭킹 1위까지 차지했다.
이후의 상황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다. 한세대학교는 항상 정상의 자리에 있었다. 대학생 신분이다 보니 선수들의 군 입대, 졸업 등으로 선수단 구성이 바뀔 때 마다 잠깐의 부진을 겪는 시기도 있었지만 새로운 팀의 조직력이 정상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여지없이 최강의 자리를 가져가곤 했었다. 이후 왕좌의 자리는 이천시청, 현대파워텍이 차례로 가져갔는데 이들의 최대 라이벌은 단연 한세대학교였다.
예전에 나와 인터뷰를 했었던 강만규, 장한빈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팀'으로 한세대학교를 공통적으로 꼽았었다. 참고로 강만규와 장한빈의 나이차이는 9살, 이들이 언급했던 한세대학교는 각각의 멤버가 완전히 다른 팀이었고, 최소 5년이상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랜 시간동안 최강의 자리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더욱 절감할 것이다. 그만큼 항상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강자였다. 그리고 이후 창단한 대학 족구팀들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고, 청소년 선수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3. 해체 통보, 그리고 역사 속으로...
2011년, 한세대학교 족구단에 청천벽력과 같은 통보가 내려왔다. 2012학년도 대학입시 전형부터 더 이상 족구 특기생을 선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교육부에서 나온 대학 감사에서 체육학부가 없는 학교에서 운동선수를 특기생으로 선발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물론 기존의 선수들을 고려해 일반 학생들과 동일한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 중 지원자들에게 기존의 선수들과 똑같은 지원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족구를 하는 청소년 선수들은 학업을 소홀히 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한세대학교는 수도권에 위치한 대학이다 보니 결코 낮은 수준의 학교가 아니었다. 결국 이는 대놓고 해체통보를 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의 해체통보와 다를바가 없었다.
또한 대학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취업률인데, 족구 선수들의 취업은 그 취업률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도 해체에 중대한 사유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은 12학번 이태호의 입학 때문이었다. 학창시절 학업 성적도 좋았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과 동일한 전형으로 합격한 첫 번째 사례였다. 사실 이태호의 입학이 아니었으면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마지막 공격수는 백넘버 10번 손연석이 되었을 것이고, 그의 졸업과 함께 한세대학교 족구단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태호의 입학으로 3년여의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이후가 문제였다.(참고. 한세대학교 족구단 선수들은 전통적으로 3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한다.) 2014시즌을 마치고 이태호의 군 입대와 신진이의 졸업으로 선수가 박성호, 박정철 단 두 명만이 남은 것이다. 그래서 이 당시 이광재는 이들을 자신의 팀인 조이킥스포츠 팀으로 합류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임종흔 감독은 '그래도 명문인데, 성호랑 정철이가 졸업할 때까지 명맥은 이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만류했고, 결국 이광재가 대학원으로 입학하며 어렵사리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 속에 명맥을 간신히 이어오기는 했지만 2017시즌을 끝으로 마지막 선수 이태호의 졸업으로 이제 한세대학교 족구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4.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업적
2004년 창단 후, 약 13년의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그 시간 동안 한세대학교 족구단은 많은 업적 또한 남겼다.
일단 많은 청소년 선수들을 입학시켰다. 이는 족구를 하고 있었던 청소년 선수들에게 '족구만 잘 해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더욱 족구에 매진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해주었고, 다른 여러 대학 족구단이 창단될 수 있었던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둘째, 여러 초, 중, 고등학교를 방문해 족구를 전파하였다. 지금이야 족구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에게는 '족구도 스포츠냐'는 인식이 많이 깔려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시범 경기등을 통해 '이것이 족구다'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이들에게 족구를 가르치며 족구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도 이러한 시도가 많이 있기는 했지만 이처럼 체계적으로 청소년들에게 족구를 알리는 일은 한세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 지도자 강습 및 족구 기술 강습등을 통해 정확한 족구 이론을 정립해 많은 동호인들에게 알렸다. 생활체육이었던 족구는 기술에 대해 연습방법등이 정확히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것이 따로 없어서 그저 보이는대로 따라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신체조건에 맞지 않는 잘못된 습관들이 몸에 배어 근육에 무리가 따르는 등 큰 부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세대학교 족구단에서는 정확한 족구 이론을 정립해 여러 강습 활동등을 통해 이를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배출해 내었다. 여전히 최강부에는 많은 한세대학교 족구단 출신 선수들이 활동하고 있고, 실력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다.
이 외에도 많은 업적들이 있으나 위에 언급한 내용들 만으로도 한세대학교 족구단은 우리 족구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고, 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이러한 업적들을 뒤로 한 채, 씁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나는 우리 족구의 발전에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청소년 족구를 좀 더 활성화 시킬 수 있었고, 졸업생들이 기업에 취업하는 순환 시스템이 정착되어 훗날 우리 족구가 엘리트 스포츠가 되려고 할 때, 그 엘리트화를 가속화 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느 대학이 되었든간에 '제2의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탄생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쉽지 않았었던 시작부터 화려했던 영광과 좌절이 교차했던 시간들,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명맥을 이어가려 노력했던 순간들, 그리고 해체의 순간까지.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그 동안의 시간들은 우리 족구가 처한 상황들과 함께 묘하게 오버랩되며 우리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래도 훗날 그들과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보다는 지금이라도 마지막 인사라도 한 번 하는게 좋지 않을까. 아쉬움과 뭉클한 마음을 뒤로 하며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해본다.
그동안 우리에게 많은 추억들 선사해 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그대들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안녕! 한세대학교 족구단!
*한세대학교 족구단 역대 선수들
백넘버 | 이름 | 포지션 | 기수(학번) | 현 소속팀 | 비고 |
1 | 강승호 | 공격수 | 초대 감독 | 강승호족구아카데미 원장 | |
2 | 이광재 | 공격수 | 1기(04) | 조이킥스포츠 대표 | |
3 | 이승호 | 세터 | 삼성하우젠 | ||
4 | 권혁진 | 수비 | 삼성하우젠 | 초대 주장 | |
5 | 강성준 | 세터 | 삼성하우젠 | ||
6 | 김동휘 | 수비 | 2기(05) | 현대파워텍(조이킥스포츠) | |
7 | 박수훈 | 공격 | 여주시민족구단 | ||
8 | 양원주 | 공격 | 3기(06) | ||
9 | 임상욱 | 세터 | 하이트진로음료 | ||
10 | 손연석 | 공격 | 4기(07) | 조이킥스포츠 | |
11 | 김도현 | 수비 | 삼성하우젠 | ||
12 | 정인재 | 수비 | 하이트진로음료 | ||
13 | 정상호 | 수비(세터) | 5기(08) | 현대자동차 | |
14 | 중간에 그만 둔 선수 | ||||
15 | 최성욱 | 세터 | 족구오빠 강사 | ||
16 | 6기(09) | 중간에 그만 둔 선수 | |||
17 | 신진이 | 수비 | 하이트진로음료 | ||
18 | 7기(10) | 중간에 그만 둔 선수 | |||
19 | 박성호 | 수비 | 여주시민족구단 | ||
20 | 박정철 | 세터 | ING생명 | ||
21 | 김태환 | 수비 | 8기(11) | 고덕족구단 | |
22 | 심강국 | 수비 | 천안 SKC | ||
23 | 이태호 | 공격 | 9기(12) | 족구강사 |
*나에게 한새대학교는....
이광재: 한세대학교는 제게 출발점이었습니다. 20살이었던 저에게 족구조차 생소한데, 족구 특기생? 족구 선수? 이게 다 뭐였는지 얼떨떨했던 것 같습니다. 진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레임과 즐거움, 결과에 따른 허탈감, 상실감, 기쁨, 환희 등등 모든 감정을 느꼈던 곳이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13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원서 접수부터 시작해 다음 날 실기테스트 등의 모든 일정들이 생각납니다. 정말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면 '명맥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을까'하면서 후회가 많이 됩니다.
이승호: 누구도 시작하지 않았던 최초의 대학 족구단의 일원으로 수많은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최초라는 타이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힘든만큼 행복했습니다. 우리 삶의 밑거름이 되어준 한세대학교 족구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이제 역사 속에 스며들었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권혁진: 한세대학교에서의 추억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웠고, 그 곳은 제가 커다란 꿈을 키워왔던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현재의 저를 있게 해준 곳이었고, 많은 것을 이루게 해주었습니다. 힘든 시절, 동고동락한 친구들과 후배들을 생각하면 평생 잊지 못 할 추억이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제 역사속으로 그리고 추억속에 기억될 한세대학교 족구단이지만 많은 분들이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후배들에게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죄책감도 있고, 아쉬움 또한 많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운동하는 후배들을 보면 족구에 대한 미래가 밝다는 생각도 듭니다. 끝으로 한세대학교 족구단이 많은 분들께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고, 그 동안 사랑해 주셨던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박수훈: 한세대학교 시절은 저에게 스승이자 인생의 길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력과 땀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큰 교훈을 얻었으며, 지금도 어떠한 일이 닥쳐도 묵묵히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을 얻은 것 같습니다. 또한 일우회라는 가족을 얻었습니다. 정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시절일 겁니다.
김동휘: 한세대학교 족구단은 저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멋진 선후배들과 함께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땀흘리며 최고가 되기위해 노력했었습니다. 정말 후회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임상욱: 한세대학교 족구단은 제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였습니다. 처음으로 부모님 품을 벗어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설레임과 함께 처음 도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군포로 올라왔었죠. 츤데레 감독님과 친형처럼 대해주었던 선배들과의 첫만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함께 땀 흘리고, 코트에서 뒹구르며 많은 추억을 쌓았던 그 곳은 제게는 제2의 고향입니다. 한세대학교 족구단이 있었기에 저의 20대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고, 일우회라는 가족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훌쩍 지나도 먼 훗날 그 시간들은 평생을 곱씹을 맛있는 안주와 같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박성호: 한세대학교 족구단은 제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뚜렷한 목표가 없었던 저의 학창시절, 한세대 선배님들을 보며 저의 목표가 생겼고, 저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배님들 동기, 후배들은 단순한 동문들이 아닌 형제와도 같은 이들입니다. 2015년 정철이랑 저만 남아 명맥조차도 이어가지 못할 것 같았던 상황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게 하기 위해 이광재 선배님은 오직 저희가 선수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게 해주시려고 대학원에 입학하셔서 저희들이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게 해 주셨고, 제가 졸업하고 취업이 되지 않아 족구를 포기하려고 했을때는 박수훈 선배님께서 좋은 제안해주셔서 취업과 함께 여주시민 족구단에서 이렇게 계속 족구를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땀 흘리고 엄청 뒹구르며 꿈을 꾸었던 체육관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이 곳에서의 시간들 정말 잊지 못 할 것입니다.
김태환: 한세대학교 족구단은 제 족구인생에 있어서 절대 잊을 수 없고, 족구단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항상 실력보다는 바른 인성과 예의 범절을 먼저 가르쳐주었고, 그것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족구로 대학도 갈 수 있구나' 하고 신기해 할때도 많았고, 그로인해 무시당한적도 있었지만 저는 항상 족구 선수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족구단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족구라는 운동을 하도 있다는 사실을 단 한번도 후회하거나 부끄러워 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더이상 신입생을 받지 못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족구를 더욱 발전시키기위해 노력한다면 후배들을 다시금 받을 수 있는 그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많은 대학 족구단이 창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저는 한세대학교 족구단에서 족구를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고,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호: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사실상 해체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힘든 시기에 제 고집으로 입학했다는 사실에 마음고생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다만 한세대학교 입학을 꿈꾸며 운동했던 많은 후배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고, 꿈도 심어줄 수 없다는 현실이 진심으로 미안하고 안타깝습니다. 또 감독님 이하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제자 그리고 후배여서 항상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한세대학교 마크를 가슴에 달고 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한세대학교 족구단을 사랑해 주셨던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