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창시절, 공부는 정말 못했지만 단 한 번도 꼴찌를 한 적은 없었다. 한 반에 있었던 운동부 학생들 덕분(?)이었다. 흔히들 '운동선수들은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한다. 학창시절부터 줄곧 학업은 뒤로한 채 운동만 했었던 우리의 현실을 돌아봤을 때 이 말을 부인할 수 없어 정말 아쉽다. 그런데 더욱 아쉬운 것은 이러한 현실이 우리 족구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다수의 청소년 선수들이 학업을 뒤로 한 채 족구에 이른바 '올인'하고 있다.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공부를 하고 싶지도 않고, 한다고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운동을 시작하려니 이미 늦었고, 그나마 족구는 지금이라도 시작해도 늦지 않았고, 잘 만 하면 4년제 대학 입학도 가능하고 최강부 선수가 되면 대기업에도 취업 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무책임한 생각이다. 일단 족구 특기생을 뽑는 대학은 현재 '세경대학교' 단 한 군데 밖에 없는데다가 족구로 인한 취업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설사 족구를 잘 해 대기업에 취업을 한다고 해도 엘리트 종목의 선수들처럼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 직원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만 족구를 해야한다. 족구를 위한 시간 할애는 없다. 남는 시간에 알아서 연습을 해야 한다. 심지어 대회 전 날 야간 근무에도 열외는 없다. 실제로 지금은 은퇴한 현대파워텍의 공격수 강만규는 야간 근무를 한 이후 새벽에 이동하는 차 안에서 쪽잠을 잔 후 대회를 뛰는 날이 허다했다. 게다가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성적을 내지 못하면 갖은 질타를 받는다. 이렇듯 최강부 선수들의 실상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그리고 그나마도 이는 최강부 입성에 성공한 소수의 선수들의 이야기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학창시절 족구만 하다가 그만 둔 선수들의 대부분이 사회에 나와 자리를 잡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나는 예전에 '족구도 1등, 공부도 1등'이라는 칼럼을 통해 청소년 선수들이 족구 뿐만이 아닌 공부, 즉 학업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나의 생각은 변함없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이 학창시절 성적도 좋지 않았고, 족구도 정말 못하는 내가 청소년 선수들에게 이러한 말을 해준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나이 먹은 꼰대의 잔소리라고 할 지도 모른다. ☞클릭 '족구도 1등, 공부도 1등' 칼럼 보기
그래서 이번 칼럼에서는 이런 청소년 선수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최강부 선수가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주인공은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는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마지막 선수 이태호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청소년 선수들이 현실을 깨닫고 미래를 준비하기를 바라며 이 칼럼을 쓴다.
1. 그저 족구가 좋았던 아이
1993년 서울시 강서구에서 태어난 이태호는 초등학교 5,6학년 시절, 동네 아파트 주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족구 동호회에 가입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족구를 처음으로 접했다. 이때는 그저 따라가 구경하는 정도였고, 실제로 족구화를 구입해 공을 차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부터였다. 사실 어린 학생에게 동호회에서 족구를 할 기회는 많이 주어지지 않았고, 족구장에 나오면 공을 주우러 다니는 시간이 훨씬 많았지만 그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날이 춥거나 덥거나 주말에 학원 수업이 없으면 항상 족구장으로 나가고는 했었다.
이태호가 족구를 처음 시작했던 시기에는 SBS족구최강전 등 몇 개의 스포츠 채널에서 족구가 중계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방송들을 보며 족구에 푹 빠졌고, 강만규, 이광재를 보며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언젠가는 저 무대에 꼭 서보고 싶다.'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족구 선수의 꿈을 꾼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학교 체육 선생이 되어 학생들에게 운동을 가르치는 것을 꿈꾸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굳이 또래 친구들과 다른 점은 친구들과 PC방에 놀러가 게임을 할 때는 족구카페등을 통해 족구 동영상을 시청했고, 함께 축구하러 가자고 할때는 '족구를 하러 가야한다'며 빠지는 (또래 친구들이 볼 때)조금은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학생이었다.
학교 성적은 준수했다. 서울 소재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약 40명 정도 되는 반에서 항상 10등 안에 들 정도의 성적이었다. 이는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체육학과에 충분히 합격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이었다. 그러다보니 학교 내에서도 선생님들 사이에서 '예체능계의 희망'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2. 족구 선수의 길을 택하다.
족구가 너무 좋았던 이태호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부모님에게 '족구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한세대학교의 1기 멤버였던 이광재, 권혁진, 이승호가 졸업을 하면서 모두 '삼성전자'에 입사해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당연히 반대를 했다. 학교 성적이 준수했던 아들이 엘리트 종목도 아닌 족구 선수가 되겠다고 하는데 어느 부모가 이를 말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이태호는 이렇게 회상했다.
"정말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나이에 족구가 너무 좋았고, 그 늪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 당시에 한세대학교 1기 선배님들이 대기업에 취직하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께 한세대학교만 들어가면 장학금 혜택과 함께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고집 부리듯이 설득을 했습니다. 정말 당시에는 한세대학교에 입학만 하면 무조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을 했거든요."
하지만 이를 곱게 보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태호의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과거에 학교 선생이었다. 그래서 집안 자체가 학구열이 강해 그 곳에서 공 차는 선수가 나온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나마 족구 동호인이었던 아버지는 그의 결정을 어느 정도 수긍해 주며 '그럼 한 번 해봐라'라고 조금은 쉽게(?) 허락해 주었지만 문제는 어머니였다. 이런 아들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고, 이 때문에 부부싸움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논쟁의 핵심은 '당신이 족구를 하니까 쟤가 그걸 보고 저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속된 설득과 고집을 부리는 아들에게 어머니 역시 결국은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바로 내신 성적 유지였다. 내신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족구를 그만 두기로 약속한 것이다.
3. 한세대학교, 족구특기생 전형 폐지
이후 이태호는 족구에 더욱 매진해야 했다. 한세대학교 족구 특기생이 되기 위해서는 동갑내기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했기 때문이다. '서울시 강서구 내에서 최고의 공격수'라는 타이틀로는 한세대학교에 입학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이태호의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당시 서울시 최강의 팀 중 하나였던 '경동나비엔 족구단'을 찾아가 입단을 부탁했다. 이미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던 만큼 경동나비엔의 김종원 단장은 이태호의 입단을 반겼고, 당시 팀의 공격수였던 박동형의 백업 멤버로 뛰기 시작했다.
물론 내신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공부를 놓지 않았다.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다보니 더욱 힘들었다.
"시험이 있으면 하루 이틀 전에 공부를 시작해 새벽 3, 4시까지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았습니다. 제가 벼락치기에 능한 스타일이다 보니 어떻게든 핵심만 체크해 달달 외워서 시험을 보곤 했습니다. 다행히 성적은 족구를 하기 이전과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고등학생 시절, 어느 정도 수준의 선수였을까? 사실 그에 대한 당시의 기록과 영상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그가 어떤 선수였는지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주관적으로 내가 평가를 내리겠다. 2011년 벌어졌던 '제1회 레전드배 족구대회'에서 당시 한강족구단의 공격수로 나선 나와 예선 두 번째 경기에서 맞붙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태호는 기억도 못 한다. 당시 경동나비엔과 한 조가 된 것을 안 나는 공격수 박동형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우리와의 경기에서 1세트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선수가 공격수로 나섰다. 당시 이태호를 몰랐던 우리 팀의 분위기는 이랬다. '그래도 박동형이 아니니 해 볼만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 기억에 당시 이태호는 안축이면 안축, 발등이면 발등 그야말로 기본기가 아주 충실하게 잡혀 있었다. 안축의 파워는 바운드 이후의 종속이 강했고, 발등으로 A,B,C킥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물론 성인들과 같은 완숙미는 아직 갖추지 못 한 시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 팀을 이기는 것은 충분했다. 정확한 스코어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처참한 스코어였던 것은 확실하다. 당시 그와 경기가 끝나고 생각했다. '저거 정말 크게 될 선수네.'
이후에도 이태호는 경동나비엔에서 경험을 계속해서 쌓으며 한세대학교 입단 테스트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통보가 내려왔다. 한세대학교에서 이태호가 입학 할 2012학년도 대학입시부터 더이상 족구특기생을 선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것이 수능을 100일도 채 남기지 않았던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이태호를 비롯한 한세대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던 선수들이 느꼈던 당혹감과 상실감은 정말 컸다.
4. 한세대학교 NO. 23
그래도 이태호에게는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바로 어머니와의 약속이었던 '내신 성적 유지'였다. 사실 이태호는 한세대학교에 불합격하면 재수와 함께 족구 선수로서의 꿈을 접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그 해 대학입시 전형에서 한세대학교 딱 한 군데만 지원했다.
"아마도 어머니는 제가 족구를 하루 빨리 포기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그런 조건을 내 걸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한세대학교의 유니폼을 입기를 너무나도 간절히 바랬습니다. 이런 저에게 족구특기생 전형 폐지 소식은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사실 내신 성적 유지라는 목표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능 시험은 전혀 준비를 안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행히 저의 성적이 한세대학교에 간신히 합격할만한 성적이었습니다. 어차피 족구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점수가 가장 낮은 학과를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족구가 하고 싶어 했었던 공부 때문에 한세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세대학교가 어느 정도 수준의 대학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나 조이킥스포츠의 이광재 대표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세대학교는 결코 명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도권에 위치한 대학이기 때문에 커트라인이 낮지 않습니다. 그러니 학업을 뒤로한 채 운동만 해서는 절대 합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이태호는 선배들과는 다르게 일반 학생들과 동일한 전형으로 '수시모집'으로 한세대학교 경영학부에 합격했고, 자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한세대학교의 스물 세 번째 선수가 되었다. 이후 수많은 대회 우승으로 한세대학교는 최강부의 강호로서의 면모를 계속 이어나갔고, 이태호의 실력은 날로 향상되어 최강부 정상급 공격수로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의 학교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훈련은 힘들기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고, 막내 였던 그는 항상 훈련 끝나고 뒷 정리와 잡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스포츠 선교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다른 선배들은 오전 수업만 받고 훈련을 하는데 지장이 없었지만 혼자만 다른 학과였던 이태호는 오후 수업을 받지 않아 교수들로 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결국 그는 용기를 내어 강승호 감독을 찾아가 말했다. '오후 수업까지 모두 받고 훈련을 했으면 합니다.' 불호령을 각오하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강승호 감독은 의외로 쉽게 허락을 했다. 아니 오히려 기특한 생각이라며 격려하기 까지 했다.
감독의 허락까지 받은 이태호는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운동을 하는 선수들은 공부를 못 한다.'라는 편견이 싫어 훈련이 끝난 이후 빨래등의 잡일이 끝나는 밤 11시, 12시부터 새벽까지 공부를 하며 시험을 보고는 했다. 그런 그의 노력을 가상히 여긴 몇몇 교수들은 노력 이상의 점수를 주기도 했고, 이후 시험기간에는 선배들이 조금 이른 시간에 훈련을 마치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배려해주기도 했다. 힘들었지만 '중간만 가자'라는 생각으로 펜을 아예 놓지 않은 그는 3점대 중반의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현재 이태호는 서울 집에 머물며 평일에는 '족구 강습' 활동을 하고 있고, 주말이면 성남중학교 학생들에게 방과 후 교실 활동으로 족구를 가르치고 있다. 앞으로 체육 공부를 좀 더 하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으며, 대학원과 지금의 족구강습을 병행할 수 있는 일반적인 회사로의 취업을 알아보고 있다. 어린 시절 체육 교사를 꿈꾸었던 이태호는 지금 동호인, 학생들에게 족구를 가르치는 강습 시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내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세대학교에서 2012학년도 부터 족구특기생 전형을 폐지한다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자 그 전형을 준비하고 있었던 다른 또래의 선수들은 모두 입학을 포기해야 했지만 이태호는 유일하게 '수시모집'으로 합격했다. 그동안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게 돌발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하며 다른 이들은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던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최강부 선수로 뛰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 회사로의 취업을 준비하며 제2의 인생을 순조롭게 준비하고 있다. 그가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태호: 저 역시 '공부해라'라는 소리가 가장 듣기 싫습니다. 그러니 청소년 선수들에게 꼭 공부를 하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습니다. 족구는 엘리트 종목이 아닙니다. 그리고 족구로서 취업하는 것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힘듭니다.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무언가를 해 놓고 족구를 하는 것을 권합니다. 그 무언가라는 것은 자격증이라든가 사회에서 인정받는 기술 능력등을 말합니다. 족구는 어디까지나 특이한 장기입니다. 그것으로는 취업하기도 힘들고, 인정받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꼭 자신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장기를 만들기를 당부합니다.
청소년 선수들이 이태호의 이 말을 꼭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다른 최강부 선수들의 충고와 함께 이 칼럼을 마치겠다.
이광재(조이킥스포츠): 한세대학교 시절, 군대를 포함한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가장 후회하는 것은 전문지식을 쌓고 자격증을 취득하는데 너무 소홀히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동안 자격증이라도 몇 개 따 놓았다면 졸업 후 취업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말이죠.
임상욱(하이트진로음료): 청소년 선수들은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족구로 취업을 하는 문은 점점 좁아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어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저도 후배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해 준적은 있지만 족구 열심히 하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장한빈(일등코리아): 지금 청소년 선수들의 꿈을 깨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먼저 그 길을 걸어온 선배로서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먼저 본인이 '정말 족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하기 싫어서 족구를 하는 것인지?' 꼭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 후자에 언급한 '지금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공부'가 될 수도 있고요, 자신이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는 기술 또는 다른 운동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러니 그 두 가지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요, 제가 청소년 시절 족구를 함께 했었던 선수들 중 지금까지도 계속 족구를 하고 있는 선수들이 몇 명 없어요. 그만 둔 선수들이 태반이고, 그 선수들 중 지금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선수들이 정말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학생 신분인 만큼 주(主)는 반드시 '공부'가 되어야 해요. 족구는 어디까지나 '부(副)'입니다. 지금 족구는 아직 생활체육입니다. 그러다보니 족구 선수로서 최고의 자리는 바로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는 것이예요. 족구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이예요. 그러니 현실을 인지하고 그 상황을 꼭 대비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