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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를 빛낸 영웅들

(선수소개)'인간줄자' 임상욱

작성자(신화)송한용|작성시간18.05.18|조회수86 목록 댓글 0

이광재, 박수훈, 양원주, 손연석, 손기원, 김기호, 장한빈


'한세대학교의 역대 공격수를 나열한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손기원의 이름을 본 순간 '그건 아니네'라는 생각이 드는 이 라인업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포지션이 공격수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최강부의 공식경기에서 임상욱과 호흡을 맞췄던 공격수라는 것이다.


보통 한 명의 세터가 최강부 데뷔부터 은퇴까지, 공식전에서 호흡을 맞추는 공격수가 많아야 3명 이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7명은 정말 놀라울 정도의 수치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대부분의 공격수들과 한차례 이상의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한 명의 공격수와 호흡을 맞춰 한 번 우승하기도 힘든데, 자그마치 7명의 공격수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대부분 우승을 경험했다는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 뛰어난 공격수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뛰어난 세터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론적으로는 일단 정확한 볼 컨트롤은 기본이고, 상대 수비라인의 움직임에 따라 공격수가 잘 하는 장기에 맞춰 공을 세팅해 주어야 한다. 또한 수비시에는 상대 공격수의 위치, 리시브 한 공이 네트에 붙는 정도에 따라 수시로 이동하며 수비위치를 잡아주어야 한다. 물론 이를 갖춘 세터들은 정말 많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세터는 수비수와 공격수의 연결고리로서 단순히 공을 올려주는 것만이 아닌 수비라인을 지휘해 주어야 하며,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공격수의 마음을 다 잡아주어야 하는 역할도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나의 의견이지만 이러한 세터들의 역할 때문에 세터가 주장을 맡고 있는 팀을 가장 이상적인 팀이라고 생각한다. 임상욱은 이런 능력을 모두 갖춘 세터이다.


한세대학교 후배인 박성호는 임상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장으로서 정말 카리스마와 온화함을 두루 갖추었던 선배입니다. 훈련 중에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아무리 쉬운 공이라고 해도 대충 받아 내려하는 모습을 보이면 혼이 많이 났습니다. 쉬운 공도 집중하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오히려 실전에서는 후배 동료 선수들이 주눅들지 않고 최고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도록 실수를 다독여주고, '훈련처럼 하자.'고 말해주며 온화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최고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상욱의 토스능력과 수비능력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거기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쉽까지 갖춘 그는 그야말로 무결점의 세터이다. 그것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공격수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발휘한 능력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세터를 임상욱이라고 말 할 수 없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최정상급 기량의 세터 중 한 명이라는데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운명과도 같았던 족구와의 만남


임상욱은 1987년 경북 문경에서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전문적으로 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문경시 아줌마 리그에서 선수 출신들을 제외한 최고의 정구 선수였던 어머니의 운동신경을 이어 받아서 였을까? 형제는 둘 다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형은 중학생 시절까지 문경시 시대표와 경상북도 도대표까지 뽑혔던 육상 유망주였고, 임상욱은 합기도와 이종격투기에 나름 재능을 보였다.


이런 그에게 족구는 운명과도 같이 찾아왔다. 임상욱의 고등학생(문경공고) 시절, 가장 친한 친구는 김형삼, 박정업이었다. {참고: 김형삼, 박정업은 과거 관동대학교(현 세경대학교) 족구단 원년 멤버였고, 현재 김형삼은 성우하이텍, 박정업은 한국타이어에서 각각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문경시 족구 동호인이었던 김형삼의 아버지에 의해 김형삼은 족구를 시작했고, 임상욱과 박정업은 '쟤가 하는게 뭐지?'하는 마음으로 구경을 갔는데, 딱히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 구경을 했는데, 김형삼의 아버지가 '그렇게 구경만 하지 말고 와서 한 번 해봐.'라고 말하며 이들을 코트로 끌어들였고, 이튿날 바로 족구화를 사와서 족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족구에 관한한 전혀 문외한이었던 임상욱, 박정업에게 당시 문경시 족구연합회의 김영대 사무장이 족구에 대한 기본기를 가르쳐 주었고, 하나하나 배워가며 자신들도 모르게 족구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족구를 하던 중, 부산 기장군에서 열린 대회에 구경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당시 울산 파랑새 족구단 소속이었던 박동근(전 문경대 선수)이 일반부 준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같은 또래의 선수가 너무 잘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시합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연습하며 더욱 족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시합마다 천 원 내기를 하고 있었던 팀 내 사정(?) 때문에 이들은 그 안에 끼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인원이 3명 뿐이니 하다못해 연습경기 한 번 하기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일단 4명이라도 맞추고 보자는 생각으로 문경공고 후배였던 류병진(전 문경대 공격수)을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팀으로 끌고 왔다. 



그렇게 팀을 꾸리기는 했지만 시합을 나가고 싶어도 어떻게 나가는지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들에게 손을 내민 이가 바로 당시 무한질주 족구단의 김천환 회장이었다. 김천환 회장은 열의가 있는 이들을 보고, 자비를 들여가며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이끌고 상주, 포항, 구미등을 직접 태워다 주며 교류전등을 통해 실력 향상을 도왔고, 2005년 창원에서 열렸던 문화관광부장관기 청소년부에 처음으로 출전을 하였다. 참가팀은 이들 문경공고를 비롯해 양원주가 있었던 천안공고, 김민수가 있었던 울산에이스 등 총 6개 팀이었고, 문경공고는 이 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며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한세대학교 NO.9


첫 대회였던 문화관광부장관기에서 이들은 한세대학교 족구단이라는 존재를 처음 알았다. 족구를 잘 하면 4년제 대학에 진학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은 그때부터 더욱 족구에 매달렸다. 이들의 목표는 당연히 한세대학교의 진학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때 부터는 아예 족구만 했다. 오전에는 기본 체력을 다지기 위해 산을 다녔고, 오후에는 기본기 훈련과 연습, 저녁에는 경기 위주로 운동을 하며 실력을 계속해서 키워나갔다


 


그렇게 그 해 가을, 2006학년도 한세대학교 족구 특기생 모집 테스트에 이들 셋은 지원을 했다. 지원자는 이들 셋을 비롯해 총 6명, 전국에서 족구 좀 한다하는 또래들의 사이에서 이들의 기량은 결코 특출나지 않았다. 특히 임상욱은 문경공고 삼총사 중에서도 객관적으로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선수였다. 그러니 학교는 물론 주위 사람들 심지어 본인조차도 합격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합격한 이는 임상욱이었다. 본인조차도 얼떨떨한 합격 소식이었지만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선배들과 감독님의 말씀을 듣고 알게 되었는데, 그 때 당시 지원했던 6명의 선수가 모두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옥석을 가리는 기준은 폼을 수정해주기 쉬운 선수와 면접 시의 인성이 우선이었다고 하더군요. 그 기준을 알게 된 이후 후배 선수들이 테스트를 볼 때면 '저 선수가 합격하겠구나.'라는게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여지없이 그 선수들이 합격을 했습니다."


합격했다는 사실이 기쁘기는 했지만 임상욱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불합격한 친구들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을 임상욱은 이렇게 회상했다. 


"혼자만 합격해 친구들에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게다가 그로 인해 친구들은 진로가 정해지지 않아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당시 관동대학교에서 족구단을 창단했고, 그 곳에서 김현우 선수와 함께 하자는 제안이 와서 형삼이랑 정업이가 입학을 하게 되어 정말 제 일처럼 기뻤습니다."


친구들과 떨어진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했지만 모두 자리를 잡았고, 임상욱은 한세대학교의 NO.9 유니폼을 입으며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일원이 되었다.


신의 한수가 되었던 포지션 변경


많은 이들이 임상욱의 포지션을 세터로 알고 있지만 사실 한세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그의 포지션은 수비수였다. 임상욱이 입학했던 2006년의 한세대학교는 현대자동차 족구단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신흥강호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광재라는 걸출한 공격수에 권혁진, 김동휘의 막강 수비라인까지 갖추며 대회마다 정상을 노리는 강호였다. 이런 상황에서 임상욱은 벤치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 권혁진, 김동휘의 실력이 너무 출중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기량향상이 더디었기 때문이다.



한편 한세대학교 입장에서는 2006시즌을 끝으로 핵심멤버 이광재, 이승호, 권혁진의 군 입대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라인업을 구성해야 했다. 따라서 이 새로운 라인업의 핵심이 되어주어야 했었던 임상욱과 동기 양원주의 성장은 2007시즌을 준비해야 하는 한세대학교의 입장에서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양원주는 이광재의 백업 공격수 역할을 훌륭히 해내며 새로운 시즌의 전망을 밝게 해주었다. 5점 이상 앞서고 있었던 경기에서 이광재와 교체되어 나와 경기를 마무리 해주었고, 특히 'SBS 족구최강전' 5인제 경기에서 보조 공격수로 나서 가끔씩 주 공격수인 이광재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공격을 선보이며 조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권혁진의 공백을 메우길 바랐던 임상욱의 더딘 성장은 큰 골칫거리였다. 


"강승호 감독님께서 당시에 저랑 원주를 부르셔서 면담을 하셨습니다. 원주에게는 농담삼아 웃으시면서 '넌 살 좀 쪄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제게는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당시에 몸이 좀 뚱뚱했을 때였거든요. '상욱이 너는 살 빼고 똑바로 하지 않을거면 집에 갈 생각해라.' 당연히 기분이 안 좋았지만 거기에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때부터 족구를 처음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족구 기본기만 부단히 연습했습니다."


이후에도 강승호 감독의 시험은 계속 되었다. 5점 이상 앞서고 있어 여유가 있을때면 임상욱을 수비 혹은 세터 위치에 세우며 적합한 포지션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렇게 2006시즌이 끝나고, 2007시즌 개막이 한 달 정도 남아있을 때였다. 5월에는 이광재, 이승호, 권혁진의 군 입대가 확정되었고, 07학번 선수들(손연석, 김도현, 정인재)이 입학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포지션에 공백이 생겼다. 이승호가 입대를 하게 되면 남아있는 선수들 중 세터를 할 선수가 없었던 것이다.(공격수-양원주, 손연석 / 수비수: 김동휘, 임상욱, 김도현, 정인재) 이에 강승호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오늘부터 상욱이와 인재가 주전세터 경쟁을 한다. 한 명이 주전이 되면 나머지 한 명은 올 시즌 경기를 못 뛸 수도 있으니 둘 다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한 달 뒤, 테스트를 통해 주전을 결정하겠다."


그 날 부터 임상욱은 그야말로 악으로 깡으로 세터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미 2006시즌을 거치며 수비수로서 재능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세터로의 전향마저 실패한다면 더 이상 설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되기로 유명했던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훈련이 끝난 이후에도 개인 훈련을 더 했다. 혼자서 따로 체육관에 남아 오른발 제자리 토스만 1,500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왼발 토스 1,000개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화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한 달 뒤, 정인재와 주전세터를 결정하는 테스트를 했고, 직상 토스, 후위 토스등을 테스트한 결과 그 경쟁의 승자는 임상욱이었다.


내부경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미 시즌 개막은 코 앞으로 다가왔고, 당장 두 달 뒤에 입대하는 이승호의 공백을 메워야 했기에 개인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이승호가 임상욱에게 나름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려고 했지만 임상욱에게 이승호의 스타일은 맞지 않았다. 결국 그는 결단을 내렸다. 다른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이 아닌 임상욱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내겠다고 말이다.


"그땐 정말 1년만 미친듯이 해보고, 안 되면 모두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각오했습니다. 실제로 명절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고향집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하계, 동계 체력훈련때도 야간 개인훈련은 계속되었습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났지만 붕대를 감싸고 매일 운동을 했습니다. 평발이다보니 남들보다 피로가 먼저 쌓이는 핸디캡도 있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마저 실패한다면 저의 족구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다보니 그 때, 몸무게가 10키로가 빠졌습니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으로 한세대학교의 주전 세터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최강부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1기 멤버가 빠지고 새롭게 팀을 재건했던 한세대학교는 과도기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1기 멤버 중 유일하게 김동휘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후보에서 주전으로 갓 올라선 양원주와 신입생 공격수 손연석, 포지션을 전향한지 얼마되지 않은 임상욱, 그리고 신입생 수비수 김도현, 정인재에게 최강부의 벽은 너무 높았다. 결국 1기 멤버들이 군 입대를 한 5월 이후 출범한 2기 멤버들은 2007시즌을 무관으로 마감했다.


그리고 절치부심하며 비시즌을 보내고 맞이한 2008시즌, 김동휘가 군 입대를 하며 임상욱은 한세대학교 3대 주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상등극은 쉽지 않았다. 전반기에 벌어진 온양온천기에서 주전세터로서 첫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이는 휴가 나온 이광재와 권혁진이 나선 대회였다. 한세대학교의 우승이기는 했지만 1기 멤버들의 도움(?)을 받은 만큼 2기 멤버들에게 온전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우승은 아니었다. 순수 2기 멤버들이 일궈낸 첫 우승은 그 해 하반기 양구에서 벌어졌던 정중앙배였다. 그렇게 비로소 임상욱은 정상급 세터로 발돋움 했다.


"어쩌면 강승호 감독님께서 제가 수비에 어울리지 않아서 다른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배들도 저보고 세터하길 잘 했다고 하네요. 포지션 변경은 정말 제 족구인생의 '신의 한 수' 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2008시즌을 마치고 임상욱 역시 군 입대를 했다. 그런데 거기서도 하늘이 도왔을까? 임상욱이 입대했던 부대의 수송관은 족구동호인이었고, 바로 아그레망의 공격수 나영수와는 친구사이였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임상욱을 알고 있었고, 부대 내의 간부들이 그에게 족구를 배우는 등 일약 족구 붐이 일어났으며 주임 원사를 비롯한 간부들의 배려로 족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가 2011시즌에 돌아왔을 때, 공백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기량을 선보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제대를 하고 맞이한 2011시즌, 그는 더욱 성장해 있었고, 시즌 하반기에는 양원주와 짝을 이뤄 대부분의 대회를 싹쓸이 우승을 하고 한세대학교에서의 활약을 마무리 했다. 당시 족구계에 신인드래프트 제도가 있었다면 양원주와 임상욱은 2012년 최대어였을 것이다.


넥센타이어에 이어 하이트진로음료


2011시즌을 끝으로 한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임상욱은 양원주와 함께 넥센타이어에 입단했다. 그곳에는 한세대학교 1년 선배 박수훈이 함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5회 소양강배대회 우승 이외에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고, 팀 내 사정으로 인해 넥센타이어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입사한지 1년도 안 되어 퇴사를 했고,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몇 군데 연락이 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하던 중 고등학교 후배였던 손기원에게 연락이 왔다. "하이트진로음료에서 공석인 세터 자리에 형을 데리고 오고 싶어해요." 이 제안을 받은 이후 하이트진로음료의 이성일 노조위원장과 김동진 단장과 면담을 한 후 입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 후 2013, 2014시즌에는 최강부와 일반부를 왔다갔다 하며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2015시즌, 장한빈, 박성진, 신진이를 영입하며 최강부와 일반부가 정확하게 구분되었다. 임상욱은 이 중 일반부 팀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5시즌 두 번째 대회였던 '울산광역시장배'에서 (본인의 말로는) 얼떨결에 일반부 우승을 하는 바람에 바로 최강부로 승격되었고, 하이트진로음료는 최강부를 두 팀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바로 '하이트진로음료'(이하 '음료팀')와 '하이트진로'(이하 '진로팀')였다. 사실 2015시즌 승승장구했던 '음료팀'과는 달리 '진로팀'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5시즌 후반, 팀 수뇌부에서 팀 개편을 결정했고, 임상욱은 '음료팀'에서 장한빈과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당대 최고 공격수와 최고 세터의 만남과 황희망, 신진이의 수비라인까지 갖추게 된 '음료팀'은 2015시즌 마지막 대회를 시작으로 2016시즌을 사실상 싹쓸이하며, 그야말로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임상욱은 팀의 맏형으로써 스타플레이어들을 통솔하는 리더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제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직장과 가정에 충실하고 있다. 수많은 공격수들과 호흡을 맞추며 최고의 세팅능력과 동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까지 갖춘 그의 모습, 2010년대를 살아간 족구인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어울리는 별명이 무엇일까? 나는 누구에게나 정확한 토스를 공급했던 그의 모습을 두고 '인간줄자'라는 별명을 붙이고 싶다.


임상욱과 간단한 일문일답


Q. 호흡을 맞췄던 공격수 중 가장 편했던 공격수와 그 이유는? 반대로 가장 맞춰주기 힘들었던 공격수와 그 이유는?

A. 가장 편했던 공격수, 가장 힘들었던 공격수 모두 박수훈 선배입니다. 함께 연습을 많이해서 맞추기 편했지만 선배이다보니 쉽게 말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더라고요, 그게 조금은 힘들었습니다.

제 족구인생 중 최고의 공격수는 이광재 선배입니다. 경기 흐름을 잘 알아요. 공격수로서 해결해 줘야 하는 모든 부분을 잘 알고 컨트롤 해줍니다. 득점을 내 줄때 확실하게 득점을 내주고, 세터를 편안하게 해줘요.

가장 잘하는 공격수는 장한빈 선수입니다. 한빈이는 노력형 천재인 것 같습니다. 배울 점도 많고 경기 운영이 최고죠. 족구를 정말 잘 하는 후배입니다.

가장 호흡이 잘 맞는 공격수는 박수훈 선배입니다. 경기 운영 및 서로에게 의지하는게 딱 50%씩인 것 같아요. 제가 복잡할 때는 공격능력으로 커버해주고, 반대로 공격이 잘 안 풀리면 토스의 변화로 해결해 가면서 호흡이 잘 맞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함께 성적을 가장 많이 낸 공격수는 원주입니다. 2011년도 하반기 대회는 거의 싹쓸이 할 정도 였어요. 진이와 성호가 수비에서 단단하게 버텨준 덕분이기도 하지만 원주는 자신만의 족구를 잘 해석하고 보여준 케이스입니다.

손기원 선수는 왼발잡이라 토스할 때 새롭게 시작한 느낌이었어요. 힘들진 않았지만 낯선 느낌이 오래가더라고요.


Q. 한세대학교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 불화는 없었는지?

A. 모두 숙소생활을 하며 가족같이 생활하다 보니 다양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숙소 방 대 방으로 팀을 나누어 족구, 탁구, 스타크래프트, 풋살 등 다양한 종목으로 내기를 많이 했어요. 시합 끝나고는 산본신도시 번화가에서 술도 한 잔 하면서 좋은 추억 많이 쌓았습니다. 군대 다녀온 선배들 덕분에 방마다 점호도 하고, 기합도 받았죠. 신입생 시절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다 즐거운 에피소드였습니다.

불화는 딱히 없었는데, 제가 광재 선배한테 딱 한 번 대든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당시에 몸이 좀 뚱뚱했는데, 툭하면 돼지라고 놀리고, 넌 족구랑 안 어울린다는 둥, 포기하라는 둥 장난을 많이 걸었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광재선배는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런 장난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던 중 한 번은 제 뒤통수를 때렸는데 그게 너무 화가 나서 '제 부모님도 뒤통수는 안때리시는데, 왜 형이 때려요'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기숙사에서 나갔습니다. 화를 식히고 다시 돌아왔는데 그때 저랑 선배랑 일기장을 쓰던게 있었어요. 거기에 선배가 '미안하다 사랑한다'라고 써 놓았더라고요. 그렇게 그 자리에서 풀고 포옹했어요. 그리고 더욱 돈독해 진 것 같고 지금도 물론 아주 좋은 관계 유지하고 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A. 하이트진로음료 일반부로 시합을 다닐 계획입니다. 자주 시합장에서 뵙지는 못 할 듯 합니다. 지난 해에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가정에 충실하고 있어요. 아내와 아이랑 보내는 시간도 족구만큼 소중한 시간이기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족구를 하면서 감사했었던 분들이 계시다면?

A. 정말 많죠. 저를 새로운 족구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김천환 감독님, 아마 저희 때문에 본인의 가정도 거의 포기하시다시피 하셨던 은사님이십니다. 그리고 최고의 스승님이신 강승호 감독님, 하이트진로음료 운영진 이성일 노조 위원장님, 김동진 단장님, 신동민 감독님, 선수 생활 하면서 많은 조언을 해준 광재 선배, 함께 수 많은 희노애락을 함께한 수훈 선배, 인정받는 선수가 되라고 해준 혁진 선배, 친형처럼 챙겨준 승호 선배, 제 마음 속의 영원한 주장 동휘 선배, 07시즌 성적이 안 나서 함께 마음 고생했던 동기생 원주, 1년 후배 연석이, 인재, 도현이, 가장 사랑하는 후배 신진이 저의 영혼의 파트너죠. 그리고 진이와 함께 팀포메이션에 대해 연구하고, 많은 대화 나누었던 성호, 그리고 언급하지 못한 한세대 선후배 선수들 모두, 그리고 현재 하이트진로음료팀의 선수단 전원, 주장 명구 형과 항상 동생들을 잘 챙겨주는 영대 형, 특히 기원이, 아름이, 희망이. 제가 너무 의욕이 앞서다보니 너무 뭐라고 많이 했었는데 지금 잘 하고 있고, 그런게 고마워서 지금도 항상 얘들 나오는 영상을 꼭 챙겨보게 되네요. 그리고 같은 부서에서 항상 힘이 되어 주고 많은 연습했었던 기호 형,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호흡을 맞춰 너무 행복했었던 한빈이, 잠깐이지만 함께 좋은 추억 만들었었던 넥센타이어 시절의 상진이, 정훈이, 40대부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문경공고 삼총사 형삼이 정업이, 평창의 (한)기섭이 예전에 고등학생이었을때, 한세대 팀을 이기기도 해서 우러러 봤는데 지금은 농담도 많이 하고, 세터에 대해 많은 대화도 하고, 정말 고마운 친구죠. 한세대학교 평생 교육원 지도자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분들 정말 한 분 한 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각 지역에서 고생 많은 문경 촌놈들, 고맙고 명절에 모여서 족구 한 번 하자고 말해주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나의 영원한 반쪽, 항상 부족한 남편에게 내조 잘 해주는 사랑하는 아내 승민엄마 은경이, 항상 고맙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이 자리를 빌어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서 모든 분들을 언급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좀 전에'전국 각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문경 촌놈들'이라고 언급한 이들. 2012년 추석때 고향에서 모여 족구 한 판 하고 기념촬영.  


Q. 임상욱에게 족구란?

A. 족구는 저에게 '옷'인 것 같습니다. 옷이 의식주 중에 하나인데, 족구라는 옷은 삶의 일부이고, 저 한테 잘 맞고, 저를 폼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학창 시절 처음 교복을 사면 더 자랄 것을 대비해 크게 사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 성장해 그 옷이 제 몸에 딱 맞는 것처럼 우연히 시작하기는 했지만 저에게 잘 맞고 간직하고 싶은 그런 옷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임상욱을 말 하는 사람들


이광재: 상욱이는 천재형 보다는 노력형 선수였던 것 같습니다. 수비수로 입학해 세터로 포지션을 변경했는데, 그만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성격도 꼼꼼하고 자기관리 또한 철저했어요. 여담으로 운동시간이 끝나고 감독님 몰래 상욱이랑 야족 다니던 생각이 많이 나네요. 야족 끝나고 편의점에서 사 먹었던 머릿고기가 정말 맛있었습니다.


권혁진: 상욱이는 목표의식이 뚜렷합니다. 뭔가 목표를 잡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을 연구하고 생각하는 후배입니다. 굉장한 연습벌레이기도 하고요. 대학교때 운동량을 보면 혀를 찰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보기와는 달리 정말 예의 바른 후배였습니다.


박수훈: 상욱이를 떠올리면 열정, 끈기, 노력 이 세 가지가 떠오릅니다. 자신을 극복하고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모습은 후배이지만 존경스럽고, 그런 후배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신진이: 상욱 선배는 정말 존경하고 배울 부분이 많은 형입니다. 일상생활, 운동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잘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말 보다는 행동과 결과로 모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목표를 향한 몰입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또한 생각이 아주 깊어서 운동 뿐만이 아닌 많은 부분에서 조언도 해주고, 가끔은 장난도 많이 치죠. 피는 안 섞였지만 가족과 같은 존재입니다. 제 인생 중 평생을 함게 하며 감사한 마음을 갚아 나가야 할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박성호: 2011년 신입생 시절, 훌륭한 선배들과 한 팀이 되었는데 항상 대회만 나가면 4강 문턱에서 좌절하고는 했습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감도 없어지고, 포기하고 싶었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상욱 선배가 저를 다독여 주면서 훈련이 끝나고 항상 나머지 훈련으로 진이 선배와 함께 운동장을 달렸습니다. 그런 힘든 훈련은 결국 우승이라는 결실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상욱 선배는 운동량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기차기 만 개를 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체력과 공에 대한 집중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해내더군요. 제가 아는 한 상욱 선배는 정말 최고의 세터이고, 항상 존경하는 선배입니다.


장한빈: 상욱이 형은 FM의 표본이었습니다. 항상 일정한 자세와 자신만의 루틴을 지키는 진정한 프로였습니다. 함께 호흡을 맞췄을 때는 정말 공격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세터였습니다. 경기를 읽는 능력이나 수비포메이션은 물론이고, 탁월한 리더쉽도 갖춘 선수입니다. 상욱이 형과 늦게 호흡을 맞춘만큼 좀 더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고 싶었는데 이제 승민이(임상욱의 아들)에게 빼앗긴게 너무 아쉽습니다. 2010년대 한 시대를 대표한 세터라고 생각합니다.


이태호: 상욱 선배는 자기 관리와 주변 선후배 간의 인간관계 관리까지 상당히 잘 하는 배울점이 많은 선배입니다. 그리고 늘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감사한 선배이기도 하죠. 여러모로 뛰어난게 많은 팔방미인인데다가 흔치않게 무결점 플레이를 하는 멋진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취재에 응해 주시고 칼럼 쓰는 것을 허락해 주신 임상욱 선수에게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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