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은 또 다른 채움을 주는 곳간
이원정李元禎, 1622-1680 『귀암집歸巖集』卷之九
「여헌장선생행장旅軒張先生行狀」에서 가려 뽑아
불이당 풀이하고 譯하여 올림/
一爲萬數之首。虛爲萬實之府。
靜爲萬化之基。貞爲萬事之幹。
淸爲萬物之高。謙爲萬益之柄。
儉爲萬福之原也。
1은 모든 숫자의 으뜸수이고,
비움은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곳간이다.
고요함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기초이고,
곧음은 모든 일을 이루게 하는 기둥이다.
맑음은 모든 몬사물의 고아함을 이루게 하고,
겸손함은 모두에게 유익함을 주는 사자어금니요체-要諦이다.
검소함은 만복의 근원이다.
1이라는 숫자는 만물의 근원이다. 으뜸수인 것이다. 하늘과 땅이 아직
열리지 않았을 태고에는 태극太極이 있었다. 태극이 갈라지며 곧 음과 양이
생겨났던 것이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라고 한다. 디지털은 무엇인가? 바로
십진수의 근간이 되는 0과 1의 조합으로 된 수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태고의 시절로 가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0과 1이라는
숫자의 조합에는 길들여지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동양의 사고방식은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적 사고의 틀에 놓여있다.
곳간은 차면 비워야 한다. 꽉 찬 곳간의 곡식은 썩게 마련이고 쥐가
드나들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채우면 채울수록 더 채우려 아우성에다
아등바등한다. 늘 비운다 비운다 하면서 더 채우려는 게 사람의 게염욕심
이다. 자신은 비우질 않고 남에게만 비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늘 비우라고 하면서 자신은 정작 비우질 않는 이율배반적인
궤변을 늘어놓는다. 비우면서 또 다른 채움을 기다리는 게 자연의 섭리이다.
靜中動, 태고적 우주는 고요하면서도 그 안에 삼라만상을 잉태하려는 몸부림이
있었다. 정중동(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오고 그 다음으로 오행의 법칙이 나왔으니
고요함이야말로 만물을 생성시키고 소멸시키는 원류인 셈이다.
바름(貞)은 무엇인가? 바로 ‘자연의 섭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先天而天弗違)’
이다. 『주역』의 알짬핵심이 되는 대목이다. 모든 사물은 각각 본래의 성질과 형질을
타고났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이러한 성질과 형질이 변해가는 것인데, 그래도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은 곧 삼라만상 모든 것에 깃들여져 있는 貞이
되는 것이다. 정이 변하면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본성이 망가지는 것이다.
맑음은 인간의 정신과 사물의 본성이 순수한 형태로 남아있다는 말이다. 맑지 않으면
모든 사물이 추잡스럽고 볼품없는 것에 지나지 않음이다. 하지만 지금은 맑은 정신과
마음을 보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모든 것에 덧씌우기를 하거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일이 다반사이니 어느 것이 맑고 맑지 않은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겸손함은 서로에게
유익한 것이다. 잘 났다고 벋대면 결국 서로에게 별 이득이 되지는 않고 결국에는 손해만
될 뿐이다. 겸손함의 어짊(仁)에서 뻗어 나온 禮를 말하는 것이니 禮 는 곧 행동으로 보이는
공경함(敬)이다. 敬은 곧 마음속을 밝혀주는 등불이며 禮 는 곧 등불을 타인에게도 비추는
겉으로 드러난 敬의 실체인 것이다.
검소함은 과소비의 반대개념이다. 돈을 물 쓰듯 쓰면 나라 경제나 가정살림은 거덜나기 십상
이다. 한때 소비가 미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잠시 경기침체에 따른 내수內需를 끌어올리기
위한 고육지계苦肉之計인 셈이다. 곶감 빼어 먹 듯하다가 결국 쪽박 차게 되는 것이다. 가정살림
이나 나라살림이나 잘 돌봐야 할 것이다.요즘 복지 POPULISM이니 뭐니 말이 많다. 국민 세금 들여
마구잡이식으로 복지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곶감 빼어 먹는 꼴이 될 것이다.
* 장현광張顯光, 1554~1637 :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으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을 주장했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이씨(京山李氏)이다. 1576년(선조 9) 재사(才士)로 천거되었고, 1595년 유성룡
(柳成龍)의 천거로 보은현감을 지냈다. 그뒤 형조좌랑·순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광해군 때 합천군수, 인조 때
지평·집의·이조참판·대사헌·지중추부사 등에 20여 차례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1624년(인조 2) 이괄
(李适)의 난이 진압된 후 부름을 받아 인조에게 정치에 대한 건의를 했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에 격문을 보내
근왕(勤王)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듬해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산(立?山)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