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융(姜融)
출생일 미상
사망일 1349년(충정왕 1)
고려후기 만호, 찬성사, 첨의좌정승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명은 강장(姜莊). 할아버지가 진주의 관노였으며, 누이동생은 송악사(松岳祠)의 무당이었다.
충선왕이 즉위 7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에 들어가 있는 동안, 충렬왕과 충선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당시 충선왕의 측근이었다.
그때의 공이 인정되어 충선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자 내부령(內府令)으로 발탁되었다.
충숙왕대에 역시 승진을 거듭하여 만호를 거쳐 1328년(충숙왕 15) 찬성사가 되고, 1335년(충숙왕 복위 4)에는 첨의좌정승판삼사사(僉議左政丞判三司事)에 이르렀다.
충숙왕에 의하여 단성협대공신(端誠協戴功臣)의 호를 받았고, 또 뒤에 진녕부원군(晉寧府院君)에 봉해졌다.
이같은 출세의 배경에는 딸이 원나라의 승상 탈탈(脫脫)의 애첩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데, 이점은 강융이 부원적(附元的) 성격의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개풍군 광덕면 소재 경천사(敬天寺)는 바로 탈탈의 원찰(願刹)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경복궁 안에 이건된 국보 제86호 개성 경천사지십층석탑은 강융이 원나라에서 기술자를 모집하여 1348년(충목왕 4)에 건립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석탑에 새겨진 글자 등에 의해 확인되며, 강융의 친원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경천사지십층석탑은 경복궁 안에 이건되었다가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융(姜融))]
충렬 무신34년(1308) 원 무종(武宗) 지대(至大)원년
○ 겨울 10월에 중문에 방을 붙여 이르기를,
“왕륜사의 주지 인조(仁照), 용암사(龍巖寺)의 주지 용선(用宣), 선암사(仙巖寺)의 주지 약굉(若宏)과 최단(崔湍)ㆍ권한공(權漢功)ㆍ김지겸(金之謙)ㆍ김사원(金士元)ㆍ최실(崔實)ㆍ환이(桓頣)ㆍ오현량(吳玄良)ㆍ강방언(姜邦彦)ㆍ이진(李珍)ㆍ강융(姜融)ㆍ조통(趙通)ㆍ조적(曹頔)ㆍ조석(曹碩)ㆍ최현(崔玄)ㆍ정자우(鄭子羽)ㆍ최중공(崔仲公)ㆍ문점(文坫)ㆍ이백겸(李伯謙)을 제외한 사람들은 특별히 부르지아니하면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 고릉(高陵)을 배알하고, 능터를 불길한 데에 정했다하여 터를 선정한 밀직부사로 치사한 강헌(姜軒)과 고 찬성사 오윤부(伍允孚)의 사위 강미(姜美)와 외손 2명을 순군옥에 가두고, 마침내 새 능에 가서 호작관(護作官)과 공역하는 무리들에게 술을 하사하여 노고를 위로하였다.
충선 기유원년(1309), 원 지대2년
○ 가을 7월에 상락공(上洛公) 김흔(金忻)이 졸하였다.
흔은 성품이 활달하고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였으며, 친척중에서 곤궁한 자를 더욱 구휼하였다.
○ 전부승(典符丞) 김서정(金瑞廷)에게 장형(杖刑)을 행한 후 섬으로 귀양보냈다. 과거에 내부령(內府令) 강융(姜融)이 서정에게 요구한 것이 있었으나 얻지 못하자 성내어 서정을 구타하니, 서정이 꾸짖기를,
“너는 본래 노예인데, 감히 사족을 욕보이느냐?"하였다.
융의 본명은 강장(康莊)으로서 진주(晉州) 관노의 손자였으므로 이렇게 말하였는데, 융이 원한을 품고 참소한 것이다.
충숙 을축12년, 원 태정2년
○ 여름 5월 신유일에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서 도착하였다.
○ 이날 상왕이 원나라에서 훙하였다.
○ 삼사사 윤신걸과 만호 강융(姜融)을 보내어 평양(平壤)에서 재궁(梓宮)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충숙 경오17년, 원 지순(至順)원년
○ 가을 7월에 원나라에서 명종(明宗)의 태자(太子) 타환첩목이(妥懽帖睦爾)를 대청도(大靑島)로 귀양보내었다.
○ 윤달에 상왕이 원나라에 가려고 해주에 있으니,
정승 정방길, 찬성사 강융, 전평리 김원상(金元祥)이 아뢰기를,
“지금의 왕위는 전하(殿下)가 물려주신 것이니, 왕은 마땅히 성심으로 전하를 섬겨야할 것인데, 도리어 원수와 같이 여기며 전하의 신하들은 모두 파직시켰습니다.
전하에게 의성창(義成倉)만을 붙여주고, 봉양할 물자를 제공하지 아니하니, 욕됨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또, 지금 왕이 용산 원자(龍山元子)와 우애하지 않은 마음이 있어 형세가 양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원자를 데리고 가소서" 하였다.
상왕이 드디어 덕비(德妃)에게 명하여 시골로 돌아가게 하여, 왕과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중랑장 조익청(曹益淸)이 왕의 처소에서 오니 상왕이 불러 이르기를,
“왕이 나의 종신들의 관직을 빼앗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록 고가 왕이 되었더라도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는가?
내가 원 나라에 입조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하니,
조익청이 왕위는 부자상전(父子相傳)하는 법이라는 말을 매우 간절하게 극력 아뢰니, 상왕이 기꺼이 납득하였으나, 정방길등의 말때문에 안심하지는 못하였다.
충숙 을해4년(1335), 원 지원(至元)원년
○ 여름 4월 기사일에 왕이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 우문군(佑文君) 양장(梁將)과 전낭장(郞將) 조신경(曹莘卿)에게 명하여 인사행정을 맡게하고, 강융(姜融)을 첨의좌정승판삼사사(僉議左政丞判三司事)로, 채하중(蔡河中)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최노성(崔老星)을 회의군(懷義君)으로, 조신경을 좌대언(左代言)으로, 신시용(申時用)을 대광원윤(大匡元尹)으로, 윤현(尹賢)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양장은 연남(燕南)사람으로, 일찍이 왕삼석(王三錫)을 따라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에게 붙어서 권세를 부렸으므로 조야가 모두 그를 미워하였다.
삼석(三錫)이 죽자, 장은 연남으로 돌아갔다가 왕이 조회하러 들어가니, 장이 또다시 장백상(蔣伯祥)과 흉모를 꾸미다가 이루지못하고, 왕의 측근자들에게 아첨하고 섬기어 왕의 사랑을 받아 봉군까지 되고는 이름을 재(載)로 고치고, 환관들과 결탁하여 정권을 농락하였다.
청탁하는 사람이 문앞을 메웠고, 뇌물을 공공연히 받았으며, 사대부(士大夫) 중에 그 문을 통해 출세하는 자가 많았다.
신경(莘卿)은 일찍이 중이 되어 풍수(風水)노릇을 하였는데, 재(載)를 통하여 출세하여 함께 인사행정을 맡아보았다.
최노성(崔老星 본 이름은 당흑시(黨黑厮))은 색목인(色目人)의 부상(富商)인데 역시 재(載)를 통해서 봉군이 되었다.
재는 말썽이 있을 것을 꺼려하여 비목(批目)에 쓰기를,
'1백4세의 노인 최노성'이라 하였다.
현(賢)은 전법사(典法司)의 관속에서 기용되어 시용(時用)의 가신이 되었다가 전법좌랑(典法佐郞)으로 임명되었는데, 뇌물을 받고 죄수를 석방하여 포(布) 1백 50필을 받은 것이 탄로났다.
헌사(憲司)에서 그 죄를 탄핵하려고 하였는데, 이때는 비목이 내려온 이틀 후였다. 현은 환관들과 공모하여 그 탄핵을 가라앉히고, 비목을 안으로 가지고 가서 지평(持平) 이손보(李孫寶)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자기 이름을 써 넣었다.
뇌물을 바쳐 벼슬을 얻은 자가 거의 1백여명에 이르렀는데도 왕은 그것을 알지못하였으니, 왕을 속이고 제마음대로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대관(臺官) 신군평(申君平)도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가 바로 파면되고, 다음날 장령(掌令) 박원계(朴元桂)가 서명하니, 사람들이 그 비겁함을 비난하였다.
융(融)의 누이가 무당이 되어 송악사(松岳祠)를 근거로 생활하였는데, 대호군 김직방(金直邦)이 자기가 좋아하는 무당으로 그와 대치하려하자, 융(融)이 안된다하니, 직방(直邦)이, “너는 관노(官奴)인데 왜 이렇게 교만을 부리느냐?" 하며 융을 꾸짖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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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노털한강 작성시간 20.07.20 ㅎ 진주강씨(晋州康氏)도 있는데...
위 글(고려사절요)에도 강융의 본명은 강장(康莊) 진주관노의 손자라 하였는데...
1761년 청주보 9권 별보에는 강이식의 계대를 할 수 없는 원대손...
고려문하시중 휘 흠장(欽粧 인터넷검색 안됨)이 강융(姜融)의 아버지라고...
또한 흠장의 9대손 강귀복(姜貴復 1512~1560)의 묘갈(1561.1.19 진사 金宇海1563~?撰)이
있는데도...어찌하여 엉망진창...
우리 94년도 대동보에는 석덕의 3자 희증(안동권씨성화보 无后)의 후손으로
둔갑되어 있는지??
정말로 아리송해요~!!! -
답댓글 작성자송훈(松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7.29 노털한강 그러게요. 제 생각에는 족보를 후대에서 앞세대를 찿아 만들다보니 이러지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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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훈(松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9.01.22 융(融)의 누이는 송화(松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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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훈(松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4.20 외손 2명은 찬성사 오윤부의 손자 둘을 말하는 것으로, 강미의 아들 2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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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풍산(豊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5.23 강융과 고용봉의 시주로 경천사 10층석탑(용산 중앙박물관 소재)을 만들었다...한국의 유산, KBS 유산제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