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충(忠)

한성부판윤 강섬(姜暹)...재경원수(在京元帥)

작성자송훈(松薰)|작성시간15.08.11|조회수380 목록 댓글 0

강섬(姜暹)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2AC15C12CFFFFB1516X0

자 명중(明仲)

호 송월당(松月堂)

호 송일(松日)

호 낙봉(樂峰)

생년 1516(중종 11)

졸년 ?(미상)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진주(晉州)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전력 진사(進士)

관직 호조판서(戶曹判書)

관직 한림(翰林)

타과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가족사항]

[부]

성명 : 강공망(姜公望)

품계 : 종사랑(從仕郞)

[조부]

성명 : 강경서(姜景敍)

[증조부]

성명 : 강순민(姜舜民)

[외조부]

성명 : 최장손(崔長孫)

[처부]

성명 : 송세문(宋世文)

[형]

성명 : 강욱(姜昱)

[자]

성명 : 강의호(姜義虎)

[관련정보]

[문과]명종(明宗)1년(1546)병오(丙午)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2위(12/33)

합격연령 31세

모든 방목에 “증광방”으로 나온다. 규106본에는 시험문제가 나오고, 규귀본에는 시험실시이유가 “즉위경(卽位慶)”으로 나온다.

실록에 의하면 4월 24일에 사정전에서 문과를, 경회루에서 무과를 실시하였다. 무과는 당일 출방하였고, 문과는 25일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명종실록에 문과에서 생원 최응룡(崔應龍)등 33인을 뽑았다.

[진사시]중종(中宗)35년(1540)경자(庚子)식년시(式年試)[진사]3등(三等) 36위(66/100)

방목 말미에는 ‘방중양시구중(榜中兩試俱中)’, ‘방중형제연벽(榜中兄弟聯璧)’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1540년 2월 23일

강익(姜益) 숙겸(叔謙) 1504 ~ ? 진주(晉州) 병과(丙科) 7위

강사안(姜士安) 순지(順之) ? ~ ? 진주(晉州) 2등(二等) 20위

강섬(姜暹) 명중(明仲) ? ~ ? 진주(晉州) 3등(三等) 36위

[상세내용]

강섬(姜暹)에 대하여

1516년(중종11)∼미상.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월당(松月堂)‧송일(松日)‧낙봉(樂峰).

조부는 대사간 강경서(姜景敍)이며, 부친은 강공망(姜公望), 형은 강욱(姜昱)이다.

1540년(중종35) 진사가 되었고, 1546년(명종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봉교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중종실록》‧《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0년 예조좌랑에 보임된 뒤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함경도어사‧사간원헌납‧홍문관부교리를 역임하고,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병조참지가 되었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첨지중추부사와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562년 회령부사로 나갔다. 그 이듬해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자, 행부호군(行副護軍)으로서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주상(主喪)을 맡아, 3년간 수묘관(守墓官)으로 있었다.

1566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는데 판윤 재직 때 성황제(城隍祭)의 헌관(獻官)으로 임명되었음에도 병을 핑계하여 제사에 불참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전보되었다.

1568년(선조1)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3년 다시 한성부판윤이 되어 특진관으로 경연에 참석한 바 있고, 신병으로 판윤을 사직하자 경기관찰사로 체직되었다.

1583년 비변사로부터 재경원수(在京元帥)로 추천을 받았으며, 범죄인을 사면할 때 외류(外流)이하는 납속(納粟)으로 속죄시킬 것을 주청한 바 있다.

[참고문헌]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이병휴(李秉烋)

2005-11-30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명종 3권, 1년(1546 병오/명가정(嘉靖) 25년) 4월 24일(경술) 1번째기사

무과를 친시하고 임몽서등 28인을 뽑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책제(策題)를 내도록 명한 후 다시 내전(內殿)으로 돌아갔다가【사정전으로 나아간 것은 상이 지금 상중이어서 정전(正殿)에 나아가기가 미안했기 때문이다】경회루(慶會樓)아래로 나가서 무과를 친시(親試)하여 임몽서(任夢瑞)등 28인을 뽑았다.

○庚戌/上御思政殿, 命出策題後, 還入內殿。【御思政殿者, 上方宅憂, 御正殿未安故也。】出御慶會樓下, 親試武科, 取任夢瑞等二十八人。

강섬(姜暹) 명중(明仲) 송월(松月) 1516 ~ ? 진주(晉州) 병과(丙科) 2위

부록 / 중종실록 편수관 명단

가정(嘉靖) 29년(1244) 9월 일, 춘추관(春秋館)에서 삼가 교지(敎旨)를 받들어 찬(撰)한 전후관(前後官)을 아울러 기록합니다.

○감사(監事)

추성협익병기정난위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推誠協翼炳幾定難衛社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 신(臣) 이기(李)

추성협익병기정난위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推誠協翼炳幾定難衛社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 신 정순붕(鄭順朋)

추성정난위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推誠定難衛社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신 심연원(沈連源)

○지사(知事)

추성정난위사공신 숭록대부(推誠定難衛社功臣崇祿大夫) 행예조판서겸판의금부사(行禮曹判書兼判義禁府事) 영평군(鈴平君) 신 윤개(尹漑)

숭정대부(崇政大夫) 행이조판서겸판의금부사 지경연사(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 신 상진(尙震)

추성정난위사공신 숭정대부(推誠定難衛社功臣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겸지경연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議政府左贊成兼知經筵成均館事弘文大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영성군(靈城君) 신 신광한(申光漢)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 숭정대부(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겸지경연사(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 상락군(上洛君) 신 김광준(金光準)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동지경연사(議政府左參贊兼同知經筵事) 신 임권(任權)

정헌대부(正憲大夫) 형조판서 겸홍문관제학(刑曹判書兼弘文館提學)

신 정사룡(鄭士龍)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신 윤사익(尹思翼)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신 김인손(金麟孫)

추성정난위사공신 자헌대부(推誠定難衛社功臣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동원군(東原君) 신 최연(崔演)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신 안현(安玹)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오위도총부도총관(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莩摠管) 신 송겸(宋)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동지경연성균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成均館事) 신 홍섬(洪暹)

○동지사(同知事)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우참찬 겸지경연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議政府右參贊兼知經筵義禁府事五衛都摠莩摠管) 신 박수량(朴守良)

추성정난위사공신 자헌대부(推誠定難衛社功臣資憲大夫) 호조판서겸지의금부사(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 호산군(壺山君) 신 송세형(宋世珩)

가의대부(嘉義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 창양군(昌陽君) 신 조광원(曺光遠)

추성정난위사공신 가의대부(推誠定難衛社功臣嘉義大夫)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광평군(光平君) 신 김명윤(金明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신 남세건(南世健)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刑曹參判兼五衛都摠副府摠管) 신 강현(姜顯)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신 김만균(金萬鈞)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 가선대부(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서원군(瑞原君) 신 윤원형(尹元衡)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신 신영(申瑛)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신 김광철(金光轍)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신 나세찬(羅世纘)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부총관(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 신 정만종(鄭萬鍾)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신 유진동(柳辰仝)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부총관(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 신 박우(朴祐)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신 권찬(權纘)

추성정난위사공신 가선대부(推誠定難衛社功臣嘉善大夫) 덕은군(德恩君)

신 송기수(宋麒壽)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성균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成均館事) 신 조사수(趙士秀)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신 정유선(鄭惟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신 심광언(沈光彦)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신 채세영(蔡世英)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

신 이찬(李澯)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신 임호신(任虎臣)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신 주세붕(周世鵬)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겸동지성균관사(同知中樞府事兼同知成均館事) 신 이명(李蓂)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行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

신 한두(韓)

○편수관(編修官)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경연시강관(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 심통원(沈通源)

중훈대부(中訓大夫) 수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경연시강관(守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 정언각(鄭彦慤)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경연시강관(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 원계검(元繼儉)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경연시강관 신 이세장(李世璋)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경연시강관 신 경혼(慶渾)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경연시강관승문원참교(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承文院參校) 신 정유길(鄭惟吉)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경연시강관승문원참교 교서관교리(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承文院參校校書館校理) 신 홍담(洪曇)

통훈 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 지제교(通禮院左通禮知製敎) 신 박충원(朴忠元)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 신 안위(安瑋)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우통례 겸교서관판교(通禮院右通禮兼校書館判校) 신 노한문(盧漢文)

통훈대부(通訓大夫) 군기시정지제교(軍器寺正知製敎) 신 이원손(李元孫)

통훈대부(通訓大夫) 군기시정지제교 신 민기(閔箕)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재감정(司宰監正) 신 김충렬(金忠烈)

통훈대부(通訓大夫) 예빈시정 지제교(禮賓寺正知製敎) 신 장옥(張玉)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 신 김반천(金半千)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정 지제교(掌樂院正知製敎) 신 윤현(尹鉉)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 지제교(司僕寺正知製敎) 신 이영현(李英賢)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도시정(司寺正) 신 성세장(成世章)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 겸교서관교리(司僕寺正兼校書館校理)

신 박공량(朴公亮)

통훈대부(通訓大夫) 선공감정(繕工監正) 신 김개(金鎧)

통훈대부(通訓大夫) 제용감정(濟用監正) 신 김확(金擴)

통훈대부(通訓大夫) 예빈시정지제교 겸승문원참교(禮賓寺正知製敎兼承文院參校) 신 남응룡(南應龍)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재감정(司宰監正) 신 조광옥(趙光玉)

통훈대부(通訓大夫) 예빈시정(禮賓寺正) 신 유강(兪絳)

중직대부(中直大夫) 수사복시정(守司僕寺正) 신 김천우(金天宇)

중직대부(中直大夫) 수내자시정(守內資寺正) 신 백인영(白仁英)

중직대부(中直大夫) 수예빈시정(守禮賓寺正) 신 윤우(尹雨)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홍문관전한지제교 겸경연시강관(行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 민전(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군기시부정 겸승문원참교(行軍器寺副正兼承文院參校) 신 이택(李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성균관사성 겸승문원참교(行成均館司成兼承文院參校) 신 남응운(南應雲)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복시부정(行司僕寺副正) 신 이무강(李無疆)

중직대부(中直大夫) 사복시부정 겸승문원참교(司僕寺副正兼承文院參校)

신 송찬(宋贊)

봉정대부(奉正大夫) 수홍문관전한지제교 겸경연시강관(守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 윤옥(尹玉)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의정부사인(行議政府舍人) 신 윤부(尹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의정부 사인 신 정유(鄭裕)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홍문관응교지제교 겸경연시강관승문원교감(行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承文院校勘) 신 우상(禹)

봉렬대부(奉列大夫)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신 안방경(安方慶)

중훈대부(中訓大夫) 행홍문관부응교지제교 겸경연시강관승문원교감교서관교리(行弘文館副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承文院校勘校書館校理) 신 김주(金澍)

봉렬대부(奉列大夫) 홍문관부응교지제교 겸경연시강관(弘文館副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 이사필(李士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예빈시첨정 겸승문원교감(行禮賓寺僉正兼承文院校勘) 신 강위(姜偉)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장악원첨정(行掌樂院僉正) 신 홍춘년(洪春年)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내섬시첨정(行內贍寺僉正) 신 남경춘(南慶春)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종부시첨정(行宗簿寺僉正) 신 노경린(盧慶麟)

중직대부(中直大夫) 행장악원첨정(行掌樂院僉正) 신 이건(李楗)

봉정대부(奉正大夫) 행군기시첨정지제교(行軍器寺僉正知製敎) 신 이추(李樞)

○기주관(記注官)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홍문관교리지제교 겸경연시독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 유잠(柳潛)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예조정랑(行禮曹正郞) 신 임내신(任?臣)

중훈대부(中訓大夫) 행병조정랑(行兵曹正郞) 신 이영(李瑛)

봉렬대부(奉列大夫) 행예조정랑(行禮曹正郞) 신 고맹영(高孟英)

조산대부(朝散大夫) 행이조정랑(行吏曹正郞) 신 정준(鄭浚)

조산대부(朝散大夫) 행예조정랑(行禮曹正郞) 신 정종영(鄭宗榮)

봉정대부(奉正大夫) 행이조정랑(行吏曹正郞) 신 박영준(朴永俊)

조산대부(朝散大夫) 행예조정랑(行禮曹正郞) 신 박대립(朴大立)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예조정랑지제교(行禮曹正郞知製敎) 신 권벽(權擘)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예조정랑 겸승문원교리(行禮曹正郞兼承文院校理)

신 이감(李戡)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예조정랑(行禮曹正郞) 신 이수철(李壽鐵)

통덕랑(通德郞) 예조정랑(禮曹正郞) 신 함헌(咸軒)

통선랑(通善郞) 이조정랑(吏曹正郞) 신 이탁(李鐸)

봉직랑(奉直郞) 수공조정랑(守工曹正郞) 신 강억(姜億)

중훈대부(中訓大夫) 행홍문관부교리지제교 겸경연시독관(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 원호변(元虎變)

조봉대부(朝奉大夫) 행홍문관부교리지제교 겸경연시독관(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 윤춘년(尹春年)

조봉대부(朝奉大夫) 행홍문관부교리지제교 겸경연시독관(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 권용(權容)

○기사관(記事官)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예조좌랑(行禮曹佐郞) 신 정순우(鄭純祐)

봉정대부(奉正大夫) 행홍문관수찬지제교 겸경연검토관(行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 신 남궁침(南宮)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성균관전적(行成均館典籍) 신 이억상(李億祥)

통덕랑(通德郞) 행예조좌랑(行禮曹佐郞) 신 신여종(申汝悰)

통덕랑(通德郞) 행성균관전적(行成均館典籍) 신 이지신(李之信)

통선랑(通善郞) 행이조좌랑(行吏曹佐郞) 신 한지원(韓智源)

통선랑(通善郞) 행이조좌랑 신 심수경(沈守慶)

통선랑(通善郞) 행이조좌랑지제교(行吏曹佐郞知製敎) 신 허엽(許曄)

통선랑(通善郞) 행호조좌랑(行戶曹佐郞) 신 황준량(黃俊良)

봉직랑(奉直郞) 행공조좌랑(行工曹佐郞) 신 강욱(姜昱)

봉직랑(奉直郞) 행병조좌랑(行兵曹佐郞) 신 임여(任呂)

봉직랑(奉直郞) 행공조좌랑 신 김적(金適)

승의랑(承議郞) 홍문관수찬지제교 겸경연검토관(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 신 이우민(李友閔)

승의랑(承議郞) 병조좌랑(兵曹佐郞) 신 이언충(李彦忠)

승의랑(承議郞) 병조좌랑 신 이중경(李重慶)

승의랑(承議郞)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신 이광진(李光軫)

승의랑(承議郞) 공조좌랑(工曹佐郞) 신 고경허(高景虛)

승의랑(承議郞) 성균관전적 신 기대항(奇大恒)

선교랑(宣敎郞) 수병조좌랑(守兵曹佐郞) 신 김규(金)

선교랑(宣敎郞) 수성균관전적(守成均館典籍) 신 황호(黃祜)

봉정대부(奉正大夫) 행예문관봉교(行藝文館奉敎) 신 최언수(崔彦粹)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예문관봉교(行藝文館奉敎) 신 민지(閔)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예문관봉교 신 이순효(李純孝)

승훈랑(承訓郞) 행예문관봉교(行藝文館奉敎) 신 김익(金瀷)

선교랑(宣敎郞) 행예문관봉교(行藝文館奉敎) 신 이문형(李文馨)

선무랑(宣務郞) 행예문관봉교(行藝文館奉敎) 신 정사량(鄭思亮)

선교랑(宣敎郞) 행예문관봉교(行藝文館奉敎) 신 김질충(金質忠)

무공랑(務功郞)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신 목첨(睦詹)

무공랑(務功郞) 예문관봉교 신 강사안(姜士安)

무공랑(務功郞) 예문관봉교 신 이지행(李之行)

무공랑(務功郞) 예문관봉교 신 강섬(姜暹)

선교랑(宣敎郞) 행홍문관저작 겸경연설경(行弘文館著作兼經筵說經)

신 유순선(柳順善)

계공랑(啓功郞) 행예문관대교(行藝文館待敎) 신 이명(李銘)

통사랑(通仕郞)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 신 김귀영(金貴榮)

봉훈랑(奉訓郞) 행예문관검열(行藝文館檢閱) 신 유신(柳信)

승의랑(承議郞) 행예문관검열(行藝文館檢閱) 신 이관(李瓘)

승사랑(承仕郞)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신 이희백(李希伯)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9책 174면

註21244]가정(嘉靖) 29년: 1550 명종 5년.

인종실록 편수관 명단

가정(嘉靖) 29년9월 일.

춘추관(春秋館)이 교지(敎旨)를 받들어 찬(撰)하였다.

전후의 관원을 아울러 적는다.

○ 감사(監事)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신(臣) 심연원(沈連源)

○ 지사(知事)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행예조판서겸판의금부사(行禮曹判書兼判義禁府事) 영평군(鈴平君) 신 윤개(尹漑)

숭정대부(崇政大夫) 행이조판서겸판의금부사지경연사(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 신 상진(尙震)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겸지경연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議政府左贊成兼知經筵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영성군(靈城君) 신 신광한(申光漢)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겸지경연사(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 상락군(上洛君) 신 김광준(金光準)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동지경연사(議政府左參贊兼同知經筵事) 신 임권(任權)

○ 동지사(同知事)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우참찬 겸지경연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議政府右參贊兼知經筵義禁府事五衛都摠莩摠管) 신 박수량(朴守良)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겸지의금부사(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 호산군(壺山君) 신 송세형(宋世珩)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신 남세건(南世健)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신 김광철(金光轍)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신 유진동(柳辰仝)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신 권찬(權纘)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동지의금부성균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成均館事) 신 조사수(趙士秀)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신 심광언(沈光彦)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겸동지성균관사(同知中樞府事兼同知成均館事) 신 이명(李蓂)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行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

신 한두(韓)

○ 편수관(編修官)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경연시강관승문원참교교서관교리(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承文院參校校書館校理) 신 홍담(洪曇)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좌통례지제교(通禮院左通禮知製敎)

신 박충원(朴忠元)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재감정(司宰監正) 신 김충렬(金忠烈)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 신 김반천(金半千)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도시정(司寺正) 신 성세장(成世章)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 겸교서관교리(司僕寺正兼校書館校理)

신 박공량(朴公亮)

통훈대부(通訓大夫) 선공감정(繕工監正) 신 김개(金鎧)

통훈대부(通訓大夫) 예빈시정(禮賓寺正) 신 유강(兪絳)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복시부정(行司僕寺副正) 신 이무강(李無疆)

봉정대부(奉正大夫) 수홍문관전한지제교 겸경연시강관(守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 윤옥(尹玉)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의정부사인(行議政府舍人) 신 윤부(尹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의정부사인 신 정유(鄭裕)

봉렬대부(奉列大夫) 홍문관부응교 제교 겸경연시강관(弘文館副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 이사필(李士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종부시첨정(行宗簿寺僉正) 신 노경린(盧慶麟)

○ 기주관(記注官)

봉정대부(奉正大夫) 행이조정랑(行吏曹正郞) 신 박영준(朴永俊)

조산대부(朝散大夫) 행병조정랑(行兵曹正郞) 신 박대립(朴大立)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예조정랑지제교(行禮曹正郞知製敎) 신 권벽(權擘)

○ 기사관(記事官)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성균관전적(行成均館典籍) 신 이억상(李億祥)

통덕랑(通德郞) 행예조좌랑(行禮曹佐郞) 신 신여종(申汝悰)

통선랑(通善郞) 행이조좌랑(行吏曹佐郞) 신 심수경(沈守慶)

통선랑(通善郞) 행이조좌랑지제교(行吏曹佐郞知製敎) 신 허엽(許曄)

통선랑(通善郞) 행호조좌랑(行戶曹佐郞) 신 황준량(黃俊良)

봉직랑(奉直郞) 행병조좌랑(行兵曹佐郞) 신 임여(任呂)

봉직랑(奉直郞) 행공조좌랑(行工曹佐郞) 신 김적(金適)

승의랑(承議郞) 행병조좌랑(行兵曹佐郞) 신 이언충(李彦忠)

승의랑(承議郞) 병조좌랑(兵曹佐郞) 신 이중경(李重慶)

승의랑(承議郞)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신 이광진(李光軫)

승의랑(承議郞) 공조좌랑(工曹佐郞) 신 고경허(高景虛)

승의랑(承議郞)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신 기대항(奇大恒)

선교랑(宣敎郞) 수병조좌랑(守兵曹佐郞) 신 김규(金)

선교랑(宣敎郞) 수성균관전적(守成均館典籍) 신 황우(黃祐)

선교랑(宣敎郞) 행예문관봉교(行藝文館奉敎) 신 김질충(金質忠)

무공랑(務功郞)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신 목첨(睦詹)

무공랑(務功郞) 예문관 교(藝文館奉敎) 신 이지행(李之行)

무공랑(務功郞)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신 강섬(姜暹)

계공랑(啓功郞) 행예문관대교(行藝文館待敎) 신 이명(李銘)

명종 10권, 5년(1550 경술/명가정(嘉靖) 29년) 12월 22일(신사) 4번째기사

이무강·심수경·강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무강(李無疆)을 홍문관직제학으로,【무강이 처음에 진복창에게 붙어서 갑자기 좋은 관직을 얻었었는데, 복창이 몰락한 뒤에는 이기의 주구(走狗)가 되어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이기는 매양 훌륭한 인재라고 칭찬하였는데, 어느날 이조판서에게 ‘직제학이 결원이니, 꼭 무강을 의망(擬望)하라.’고 하였다】심수경(沈守慶)을 이조정랑으로, 강섬(姜暹)을 예조좌랑으로, 최우(崔堣)를 사간원정언으로, 이감(李戡)을 홍문관수찬으로 삼았다.

○以李無疆爲弘文館直提學,【無疆初附陳復昌, 驟得美官, 自陳之敗, 爲李芑鷹犬, 多殺士類。 芑每以美材稱之, 見吏判曰: “直提學有闕, 須擬無疆” 云。】 沈守慶爲吏曹正郞, 姜暹爲禮曹佐郞, 崔堣爲司諫院正言, 李戡爲弘文館修撰。

명종 12권, 6년(1551 신해/명가정(嘉靖) 30년) 9월 12일(정유) 2번째기사

경혼·정유길·권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경혼(慶渾)을 청홍도관찰사로, 정유길(鄭惟吉)을 승정원도승지로, 권철(權轍)을 좌승지로, 홍담(洪曇)을 우승지로, 윤옥(尹玉)을 좌부승지로, 남응운(南應雲)을 우부승지로, 성세장(成世章)을 동부승지로, 이몽필(李夢弼)을 예조참의로, 김주(金澍)를 장례원판결사로, 이탁(李鐸)을 홍문관직제학으로, 윤춘년(尹春年)을 전한으로, 정종영(鄭宗榮)을 부교리로, 강섬(姜暹)을 사간원정언으로, 김귀영(金貴榮)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삼았다.

○以慶渾爲淸洪道觀察使, 鄭惟吉爲承政院都承旨, 權轍爲左承旨, 洪曇爲右承旨, 尹玉爲左副承旨, 南應雲爲右副承旨, 成世章爲同副承旨, 李夢弼爲禮曹參議, 金澍爲掌隷院判決事, 李鐸爲弘文館直提學, 尹春年爲典翰, 鄭宗榮爲副校理, 姜暹爲司諫院正言, 金貴榮爲弘文館副修撰。

명종 12권, 6년(1551 신해/명가정(嘉靖) 30년) 10월 25일(기묘) 2번째기사

양사에서 자신들의 체직을 청하며 이기의 처벌을 주장했으나 불허하다

대사헌 이명규(李名珪), 대사간 김주(金澍), 사간 이사필(李士弼), 장령 정준(鄭浚)·임내신(任臣), 지평 어계선(魚季瑄)·민지(閔), 헌납 이중경(李重慶), 정언 김규(金)·강섬(姜暹)등이 아뢰기를,

“영중추부사 이기의 죄악이 공론에 뚜렷하게 제기된 지 오래입니다. 신들은 이목(耳目)의 관원으로서 즉시 논계하지 못하고 공론이 시종에게서 먼저 제기되게 하였으니, 신들의 직분을 잘 수행하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하니,

답하기를,

“보고 듣는데는 선후(先後)가 있는 법이니, 어찌 이것이 직분을 잃은 것이겠는가?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이기는 본래 음흉한 사람으로서 자기의 공만 믿고 마음대로 방자하게 굴면서 정권을 농락하고 사림을 제압하여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조금만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곧바로 죄로 다스리니 그 권세는 날로 치성(熾盛)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벼슬의 제수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오므로 뇌물을 바치고 청탁하려는 사람들이 그의 문을 메우니 현능 여부는 가리지도 않고 오직 재물의 경중에 따라 하였으며, 만약 전조(銓曹)의 장관이 조금만 자기 뜻을 거스르면 공공연하게 성을 내며 끝내 죄에 빠뜨려 해를 입히는 등 조정의 명기(名器)를 자기 한몸의 뇌물얻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또 둔전(屯田)이 있는 지방의 병사와 수사 및 수령들에게 촉탁하여 그 둔전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으니, 황주(黃州)·봉산(鳳山) 및 전라도·청홍도 병영(兵營)의 둔전은 모두 그에게 빼앗겼고 그 밖에도 빼앗긴 곳을 낱낱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이들 병영과 각 읍은 이로 인하여 잔폐해져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양민들의 감축이 오늘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상께서 이를 염려하시어 경석(經席)에서 누차 간절하신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기는 오랫동안 수상 자리에 있으면서 성상의 마음을 잘 이어받아 준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정수(定數) 외의 사반(私伴)이 한 고을에 십여명에 이르고 전국에 없는 고을이 없으니 이를 합하여 계산하면 몇 백명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방납(防納)은 바로 간사한 백성의 모리(謀利)하는 술책이므로 비록 필부라도 약간의 식견이 있으면 오히려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이기는 삼공의 반열에 있으면서 차마 못할 짓을 하였으니, 그의 용심(用心)을 알 만합니다. 열읍(列邑)에서 한없이 거두어들이는데 수령들도 그 뜻을 받아서 뇌물실은 짐바리가 줄을 이었습니다. 또 노비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공공연히 탈취하고, 만약 그 억울함을 송관(訟官)에게 호소하여 그 소장을 접수시킨 자가 있으면 즉시 그 송관의 장을 불러다가 위협으로 겁을 주었습니다. 이기의 형편없는 정상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렀는데도 공론은 형적도 없고 도리어 서로 이를 본받아 습속이 날로 비루해지고 탐욕의 기풍은 날로 치성하여 민생을 피폐하게 하여 백성이 이미 흔들리매 나라의 형세가 위험하여 패망의 화가 조석에 임박해 있으니 식견있는 인사라면 어느 누가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일벌백계의 본보기를 보이지 않는다면 온 나라가 함께 망하는 화를 장차 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속히 멀리 귀양보내어 많은 사람의 심정을 통쾌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공이 크고 죽음이 임박한 대신을 어찌 귀양보낼 수 있겠는가? 공론이 이와 같다면 마땅히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경계할 것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수 밖의 반인(伴人)과 둔전을 강탈 점유한 사실은 열읍에 조사해 보면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기가 을사년에 윤임(尹任)등을 살해하고 훈적(勳籍)에 오르고는 드디어 조정의 권세를 마음대로 농락하면서 탐욕과 횡포를 자행(恣行)하니, 한때의 명현(名賢)들이 남김없이 귀양하고 살해되어 사람들이 호랑이처럼 무서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무강(李無疆)같은 그의 조아(爪牙) 응견(鷹犬)의 무리가 모두 외지(外地)로 쫓겨나자, 사람들이 비로소 그 악을 공격하였다.

○大司憲李名珪、大司諫金澍、司諫李士弼、掌令鄭浚任鼐臣、持平魚季瑄閔箎、獻納李重慶、正言金虬姜暹啓曰: “領中樞府事李芑罪惡, 顯發於公論久矣。 臣等爲耳目之官, 不卽論啓, 而使公論先發於侍從, 臣等之失職甚矣。 請遞臣等之職。” 答曰: “聞見有先後。 豈以此爲失職乎? 勿辭。” 仍啓曰: “李芑本以貪饕兇險之人, 恃功專恣, 擅弄權柄, 鉗制士林, 莫敢開口, 少有不協, 輒置於罪, 勢焰日熾, 無所忌憚。 官爵除拜, 皆出其手, 賄賂請托, 輻轃其門, 不擇能否, 而惟貨之輕重。 銓曹之長, 少違其意, 則公然發怒, 終必陷害, 使朝廷名器, 爲一己得賂之資。 又囑屯田所在兵、水使及守令, 占爲己有, 黃州鳳山全羅淸洪道兵營屯田, 皆在於奪占之中。 其他被奪之處, 不可枚擧, 而此等營與各邑, 因此凋弊, 將不能支, 良民之縮, 莫甚於今日。 自上軫念經席之上, 屢有丁寧之敎, 久在首相之位, 不思遵體聖心, 數外私伴, 一邑或至十餘人, 而無邑無之, 合而計之, 則不知其幾百也。 防納者乃奸民謀利之術, 雖匹(失)〔夫〕稍有知識, 尙恥爲之, 在三公之列而忍爲之, 其用心可知。 徵索列邑, 而靡有紀極, 守令承風, 駄載絡繹。 人有臧獲, 公然奪取, 若有訴冤於訟官而接狀, 則招訟官之長, 刼之以威。 其爲無狀, 一至於此, 而公論泯滅, 轉相效尤, 習俗日鄙, 貪風日盛, 使民生困瘁, 邦本已搖, 國勢岌岌, 危亡之禍, 迫在朝夕。 有識之士, 孰不痛憤? 若不懲一勵百, 則國家淪胥之禍, 將不可救。 請亟竄黜, 以快輿情。” 答曰: “功重垂死大臣, 豈可竄黜乎? 公論如此, 當改過自懲矣。 不允。 數外伴人及奪占屯田, 考諸列邑則可知虛實矣。”

【史臣曰: “芑在乙巳, 殺尹任等, 錄勳籍, 遂專朝權, 極肆貪暴, 一時名賢, 竄殛無遺, 人畏之如虎。 至是其瓜牙、鷹犬, 如李無彊輩, 皆出于外, 衆始(恐)〔攻〕其惡。”】

명종 13권, 7년(1552 임자/명가정(嘉靖) 31년) 2월 12일(갑자) 4번째기사

조사수·박영준·이희백·강섬·정윤성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사수(趙士秀)를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박영준(朴永俊)을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이희백(李希伯)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강섬(姜暹)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정척(鄭)을 저작(著作)으로, 정윤성(鄭允成)을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로, 김공석(金公奭)을 청홍도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以趙士秀爲刑曹參判, 朴永俊爲議政府舍人, 李希伯爲司諫院正言, 姜暹爲弘文館修撰, 鄭惕爲著作, 鄭允成爲平安道節度使, 金公奭爲淸洪道水軍節度使。

명종 13권, 7년(1552 임자/명가정(嘉靖) 31년) 3월 13일(을미) 1번째기사

남궁침·정준·김개등을 어사로 파견하다

남궁침(南宮)을 경상도에, 정준(鄭浚)을 전라도에, 김개(金鎧)를 평안도에, 강섬(姜暹)을 함경도에 어사로 보내면서 이르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어사에게 역기(驛騎)를 타게하지 않고 사복마(司僕馬)를 타게했기 때문에 수령들이 미리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또한 그대들에게 사복마를 주노니, 복명(復命)을 급선무로 삼지말고 모든 일을 한결같이 사행(私行)인 것처럼 하여 조용히 출입하면서 민생(民生)의 질고를 살피고 읍재(邑宰)들의 비리를 적발하여 아뢰라.”하였다.

정준(鄭浚) 등이 회계하기를,

“사복마가 중도에 병들거나 절게 되면 어찌하겠습니까? 또 빨리 달리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 이르는 고을에서는 어사인 줄 알지 못한다하더라도 다른 고을에서는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하니,

전례대로 일마(馹馬)를 타고가라고 전교하였다.【어사에게 사복마를 타게 하려고 한 것은 곧 전일 정준이 경연에서 아뢰었기 때문인데, 지금 이 하명(下命)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걱정하는 빛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乙未/遣御史南宮忱于慶尙道, 鄭浚于全羅道, 金鎧于平安道, 姜暹于咸鏡道。 命之曰: “祖宗朝, 令御史乘司僕馬, 不乘驛騎, 故守令不得預知。 今亦給爾等以司僕馬, 勿以復命爲急, 凡事一如私行, 從容出入, 詢問民生疾苦, 摘發邑宰貪汚而啓之。” 浚等回啓曰: “司僕馬, 若於中途或病或蹇, 則何以爲之? 且不能疾馳。 初到之邑, 則雖不覺其爲御史, 他邑則必皆知之。” 傳曰: “依前例乘馹而往。”【使御史乘司僕馬, 乃前日鄭浚啓于經席, 而今當是命, 莫知所措, 遑遑有憂悶之色, 人皆竊笑之。】

명종 13권, 7년(1552 임자/명가정(嘉靖) 31년) 3월 21일(계묘) 4번째기사

신영·김주·윤춘년·김규·왕희걸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영(申瑛)을 사헌부대사헌으로, 김주(金澍)를 홍문관부제학으로, 윤춘년을 사간원대사간으로, 김규(金)를 사헌부지평으로, 왕희걸(王希傑)을 사간원 헌납으로, 이감(李戡)을 홍문관교리로, 강섬(姜暹)을 사간원정언으로, 윤의중(尹毅中)을 승정원주서로 삼았다.

〔○〕以申瑛爲司憲府大司憲, 金澍爲弘文館副提學, 尹春年爲司諫院大司諫, 金虯爲司憲府持平, 王希傑爲司諫院獻納, 李戡爲弘文館校理, 姜暹爲司諫院正言, 尹毅中爲承政院注書。

명종 13권, 7년(1552 임자/명가정(嘉靖) 31년) 5월 27일(무신) 3번째기사

이미·김주·윤춘년·이거·이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미(李薇)를 한성부판윤으로,【이미는 이행(李荇)·이기(李)의 동생이다. 기묘사화 이후 이행이 요직에 앉게 되자 이미가 최홍제(崔弘濟)·홍석견(洪石堅)을 힘써 천거하다가 사림(士林)에게 죄를 얻었었다. 공론이 탄핵하자 이미가 이행에게 ‘사림이 최홍제·홍석견을 논박하는 것은 반드시 기묘년 사람들을 부식(扶植)시키려는 것이다.’하니, 이행이 그렇게 여겨 장차 사림의 화(禍)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때 마침 민수천(閔壽千)이 옥당(玉堂)에 있었는데 이행과 서로 좋게 지냈으므로 민수천이 이행에게 ‘두 사람 모두가 잡스러워 취할 만하지 못하므로 사림이 논박한 것이다. 지금 영공(令公)이 화를 내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하니, 이행이 그만두었다. 이미의 인품이 이렇기 때문에 조의(朝議)에 용납되지 못했는데, 이기가 권세를 잡은 을사년 이후에 다시 조정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기와도 서로 좋게 지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형제가 서로 화를 감싸 주지 못하였다】김주(金澍)를 사간원대사간으로, 윤춘년(尹春年)을 홍문관부제학으로, 이거(李)를 사간원사간으로, 이감(李戡)을 사헌부지평으로, 이중경(李重慶)을 사간원헌납으로, 이명(李銘)과 이관(李瓘)을 정언으로, 강섬(姜暹)을 홍문관수찬으로 삼았다.

○以李薇爲漢城府判尹,【薇, 李荇、李芑之弟也。 己卯後, 荇當國, 薇力薦崔弘濟、洪石堅, 乃得罪於士林者也。 公論彈劾之, 薇言於荇曰: “士林駁弘濟、石堅, 必欲扶植己卯人也。” 荇然之, 將起士林之禍。 適閔壽千在玉堂, 與荇相許, 言於荇曰: “兩人皆麤雜無可取, 故士林駁之。 令公若怒, 則人心不服矣。” 荇乃止。 薇之爲人如是, 故不爲朝議所容, 乙巳年, 李芑秉權之後, 更廁朝班。 然而與芑亦不相能, 故兄弟不能相比扇禍。】 金澍爲司諫院大司諫, 尹春年爲弘文館副提學, 李璖爲司諫院司諫, 李戡爲司憲府持平, 李重慶爲司諫院獻納, 李銘、李瓘爲正言, 姜暹爲弘文館修撰。

명종 13권, 7년(1552 임자/명가정(嘉靖) 31년) 6월 1일(임자) 1번째기사

검토관 강섬이 공계언에 관해 아뢰다

상이 소대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강섬(姜暹)이 아뢰었다.

“어제 강론한 공계언(孔季彦)은 동한명제(東漢明帝) 때 사람입니다. 당시 말[斗]만한 우박이 내렸었는데, 공계언이, 귀신(貴臣)이 권세를 천단하고 모후(母后)가 정사를 맡고 있어서이니 폐하는 성덕을 닦아 재변을 없애야 한다고 아뢰었습니다. 공계언은 강직한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후예입니다.”

○壬子朔/上召對。 檢討官姜暹曰: “昨日所講孔季彦, 乃東漢明帝時人。 其時雨雹大如斗, 季彦曰: ‘貴臣擅權, 母后當政。 陛下宜修聖德以弭災。’ 季彦, 乃剛直之人, 孔子之後也。”

명종 13권, 7년(1552 임자/명가정(嘉靖) 31년) 6월 22일(계유) 1번째기사

신광한·정대년·권철·홍담·성세장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광한(申光漢)을 의정부우찬성으로, 정대년(鄭大年)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정대년은 관후한 장자(長者)인데, 정원(政院)의 종장(宗長)으로 오래 있었는데도 승차(陞差)되지 않아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이제 비로소 특별히 제수되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권철(權轍)을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홍담(洪曇)을 좌승지로, 성세장(成世章)을 우승지로, 이탁(李鐸)을 좌부승지로, 남궁침(南宮)을 우부승지로,【남궁침은 인품이 흉사(凶邪)하고 음교(陰巧)하여 사람들과 말하고 웃을 때는 마치 엿처럼 달콤하지만 마음속에는 독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웃음 속에 칼이 들어 있다.’고 하였다. 구수담(具壽)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남궁침의 아비 남궁익(南宮翼)이 그 도의 현감(縣監)으로 있었다. 남궁침이 일찍이 근친(覲親)을 갔다가, 그 고을 사람을 꾀어 감사(監司)에게 자기 아비가 선정(善政)을 한다고 거짓 진정(陳情)하게 하여 포상할 것을 아뢰게 함으로써 은상(恩賞)을 받게하려 하였으나 형적이 드러나고 말았다. 구수담은 이미 남궁익이 백성을 잘 다스린 정상이 없음을 알고 있었고, 또 남궁침이 조정을 속이려 한 것에 노하여 거짓 진정한 고을 사람의 죄를 다스렸으므로 남궁침이 유감을 품었다. 구수담이 죄를 입고 멀리 귀양가 있을 때 남궁침이 가만히 이기(李)·윤원형(尹元衡)·진복창(陳復昌)등에게 구수담이 부도(不道)한 말을 하였다고 일러서 분심(忿心)을 격발, 마침내 사사(賜死)시켰으니 그의 용심이 참혹하다고 하겠다】윤선지(尹先智)를 동부승지로,【윤선지는 무인(武人)인데, 대비(大妃)의 외구(外舅) 이귀령(李龜齡) 첩의 딸을 첩으로 삼은 자이다. 윤원형이 그의 뇌물을 받고 천거한 것이다】강섬(姜暹)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이언충(李彦忠)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김규(金)를 부교리(副校理)로, 이우민(李友閔)을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김홍도(金弘度)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이중경(李重慶)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안수(安璲)를 박사(博士)로, 윤의중(尹毅中)을 저작(著作)으로, 이양(李樑)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조성(趙晟)을 부사과(副司果)로 삼았다.【조성은 기성인(箕城人)으로 유일(遺逸) 조욱(趙昱)의 형이다. 어려서 음보(蔭補)로 참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인품이 천문(天文)·지지(地誌)·의약(醫藥)·복서(卜筮)·산수(算數)·율려(律呂)등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나는 세상에서 쓸모가 없다. 남을 구하는 공효(攻)는 단지 의술로만 이룰 수 있다.’하고는 의학에 힘써 깊이 통달했으므로, 그가 살린사람이 매우 많았다】

○癸酉/以申光漢爲議政府右贊成, 鄭大年漢城府右尹,大年寬厚長者, 宗長政院, 久未得陞, 人多歎之, 今始特授, 人皆喜。】 權轍爲承政院都承旨, 洪曇爲左承旨, 成世章爲右承旨, 李鐸爲左副承旨, 南宮忱爲右副承旨,, 爲人兇邪陰巧, 與人言笑, 其甘如飴, 而中含虺螫, 人以爲: “笑中有刀。” 具壽聃全羅監司時, 其父爲縣監於其道。 嘗歸覲, 誘本縣之人, 僞陳其父善政於監司, 欲使褒啓, 冀竊恩賞, 顯有形迹。 壽聃旣知治民無狀, 又怒欲欺朝廷, 治縣人瞞呈之罪。 有憾於此, 及壽聃被罪投荒, 陰說壽聃所不道之言於李芑尹元衡陳復昌等, 激成兇忿, 終至賜死。 其爲用心, 可謂慘矣。】 尹先智爲同副承旨,先智, 武人也, 以大妃之外舅李龜齡妾女子, 爲妾者也。 元衡受其賕薦之。】 姜暹爲司諫院獻納, 李彦忠爲弘文館校理, 金虬爲副校理, 李友閔爲吏曹佐郞, 金弘度爲司諫院正言, 李重慶爲弘文館副修撰, 安璲爲博士, 尹毅中爲著作, 李樑爲承政院注書, 趙晟爲副司果。, 箕城人, 遺逸兄也。 少時以蔭補參奉, 不就。 其爲人, 於天文、地誌、醫藥、卜筮、算數、律呂, 無不能解。 嘗曰: “自分無用於世。 濟人功效, 只可醫術以就之。” 力於醫學, 深達其用, 前後活人甚多。】

명종 13권, 7년(1552 임자/명가정(嘉靖) 31년) 6월 23일(갑술) 2번째기사

김규·강섬·김귀영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규(金)를 사간원헌납으로, 강섬(姜暹)을 홍문관수찬으로, 김귀영(金貴榮)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以金虯爲司諫院獻納, 姜暹爲弘文館修撰, 金貴榮爲副修撰。

명종 13권, 7년(1552 임자/명가정(嘉靖) 31년) 9월 12일(신묘) 2번째기사

홍문관부제학 정유 등이 탐학한 관리 정세호를 벌할 것을 청하다

홍문관 부제학 정유(鄭裕)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임금의 다스림에는 지향(指向)할 바를 먼저 정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숭상하시는 바가 선(善)에 있습니까? 아니면 불선(不善)에 있습니까? 전하께서 바야흐로 염치를 권려하여 일대의 숭상하는 바를 일신시키려고 백료(百僚) 가운데서 염근(廉謹)한 사람을 가리라 명하셨으니, 권장하는 방법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 사람들이 전하께서 숭상하는 바가 염치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간이 정세호(鄭世虎)의 탐오한 정상 때문에 여러날 복합(伏閤)하면서 더러운 풍속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시는 명이 없으시니, 전하께서 염치를 권장하시는 훌륭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제위왕(齊威王)은 전국(戰國)시대의 중주(中主)였는데도 오히려 아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이고 즉묵대부(卽墨大夫)를 봉하여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지게 하였습니다.1264) 지금은 탐풍이 크게 일어 염치의 도가 사라지는 때인데 전하께서는 기강을 진작시키지는 않고 도리어 취렴(聚)하는 신하만을 아껴 명정(明正)한 율(律)을 쓰지 않으시니, 전하의 명성(明聖)이 제위왕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대간의 논집(論執)이 어찌 과중한 논의로 곧고 바르다는 이름을 사려는 것이겠습니까? 성종(成宗)처럼 인성(仁聖)하신 분도 오히려 신정(申瀞) 한 사람을 죽여 그 나머지를 경계하였는데1265) 후세에서 성종이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고 지탄하지 않음은 전하께서도 일찍이 들으신 일이고 본받을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하옥시키라는 청은 주륙(誅戮)하라는 것보다는 가벼운 것이고 정세호의 탐욕은 신정보다 더한데도 전하께서 대간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니, 신들은 전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일국의 숭상하는 바가 끝내는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정세호는 재상으로서 잘못된 소행이 많기 때문에 즉시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게 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註1264]아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이고 즉묵대부(卽墨大夫)를 봉하여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임금이 좌우의 아첨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 제 위왕(齊威王)이 잘못 다스린다는 말이 날마다 들려오는 즉묵대부(卽墨大夫)와 잘 다스린다는 말이 날마다 들려오는 아대부의 뒷조사를 하여 그것이 사실과 정반대임을 확인한 다음, 아대부와 그를 기리던 좌우의 신하들을 팽형(烹刑)에 처하자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함. 《사기(史記)》권46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註1265]신정(申瀞) 한 사람을 죽여 그 나머지를 경계하였는데: 신정은 신숙주(申叔舟)의 아들이다. 그는 고령현(高靈縣)의 사노(寺奴)를 자기의 종으로 삼기 위해 어보(御寶)를 위조, 문서를 발송하여 독책하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권지5 세조조본말(世祖韓本末).

○弘文館副提學鄭裕等上箚曰:

人君之爲治, 莫先於定所向。 殿下之所尙, 其在於善乎? 其在於不善乎? 殿下方欲勵廉恥, 以新一代之所尙, 命於百僚之中, 揀其廉謹之人, 其勸奬之方, 可謂至矣。 一國之人, 咸知殿下之所尙, 在於廉恥, 而今者臺諫, 以鄭世虎貪汚之狀, 累日伏閤, 冀革汚習, 而終無允兪之命, 殿下勸奬廉恥之盛意, 果安在哉? 威王, 戰國之中主, 猶能烹大夫, 封即墨大夫, 而齊國大治。 今値貪風大熾, 廉恥道喪之時, 殿下不爲振動綱紀, 而顧乃愛惜聚歛之臣, 不擧明正之律, 以殿下之明聖, 曾威王之不若乎? 臺諫之所以論執者, 豈爲過重之論, 以沽讜直之名哉? 以成廟之仁聖, 猶忍誅一申瀞, 以警其餘, 而後世不以殺不辜指成廟, 亦殿下之所嘗聞, 而足以爲法者也。 今下獄之請, 緩於誅戮, 世虎之貪, 過於申瀞, 而殿下不聽臺諫之言。 臣等未知殿下之意, 而一國之所尙, 終至於何如也?

答曰: “鄭世虎, 以宰相之人, 所行多誤, 故卽命先罷後推矣。 不允。”

명종 13권, 7년(1552 임자/명가정(嘉靖) 31년) 9월 12일(신묘) 3번째기사

임억령·유강·송찬·강섬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임억령(林億齡)을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유강(兪絳)을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송찬(宋贊)을 전한(典翰)으로, 강섬(姜暹)을 수찬(修撰)으로, 이희안(李希顔)을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삼았다.

○以林億齡爲兵曹參知, 兪絳爲弘文館直提學, 宋贊爲典翰, 姜暹爲修撰, 李希顔爲高靈縣監。

명종 14권, 8년(1553 계축/명가정(嘉靖) 32년) 4월 29일(갑진) 2번째기사

신영·강섬·유여흠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영(申瑛)을 한성부판윤으로, 강섬(姜暹)을 홍문관수찬으로, 유여흠(兪汝欽)을 절충장군 행용양위호군으로 삼았다.

○以申瑛爲漢城府判尹, 姜暹爲弘文館修撰, 兪汝欽爲折衝將軍行龍驤衛護軍。

명종 19권, 10년(1555 을묘/명가정(嘉靖) 34년) 12월 3일 계사 4번째기사

조사수, 정대년, 유지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사수(趙士秀)를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정대년(鄭大年)을 대호군(大護軍)으로, 유지선(柳智善)을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이언충(李彦忠)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고경허(高景虛)를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이언경(李彦璟), 강섬(姜暹)을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홍천민(洪天民)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삼았다.

○以趙士秀爲知敦寧府事, 鄭大年爲大護軍, 柳智善爲掌隷院判決事, 李彦忠爲司憲府執義, 高景虛爲司諫(旣)〔院〕獻納, 李彦璟ㆍ姜暹爲弘文館副校理, 洪天民爲司諫院正言。

명종 20권, 11년(1556 병진/명가정(嘉靖) 35년) 1월 9일 기사 2번째기사

이중경을 홍문관교리로, 강섬을 부교리로 삼다

이중경(李重慶)을 홍문관교리로, 강섬(姜暹)을 부교리로 삼았다

○以李重慶爲弘文館校理, 姜暹爲副校理。

명종 22권, 12년(1557 정사/명가정(嘉靖) 36년) 1월 12일 병인 3번째기사

조광원, 이명, 목첨, 강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광원(曺光遠)을 형조판서로, 이명(李蓂)을 겸동지경연사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명은 청근하고 번잡하지 않으니 한 벼슬의 책임은 할 수 있지만 묘당(廟堂)에 좌기(坐起)하고 강석(講席)에 나아가는데에는 재주와 지식이 모자라니 적임인 점을 볼 수 없다.

목첨(睦瞻)을 홍문관 교리로, 강섬(姜暹)을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강섬은 국량이 천박하고 오로지 거짓말을 일삼으며 산에 있는 호표(虎豹)의 기상도 없고 방어할 만한 재주도 없는데 단지 활쏘는 것을 대강 익힌 것으로 계급을 뛰어넘어 당상(堂上)의 중한 가자(加資)까지 주었으니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방도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으며 대신이 사람을 천거하는 것 또한 현재(賢才)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시정(時政)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이 한탄스럽다.

○以曺光遠爲刑曹判書, 李蓂爲兼同知經筵事。

【史臣曰: “蓂淸謹不煩, 足爲一官之守, 至於坐廟堂侍講席, 才短識淺, 未見其可也。”】

睦詹爲弘文館校理, 姜暹爲滿浦僉使。

【史臣曰: “暹之爲人, 局量淺(溥)〔薄〕, 專事詐謀, 無虎豹在山之氣, 乏之屛之翰才, 而徒以粗解操弓, 超資越序, 至授堂上重加, 國家用人可謂得其道, 而大臣薦人, 亦可謂得其賢乎? 可歎時政之日非也。”】

명종 22권, 12년(1557 정사/명가정(嘉靖) 36년) 5월 15일(정묘) 4번째기사

헌부가 인산은 요지이니 첨사 김덕룡을 체직하고 무반을 차임할 것을 청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인산(麟山)은 관방(關防)의 요지이고 또 중국인들이 몰래 통행하는 길목이므로 마땅히 적임자를 가려서 보내야 하는 것은 물론 으레 무반(武班) 가운데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채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대간이나 시종(侍從)을 주의(注擬)한 때가 없었는데, 이번에 첨사(僉使) 김덕룡(金德龍)은 시임(時任) 언관(言官)으로 특명도 없이 병조가 계품하여 차임한 것입니다. 이는 내직(內職)을 가벼이 여기고 외직을 중히 여기는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뒷날 뜻밖에 경솔히 체직시키는 조짐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유중영(柳仲郢)이 이미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고 강섬(姜暹)이 또 만포첨사(滿浦僉使)가 되었는데, 대간과 시종이 연이어 외직으로 나가므로 물론(物論)이 대부분 그르게 여깁니다. 더구나 인산은 의주의 속진(屬鎭)입니다. 사체를 헤아려보아도 이 두 고을보다 경한데 어떻게 대간으로 있는 사람에게 자급(資級)을 뛰어 올려주어 차견(差遣)할 수가 있겠습니까? 덕룡을 체직시키고 그의 가자도 개정하소서. 그리고 무반중에서 가려서 차임하소서.”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憲府啓曰: “麟山, 關防旣重, 又當華人潛通之路。 雖當擇遣, 而亦宜例以武班中選差堪任之人可也, 舊未有以臺諫、侍從注擬之時也。 今者僉使金德龍, 以時任言官, 非有特命, 而兵曹啓稟擬差, 不但有內輕外重之弊, 他日意外輕遞之漸, 恐未不由此始也。 柳仲郢旣爲義州牧使, 姜暹又爲滿浦僉使, 臺諫、侍從, 相繼而出, 物論多以爲非。 況麟山, 乃義州之屬鎭。 揆其事體, 又劣於此地, 何以臺諫之人, 超資差遣乎? 請遞德龍, 改正其加, 武班中擇差。” 傳曰: “如啓。”

명종 24권, 13년(1558 무오/명가정(嘉靖) 37년) 12월 6일(무신) 1번째기사

변방에 무신을 파견하는 일과 신사헌의 삭과에 관해 전교하다

삼공·영부사와 이조·병조의 당상을 명초(命招)하여 전교하기를,

“무릇 일은 미리 해놓으면 제대로 되는 법이다. 바야흐로 지금 서쪽 변방에 달적들이 충돌해올 변이 있을까 염려되니 변진(邊鎭)의 수령들을 무신으로 가려서 보내야 한다. 본도(本道)의 절도사(節度使)【심수경(沈守慶)】, 의주 목사 【김덕룡(金德龍)】, 만포첨사(滿浦僉使)【강섬(姜暹)】를 체직하고 명망이 있는 무신으로 신중히 가려서 보내고 싶으니, 경들은 상의하여 아뢰라.

지금 신희(愼喜)【신사헌(愼思獻)의 아들이다】의 상언(上言)을 보건대, 신사헌의 삭과(削科)에 관한 일은 분명하지 못한 듯하다. 마땅히 원통함을 펴주는 일을 거행해야 하겠기에 금부로 하여금 추핵(推)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겠으니, 경들은 알고 있으라.”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당초에 심수경에게 답한 말을 고찰해 보건대 ‘내가 바야흐로 서쪽 변방 때문에 우려하고 있다. 경이 만약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내가 어찌 감히 특별히 제수하겠는가?’했으니, 심수경을 보내어 서쪽 변방의 소임을 담당하게 했던 것은 역시 달적(賊)들의 변이 있을까 염려해서이며 심수경이 그 소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서인 것이다. 그런데 몇 달이 못되어 도로 체직하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당초에 특별히 제수한 것은 무슨 뜻이었으며, 이번에 체직하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한갓 맞이하고 전송하는 폐단만 끼치어 한 지방을 곤궁하고 지치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미리 조치하여 방비하기를 합당하게 한 것이겠는가?“하고,

정원에 전교하기를,

“신사헌을 금부에 내리어, 정사룡(鄭士龍)과 서로 통한 실정과 연유를 자세히 핵실해서 실정을 알아내게 하라.”하였다.

【당초에 정사룡이 중국 조정의 일을 가지고 책문(策問) 제목을 내며 남몰래 신사헌에게 미리 짓게 하니, 신사헌이 글 잘하는 사람에게 차작(借作)하여 과연 을과(乙科)에 수석으로 합격했었는데 물의가 들끓자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정사룡을 파직하고 신사헌의 이름을 방목에서 삭제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금부에 내려 신사헌과 정사룡이 서로 행한 실정과 연유를 추핵하게 한 것이다. 이양은 정사룡의 문인이고, 신사헌은 이양의 심복이다. 이양이 신사헌에게 과거급제를 도로 주게 하려고 그의 아들을 시켜 원통함을 호소하게 했기 때문에 이런 명이 내리게 된 것이다.】

○戊申/命招三公、領府事、吏ㆍ兵曹堂上, 傳曰: “凡事豫則立方。 今西鄙慮有㺚賊衝突之變, 邊鎭守令, 所當以武臣擇送。 本道節度使、沈守慶。】義州牧使、金德龍。】滿浦僉使姜暹。】可遞, 欲以有名望武臣, 十分擇遣。 卿等商議以啓。 今觀愼喜愼思獻子也】上言, 則愼思獻削科之事, 涉於黯黮。 當擧伸冤之政, 令禁府, 推覈得情。 卿等知悉。”

【史臣曰: “按當初答沈守慶之辭曰: “予方以西鄙爲憂。 卿若不能堪任, 予何敢特授乎?” 云, 則遣守慶, 以當西鄙之任, 亦慮有㺚賊之變, 以守慶爲可以當其任者也。 未數月, 旋欲遞之, 然則初之特授者, 何意歟, 今之欲遞者, 亦何意歟? 徒貽迎送之弊, 使一方困瘁, 是豈豫措防備之得宜哉?”】

傳于政院曰: “下愼思獻于禁府, 與鄭士龍相應情由, 詳覆待實。”【初士龍以中朝事策題, 陰令愼思獻先製, 思獻借手於能文者, 果登乙科第一名。 物論譁然, 臺諫交章, 罷士龍, 削思獻之名。 至是命下禁府, 推覈思獻與士蘢相應情由。 蓋李樑, 士龍之門人, 而思獻, 樑之腹心也。 樑欲還給思獻科第, 令其子訴冤, 故有是命。】

명종 25권, 14년(1559 기미/명가정(嘉靖) 38년) 2월 10일 임자 1번째기사

이영현, 강섬, 노경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영현(李英賢)을 이조참의로, 강섬(姜暹)을 병조참지로, 노경린(盧景麟)을 병조정랑으로, 박근원(朴謹元)을 홍문관부교리로, 홍인경(洪仁慶)을 수찬으로, 최희효(崔希孝)를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삼았다.

○壬子/以李英賢爲吏曹參議, 姜暹爲兵曹參知, 盧景麟爲兵曹正郞, 朴謹元爲弘文館副校理, 洪仁慶爲修撰, 崔希孝爲全羅道兵馬節度使。

명종 25권, 14년(1559 기미/명가정(嘉靖) 38년) 5월 6일 정축 1번째기사

병조참지 강섬을 경사에 보내 성절을 하례하다

병조참지 강섬(姜暹)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丁丑/遣兵曹參知姜暹如京師, 賀聖節。

명종 25권, 14년(1559 기미/명가정(嘉靖) 38년) 9월 13일 신사 1번째기사

오상, 강섬, 이기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오상(吳祥)을 승정원도승지로, 강섬(姜暹)을 첨지중추부사로, 이기(李)를 세자시강원설서로 삼았다.

○辛巳/以吳祥爲承政院都承旨, 姜暹爲僉知中樞府事, 李墍爲世子侍講院說書。

명종 26권, 15년(1560 경신/명가정(嘉靖) 39년) 10월 20일 임자 1번째기사

심수경, 강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심수경을 전라도관찰사로, 강섬(姜暹)을 장례원판결사로 삼았다.

○壬子/以沈守慶爲全羅道觀察使, 姜暹爲掌隷院判決事。

명종 27권, 16년(1561 신유/명가정(嘉靖) 40년) 8월 13일 경오 1번째기사

윤옥, 강섬, 경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윤옥(尹玉)을 동지돈령부사로, 강섬(姜暹)을 승정원동부승지로, 경혼(慶渾)을 장례원판결사로, 이식(李拭)을 병조정랑으로, 황정욱(黃廷彧)을 호조좌랑으로 삼았다

○庚午/以尹玉爲同知敦寧府事, 姜暹爲承政院同副承旨, 慶渾爲掌隷〔院〕判決事, 李拭爲兵曹正郞, 黃廷彧爲戶曹佐郞

명종 28권, 17년(1562 임술/명가정(嘉靖) 41년) 7월 21일(계묘) 1번째기사

이언충·강섬·김백균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언충(李彦忠)을 승정원도승지로, 강섬(姜暹)을 좌승지로, 김백균(金百鈞)을 좌부승지로, 윤현(尹鉉)을 우부승지로, 박응남(朴應男)을 동부승지로, 허엽(許曄)【허엽은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고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식견이 얕고 밝지 못하여 다만 사소한 일에 집착할 뿐 사리를 통달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윤춘년(尹春年)을 도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 사람들에게 ‘윤언구(尹彦久)는 나보다 먼저 형연부동(瑩然不動)한 사람이다.’하였다. 윤언구는 윤춘년의 자이다. 어떤 사람이 비웃기를 ‘형연부동이란 번쩍이는 것이 수정같은 것이 아니냐?’고 하니, 또 어떤 사람이 해명하기를 ‘그가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행위에는 그런 점이 있다.’하였다】을 예조참의로, 박대립(朴大立)을 병조참지로 삼았다.

○癸卯/以李彦忠爲承政院都承旨, 姜暹爲左承旨, 金百鈞爲左副承旨, 尹鉉〔爲〕右副承旨, 朴應男爲同副承旨, 許曄【天質頗美, 志嘗向學, 然識見淺暗, 徒規規於事爲之間, 未見有通透處。 依倚尹春年, 意以爲有道者, 嘗語人曰: “尹彦久先我, 見瑩然不動處。” 彦久, 春年字也。 或有哂之者曰: “所謂瑩然不動者, 無乃是晶光如水精底物事乎?” 又有解之者曰: “未知有何所見, 但其人所爲, 自有其事” 云云。】爲禮曹參議, 朴大立爲兵曹參知。

명종 28권, 17년(1562 임술/명가정(嘉靖) 41년) 9월 5일(병술) 1번째기사

오겸·원계검·이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오겸을 의정부우참찬으로, 원계검을 예조판서로, 이양을 공조판서로, 이감(李戡)을 형조참판으로, 이언충을 경기관찰사로, 강욱(姜昱)을 예조참의로, 강섬을 승정원도승지로, 홍천민(洪天民)을 좌승지로, 송찬(宋贊)을 우승지로, 윤현(尹鉉)을 좌부승지로, 박응남을 우부승지로, 허엽을 동부승지로, 김덕룡(金德龍)을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박호원(朴好元)을 의정부사인으로, 조광언(趙光彦)을 통정대부 강계부사(江界府使)로,【응교(應敎)로서 당상에 올랐다】김주(金澍)를 동지중추부사로 삼았다.【김주는 부랑방탕하여 행동이 좋지 못하고 일처리하는 것이 분명치 못하였다. 을묘년 왜변 때 전라감사로 순행차(巡行次) 강진(康津)에 갔다가 병사 원적(元績)이 패전하여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영암(靈巖)으로 도망했다가 이어 나주(羅州)로 달아나서 여러 성이 차례로 함몰되게 하였다】

○丙戌/以吳謙爲議政府右參贊, 元繼儉爲禮曹判書, 李樑爲工曹判書, 李戡爲刑曹參判, 李彦忠爲京圻觀察使, 姜昱爲禮曹參議, 姜暹爲承政院都承旨, 洪天民爲左承旨, 宋賛爲右承旨, 尹鉉爲左副承旨, 朴應男爲右副承旨, 許曄爲同副承旨, 金德龍爲掌隷院判決事, 朴好元爲議政府舍人, 趙光彦爲通政大夫江界府使,【以應敎陞堂上。】 金澍爲同知中樞府事。【浮蕩不檢,臨事鶻突。乙卯倭變,以全羅監司,巡到康津,聞兵使元績敗死,遁入靈巖,仍走羅州,以致諸城相次陷沒。】

명종 28권, 17년(1562 임술/명가정(嘉靖) 41년) 10월 20일 신미 2번째기사

김주, 박충원, 이연현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주(金澍)를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 박충원(朴忠元)을 우윤으로, 이영현(李英賢)을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로, 강섬(姜暹)을 회령부사(會寧府使)로,【상이 강섬을 주의(注擬)하라 명하여 제수하였다】홍천민(洪天民)을 승정원도승지로, 송찬(宋贊)을 좌승지로, 윤현(尹鉉)을 우승지로, 박계현(朴啓賢)을 좌부승지로, 권신(權信)【이양에게 붙어 쓸개를 빼어버리고 아첨하기를 마치 귀신과 물여우[]같이 하였다. 어두운 밤에 권력자에게 찾아가 애걸하여 한 자리 얻어가지고는 대낮에 사람들에게 으스대었다. 근래에 어떤 사람이 윤원형에게 붙었다는 말을 하니 이 소문이 이양에게 알려져서 거의 실의에 빠졌었는데 요즘 다시 화해가 되었으므로 이러한 특지가 내려졌다】을 형조참의로, 조덕원(趙德源)【이양에게 붙어 기회를 보아가며 아첨하여 그의 비위를 잘 맞추었기 때문에 누차 승계(陞階)하여 현직(顯職)에 올랐다】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송하(宋賀)를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으로, 권순(權純)【권신의 조카로서 권신 때문에 그도 이양에게 붙었다. 위에서 끌어주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낮은 관직에 있던 자가 갑자기 현직에 올랐다】을 필선(弼善)으로, 이거(李), 박희립(朴希立)을 문학(文學)으로, 윤두수(尹斗壽)를 이조좌랑으로 삼았다.

○以金澍爲漢城府左尹, 朴忠元爲右尹, 李英賢爲淸洪道觀察使, 姜暹爲會寧府使, 【上命以暹注擬而授之。】 洪天民爲承政院都承旨, 宋賛爲左承旨, 尹鉉爲右承旨, 朴啓賢爲左副承旨, 權信【諂附李樑, 傾側便佞, 如鬼如蜮。 昏夜乞哀, 白日驕人。 近來人有反附於尹元衡之言, 聞於李樑, 幾乎失意, 今復和解, 故有是特旨也。】爲刑曹參議, 趙德源【諂附李樑, 潛伺獻諛, 善中其意, 故屢陞顯秩也。】爲司憲府執義, 宋賀爲世子侍講院輔德, 權純【權信之猶子也。 以信之故, 因附李樑, 有汲引之力, 久在下僚, 一朝登顯。】爲弼善, 李蘧、朴希立爲文學, 尹斗壽爲吏曹佐郞。

명종 29권, 18년(1563 계해/명가정(嘉靖) 42년) 9월 20일(을미) 3번째기사

좌찬성 정응두·예조참판 이택 등을 염빈·국장도감제조 등으로 삼다

좌찬성 정응두(丁應斗), 예조참판 이택(李澤)【별다른 재행도 없으면서 오만하게 자처했다】을 염빈도감(斂殯都監) 제조로, 우의정 심통원을 국장도감 제조로, 우참찬 신희복(愼希復)【젊어서 명망이 있었으나 끝내 일컬을 만한 재능이 없었고 한갓 재산모으는데만 힘썼다】·공조참판 정종영을 제조로, 행 부호군 강섬을 주상(主喪)으로【상복을 입고 3년간 묘를 지켰다】삼았다.

○以左贊成丁應斗、禮曹參判李澤,【別無才行, 但自處甚簡。】爲斂殯都監提調, 以右議政沈通源, 爲國葬都監提調, 右參贊愼希復、【少有名望, 而終無可稱之善, 徒務營産之事。】工曹參判鄭宗榮, 爲提調, 行副護軍姜暹爲主喪。【以衰服, 守墓三年。】

명종 29권, 18년(1563 계해/명가정(嘉靖) 42년) 9월 25일 경자 1번째기사

예조에서 왕세자의 감선을 주상 강섬에게 맡기도록 청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작고하신 왕세자의 3년 동안의 감선(監膳)을 주상(主喪)【강섬(姜暹)】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庚子/禮曹啓曰: “卒王世子三年內監膳, 以主喪【姜暹。】爲之何如?” 傳曰: “如啓。”

명종 30권, 19년(1564 갑자/명가정(嘉靖) 43년) 9월 20일 기미 1번째기사

순회세자의 수묘관 첨지중추부사 강섬등의 가자를 명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순회세자의 수묘관(守墓官) 첨지중추부사 강섬(姜暹)【지난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오며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것을 사들이면서 좋고 나쁜 물건을 직접 가리고 그 값을 흥정하니 듣는 사람들이 비웃으며 비루하게 여겼다】과 시묘관(侍墓官) 내시부상선(內侍府尙膳) 김형석(金亨碩)을 각기 한 자급씩 올려주라.”

○己未/傳于政院曰: “順懷世子守墓官僉知中樞府事姜暹、【嘗奉使中原, 多齎物貨, 貿易之際, 擇其美惡, 親定其價, 聞者(嗤)〔唾〕鄙。】侍墓官內侍尙膳金亨碩, 各加一資。”

명종 31권, 20년(1565 을축/명가정(嘉靖) 44년) 10월 12일 을해 3번째기사

헌부가 세자의 수묘관 동지 강섬의 중가 제수의 불가함등을 청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동지(同知) 강섬(姜暹)【성품이 경박하고 비루하며 행신이 조심스럽지 못했다. 전에 수묘관(守墓官)이었을 때, 비루하고 사소한 일들을 많이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했고,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갔을 때는, 비단을 많이 사왔었다.

그의 형 강욱(姜昱)이 수원부사였을 때, 부(府)에 원악(元惡)이 있어 관리가 이를 잡아 가두고 사형에 처하기로 되었었는데, 강섬이 뇌물을 받고 강욱에게 부탁해 놓아 주었다. 그 무상함이 이와 같다】은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수묘관으로서 소상(小祥) 때에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받았고, 또 대상 때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비록 성상께서 순회세자를 위해 특별한 은전(恩典)을 베푸는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예문(禮文)에는 등급의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은수(恩數)도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자의 수묘관은 본디 대왕의 수릉관(守陵官)과 더불어 그 은상(恩賞)을 같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의 등급을 무시하고 혼란하게 은수를 베푼다면 작상(爵賞)이 헛되이 남용되어 사람을 권장할 방법이 없게 될 뿐 아니라 또한 후세에서도 논의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당초 수묘관을 차출하여 정할 때, 2품(品)의 사람으로 계하(啓下)하기까지 하였으나 여론이 모두 온당치 못하다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헌대부의 중가(重加)를 제수하니 여론이 더욱 온당치 못하게 여깁니다. 강섬에게 자헌을 가자(加資)한 것을 개정하소서.

도승지 박계현(朴啓賢)은 약방부제조였기 때문에 가의대부의 상가(賞加)를 제수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의관(醫官) 및 다른 제조들과 일례(一例)의 은전입니다. 그런데 박계현은 이미 지난달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는데,【문정왕후(文定王后)의 하현궁(下玄宮) 때 박계현이 재궁(梓宮)을 시위(侍衛)하였기 때문에 가선대부의 상가(賞加)를 제수하였다】 이달에 또 가의에 제수되니 한 달 사이에 연이어 중가를 받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은상의 남용이 이와 같이 심했던 일은 없었습니다. 여론이 모두 부당하다 하니, 박계현에게 가의를 가자한 것을 개정하소서.

강원감사(江原監司) 신여종(申汝悰)【사람됨이 옳고 그른 것에 어두웠다. 윤춘년(尹春年)과 교분을 맺어 청현직(淸顯職)을 같이 역임했고 재상의 반열에 이르게 되었으나, 이미 식자들에게는 기롱을 받아 왔다. 전에 감사였을 때는, 심통원(沈通源)의 간찰(簡札)을 대필해 주어 듣는 사람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이 전에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있을 때, 본부에 사는 사노(私奴) 표륜(表倫)이 자기의 주인인 윤원형의 위세를 믿고, 남의 토지, 노비, 우마 등을 빼앗기도 하고 양인 여자 가운데 미색이 있다고 하면 반드시 겁탈 강간하는 등 그 흉악함이 극에 달하여 못하는 짓이 없어서 본읍 및 인근 고을 백성들이 그 침해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읍주(邑主)가 된 이는 마땅히 이를 살펴 다스려야 할 터인데, 신여종은 그 세력이 두려워 모르는 체하였습니다. 그리고 유효원(兪孝元)이라 칭하는 자가 표륜의 무고로 본부에 수감되어 있었을 때에는, 한 차례 형을 받은 뒤였는데, 많은 반노(班奴)들을 데리고 옥중에 멋대로 들어가 유효원을 난타해 전신에 상처를 입히고 이어 죽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한 시말은 유효원의 시친(屍親) 정삼재(鄭三才)의 소장에 전부 드러나 있습니다. 신들이 수원의 형옥 이졸을 잡아들여 추힐(推詰)하였더니, 표륜의 타살임이 명백하여 의심이 없었습니다. 신여종은 한 읍의 주인이 되어 권세가의 종으로 하여금 관옥에 함부로 들어가 인명을 타살하게 하여 놓고도 권세에 겁을 내 이를 감추고 불문에 부쳤으니, 그 죄가 큽니다. 그런데 지금도 편안히 날을 보내며 태연히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어 세상 사람들이 이를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방백(方伯)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 직을 파하소서.

근래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람들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수령들은 외람하여 탐욕이 풍조를 이루니, 관고(官庫)의 재물과 곡식을 공공연히 도적질하면서도 그래도 부족하여 민가 장정을 징발해 방죽을 쌓고 밭을 만들어, 자기들의 자손을 위한 무궁한 계획을 세웁니다. 폐습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연안부사(延安府使) 이숙남(李叔男)은 본래 뇌물을 탐하는 도적같은 사람으로 성품도 난폭합니다. 윤원형의 비첩의 딸을 취하여 첩으로 삼은 뒤에, 그 세력을 빙자해 더욱 교만과 횡포가 늘어났습니다. 한 고을의 곡식을 남김없이 실어가며 백성들의 고혈을 전부 짜내고도 또 전지를 만들 계책을 내어 일읍의 백성을 전부 징발하여 널리 세겹으로 쌓은 방죽이 주위 사방이 탁 트여 바라보매 끝이 안보입니다. 또 평산(平山)과 해주(海州)의 경계를 잇는 두 곳에도 방죽을 쌓아 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역사를 경영할 때 민생의 원망과 고통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본읍의 한 백성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법사(法司)에 원통함을 호소하고자 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이숙남이 이를 알고 잡아들여 극심한 폭행을 가해 죽게하니, 듣는 사람들이 경악하였습니다. 이숙남을 영구히 서용하지 마소서. 저 세곳에 축조한 전지는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지 실로 이숙남의 소유가 아닙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도사(都事)가 직접 적간(摘奸)하여 남김없이 측량하고 자세하게 그 수를 기록해서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호조(戶曹)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강섬에게 특별히 가자한 것은 내가 이미 생각해서 제수한 것이니, 개정할 필요가 없다. 윤허하지 않는다. 도승지가 한 달 사이에 연이어 가자(加資)된 것이 잦기는 잦다. 그러나 전에 제조를 으레 모두 가자하였는데 홀로 가자를 제수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한 것같아 아울러 가자를 제수한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신여종은 파직은 과한 것 같으니 체차만 하라. 이숙남을 영구히 서용하지 말라함은 지나치게 무겁다. 사람을 다스림에 어찌 이와 같이 심하게 하겠는가?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음이 좋겠다. 영구히 서용하지 말라 함은 윤허하지 않는다. 나머지 일들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憲府啓曰: “同知姜暹【性輕佻麤鄙, 行身不謹。 頃爲守墓官時, 多行鄙陋。 細瑣之事, 以利於己。 奉使朝京, 多貿綾段。 其兄昱爲水原府使, 府有元惡吏, 被囚當死, 暹受其賕, 囑諸昱, 放之。 其無狀類此。】以順懷世子守墓官, 於小祥得授嘉義, 又於大祥陞資憲。 此雖出於聖上爲順懷, 別施恩典之至情, 而禮文不能無等級之殊, 恩數又從而有異焉, 則世子守墓之官, 固不得與大王守陵官, 同其恩賞也。 若不顧禮之等級, 而混施恩數, 則非徒爵賞虛濫, 無以勸人, 而亦不得無議於後世矣。 當初守墓官差定時, 至以二品之人啓下, 物情皆以爲未便, 而今授資憲重加, 物情尤爲未便。 請姜暹資憲加改正。 都承旨朴啓賢, 以藥房副提調之故, 得授嘉義賞加。 此乃醫官及他提調等, 一例恩典也。 然啓賢旣於去朔授嘉善, 【文定王后下玄宮時, 啓賢以榟宮侍衛, 授嘉善賞加。】又於今月授嘉義。 一朔之內, 連受重加, 自古恩賞之濫, 未有若此之甚者也。 物情皆以爲未便。 請啓賢嘉義加改正。 江原監司申汝悰, 【爲人眩於是非。 與尹春年交結, 同踐淸顯, 馴致宰列, 已取譏於有識。 頃爲監司時, 捧沈通源簡而爲之, 聞者鄙之。】前爲水原府使時, 本府居私奴表倫, 恃其主尹元衡威勢, 或奪人土田, 或奪人奴婢, 或奪人牛馬。 聞良民女子有色, 則必刼奪强奸, 窮兇極惡, 無所不至。 本邑及隣近官百姓, 不勝其侵害。 爲邑主者, 所當按治, 而汝悰畏其勢焰, 若不聞知。 至於兪孝元稱名人, 以表倫之誣訴, 被囚於本府, 受刑一次之後, 多率班奴, 擅入獄中, 亂打孝元, 滿身有傷, 仍致物故。 事狀首末, 備露於孝元屍親鄭三才之訴狀, 臣等捉致水原刑獄吏卒, 而推詰, 則表倫之打殺, 明白無疑。 汝悰身爲一邑之主, 使勢家奴子擅入官獄, 打殺人命, 而怯於權勢, 掩匿不發, 其罪大矣。 而至今安心度日, 恬不爲恥, 物情痛憤。 不可任其方伯, 請罷其職。 近來國綱解弛, 人不畏法, 守令汎濫, 貪汚成風, 官庫財穀, 公然偸竊而猶爲不足。 調發民丁, 築堰作田, 以爲子孫無窮之計, 弊習已成, 極爲寒心。 延安府使李叔男, 本以貪贓之賊, 性又暴悍, 取尹元衡婢妾女。 作妾之後, 憑藉勢, 益長驕橫, 一邑之穀, 輸運無餘, 盡民血之餘。 又生作田之計, 盡發一邑之民, 廣築三重之堰, 周回闊遠, 一望無際。 又於平山、海州連境兩處, 築堰作田, 經營此役之際, 民生之怨苦, 爲如何哉! 有一本邑之民, 不勝其苦, 欲訴冤於法司, 而叔男知而捉致, 極加侵暴, 以致斃死, 聞者驚駭。 請李叔男永不敍用。 其三處所築之田, 皆出於民, 實非叔男之物也。 請令本道監司, 珥事親審摘奸, 無遺打量, 詳錄其數啓聞後, 令戶曹處置。” 答曰: “姜暹特加事, 予已量授, 不必改正, 不允。 都承旨一朔內連受加資, 數則數矣, 而前者提調, 例皆加資, 獨不授加, 亦似異焉, 故竝授加矣, 不允。 申汝悰罷職似過, 只遞差。 李叔男永不敍用太重。 治人何至如此之甚乎? 罷職不敍可也。 永不敍用, 則不允。 餘事如啓。”

명종 31권, 20년(1565 을축/명가정(嘉靖) 44년) 12월 26일 기축 2번째기사

박충원, 민기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충원(朴忠元)【젊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문하에 출입하며 그의 지휘를 곡진히 따랐다. 나세찬(羅世纘)을 죄주고자 말을 다한 것이 크게 김안로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의 마음씀이 바르지 않은 것을 이로써 대개 알 수 있다】을 호조판서로, 민기(閔箕)【사람됨이 단아했다. 육간(六奸)이 정사를 어지럽힐 때를 당해서는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서서 중용을 지켰다. 그의 추향을 바르다고 이를 만하다】를 형조판서로, 강섬(姜暹)【기국이 가볍고 얕아 족히 취할 만한 것이 없다. 전에 중국에 사신갔을 때는 많은 비단을 가지고 왔었고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묘를 지킴에 미쳐서는 비루한 일이 있었을 뿐 아니라 재실 가운데에서 사람을 시켜 씨름판을 벌이기까지 하였으니, 경근한 마음이 없었음을 알 만하다. 한성부판윤이 되어 육경(六卿)과 더불어 동렬이 되었으니 명기(名器)가 외람되다】을 한성부판윤으로, 성세장(成世章)【이양(李樑)이 득세하였을 때 그 악행이 맹위를 떨쳐 말과 안색에 근심을 나타내기까지 하면서도 그 문하에 드나드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 또한 보신에 급했던 자인가 보다. 함경도안찰사로 나갔을 때 탐오의 일이 없지 않았으니, 그 사람됨에 족히 취할 만한 것이 없다 하겠다】을 병조참판으로, 이문형(李文馨)【남에게 과실이 있으면 면전에서 꼬집어 들추어내고 숨겨 주지 않았다. 그러나 외척에게 달려가 아부하고 있으니, 조용히 뜻을 지키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과 김개(金鎧)【임금이 미령하였을 때, 김개가 글을 올려 ‘조섭과 보양에 전심하고 정사는 총재에게 위임하라.’고 권했었다. 만약 당시의 재상들이 모두 적임자이었다면 옳은 말이다. 위세와 사사로운 선심으로 나쁜 짓을 꾸미는 윤원형(尹元衡)과 탐욕과 방종이 무상한 심통원(沈通源)이 재상의 반열에 그대로 있는데, 김개의 말이 여기에 미쳤으니 아부가 심했다고 하겠다】를 지중추부사로, 이황을 동지중추부사로 삼았다. 이날 정원에 전교하기를 ‘동지(同知) 자리를 만들어 전참판 이황으로 이를 채울 것을 병조에 이르라.’ 하였다.

○以朴忠元【少時出入金安老門下, 曲從其指揮, 欲罪羅世纉之盡言, 大爲安老所推許。 其用心之不正, 蓋可見矣。】爲戶曹判書, 閔箕【爲人端雅, 當六奸亂政之日, 不畏權勢, 獨立不倚。 其趨向, 可謂正矣。】爲刑曹判書, 姜暹【器局輕淺, 無足可取。 曾於朝天之日, 多以錦綺自隨。 及守順懷之墓, 不但有鄙陋之事, 齋室中, 至使人爲角力之戲, 其無敬謹之心, 可知矣。 得判京兆, 與六卿同例, 名器濫矣。】爲漢城府判尹, 成世章【李樑之得志也, 惡其鴟張, 至於憂形辭色, 而未免往來門下。 其亦急於保身者歟! 出按咸鏡道, 不無貪汚之事。 其爲人無足取矣。】爲兵曹參判, 李文馨【人有過失, 面斥而不隱。 然趨附戚里之門, 是可謂靜而守志者乎?】 金鎧【上之未寧也, 鎧上書勸以專心調保, 委政冡宰。 使當時冡宰, 皆得其人則可, 威福追作之元衡, 貪縱無狀之通源, 尙在台鼎之列, 而鎧之言及此, 阿附甚矣。】爲知中樞府事, 李滉爲同知中樞府事【是日傳于政院曰: “同知作闕, 以前參判李滉付之事, 言于兵曹。”】

명종 32권, 21년(1566 병인/명가정(嘉靖) 45년) 3월 12일(계묘) 1번째기사

간원이 서낭 발고제와 여제에 참석하지 않은 강섬의 파직을 청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서낭발고제[城隍發告祭]와 여제(祭)의 헌관(獻官)은 한성부 당상으로 차송하는 것이 의주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다른 관원을 차송할 수 없습니다. 이달 5일 서낭제와 8일 여제의 헌관을 이조가 판윤 강섬(姜暹)【성격이 경부(輕浮)하여 이루 칭할만한 것이 없는데 좋은 기회를 인연하여 갑자기 육경의 지위에 올랐다】으로 차출하였는데, 서낭제에는 신병을 칭탁하고 여제에는 부기(父忌)2968)라 하여 체직해 주기를 계청하였습니다. 제사는 중대한 일이라 사사를 내세울 수 없는데 성청(聖聽)까지 번거롭게 하며 교만하게 주청하였습니다. 이는 이전에 없었던 일로 사체를 너무 몰랐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강섬이 서낭제 수향(受香) 때 신병을 칭탁하므로 해조의 낭청이 추고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원이 저지시켰고, 또 여제 때에는 감히 사사로써 계청하여 제마음대로 들어주었으니 오직 왕명의 출납을 올바르게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로부터 선사후공(先私後公)하는 폐단이 시작되고 또 바른 길이 막히는 조짐이 생길까 깊이 걱정됩니다. 물정이 다 이를 해괴하게 여기고 있으니 도승지를 파직시키고 기타 승지를 추고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강섬은 이미 추고중에 있으니 율에 의해 치죄하면 그뿐, 파직은 너무 과한 듯하므로 윤허하지않는다. 도승지와 색승지의 파직 역시 과하므로 체직에서 그치고, 기타 승지는 아울러 추고하라.”하였다.

강섬의 파직 문제에 대해 뒤에 누차 계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註2968]부기(父忌): 아버지의 기제(忌祭).

○癸卯/諫院啓曰: “城隍發告祭及厲祭獻官, 以漢城府堂上差遣, 載在儀註, 固不可以他官差之也。 本月初五日城隍祭, 初八日厲祭獻官, 吏曹以判尹姜暹【性輕浮, 未有可稱, 而寅緣幸會, 驟陞六卿之班。】充差。 暹於城隍祭則稱病, 厲祭則以父忌啓遞。 祭享重事, 不可以私己之故, 至煩聖聽, 而偃然來達。 是乃前此未聞之事, 不識事體甚矣。 請命罷職。 姜暹城隍祭受香時稱病, 該曹郞廳欲請推, 則政院止之。 又於厲祭, 敢以私故來啓, 則任其所爲, 其出納惟允之意安在? 竊恐先私後公之弊, 將自此始, 而亦開壅遏之漸也。 物情皆以爲駭愕。 請都承旨罷職, 其餘承旨推考。” 答曰: “姜暹已推矣。 只依律治罪, 罷則似過, 不允。 都承旨、色承旨罷職亦過, 只遞。 其餘承旨, 竝推考。” 姜暹罷職事, 後累啓, 終不允。

명종 32권, 21년(1566 병인/명가정(嘉靖) 45년) 3월 16일 정미 1번째기사

송기수, 김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기수를 예조판서로, 김개를 형조판서로,

사신은 논한다. 김개는 처음에는 청렴하고 근신한 사람으로 일컬어졌으나 만년에 가산을 영위하여, 앞뒤가 크게 어긋났다. 윤원형과 심통원이 재상으로 있을 때 김개가 소를 올려 상에게 병을 조리하는 방법을 권하면서 ‘침흥(寢興)을 시각(時刻)에 맞추고 기거(起居)를 편리에 따르며 관심되는 일은 일체 떨쳐버리고 백사의 집무는 삼공에게 맡기라.’하였으니, 그 혼암(昏暗)함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한 평생의 가식이 만년에 드러나고 말았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이다.

이황을 겸홍문관예문관대제학으로,

사신은 논한다. 이황은 학문이 정심하고 실천이 독실하며 문장과 절행이 일세의 표준으로 염정에 안착하여 영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중묘조부터 누차 사직하고 누차 나왔고, 본가가 예안에 있다. 몸은 비록 물러나 있었으나 조정이 항상 그 자리를 비워두어, 그를 맞이할 뜻을 보인 지가 10여 년이나 되었다. 전년에 돌아가기를 빌어 벼슬을 내놓고 본현 도산에 터를 잡아 그 안에 정사를 지은 뒤 속인을 사절하고 날마다 성리를 연구하는데 전념하므로, 온 조야가 다 그 포부의 발휘를 갈망하였다. 상이 특별히 전의 벼슬인 동지(同知)로써 거듭 불렀으나 도중에 병이 발작하여 누차 되돌아가기를 간청하므로 상이 어의를 보내 문병하고 공조판서를 탁배하였다. 홍섬도 일시의 물망이 그에게 집중된 것을 알고 문형의 자리를 간곡히 사양하였다.

유전【남을 극해하려는 마음이 없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을 사간원사간으로, 이후백을 홍문관응교로, 민시중(閔時中)을 부응교로, 정철(鄭澈)【천성이 염담하여 영위하는 일이 없고 추향이 일정하였다】을 사간원헌납으로, 이인(李), 이제민을 홍문관교리로, 김억령을 부교리로, 임수신(任壽臣)【위인이 단아하고 집상(執喪)하는데 예가 있었다】을 예조좌랑으로, 이경명(李景明)【위인이 강명독립(剛明獨立)의 기개가 없다. 맨 처음 기대항의 추천을 힘입어 청현의 길을 통하였다】과 황정식(黃廷式)을 사간원정언으로, 이해수【이탁의 아들로 천성이 정아하여 말이 적었다】를 홍문관부수찬으로, 안용(安容)을 예문관대교(待敎)로, 박인수(朴麟壽)【천성이 본시 교만하고 탐음(貪淫) 방자하였다.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있을 때에 관적(官)을 원형의 전장(田庄)에 바치게 하였으니, 다른 일은 미루어 알 수 있으며, 송림(松林)을 다 벌채하고 온 창고 곡식을 훔쳐내니, 고을 사람들이 ‘의창이 텅 비고 수양산이 황폐하였다. [義倉浮海首陽南傾]’고 하였다. 그리고 역임하는 주진(州鎭)마다 관창(官娼) 중에 비록 지친(至親)이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반드시 모두 통음(通淫)하니, 어리석고 천한 전복(典僕)들도 모두 개, 돼지로 여겨 침을 뱉지않는 자가 없었다】를 장단도호부사로, 박영준(朴永俊)【위인이 약아서 일을 회피하고 몸을 사렸다. 일찍이 청렴 근신하다는 명예를 훔쳤으나 사실은 탐사(貪奢), 기응(嗜淫)하여 취할 만한 행실이 없다. 일생 동안의 행사가 거짓일 뿐이다】을 지중추부사로, 강섬을 동지중추부사로 삼았다.

○丁未/以宋麒壽爲禮曹判書, 金鎧爲刑曹判書。

【史臣曰: “, 初以廉謹稱, 暮年營爲, 大戾前後。 方元衡通源爲相, 上疏, 勸上以調病之方曰: “寢興以時, 起居隨便, 關心之事, 一切屛去, 百司之務, 付諸三公。’ 何其昏暗之至此耶? 平生假飾, 末路敗露, 良可惜哉。”】

李滉兼弘文館藝文館大提學。

【史臣曰: “學問精深, 踐履篤實, 文章節行, 表準一世。 安於恬靜, 不喜榮進。 自中廟朝, 屢辭屢起。 家在禮安, 身雖退去, 朝廷尙虛其位, 以示願致之意者十餘年。 前歲懇乞方解, 卜地於本縣之陶山, 築精舍其中, 屛謝俗人, 日以硏窮性理爲事。 朝野想望, 庶幾展布。 上特申同知舊官以召, 登途病作, 屢請還歸。 上遣醫問疾, 擢長冬曹。 洪暹亦知時望所屬, 懇辭文柄。”】

柳㙉【無剋害之心, 聰明過人。】爲司諫院司諫, 李後白爲弘文館應敎, 閔時中爲副應敎, 鄭澈【恬淡無官, 所趨有向方。】爲司諫院獻納, 李訒、李齊閔爲弘文館校理, 金億齡爲副校理, 任壽臣【爲人端雅, 執喪有禮。】爲禮曹佐郞, 李景明【爲人無剛明植立之氣。 初被奇大恒吹噓, 得通淸顯。】 (黃廷式)〔黃廷彧〕爲司諫院正言, 李海壽【鐸之子, 雅靜少言。】爲弘文館副修撰, 安容爲藝文館待敎, 朴麟壽【性本驕妄, 貪淫自恣。 曾爲海州牧使, 至捧官糴於元衡田庄, 他可推知。 盡伐松林, 傾倉偸竊, 邑人有義倉浮海首陽南傾之語。 所歷州鎭官娼, 雖至親所戀, 必盡通淫。 愚賤典僕, 莫不以犬豕唾之。】爲長湍都護府使, 朴永俊【爲人巧黠, 善觀時(熊)〔態〕, 避事謀身, 曾盜廉謹之名, 而其實貪奢嗜淫, 無行可取, 一生行事詐而已矣。】爲知中樞府事, 姜暹爲同知中樞府事。

명종 32권, 21년(1566 병인/명가정(嘉靖) 45년) 4월 5일(병인) 1번째기사

이준경·조언수등이 문정왕후의 3년상에 대하여 찬반을 논의하니 구례를 따르도록 하다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이명, 우의정 권철, 판돈녕부사 김명윤, 우찬성 홍섬, 판중추부사 조광원, 우찬성 오겸, 예조판서 송기수, 좌참찬 원혼, 형조판서 김개, 병조판서 박충원, 동지중추부사 강섬, 이조판서 민기, 호조판서 이탁, 판윤 유강, 호조참판 김광진, 동지중추부사 김홍윤, 좌윤 남궁침, 우윤 임열, 동지중추부사 남응운, 상호군 오상, 이조참판 정종영, 아선군 어계선, 판결사 이우민, 공조참판 윤옥, 예조참판 이건, 상호군 김덕룡, 형조참판 송찬, 예조 참의 홍천민이 의논드리기를,

“문정왕비께서 종사를 다시 일으켜 9년 동안 임금을 대리하여 정사를 맡아보신 신성한 공렬은 천재에 뛰어나시어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있으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추모하고 망극해하는 정이 어찌 대왕과 차이가 있겠습니까? 다만 마음은 아무리 다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예에는 한계가 있으며, 내외의 상사에 관한 기강은 천경지의(天經地義)와 같아 사사로운 뜻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정왕비의 성대한 공열이 아무리 극도로 빛나며 크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왕비이니, 내외의 제도는 삼대(三代)2984)로부터 만들어져 백세토록 준행해오는 동안 변경한 적이 없었으며, 조종(祖宗)께서 예를 제정하신 것도 이 법을 준용하여 후세에 전하였으나 다른 의논이 없었으니, 의당 위로 고례(古禮)를 살피고 우러러 성헌(成憲)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비(先妃)께서는 그 공렬의 성대함을 생각할 때 심상한 전례(典禮)로는 우러러 보답과 일컬음[報稱]에 맞출 수없기 때문에, 심지어 상장(喪葬)의 의물(儀物)과 역군(役軍)의 다소(多小)와 포미(褒美)하여 일컫고 존호(尊號)를 올리는 등의 일에, 진실로 존숭(尊崇)하기를 극도에 달하게 하여 인신(人臣)의 망극한 정과 예를 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내외 상례의 분별은 선왕이 제정한 예로서 그 분수가 매우 엄격한 데다가 역대(歷代)를 상고해 보아도 별도로 시행한 제도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신들이 모두 불초(不肖)한 위인들로 오늘의 세대에 태어나 전현(前賢)과 같은 견해도 없으면서 마음대로 예의를 변경한다는 것은 실로 감당하지 못할 일입니다. 연제 뒤에 길례를 따르는 것은 바로 선왕이 제작하신 예이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뿐입니다. 하지만 삼년 내에 누가 감히 화려하고 성대한 의복을 입고 연회(宴會)하는 일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이름은 길례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삼년의 제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 이붕(李鵬)의 상소의 내용을 되풀이하여 상세히 관찰하니, 그 대의(大意)는 오로지 국가에서 삼년복의 제도를 따르게 하려고 발설한 것이었으니,【이붕이 상소하기를 ‘선비의 상사가 모두 대왕의 앞에 있었기 때문에 군신(群臣)의 복이 대왕에게 압존(壓尊)되어 모두 기년(期年) 제도의 복을 입었는데, 정희왕후의 상사는 세조보다 뒤에 있었기 때문에 성종이 여러 군신들에게 백의(白衣)와 흑대(黑帶)를 만들게 하여 삼년복을 마치게 하였으며, 정현 왕후의 상사 역시 성종보다 뒤에 있었으니 군신이 당연히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데, 당시 권신이 정권을 잡고 성종의 중제(重制)를 무너뜨리고 단지 기년복(朞年服)만 입게 하였습니다. 지금 문정왕비의 상사는 이미 압존되는데가 없고 또 일찍이 임시로 정사를 청단(聽斷)하였으니, 마땅히 백의로서 삼년복을 마치기를 한결같이 성종이 정희왕후의 상사에 제도화한 것처럼 해야 합니다……’ 하였다】성조(聖祖) 신손(神孫)은 저절로 가법(家法)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을 뿐입니다. 그가 말한 ‘정희왕후의 상사에 성종이 군신으로 하여금 백의(白衣)와 흑대(黑帶)를 만들게 하여 3년을 마치도록 했다.’고 한 것은 사실 망발을 한 것입니다. 당시에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하였으나【손순효(孫舜孝)가 소를 올려 삼년복을 행하자고 청하였다】유신(儒臣)이 상소하고【그때 홍문관에서 여러 날 동안 이 사실에 대해서 극론했다】석보(碩輔)2985) 【당시 정창손(鄭昌孫)이 수상(首相)이었다】가 헌의(獻議)하여 도로 예제(禮制)를 따랐으며,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상사에 권신이 정권을 잡고 세조【이붕의 상소에 또 ‘세조 때부터 경문(經文)을 참고하여 백립(白笠)에 흑대(黑帶)를 착용하는 법을 세웠다.……’ 하였다】와 성종의 중제(重制)를 무너뜨렸다고 말하였는데, 그때에 특별한 권간도 없었으며【당시 정광필(鄭光弼)이 수상이었다】 단지 예문만 준수하였고, 또 다른 말이 없었으니 이것도 망령된 말인 것입니다.

그가 말한 ‘삼년상의 제도는 대왕(大王)의 상과 의사하여 혐의스럽다.’한 것【이붕의 소에 이르기를 ‘삼년상의 제도를 가지고 대왕에게 맞먹게 된다하여 혐의스럽게 여긴 것은 참람되게 맞먹으려는 단서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삼청전(三淸殿)의 유(類)는 참람되게 맞먹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어찌 상제(喪制)를 범(犯)하는 것만 혐의스럽게 여기는가?’하였다】 역시 고선(古先)의 예의(禮義)와 본조(本朝)의 법제를 모르고서 망발한 것입니다. 신들이 어제 헌의하면서 말에 잘못된 것이 많다고 한 것은 대체로 이런 따위의 말을 지목하여 아뢴 것입니다. 되풀이하여 깊이 생각하니 백의를 입고 삼년상을 마치는 제도는 사실 신하가 당연히 해야 할 바인데도, 신들이 전례와 고사를 인용하여 시행할 수 없다고 굳게 고집하고 있으니, 실로 스스로 혐의스런 죄를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예라는 것은 천지(天地)의 떳떳한 법이라서, 감히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스스로 혐의스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참람하고 망령된 말을 진달하는 바입니다.”하고,

영중추부사 심통원은 의논드리기를,

“대체로 친상은 그 정(情)을 논한다면 끝이 없고 그 예를 의논한다면 한계가 있습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바로 세종대왕께서 석보명신(碩輔名臣)과 함께 인정과 예의를 헤아려서 책을 만들어 만세에 전한 것으로, 대왕의 상사에는 백관이 백의를 입고 삼년복을 마치며, 내상에는 연제 뒤에 백관은 길례를 따르게 하여 융쇄(隆殺)의 제도를 정하였으니, 그 공렬의 경중에 따라서 변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가 정희왕후의 상례를 보니 성종 대왕이 특별히 대왕의 예로 치상(治喪)하도록 하였지만 당시 조정의 의논이 영역(塋域)·상설(像設)·의장(儀仗)·거여(車輿)·물채(物彩)는 일체 대왕의 예를 따랐으나, 온 나라의 복제만은 모두 내상에 의거하여 시행하였으니 이미 이루어진 규칙이 있습니다. 지금 문정왕비께서 위난(危難)을 안정시키고 임금을 대리하여 정사를 맡으셔서 종묘사직을 다시 일으키고 성궁(聖躬)을 돕고 보호하여 위태로움이 변하여 편안함이 되게 하셨으니 그 융성하고 위대한 공렬이 바로 정희왕후와 동일하기 때문에 승하하던 날에 대왕의 예를 적용하도록 명하셨던 것입니다.

대저 성상(聖上)의 다함이 없는 정성과 군하(群下)가 추모(追慕)하는 심정을 헤아린다면 대소신료(大小臣僚)가 삼년복을 입는다하더라도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상사에 이미 정한 제도가 있었으니, 지금 문정 왕비를 위하여 다시 한 등급을 더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해 초상(初喪)에 부녀(婦女)와 서인(庶人)은 역월(易月)의 제도를 따라 장차 13일만에 백의(白衣)를 벗게 되었으므로 신들의 마음에 서운함을 견디지 못해서 회례관(會禮官)과 재집(宰執)이 각년의 전규(前規)를 널리 고찰해보니 모두 《오례의》의 문구를 적용하였는데 정희왕비의 상사에 이르러서는 우례(優禮)를 거행한 듯하였으나 더 보탠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상례를 한결같이 정희왕비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하겠기에 이 뜻을 가지고 이미 서계(書啓)하였습니다. 소신의 생각에는 초상 때부터 이미 내상의 예제를 적용하였는데 지금 기년(期年)인 연제에 와서 백관의 복색에 대해 다른 의논을 두기는 어려울 듯합니다.”하고,

우참찬 조언수는 의논드리기를,

“신이 대왕과 왕후의 상례를 살펴보니 그 예제 융쇄의 구분에 대해서는 진실로 사람마다 경솔하게 의논하여 옛법을 고칠 바가 아닙니다. 다만 문정왕비께서 국가가 위난할 때를 당하여 성궁을 보양하고 종묘사직을 다시 편안하게 하신 공은 백세에 잊기 어려우니 백의를 입고 삼년상을 마치도록 하여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것도 신자의 지극한 정입니다.” 하니,

(사신은 논한다. 인정은 다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예의는 절도가 있는 것이니 한때의 공으로 만세(萬世)의 예를 폐지할 수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언수가 어찌 공은 계교할 수없고 예는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리요마는 사의(私意)에 끌려서 성상의 뜻을 구차하게 맞췄으니 그의 구차스럽고 나약함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답하기를,

“내가 망극한 정을 가지고 미진한 뜻이 없게 하려고 이에 다시 의논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김흔(金)의 소를 보니, 다른 의논이 없는 듯하니 구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註2984]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註2985]석보(碩輔): 대신을 말함.

○丙寅/領議政李浚慶、左議政李蓂、右議政權轍、判敦寧府事金明胤、右贊成洪暹、判中樞府事曹光遠、右贊成吳謙、禮曹判書宋麒壽、左參贊元混、刑曹判書金鎧、兵曹判書朴忠元、同知中樞府事姜暹、吏曹判書閔箕、戶曹判書李鐸、判尹兪綘、戶曹參判金光軫、同知中樞府事金弘胤、左尹南宮忱、右尹任說、同知中樞府事南應雲、上護軍吳祥、吏曹參判鄭宗榮、牙善君魚季瑄、判決事李友閔、工曹參判尹玉、禮曹參判李楗、上護軍金德龍、刑曹參判宋賛、禮曹參議洪天民議: “文定王妃再造宗社, 攝政九載, 神功聖烈, 超越千載, 在人耳目, 一國臣民追慕罔極之情, 豈有間於大王哉? 第以心雖無窮, 禮則有限, 內外喪紀, 如天經地義, 不可以私意變易。 文定王妃功烈之盛, 雖極光大, 終是王妃。 內外之制, 著自三代, 遵行百世, 未有變改。 祖宗制禮, 亦遵是法, 以垂後世, 未有異議, 所宜上察古禮, 仰遵成憲者也。 惟我先妃, 惟其功烈之盛, 不可以尋常典禮, 仰副報稱, 故至於喪葬儀物, 役軍多少、徽稱上號等事, 固當極其尊崇, 以盡人臣罔極之情禮矣。 但內外喪禮之別, 先王制禮, 其分甚嚴, 考之歷代, 未有別行之制。 臣等俱以無似, 生今之世, 無前賢之見, 率意變禮, 實所不堪。 練後從吉, 乃是先王制禮, 不敢不從而已。 三年之內, 誰敢服華盛之服, 爲宴會之事乎? 是則名雖從吉, 實守三年之制也。 今者將李鵬疏辭, 反覆詳觀, 其大意, 則專在於國家欲遵三年之制而發也。 之疏曰: 先妃之喪, 皆在於大王之前, 故群臣之服壓於大王, 皆服朞制, 而惟貞熹王妃之喪, 後於世祖, 故成宗使群臣爲白衣、黑帶, 以終三年。 貞顯王妃之喪, 亦在成廟之後, 群臣宜服三年, 而當時權臣執政, 毁成廟重制, 而只服期年。 今此文定王妃之喪, 旣無壓尊? 又曾權同聽斷, 當以白衣終三年, 一如成廟所制貞熹王后之喪也。 云云。】

不知聖祖神孫, 自有家法而然耳。 其曰: ‘貞熹王妃之喪, 成廟使群臣爲白衣黑帶, 以終三年云者。’ 實爲妄發。 當時欲行此制。”孫舜孝上疏請行三年。】而儒臣【其時, 弘文館累日封實極論。】上疏, 碩輔【時鄭昌孫爲首相。】獻議, 還循禮制。 貞顯王妃之喪, 權臣執政, 毁世廟疏又有世廟參考經文, 立白笠黑帶三年之法, 云云。】 成廟重制云: ‘其時別無權奸。’ 【時鄭光弼爲首相。】只遵禮文, 又無異同之言, 此亦妄言也。 其曰三年之制, 擬於大王, 而爲嫌云【鵬之疏亦曰: 以三年之制, 擬於大王, 而爲嫌藺僭擬之端, 則我國三淸殿之類, 僭擬非一, 豈可獨犯喪制爲解者乎】

亦不知古先禮義、本朝法制, 而妄發也。 臣等昨日獻議, 以爲語多誣妄者, 蓋指此等之語, 而啓之也。 反覆竊念, 白衣終三年之制, 實臣下之所當爲者, 而臣等援引典故, 牢執以爲不可行, 實未免自嫌之罪。 然禮者天地之常經, 不敢以私意自嫌, 故敢陳僭妄之說。” 領中樞府事沈通源議: “夫親喪, 論其情, 則無窮, 議其禮, 則有限。 《國朝五禮儀》, 乃世宗大王與碩輔名臣, 商確情禮, 而成書, 以傳萬世。 凡大王之喪, 百官白衣終三年, 內喪, 則練後百官從吉, 以定隆殺之制, 不可因其輕重, 而有所改易也。 伏覩貞熹王妃喪禮, 成宗大王特敎以大王禮治喪, 而其時廷議: ‘塋域、像設、儀仗、車輿、物彩, 一從大王之禮,’ 而一國服制, 則竝依內喪行之, 已有成規。 今者文定王妃, 靖難攝政, 再安宗社, 扶護聖躬, 轉危爲安, 其隆功偉烈, 正同貞熹王妃, 故升遐之日, 命用大王之禮矣。 夫以 聖上罔極之誠、群下追慕之懷料之, 大小臣僚, 雖服三年之喪, 未爲過也。 然貞熹王妃之喪, 旣有定制, 則今不可爲文定王妃更加一等也。 去歲初喪, 婦女、庶人從易月之制, 將於十三日釋白, 臣等之心不勝缺然。 會禮官(宰)〔牢〕執, 博考各年前規, 則皆用《五禮儀》之文。 至於貞熹王妃之喪, 似擧優禮, 而無加焉。 故今此喪禮, 一依貞熹王妃故事行之, 將此意曾已書啓矣。 小臣之意, 自初喪, 已用內喪禮制, 今此練期, 百官服色, 似難有他議也。” 右參贊趙彦秀議: “臣按大王王后之喪, 其禮制隆殺之分, 固非人人所可輕議, 而更變舊章。 但我文定王妃, 當國家危亂之傺, 輔養聖躬, 再安宗社之功, 百世難忘, 白衣終三年, 思報萬一, 亦臣子之至情。”

【史臣曰: “情雖無窮, 禮則有節, 不可以一時之功, 廢萬世之禮。 彦秀豈不知功之不可計、禮之不可廢, 而牽於私意, 苟合上旨, 其偸靡懦弱, 於此可見矣。”】

答曰: “予將罔極之情, 欲無未盡之意, 乃使更議。 且見金訢之疏, 似無異議, 依舊禮行之。”

명종 32권, 21년(1566 병인/명가정(嘉靖) 45년) 4월 11일 임신 4번째기사

박충원, 유강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충원을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으로, 유강을 공조판서로, 강섬을 한성부판윤으로, 심의겸을 홍문관직제학으로, 백인걸【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결단성이 있어 평생에 의롭지않은 일은 하지않았으며, 늘 사서의 말을 외면서 가훈으로 삼았다.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어서는 백성을 다스린 공적이 제일이었으므로 주민들이 지금까지 그를 사모하고 있다. 을사년2993)에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헌납이 되었는데, 혼자 밀지(密旨)의 그릇됨을 논(論)하고 인해서 여러 대간의 주관이 없는 실책을 낱낱이 들어 나무랐는데 주장하는 이론이 격절하였다. 대궐에 나아가 밀지에 대해 논하려고 허자(許磁)를 찾아 의논하니 허자가 만류하면서 ‘틀림없이 큰 화를 당할 것이다.’하였으나, 백인걸이 듣지 않았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편안하게 여기면서 개의하지 않았었다. 귀양지에 있으면서 객(客)과 바둑을 한창 두고있는데 석방되어 돌아가게 되었다는 기별을 듣고도 기뻐하는 모습이 없이 바둑두기를 보통 때와 같이 하였으며, 바둑이 끝나자 객이 조보(朝報)를 살펴보도록 청하자 그제야 그것을 알았다. 그의 형(兄) 백인호(白仁豪)와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며 백인호가 죽자 슬퍼하기를 예도(禮度)에 지나치게 하였으며, 나이 60이 넘었으나 자주 산려(山廬)에 나아가 묘지(墓地)를 살펴보았다. 파면되어 배척을 당한 지 20여년 동안 사림들이 높이고 사모하여 백헌납(白獻納)이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파면되었다가 기용된 뒤에 배우는 무리들이, 나이가 70이 넘은 몸으로 종사(從仕)하고 있는 의향에 대해 물으니, 백인걸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을 선공감 부정으로, 윤근수【성품이 단정하고 뜻을 세운 것은 지키며 말과 행동은 과실이 적고, 또 모서리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논자들이 그의 형 윤두수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여겼다】를 홍문관부교리로, 이황을 동지중추부사로, 오성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삼았다.

○以朴忠元爲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兪絳爲工曹判書, 姜暹爲漢城府判尹, 沈義謙爲弘文館直提學, 白仁傑【天資剛直勇決, 平生不爲非義。 常誦四書之語, 以爲家訓。 爲南平縣監, 治行第一, 民至今思之。 乙巳入爲獻納, 獨論密旨之非, 因歷詆諸臺諫依違之失, 持論激切。 將詣闕論密旨, (過)〔遇〕許磁議之磁止之曰: “必蒙大禍。” 仁傑不聽, 竟以此見謫, 恬然不芥。 在配所, 方與客圍碁, 聞放還之奇, 略無喜色, 圍碁如常。 碁罷, 客請觀朝報, 始知之。 與其兄仁豪友愛岳, 仁豪歿, 悲慟過度, 雖年踰耳順, 而頻詣山廬, 省視墓地。 廢斥二十餘年, 士林尊仰, 稱爲白獻納而不名。 起廢之後, 學者輩以年過七十, 問從仕志趣, 仁傑笑而不答。】爲繕工監副正, 尹根壽【性稟端的, 立志有守, 言行少過差。 又不見圭角, 論者以爲, 優於乃兄斗壽甚。】爲弘文館副校理, 李滉爲同知中樞府事, 吳誠爲平安道兵馬節度使。

명종 33권, 21년(1566 병인/명가정(嘉靖) 45년) 8월 28일 병술 4번째기사

이탁, 강섬, 황임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탁(李鐸)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강섬(姜暹)을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황임(黃琳)을 승정원우승지로, 윤두수(尹斗壽)를 좌부승지로, 박호원(朴好元)을 우부승지로, 심의겸(沈義謙)을 통정대부 동부승지로, 유전(柳)을 홍문관응교로, 김첨경(金添慶)을 부응교로, 김억령(金億齡)을 교리로, 이해수(李海壽)를 부교리로, 조식(曺植)을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으로, 이증(李增)과 구봉령(具鳳齡)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성운(成運)을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로, 송응개(宋應漑)를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으로 삼고, 한윤명(韓胤明)을 왕손사부(王孫師傅)로 삼았는데, 윤희렴(尹希廉)과 정지연(鄭芝衍)이 서로 이어서 하게 하였다.【한윤명은 학문에 뜻을 두고 실천을 독실하게 하는 사람이다. 정지연도 그런대로 옳은 사람이나 윤희렴만은 보통 사람으로 행동에 구애받는 일이 없고 술마시는 것을 일과로 삼으며 재리만을 도모해 마지않는데 오히려 이 선발에 참여되었으니, 그 선발이 과연 정밀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해조가 상의 뜻을 몸받지 못하였다고 기롱하였다.

○ 전일 육조의 행실이 갖춰진 사람을 선택하도록 명한 것은 대개 상이 이미 왕손(王孫) 중에 기대할 만한 자가 있어 그를 미리 교양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없는 신례(新例)를 개창(開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중지하였는데, 그 뒤 대간이 아뢴 바에 따라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선발하는 사례에 의하여 선발하였던 것이다. 한윤명이 처음에 공천(公薦)으로 의금부도사(義禁莩事)가 되었었는데, 이때에 와서 추천으로 왕손사부를 제수받았다. 사람됨이 학문에 독실한 뜻을 가지고 오직 힘써 행할 것을 임무로 삼았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늦게 잠자며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었다. 그렇게 한 지 여러 해만에 언어 행동이 자연 법도에 맞았다. 친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문을 따랐는데, 훼척(毁瘠)으로 이내 병을 얻어 이 벼슬이 된 지 얼마 안되어 죽으니, 사림에서 통석해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상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그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경연(經筵)에 임어함에 미쳐 성학(聖學)이 쉽게 고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의 계발한 공이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以李鐸爲漢城府判尹, 姜暹爲全羅道觀察使, 黃琳爲承政院右承旨, 尹斗壽爲左副承旨, 朴好元爲右副承旨, 沈義謙爲通政大夫同副承旨, 柳㙉爲弘文館應敎, 金添慶爲副應敎, 金億齡爲校理, 李海壽爲副校理, 曺植爲尙瑞院判官, 李增、具鳳齡爲弘文館修撰, 成運爲通禮院引儀, 宋應漑爲弘文館著作, 韓胤明爲王孫師傅, 尹希廉、鄭芝衍相繼爲之。 【胤明有志於學問, 踐履篤實。 芝衍猶可人矣。 至於希廉, 自是常類, 行無拘檢, 縱酒爲事, 牟利不已, 而尙預此選, 其可謂精乎? 人以該曹不體上意譏之。 ○前日命擇六行之人, 蓋上已於王孫中, 有所屬意, 而欲爲之預養也。 以爲不可創開新例, 中止之。 其後因臺諫所啓, 命依王子師傅例擇授之。 胤明初以公薦, 爲義禁莩事, 至是薦授焉。 爲人篤志學問, 唯以力行爲務, 夙興夜寐, 端坐讀書者累年。 言動從容, 必遵繩墨, 執親喪, 一用禮文, 仍致柴毁。 爲此官, 未幾而終, 士林莫不痛惜。 今上在潛邸時, 受《小學》書, 及御經筵, 聖學易至高明者多, 是此人啓發之功云。】

선조 6권, 5년(1572 임신/명융경(隆慶) 6년) 11월 3일(을유) 1번째기사

중국 사신이 성균관에서 알성하고 재상들과 의식을 거행하다

사신이 성균관에 도착하니 동지성균관(同知成均館) 유희춘(柳希春)과 가관관(假館官) 원혼(元混)·강섬(姜暹)·김귀영(金貴榮), 대사성 홍천민(洪天民)등과 관반(館伴) 노수신(盧守愼), 원접사 정유길(鄭惟吉)이 사신을 정중히 맞이하여 성전(聖殿) 뜰에 들어가서 알성하고 향을 올렸다. 사배(四拜)한 뒤에 전에 올라서 궤(櫃)를 열고 공경스레 보았다. 명륜당에 좌정하자 원혼 등 여덟 재상이 두 사신 앞에 나아가 각각 재배한 뒤 물러나고, 관의 당하 관원들이 잇따라 재배하고 물러나고, 유생들은 두 번에 걸쳐 뜰아래에서 재배례를 행하였다. 사신은 재상들에게는 답읍(答揖)하고 당하관에게는 손만 가지런히 모으고 유생들에게는 역시 답읍하였다. 재상들은 서벽(西壁)에 설치된 의자에 앉았다가 사신이 말을 하면 서로 존경하는 뜻으로 손을 위로 가지런히 올렸다. 다례(茶禮)를 행할 때는 손으로 흰 잔을 받쳐들고 서로 권한 뒤에 마셨다. 정유길은 상의 패초(牌招)로 행례에는 참석을 못한 채 먼저 예궐했다. 오후에 도승지 목첨(睦詹)이 궁온(宮)220)을 가지고 왔다.

사신이 재상들에게 묻기를,

“이 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하니,

재상들이 답하기를,

“대인(大人)의 처분대로 하십시오.”하였다.

사신이 음주하는 의식을 의논하니 목첨이 술동이 앞으로 가서 금대(金臺)의 잔에 술을 담아 받쳐들고 사신에게 나아가 공경히 읍하니, 사신이 답읍하고 나서 받았다. 승지는 그대로 잔대를 두 손으로 받쳐든 채 사신이 잔을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잔을 받아 서로 읍하고 또 술동이 앞으로 가서 잔에 술을 채워 앞서와 같이 두 사신에게 각각 두 잔씩 권하였다. 예가 끝난 뒤 상사(上使)는 재상 9인이 서벽에 좁게 앉은 것을 보고 4인은 동벽으로 옮겨 않고 5인은 그대로 서벽에 있게 하였다. 9인의 재상이 일제히 나와 한 잔을 올린 다음 사신과 9인의 재상이 일제히 술잔을 들고 서로 읍한 뒤에 마시고 사신이 다시 답으로 잔을 돌려 앞서와 같은 의식으로 마셨다.

사신이 돌아가려 하므로 재상들은 두 번씩 읍한 뒤에 물러나 서쪽 협실(夾室)을 통해 명륜당 뒤쪽으로 나와 지송처(祗送處)에 먼저 도착하여 사신이 나오는 것을 보고 국궁(鞠躬)하였다. 사신은 유생들이 뜰에 가득히 모여 배례(拜禮)하는 것을 보고 역관을 보내어 관당상(館堂上)에게 말하기를,

“영재(英才)들이 많이 모인 것을 보니 교육이 훌륭함을 알 만합니다.”하고, 또 관원(館員)에게 묻기를,

“관에는 양성하는 유생이 몇 명이나 됩니까?”하니,

유희춘이 대답하기를,

“언제나 5백 명을 양성합니다.”하였는데,

이는 전에 서거정(徐居正)이 왕창(王昌)과 동월(董越)에게 대답한 말을 그대로 한 것이다.

유희춘이 처음 도착했을 때 대사성 홍천민이 학령(學令)을 제거하려고 하였는데, 유희춘이 제거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고 하였고, 또 승지가 궁온을 가져왔을 때 통사(通事)가 선온(宣醞)이라고 말하니, 유희춘이 ‘선(宣)자는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한다는 뜻으로 쓰는 것이니 사신에게는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으며, 또 여러 사람이 동지의 망궐례(望闕禮)에 대해 의논하면서 어떤 이가 상과 사신이 한 곳에서 행하는 것을 물으니 유희춘이 함께 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註220]궁온(宮): 임금이 내리는 술.

○乙酉/天使到成均館。 同知成均館柳希春, 假館官元混、姜暹、金貴榮、大司成洪天民等及館伴盧守愼、遠接使鄭惟吉祗迎天使, 入聖殿庭, 謁聖上香, 前後四拜, 遂升殿開樻敬視, 遂坐明倫堂。 元混等八宰相, 進於兩使前, 各行再拜而退。 館堂下員等, 又就行再拜而退。 群儒生, 於庭下行再拜禮者再。 天使於宰樞之拜, 答揖。 於堂下館員之拜, 只立而肅手。 於儒生之拜, 亦答揖。 坐時, 宰樞坐交倚于西壁。 凡天使有所言, 相敬, 必俱上手, 乃行茶禮。 只以手捧白鍾, 相告而飮。 鄭惟吉, 以上牌招未入行禮, 而先詣闕。 午後都承旨睦詹, 持宮醞來。 天使問于諸宰相曰: “此酒, 何以爲之?” 宰樞等答曰: “在大人區處耳。” 天使乃議飮酒之儀, 睦詹詣尊所, 奉宮醞于金臺之盞, 詣天使所, 揖而敬之, 天使答揖而受之。 承旨, 仍以兩手持盞臺, 天使飮畢, 承旨受其盃而相揖。 又詣尊所, 盛酒于盃, 如前儀。 兩使前, 各呈二盃。 禮畢, 上使, 以宰樞九人, 窄坐西壁, 令四人移坐于東壁, 五人仍在西壁。 令九人齊出, 行一盃天使。 乃九宰相一時持盃, 而相揖遂飮。 天使復答行巡盃, 如前儀。 天使有欲歸之意, 宰相再揖辭退, 由西夾室後, 經由明倫堂後, 至祗送處, 於天使來, 鞠躬焉。 天使見儒生滿庭之拜, 遣譯官語館堂上曰: “英才濟濟, 足見敎育之盛。” 又曰: “進退合禮, 尤見敎育之功。” 云云。 又問館員曰: “館中養育儒生幾人?” 希春對曰: “常養五百人。” 蓋祖述徐居正, 對王昌、董越之語也。 春希初到, 大司成洪天民欲去, 學令以爲不當去, 及承旨於持來宮醞, 通事以宣醞爲言, 以宣字用於賜臣下, 不當用於呈天使。 又衆議: “冬至望闕禮。 或疑上與天使同行一處。” 希春以爲: “不當同處爲之” 云。

선조 7권, 6년(1573 계유/명만력(萬曆) 1년) 2월 5일(병진) 1번째기사

주강에서 음양론, 교서관의 주자 저서 인쇄, 서쪽 변방의 일등을 논하다

주강(晝講)이 있었다. 특진관(特進官) 강섬(姜暹)·심수경(沈守慶), 승지 정유일(鄭惟一), 옥당 유희춘(柳希春)·이성중(李誠中)이 함께 들어갔다. 유희춘이 《서경(書經)》 우공편(禹貢篇)의 ‘역양(陽)268)의 고동(孤桐)269)과 ……’라는 단락을 강독(講讀)하다가 전(傳)에 ‘초목의 생장에는 볕을 받는 것이 귀중하다.’한 것에 따라 아뢰기를,

”만물은 어느 것이나 다 볕을 받아서 무성하게 되니, 실로 산의 남쪽만이 볕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한 나무나 한 숲 가운데에서도 남쪽 가지가 좋고 북쪽 가지가 좋지 않습니다. 임금이 남면하여 청정(聽政)하는 것도 다 볕을 받는 것을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볕을 받는다 함은 대개 문명(文明)의 뜻을 취한 것이다.”하였다.

신(臣)이 대답하기를,

“천하에는 해에 의하여 광명(光明)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남쪽을 향하면 가까워지므로 좋은 것입니다. 초목의 모든 무리가 모두 다 볕 받기를 좋아하나, 양하(荷)라는 채소만은 반드시 그늘진 데라야 좋아하니, 이것이 음중양(陰中陽)·양중음(陽中陰)이라는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짐승 가운데서 수리부엉이만은 밤에 다니는데, 이것도 음기(陰氣)를 타고난 것이다.”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양하는 음의 여린기를 타고나고 수리부엉이는 음의 사나운 기를 타고난 것이다.”하고,

또 고동은 역양 등에서 나는 물건이란 것을 논하여 아뢰기를,

“물건만이 그러할 뿐 아니라 인재도 나는 곳과 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노(魯)나라에 군자가 많다고는 하나, 계씨(季氏)·양호(陽虎)같은 무리를 어찌 착하다 하겠습니까? 대저 도리는 모래 가운데에 금이 있고 옥 가운데에 돌이 있는 것이니, 정하게 가려야 합니다.”하였다.

유희춘이 또 나아가 아뢰기를,

“어젯밤에, 경서(經書)의 판본(板本)에서 오자가 있는 곳은 당본(唐本)에 따라 고쳐야 한다는 성지(聖旨)를 면대하여 받았는데, 참으로 위에서 분부하신 것이 마땅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피휘(避諱)하느라 다른 글자로 갈아 쓴 글자라면 지두(紙頭)에 써야 하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판본의 오자는 후래의 착오이고 주자(朱子)의 본(本)이 아니나, 피휘하여 갈아 쓴 것은 주자 당시에 한 일이니, 지두에 적어야 한다”하였다. 또 강섬 등이 서쪽 변방에서 정토(征討)하는 일을 의논드렸는데,

유희춘이 다시 나아가 아뢰기를,

“정토하는 일은 신처럼 오활한 서생이 본디 알 수 없습니다마는, 고금을 두루 살펴보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큰일이니, 살피고 삼가야 할 것이고 쉽사리 일으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최호(崔浩)는 원위(元魏)270)를 도와 사방을 정벌하여 이겼으나, 그의 말에 ‘나라를 일으키는 임금은 먼저 인사(人事)를 닦고 다음에 지리(地利)를 다한 뒤에 천시(天時)를 보므로 모든 거사에 모두 안전하다.’하였습니다. 지난해에는 농사가 부실하고 올해에는 또 재변이 있어 포(砲)를 쏘는 듯한 소리까지 일어났으니, 이러한 때에 군사를 일으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변장(邊將)·무관(武官)들이 작은 울분을 참지 않고 으레 정토를 청하니, 이것은 따를 수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仁)·신(信)·지(智)·용(勇)·엄(嚴) 중에서 하나라도 없으면 장수가 될 수 없다 하는데, 이것이 누구의 말인가?”하였다.

유희춘이 대답하기를,

“손무(孫武)와 악비(岳飛)의 말입니다. 예전 성종 때의 허종(許琮)은 명신(名臣)인데, 심처(深處)의 우지개(于之介)가 변장 나사종(羅嗣宗)을 야춘강(也春江)가에서 죽였으므로, 성종께서 노하여 허종을 보내어 정벌하게 하셨습니다. 허종이 종성(鐘城)에 가서 변방의 두 사람을 보내어 되[虜]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엿보게 하였는데, 그때에는 말썽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변방의 정탐하는 자가 감히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3일정(日程)만을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되는 3일정에 있다.’하였습니다. 허종이 부원수(副元帥) 이하에게 의논하지 않고 곧바로 ‘사흘 양식을 지니라.’고 영을 내렸으나, 10여 일정을 갔으므로 군졸이 많이 굶어 죽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지(智)는 장수에게 더욱 긴요한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의 의논이 있을 것이다. 대개 군사는 쉽사리 일으켜서는 안될 것이다.”하고,

또 이르기를,

“이 일은 본디 대단한 정토까지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거사이다.”하였다. 유희춘이 대답하기를,

“말썽은 반드시 큰 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작더라도 화(禍)가 맺히는 수가 있습니다. 신이 육진(六鎭)에서 귀양살이할 때에 경흥부사(慶興府使)가 백성의 식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저들의 땅에 침입하여 빼앗았으므로, 이응거도(伊應巨島)에서 경작하는 호인이 원한을 갖고 후라도(厚羅島)·극성보(棘城堡) 등에서 도둑질하여 병화(兵禍)가 잇달아 있었으니, 이것도 경계해야 합니다.”하였다.

대답이 끝나 물러나왔다.

註268]역양(陽): 역산(山)의 남쪽.註269]고동(孤桐): 홀로 우뚝한 오동.註 270]원위(元魏): 후위(後魏).

○丙辰/晝講。 特進官姜暹、沈守慶、承旨鄭惟一、玉堂柳希春、李誠中同入。 希春講 “嶧陽孤桐, 因傳中草木之生, 以向陽爲貴” 曰: “萬物莫不向陽, 而遂茂盛, 實非特山南向陽, 雖一樹一林, 南枝好, 而北枝不好, 人君南面而聽政, 亦莫不以向陽爲貴也。” 上曰: “向陽蓋取文明之義。” 臣對曰: “天下莫不光明於日, 向南則近日光, 故好也。 草木庶類, 莫不以向陽爲好, 唯蓑荷一菜, 必以陰乃好, 此所謂陰中陽, 陽中陰也。” 上曰: “禽獸之中, 唯鵂鶹夜行, 此亦稟陰氣者也。” 臣曰: “蓑荷, 稟陰弱之氣, 鵂鶹稟陰戾之氣者也。” 又論孤桐之出於嶧陽等物, 而言曰: “不特物爲然, 人材亦有生出之地、不出之地, 然又不可執一論。 魯雖云君子之多, 至如季氏、陽虎之徒, 豈可謂善乎? 大抵道理, 沙中有金, 玉中有石, 要須精擇。” 希春又進曰: “昨夜面承聖旨, 經書板本誤字處, 依唐本當改正, 誠上敎允當。 臣以爲, 若避諱代書之字, 當書於紙頭。” 上曰: “此說是矣。 ” 板本之誤, 乃後來之訛, 朱子非之。 本避諱代用, 朱子當日所爲, 今當錄於紙頭。 又姜暹等議西邊征討事。 希春更進曰: “征討之事, 如臣迂疏書生, 固不能知。 但歷考古今興兵大事, 所當審愼, 而不可輕擧。 崔浩輔佐元魏, 征伐四克, 然其言曰: ‘興國之君, 先修人事, 次盡地利, 後觀天時, 故萬擧而萬全。’ 去歲農事不實, 今年西方, 又有災變, 至作放砲之聲, 當此之時, 其不可擧兵明矣。 邊將介冑之士, 不忍小憤, 例請征討, 此不可從也。” 上曰: “仁、信、智、勇、嚴, 闕一, 不可爲將。 此誰語?” 希春對曰: “孫武及岳飛語也。 昔成廟朝, 許琮名臣也。 深處亏之介。 殺邊將羅嗣宗于也春江邊, 成廟赫怒, 遣許琮征之。 琮到鍾城, 遣邊上二人, 往覘虜所在遠近。 其時釁隙已著, 邊探者不敢深入, 只入三日程而還曰: ‘虜在三日程。’ 琮不議于副元帥以下, 直下令曰: ‘持三日糧。’ 行十餘日程, 軍卒多飢死。 以此觀之, 智, 在將尤緊急也。 上曰: “大臣等必有所議, 大槪兵不可輕擧。” 又曰: “此事本不至大叚, 征討乃小小擧也。” 希春對曰: “釁不必大, 雖小, 亦有禍結之理。 臣謫居六鎭, 慶興府使因民乏食, 越豆滿江, 侵奪彼地, 於伊應巨島, 耕種。 胡人結怨, 作賊于厚羅島、棘城堡等處。 兵連禍結, 此亦可戒也。” 語畢, 退。

선조 7권, 6년(1573 계유/명만력(萬曆) 1년) 8월 24일 신미 3번째기사

심의겸, 이산해, 신응시, 하진보, 곽월, 정이주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특지(特旨)로 심의겸(沈義謙)을 대사헌으로, 이산해(李山海)를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신응시(辛應時)를 집의(執義)로, 하진보(河晉寶), 곽월(郭越)을 장령(掌令)으로, 정이주(鄭以周)를 지평으로, 강섬(姜暹)을 판윤(判尹)으로, 유경선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特旨以沈義謙爲大司憲, 李山海爲吏曹參議, 辛應時爲執義, 河晋寶、郭越爲掌令, 鄭以周爲持平, 姜暹爲判尹, 柳敬先爲忠淸水使。

선조 7권, 6년(1573 계유/명만력(萬曆) 1년) 9월 10일 정해 2번째기사

홍천민, 곽월, 강섬, 김우서, 최응룡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홍천민(洪天民)을 대사간(大司諫)에, 곽월(郭越)을 장령에, 강섬(姜暹)을 겸도총관(兼都摠管)에, 김우서(金禹瑞)를 북도병사(北道兵使)에, 최응룡을 부호군(副護軍)에 제수하였다. 최응룡은 북병사에서 체직되고 나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가자(加資)가 개정되었고, 또 충청감사(忠淸監司)에 잉임(仍任)되지도 못하였다.

○有政。 以洪天民爲大司諫, 郭越爲掌令, 姜暹兼都摠官, 金禹瑞爲北道兵使, 崔應龍爲副護軍, 崔玩遞北兵使, 改正嘉善, 又不得仍任忠淸監司。

선조 7권, 6년(1573 계유/명만력(萬曆) 1년) 9월 29일(병오) 1번째기사

경회루에서 친시하고 활쏘기를 구경하다

상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전좌(殿坐)하여 친시(親試)하고 관사(觀射)하였는데, 시관(詩官) 좌상 박순(朴淳), 우상 노수신(盧守愼), 박충원(朴忠元)·성세장(成世章)·정종영(鄭宗榮)·이순형(李純亨)·심수경(沈守慶)·윤현(尹鉉)·유희춘(柳希春)·박근원(朴謹元)이 동편에 입시하였고, 무과(武科)의 시관은 강사상(姜士尙)·강섬(姜暹)이었다. 제목은 ‘선악은 다 천리이다. [善惡皆天理]’라는 것이었는데 논(論)을 짓게 하였다. 상이 ‘금일즉사(今日卽事)’를 글제로 하여 좌우에게 명하여 칠언 율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승지 박승임(朴承任)과 유전(柳琠)이 삼중(三中)으로 숙마(熟馬)·대록비(大鹿皮)를 받고, 이순형·이양중(李養中)·성세장은 삼하(三下)로 호피(虎皮)를 받고, 유생 안곡(安鵠)은 삼상(三上)으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丙午/上殿坐于慶會樓下, 親試與觀射。 試官左相朴淳、右相盧守愼, 朴忠元、成世章、鄭宗榮、李純亨、沈守慶、尹鉉、柳希春、朴謹元入侍。 東邊武科試官, 姜士尙、姜暹題善惡皆天理之論。 上以今日卽事爲題, 命左右製七言律詩以進。 承旨朴承任、柳㙉三中, 受熟馬大鹿皮, 李純亨、尹鉉、李養中、成世章三下, 受虎皮, 儒生安鵠三上, 直赴殿試。

선조 7권, 6년(1573 계유/명만력(萬曆) 1년) 10월 4일(신해) 3번째기사

예조의 조묘 제사 논의와 여진 근처에서 인삼을 캐는 백성들의 처리 논의

예조의 공사(公事)에,

“철주수(鐵州守) 이원정(李元禎) 등의 쌍충사(雙忠祠)의 위패(位牌)는 ‘철주수이공지위(鐵州守李公之位)’ ‘철주판관이공지위(鐵州判官李公之位)’로 쓰고, 봄·가을의 중월(仲月)에 치사(致祠)하되 날짜는 상정일(上丁日)·상무일(上戊日)에 문선왕(文宣王)·사직의 제사를 지낸 뒤의 상경일(上庚日)로 정하소서. 그리고 종묘의 제사를 섭행할 때에 성생(省牲)하는 일은, 《오례의(五禮儀)》 서례(序例)에 ‘종묘·사직에 친제할 때에는 왕세자가 으레 아헌관(亞獻官)이 되고 영의정이 종헌관(終獻官)이 된다.’하였고, 성생조(省牲條)에 또 ‘영의정이 아헌관이 되면 영의정이 성생한다. 섭행할 때에도 같다.’하였으니, 이것을 살펴보면 영의정은 초·중·종의 어느 헌관이 되든 막론하고 성생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소견은 이러하나 사람들의 소견은 같지 않은 것이어서 오히려 섭행할 때에도 같다는 글에 얽매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하소서.”하였는데,

이것은 수십 년 동안 결정하지 못한 큰일이었다.

또 강섬(姜暹)이 윤대(輪對) 때에 아뢰기를,

“강변(江邊) 사람들이 흔히 되[胡]에 가까운 곳에서 인삼(人蔘)을 캐는 것은 부경(赴京)하는 일행이 가져가기 때문이니, 일로(一路)에서 가져가는 것을 금하소서.”한 말에 따라 판서 정종영과 참판 유희춘이 아뢰기를,

“강변 백성이 금령(禁令)을 무릅쓰고 되에 가까운 곳에서 인삼을 캐는 것은 감사를 시켜 금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부경하는 일로에서 인삼을 가져가는 것을 금하면 먼길을 가는 일행이 가볍게 가져갈 것이 없을 것이니, 금하지 마소서…….”하였다.

○禮曹公事: “鐵州守李元禎等雙忠祠位牌, 書鐵州守李公之位, 鐵州判官李公之位, 春秋仲月致祀。 日期, 以上丁上戊, 文宣王、社稷祭之後, 上庚爲定。 且宗廟攝行時省牲事, 載於《五禮儀序例》云。 宗廟社稷親祭時, 王世子例爲亞獻官, 領議政爲終獻官, 省牲又云領議政爲亞獻官, 則領議政省牲攝行同, 按此則領議政, 勿論初中終獻官, 皆爲省牲也。 臣等之所見如是, 而人之所見不同, 猶拘攝事同之文, 請議諸大臣, 永爲定式。 此乃數十年不決之大事也。 又因姜暹輪對, 江邊人多採人蔘於近胡之地, 以其赴京一行齎去故也。 請禁一路持去。” 判書鄭宗榮及參判柳希春以爲: “江邊人民, 冒禁採蔘於近胡之地, 則令監司禁斷爲當。 赴京一路禁齎人蔘, 則遠路一行, 無所輕齎, 請禁。” 云云。

선조 7권, 6년(1573 계유/명만력(萬曆) 1년) 11월 30일(병오) 1번째기사

주강에 《서경》을 강하고 검소함, 이항·조식등에 대해 논하다

주강(晝講)이 있었다. 특진관 강섬(姜暹)·윤현(尹鉉), 도승지 유전(柳)과 유희춘(柳希春)이 입시하였다.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먼동틀 때에 비현(丕顯)하여’라는 단락과 ‘그 검덕(儉德)을 삼간다.’라는 단락을 강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먼동 틀 때에 비현하여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야기(夜氣)가 청명(淸明)한데에 관계되는 일인가?”하니,

유희춘이 아뢰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맹자(孟子)》에 있는 야기의 주(註)에 ‘밝은 낮에 마음이 물욕에 얽매여 상하지 않으면 야기가 더욱 맑게 되고 야기가 맑으면 아직 사물을 접하지 않은 아침에 담담하여 허명(虛明)한 기상을 볼 수 있다.’ 하였습니다.”하였다.

또 ‘그 검덕을 삼간다’한 데를 강독할 때에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공자(孔子)는 온(溫)·양(良)·공(恭)·검(儉)하다.’는 검(儉)을 풀이하여 ‘검은 검약(儉約)에 그치지 않고 무릇 방사(放肆)하지 않고 수렴(收斂)을 힘쓰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하였습니다. 무릇 사치하고 방사하면 나라를 망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걸(桀)의 경궁(瓊宮)·요대(瑤臺)와 주(紂) 주지(酒池)·육림(肉林)과 진(秦)의 아방(阿房)414)·여산(驪山)415)과 진무제(晉武帝)의 액정양차(掖庭羊車)416)와 진후주(陳後主)의 삼각황음(三閣荒淫)417) 과 수양제(隨煬帝)가 넓게 궁실(宮室)을 지은 것과 당의종(唐懿宗)이 절도 없이 교사(驕奢)하여 천하의 재력(財力)을 고갈시킨 것과 송휘종(宋徽宗)이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고 널리 화석(花石)을 모은 것이 다 방사한 일인데, 곧은 말을 듣기 싫어하였으므로 복철(覆轍)이 한결같았습니다. 한무제(漢武帝)만은 여러번 군사를 일으키고 또 백량대(柏梁臺)·건장궁(建章宮)을 짓고서도 우연히 망하지는 않았지만 도둑이 천하에 들끓었으므로 무제가 깊이 뉘우치고 윤대(輪對)의 조(詔)418)를 내렸기 때문에 겨우 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개 검(劍)은 덕(德)의 공순함이요, 치(侈)는 큰 악(惡)입니다마는, 《시경(詩經)》위풍(魏風) 갈구편(葛篇)에 일설(一說)이 있습니다. 장식(張)이 ‘부자(夫子)가 「쓰는 것이 검(儉)에 지나치다」하였고, 또 「예(禮)가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게 하라」하였으니, 검은 본디 악덕(惡德)이 아니다. 그러나 검이 지나치면 인색하고 막히게 되어 이익을 꾀하는 마음이 급박해진다.’하였고, 또 공자가 ‘남에게 주기는 마찬가진데 출납(出納)이 인색한 것을 유사(有司)라 한다’하였으니, 검이 지나쳐 인색한데에 이르면 당연히 주어야 할 때에도 주저하고 주지않게 되어 마침내는 인심을 잃게 됩니다. 대개 모든 일은 중도에 맞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인(仁)이 지나친 경우에는 가엾게 여기는데에 치우치기도 하고 의(義)가 지나친 경우에는 가엾게 여기는데에 치우치기도 하고 공순이 지나친 경우에는 수고롭게 되고 검이 지나친 경우에는 인색하게 되니, 이것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됩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동틀 때에 비현(丕顯)하여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곧 《중용(中庸)》에 이른바 ‘재계(齋戒)하고 복장을 가다듬고 예(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뛰어난 선비를 널리 구한다는 것은 곧 이른바 ‘어진이를 높인다.’는 것입니다. 대개 《대학》·《중용》의 도(道)는 다 먼저 덕을 밝힌 뒤에 어진이를 높이는 것이고, 또 먼동이 틀 때에 비현하여 앉아서 아침을 기다린다는 것은 곧 경(敬)인 것입니다.”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유희춘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홍문관의 차자에서 아뢴, 이황(李滉)의 문인으로서 서술한 자란 바로 조목(趙穆)을 가리킨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황의 문인 가운데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있는가?”하니,

아뢰기를,

“정유일(鄭惟一)·정탁(鄭琢)·김취려(金就礪) 등입니다.”하였다.

이황이 걸신(乞身)419)하여 떠날 때에 상이 노쇠하고 병든 것을 근심하였고 신들도 위에서 굳게 만류하도록 권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때에는 늘 한스럽게 여겼으나 이제와서 생각하면 또한 유감이 없다. 이황이 기사년420)에 사직하고 돌아가 경오년421)에 죽었는데 그 문인들도 모두들 겸퇴(謙退)하여 감히 행장(行狀)을 지어올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림(士林)들은 다들 빨리 역명(易名)422) 보기를 바랐는데, 이는 공론이었다. 이황이 《주자대전(朱子大全)》의 교정에 지극한 공이 있으니, 《주자대전》의 교정은 이황의 공이 반을 차지하였다. 이황이 아직 살아있다면 어찌 상사(賞賜)를 받지 않았겠는가?“ 상이 김우옹에게 하문하기를,

“조식(曺植)은 사람을 어떻게 가르쳤는가?”하니,

김우옹이 아뢰기를,

“조식의 박문(博文)·궁리(窮理)는 이황만 못하지만, 사람에게 정신과 기개를 가르쳤으므로 흥기된 자가 많았는데, 최영경(崔永慶)·정인홍(鄭仁弘) 같은 사람들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항(李恒)은 사서(四書)만을 읽게 한다는데 이것도 옳다. 대개 서적이 많지 않은 옛날에는 어진 사람이 많았으나, 글이 더욱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성취는 더욱 적어졌다.”하니,

유희춘이 아뢰기를,

“글을 널리 보는 것을 단점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만 널리 보고도 정밀하지 못하여 시비(是非)·정조(精粗)의 구별을 모른다면 많은들 무엇하겠습니까? 널리 배우고 상세히 밝혀서 반드시 그 이치를 궁구한다면 어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학문은 넓기를 바라되 잡되기는 바라지 않고 간략하기를 바라되 고루하기는 바라지 않는 것인데, 잡된 것은 넓은 듯하고 고루한 것은 간략한 듯하니, 이 점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항은 오로지 간략을 힘썼으므로 이런 말이 있는 것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학문이 넓은 것은 요체를 아는 것만 못하고 요체를 아는 것은 실행이 절실한 것만 못합니다. 임금은 만기(萬機)가 번다한데, 어찌 지엽적인 것에 정신을 둘 수 있겠습니까. 글에서는 긴요한 것만을 취하여 체념(體念)해야 합니다.”하였다.

註414]아방(阿房): 궁명(宮名).註415]여산(驪山): 진시황이 묻힌 곳.註416]액정양차(掖庭羊車): 진무제는 본디 검소하였으나, 오(吳)를 평정하여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액정(掖庭:후궁, 궁녀)이 거의 1만명이나 되고 총애하는 자도 매우 많았다. 그래서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양이 끄는 대로 가서 자니, 궁인들이 댓잎을 문에 꽂고 소금물을 땅에 뿌려 양을 유인하여 임금의 수레가 오게 하였다. 《진서(晉書)》권31 호귀빈전(胡貴嬪傳).註417]삼각황음(三閣荒淫): 남조(南朝) 진(陳)의 후주(後主)는 광소전(光昭殿) 앞에 임춘각(臨春閣)·결기각(結綺閣)·망선각(望仙閣)을 짓고 임춘각에는 자신이 거처하고, 결기각에는 장귀비(張貴妃)를, 망선각에는 공귀빈(貴嬪)·공귀빈(孔貴嬪)을 거처하게 하고 세 각을 복도로 이어 왕래하였으며, 또 왕미인(王美人)등 10여인을 번갈아 그곳에 들어오게 하여 주색으로 날을 보냈다. 《남사(南史)》권12 장귀비전(張貴妃傳).註418]윤대(輪對)의 조(詔): 윤대는 한(漢)나라가 개척하여 군사를 주둔시켰던 서역(西域)의 땅으로 지금의 신강성(新疆省)에 속하는 것인데, 무제 말기에 이곳을 흉노(匈奴)에게 빼앗기고 나서 무제가 애통해 하고 뉘우치는 뜻의 조서(詔書)를 내렸다. 《한서(漢書)》권96 서역전(西域傳)註419]걸신(乞身): 나라에 바쳐 벼슬하던 몸을 임금에게 청하여 도로 받아서 고향에 돌아가 묻는다는 뜻으로, 사직을 청원하거나 청원하여 면직됨을 뜻하는 말로 쓴다.註420]기사년: 1569 선조 2년.註421]경오년: 1570 선조 3년.註422]역명(易名): 시호.

○丙午/晝講。 特進官姜暹ㆍ尹鉉、都承旨柳㙉、柳希春入侍, 講《伊尹》, 乃言曰: “先王昧爽丕顯一段, 愼乃儉德一段。” 上曰: “昧爽丕顯, 坐以待旦, 是夜氣淸明之事。” 希春對曰: “誠然。 《孟子》夜氣註云: ‘若於旦晝之間, 不至梏亡, 則夜氣愈淸。’ 夜氣淸, 則平旦未與物接之時, 湛然虛明, 氣像自可見。” 又講愼乃儉德曰: “朱子釋孔子溫良恭儉之儉曰: ‘儉不止儉約, 凡不放肆、務收斂, 皆是。’ 凡奢侈放肆, 未有不亡其國。 桀之瓊宮瑤臺, 紂之酒池肉林, 秦之阿房、驪山, 晋武之掖庭羊車, 陳後主之三閣荒淫, 隋煬帝之廣營宮室, 唐懿宗之驕奢無度, 竭四海之財力, 宋徽宗之大興土木, 廣聚花石, 皆恣肆, 而惡聞直言, 覆轍如一。 惟漢武帝屢興師旅, 又作栢梁迷章宮, 而偶得不亡。 然盜賊滿於天下, 帝又深悔, 下輪對之詔, 故僅得不亡耳。 蓋儉德之恭也; 侈惡之大也。 但有一說, 詩《魏風》《葛屨》篇, 張拭〔張栻〕曰: ‘夫子曰用過乎儉。 又曰禮與其奢也, 寧儉。’ 儉本非惡德, 然儉之過, 則至於吝嗇迫隘, 而謀利之心, 始急矣。 又孔子曰: ‘猶之與人也, 出納之吝, 謂之有司, 儉而至於吝, 則遲疑不決。 當予不予, 終失人心。 蓋凡事, 貴乎得中。 仁之過者, (惑)〔或〕至於之其所哀矜而辟焉;義之過者, 或至於之其所賤惡而辟焉; 恭之過者, 至於勞;儉之過者, 至於吝。 此不可不察。” 又曰: “昧爽丕顯, 坐不待旦, 卽《中庸》所謂齊明盛服, 非禮不動也。 旁求俊彦, 卽所謂尊賢也。 蓋《大學》、《中庸》之道, 皆以先明德而後尊賢。 又昧爽丕顯, 坐以待旦, 卽敬也。” 講畢, 希春進曰: “頃日, 館箚子所云, 李滉門人敍述者, 指趙穆。” 上曰: “李滉門人, 亦有立朝者乎?” 對曰: “鄭惟一, 鄭琢、金就礪等是也。 李滉之乞身而去也, 上愍其衰病, 臣等亦不勸上强留, 其時常以爲恨。 至今觀之, 亦爲無憾。 己巳告歸, 而庚午身沒也。 其門人亦皆謙退, 不敢呈行狀, 士林咸欲速見易名, 此公論也。 滉之校正《朱子大全》, 至爲有功。 《朱子大全》之校正, 滉之功居半, 使滉尙在, 豈不受 賜? 上問金宇顒曰: “曹植敎人如何?” 宇顒曰: “植之博文窮理, 不如李滉。 然敎人精神氣槪, 多有興起者, 如崔永慶、鄭仁弘之類是也。” 上曰: “聞李恒, 只令讀四書, 此亦是。 蓋書不多時, 古人多賢, 文字愈多, 而人之成就愈下。” 柳希春對曰: “博觀文字, 亦不可少。 蓋博而不精, 不知是非精粗之別, 則雖多何爲? 若能博學詳說, 而必窮其理, 則豈不有益乎? 但學欲博, 不欲雜, 欲約不欲陋, 雜者似博, 陋者似約, 此不可不察也。 (李恒)〔李滉〕專務簡約, 故有此說耳。” 又曰: “學之博, 未若知之要, 知之要, 未若行之切。 人君萬機之繁, 豈能留神於枝葉? 文字上, 但當取其緊要者, 而體念耳。”

선조 7권, 6년(1573 계유/명만력(萬曆) 1년) 12월 21일(정묘) 1번째기사

조강을 하고 유희춘 등이 《근사록》, 소동파 시, 비평등을 아뢰다

조강이 있었다. 영상(領相) 이탁(李鐸), 동지경연(同知經筵) 이후백(李後白)·유희춘(柳希春), 특진관(特進官) 강섬(姜暹)·성세장(成世章), 승지(承旨) 구봉령(具鳳齡)이 입시하였다. 유희춘이 ‘이윤(伊尹)이 임금에게 거듭 고하기를’이라는 한 문단을 강독하고 아뢰기를,

“《근사록(近思錄)》을 살펴보니 명도선생(明道先生)442)이 ‘천지 사이에는 감(感)과 응(應)이 있을 뿐이다.’하였는데, 이 장(章)에도 감응의 이치를 말하였습니다. 하늘을 공경한다는 것은 동정(動靜)·어묵(語默)에 털끝만큼도 감히 게을리하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호오(好惡)·용사(用捨)도 한결같이 천리(天理)를 따라야 하는 것으로 이것이 경천이 됩니다. 《대학(大學)》에 ‘하늘의 명명(明命)을 돌아본다.’하고,《논어(論語)》에 ‘군자(君子)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한다.’하고, 《맹자(孟子)》에 ‘본심(本心)을 지켜 본성(本性)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방도이다.’하고, 《중용(中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삼가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한 것이 모두 경천의 뜻입니다. 《대학》에 ‘갓난아이를 보육하듯이 한다.’하고, 또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임금을 백성의 부모라 한다.’ 하고, 《논어》에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는데에는 일을 공경히 하여 미덥게 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사람을 아끼고 백성을 제 시기에 부린다.’하고, 《맹자》에 ‘사람을 차마 해롭게 못하는 정치를 행한다.’하고, 또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는 것을 인정(仁政)의 큰 근본으로 삼았고 또 정령(政令)을 내어 인정(仁政)을 베풀 때에 반드시 환과고독(鰥寡孤獨)을 먼저 한 것이 문왕(文王)의 정치라 하고, 《중용》에서 공자(孔子)가 구경(九經)의 도리를 논함에 있어 서민(庶民)을 자식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이 다 백성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논어》에 ‘공자는 죽은 이를 제사할 적에는 살아 있을 때와 같이 하고 신(神)을 제사할 적에는 신이 있는 듯이 한다.’하고, 《중용》에 ‘재계(齋戒)하고 옷을 깨끗이 하여 제사를 봉승(奉承)한다.’한 것은 다 귀신에게 치성(致誠)하는 뜻입니다.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는 그 대강(大綱)이 명백하여 알기 쉬우나, 백성을 사랑하고 귀신에게 치성하는 두 가지 일에는 다시 곡절이 있습니다. 대개 맹자는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를 극진히 논하고 또 ‘살리기 위한 도리로 백성을 죽이면 죽더라도 죽인 자를 원망하지 않는다.’하였는데, 주자가 풀이하기를 ‘해로운 것을 없애고 악한 것을 없애는 따위가 이것이다.’하였습니다. 제사는 친히 지내야 마땅한 것이긴 하지만 임금의 경우에 있어서는 한추위와 한더위에 행할 수없는 형세이면 친히 행하지 않더라도, 순(舜)이 백이(伯夷)에게 명하여 삼례(三禮)를 맡게 하고 훈계하기를 ‘밤낮으로 공경하라.’한 것과 한 문제(漢文帝)가 종묘(宗廟)를 공경히 받든 뜻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대저 이 한 문단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귀신에게 치성하는 이 세 가지 일이기는 하나 그 실상은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 강령(綱領)입니다. 임금이 진실로 하늘을 공경한다면 백성을 사랑하고 귀신에게 치성하는 것은 차례로 거행할 수 있습니다.”하고,

윤현(尹晛)이 아뢰기를,

“이 장(章)은 장재(張載)가 지은 서명(西銘)의 뜻에 맞습니다.”하고,

유희춘도 따라서 칭찬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대간·승지가 나아가 아뢴 뒤에 유희춘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위에서 동파(東坡)의 시(詩)를 들여오라고 명하셨는데 신은 위에서 한두 곳을 살펴보려 하시는 것인지 두고 보려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소식(蘇軾)은 잘난 체하고 궤사스러워 심술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문사(文詞)에 나타난 것도 다 평탄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예엽(芮曄)이 학교의 정사를 맡았을 때에 주자(朱子)가 글을 보내어 논하기를 ‘소씨(蘇氏)는 웅심(雄深)하고 번묘(繁妙)한 글로 경위(傾危)하고 변환(變幻)하는 버릇을 선동하므로 그 해독을 입는 사람들이 살에 젖고 뼛속에 스미게 되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하였으니, 이제 바로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야만 세찬 물결이 동방으로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시에서 감흥을 일으키려 하신다면, 주자의 감흥시 20수(首)가 있습니다. 이는 다 오언(五言)으로 모두 1천2백60자(字)인데 그 가운데에 천지만물의 이치와 만고 성현의 마음과 고금 만사의 변천이 모두 다 들어있으며 음운(音韻)이 잘 조화되고 흥취가 유원(悠遠)하여 읊는 동안에 의미가 심장하니, 이 시로 그것에 대체하시면 다행하겠습니다.”하고,

윤현이, 소식이 이천(伊川)443)을 시기한 일을 아뢰고, 유희춘이 아뢰기를,

“소식은 도덕을 말할 경우에는 대본(大本)을 어지럽히고 사실을 논할 경우에는 권모(權謀)를 숭상하며, 통달(通達)은 귀하게 여기면서 명검(名檢)444)은 천하게 여기고 부화(浮華)를 자랑하면서 본실(本實)을 잊으므로, 전혀 예법과 염치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이 때문에 이천의 규구(規矩)·준승(準繩)을 보면 꺼리고 미워하는 것이 심하여 마치 훈유(薰)445)·빙탄(氷炭)처럼 상반됩니다. 신은 전에 송고종(宋高宗)이 소식·황정견(黃庭堅)의 시를 즐겨 보는 것에 대해 군자들이 유감스럽게 여겼다는 것을 보았는데, 더구나 전하의 성명(聖明)으로 어찌 이러하실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강설(講說)을 끝내고서 물러갔다.

註442]명도선생(明道先生): 정호(程顥)의 호.註443]이천(伊川): 정이(程)의 호.註444]명검(名檢): 법도.註445]훈유(薰) 향기 나는 풀과 악취 나는 풀.

○丁卯/有朝講。 領相李鐸、同知經筵李後白ㆍ柳希春、特進官姜暹ㆍ成世章、承旨具鳳齡入侍。 希春講伊尹申告于王一段曰: “按《近思錄》, 明道先王說, 天地間, 只有感與應。 此章亦言感應之理, 所謂敬天者, 非但動靜語默, 無一毫之敢慢, 好惡用舍, 亦一循于天理, 乃爲敬天。 《大學》曰: ‘顧諟天之明命。’ 《論語》曰: ‘君子畏天命。’ 《孟子》曰: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中庸》曰: ‘戒愼乎其所不覩, 恐懼乎其所不聞。’ 皆敬天之謂也。 《大學》曰: ‘如保赤子。’ 又曰: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之, 此之謂民之父母。’ 《論語》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孟子》曰: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又以省刑罰、薄稅斂, 爲仁政之大端。 發政施仁, 必先鱞寡孤獨, 爲文王之政。 《中庸》: ‘孔子論九經之道, 以子庶民。’ 爲訓, 皆仁民之事也。 《論語》: ‘孔子祭如在, 祭神如神在。’ 《中庸》云: ‘齋明盛服, 以承祭祀。’ 皆致誠鬼神之謂也。 敬天之道, 大綱明白易見。 若仁民、致誠鬼神二事, 更有曲折。 蓋孟子極論愛民之道, 而又曰: ‘以生道殺民, 雖死。 不怨殺者。’ 朱子釋之曰: “除害去惡之類是也。’ 雖曰祭祀當親, 至於人君, 隆寒盛暑, 勢不能行。 雖不能親行, 舜命伯夷典三禮, 而訓之曰: ‘夙夜惟寅。’ 漢文帝恭承宗廟之意, 不忘也。 大抵此一段, 敬天、仁民、致誠鬼神, 雖是三事, 其實敬天爲綱領, 人君苟能敬天, 則仁民、致誠鬼神, 次第可擧矣。” 尹晛曰: “此章, 合於張載《西銘》之意。” 希春從而稱善, 講畢。 臺諫、承旨進言, 希春進於其後曰: “頃日, 上命入東坡詩, 臣未知上欲者一二處耶? 欲留覽耶? 蘇軾爲人, 矜豪詭譎, 心術不正, 發於文詞, 亦皆不平。 是故芮曄掌學校之政, 朱子遺書論曰: ‘蘇氏以雄深繁妙之文, 扇其傾危變幻之習, 以故人之被其毒者, 淪肌浹髓, 而不自知。’ 今正當拔本塞源, 庶乎可以障狂瀾, 而東之。 自上若欲興於詩, 則有朱子感興詩二十首在, 蓋皆五言, 凡一千二百六十字之中, 天地萬物之理, 聖賢萬古之心、古今萬事之變, 無不在焉。 音韻鏗鏘, 興致悠遠, 吟詠之間, 意味深長。 以此詩, 易在彼幸甚。” 尹晛言蘇軾媢嫉伊川之事。 希春曰: “蘇軾語道德, 則迷大本;論事實, 則尙權謀貴, 通達而賤名檢; 衒浮華而忘本實, 漠然而不知禮法廉恥之爲何物。 是以見伊川之規矩準繩, 其忌惡之甚, 如薰蕕氷炭之相反也。 臣嘗觀宋高宗好觀蘇黃詩, 君子不能無憾。 況以殿下聖明, 豈可如此乎?” 說畢而退。

선조 8권, 7년(1574 갑술/명만력(萬曆) 2년) 1월 21일(정유) 1번째기사

조강에 유희춘이 진강하여 소인이 정치를 좌우하게 되는 경우 등을 말하다

조강(朝講)452)이 있었다. 영의정 이탁(李鐸), 지경연사 김귀영(金貴榮), 특진관 강섬(姜暹)·허세린(許世麟), 대사헌 박근원, 헌납 홍인건(洪仁健), 부제학 유희춘이 모두 모였다. 정원이 날씨가 추운 것을 들어 조강을 정지할 것을 청했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정원이 다시 아뢰니, 상이 비현각(丕顯閣)에서 영상 및 경연관·대간·사관등을 인견했는데, 자리가 좁기 때문에 지경연사·특진관은 들어가지 못했다. 이탁이 먼저 들어가 북쪽을 향하여 자리에 엎드렸다가 남쪽으로 어좌(御座) 가까이에 앉고, 유희춘·박근원이 잇달아 들어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앉고, 헌납 하번(下番)도 역시 잇대어 앉고 사관 3인은 유희춘 등의 뒤에 앉은 다음에, 상이 전에 진강한 데를 읽었다.

유희춘이 즉시 진강하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며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루겠는가?’라는 말은 지행(知行)이 함께 진보된다는 것이고 ‘한 사람이 지극히 선량하면 모든 나라가 바루어진다.’는 말은 덕화(德化)가 모두 융성해지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며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루겠는가?’란 말은 양동(陽動)을 주로 하는 것이고 ‘임금은 변설(辯舌)로 구정(舊政)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하고, 신하는 총리(寵利)로 성공을 차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음정(陰靜)을 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는가?’라는 구절은 이미 아래 대문을 포괄하고 있으니, 대개 신중하게 생각한다면 변설로 구정을 어지럽히거나 총리로 성공을 차지하는 등의 염려는 저절로 없어지는 것입니다.”하였다.

또 그 전(傳)의 ‘잘 생각하고 잘 행하여 총명한 척한다.’고 한 대문을 해석하기를,

“‘잘 생각하고 잘 행한다.’는 말은, 참으로 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능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생각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방종과 해이를 편안히 여기는 것이니 병이 있는데도 조리하거나 약을 먹지않는 것과 같고 ‘변설로 구정을 어지럽힌다.’는 것은 병이 있는데도 독한 술을 마시고 독이 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아서 그 해독이 더욱 심해지는 것입니다. ‘변설’이란 자기의 사심(私心)으로 기뻐하고 성내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인데, 임금이 조금이라도 편벽된 사심이 있으면 소인들은 반드시 영합하여 기망하는 것입니다. 진효공(秦孝公)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바라자 상앙(商)이 질경(疾耕)·역전(力戰) 같은 피를 흘리고 뼈를 깎는 법을 만들었고, 진시황(秦始皇)이 포악 무도하자 이사(李斯) 또한 공론을 싫어하며 분서(焚書)하도록 권하고 옛 것을 가지고 오늘날을 비난하는 자는 멸족(滅族)하도록 권했습니다. 한무제(漢武帝)가 사방 오랑캐를 정벌하다가 국가의 용도(用度)가 부족하자 장탕(張湯)·조우(趙禹)의 무리가 고황제(高皇帝)의 약속(約束)453)을 어지러이 고쳐 견지고종 감림부주법(見知故縱監臨部主法)454)을 만들었습니다. 당명황(唐明皇)은 당 태종(唐太宗)이 환관을 억제하던 법을 생각지 않고 환관을 높이고 함부로 승진시켰다가 마침내 당나라가 망하게 될 환란의 조짐을 만들었습니다. 송휘종(宋徽宗)은 성격이 음교(淫巧)하고 사치하므로, 채경(蔡京)이 음교와 사치로써 토목 역사를 일으키도록 유도하였는데 전에 만든 규모에 비교하여 다음 집을 더 사치스럽게 하여 조종(祖宗)들이 저축해 놓은 재물을 매양 유왕불회(惟王不會)455)라 하면서 모두 써버렸었습니다. 이는 모두 변설로 구정을 어지럽힌 자들입니다.”하였다.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왕안석(王安石)은 옳은 듯하면서도 그른 말을 하여 송신종(宋神宗)을 현혹하고 법을 고쳐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참으로 변론으로 정치를 어지럽힌 것이지만, 그 나머지 소인들의 말이야 어찌 변론으로 정치를 어지럽힌 것이겠습니까.”하니,

유희춘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변론으로 정치를 어지럽힌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임금의 악에 영합하여 성헌(成憲)을 변란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반드시 왕안석같은 사람만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여후(呂后)456)가 여씨들을 왕으로 삼으려 할 때 왕능(王陵)은 안 된다고 고집했지만, 진평(陳平)·주발(周勃)은 ‘고제(高帝)가 천하를 평정하자 유씨(劉氏)가 임금이 되었으니, 지금 태후가 조정을 다스리매 여씨들이 임금이 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다.’했으니, 이런 것은 모두 변론으로 정치를 어지럽힌 것들입니다. 수성(守成)하는 임금이 신하가 건의하는데 따라 변통하고 가감하는 것은 사리에 당연한 일이지 변론으로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漢)나라 한 시대로 말하면, 한고조가 창업수통(創業垂統)한 다음에 문제(文帝)가 처자까지 연좌시키는 율을 없애고 비방과 요언(妖言)에 관한 죄를 없애고 육형(肉刑)을 없애고 전세(田稅)를 없앴으며, 경제(景帝)는 추령(令)을 경정하고, 무제(武帝)는 연호(年號)를 세우고 육경(六經)을 밝혔으며, 현량(賢良)들을 불러서 대책(對策)을 시험보였습니다. 우리 조정의 일로 말하면, 세종께서 집현전을 세워 문무(文武)의 선비들과 친근히 하였고 사대하는 문서와 방물에 관한 것을 닦아 거행하였고 수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는 법을 세웠으며 또 역상(曆象)457)을 관찰했습니다. 문종께서는 왕씨의 후손을 찾아내어 숭의전(崇義殿)을 세웠고, 성종께서는 다시 홍문관을 세우고 재가한 여인의 자손은 동·서반(東西班)의 관직에 서용하지 말도록 하여 인륜(人倫)을 밝혔습니다. 중종께서는 불교의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혁파하고 소릉(昭陵)을 복위하였으며, 서리(書吏)와 역승(驛丞)을 개혁하여 찰방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모두가 시대에 따라 가감한 것으로서 마치 궁실에다 단확(丹)458)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전에 없던 것이라 하여 팔장끼고 손을 쓰지 않는다면 희망할 만한 일도 칭찬할 만한 일도 없을 것이니, 북제(北齊)처럼 어지러워져서 점차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대간·영상이 잇따라 나아가 아뢰었다.

유희춘도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본래 의술을 알지는 못하지만 다만 몸이 약한 관계로 해서 양생(養生)에 관한 글을 많이 보았습니다. 전일에 뽑아 올린 해설들을 성상께서 보시고 어떻게 여기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니,

상이 매우 좋다고 하자, 유희춘이 일어나 사은하였다.

또 아뢰기를,

“세전(歲前)의 상차는 헌부와 정원이 잘못 알고있던 것을 바탕으로 하였는데 본관(本館)에서도 익랑(翼廊)의 일을 잘못 듣고 간언을 아뢰었습니다. 대개 삼사(三司)459)의 마음은 임금을 선한 데로 인도하여 공도를 확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고찰해보지 않고 망령되이 말했으니 지극히 미안합니다.”하고, 이어 일어나 사죄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릇 글로 뜻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전형(銓衡)에 관한 소임은 반드시 한때의 인망이 있는 사람을 정선하여 시키되 전적으로 위임하여 책임지울 것이요 어쩌다 한번 넘어진 것으로 양마(良馬)를 의심해서는 안되는 법이니, 상께서 사람을 쓸 때는 진실로 이같이 하셔야 합니다. 지난번의 차자에 이비(吏批)와 병비(兵批)의 잘못을 거론한 것은 단지 격려하고 권면하여 더할 수없이 잘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니 이것이 이른바 ‘잘못한 일을 낱낱히 들어 책하는 것은 잘한 일이 오히려 많은 것이다.’는 것입니다. 강사상(姜士尙)은 그의 5촌 숙부가 벼슬하려고 외방에서 올라왔는데 평소에 그를 아꼈으므로 후히 대접은 하면서도 ‘숙부의 재질은 백집사(百執事)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에 감히 천거하지 못한다.’고 하고 돌려보냈으니, 이는 당(唐)나라의 훌륭한 재상 배기(裵)와 무엇이 다릅니까? 신이 강사상과는 벼슬에 나아온 선후가 달라 왕래는 없었습니다만 들은 바가 이러합니다.”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지금의 전조(銓曹)를 어찌 완벽하게 삼가서 사정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유희춘이 아뢰기를,

“지금 세상의 인재는 단지 이런 사람들뿐인데 어떻게 완전한 사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평범한 사람이라도 임용할 만합니다. 현저하게 선하지 못하고 형편없는 사람이라면 대간이 탄핵할 것입니다.”하고,

맨나중에 김우옹이 나아가서 아뢰었다. 또 기록한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형벌이 맞지않는 일이 드물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백성들의 부역(賦役)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는 본래 그전부터 행해져 내려온 것이지만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무(時務)를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전일에 올린 이이의 상소에 대해 상께서 답하신 말씀이 매우 권장하고 허여하신 것이므로, 각기 보고듣는 사람마다 모두 감격하였습니다. 소신도 역시 재질과 학식이 이 사람만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만일 이 사람만 하다면 어찌 이처럼 권장받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이번에 이이의 상소로 인하여 공물(貢物)·선상(選上)460)·군정(軍政)에 관한 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들의 곤고함이 소복될 것입니다”하였다. 또 추기(追記)한다. 유희춘이 임문(臨文)하여 아뢰기를,

“태갑(太甲)이 욕심에 끌려서 법도를 망치고 방종에 빠져서 예의를 망쳐 탕(湯)의 전형(典刑)을 전복시켰으니 이것이야말로 일찍이 변론으로 구정을 어지럽힌 것이기 때문에 이윤(伊尹)이 다시 이것으로 경계한 것입니다”하였다. 제신(諸臣)들의 진달하는 말이 끝나자, 이탁 이하가 차례로 물러갔다.

註452]조강(朝講): 아침 경연을 말함. 경연은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경사(經史)를 강독하고 시정(時政)을 논(論)하는 것인데, 아침·낮·저녁 하루에 세 번 여는 것이 상례이다.註453]약속(約束): 법령.註454]견지고종감림부주법(見知故縱監臨部主法): 견지는 죄를 범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발하지 않았을 때 그 사람을 같은 죄로 처벌하는 법. 고종은 죄가 있는 줄을 알면서도 고의로 놓아 주었을 때 처벌하는 법. 감림부주는 관할하의 하급 관서나 부하가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 그 상사가 죄를 받는 법.《자치통감금주(資治通鑑今註)》註455]유왕불회(惟王不會): 왕의 필요에 의하여 쓰는 것은 회계(會計)에 넣어 따지지 않는 것. 유왕급후세자불회(惟王及后世子不會)의 줄인 말. 《주례(周禮)》천관(天官) 선부(膳夫).註456]여후(呂后): 한 고조의 황후.註457]역상(曆象): 천문(天文).註458]단확(丹): 단청(丹靑).註459]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註460]선상(選上): 서울의 각 관사(官司)에서 부리기 위해 외방(外方)의 각 고을에 소속된 노비(奴婢) 등을 뽑아 올리는 것.

○丁酉/有朝講。 領議政李鐸、知經筵金貴榮、特進官姜暹、許世麟、大司憲朴謹元、獻納洪仁健、副提學柳希春, 皆會政院, 以日寒請停朝講。 上不聽。 政院復啓, 上乃於丕顯閣, 引見領相及經筵臺諫史官等, 而以地窄, 知經筵特進官不得入焉。 李鐸先入北向伏地, 坐于南, 而近御座。 柳希春、謹元相繼入坐東邊向西, 而獻納下番, 亦連坐。 史官三人坐於春等之後。 上讀過前受, 希春卽講弗慮胡獲, 不爲(獲)〔胡〕成, 知行幷進也。 一人元良, 萬邦以貞, 德化俱隆也。 希春以爲: “弗慮胡獲, 弗爲胡成, 主於陽動。 君罔以辯言亂舊政, 臣罔以寵利居成功, 主於陰靜。 然弗慮、胡獲一句, 已包下一段。 蓋愼思, 則目無以辯言亂舊政, 以寵利居成功之患矣。” 又釋傳能思能爲, 作其聰明曰: “能思能爲, 非眞能也, 乃自以爲能也。” 又曰: “不思弗爲, 安於縱弛者, 猶病而不能調理飮藥也。 以辯言亂舊政, 猶病而飮毒酒, 食毒物也。 其害也尤急。 所謂辨言以私意, 爲喜怒好惡。 人主一有私意之偏, 則小人必逢迎, 而欺罔之。 若秦孝公欲富國强兵, 則商鞅變爲疾耕力戰, 流血刻骨之法; 始皇暴虐無道, 李斯亦惡公論, 勸焚書而族滅, 以古非今; 漢武帝征伐四夷, 國用不足, 則張湯、趙禹之徒, 取高皇帝約束, 而紛更之, 創爲見知, 故縱濫臨部主之法; 唐明皇不念太宗裁抑, 宦官之憲, 崇長濫升, 卒基亡唐之禍; 宋徽宗性淫巧奢侈, 而蔡京以淫侈, 導諛土木之役, 卒欲度前規, 而侈後觀, 祖宗儲積之物, 每以惟王不會爲言, 而盡用之。 皆以辨言亂舊政者也。” 李珥曰: “王安石以似是而非之說, 惑神宗變法, 亂天下, 眞所謂辨言亂政。 若其他小人之言, 豈是爲辨言亂政者乎? 希春曰: “不然, 辨言亂政, 泛指不正之人, 逢迎君惡, 變亂成憲, 不必專指安石一般人也。 且如呂后欲王諸呂, 王陵執不可, 陳平、周勃曰: ‘高帝定天下, 王劉氏, 今太后臨朝, 王諸呂, 無所不可。’ 此類皆是辯言亂政者也。 若守成之君, 因臣下建白, 而變通損益, 乃理之當然, 非辯言亂政之事也。 且以漢一代言之, 高祖創業垂統之後, 文帝除收孥連坐律, 除誹謗妖言罪, 除肉刑, 除田稅。 景帝更定箠令, 武帝建年號, 表章六經, 徵賢良對策。 以我朝之事言之, 世宗創立集賢殿, 以親文武之士, 修擧事大文書方物, 立六年守令之法, 又審曆象。 文宗求王氏之後, 立崇義殿, 成宗復立弘文館, 再嫁女子孫, 勿敍東西班職, 以明人倫。 中宗罷禪敎兩宗, 復昭陵, 革書吏驛丞爲察訪。 皆隨時損益, 猶艧丹乎宮室。 苟以爲前日所無, 拱手而不爲, 則可願可稱之事, 無從彛。 如(北齋)〔北齊〕之蕩然漸盡也。” 講畢, 臺諫領相, 相繼進言。 臣希春亦進啓曰: “臣本不曉醫術, 只緣羸弱, 多觀養生之書。 頃日抄進之說, 未知聖覽以爲如何?” 上曰: “甚好。” 臣希春起而謝。 又啓: “歲前上箚, 因憲府政院之誤, 館中亦誤聞翼廊事, 而陳諫。 蓋三司之心, 皆欲引君恢張公道, 然不考事實, 而妄爲之說, 極爲未安。 因起謝。 又陳曰: “凡文不盡意, 銓衡之任, 必精選一時之望, 而爲之, 委任責成, 不可以一蹶疑良馬, 自上用人, 固如是矣。 頃日箚子, 論擧吏兵批之失, 只欲激厲勸勉, 使之盡善而已。 所謂數其事, 而責之者, 其所善者猶多也。 姜士尙其五寸叔, 自外方, 求仕上來, 士尙素愛, 而厚饋之, 以爲: ‘叔才不堪百執事, 不敢薦擧。’ 而送之。 此與唐賢相裵垍何異? 臣於士尙, 先後進不同, 不相往來, 然所聞如此。” 李珥曰: “今之銓曹, 豈可全謹愼, 而無私情乎?” 希春曰: “今世人才, 只是此樣人物, 何由盡得十分? 只平平人, 亦可用。 若顯然不善無狀者, 則臺諫彈擊之矣。” 最後金宇顒進說云云。 更記希春啓: “自上卽位之後, 刑罰罕有不中, 民未見怨者。 但民之賦役不均, 此固從前推逼至此, 然亦不可不變通, 識時務最難。 頃日李珥之疏, 上之答辭, 極其奬許, 各在見聞, 莫不感激。 小臣示以爲: ‘恨才識不如此人。 若如此人, 豈不蒙奬如此乎?’ 今若因珥疏, 講成貢物選上, 軍政之事施行, 則民之困苦, 可蘇息矣。” 又追記, 希春臨文曰: “太甲欲敗度縱敗禮, 顚覆湯之典刑, 固嘗以辯言亂舊政。 故伊尹復以是戒之。” 諸臣陳說旣畢, 自李鐸以下, 以次退。

선조 8권, 7년(1574 갑술/명만력(萬曆) 2년) 2월 8일(계축) 2번째기사

한성판윤 강섬과 공조판서 박영준이 신병으로 정사하다

한성판윤 강섬(姜暹), 공조판서 박영준(朴永俊)이 다같이 신병으로 세 번째 정사(呈辭)하니 체차시키게 하였다.

○漢城判尹姜暹、工曹判書朴永俊, 俱以身病, 三度呈辭, 命遞差。

선조 8권, 7년(1574 갑술/명만력(萬曆) 2년) 9월 20일 신묘 1번째기사

윤희겸을 증직하고, 강섬, 이이, 민기문, 이산해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가 있었다. 고 사부(師傅) 경산현령(慶山縣令) 윤희렴을 좌승지로 증직하고, 강섬을 경기감사로, 이이를 황해감사로, 민기문을 좌부승지로, 이산해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辛卯/有政。 故師傅慶山縣令尹希廉, 贈左承旨, 姜暹爲京畿監司, 李珥爲黃海監司, 閔起文爲左副承旨, 李山海爲大司諫。

선수 13권, 12년(1579 기묘/명만력(萬歷) 7년) 11월 1일 계묘 1번째기사

강섬을 함경도관찰사로 삼다

강섬(姜暹)을 함경도관찰사로 삼았다. 강섬은 재능이 없는데다가 비루하고 인색해서 물의의 비난을 받았지만 수릉관으로 은총을 받았다. 양사(兩司)가 함경도는 북문(北門)의 요충이므로 그 사람이 맡을 곳이 아니라고 여러 번 논박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朔癸卯/以姜暹爲咸鏡道觀察使。 暹無才能, 鄙嗇取譏, 以守陵官, 有恩眷。 兩司論北門鎖?非其任, 累啓, 不允。

선수 15권, 14년(1581 신사/명만력(萬曆) 9년) 10월 1일(신묘) 3번째기사

이달 11일의 재이때문에 대신들을 맞아 자문하다

이달 11일,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 낮에도 캄캄하였고 천둥·번개가 크게 쳤다. 상이 재이(災異)때문에 대신들을 맞아 자문하였는데, 영상 박순(朴淳), 병조판서 유전(柳?), 형조판서 강섬(姜暹), 한성판윤 임열(任說), 좌참찬 심수경(沈守慶), 우참찬 이문형(李文馨), 공조판서 황임(黃琳), 예조판서 이양원(李陽元), 이조판서 정지연(鄭芝衍), 호조판서 이이(李珥), 도승지 이우직(李友直), 대사헌 구봉령(具鳳齡) 등이 입대하였다.

상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천변이 비상하니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는가?”하니,

좌우 신하들이 순서대로 각자 소회를 진달하였는데 모두 평범하고 잗단 것으로 취할 만한 것이 없었고, 유독 이이·유성룡이 다스림의 사체에 관해서 논한 것이 매우 절실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재이는 반드시 치란(治亂)의 갈림길에 있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이는 하늘이 임금으로 하여금 경계하고 조심하여 치적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조(我朝)가 개국한 지 2백년이 지났으니 이때가 바로 중엽의 쇠퇴해지는 시기에 여러 차례 권간이 조정을 탁란시키는 화를 겪었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마치 노인이 원기(元氣)가 거의 쇠진하여 다시 떨치고 일어날 수없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성상께서 태어나셨으니 이는 장차 다스려질 것인가 어지러워질 것인가의 분기점인 것입니다. 만일 이때에 분발하여 진작시킨다면 동방에 만년토록 무궁한 경사가 있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너져 소멸되는 지경에 이르러 구제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임금이 어떠한 큰일을 하려 한다면 반드시 원대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삼대의 정치를 실현할 것을 기약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실학(實學)을 힘써 자신이 한시대에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사에 시행하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선한 마음만을 갖는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널리 현재를 구하여 여러 지위에 임명하고서 전적으로 위임시켜 공을 성취하게 해야 합니다. 임금이 반드시 한시대의 폐단을 제거시킨 뒤에야 한시대의 다스림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소 관리들이 모두가 자신만을 돌보고 나랏일에 유의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상께서 아무리 혼자 걱정하고 애쓰셔도 백성들이 그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폐단은 모두가 어진 인재들에게 위임시키지 못한데에 있는 것입니다. 폐단을 혁파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 여러 신하들이 아뢴 것은 애당초 심사숙고하지 않고서 건백(建白)한 것입니다. 범연한 논설 따위는 채택하여 시행하더라도 끝내 실효가 없는 것입니다.

신의 우견은,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하여 하나의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고 사류들 가운데 시무(時務)를 환히 알고 국사에 유념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모든 건백하는 언론을 곧바로 그 사(司)에 하달하여 상의해서 결정케 함으로써 폐정을 개혁시키게 하면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제사의 일은 훗날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공사(公事)를 육부(六部)가 나누어 관장하게 한 데에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하였다.

이이가 또 아뢰기를,

“어진이를 높이고 학문을 숭상해야 하는데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은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가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할 수 없다.”하였다.

상이 박순에게 이르기를

“군신들의 계사 중에 어느 일이 시행할 만한가?”하니,

박순이 차례대로 변백(辯白)하고, 또 아뢰기를,

“경제사의 일은 이이가 모든 일을 갖추어 아뢰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께서 시행하기가 어렵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다시 이이에게 하문하소서”하였다. 이이가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창졸간에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살릴 만한 새로운 대책을 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바루어 구제할 수있는 방도를 애써 찾아 날로 실행해 나가면 인심과 세도를 점차 회복할 수 있고 따라서 하늘의 노여움도 멈출 것입니다.”하였다.

○是月辛丑, 風雨晝晦, 大雷震電。 上以災異, 延訪公卿。 領相朴淳、兵曹判書柳㙉、刑曹判書姜暹、漢城判尹任說、左參贊沈守慶、右參贊李文馨、工曹判書黃琳、禮曹判書李陽元、吏曹判書鄭芝衍、戶曹判書李珥、都承旨李友直、大司憲具鳳齡、副提學柳成龍等入對。 上顧左右曰: “天變非常, 何以應之?” 左右以次, 各陳所懷, 皆庸瑣無可取, 獨李珥、柳成龍, 論說治體甚切。 珥言: “災異必作於將治將亂之際, 此, 天心欲使人君, 儆惕興治也。 我朝立國, 幾二百年, 此是中衰之日, 而多經權奸濁亂之禍, 至於今日, 如老人元氣垂盡, 不可復振。 而幸有聖上出焉, 此是將治將亂之幾。 若於此際, 奮興振作則爲東方萬年無疆之休, 不然則將至於潰散澌盡, 而莫之救矣。 人君將大有爲, 必立心遠大, 以三代爲期, 先須務實學, 以一身爲一世表準。 然若不施諸政事, 是亦徒善而已。 又須旁求賢才, 列于庶位, 專任而就功。 且人君必袪一世之弊然後, 可興一世之治。 今者大小官, 皆自私其身, 無一人留意於奉公者。 自上雖獨憂勤, 小民不被其澤, 今日之弊, 皆在於不能委任賢材之故也。 至於革弊一事, 群臣所啓, 初非熟計深思, 而建白也。 偶然論說, 雖或採施, 終無實效。 臣愚請令大臣, 議設一經濟司, 擇士類曉達時務、留心國事者與其選, 凡有建白之言, 輒下厥司, 商議定奪, 以革弊政, 則天心庶可回矣。” 上曰: “經濟司, 後必有弊。 我國公事, 六部分掌, 意有在矣。” 珥又言: “宜尊賢崇學。 趙光祖、李滉, 可合從祀。” 上曰: “此事不可爲也。” 上謂朴淳曰: “群臣啓辭, 何事可行?” 淳以次辨白, 且云: “經濟之事, 珥不能事事具啓, 故自上以爲難行, 請更問於珥。” 珥進啓曰: “小臣倉卒, 不能陳新策之可以利國活民者。 但如是勤求匡救之術, 日有所爲, 則人心、世道漸可回, 而天怒可弭矣。”

선조 15권, 14년(1581 신사/명만력(萬曆) 9년) 10월 16일(병오) 1번째기사

상이 천재로 공경을 연방하고, 경제사의 설치등을 논의하다

상이 천재로 인하여 공경(公卿)들을 연방(延訪)하였다. 입시(入侍)한 사람은 영상 박순(朴淳), 병조판서 유전(柳), 형조판서 강섬(姜暹), 한성부판윤 임열(任說), 좌참찬 심수경(沈守慶), 우참찬 이문형(李文馨), 공조판서 황임(黃琳), 예조판서 이양원(李陽元), 이조판서 정지연(鄭之衍), 호조판서 이이(李珥), 도승지 이우직(李友直), 대사헌 구봉령(具鳳齡), 부제학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자리에 앉자 상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천재가 비상하니 장차 어떻게 대응해야겠는가? 좌우의 신하들은 차례로 자기 의견을 진달하라.”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천도(天道)는 심오하여 참으로 엿보아 측량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옛 역사를 놓고 보면 치란(治亂)의 형적이 이미 정해지면 별다른 재변이 없었습니다. 재변이란 반드시 장차 잘 다스려지려고 하거나 어지러워지려고 할 즈음에 일어나는 것이니 비록 어진 임금이라도 또한 재변은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재변으로 인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두려워하며 반성하고 수양해 나간다면 재변은 도리어 상서가 될 것입니다. 대체로 천심(天心)은 인자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경계하고 반성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만약 그에 대한 보응을 참되게 하지 않으면 나라는 이로 인해 어지러워지고 또 멸망하게 될 것이니 이런 사례는 사책(史冊)에서 역력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부터 나라를 세운 지가 오래되면 법제가 점차 폐단이 생기고 인심이 해이해지는 법인데 그때는 반드시 현명한 군주가 나와서 폐지되고 추락된 것들을 일으켜 세워 그 정사의 기강부터 개혁한 연후에 국세가 다시 진작되고 국운이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지고 넘어져서 바로잡아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그 상황을 알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조정이 나라를 세운 지가 거의 2백년이 되었으니 이는 중엽의 쇠퇴기라고 할 수 있으며 권간들이 나라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게 했던 재앙도 많이 있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마치 노인이 원기가 쇠진하여 다시 일어날 수 없는데 이른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성상께서 나오셨으니 이는 장차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워지느냐 하는 계기인 것입니다. 만약 이때에 분연히 진작한다면 동방이 억만년토록 끝이 없이 번창할 좋은 운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장차 쓰러지고 쇠진하여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난날 권간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날에도 오히려 지탱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안으로는 전하깨서 실덕(失德)하심이 없고 밖으로는 유신(儒臣)들이 포열해 있으니 예로부터 오늘과 같은 때는 드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천변이 이 지경으로 일어나고 있으니 신은 전하의 정치에 미진한 바가 있는가 두렵습니다.

대체로 임금으로서 큰 왕업을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그 뜻을 원대하게 세우고 세속 논의에 구애없이 삼대(三代)967)의 치업을 기약하되 반드시 실학(實學)에 힘써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여 그 자신의 한 몸으로써 한 세상의 표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를 정사에 시행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도선(徒善)일 뿐입니다. 이미 이와 같이 하고 또 반드시 현능한 인재를 두루 찾아 백관(百官)에 배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자 그 직책을 다하게 하고 또 그들의 말을 듣고 잘 따라 준 다음에야 전적으로 맡아 하게 되어 공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은 반드시 한 시대의 폐단을 안 다음에야 한 시대의 치평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니 이는 마치 의원이 반드시 병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만 증세에 맞는 약을 쓸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대소의 신료들이 다 그들의 일신만 돌아보고 유유범범(悠悠泛泛) 세월만 보낼 뿐 한 사람도 봉공(奉公)에 뜻을 두는 자가 없으니 상께서 비록 홀로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신다해도 서민은 그 은택을 입지 못하며, 세도(世道)가 낮아지기를 흐르는 물처럼 갈수록 내려가서, 사류가 혹 주상을 믿고 자기 할 말을 다하는 자가 있기도 하나 그 사이에는 또 공평한 마음이 없어 서로를 의심하고 저지하는 자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폐단은 참으로 낱낱이 들어 열거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그 병의 근원은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에게 위임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반드시 한 시대의 인재를 잘 헤아려서 그 중에서 유능한 자를 골라 위임하고 그로 하여금 정성을 다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정치를 잘하지 못하면서 한갓 재변이 없기만을 바란다면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재변을 만나면 반드시 정신을 가다듬어 상례를 따라야 한다는 관념에 구애받지 마시고 공을 세워 조종(祖宗)을 빛내고 업을 이루어 후손에게 전할 것을 생각하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폐정(弊政)을 개혁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경연관이 아뢴 것들은 애초에 심사 숙고하여 건백한 것이 아니고 우연히 진달한 것이어서 비록 간혹 채택하여 시행하더라도 끝내 실효가 없기 때문에 상께서도 더욱 함께 큰일을 할만한 자가 없음을 아셨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그렇습니다. 신에게 망령된 계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대신과 상의하여 한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고 사류 가운데 시무(時務)를 잘 알고 국사에 마음을 둔 자를 택하여 선임케 하고 모든 건백한 사항은 다 그 관사에 내려서 상의 확정하여 폐정을 개혁하게 한다면 천심을 거의 돌이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설사 공자와 맹자가 곁에 있다하더라도 재능을 발휘할 데가 없다면 무슨 보익됨이 있겠습니까? 경제사를 설치한다는 것은 우선 듣기에는 생소한 것 같습니다마는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국사를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어 점차로 비하(卑下)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제사를 설치하면 나중에 반드시 큰일이 생길 것이다. 우리나라는 모든 공사(公事)를 육부(六部)가 나누어 관장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대사간 구봉령이 나아가 유생들이 글을 읽지 않고 부질없는 말만을 숭상하는 폐단을 아뢰니, 이이가 아뢰기를,

“유생들의 폐단은 마땅히 유생을 책망할 것이지 위에 진달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성상께서 이미 이 폐단을 아셨으니 교화시킬 방법을 생각하시고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위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교화를 밝히려고 한다면 반드시 선현을 존중하여 후학이 존경하고 본받을 데가 있게 해야 하는데도 상께서는 항상 중난(重難)하다고만 하십니다. 최근은 현인들을 비록 다 사전(祀典)에 넣을 수는 없더라도 조광조(趙光祖)는 도학을 솔선해 밝혔고 이황(李滉)은 이굴(理窟)968)을 깊이 연구하였으니 이 두 사람만은 진실로 종사(從祀)케 하여 뭇 선비의 선을 추향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해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할 수 없다.”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 아뢰고 나니, 상이 박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여러 신하가 아뢴 말 중에서 어떤 일이 시행할 만한가?”하니,

순이 차례로 분석하여 아뢰기를,

“경제사 설치 문제는 사유를 갖추어 아뢰지 않았기 때문에 상께서 시행하기 어렵다고 여기시는데 마땅히 이이를 다시 불러 물으셔야 합니다.”하였다.

이이가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창졸간에 그에 대한 말을 자세하게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 뜻을 다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갖가지로 폐단이 쌓여 군왕의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으니 반드시 시무(時務)에 마음을 둔 사람을 얻어 한 곳에 모여 서로 대책을 강구해서 시폐를 개혁하게 해야 합니다. 폐단만 다 개혁되면 또한 도로 관서를 혁파할 수도 있으며 관서를 설치하여 오래도록 보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오활하다고 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맡긴단 말인가? 지난날 정공도감(正供都監)도 폐단이 있었는데 이것도 폐단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하였다.

박순이 아뢰기를,

“각사의 관원을 각기 그 관사가 공궤하게 하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하고, 이이가 아뢰기를,

“정명도(程明道)969)가 도현당(導賢堂)을 설치하자고 청하였으니, 옛사람도 이와 같이 논의가 있었습니다.”하였다.

말이 붕당의 일에 미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 조정이 불화하다고 말하는 자가 많이 있다. 조정이 불화하면 어찌 천재를 부르지 않겠는가?”하고,

박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는 대신의 책임이다. 신하가 감히 붕당을 만든다면 비록 멀리 귀양을 보낸다 하더라도 괜찮다. 누가 감히 붕당을 만든단 말인가?”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선비는 동류끼리 상종함을 면치 못하는 것인데 가끔 식견의 차이로 의심하고 저지함을 면치 못하는 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사적으로 서로 붕당을 만든 일이야 있겠습니까. 급작스레 벌을 줄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註967]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註968]이굴(理窟): 도리(道理) 註969]정명도(程明道): 명도는 정호(程顥)의 호(號).

○丙午/上以天災, 延訪公卿。 入侍者, 領相朴淳、兵曹判書柳㙉、刑曹判書姜暹、漢城府判尹任說、左參贊沈守慶、右參贊李文馨、工曹判書黃琳、禮曹判書李陽元、吏曹判書鄭芝衍、戶曹判書李珥、都承旨李友直、大司憲具鳳齡、副提學柳成龍。 群臣坐定, 上顧左右曰: “天災非常, 將何以應之? 左右以次各陳所懷。” 珥之言曰: “天道玄遠, 誠難窺測。 第以古史觀之, 治亂之形已定, 則別無災異。 災異必作於將治將亂之際, 雖賢君, 亦不免災。 若因災惕念, 恐懼修省, 則災反爲祥。 蓋天心仁愛, 欲使人君, 儆省興治也。 若應之不以其實, 則國因而亂且亡焉, 史冊班班可見矣。 自古立國旣久, 則法制漸弊, 人心解弛, 必有賢主作焉, 修擧廢隳, 改紀其政, 然後國勢復振, 其命維新矣。 不然, 則因循頹墮, 以至於不可匡救, 其狀不難見矣。 我朝立國幾二百年, 此是中衰之日, 而多有權奸濁亂之禍。 至於今日, 如老人元氣垂盡, 不可復振, 而幸有聖上出焉, 此是將治將亂之幾也。 若於此時奮興振作, 則爲東方億萬年無疆之休, 不然, 則將至於潰敗澌盡, 而莫之救矣。 臣念, 往時權奸用事之日, 尙能支持, 今則內而殿下無失德, 外而儒臣布列, 自古罕有如今日者也, 而天變之作, 乃至於此, 臣恐殿下於爲治, 有所未盡也。 夫人君將大有爲者, 必立心遠大, 不拘於俗論, 以三代爲期, 而必務實學, 躬行心得, 以一身爲一世表準可也。 然若不施諸政事, 則是亦徒善也。 旣能如是, 而又必旁求賢才, 列于庶位, 使之各盡其職, 而聽從其言, 然後任專而功就矣。 且人君必知一世之弊, 然後可興一代之治, 如醫者必知病根之所在, 然後可用對證之藥矣。 今者大小臣僚, 皆自私其身, 悠悠泛泛, 無一留念於奉公者。 自上雖獨憂勤, 小民不被其澤, 世道之卑, 如水益下, 士類或有仰恃聖明, 能盡其言者, 而其間亦有無平坦之心, 自相疑阻者矣。 今日之弊, 誠難枚擧, 大槪病根在於不能委任賢才之故也。 必也, 商量一時人才, 擇賢委任, 使之盡誠可也。 今不能做實治, 而徒望無災, 得乎? 殿下遇災, 必須振拔志慮, 不拘循常之念, 思所以功光祖宗, 業垂後裔, 則幸甚矣。 至於革弊一事, 凡經筵官所啓, 初非熟計深思, 而建白也。 偶然陳達, 雖或採施, 終無實效, 故自上益知無人可與有爲者, 此固然矣。 臣有妄計, 請令大臣商議, 設一經濟司, 使大臣領之, 而擇士類曉達時務, 留心國事者, 與其選, 凡有建白之言, 皆下其司, 商議定奪, 以革弊政, 則天心庶可回矣。 今設使孔孟在於左右, 若無所施設, 則何益之有? 經濟司之設, 於聞見似若生踈, 但不如是, 則國事無可爲, 而漸至於卑下矣。” 上曰: “經濟司之設, 後必生大事矣。 我國凡公事, 六部分掌, 意有在矣。” 大司憲具鳳齡進啓: “儒生不讀書, 崇尙空言之弊。” 珥曰: “儒生之弊, 當責於儒生, 非可上達之事也。 但自上旣知此弊, 須思敎化之術, 擇其可爲師表之人, 而委任之可也。 今欲明敎化, 則必須尊奬先賢, 使後學有所矜式, 而自上每以爲重難焉。 近日賢者, 雖不可悉入祀典, 如趙光祖倡明道學, 李滉沈潛理窟, 此二人誠可從祀, 以起多士向善之心。” 上曰: “此事不可爲也。” 群臣啓訖, 上顧朴淳曰: “群臣啓辭, 何事可行耶?” 淳以次辨白曰: “經濟司事, 事具由以啓, 故自上以爲難行, 當更招李珥而問之。” 珥進啓曰: “小臣倉卒, 不能詳盡其說, 故辭不達意。 今者積弊多端, 王澤不流, 必得留心時務者, 會于一處, 相與講究, 以革時弊可也。 弊苟盡革, 亦可還罷, 非欲設局久存也。” 上曰: “於予意則以爲迂闊。 且未知, 委之何等人耶? 前日正供都監, 亦有弊。 此亦安保其無弊耶?” 淳曰: “各司之官, 各使其司供饋, 則無弊矣。” 珥曰: “程明道請設導賢堂, 古人亦有如此之議矣。” 言及朋比事, 上曰: “近日多有言朝廷不和者, 朝廷不和, 則豈不召天災乎?” 顧朴淳曰: “此則大臣之責也。 人臣敢爲朋比, 則雖流放竄殛可也。 誰某敢爲朋結耶?” 珥曰: “士子不免以類相從, 而或以識見之異, 未免疑阻者則有之。 奚至於私相朋比乎? 不可遽加威怒也。”

선조 16권, 15년(1582 임오/명만력(萬曆) 10년) 11월 26일(경진) 1번째기사

간원이 음죽현감 안전, 고령첨사 민사준의 파직을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음죽현감(陰竹縣監) 안전(安)은 하리에게 사무를 위임하고 있으며 양근군수(楊根郡守) 강성(姜晟)은 부역을 고르게 하지 않았으니 파직시키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령첨사(高嶺僉使) 민사준(閔士俊)은 성품이 본래 교만한데다가 만호에서 6품에 오른 지 5년이 채 안되어 갑자기 당상에 올랐으므로 물정이 해괴하게 여기고 있으니 개정하소서. 병조는 감히 계청(啓請)하고 의망하였으니 공도를 멸시하고 은혜를 판 죄가 큽니다. 민사준은 개정하고 병조의 당상과 색낭청은 파직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

“개정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파직하는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庚辰/司諫院啓曰: “陰竹縣監安琠, 委諸下吏; (根楊)〔楊根〕郡守姜晟, 賦役不均, 請罷。” 依啓。 “高嶺僉使閔士俊, 性本驕傲, 自萬戶陞六品, 未五年而遽陞堂上, 物情駭怪, 請改正; 兵曹敢爲啓請擬望, 蔑公市恩之罪, 大矣。 請閔士俊改正, 堂上、色郞廳罷職。” 答曰: “改正事依啓, 罷職事不允。”

선수 17권, 16년(1583 계미/명만력(萬曆) 11년) 3월 1일(계미) 1번째기사

비변사 당상들에게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고, 부제학 유성룡이 해직하고 귀향하다

상이 비변사 당상들에게 각각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다.

영상 박순(朴淳)은 ‘성혼(成渾)은 재주와 덕행이 모두 넉넉하고, 정개청(鄭介淸)은 재주와 학식이 밝고 통달했으며, 김여물(金汝)·최경회(崔慶會)·서익(徐益)은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다.’고 추천했으며, 좌상 김귀영(金貴榮)은 유장(儒將) 김수(金)와 무장 양대수(楊大樹)를 추천했으며,【양대수는 교활하고 재능이 없었다】 정지연(鄭之衍)은 ‘성혼(成渾)은 재주와 학식이 탁월하고 유조인(柳祖)은 충효의 대절(大節)이 있으며【유조인은 행실이 독실한 선비였으나 학문이 불순했다】 성윤해(成允諧)는 은거하면서 덕을 쌓았다.’고 추천하였다.

이품(二品) 재신(宰臣) 정유길(鄭惟吉)은 윤선각(尹先覺)과【김수와 윤선각은 모두 당시에 청렴하고 고귀하다는 인망이 있었으나 재능이 없었으므로 끝내 곤기(寄)240)에 실패했다】무장 서득운(徐得運)을 추천했으며, 정종영(鄭宗榮)은 포의(布衣) 이충가(李忠可)를【용렬하고 비루한 사람이었는데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추천했다.

이이(李珥)는 ‘성혼은 경륜(經綸)을 맡을 만하고, 성윤해(成允諧)는 일민(逸民)으로서 재능과 학덕이 있는 자이고, 정구(鄭逑)는 영특한 재주가 있다.’고 추천했으며, 유전(柳)·심수경(沈守慶)은 유극량(柳克良)을【개성부의 빈한하고 미천한 사람으로 무과에 급제했다. 청렴결백하고 정직하였으며 보장(堡將)으로 있을 때부터 명성이 드러나 벼슬이 수사(水使)에 이르렀다】추천했다.

강섬(姜暹)은 박종남(朴宗男)과 유극량(劉克良)을 추천했으며, 이준민(李俊民)은 성윤해(成允諧)·서익(徐益)·김여물을【문무(文武)의 재능이 있으며 기개가 뛰어났으나 호탕하여 행동을 가다듬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현직(顯職)에 등용되지 못하였다】추천했다.

곽흘(郭屹)은 유극량(劉克良)·이요(李)·이즙(李)·김응상(金應祥)을 추천했으며,【모두 무인으로 명성이 없었는데, 유극량만 유명하였다】박호원(朴好元)은 유극량·민사준(閔思俊)·박지지(朴止知)를 추천했다.【모두 무인이다】

홍연(洪淵)은 김외천(金畏天)을【무인으로서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다】추천했으며, 김명원(金命元)은 윤구수(尹龜壽)·이지시(李之詩)를【무인이다】추천했다.

유홍(兪泓)·이전(李)은 성혼을 추천했으며, 최원(崔遠)은 유극량을 추천했다.【이때에 시대가 태평하고 무사했으므로 문무(文武)의 신하들이 드러나게 공로를 세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추천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 후에 명성과 걸맞지 않았는데, 오직 박순이 추천한 다섯 사람만은 명망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부제학 유성룡(柳成龍)이 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성룡은 사론(士論)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조정에 있는 것이 내키지 아니하여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구실로 물러갔다.

註240]곤기(寄) : 장수의 임무.

○朔癸未/上令備邊司堂上, 各薦人材。 領相朴淳薦: 成渾才德俱優; 鄭介淸才識明達; 金汝岉、崔慶會、徐益, 文武才能。 左相金貴榮薦: 儒將金睟、武將楊大樹。【大樹狡猾, 無才能。】 鄭芝衍薦: 成渾才學卓異; 柳祖訒忠孝大節;【祖訒篤行之士, 所學不純。】 成允諧隱居蓄德。 二品宰臣鄭惟吉薦: 尹先覺、【金睟、尹先覺, 皆時望淸貴, 而無材能, 故卒敗於閫寄。】武將徐得運。 鄭宗榮薦: 布衣李忠可。【庸鄙之人, 官至郡守。】 李珥薦: 成渾可任經綸; 成允諧逸民之有才德者; 鄭逑有英才。 柳㙉、沈守慶: 薦劉克良。【開城府寒賤人, 登武科, 淸白貞良, 自堡將著名, 官至水使。】 姜暹薦: 朴宗男、劉克良。 李俊民薦: 成允諧、徐益、金汝岉。【有文武才, 氣槪卓然, 以豪宕不撿, 不得顯用。】 郭屹薦: 劉克良、李鎐、李濈、金應祥。【皆武人無稱, 克良有名】 朴好元薦: 劉克良、閔思俊、朴知止。【皆武人。】 洪淵薦: 金畏天。【武人無稱。】 金命元薦: 尹龜壽、李之詩。【武人。】 兪泓、李戩薦: 成渾。 崔遠薦: 劉克良。【時, 時平無事, 文武之臣, 無事功可顯。 所薦之人, 後多不稱, 惟朴淳所薦五人, 聞望不衰。】 副提學柳成龍, 解職還鄕。 成龍見士論携貳, 不樂在朝, 辭以母老退歸。

선조 17권, 16년(1583 계미/명만력(萬曆) 11년) 3월 4일(병술) 3번째기사

남방의 방어사를 서계하라는 전교에 따라 비변사에서 올린 회계

전교하기를,

“현재 이름있는 장신(將臣)이 부족한데 만약 남쪽에 사변이라도 있게되면 원수(元帥)는 누구를 시키며 방어사(防禦使)는 누구를 시켜야할 것인지 서계(書啓)하라.”하니,

비변사(備邊司)가 회계(回啓)하기를,

“경상감사(慶尙監司) 유훈(柳塤)과 전라감사(全羅監司) 김명원(金命元)이 무재(武才)가 있는데다 변방 사정을 잘 알고있으니 만약에 사변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순찰사(巡察使)를 겸직시키면 매우 편리할 것이며, 방어사에 있어서는 호남(湖南)인 경우 장흥부사(長興府使) 임진(林晉)·순천부사(順天府使) 신익(申翌)이 적임자이고, 서울인 경우 원수 적임자로는 이이(李珥)·강섬(姜暹)·이양원(李陽元)·이준민(李俊民)·유홍(兪泓)·구봉령(具鳳齡)·홍연(洪淵)등이 있고, 방어사 적임자로는 곽흘(郭屹)·이진(李戩)·이윤덕(李潤德)·최원(崔遠)·신각(申恪) 등이 있습니다.”하였다.

○傳曰: “方今將臣知名者乏小, 萬一南?有事變, 誰爲元帥, 誰爲防禦使乎? 書啓。” 備邊司回啓曰: “慶尙監司柳塤, 全羅監司金命元有武才, 知邊事, 若有事變, 因兼巡察使甚便, 防禦使, 湖南則長興府使林晋, 順天府使申翌可合, 在京元帥可當人, 李珥、姜暹、李陽元、李俊民、兪泓、具鳳齡、洪淵, 防禦使可當, 郭屹、李戩、李潤德、崔遠、申恪。”

선조 17권, 16년(1583 계미/명만력(萬曆) 11년) 4월 19일 경오 1번째기사

강섬이 상사소불원에 해당되는 자를 뺀 죄인은 북도에 곡식을 바치면 사면하자고 상소하다

강섬(姜暹)의 상소에 의하여, 상사소불원(常赦所不原)1028)인 자를 제외한 기타의 유(流) 이하의 죄인에 대하여는 곡식을 북도(北道)에 바치는 것으로 속죄(贖罪)하게 하였다.

註1028]상사소불원(常赦所不原): 일반사면(一般赦免)에서 제외되는 죄.《대명률(大明律)》명례율(名例律)에 의하면, 십악(十惡), 살인(殺人), 관물절취(官物竊取), 강도(强盜), 방화(放火), 발총(發塚), 수장(受贓), 사위(詐僞), 범간(犯姦), 약인(略人), 약매(略賣)등으로 대개 고의(故意)로 범한 죄들임.

○庚午/因姜暹上疏, 犯罪人除常赦所不原者外, 流以下, 納粟北道, 使之贖罪。

선조 17권, 16년(1583 계미/명만력(萬曆) 11년) 4월 21일(임신) 1번째기사

형조가 임신부를 형문하다가 낙태하여 죽자 색낭청등을 파직하다

형조(刑曹)가 임신부를 형문(刑問)하다가 낙태(落胎)가 되어 죽게 하자 색낭청(色郞廳) 김건(金鍵)·참의 권수(權燧)를 파직하고, 참판 윤탁연(尹卓然)·판서 강섬(姜暹)을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壬申/刑曹刑問孕婦, 使之落胎而死, 命罷色郞廳金鍵, 參議權燧, 遞參判尹卓然, 判書姜暹等。

선조 23권, 22년(1589 기축/명만력(萬曆) 17년) 1월 21일(기사) 1번째기사

비변사에서 무인을 불차 채용한다고 하자 각 신료들이 올린 명단

비변사에게 무신(武臣)을 불차 채용(不次採用)한다고 하자, 이산해는 손인갑(孫仁甲)·성천지(成天祉)·이순신(李舜臣)·이명하(李明河)·이빈(李)·신할(申)·조경(趙儆)을, 심수경(沈守慶)은 이경(李景)·신할·이용준(李用濬)·박진(朴晉)을, 유홍(兪泓)은 이혼(李渾)·왕경조(王景祚)·이용준(李用濬)·변응성(邊應星)·유몽경(柳夢經)·유연(兪淵)을, 정언신(鄭彦信)은 손인갑(孫仁甲)·성천지·이순신·이명하(李明河)·이시언(李時言)·한인제(韓仁濟)·이언함(李彦)·정담(鄭湛)·김당(金)을, 윤탁연(尹卓然)은 유희선(柳希先)·이종장(李宗張)·윤안성(尹安性)을, 강섬(姜暹)은 유염(柳濂)·정눌(鄭訥)·문몽헌(文夢軒)·김경로(金敬老)·정발(鄭撥)·정득렬(鄭得說)을, 변협(邊協)은 조경·신할·이복남(李福男)을, 이진(李)은 신할·김순(金徇)·변응성을, 최원(崔遠)은 이경(李景)·전협(田浹)을, 신립(申砬)은 최미수(崔眉壽)·변응성·변응정(邊應井)·이지시(李之詩)·정현룡(鄭見龍)·이범(李範)을 추천하였다.

○己巳/備邊司武臣不次可用, 李山海薦孫仁甲、成天祉、李舜臣、李明河、李薲、申硈、趙儆, 沈守慶薦李景、申硈、李用濬、朴晋, 兪泓薦李渾、王景祚、李用濬、邊應星、柳夢經、兪淵, 鄭彦信薦孫仁甲、成天祉、李舜臣、李明河、李時言、韓仁濟、李彦諴、鄭湛、金鐺, 尹卓然薦柳希先、李宗張、尹安性, 姜暹薦柳濂、鄭訥、文夢軒、金敬老、鄭撥、鄭得說, 邊協薦趙儆、申硈、李福男, 李戩薦申硈、金徇、邊應星, 崔遠薦李景、田浹, 申砬薦崔眉壽、邊應星、邊應井、李之詩、鄭見龍ㆍ李範。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명만력(萬曆) 21년) 5월 4일(정사) 2번째기사

영의정 최흥원등과 선릉과 정릉의 처리, 왜적의 토벌등을 논의하다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봉심(奉審)한 뒤에 대신들을 인견하여 의논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청민당(聽民堂)에 나아가 여러 재신들을 들어오도록 명하니 영의정 최흥원, 좌의정 윤두수, 부원군(府院君) 정철(鄭澈), 판돈녕(判敦寧) 정곤수(鄭壽), 지돈녕(知敦寧) 정창연(鄭昌衍), 아천군(鵝川君) 이증(李增), 병조판서(兵曹判書) 이항복(李恒福),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응남(金應南), 이조참판(吏曹參判) 구사맹(具思孟), 호조참판(戶曹參判) 윤자신(尹自新),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충원(李忠元), 병조참판(兵曹參判) 심충겸(沈忠謙), 형조참판(刑曹參判) 이희득(李希得), 공조참판(工曹參判) 박응복(朴應福), 창산군(昌山君) 성수익(成壽益), 오산군(烏山君) 이현(李玹), 형조참의(刑曹參議) 신점(申點), 예조참의(禮曹參議) 이관(李瓘), 병조참의(兵曹參議) 황진(黃璡),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이시언(李時彦),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허성(許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신흠(申欽)등이 들어왔다. 최흥원이 나아가 아뢰기를,

“선릉의 광중(壙中)에는 재만 남아있으므로 재를 종이에 싸서 다른 곳에 봉안(奉安)하였고 왕후의 능에도 재만 있었습니다. 정릉의 안팎 재궁(梓宮)이 모두 불타버렸고 역시 재가 세 곳에 있었는데, 한 곳은 분명히 밥을 해먹은 흔적이었고 한 곳은 옷을 태운 흔적같은 것이 있을 뿐 광중에 이것 외에 다른 물건은 없었습니다. 김천일(金千鎰)이 덕양령(德陽令)을 시켜 봉심하게 하니 옥체가 광중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리(事理)로 미루어 보건대, 적들이 발굴할 때에 반드시 안팎 재궁이 불타기 전에 별도로 옥체를 다른 곳에 옮겨 놓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후라야 재궁은 비록 불탔어도 옥체는 보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막중한 일이니, 반드시 조신(朝臣)들과 널리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소서. 구신(舊臣) 중에는 강섬(姜暹)·목첨(陸詹)·심수경(沈守慶)만이 살아있는데 당시에 강섬은 한림(翰林)이었고 목첨과 심수경은 출사(出仕)하기 전이었다고 합니다. 혹시 늙은 궁인(宮人)이 있으면 물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없이 중하고 어려운 일이므로 무한한 후회가 있을까 걱정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궁인이나 늙은 환자(宦者)들도 어디 살아남아있는 자가 있겠는가?”하니,

최흥원이 아뢰기를,

“광중의 재도 함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중신(重臣)을 보내어 다시 봉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신이 광중을 살펴본 뒤에 더욱 조처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았습니다.”하였다.

상이 울면서 이르기를,

“대신들이 처리하라. 마땅히 중신과 삼사(三司)의 장관을 보내어 그 일을 중하게 할 것이며 경성에 있는 접반사(接伴使)1739)도 참여하여 이 일을 의논하게 해야 할 것이요, 총호산릉제조(總護山陵提調)가 독자적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 강릉(康陵)·태릉(泰陵)·헌릉(獻陵)도 장마 전에 개수(改修)하도록 하라.”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최흥원의 말을 들어보니, 정릉의 흉변도 선릉과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참판 심충겸의 집에 봉성군(鳳城君)1740)댁에 있던 늙은 여종이 있으나 한 천인의 말에 의거하여 결정하기도 또한 어렵습니다. 오직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람은 덕양부인(德陽夫人) 뿐이라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얼굴을 가리우고 울면서 이르기를,

“함께 의논하여 시행하라.”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정릉의 일은 대신들이 봉심한 후에 조처하도록 하겠습니다. 선릉의 경우에 있어서는 재[灰]를 가지고 개장하는 것은 변례(變禮)입니다. 《오례의》에도 근거할 데가 없고 난리통에 예경(禮經)도 산실되었기 때문에 사당에 고유(告由)할 때에도 휘호(徽號)를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당의 체모를 갖추지 못했는데 어떻게 고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고유하지 않으면 안된다.’하여 의논이 나뉘어져 끝내 고증하기 어렵습니다.”하고,

최흥원은 아뢰기를,

“다른 것은 굳이 말할 것이 없습니다. 정릉의 일이 매우 중하니 반드시 자세히 살펴 조처해야 합니다.”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선릉을 개장할 때에 어떤 사람은 ‘관곽(棺槨)을 반드시 작게 하여야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작게 해서는 안된다.’라고도 하고 ‘수도(隧道)도 예전대로 해야 한다.’고 하니, 조정이 반드시 모두 모여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 나머지 소소한 절문(節文)은 초상 때와는 달라 대유(大儒)들이 의논하더라도 어렵게 여길 것이니, 소신(小臣)만이 조처할 바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온 조정이 모두 근심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바입니다.”하고,

정철은 아뢰기를,

“원릉(園陵)의 변고가 이 지경에 이르러 전하의 마음이 망극한데 예문(禮文)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을 감히 아뢸 수가 없었습니다. 서적(書籍)이 이미 흩어져버렸고 조정의 신하들 중에도 예를 아는 자가 없으니 마땅히 경성의 서적들을 거두어서 의논하되 관곽과 의복 등의 일은 널리 조정의 의논을 수렴하여 좋은 점을 따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일시적인 의견을 따르게 되면 후회가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헌릉·강릉도 왜구의 화를 입었으니, 일시에 개수하지는 못하더라도 경성에 있는 한두 명의 대신들을 시켜 봉심케 하고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소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조와 대신들은 함께 의논하여 속히 봉심하도록 하라.”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지금 경략이 마음을 가다듬어 적을 추격하려 하고있다. 경략이 설령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진실로 진격해서 섬멸해야 할 터인데, 더구나 경략의 뜻이 이미 이와 같으니 어찌 합심하여 적을 추격, 섬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망극한 일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경성을 통과한 뒤에 보고가 일체 오지 않고 있으니, 조신(朝臣)들은 각자 한 가지씩 계책을 내도록 하라.”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경략은 진실로 진심을 다해 합니다.”하고,

이항복은 아뢰기를,

“신은 생각건대, 우리의 처지로서는 적을 추적하여 섬멸할 수없을 뿐만 아니라 경략에게 견책을 당할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이빈의 군사는 모두 도망가버려 1∼2천명밖에 되지 않고 권율의 군대도 지쳐있어 고향에 돌아갈 것만 생각하고 있는데다가 제독이 적의 뒤를 추격하는 것을 일체 허락하지 않으므로 노약자를 제외하고서는 이미 흩어져 갔다고 합니다. 이빈의 군대가 강을 건너기는 하였으나 5백명에 불과하고 고언백의 군대도 겨우 2백명뿐입니다. 권율도 호남(湖南)으로 돌아갔으니 어찌 쉽게 거두어 모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아직 우리 경내(境內)에 남아 있는데 진영을 해산하듯이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힘을 합해 추격하더라도 오히려 성공하지 못할까 염려스럽다.”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만약 협공하려 한다면 진형(陣形)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이 운이 좋아 자연 이렇게 된 것이다.”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최경회(崔慶會)·고종후(高從厚)등은 정예병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데 장차 적을 추격할지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적을 섬멸하지 못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하니,

정창연이 아뢰기를,

“경략의 용병(用兵)과 계책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의 행동이 경망스럽다고 하여 말해주지 않는다할지라도 어찌 적과 대진하고 있는 제독에까지 알리지 않겠습니까? 다만 경략이 이렇게 말했으니 진실로 마음을 다하여 따라야 할 것입니다.”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경성의 군사가 1만여명이 넘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즈음 살펴보니 2∼3천명에 불과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양에서도 제진(諸陣)이 모두 무너져 흩어졌는데 지금 또다시 이와 같단 말인가? 적이 만약 영남에 웅거하여 새재[鳥嶺]를 막아 지키고 호남지방을 노략질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니,

심충겸이 아뢰기를,

“적이 이미 물러갔다고 하여 마음이 해이해진다면 조정에서도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복(起復)한 무사로서 수령이 된 자들을 모두 노약한 문음(門蔭)으로 바꾸었는데, 적이 계속 남아있고 떠나가지 않는다면 다시 무사로 임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신점은 아뢰기를,

“경성을 수복한 뒤에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졌고 경기·충청도등의 감사(監司)들이 일체 장계를 올리지 않습니다. 만일 이러한 폐습을 고치지 않는다면 적이 물러갔다 하더라도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하고,

이증은 아뢰기를,

“제독이 일을 처리함에 어찌 경략의 뜻을 모르겠습니까? 왜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중국은 즉시 약속을 어기고 있습니다. 지금 적이 멀리 퇴각했으니 어찌 놓아주고 토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서(徐)·사(謝)·심(沈)이【서일관(徐一貫)·사용재(謝用梓)·심유경(沈惟敬)】 모두 적에게 포박되어 있다하니 우리나라에서 대의를 들어 동쪽으로 전진한다면 제독인들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혹시 함께 협력하여 진격해서 적을 섬멸할 수 있을 듯합니다.”하였다.

註1739]접반사(接伴使): 유성룡을 말함.註1740]봉성군(鳳城君): 중종(中宗)의 아들로 이름은 이완(李). 경기관찰사 김명윤(金明胤)이 반역을 꾸민다고 무고하여 평창(平昌)으로 귀양갔다가 1547년에 사사(賜死)되었음.

○領議政崔興源, 宣、靖陵奉審後, 請引見議處。 上御聽民堂, 命引入諸宰臣: 領議政崔興源、左議政尹斗壽、府院君鄭澈、判敦寧鄭崑壽、知敦寧鄭昌衍、鵝川君李增、兵曹判書李恒福、禮曹判書金應南、吏曹參判具思孟、戶曹參判尹自新、禮曹參判李忠元、兵曹參判沈忠謙、刑曹參判李希得、工曹參判朴應福、昌山君成壽益、烏山君玹、刑曹參議申點、禮曹參議李瓘、兵曹參議黃璡、司諫院司諫李時彦、弘文館應敎許筬、司憲府持平申欽。 崔興源進曰: “宣陵壙中, 只有灰燼, 裹之以紙, 奉安于他處, 王后陵, 亦有灰燼。 靖陵內外榟宮燒盡, 亦有灰燼三處, 而一處則明是炊飯之形, 一處則似有燒衣之痕, 壙中更無他物。 而金千鎰使德陽令奉審, 則玉體在壙中云。 以事理推之, 當賊掘發之際, 必須於內外榟宮未燒之前, 別爲奉安玉體於他處, 然後榟宮雖焚, 玉體可存。 莫重之事, 必須與朝臣, 廣議處之。 舊臣唯有姜暹、睦詹、沈守慶, 其時姜暹爲翰林, 睦詹、沈守慶未及出身云。 或有老宮人, 則可以審得。 莫重且難, 恐有無窮之悔。” 上曰: “不知何以處之? 宮人、老宦, 亦安有存者?” 興源曰: “壙中之灰, 亦不可容易處之。 遣重臣, 更爲奉審爲當。 臣見壙中後, 尤知其難處矣。” 上泣曰: “大臣處之。 宜遣重臣及三司長官, 以重其事, 在京接伴使, 亦令參議此事, 不可以摠護山陵提調, 獨自爲之。 康陵、泰陵、獻陵, 亦當於霾雨前修改。” 尹斗壽曰: “聞崔興源之言, 靖陵兇戀, 似無異於宣陵。 參判沈忠謙家, 有鳳城君家老婢子, 一賤人之言, 亦難決定。 可以詳知者, 唯有德陽夫人云。” 上掩泣曰: “僉議爲之。” 金應南曰: “靖陵事, 大臣奉審後, 當處之。 至於宣陵, 以灰燼改葬, 則此是變禮。 《五禮儀》, 亦無所據, 亂離之餘, 《禮經》散失, 告廟時, 亦不知徽號。 或云: ‘不成廟貌, 何可告之?’ 或云: ‘不可不告。’ 議論分岐, 終難考證。” 興源曰: “他不須言。 靖陵事至重, 必須詳審處之。” 應南曰: “宣陵改葬時, 或云棺槨須小云, 或云不可小, 隧道亦當用舊云, 朝廷必須會議, 乃可。 其他小小節文, 異於初喪, 雖使大儒講之, 亦以爲難。 非但小臣不知所以處之, 擧朝亦以爲悶鬱焉。” 鄭澈曰: “園陵之變至此, 聖心罔極, 禮文難斷之事, 不敢上稟。 大槪書籍已散, 朝紳中亦無知禮者, 當令收拾京城書籍而議之, 如棺槨衣服等事, 廣收廷議, 從其長而用之。 若從一時意見, 則恐有後悔。 獻陵、康陵亦被其禍, 雖不能一時修改, 亦可令在京一二大臣, 奉審而議處之。” 上曰: “禮曹、大臣, 同議速爲奉審。” 上仍曰: “經略銳意追賊。 經略雖不如此, 我國固當進勦, 況經略旣如此, 其不可同心追勦乎? 遭此罔極之事, 必報此讎而後已。 我國解弛, 過京城後, 邊報一不來到矣, 朝臣各出一策。” 斗壽曰: “經略固無餘蘊矣。” 李恒偪曰: “臣意, 非但不能追勦, 不無被譴於經略矣。 李薲之軍盡爲亡去, 只有一二千, 權慄之兵, 亦師老思歸, 且提督一切不許追賊之後, 除出老弱, 已爲散去云。 李薲渡江, 軍不過五百, 高彦伯軍亦僅二百。 權慄且還湖南, 豈可容易收聚乎?” 上曰: “賊在我境, 似若破陣然, 何也? 合力追之, 猶慮其不成。” 恒福曰: “若欲夾擊, 則不可成形。” 上曰: “倭賊有福, 自然至此。” 斗壽曰: “崔景會、高從厚等, 多率精兵, 未知其將追之乎?” 上曰: “此時不能勦賊, 則安有如此事乎?” 鄭昌衍曰: “經略用兵權謀, 不可知。 雖以我國爲輕躁而不言, 安可使臨陣之提督, 亦不知之耶? 第經略如此言之, 固當盡心從之。” 恒福曰: “京城之兵, 意以爲不下萬餘, 而近日觀之, 則不過二三千。” 上曰: “平壤之事, 諸陣皆爲潰去, 今又如是耶? 賊若雄據嶺南, 防塞鳥嶺, 寇抄湖南, 何以爲之?” 沈忠謙曰: “謂賊已退, 而解弛其心者, 朝廷亦不免焉。 起復武士之爲守令者, 盡換以老病門蔭, 賊若留連不去, 則其可不復以武士爲之乎?” 申點曰: “京城收復後, 人心解弛, 京畿、忠淸等道監司, 一不伏啓。 若不變此習, 賊雖退, 國可爲乎?” 李增曰: “提督擧措, 豈不知經略之意乎? 此賊不可不討, 而天朝旋卽背約。 今則賊已遠去, 豈可縱而不討乎? 聞徐、謝、沈【徐一貫, 謝用榟、沈惟敬。】皆爲賊縳致云, 我國擧義東向, 則提督獨不愧於心乎? 或可與協力, 而進勦矣。”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명만력(萬曆) 21년) 5월 4일 정사 5번째기사

예조가 송산의 빈전을 봉심할 때 강섬과 목첨을 부르기를 청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송산의 빈전을 봉심할 때에 강섬과 목첨을 모두 하서하여 불러오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禮曹啓曰: “松山殯殿奉審, 則姜暹、睦詹幷下書召來。” 上從之。

광해 11권, 즉위년(1608 무신/명만력(萬曆)36년) 12월 8일(신유) 1번째기사

예조가 대신을 보내 사은까지 겸하는 일에 대한 대신들의 논의를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신을 보내 사은(謝恩)까지 겸해서 할 것인가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해 보았습니다.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이항복, 행판중추 윤승훈(尹承勳),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은 모두 말하기를, ‘한결같이 전례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고, 우의정 심희수는 말하기를, ‘듣건대, 명묘조에서는 임백령(林百齡)을 상사(上使)로 삼고 이윤경(李潤慶)을 부사(副使)로 삼아 사은사까지 겸해서 거행하였고, 선조 초년에는 정응두(丁應斗)를 임시 우의정으로 제수하여 상사로 삼고 강섬(姜暹)을 부사로 삼아 사은까지 겸해서 거행했다하니, 전례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고, 〈영의정 이원익은 병이 있어서 수의(收議)하지 못했습니다.〉대신들의 뜻이 이같음을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나랏일이 어렵고 근심스러우니, 이 시기에 삼공을 중국에 보낼 수 없다. 1품을 상사로 뽑은 다음 그에게 임시 관작을 제수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다. 〈이 뜻을 이조에 말하라.〉”하였다.

○戊申十二月初八日辛酉禮曹啓曰: “以遣大臣兼行謝恩事, 議于大臣, 則鵝城府院君李山海、左議政李恒福、行判中樞尹承勳、淸平府院君韓應寅皆以爲: ‘一依前例爲當。’ 右議政沈喜壽以爲: ‘竊聞明廟朝, 林百齡爲上使, 李潤慶爲副使, 兼行謝恩, 而先宣宗初年, 丁應斗右議政結銜爲上使, 姜暹爲副使, 兼行謝恩, 依前例施行爲當。’ (領議政李元翼病不收議。) 大臣之意如此, 敢啓。” 傳曰: “知道。國事艱虞,此時三公不可赴京。以一品差上使結銜可也。(此意言于吏曹。)”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청순치(順治) 2년) 5월 18일(기해) 1번째기사

이조가 당상 종실을 수묘관으로 삼은 일을 대신과 의논할 것을 청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초상 때에 몹시 황급하여 떠도는 말만을 믿고 당상 종실을 수묘관으로 삼았었는데, 지금 들으니 조종조에서는 모두 훈신과 문신으로 삼았다합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뒤늦게 고치는 것은 매우 편리하지 못한 일이니, 대신에게 의논해야 합니다.”하였다.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의당 실록을 상고해 오기를 기다려서 의논하여 처리해야 합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그 후에 실록을 상고해 보니, 하원군(河原君) 정수충(鄭守忠)을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수묘관으로 삼았고 행첨지(僉知) 강섬(姜暹)을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수묘관으로 삼았는데, 모두 2품 재신이었다. 그래서 대신이 마침내 여기에 의거해서 고치기를 청하였는데, 다시 의논할 때에 끝내 고치지 않고 그대로 종실로 삼았다.

○己亥/吏曹啓曰: “初喪倉卒, 只憑流傳之說, 以堂上宗室, 差出守墓官矣。 今聞, 祖宗朝皆以勳臣、文臣爲之, 而到今追改, 事甚難便, 宜議于大臣。” 大臣以爲: “宜待《實錄》考出議處。” 上從之。 其後, 考見《實錄》, 河原君鄭守忠爲懿敬世子守墓官, 行僉知姜暹爲順懷世子守墓官, 皆二品宰臣也。 大臣遂據此請改, 及更議, 竟不改, 仍以宗室爲之。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