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28권, 6년(1730 경술/청옹정(雍正) 8년) 12월 17일(신해) 2번째기사
북경의 재변으로 인한 우리 북방 지역의 대비책을 강구할 것에 대한 이종성의 상소
소대(召對)를 행하여《고려사(高麗史)》를 강(講)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홍다구(洪茶丘)가 김방경(金方慶)을 국문한 것은 가히 참독(慘毒)하다하겠습니다. 남형(濫刑)과 혹벌(酷罰)아래 무복(誣服)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천지의 대덕(大德)은 생(生)이라 하니, 임금이 꼭 죽게된 처지에서 사람을 살리려하는 것은 바로 천도(天道)를 본받는 까닭입니다.
신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온 뒤에도 화형(火刑)의 도구가 아직 전정(殿庭)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군주가 정치(政治)를 하는 곳에서 아직도 남형의 도구가 놓여져 있으니,
견식이 있는 사람의 가만히 탄식하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물건이 아직도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였다.
유신(儒臣)이 먼 지방에 나갔던 것도 이제야 비로소 들었다”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북경의 재변은 참으로 놀랄 만합니다. 옹정(雍正)5587)이 망국지주(亡國之主)가 되고 청(淸)나라 운수가 갑자기 끝나는 지경에 이르지않을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전고(前古)의 사첩(史牒)으로 보더라도 재변이 있는 이후로 북경의 재앙과 같은 것은 있지 않았습니다. 이번의 재변의 우리나라 북도(北道)의 재앙이기도 합니다. 천리(天理)는 환하게 밝으므로 실로 감추기 어려운 것입니다. 정강(靖康)5588)의 수재(水災)때에 이강(李綱)5589)은 눈물을 흘리며 장소(章疏)로써 진달하였고, 임진병란(壬辰兵亂)이 일어나기 전에 조헌(趙憲)도 상소(上疏)하여 할말을 다했는데, 그때 사람들이 모두 요언(妖言)이라 했으나 필경엔 이강·조헌의 말은 부절(符節)을 맞추듯이 꼭 들어맞았습니다.
군주는 이러한 말을 듣기 싫어하기에 옛날에도‘관동(關東)의 도적은 능히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란 말이 있었습니다.5590)
현재 북경의 재이(災異)는 현저히 복망(覆亡)의 징조가 있고, 저들이 비록 복망에 이르지않는다하더라도 만약 북경을 잃는다면 반드시 본토(本土)로 돌아올 것인데, 심양(瀋陽)은 우리 평안도와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따라서 평안도 전체가 앞으로 버린 땅이 될지도 모르니, 이는 첫째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또 영고탑(寧古塔)의 장군이 배반하지않을 것도 기필할 수가 없으니, 영고탑의 장군이 만약 배반한다면 북경으로 나갈 수도 없고 영고탑으로 물러설 수도 없으니, 그럴 경우 그 형세가 반드시 우리 육진(六鎭)으로 오게 될 터이니, 이것이 둘째 걱정입니다.
만일 육진에 의거하여 오래 머무를 계획을 세운다면, 우리나라 형세는 앞으로 장차 어찌되겠습니까? 이것이 세째 걱정입니다.
한가하고 무사할 때에 마땅히 승산(勝算)을 마련할 도리를 강구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랫만에 만나서 권권(眷眷)한 진달을 듣게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이 된다. 청(淸)나라 국운이 비록 갑자기 끝나지않는다 하더라도 국내는 반드시 불안케 될 것이니, 저들이 불안하면 우리만 어찌 홀로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진달한 세가지 일은 사실 내가 미처 생각치못한 일이다”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지금의 나라 형편은 가히 아침에 저녁일을 예측할 수 없는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반드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조처하는 거조가 있는 후에라야 모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날마다 소대(召對)하여 분전(墳典)5591)속에 출입하고 경사(經史)를 토론하더라도 앞으로 연미(燃眉)5592)의 위급에 부응치 못할 것입니다.
이강(李綱)의 주의(奏議)중에 인재를 동남(東南)5593)에서 구하라는 말이 있었고, 주자(朱子)의 봉사(封事)중에는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말이 있는데, 꼭 오늘의 귀감(龜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성으로 군주를 섬기는 마음을 깊이 가상하게 여겨 감탄한다.
진덕수(眞德秀)5594)가 말하기를,‘조강(朝講)이 야대(夜對)만 못하다’하였으니, 내일은 마땅히 야대를 명할 것이다. 조용히 강론하라”하였다.
註5587]옹정(雍正):청세종(世宗)의 연호.註5588]정강(靖康):송흠종(宋欽宗)의 연호 註5589]이강(李綱):남송(南宋) 고종(高宗)때의 재상(宰相). 내치(內治)를 정돈하고 군정(軍政)을 정비하여 중원 회복을 도모하였음 註5590]관동(關東)의 도적은 능히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란 말이 있었습니다:진(秦)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때 각처에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간신 조고(趙高)가 황제를 속여 “관동(關東)의 도적은 능히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데서 나온 말. 관동은 진(秦)나라의 서울인 함양(咸陽)의 입구 함곡관(函谷關) 동쪽의 땅.註5591]분전(墳典):삼분(三墳)과 오전(五典). 삼분은 태고시대(太古時代)의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에 관한 서적이고, 오전은 소호(少昊)·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순(舜)의 일을 기록한 책이라 전함.註5592]연미(燃眉):눈썹이 탐. 아주 절박한 경우를 말함.註5593]동남(東南):강동(江東)·강남(江南).註5594]진덕수(眞德秀):남송(南宋) 영종(寧宗)때 문신(文臣).
○行召對, 講《麗史》。 侍讀官李宗城曰: “洪茶丘之鞫金方慶, 可謂慘毒。 淫刑、酷罰之下, 其不誣服者, 能幾人, 天地大德曰生, 人君求生於必死之地者, 乃所以體天道也。 臣自北還後, 見火刑之具, 尙在殿庭。 人君出治之所, 尙置淫刑之具, 有識之竊歎, 容有極哉,” 上曰: “此物之尙在, 予未知之。 儒臣遠出, 今始得聞。” 宗城曰: “北京災變, 實爲驚心。 孰能知雍正, 非亡國之主, 而淸運不至遽訖耶, 以前古史牒見之, 自有變異以來, 未有如北京。 今番之變, 我國北路之災也。 天理昭昭, 實難掩晦。 靖康水災之時, 李綱涕泣陳章, 壬辰兵火之前, 趙憲陳疏竭論, 其時人皆以爲妖言, 而畢竟李綱、趙憲之言, 如合符節。 人主惡聞如此之言, 故古亦有關東盜無能爲之說矣。 目今北京災異, 有顯然覆亡之兆, 而彼雖不底於亡, 若失北京, 必歸本土, 瀋陽距我平安道不遠。 平安一道, 將作棄地, 此一可慮也。 且寧古塔將軍之不叛, 亦未可必, 寧古塔將軍若叛, 則進不得北京, 退不得寧古塔, 其勢必將來我六鎭, 此二可慮也。 若據六鎭, 爲久留之計, 則我國形勢, 其將何如, 此三可慮也。 居閑處寂之時, 宜有講確制勝之道矣。” 上曰: “久違之餘, 得聞眷眷陳達, 令人不覺感動。 淸運雖不遽訖, 邦內必不安, 彼不安, 則我豈獨晏然乎, 所達三件事, 實予之所未慮及也。” 宗城曰: “卽今國勢, 可謂朝不謀夕。 必有先事制置之擧, 然後可以爲之。 不然則雖日日召對, 出入墳典, 討論經史, 將無以副燃眉之急矣。 李綱奏議中, 取才東南之說, 朱子封事中, 誠意正心之言, 正爲今日之可監矣。” 上曰: “至誠事君之心, 心甚嘉歎。 眞德秀曰: ‘朝講不如夜對。’ 明日當賜夜對, 從容講論。”
영조 31권, 8년(1732 임자/청옹정(雍正) 10년) 6월 9일(갑자) 5번째기사
예조에서 재신을 파견해 북교에서 기우하자고 하니 선농단에 친제를 명하다
예조에서 병인일(丙寅日)에 재신(宰臣)을 파견하여 북교(北郊)에서 기우(祈雨)하도록 청하니, 선농단(先農壇)에 친제(親祭)하도록 명하였다.
○禮曹請以丙寅遣宰臣, 祈雨於北郊, 命親祭先農壇。
영조 31권, 8년(1732 임자/청옹정(雍正) 10년) 6월 9일(갑자) 10번째기사
남교·북교·선농단의 기우때는 말을 탄 전례가 있다는 예조의 말에 따르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성상께서 보련(步輦)으로 나아가시면 배종(陪從)하는 백관(百官)은 당연히 걸어서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남교(南郊)·북교(北郊)및 선농단(先農壇)에 기우(祈雨)하였을 때에는 일찍이 말을 타도록 허락한 전례가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전례대로 말을 타도록 명하였다.
○禮曹啓言: “上御步輦, 則陪從百官當步從。 而南、北郊及先農壇祈雨時, 曾有許令乘馬之例矣。” 上命依例乘馬。
영조 31권, 8년(1732 임자/청옹정(雍正) 10년) 6월 10일(을축) 1번째기사
비를 빌기 위해 임금이 선농단에 거둥하다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였는데, 비가 내리도록 빌기 위해서이다.
○乙丑/上幸先農壇, 爲禱雨也。
영조 31권, 8년(1732 임자/청옹정(雍正) 10년) 6월 17일(임신) 1번째기사
북교의 어재소에 나가 홀기(笏記)에 대해 예조참의 신치운과 논하다
임금이 북교(北郊)의 어재소(御齋所)에 나아가 예조참의 신치운(申致雲)을 불러 전교하기를,
“태묘(太廟)·사단(社壇)·경휘전(敬徽殿)의 의식절차가 각기 다른데, 이것은 모두 수복(守僕)이 잘못된 것을 답습해서이다.
홀기(笏記)가운데 빼버려야할 부분은 점(點)찍어 고치는 것이 타당하다”하자, 신치운이 아뢰기를,
“북교(北郊)에서의 친제(親祭)는 본래《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된 바가 아니기 때문에 이번에 보태고 보충하여 홀기(笏記)를 만들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단(南壇)에는 효종(孝宗 때 처음으로 친제(親祭)를 행하였고, 선농단(先農壇)에는 숙종(肅宗)때 처음으로 친제를 행하였으므로, 북교(北郊)에는 내가 을사년6381)에 이러한 전례를 모방하여 친제하였다”하였다.
註6381]을사년: 1725 영조 원년.
○壬申/上幸北郊御齋所, 召禮曹參議申致雲敎曰: “太廟、 社壇、 敬徽殿, 儀節各異, 此皆守僕之襲謬。 笏記中可刪者, 當點下釐正。” 致雲曰: “北郊親祭, 本非《五禮儀》所載, 故今番添補而成笏記矣。” 上曰: “南壇則孝廟始行親祭, 先農壇則肅廟始行親祭, 北郊則予於乙巳, 倣此親祭矣。”
영조 38권, 10년(1734 갑인/청옹정(雍正) 12년) 8월 7일(경술) 3번째기사
장차 선농단에 친히 기도하려 하다
임금이 또 장차 선농단(先農壇)에 친히 기도하려 하는데, 여러 신하들이 힘써 섭행(攝行)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않았다.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취로(金取魯)가 눈물을 흘리며 간쟁하니, 임금이 드디어 마지못해 따르고 단지 친히 향축(香祝)만 전할 것을 명하였다.
○上又將親禱于先農壇, 諸臣力請攝行, 上終不聽。 工曹判書金取魯涕泣爭之, 上遂勉從, 只命親傳香祝。
영조 38권, 10년(1734 갑인/청옹정(雍正)12년) 8월 8일(신해) 1번째기사
대신을 보내서 선농단에 기우제를 지내고,
친히 선정전에 나아가 향축을 전하다
대신(大臣)을 보내서 선농단(先農壇)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는데,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친히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이날 임금이 그대로 성복(盛服)을 갖추고서 궁전의 뜰에 앉아 향을 피우고 한데서 밤새워 기도하였는데, 다음날 하늘이 비를 내렸다.
○辛亥/遣大臣祈雨于先農壇, 上臨宣政殿, 親傳香祝。 是日, 上仍具盛服, 坐殿庭, 焚香露禱徹夜, 翌日天乃雨。
영조 38권, 10년(1734 갑인/청옹정(雍正) 12년) 8월 10일(계축) 1번째기사
선농단의 헌관 우의정 김흥경 등에게 상을 주다
선농단(先農壇)의 헌관(獻官)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에게 구마(廐馬)를 하사하고, 여러 집사(執事)에게도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癸丑/賜先農壇獻官右議政金興慶廐馬, 諸執事亦各賞賜有差。
영조 39권, 10년(1734 갑인/청옹정(雍正)12년) 12월 10일(신해) 5번째기사
바른말을 구할 것과 조세 감제와 포흠 탕감 등에 대한 부사과 이제의 상소
부사과(副司果) 이제(李濟)가 재변(災變)으로 인하여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하의 모든 일이 실상에 힘씀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실상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패망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실상에 힘쓰지 않고서 그 치적(治績)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정성이 순일(純一)하지못하면 실지로 하늘을 공경함이 아니요, 백성을 애휼한다고 하면서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못하면 실지로 백성을 애휼함이 아닙니다.
숨겨진 간악(奸惡)을 적발하면서 총명하다고 한다면 실지로 총명한 것이 아니요, 고식적인 은혜를 베풀면서 인자(仁慈)하다고 한다면 실지로 인자한 것이 아니며, 어진이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능히 맡기지못한다면 실지로 어진이를 좋아함이 아니요, 바른말을 구한다고 하면서 채용(採用)하지않는다면 실지로 바른 말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이보다 앞서는 재변을 만나면 일찍이 바른 말을 구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근년에 이르러서는 간혹 잊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지난 가을 군병을 사열(査閱)함에 있어서 때아닌 천둥과 우박은 놀랍고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는데, 바른말을 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올리고 춘당대(春塘臺)에서 유생을 시험보였으니, 이는 문득 태평시대에 하는 성대한 일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하늘을 대하는 정성이 조금이라도 간단(間斷)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안일(安逸)한 행사를 하셨겠습니까? 이로써 말한다면,
하늘을 공경함에 있어 그 실상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불쌍한 백성을 애휼한다 하지마는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한갓 생각만 간절할 뿐이요, 오막살이집 아래에는 실지의 혜택이 미치지못하고 있습니다.
흉년에 조세(租稅)를 감제(減除)한 것은 간교한 아전들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오랜 포흠을 탕감한 것은 토호(土豪)들이 요행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신해년7778)과 임자년7779)에 거듭 흉년이 드니 전하께서 내탕금(內帑金)을 기울여 도와주었으나, 일을 맡은 자들이 삼가지 아니하여 건량(乾糧)에 입록(入錄)된 자의 태반이 유령 호구(幽靈戶口)이며 간활(奸猾)한 아전의 주머니에 거의 한정이 없이 들어갔으니, 구제된 자의 수효는 사망한 자의 비교가 되지 않는데도, 마침내 논상(論賞)함에 있어서는 품계(品階)가 올라 금옥관자(金玉貫子)가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이로써 말하건대,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에 있어 그 실상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장(疏章)의 합잡한 말을 범연히 보아 넘기지않았고 여염(閭閻)의 은밀한 일도 모두 통촉하시며, 금번 우녀(禹女)의 옥사(獄事)에 있어서도 12조(條)의 문목(問目)은 모두 형관(刑官)들의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니, 이는 전하의 명철(明哲)함이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큰 근본과 큰 체통이 안위존망(安危存亡)의 기미(機微)에 관련되는 것은 일체 방치(放置)해 버리고 깨닫지 못하시는 듯하니, 명철의 실상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가난한 백성이 죽어서 매장(埋葬)하지못한 자에게는 관(官)에서 쌀과 베를 주게 하고, 나이 70이 넘은 노인에게는 해마다 어육(魚肉)을 하사했으니, 이는 전하의 인자함입니다.
그러나 불쌍한 백성들이 정공(正供) 이외의 횡렴(橫斂)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전하께서 듣지못하고 알지못한다면, 인자의 실상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어진이를 좋아하는 것이 귀중한 것은 그 도(道)를 행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찬성(贊成) 신(臣) 정제두(鄭齊斗)는 전하의 예우(禮遇)를 받은 지 이미 10년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일어나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전하께서 좋아하면서도 맡기지 않는 때문이니, 어진이를 좋아하는 실상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두 대신(大臣)의 물러감을 허락함에 이르러서는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미 물러감을 허락하려 했다면 어찌 도성(都城)에 들어오라고 재촉할 필요가 있으며, 이미 도성에 들어오게 했다면 또 어찌 갑자기 물러감을 허락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신의 진퇴(進退)는 나라의 안위(安危)에 관계가 되는데, 처분이 황홀하여 거의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니, 가만히 전하를 위하여 애석히 여깁니다.
전하께서 매양 응지(應旨)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하기를,
‘내가 가상히 여긴다’고 하며 혹은‘어찌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나, 그 말을 실지로 채용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해사(該司)로 하여금 품처하라는 명은 있었으나 막연히 물이 마른 우물에 돌을 던지듯 하였으니, 바른 말을 구하는 실상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대각(臺閣)의 말에 이르러서는 조금만 뜻을 거스리면 가벼운 자는 꺾어버리고 무거운 자는 귀양을 보내니,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심하여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는 것이 풍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설령 실덕(失德)과 허물이 있으며, 조신(朝臣)이 설령 간교(奸巧)하고 패악(悖惡)한 자가 있더라도 어디로부터 들을 길이 있겠습니까?
옛날 우(禹)임금이 순(舜)임금에게 경계하기를,‘단주(丹朱)7780)와 같이 오만하지 마소서’하였는데, 순임금이 허탄(虛坦)한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급암(汲黯)은 한무제(漢武帝)를 면대(面對)하여 욕심이 많다고 지척(指斥)했으니 한무제가 사직을 맡길만한 신하라고 허여(許與)하였습니다.
가령 이 두 신하가 오늘날에 살아있어 전하를 만나 기탄없이 바른말을 한다면 전하께서 능히 받아들이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마도 전하께서 그렇지못할 것입니다.
죄수의 국문(鞫問)을 정지하라는 장계에 대해서는 해를 넘겨 서로 버티고 있으니, 형옥(刑獄)이 생긴 이래로 7년이 지나도록 살리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 죄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대신(大臣) 및 재신(宰臣)에게 널리 하문하여 빨리 판결을 내리는 것이 실로 왕정(王政)의 큰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실상에 힘쓰는 도리를 다하지 못했으므로 조정의 위에 백가지가 헛되고 한 가지도 실상이 없으니, 신은 청컨대 대략을 진달하겠습니다.
옛날에 관직을 명함에 있어 후직(后稷)7781)에게는 농사(農事)를 맡겼고 공공(共工)7782)에게는 공사(工事)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서는 요행히 한 번 급제(及第)한 자는 비록 뛰어난 재능이 없더라도 진실로 내세울 문벌(門閥)만 있다면 한 사람이 백 가지 관직을 역임할 수 있으니, 이는 인재를 등용하는 규모가 이미 옛 법을 잃은 것입니다.
전관(銓官)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의 인재를 들어 쓰는 권병(權柄)을 맡았는데, 그 마음이 공정하지못하면 쓰고 버림이 편벽되며, 그 지감(知鑑)이 밝지 못하면 현명한 사람과 우매한 자를 혼잡합니다.
한미(寒微)한 자는 권문세가(權門勢家)에게 굽히고 소원(疏遠)한 자는 친근(親近)한 자에게 빼앗기며 평온하고 조용한 자는 분경(奔競)하는 자에게 가리워지니, 정석(政席)이 열리기 전에 물색(物色)이 먼저 정해지고, 제수(除授)된 문첩(文牒)이 나오기 전에 성명(姓名)이 이미 전파되니, 신은 알지 못하지마는 전후에 전관(銓官)을 맡은 자가 과연 모두 적임자이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보건대, 전하께서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기능(技能)을 먼저 하고 간국(幹局)을 뒤로 돌리며 경민(警敏)함을 귀중히 여기고 박실(朴實)함을 천하게 여기며, 온유(溫柔)한 자를 기뻐하고 강직한 자를 싫어하니,
전후의 전관을 맡은자가 어찌 모두 산도(山濤)7783)와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옛날에는 서북 사람에게도 또한 청환(淸宦)의 자리를 주어 재신의 반열에 오른 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삼남(三南)이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하지마는 과제(科第)로 인하여 나오는 자는 벼슬이 한낱 찰방(察訪)과 현령(縣令)에 지나지 않으며, 음직(蔭職)으로서 벼슬하는 자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 온 나라 사람이 누군들 왕신(王臣)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안팎으로 나누어 내지(內地)사람을 등용하고 외방사람은 버리는데, 또 내지사람들 가운데서 당색(黨色)을 구분하여 당색이 같은 자는 채용하고 다른 자는 버리니,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키고 물정(物情)을 평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힘써 그치지않는 것은 탕평(蕩平)의 정사인데, 이른바 탕평은 그 도(道)가 지극히 호대(浩大)합니다.
군주가 먼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법칙을 위에서 세워 조정을 바로잡고 백관(百官)들을 바로잡는 근본을 삼지않고 한갖 구구(區區)한 정령(政令)의 말단(末端)으로서 천촉(川蜀)7784)의 분열된 당인(黨人)들을 몰아 옛날 팔원팔개(八元八愷)7785)의 화협(和協)한 풍습으로 돌리려 한다면, 아래에 있는 자들은 반드시 방편에 따라 윗사람의 총명을 가리우는 의논을 하여 음(陰)도 아니고 양(陽)도 아니며, 백색(白色)도 아니고 흑색(黑色)도 아니어서 바르지 못하게 몸을 굽혀 수종(隨從)하여 그 사욕(私慾)만을 몰래 차리려 할 것이니, 이것이 과연 참된 탕평이겠습니까?
신의 소견으로는 다만 사대부(士大夫)의 심술(心術)만 허물어뜨리고 세도(世道)의 해독만 될뿐입니다. 무신년7786) 이후에 인심이 크게 변하여 역적 보기를 거리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으르는 듯이 하며, 국옥(鞫獄) 보기를 송사(訟事)하는 마당에서 심문(審問)하는 것처럼 여겨 저쪽에서 이쪽을 공격할 적엔 반드시‘역적에 가담하였다’하고, 이쪽에서 저쪽을 공격할 적엔 또한‘역적을 두둔했다’고 하여, 마치 아들의 훔친 것이 금(金)인지 쇠[鐵]인지 정론(定論)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검은 까마귀와 흰 갈매기가 거의 그 본색(本色)을 잃을 지경입니다.
이리하여 선악(善惡)이 혼동되고 시비(是非)가 문란하여 아교(阿膠)와 칠(漆)을 한 그릇에 담은 것과 같으니, 아! 이것이 어떠한 세계(世界)입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탕평의 이름만 구하지말고 그 실상에 힘쓰게 하소서.
수령으로서 장죄(贓罪)를 범한 자가 한번 사핵(査覈)을 겪으면 무죄 백방(無罪白放)이 되지않는 자가 없습니다.
무릇 대각(臺閣)과 어사(御史)의 염찰(廉察)이 혹시 실지와 어긋나는 일도 있겠지마는, 10인이 사핵을 거쳐 10인이 모두 무죄백방이 된다면 어찌 매우 해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진짜 탐관(貪官)은 백성의 재물을 수탈(收奪)하여 위로 권귀(權貴)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손을 살찌우는데도 사핵에서 무죄가 되어 관직이 여전하며, 세력이 없는 잔약한 이서(吏胥)들은 장부(帳簿)에 조금만 실수가 있어도 도리어 장죄로 논하여 영구히 서용되지않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곤수(閫帥)와 수령이 아부하고 결탁하는 자는 죄를 장죄와 똑같이 논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절선(節扇)과 세찬(歲饌) 이외에 무시(無時)로 궤유(饋遺)를 받는 자는 대각으로 하여금 듣는 대로 논핵하여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형벌을 매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것은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인데, 양정(良丁)은 원래 많지않음이 아니라 피역(避役)하는 곳이 많으므로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감영(監營)·병영(兵營)의 아병(牙兵)과 수첩(守堞)등의 군관(軍官)이 그 첫째요, 영장(營將) 및 수령에 속한 액수(額數)외의 군관이 그 둘째이며,
향교(鄕校)의 교생(校生)과 서원(書院)의 모입(募入)이 그 셋째요,
각읍향청(各色鄕廳)의 관속(官屬) 차비(差備)가 그 넷째이며, 대왕(大王) 및 공신(功臣)의 자손에 모속(冒屬)함이 그 다섯째요, 유학(幼學) 및 업유(業儒)7787)를 모칭(冒稱)함이 그 여섯째이며, 사천(私賤)이라고 가칭(假稱)하여 양반(兩班)에게 투속(投屬)함이 그 일곱째요, 군적에서 누락되어 한가로이 노는 것이 그 여덟째이며, 비국(備局)의 여정(餘丁)에 이르러서도 그 수효가 또한 수백명뿐이 아니니 양정을 얻기 어려움이 대개 이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묘당(廟堂)에서 그 군안(軍案)을 거두어 들여 모두 혁파할 수 없는 것은 그 액수를 정하고 그 수효 이외에는 모두 수령에게 맡겨 도망치고 물고(物故)된 대신에 보충할 것이요, 그 모속과 모칭과 누적(漏籍)된 무리는 수령으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 낸다면 양정을 쓰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수령을 신중히 선택하고 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 고을을 염찰(廉察)하게 하여 만일 인족침징(隣族侵徵)7788)하는 자가 있으면 나타나는 즉시 계문(啓聞)하여 파직시키고 원정(元定)의 폄목(貶目)을 삼는다면, 수령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한 마음이 진실하면 만가지 일이 모두 참되고 한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만가지 일이 모두 거짓이 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조정(調整)하고 변통하는 것은 다만 전하의 한 마음의 진실한 데에 달려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리고 품처할 것을 비국(備局)에 내리라고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제(李濟)의 말한 것은 시폐(時弊)에 적중(適中)함이 많았으나, 그가 나이 늙고 자취가 소원(疏遠)한 때문에 임금이 그다지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고,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한 것도 또한 채용한 실상이 없었다.
註7778]신해년:1731 영조7년 註7779]임자년:1732 영조8년 註7780]단주(丹朱):요(堯)임금의 아들.註7781]후직(后稷):순(舜)임금의 신하.註7782]공공(共工):순(舜)임금의 신하 註7783]산도(山濤):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 진무제(晉武帝)때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어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그 사람의 재간(才幹)과 국량(局量)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였음.註7784]천촉(川蜀):송(宋)나라 철종(哲宗)무렵에 심한 정쟁(政爭)이 있었던 세 당파 가운데 천당(川黨:蜀黨이라고도 함)을 가리킴. 세 당파는 소식(蘇軾)·여도(呂陶)등의 천당, 정이(程頤)·주광정(朱光庭)등의 낙당, 유지(劉贄)·유안세(劉安世)등의 삭당(朔黨)인데,
천촉(川蜀)은 천당을 촉당(蜀黨)이라고 부른데서 인용된 것임 註7785]팔원팔개(八元八愷: 여덟 사람의 선량한 사람과 여덟 사람의 화합(和合)한 사람. 팔원은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 백분(伯奮)·중감(仲堪)·숙헌(叔獻)·계중(季仲)·중웅(仲熊)·숙표(叔豹)·계리(季貍)이며, 팔개는 고양씨(高陽氏)의 재자 창서(蒼舒)·퇴고(隤鼓)·대림(大臨)·방강(尨降)·정견(庭堅)·중용(仲容)·숙달(叔達)임.註7786]무신년:1728 영조4년 註7787]업유(業儒):유학을 닦는 서자(庶子). 손자나 증손(曾孫)대에 와서야 유학(幼學)이라 불림. 숙종22년(1696)에 정했음 註7788]인족침징(隣族侵徵):지방 고을의 이속(吏屬)들이 공금(公金)이나 관곡(官穀)을 포흠(逋欠)해 내었거나 군정(軍政)이 도망·사망하여 군포세(軍布稅)가 축났을 때, 이를 대충하기 위하여 강제로 그 이웃·일족(一族)에게 추징(追徵)하는 일.
○副司果李濟因災異上疏, 略曰:
天下萬事, 罔不以務實而成, 不務實而敗。 況人君爲國, 不務其實, 而能成其治乎, 敬天而誠不純一, 非實敬天也; 恤民而澤不下究, 非實恤民也。 發隱伏之奸以爲明, 非實明也; 行喣濡之惠以爲仁, 非實仁也。 好賢而不能任, 非實好賢也; 求言而不能用, 非實求言也。 殿下前此遇災, 未嘗不求言, 及至近年, 間或闕焉。 至於前秋閱武也, 非時雷雹, 可驚可愕, 而不惟不求言, 文廟酌獻, 春臺試士, 便是太平盛事。 若殿下對越之誠, 無少間斷, 則豈爲此豫泰之擧哉, 以此言之, 敬天可謂盡其實乎, 殿下勤恤民隱, 而廈氈之上, 睿念徒勤; 蔀屋之下, 實惠未究。 荒歲蠲減, 貪猾之所陰利也; 舊逋蕩滌, 豪右之所竊幸也。 辛壬荐饑, 殿下傾內帑而周之, 任事者不謹, 乾糧入錄, 太半虛戶, 而猾胥之櫜, 幾於尾閭, 全活之數, 不直死亡, 而末稍論賞, 金玉爛然。 以此言之, 恤民之政, 可謂盡其實乎, 章疏挾雜之言, 未嘗泛觀, 閭里隱微之情, 亦皆旁照, 而今番禹女之獄, 十二條淸問, 皆刑官之所未思得者, 此殿下之明, 而若乃大本大體, 關係安危存亡之幾者, 則一任弛置, 若不省悟, 可謂實明乎, 貧民之死不入土者, 官給米布; 老人之年踰七十者, 歲賜魚肉, 此殿下之仁, 而若乃孑遺之氓, 困於橫斂者, 殿下若不聞不知, 可謂實仁乎, 所貴乎好賢者, 爲其道可行也。 贊成臣鄭齊斗受殿下禮遇, 已過十年, 而尙未見幡然而起, 是殿下好之而不能任之也, 可謂實好賢乎, 至於兩大臣許退, 莫曉其故。 旣欲許退, 則何必迫令入城, 旣令入城, 則又何以遽許其退, 大臣進退, 關係安危, 而處之怳惚, 殆同戲劇, 竊爲殿下惜之也。 殿下每答應旨之疏, 或曰: “予用嘉尙。” 或曰: “可不留意,” 然而未聞有實用其言者, 該司稟處之命, 漠然若眢井之投石, 可謂實求言乎, 至於臺閣之言, 少有觸拂, 輕者摧抑, 重者竄逐。 是以, 人皆以言爲戒, 含默成風。 殿下設有失德過行, 朝臣設有巨奸宿慝, 何由而聞之耶, 昔禹戒舜曰: “毋若丹朱傲。” 而舜安而受之; 汲黯面斥武帝之多慾, 而武帝許之以社稷之臣。 藉令數臣遇殿下而正言不諱, 則殿下能容受乎, 臣愚死罪, 恐殿下不能也。 鞫囚還收之啓, 閱歲相持, 有刑獄以來, 安有過七年, 不生不死之囚耶, 臣謂博詢于大臣、宰執, 斯速收殺, 實是王政之大者也。 嗚呼! 殿下務實之道旣未盡, 故朝廷之上, 有百虛而無一實, 臣請略陳之。 古之命官也, 后稷知農, 共工知工, 而及至挽近, 僥倖一第者, 雖無卓異之才, 苟有席藉之地, 則以一人而歷百職, 此其用人之規, 已失古法, 而至於銓官, 掌一國用人之柄, 其心不公, 則用舍偏, 其識不明, 則賢愚混。 孤寒者詘於貴勢, 踈遠者奪於親舊, 恬靜者蔽於奔競, 故政席未開, 物色先定, 除書未出, 姓名已播, 臣未知前後秉銓者, 果皆得其人乎, 臣竊觀, 殿下取人, 先技能而後器識, 貴警敏而賤朴實, 喜軟熟而厭鯁直, 則前後秉銓者, 豈皆山濤其人耶, 在昔, 西北人亦有通顯仕, 躋宰列者, 而今則雖三南人物之府庫, 其由科目進者, 官不過一郵一縣, 而至於蔭塗入仕, 絶無有焉。 噫! 一國之人孰非王臣, 而分以內外, 用其內而舍其外, 又於內之中, 分以黨目, 用其同而捨其異, 其何以服人心而平物情乎, 殿下勉勉不已者, 蕩平之政也。 所謂蕩平, 其道至大。 人君不先建極於上, 以爲正朝廷, 正百官之本, 而徒以區區政令之末, 敺川蜀分裂之黨, 而悉令爲元凱之寅協, 則在下者, 必爲方便周遮之論, 不陰不陽, 不白不黑, 回互委曲, 陰濟其私, 是果眞蕩平者耶, 以臣見之, 只壞却士夫心術, 而爲世道害耳。 戊申以後, 人心大變, 視逆賊如街市行刼之兒, 視鞫獄如訟庭推閱之坐, 彼攻此必曰黨逆, 此攻彼亦曰護逆。 子賊金鐵, 殆無定論, 烏玄鷺白, 幾失本色, 以致善惡混幷, 是非貿亂, 有同膠漆之盆, 噫嘻! 此何世界也, 願殿下, 無求蕩平之名, 而務其實焉。 守令犯贓者, 一經査覈, 無不白脫。 夫臺閣、繡衣之廉察, 容有爽誤, 而十人經査, 十人皆脫, 則豈非可駭之甚乎, 眞箇巨貪, 頭會箕斂, 上以奉權貴, 下以業子孫, 則査覈輒脫, 歷職如故。 無勢小吏, 差失於簿書者, 則反以贓論, 永不收敍, 豈不冤哉, 閫帥、守令, 善事結托者, 罪與贓等。 臣謂節箑歲儀之外, 無時受餽者, 使臺閣隨聞論劾, 竝與受扺罪宜矣。 良役變通, 實爲當今急務, 而良丁未非不多, 避役之所多, 故難得也。 監、兵營牙兵守堞等軍官一也, 營將守令額外軍官二也, 鄕校校生書院募入三也, 各邑鄕廳官屬差備四也, 大王、功臣子孫冒屬五也, 幼學、業儒冒稱六也, 假稱私賤, 投屬兩班七也, 漏籍閑遊八也。 至於備局餘丁, 其數亦不啻累百, 良丁之難得, 蓋以此也。 臣意則自廟堂收聚其軍案, 其不可盡罷者, 定其額數, 數外則悉付守令, 以充逃故之代, 其冒屬冒稱漏籍之類, 使守令一一査出, 則良丁不可勝用矣。 伏願愼擇守令, 而又使道臣, 廉察各邑, 如有隣族侵徵者, 隨輒啓罷, 以作元定貶目, 則守令莫不盡心矣。 古語曰: “一念苟實, 萬事皆眞, 一念不實, 萬事皆假。” 然則斡旋轉移, 惟在殿下一念之實耳。
上賜例批, 可以稟處者, 下備局。
【史臣曰: 濟之所言, 多中時病, 而以其年老、跡踈之故, 上不甚奇, 而廟堂覆奏, 亦無採用之實。】
영조 48권, 15년(1739 기미/청건륭(乾隆) 4년) 1월 15일(임술) 1번째기사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친경한다고 하교하다
하교하기를,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는 것에 의지하니, 중히 여기지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신농(神農)은 처음으로 농사를 가르쳤고, 주(周)의 후직(後稷)은 농사에 근본하였고, 아조(我朝)의 창업도 또한 주나라와 같다.
공자(孔子)가‘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하였으니, 성인의 가르침을 알 수 있거니와, 이제는 권농(勸農)이 문득 겉치레가 되었으나, 몸소 밭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권장하겠는가?
내가 때맞추어 친히 농기(農器)를 잡아서 뭇 백성을 권장하고 유사(有司)의 신하가 친경(親耕)하는 기구를 갖추어 첫 해일(亥日)에 거행하는 것이 어찌 농사를 중히 여기는 것일 뿐이겠는가? 바로 내 첫 정사때에 위로 제물을 바치고 아래로 백성을 권장하는 뜻이다”하였다.
○壬戌/敎曰: “國依於民, 民依於食, 可不重歟, 昔之神農, 始敎稼穡; 周之后稷。 本於稼穡, 我朝創業, 亦若周國。 孔子曰: ‘我愛其禮。’ 可見聖人之敎矣。 今則勸農, 便成文具, 若不躬往田畝, 何以興勸, 予時親執農器, 以勸衆民, 有司之臣, 其具親耕之具, 以初亥擧行。 豈特重農, 卽予初政, 上奉,盛, 下勸生民之意也。”
영조 48권, 15년(1739 기미/청건륭(乾隆) 4년) 1월 27일(갑술) 1번째기사
법가를 갖추고 선농단에 나아가다
임금이 법가(法駕)를 갖추고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갔는데, 이튿날 선농에게 친제(親祭)하고, 친경례(親耕禮)를 거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甲戌/上具法駕, 詣先農壇, 將以明日親祭先農, 行親耕禮也。
영조 48권, 15년(1739 기미/청건륭(乾隆)4년) 1월 28일(을해) 1번째기사
선농단에 친제하다. 적전 친경을 행하다. 신하에게 호피등을 하사하다.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친제(親祭)하였다.
헌가악(軒架樂)을 연주하였으나 송신례(送神禮)가 없자 변두(籩豆)를 치우고 말았다. 초헌(初獻)을 행하고 나서 예의사(禮儀使) 윤순(尹淳)이 소차(小次)에 들어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풍년들기를 비는데 어찌 노고를 꺼릴 수 있겠는가?”하고,
따르지않고 적전친경(籍田親耕)을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하루전에 전하의 경적위(耕籍位)를 남유문(南壝門)밖 동남쪽으로 10보(步) 떨어진 곳에 남쪽으로 향하여 지세의 편의에 따라 설치하였다.【봉상시(奉常寺)】 악좌(幄座)를 관경대(觀耕臺)위에, 소차(小次)를 서계(西階) 아래【조금 북쪽】에다 남쪽으로 향하여 설치하였다.【전설사(典設司)】
또 판위(版位)를 경적소(耕籍所)에 남쪽으로 향하여 시경위(侍耕位)를 동서계(東西階)아래에 북쪽이 윗자리가 되게 설치하였다.【봉상시】
종경(從耕)하는 종친(宗親)·재신(宰臣)【대신(大臣)】의 자리를 동남쪽에 설치하였으며, 육경(六卿)·양사(兩司)의 자리가 그 남쪽에 있는데 다 서쪽으로 향하고, 【북쪽의 윗자리이다】서인(庶人)의 자리가 또 그 남쪽의 조금 동쪽【10보(步) 밖】에 있고, 기민(耆民)의 자리가 그 남쪽에 있는데 다 서쪽으로 향하였으며, 친경(親耕)에 쓰는 쟁기의 자리를 종친의 북쪽 조금 서쪽의 남쪽으로 향하여 설치하였다.【봉상시】
친경에 쓰는 소를 친경위의 서쪽 조금 북쪽에 세웠다. 【사복시(司僕寺)】
등가악(登歌樂)을 관경대 위에, 헌가(軒架)를 서인경위(庶人耕位) 서남쪽에【모두 북쪽으로 향하여】 설치하였다.【장악원(掌樂院)】
경적사(耕籍使)의 자리를 친경위의 동쪽에 【남쪽으로 향하여 북쪽이 윗자리가 되게】봉청상관(奉靑箱官)과 집분삽관(執畚鍤官)의 자리를 그 뒤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읍령(邑令)과 현령(縣令)들의 자리를 서인의 동쪽에【서쪽으로 향하여 서쪽이 윗자리가 되게】설치하였다.【읍령은 적전(籍田)을 관장하는 고을의 수령이다】종경관(從耕官)의 자리를 친경위의 동쪽에 설치하고, 또 종경에 쓰는 쟁기와 소를 그 뒤에, 백관(百官)의 자리를 여러 집사(執事)들의 뒤【조금 남쪽】에 설치하였다.
이날 전하가 대차(大次)에 나아가 장차 경적(耕籍)하려 할 때에 봉상정이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쟁기를 잡는 자들을 거느리고 먼저 자리에 나아가고, 시경(侍耕)·종경(從耕)하는 여러 집사와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다 조복을 갖추고 관찰사·읍령과 현령들이 각각 자리에 나아갔다.【5품(五品) 이하와 현령은 모두 흑단령(黑團領)을 입었다】중엄(中嚴)9078)에 전하가 원유관(遠遊冠)을 갖추고 외판(外辦)9079)【중엄·외판 이하는 통례(通禮)가 상의(常儀)대로 계청(啓請)하였다】에 전하가 대차(大次)에서 나와 여(輿)를 타니,
헌가악(軒架樂)이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관경대의 남계(南階) 아래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규(圭)를 잡으니, 예의사(禮儀使) 윤순(尹淳)이 앞에서 인도하였다. 경적위에 이르러 남쪽으로 향하여 서자【음악이 그쳤다】 윤순이 경례(耕禮)를 거행하기를 계청하였다.
적전영이 쟁기를 바치고 북으로 향하여 꿇어앉아 집을 벗겨 보습을 내어 동으로 향하여 서서 봉상정에게 주고 봉상정이 승지에게 주고 승지가 보습을 바치고 사복정(司僕正)이 소를 바쳤다.【수우(隨牛)는 두 사람이다】
전하가 규를 꽂고 쟁기를 받으니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였다.【승지 한 사람과 중관(中官) 두 사람이 쟁기를 잡는 것을 도왔는데 중관은 흑단령을 입었다.】
사복정이 고삐를 잡고【두 소를 모두 한 고삐로 하여 뒷쪽의 조금 왼쪽에서 잡았다】다섯 번 밀었다.
예(禮)가 끝나고 쟁기를 벗기니 음악이 그쳤다.
승지가 쟁기를 받아서 받았을 때처럼 전해 주니 적전 영이 집을 도로 씌웠다. 전하가 규를 잡으니 윤순이 인도하였다. 전하가 관경대에 오르니 헌가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음악이 그치니 등가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전하가 자리에 가까이 가니 음악이 그쳤다. 종경(從耕)하는 재신(宰臣)인 영의정(領議政) 이하가 친경한 동쪽 이랑에 가고 종신(宗臣)이 서쪽 이랑에 가고【다 조금 북쪽에 있다】쟁기를 잡은 자들이 각각 쟁기를 주니【조경(助耕)하고 수우(隨牛)하는 사람이 따랐다】헌가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일곱 번 미는 예를 거행하고 물러나 자리로 돌아왔다. 【음악이 그쳤다】
종경관(從耕官)인 이조판서(吏曹判書) 조현명(趙顯命)· 대사헌(大司憲)
서종옥(徐宗玉)이 차례로 영상(領相)의 이랑 동쪽이랑에 가고, 병조판서(兵曹判書) 조상경(趙尙絅)·대사간(大司諫) 유복명(柳復明)이 종신의 이랑 서쪽이랑에 가고, 앞에서 한 것처럼 쟁기를 주고 조경(助耕)하니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아홉 번 미는 예를 거행하였다. 【음악이 그쳤다】
시종(侍從)·종경관과 문무백관이 모두 관경대아래에 가서 처음으로 서립(序立)하니 봉상판관(奉常判官)이 서인(庶人)을 거느리고 1백이랑을 갈았다.
끝나고서 경적사(耕籍使) 유척기(兪拓基)가 동계(東階)로 올라가 악좌(幄座)앞 조금 동쪽에 나아가 서쪽으로 향하여 서고, 배경(陪耕)하는 기민(耆民)이 관경대 아래에 나아가 북쪽으로 향하여 사배(四邦)하고 꿇어앉으니, 도승지 조석명(趙錫命)이 교지(敎旨)를 받아 남계(南階)동쪽에 가서 서쪽으로 향하여 서서 교지를 선포하기를, 【좌통례(左通禮)가 받아서 선포하였다】
‘기민을 공경히 위로한다’하였다.
기민이 사배하고 다 자리로 돌아가니, 윤순(尹淳)이 예가 끝났음을 아뢰었다. 전하가 남계로 해서 내려가니 등가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관경대 아래에 이르니 음악이 그쳤다.
전하가 규를 놓고 여(輿)를 타니 헌가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대차(大次) 앞에 이르니 음악이 그쳤다. 전하가 여에서 내려 대차에 들어가니 봉청상관(奉靑箱官)이 늦벼·올벼의 씨를 봉상정의 경소(耕所)에 전해주어 뿌렸고 판관이 주부(主簿)를 거느리고 1백 이랑을 마친 것을 살펴보았다.
봉상정이 일이 끝난 것을 살피고 대차에 이르러 북면(北面)하여 꿇어앉아 일이 끝났음을 아뢰니 임금이 쟁기를 끈 소의 옷을 태상(太常)에 간직하라고 명하고, 또 어경우(御耕牛)는 죽을 때까지 태복(太僕)9080)에게 먹여 기르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윤순이 소를 백성에게 돌려주면 잡을 염려가 있을 듯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그 산 것을 보고 차마 죽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뜻으로 이렇게 명한 것이다.
예(禮)가 끝나고 임금이 관경대에 나아가 여러 대신 및 경기감사(京畿監司)와 수령을 인견하고 경기감사에게 호피(虎皮)를, 양주목사(楊州牧使)에게 궁시(弓矢)를 내렸다.
임금이 조정의 신하가 모두 나온 것을 감탄하여 말하기를,
“오늘과 같으면 나라의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대신들이 앞에 나아가 예가 끝난 것을 경하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현종(玄宗)도 친경(親耕)을 행하였으나 마침내 천보(天寶)의 난(亂)을 가져왔으니, 내 마음도 어찌 끝내 게을러지지않으리라고 보증하겠는가? 이제부터 앞으로는 경들이 민사(民事)에 대하여 늘 손수 쟁기를 잡았을 때와 같이 여기기를 바란다”하고,
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에게 말하기를,
“경이 지난해에 치사(致仕)하였을 때에 어찌 다시 나와 더불어 종경(從耕)할 줄 알았겠는가? 이는 천명일 것이다”하였다.
한낮에 거가(車鴐)가 돌아가다가 효종(孝宗)의 잠저(潛邸)에 들러 살피고 효종의 외손 정지익(鄭志翼)·홍익준(洪益宗)등을 불러보고 모두 승서(陞敍)하게 하였다.
註9078]중엄(中嚴):나라의 큰 의식(儀式)이나 행사에서 임금이 거둥할 때 궁중에서 이에 참여하는 여러 관서에서 준비를 서둘도록 알리기위하여 세 차례 치던 북소리를 말함. 초엄(初嚴)·이엄(二嚴)·삼엄(三嚴)이 있는데, 중엄은 이엄에 해당하며 중엄이 울리면 임금은 곧 거둥하였음.註9079]외판(外辦):임금의 거둥때에 의장(儀仗)·호종(扈從)들을 제자리에 정돈시키는 일을 말함 註9080]태복(太僕):사복시(司僕寺).
○乙亥/曉上親祭先農壇, 軒架樂作, 而無送神禮, 只撤籩豆而已。 行初獻畢, 禮儀使尹淳請入小次, 上曰: “爲民祈年, 何可憚勞,” 不從, 行籍田親耕如儀。 前一日, 設殿下耕籍位於南壝門外, 東南十步南向, 隨地宜。【奉常寺。】設幄座於觀耕臺上, 小次於西階下,【稍北。】皆南向。【典設司。】又設版位於耕籍所南向, 侍耕位於東西階下北上。【奉常寺。】從耕宗親、宰臣【大臣。】位於東南, 六卿、兩司位在其南, 皆西向, 【北上。】庶人位又在其南, 少東,【十步外。】耆民位在其南, 皆西向。 設親耕耒席於宗親之北, 稍西南向。【奉常寺。】立親耕牛於親耕位之西, 稍北。【司僕寺。】設登歌樂於觀耕臺上, 軒架於庶人耕位西南, 俱北向。 【掌樂院。】設耕籍使位於親耕位之東, 南向。【奉常寺。】奉常正及籍田令位於其南, 西向北上。 奉靑箱官及執畚官位於其後, 京畿觀察使、邑令及諸縣令位於庶人之東, 西向西上。 【邑令管籍田邑。】從耕官位於親耕位東, 又設從耕耒耟及牛於其後, 百官位於諸執事後, 稍南。 是日, 殿下御大次, 將耕籍, 奉常正具朝服, 帥諸執耒耟者先就位, 侍耕、從耕諸執事及文武百官皆朝服, 觀察使、邑令及諸縣令各就位。【五品以下及縣令, 或黑團領。】中嚴, 殿下具遠遊冠, 外辨。【中嚴外辨以下, 通禮啓請如常儀。】殿下出次乘輿, 軒架樂作。 至觀耕臺南階下降輿, 執圭, 禮儀使尹淳前導, 至耕籍位南向立。【樂止。】淳啓請行耕禮, 籍田令進耒耟, 北向跪, 解鞱出耒, 東向立, 授奉常正, 以授承旨進耒, 司僕正進牛。【隨牛二人。】殿下搢圭, 受耒耟, 樂作。【承旨一人與中官二人助執耒, 中官黑團領。】司僕正執轡,【隨牛共一轡, 從後稍左執之。】五推。 禮畢釋耒, 樂止。 承旨受耒耟, 轉授如受時, 籍田令復鞱。 殿下執圭, 淳導殿下, 陞觀耕臺, 軒架樂作, 樂止, 登歌樂作, 殿下卽座, 樂止。 從耕宰臣領議政李光佐以下, 就親耕之東畝, 宗臣就西畝,【皆稍北。】諸執耒耟者各授耒耟。【助耕隨牛人從。】軒架樂作, 行七推之禮, 退復位。【樂止。】從耕官吏曹判書趙顯命、大司憲徐宗玉以次就領相畝之東畝, 兵曹判書趙尙絅、大司諫柳復明就宗臣畝之西畝, 授耒助耕如右, 樂作, 行九推之禮。【樂止。】侍從從耕官及文武百官俱就觀耕臺下, 如初序立, 奉常判官率庶人, 耕百畝畢。 耕籍使兪拓基陞東階, 進幄座前稍東, 西向立, 陪耕耆民進臺下, 北向四拜跪。 都承旨趙錫命承敎, 之南階東, 西向立, 宣敎【左通禮承而宣之。】曰敬勞耆民。 耆民四拜, 皆復位。 淳啓禮畢, 殿下降自南階, 登歌樂作, 至臺下, 樂止。 殿下釋圭乘輿, 軒架樂作, 至大次前, 樂止, 殿下降輿, 入大次。 奉靑箱官以穜稑之種, 傳授奉常正之耕所播之, 判官帥主簿, 視終百畝。 奉常正省功畢, 至大次, 北面跪, 啓功畢, 上命藏耒耟牛衣於太常, 又命御耕牛喂養於太僕, 限其沒齒。 先是, 淳奏若還牛於民, 恐有宰殺之慮, 上以見其生, 不忍見其死之意, 有是命。 禮畢, 上御觀耕臺, 引見諸大臣及京畿監司、守令, 錫監司虎皮, 楊州牧使弓矢。 上見廷臣咸造歎曰: “若如今日, 則國事庶可爲矣。” 諸大臣進前賀禮成, 上曰: “唐玄宗亦行親耕, 而終致天寶之亂, 予心亦安保其終始不怠耶, 從今以往, 望卿等於民事, 常如手操耒耟時可也。” 又謂領議政李光佐曰: “卿於昔年致仕時, 寧知復與予從耕乎, 此殆天也。” 日午駕回, 歷省孝廟潛邸, 召見寧陵外裔鄭志翼、洪益宗等, 竝賜陞敍。
영조 49권, 15년(1739 기미/청건륭(乾隆) 4년) 3월 29일(을해) 1번째기사
선농단에 친제·친경할 때의 신하들에게 차등을 두어 포상하다
농단(農壇)에 친제(親祭)할 때의 아헌관(亞獻官)이하 집사(執事)·내시인(內侍人)등과 친경(親耕)할 때의 종경관(從耕官) 영의정이하 문무경재(文武卿宰)·종친·내시인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乙亥/賞農壇親祭時亞獻官以下執事、內侍人等及親耕時從耕官領議政以下文武卿宰、宗親、內侍人等, 有差。
영조 53권, 17년(1741 신유/청건륭(乾隆)6년) 2월 27일(임술) 2번째기사
승지 조명리를 불러 황단의 초헌 악장을 삼헌에 그대로 쓸 것인지를 묻다
임금이 승지 조명리(趙明履)를 불러 하문하기를,
“황단(皇壇)의 초헌악장(初獻樂章)을 삼헌(三獻)에 그대로 쓰는가?”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묘(太廟)와 사직(社稷)에는 모두 곡배(曲拜)9653)하는데, 유독 황단(皇壇)에서는 북쪽을 향하여 직배(直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의당《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태묘에는 속악(俗樂)을 쓰는데, 황단에는 아악(雅樂)을 쓰니 이것도 알 수 없다”하자,
조명리가 아뢰기를,
“이것은 바로 황단의 의식을 따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성(九成)9654)과 신관(神祼)9655)하는 예(禮)는 모두 갖추어졌다.
모든 일은 마땅히 한결같이 묘례(廟禮)를 준수해야 하는데, 유독 악장(樂章)만은 단례(壇禮)를 따르고, 심지어 아헌(亞獻)과 종헌(終獻)및 영신(迎神)과 송신(送神)에 이르러서는 모두 악장이 빠졌으니, 그것을 이정(釐正)하는 것이 마땅하다. 더구나 제사(祭祀)에는 마땅히 흑우(黑牛)를 써야 하는데, 황우(黃牛)를 쓰는 것 또한 무슨 뜻인가?”하였다.
뒤에 또 대신과 비국당상을 인견하여 황단(皇壇)의 일에 대해 하문하였다. 승지 조명리가 말하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해보았더니, 제후(諸侯)가 조현(朝見)하는 의식은 없고, 문무(文武)의 여러 신하들은 모두 북쪽을 향해 절을 하며,
태묘(太廟)의 시향(時享)도 그와 같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의심스럽게 여겨 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묻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종묘의 예를 반드시 곡배(曲拜)로 하는 것은 신(神)을 공경하는 예로 섬기기 때문이며, 황단(皇壇)의 예에 직배(直拜)하는 것으로 정한 것은 군신(君臣)의 도리로 행하기 때문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또 황우를 쓰는 의미를 묻자, 조명리가 말하기를,
“명(明)나라는 화덕(火德)으로〈나라를 세웠기〉때문에 성우(騂牛)를 써야 하는데, 성(騂)은 짙은 황색으로, 황색은 성(騂)에 가깝기때문에 황색을 쓰는 것입니다.”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마땅히 명(明)나라의 제례(祭禮)를 따라 성색(騂色)으로 쓰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또 악장(樂章)에 대한 일을 묻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아헌(亞獻)·종헌(終獻)·영신(迎神)·송신(送神)에 악장을 쓰지않음은 조리가 뒤섞인 듯합니다.
그러나 당초에 수의(收議)하던 가운데 고상신 이여(李畬)가 아홉번 변하는 음악을 합주(合奏)하였다고 한 것은 바로 영신(迎神)과 구성(九成)의 악(樂)입니다.
황단(皇壇)을 태묘(太廟)와 문묘(文廟)에 비교하면 사체(事體)가 가장 높은데, 가장 높은 것은 오직 국사(國社)이기 때문에 사단례(社壇禮)를 씁니다. 그리고 사단(社壇)은 바로 지신[地祗]이고, 황단은 바로 인신(人神)이기 때문에 아홉 번 변한다는 것은 바로 선농단(先農壇)의 예를 쓴 것이니,
악장을 다시 정하는 것은 지금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하였다.
註9653]곡배(曲拜):바로 절하지않고 동쪽이나 서쪽을 향해 절함 註9654]구성(九成):아홉 곡의 음악을 연주하는 일 註 9655]신관(神祼):강신(降神).
○上召承旨趙明履問曰: “皇壇初獻樂章, 仍用於三獻乎,” 明履曰: “然矣。” 上曰: “太廟、社稷, 皆曲拜, 獨於皇壇, 北向直拜者何也, 此宜考於《大明集禮》也。 且太廟用俗樂, 皇壇用雅樂, 亦未可曉也。” 明履曰: “此乃隨壇禮而然矣。” 上曰: “九成、神祼之禮, 皆具焉。 凡事當一遵廟禮, 而獨於樂章, 從壇禮, 至於亞、終獻及迎神、送神, 俱闕樂章, 其宜釐正。 況祭當用黑牛, 而用黃牛亦何意也,” 後又引見大臣、備堂, 問皇壇事。 承旨趙明履言: “考出《集禮》, 則無諸侯朝見之儀, 而文武諸臣皆北向拜, 太廟時享亦如之。” 上疑之, 又問領議政金在魯, 在魯曰: “五禮儀, 宗廟之禮, 必以曲拜者, 以神祇之禮事之也, 皇壇之禮, 定以直拜者, 以君臣之道行之也。” 上又問黃牛之義, 明履曰: “明以火德, 故當用騂牛, 而騂爲深黃色, 黃近於騂, 故用之以黃也。” 在魯曰: “宜從大明祭禮, 以騂色用之也。” 上許之。 又問樂章事, 在魯曰: “亞、終、迎、送之不用樂章, 似斑駁。 然當初收議中, 故相臣李畬合奏於九變之樂云者, 乃迎神、九成之樂也。 皇壇比之太廟、文廟, 事體最尊, 最尊者惟國社, 故用社壇。 禮而社壇乃地祇, 皇壇卽人神, 故九變者, 乃用先農壇之禮, 而樂章更定, 今難輕議也。”
영조 58권, 19년(1743 계해/청건륭(乾隆) 8년) 5월 20일(임인) 2번째기사
몸소 선농단에서 기우제를 올리려 하니 김재로와 승정원에서 그것의 정지를 청하다
이때에 비가 잠깐 내렸다가 도로 가무니, 임금이 장차 선농단(先農壇)에서 기우제를 올리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정지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정원에서 아뢰기를,
“선농단의 동쪽과 서쪽에 여역(癘疫)으로 죽은 자의 초빈(草殯)이 있고, 그 근처의 백성들 또한 역질에 전염된 자가 많습니다.
청컨대, 몸소 기도한다는 명을 거두소서”하니,
드디어 대신을 시켜 대행(代行)하라고 명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을 보내어 헌관(獻官)으로 삼았다.
임금이 후원(後苑)에서 향을 피우고 기도하였는데, 이날 과연 비가 내렸다.
○時, 乍雨旋旱, 上將禱雨于先農壇。 領議政金在魯陳箚請寢, 上不從。 政院啓言: “壇之東西, 有癘死者之草葬, 近處民亦多染痛。 請寢親禱之命。” 遂命大臣替行, 遣左議政宋寅明爲獻官。 而上於後苑焚香露禱, 是日果得雨。
영조 65권, 23년(1747 정묘/청건륭(乾隆) 12년) 5월 16일(을사) 1번째기사
빈양문에 나아가 선농단의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다
임금이 빈양문(賓陽門)에 나아가 선농단(先農壇)의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승여(乘輿)를 따라 나가 동정(東庭)에서 지영(祗迎)하였는데, 향을 지영하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乙巳/上御賓陽門,親傳先農壇香祝。乘輿隨出,祇迎于東庭,香祇迎,自此始。
영조 65권, 23년(1747 정묘/청건륭(乾隆) 12년) 5월 18일(정미) 1번째기사
유신을 불러《자성편》을 강하게 하고 정사에 임하는 자세에 관해 말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자성편(自省編)》을 가지고 입시하도록 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친경(親耕)은《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보고 한 것이고, 관예(觀刈)는 의리를 상기시켜 한 것이었는데, 마침 명(明)나라 조정의 고사(故事)와 서로 부합이 되니, 더욱 서글픈 마음 간절하다.
이번 선농단(先農壇)의 제사 때에 친행(親行)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매우 힘써 간하여 비록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으나, 마음은 편안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밤에 의복을 단정하게 입고 앉아서 기필코 밤을 지새우려고 하였었다.
내가 일경(一更) 동안 앉아 있으면 나의 일경동안의 정성을 펴는 것인데, 기력을 감당할 수 없어 마침내 잠자리에 들고 말았으니, 나의 원기가 그전만 못함을 알 수 있다”하고,
또 하교하기를,
“옛사람은 비가 내리기를 마음속으로 구하였으니, 비가 내리고 내리지않는 것은 단지 정성이 있고 없는데 달려있는 것이다”하자,
부수찬 조재민(趙載敏)이 말하기를,
“한 번 마음을 먹기에 따라 경성(景星)이 나타나기도 하고 경운(慶雲)이 일어나기도 하니, 성상의 하교가 정말 그러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성품이 조급하여 이틀동안 비가 내리면 장마가 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반드시 곡식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니,
하늘이 어찌 난처하지 않겠는가?”하자,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임금은 백성에 대해 역시 하늘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정사나 한 가지 명령이 조금이라도 백성에게 해로움이 있으면, 백성들이 임금을 원망하기를 자식이 아비를 원망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러나 인군(人君)으로 하여금 하늘이 만물을 길러 자라게 하는 법을 본받아 비내리고 볕이 나는 것을 순조롭게 한다면 무슨 원망이 있겠습니까?”하고, 조재민은 말하기를,
“하늘의 역할을 하고 임금의 역할을 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어제 관예(觀刈)하던 마음과 오늘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정성을 정사(政事)에 미루어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하였다.
○丁未/上召儒臣, 持《自省編》入侍。 講訖, 上曰: “予之親耕, 見《大學衍義》而爲之, 觀刈則義起爲之, 而適與皇朝故事相符, 益切愴然。 今番農壇祭祀時, 欲親行, 而諸臣爭之甚力, 雖命攝, 心則耿耿。 行祭之夜, 正衣而坐, 必欲達曙。 予以爲坐一更, 則展我一更之誠, 而氣不能堪, 遂至就寢, 予氣不如前可知也。” 又敎曰: “古人求雨於方寸之間, 雨不雨,只在於誠之有無。” 副修撰趙載敏曰: “一念之間, 景星、慶雲, 聖敎誠然矣。” 上曰: “我國人性燥, 二日雨則以爲成霖, 必慮傷穀, 爲天豈不難乎,” 趙明鼎曰: “君之於民, 亦天也。 一政一令, 少有害於民, 則民之怨君, 若子之怨父。 使人君,體天化育, 雨暘調順, 則何怨之有,” 載敏曰: “爲天爲君, 不亦難哉, 願殿下, 以昨日觀刈之心, 今日求雨之誠, 推之政事焉。” 上曰: “善。”
영조 65권, 23년(1747 정묘/청건륭(乾隆)12년) 5월 20일(기유) 2번째기사
선농단의 헌관·집사와 관예때의 예의사등에게 친경의 예에 의거하여 상주다
선농단(先農壇)의 헌관(獻官)과 집사(執事) 그리고 관예(觀刈)때의 예의사(禮儀使)이하에게 친경(親耕)의 예에 의거하여 아울러 차등있게 상(賞)을 주도록 명하였다.
○命農壇獻官、執事、觀刈時禮儀使以下, 依親耕例, 幷施賞有差。
영조 79권, 29년(1753 계유/청건륭(乾隆) 18년) 2월 13일(기해) 4번째기사
친경때 종경하는 신하중에 악장이 끝나기 전에 물러간 자를 추고하게 하다
친경때 임금이 말하기를,
“정위(正位)는 신농씨(神農氏)이고 배위(配位)는 후직(后稷)인가?”하니, 승지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다섯 번 미는 예를 행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이번에는 토맥(土脉)이 깊이일어났다. 기미년12781)에는 단지 겉흙만 일어났었다. 종경(從耕)에도 악장(樂章)이 있는가?” 하니,
예조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있습니다”하였다.
종경한 여러 신하들을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는데 악장이 끝나기를 기다리지않고 먼저 물러갔기 때문이었다.
예의사(禮儀使)에게 명하여 직접 전지(田地)에 가서 파종(播種)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시임대신·원임대신을 입시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동조(東朝)께서 온주(醞洒)를 하사한 것이 있기때문에 선사(宣賜)한다”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이 경근차(耕根車)의 곁에 올라 오늘의 친경에 참여하였으니 귀한 일이다”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어제시(御製詩)를 쓰게 하였다.
또 명하여 전교를 쓰게 하기를,
“지금 대신이 아뢴내용을 들으니 우리 성조(聖祖)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간 해가 곧 내년이었다고 한다.
내년에 전알(展謁)하여도 어찌 늦겠는가마는 나의 날마다 간절해지는 마음에 있어 어찌 내년 가을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금년 가을에 마땅히 건원릉(健元陵)을 전알할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분부하라”하였다.
註12781]기미년: 1739 영조 15년.
○親耕時, 上曰: “正位神農氏, 配位后稷耶,” 承旨金致仁曰: “然矣。” 上行五推訖, 敎曰: “今番則土脈深起。 己未年則只起土皮矣。 從耕亦有樂章乎,” 禮曹判書洪鳳漢曰: “有之矣。” 命從耕諸臣推考, 以不待樂章之畢而先退也。 命禮儀使, 親往田畔, 監播種。 命時、原任大臣入侍。 敎曰: “東朝有賜醞, 故宣賜矣。” 顧謂左議政李天輔曰: “卿登耕根車榜, 參於今日親耕貴矣。” 命承旨書御製詩。 又命書傳敎曰: “今聞大臣所奏, 我聖祖入耆社之年, 卽明年也。 明年展謁其豈晩也, 而以予日復一日之意, 何待明秋, 今秋當展謁健元陵, 以此分付。”
영조 79권, 29년(1753 계유/청건륭(乾隆) 18년) 5월 12일(정묘) 1번째기사
비가 적게 왔으니 내일 선농단에서 친제하겠다고 명하다
하교하기를,
“비가 오기는 했으나 5촌(寸) 1작(勺)이었을 뿐이니, 내일 선농단(先農壇)에 친제(親祭)하겠다. 의조(儀曹)에서는 자세히 알고 있으라”하였다.
내국제조(內局提調) 박문수(朴文秀), 부제조 심성진(沈星鎭),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등이 구대(求對)하여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丁卯/敎曰: “其雖得雨, 五寸若一勺, 明日當親祭農壇。儀曹知悉。”內局提調朴文秀,副提調沈星鎭左議政李天輔,右議政金尙魯等求對請寢,上終不許。
영조 79권, 29년(1753 계유/청건륭(乾隆) 18년) 5월 13일(무진) 1번째기사
선농단에 거둥하다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였다. 단소(壇所)에 나아가 위판(位版)을 봉심(奉審)하고나서 논가에 있는 부로(父老)들을 불러 우택(雨澤)의 다과(多寡)와 이앙(移秧)의 조만(早晩)에 대해 순문(詢問)하였다.
○戊辰/上幸先農壇。詣壇所,奉審位版,召田畔父老,詢雨澤多寡,移秧早晩。
영조 79권, 29년(1753 계유/청건륭(乾隆) 18년) 5월 28일(계미) 1번째기사
우단에 거둥하여 단상을 봉심하다
임금이 우단(雩壇)에 거둥하여 단상(壇上)을 봉심(奉審)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단의 신(神)은 인신(人神)인가?”하니,
교리 한광조(韓光肇)가 말하기를,
“《좌전(左傳)》에 있는데 모두가 인신입니다.
구망씨(句芒氏)는 소호(小皡)의 아들이고 축륭씨(祝融氏)는 전욱(顓頊)의 아들이고 후토씨(后土氏)는 공공(共工)의 아들이고 욕수씨(蓐收氏)와 현명씨(玄冥氏)는 소호(小昊)의 아들입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가?”하였다.
가주서(假住書) 구윤옥(具允鈺)이 좌상과 우상에게 문의(問議)한 뒤에 돌아와서 아뢰기를,
“전대로 구성(九成)으로 행사(行祀)하소서”하니,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예조당상과 경조당상(京兆堂上)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단(壇)의 안팎이 불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익정(李益炡)을 예조판서에, 신만(申晩)을 판윤에 제수하였다.
○癸未/上幸雩壇, 奉審壇上。 上曰: “雩壇神, 人神耶,” 校理韓光肇曰: “《左傳》有之, 皆人神也。 句芒氏, 小皡之子,柷融氏, 顓頊之子, 后土氏, 共工之子, 蓐收氏、玄冥氏, 小昊之子也。” 上曰: “然乎” 假注書具允鈺問議左、右相後歸奏以請: “依前以九成行祀”, 命依議施行。 命禮曹堂上、京兆堂上罷職, 以壇內外不淨也。 除李益炡禮曹判書, 申晩判尹。
영조 91권, 34년(1758 무인/청건륭(乾隆) 23년) 5월 22일(정미) 2번째기사
선농단에 거둥하여 기우제를 친행하다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친히 행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흑원령포(黑圓領袍)를 갖추고 선농단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한 다음, 성기위(省器位)에 나아갔다가 이어서 성생위(省牲位)에 나아가 희생(犧牲)을 살펴본 뒤에, 막차(幕次)에 들어가서 좌윤(左尹)에게 명하여 농민(農民)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였다.
○上幸先農壇, 親行祈雨祭。 上具翼善冠、黑圓領袍, 詣農壇奉審, 詣省器位, 仍詣省牲位, 省牲後入幕次, 命左尹, 率農民入侍。
영조 91권, 34년(1758 무인/청건륭(乾隆) 23년) 5월 23일(무신) 1번째기사
선농단 판위에 나가 사배례·작헌례를 행하고 환궁하다
임금이 선농단판위(先農壇板位)에 나아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네 번 절한 뒤에, 막차에 도로 들어가서 익선관·시사복(視事服)으로 바꾸어 입고, 환궁(還宮)할 때에 어의궁(於義宮)에 역림(歷臨)하여, 임금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의 집이 서로 가깝다는 말을 듣고 승지를 보내어 함께 와서 입시하게 하였다.
○戊申/上詣先農壇板位,行四拜禮。行酌獻禮,四拜後還入幕次,改着翼善冠,視事服,還宮時,歷臨於義宮,上聞領議政李天輔家相近,遣承旨,偕來入侍。
영조 100권, 38년(1762 임오/청건륭(乾隆) 27년) 8월 20일(경술) 1번째기사
선농단에 거둥하여 추수를 관람하다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여 추수(秋收)하는 것을 관람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游冠)과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먼저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에 전배한 뒤에 단(壇)에 나아가, 음악을 연주하라 명하였다. 예조판서 신회(申晦)가 앞에 나와 적전(籍田)의 추수 관람을 고하고 백인환(白仁煥)으로 하여금 도량(稻梁)베는 것을 고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적전은 농민으로 하여금 베고 거두게 함이 옳다.
기민(耆民)은 20명인가?”하니,
윤동섬(尹東暹)이 말하기를,
“40명이니, 농민과 합하여 80인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자성(粢盛)을 중히 여기기때문에 이 옷을 입었다.
내가 기미년15457)에 처음 밭갈고 계유년15458)에 두번째로 해 보았는데,
그 때에 전답은 처음이었고 지금은 1백묘(畝)의 밭이 되었다.
당시에는 자성에 쓸 줄 몰랐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하였다.
경적사(耕籍使) 김치인(金致仁)이 추수한 기장을 바쳤고, 승지 정광한(鄭光漢)이 받들어 향안(香案)앞에 바치니, 임금이 또 자리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받았으며, 경적사가 또 추수한 벼를 바치니, 임금이 또 자리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받았다.
이세택(李世澤)이 말하기를,
“정전법(井田法)15459)은 천하에서 거의 없어지고 오직 우리나라의 평양(平壤)에만 홀로 기자(箕子)가 만든 정전의 제도가 남아 있으나 지금 거의 없어지려 합니다.
이제 이 적전(籍田)을 만약 평양 정전(井田)의 유제를 모방해서 한다면 기자의 법이 비록 피국(彼國)에서는 폐해졌어도 이쪽에서는 행하여질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곳에서도 또한 그 제도를 행할 수 있겠느냐?”하니,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지세(地勢)가 좁아서 그 제도를 행하기에는 어렵습니다”하매,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임금이 늙은 백성들에게 찬(饌)을 내리고 가장 나이 많은 자에게는 무명을 하사하였으며, 또 찬을 내려 주었다. 여러 신하가 예를 마치자 환궁하였다.
註15457]기미년:1739 영조15년 註15458]계유년:1753 영조29년.註15459]정전법(井田法):중국(中國)의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때에 실시된 전제(田制). 주대(周代)에는 전지 1리(里)를 정(井)자 모양으로 1백묘(畝)씩 9등분하여, 주위를 여덟집에 나누어 사유(私有)로 맡기고 가운데 한 구역을 공전(公田)으로 하여 여덟집에서 공동으로 경작(耕作)하여 그 수확을 국가에 바치게 하였음.
○庚戌/上幸先農壇觀刈。 上具遠游冠絳紗袍, 先詣昌德宮, 展拜眞殿後, 詣壇所, 命作樂。 禮曹判書申晦進前, 告觀刈籍田, 令白仁煥告刈稻粱。 上曰: “籍田令率農民刈取可也。 耆民二十耶,” 尹東暹曰: “四十名, 合農民爲八十人。” 上曰: “予以重粢盛, 故着此服矣。 予初耕於己未, 再耕於癸酉, 其時田疇猶草創矣, 今成百畝田。 當時未能知用於粢盛, 今則不然矣。” 耕籍使金致仁, 進刈梁, 承旨鄭光漢, 奉進於香案前, 上降位跪受。 耕籍使又進刈稻, 上又降位跪受。 李世澤曰: “井田之法, 盡廢於天下, 惟我東平壤, 獨有箕子井田之制, 今幾湮沒。 今此籍田, 若倣平壤井田之遺制, 則箕子之法, 雖廢於彼, 而可行於此矣。” 上曰: “此處亦可以行其制乎,” 左議政洪鳳漢曰: “地勢狹側, 難行其制矣。” 上然之。 上賜耆民饌, 最老者賜木, 又賜饌。 諸臣禮畢還宮。
영조 101권, 39년(1763 계미/청건륭(乾隆)28년) 4월 22일(기유) 3번째기사
위판은 대청에 장을 설치하여 기름 먹인 독으로 덮어 간직하라고 명하다
하교하기를,
“사전(祀典)은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없이 소홀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들으니, 내국(內局)15607)에서 신농씨(神農氏)를 제사지내는 일이 있는데, 평상시에 위판(位版)을 간직해 둠이 매우 소홀하다고 한다.
이후로는 대청(大廳)에 장(欌)을 설치하여 기름을 먹인 독(櫝)으로 덮어 간직하도록 하라”하였다.
註15607]내국(內局): 내의원(內醫院).
○敎曰: “祀典勿論巨細, 不可放忽。 今聞內局, 有祭神農氏之事, 而常時藏置位版甚踈云。 此後大廳設欌, 蓋油櫝以藏。
영조 105권, 41년(1765 을유/청건륭(乾隆) 30년) 5월 6일(경진) 1번째기사
선농단에 쓸 향을 숭현문에서 지영하다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쓸 향(香)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庚辰/上祗迎先農壇香于崇賢門。
영조 111권, 44년(1768 무자/청건륭(乾隆) 33년) 11월 9일(계사) 4번째기사
사단과 선농단등의 수축을 신칙하다
하교하기를,
“중국은 본래 제왕(帝王)의 묘(廟)가 있으니, 바로 옛날을 존중하는 도리이다.
우리나라에도 단군사(檀君祠)·기자전(箕子殿)·삼국의 시조릉(始祖陵)이 있고, 전조(前朝)17201)에는 숭의전(崇義殿)이 있으니, 아름답고 거룩하다.
사전(祀典)에 실린 전대(前代)의 능침(陵寢)을 각각 그 고을로 하여금 수축하게 하라. 송도(松都)의 부조현(不朝峴)은 아직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에 이미‘전조의 충신이 말세를 경계한다[勝國忠臣勉季世]’라는 연구(聯句)가 있었으니, 두문동(杜門洞)사람을 조용(調用)할 일을 전조(銓曹)에 특별히 신칙하며, 사단(社壇)·선농단(先農壇)과 외방의 사단도 수축하도록 신칙하라”하였다.
註17201]전조(前朝):고려.
○敎曰: “中國自有帝王廟, 卽尊舊之義也。 我國亦有檀君祠ㆍ箕子殿ㆍ三國始祖陵, 於前朝有崇義殿, 猗歟盛哉。 祀典所載前代陵寢, 令各其邑修築。 松都不朝峴, 尙今在眼。 其時已有勝國忠臣, 勉季世之聯句, 杜門洞人調用事, 另飭銓曹, 社壇ㆍ先農壇ㆍ外方社壇, 亦令飭修。”
영조 114권, 46년(1770 경인/청건륭(乾隆) 35년) 1월 1일(기묘) 4번째기사
팔도와 양도에 농사와 잠업을 권장하는 뜻을 하유하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기를,
“나라의 근본은 곧 백성이요, 백성의 근본은 곧 농사(農事)이다.
신농씨(神農氏)는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서릉씨(西陵氏)는 밭갈고 베짜는 법[耕織]을 가르쳐, 선농신(先農神)과 선잠신(先蠶神)이 되었는데,
몇천년동안 공적(功績)이 만인에게 남아 있다.
3년전에《주례(周禮)》와 국전(國典)에 따라 선농단(先農壇)에서 친경(親耕)하였고, 구궐(舊闕)에서 친잠(親蠶)하였는데, 이는 만년(晩年)에 농사와 잠업(蠶業)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다.
대체로 우리 백성이 입고 먹는 것은 오로지 잠업과 농경(農耕)에 있다.
그러므로 국조(國朝)에서 수령(守令)들에게 선유(宣諭)함에 있어‘농상성(農桑盛)’3글자가 칠사(七事)17475)의 맨 앞에 있으니, 그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제도(制度)가 해이되어 법은 비록 갖추어 있으나 시행에는 게으르고, 문채는 비록 아름다우나 바탕이 다르니, 농사를 권장하는 하교(下敎)도 하나의 형식적인 법문(法文)일 뿐이다.
지금 늙은 나이에 또 한 살을 더하니, 이 마음은 걱정스러워 농사를 권장하고 잠업을 권장하는 뜻을 겸하여 하유(下諭)한다.
옛날 주(周)나라 8백년 기업(基業)은 그 근본이 후직(后稷)으로부터 말미암았다.《맹자(孟子)》의‘〈5묘(畝)의 집터에 뽕나무를 심으면 50세된 자가〉비단옷을 입을 수 있다’는 교훈이 있으니, 마땅히 거듭 신칙하는 뜻을 받들어 농사를 권장하고 잠업을 권장하여 해동(海東) 3백60주(州)로 하여금 의식(衣食)이 풍족하게 하라.
진정 이와 같이되면, 박덕한 내가 77세에 의식이 풍족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은 비록 서투르나 뜻은 실로 근본에 힘쓰는 것이니, 이 뜻을 본받아 힘쓰고 권장하라”하였다.
註17475]칠사(七事):수령(守令)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일곱가지 일. 곧 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詞訟簡)·간활식(奸猾息)임.
○下諭八道兩都曰:
“國之本, 卽民也, 民之本, 卽農也。 神農氏敎稼穡, 西陵氏敎耕織, 爲先農爲先蠶, 幾千百年, 功留萬人。 三昨年遵《周禮》國典, 農壇親耕, 舊闕親蠶, 此暮年重農桑之意也。 大抵吾民衣若食, 專在蠶與耕。 故國朝宣諭守令也, 農桑盛三字, 在於七事之先, 其重可知。 然百度解弛, 法雖備而行則惰, 文雖美而質則異, 勸農之敎, 亦一文具而已。 今於暮年, 又加一歲, 此心憧憧, 兼諭以勸農勸蠶之意。 昔周八百年基業, 其本由於后稷。 鄒聖亦有衣帛之敎, 宜體申申之飭, 勸農勸蠶, 使海東三百六十州, 有衣有食。 誠若此, 涼德七十七歲, 庶可見足食足衣之世。 文雖齟齬, 意實務本, 欽體此意, 務哉勸哉。”
영조 116권, 47년(1771 신묘/청건륭(乾隆) 36년) 3월 3일(갑진) 1번째기사
선잠제에 쓸 향을 지영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선잠제(先蠶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하교하기를,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인데, 늘그막에 그 마음이 해이해지는 듯하여 근년에는 친경(親耕)하고 친잠(親蠶)하여 바로 백성들에게 우러러 보도록 하였으니, 내가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였겠는가?
선농단(先農壇)의 향을 받는데도 이미 지영하였으며, 선잠단(先蠶壇)에도 역시 지영하니, 뜻이 대체로 깊다.
임금은 백성을 의지하고 백성은 농사짓고 누에치는 것에 의지하니, 그 중대한 것을 우선하는 것이 마땅하다. 수령칠사(守令七事)17779)를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신칙하게 하여 그 부지런하고 태만함을 내가 마땅히 알아야 하겠다”하였다.
註17779]수령칠사(守令七事):수령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힘써야 할 일곱가지 일. 곧 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詞訟簡)·간활식(姦猾息)임.
○甲辰/上詣延和門, 祗迎先蠶祭香。 敎曰: “耕蠶, 國之重事, 暮年其若解心, 頃年親耕親蠶, 卽爲觀瞻, 予豈若此。 先農壇受香, 旣已祗迎, 先蠶壇亦爲祗迎, 意蓋深矣。 君依於民, 民依於耕蠶, 宜先其重。 守令七事, 令備局申飭諸道, 其所勤慢, 予當知矣。”
정조 1권, 즉위년(1776 병신/청건륭(乾隆)41년) 4월 24일(을축) 1번째기사
유학 홍이유등이 이명휘를 주벌하도록 상소를 올리자 비답을 내리다
유학(幼學) 홍이유(洪履猷)등이 상소하기를,
“흉악한 사람 이명휘(李明徽)의 상소가 나와서 황조(皇朝)와 우리 조정을 무함하고 백세(百世)의 어진 스승을 모욕한 것이 한이 없었습니다.
그의 이른바‘삼중(三重)’이라는 말은《사전(思傳)》에서 나온 것으로,
곧 성인(聖人)이 세상을 제어하는 예법을 제정하고 음악을 일으켜 천지만물을 일제히 전재(剪裁)하여 한 시대 제왕의 제도를 정하여 넓은 사해(四海)에 펴는데, 그 규모가 크고 공을 들인 보람이 넓으므로 지위가 있고 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고대 이래로 그 지위에 있으면서 그 도(道)를 행한 분은 오직 주공(周公) 한 분뿐이고, 여타의 허다한 성현들은 모두가 그 지위를 얻지 못했기때문에 비록 제정하고 작정하여 천하에 행하지 못했지만, 사실(私室)에서 강론하고 그 한 몸으로 행하는 것은 국가에서 금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죄주지도 않았었습니다. 진실로 이명휘의 말과 같다면, 경계(經界)에 관한 일은 곧 왕자(王者)가 하는 정치인데, 장횡거(張橫渠)가 한 고을에서 정전(井田)을 시행하기를 의논했었으니, 참람한 짓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위적(委積)114)은 곧 주관(周官)의 법제인데 주자(朱子)가 숭안(崇安)에다 사창(社倉)을 창설했었으니, 외람된 짓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의해 말한다면, 예의(禮儀) 3백가지와 위의(威儀) 3천가지를 그만한 지위가 없는 사람은 모두 폐하고서 강구하지 않아야하고, 또한 이런 식으로 모두를 더 미루어 간다면, 출척(黜陟)과 포폄(褒貶)도 천자(天子)가 하는 일이라는 혐의가 있게되어《춘추(春秋)》를 짓는 것도 불가할 것입니다.
천지가 안정되게 하고 만물이 자라게 하는 것도 요(堯)·순(舜)의 사업을 핍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가(一家)의 중화(中和)도 또한 거행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삼중(三重)의 의의를 아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선정(先正)같은 이는 곧 이른바 그 지위는 없고 그 덕은 있는 분입니다.
그 지위가 없기때문에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덕이 있기때문에 오히려 사실(私室)에서 강론하여 한 구역에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치의 지극함과 정의(精義)의 미묘함을 속된 선비나 편협한 유생이 들여다볼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물며 이명휘와 같은 괴귀(怪鬼)하고 무상(無狀)한 자가 더욱 어찌 감히 외람되고 망녕되이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상소에 또한‘창오산(蒼梧山)아래 순(舜)임금의 사당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명(明)나라 천자가 화양동(華陽洞)에 무슨 조금이라도 관계된 것이 있는가?’라고 한 것은 아! 통탄스럽습니다.
무릇 순임금의 묘당에 관한 사실은 자양(紫陽)115)이 지은 비문에 자세합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전기(傳記)에 말한 바「남쪽으로 순행(巡行) 나갔다가 돌아오지못하여 드디어 창오산에 장사했다」고 한 것은 이미 경서에 있는 말이 아니기때문에 고증하여 신빙할 수 없다’라고 했으니, 장후(張侯)가 수리를 한 것이나 주자가 찬송한 것은, 단지 다행히 후세를 가르치게 되기를 바란 것이지 척방(陟方)한 곳이어서가 아닌 것입니다.
묘당을 처음 세운 것이 어느 시대에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설사 잘못된 전기를 인습(因襲)하여 수선 창오산이란 이름만 빌린 것이라면, 또한 반드시 사리를 아는 군자들이 그의 덕을 연모하고 인(仁)을 사모하느라 명칭에 따라 기의(起義)한 것일 뿐입니다.
어찌 다시 척방(陟方)이거나 척방이 아닌 것에 구애될 것 있겠습니까?
만일에 척방한 곳에만 반드시 모두 묘당을 세우고 다른 곳은 안된다고 한다면, 수성(須城)에서 당요(唐堯)에게 제사하고 활현(滑縣)에서 전욱(顓頊)에게 제사하고 호현(鄠縣)에서 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하고 형하(滎河)에서 상탕(商湯)에게 제사하는 것과, 우순(虞舜)의 사당이 또한 영원(寧遠)에 있는 것도 과연 모두 척방인 의리를 취한 것이겠습니까?
설사 중국이 과연 오늘날의 중국이 되지않았고, 충신이나 의사인 사람이 척방의 의리를 취하여 신종황제(神宗皇帝)를 홍덕지(弘德址)에서 제사하고, 의종황제(毅宗皇帝)를 만세산(萬歲山)에서 제사한다면, 명분과 실상이 모두 맞게 된 것이니 무릇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오늘날은 사해(四海)와 구주(九州)가 비린내나는 오랑캐들에게 모두 들어가버려, 척방이고 척방이 아니고를 논할 것없이 당초부터 한 조각의 땅도 사당을 세우고 존숭하여 향사할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 구석의 우리 해동(海東)이 어찌 두 황제가 돌보아준 곳이 아닐 수 있으며, 한 구역의 화양동은 또한 곧 하나의 충신이 자나깨나 과축(邁軸)하던 곳이니, 명(明)나라 천자의 묘당을 이곳에다 세우지않고 어디에 세우겠습니까?
그의 상소에 또‘목목현상(穆穆顯相)이 어찌 여기에 맞겠느냐?’라고 하면서‘빈계(賓階)’·‘주계(主階)’와‘속기(屬己)’·‘속인(屬人)’등의 말로 힐난하여 능멸하고 모욕하기를 전연 윤리 없이 했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무릇 천자의 묘당이 있으면 거기에는 천자의 예악(禮樂)이 있게 되는 법입니다.
신등은 또한 이리 저리 한 말을 어떻게 밝히느냐하면, 우제묘(虞帝廟)의 영송악가(迎送樂歌)에서 고증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무릇 어찌 예법에도 없는 예절을 주부자(朱夫子)가 창안했겠습니까?
다만 화양동은 협소하고 동우(棟宇)도 대강만 이루어졌고 예악과 의문(儀文)은 특히 미처 갖추지 못했습니다.
가령 있다고 하고 선정(先正)이 몸소 천(薦)을 하게된다면, 주선(周旋)하고 승강(升降)할 적에 자연히 마땅히 서야할 곳이 있게되고, 덕을 찬송하고 큰 복을 축원하는 말도 또한 반드시 속하게 될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명휘의 말과 같다면 정강(靜江)에서 장차 일을 행할 즈음에 장후(張侯)가 희생과 단술을 받들고 부복하여 관(灌)하고 천(薦)하고 하는 것도 또한 다시 빈계(賓階)와 주계(主階)의 사이를 두고 힐난할 것이고, 황제의 패연(沛然)한 복과 큰 덕택에 대한 송사(頌辭)도 장차 속할 데가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그의 상소에 또한 공자와 염유(冉有)의 말을 인용하여, 신도(神道)가 무함을 받은 증거로 삼은 것은 아! 통탄스럽습니다.
태산(泰山)의 여제(旅祭)는 원래부터 노(魯)나라 임금이 주관하는 것인데, 계씨(季氏)가 참람한 짓을 했기에 부자(夫子)로부터 배척을 받게된 것입니다. 만약 노나라가 멸망했는데 계씨가 태산에서 노나라 임금에게 제사했다면, 부자가 장차 포장(褒奬)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릇 어찌 임방(林放)만 못하다는 한탄을 하셨겠습니까? 이는 화양동의 일과는 서로 동떨어짐이 천리일 뿐만이 아닌데, 이번에 이명휘가 무함하고 모욕하기에 급급하여 날조해서 맞추고 동일한 것으로 빗대는 짓을 했으니,
이는 진실로 한 차례의 비웃음 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으로서, 마침 그가 성을 내어 사특한 짓을 하는 추태만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의 상소에 또한‘성조(聖朝)에서 존숭하고 보답해 갈 길은 단(壇)을 쌓음에서 벗어나지않아야 하는데, 미천한 배신(陪臣)으로서 두 묘(廟)를 거듭 창설했다’라고 했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무릇 만동묘(萬東廟)는 이미 황단(皇壇)을 쌓기 이전에 세운 것이고 그 뒤에 숙묘(肅廟)께서 비풍(匪風)·하천(下泉)의 생각에 감개(感慨)를 일으키시고 또한 선정신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의 의논을 듣고서 당초에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금원(禁苑)에 묘당을 세우도록 했었다가, 필경 조정의 의논이 노인(虜人)들의 힐란을 가져오게 될 것을 염려하므로, 드디어 묘(廟)를 고쳐 단(壇)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어찌 일찍이 묘는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단으로 바꾼 것이겠습니까? 또 단과 묘는 본시 경중(輕重)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원구단(園邱壇)이나 땅에 제사하는 방유단(方壝壇)은 유독 단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국가에서는 삼황(三皇)에게 향사(享祀)하고 화양동에 두 묘를 세운 것은 모두가 충성스럽고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보존하기 위하여, 생각에 따라 기의(起義)하는 거조이니, 단으로도 할 수 있고 묘로도 할 수 있습니다.
무릇 어찌 단과 묘의 경중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화양동의 사당이 이미 이루어지고 대보단(大報壇)에서는 계속해서 향사가 거행되어, 양양하게 황제의 영령들이 이 쪽에서도 흠향하고 저 쪽에서도 흠향하게 되는 것이 이명휘의 마음에 무슨 불쾌할 것이 있는 일이겠습니까?
진실로 그의 말과 같다면, 윗 대문에 말한바 영원(寧遠)의 사당은 곧 조가(朝家)에서 향사하는 곳이고 정강(靜江)의 사당은 곧 사민(士民)들이 향사하는 곳이며, 우순(虞舜)의 남북(南北) 두 사당은 임금과 신민이 각기 제사하는 곳이지만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 사람도 그르게 여기는 자가 없었음은 무슨 일이겠습니까?
그의 상소에 또한 효묘(孝廟)를 배향(配享)하는 의논을 인용하여 중요한 오묘(五廟)를 나누는 것으로 돌렸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무릇 선정은 진실로 효묘의 충신이고 효종은 곧 두 황제의 충신이니 선정이 효묘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지않은 것을 식견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물며 두 황제의 충신이 두 황제의 유묘(遺廟)에 철식(腏食)하는 것은 진실로 천리와 인정에 있어서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니, 어찌 위로는 두 황제에게 빛이 있게 되고 아래로는 효묘께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분의에 있어서 중대한 일임을 들어 의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부자(夫子)의 묘당은 천하의 주군(州郡)에 펼쳐져있고, 창주(滄洲)의 정사(精舍)에서는 사사로이 석채례(釋菜禮)를 거행했었으니, 이도 또한 분의에 중대한 혐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춘추》의 글에 대의(大義)가 수십 가지이지만 존왕양이(尊王攘夷)가 중요한 것이니, 사람으로서 이러한 의리를 알지 못하면, 중국이면서도 변방의 오랑캐인 것이고 의관을 갖추었어도 금수인 것입니다.
대개 갑신년116)에 십릉(十陵)이 불속에 들어가고 구주(九州)가 오랑캐에게 침몰되어서, 이제는 의종황제(毅宗皇帝)의 순사(殉社)한 영령이 돌아가 의탁할 곳이 없게되고,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재조(再造)한 은덕을 영영 보답할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 성조(聖祖)께서 혁연하게 분발하여 한 번 원한을 씻으려 뜻하시고‘지극한 통분이 마음속에 있는데 해는 저물어 가고 길은 멀기만 하다’라는 하교까지 하시었으니, 바로 천고(千古)의 지사(志士)들로 하여금 슬퍼하고 원통해하며 눈물을 흘리게 했었습니다.
이때에 선정께서 비밀히 큰 계책을 도우며 몸을 바치기를 기하였고, 한을 쌓고 분을 품으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뜻하던 사업을 절반도 이루지 못하여 갑자기 궁검(弓劍)을 남기고,117) 선정의 혈성(血誠)도 또한 스스로 효력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네 글자의 어필을 새긴 것과 조그마하게 환장암(煥章菴)을 세운 것은 모두가 애모(哀慕)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만동묘에 관한 의논도 또한 이로 인하여 생겼던 것입니다.
이는 주자(朱子)가 말한‘통분을 참고 원통을 삼키며 만부득이하여 천하의 제방을 보존시키는 것이다’라는 것으로, 의리는 대개 옛적의 일에서 취해 온 것이고 한때의 창견이 아닙니다.
옛적에 파촉(巴蜀)사람들은 한(漢)나라 소열제(昭烈帝)의 사묘에 제사하였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이른바‘세시복랍에 마을 늙은이들이 달려간다[歲時伏臘走村翁]’라고 한 것이 이런 것이고, 초(楚)나라 백성들은 소왕(昭王)의 사묘에 제사하였는데, 한유(韓愈)의 시에 이른바‘한칸 띠집에서 소왕에게 제사한다[一間茅屋 祭昭王]’라고 한 것이 이런 것입니다.
오직 체모를 지극히 정중하게 해야 하는데 사력(事力)이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또한 남쪽으로 귀양가다 북쪽으로 귀양가다하여 가지고 있는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진실로 선정께서 눈을 감을 수 없는 한이었으니, 임종하여 부탁하는 유서를 어찌 그만둘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의 문인 문순공이 유언한 부탁을 저버리지않고 힘을 다해 경영한 하옥(廈屋)의 제작을 바로 군탄(涒灘)118)이 거듭 돌아온 갑신년에 완성되어, 단지 선정의 구원(九原)에서의 한이 조금 펴지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효묘의 존주(尊周)하는 의리가 해와 별처럼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순공이 오히려 함부로 처리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고 상신 정호(鄭澔)를 통해 연석(筵席)에서 품하여 윤허받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우리 숙묘께서도 황단을 건축하는 일을 동시에 완성하게 되었고, 우리 선대왕때에 와서는 이미 받든 영고(寧考)의 유지대로 두 황제를 존숭하는 향사를 아울러 거행하고, 또한 환장암에 간직하고 있던 석각(石刻)한 어필을 모인(摹印)해 오도록 하여 친히 보셨고, 또한 전결(田結)을 획급하여 제수로 쓰인 자성(粢盛)을 도와주도록 명하셨으니,
아! 훌륭하신 일입니다.
무릇 그렇게하신 다음에야 온 동방의 어리석은 백성들도 모두 신종황제가 재조(再造)한 은덕이 태산(泰山)·심해(深海)와 같고, 의종황제가 순사(殉社)한 정의가 우뚝하여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두가 효묘께서 토복(討復)하려고 하신 충성은 만세(萬世)가 되도록 할 말이 있는 것이고 숙묘와 선대왕께서 성대하게 하신 것은 전대의 성인들과 똑같은 법도임을 알게 되며, 또한 모두가 선정의 일심 동덕(一心同德)과 혈성고충(血誠苦衷)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 이명휘란 자도 귀와 눈이 있고 또한 인간일 것인데, 어찌하여 문득 유독 무슨 속셈으로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서 흉패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 의종황제에게 불만을 가지면서 그만 진호공(陳胡公)119)의 말을 인용하였고, 신종황제와 아울러 향사하는 것을 배척하였는데,‘뇌이(餒而)’의 두 글자를 끌어다가 더없이 이치에 어긋나게 비유하는 짓을 하였고, 그 효묘께 불만을 가지면서, 겉으로는 선정를 모욕하는 말처럼 가장하여‘헛된 명분을 제기하여 실없는 광경을 만들어냈다’라고 하여, 은연중 성조(聖祖)의 끝내지못하신 뜻과 사업을 모두 유명무실한 것으로 돌렸습니다.
그가 숙묘와 선대왕에게 불만을 가지면서, 오직 천자만이 교제(郊祭)를 하게 되고 제후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외연하게 우뚝히 빛을 발하고 아름답고 찬란한 제례(祭禮)를 회방(檜邦)의 무기(無譏)에다 빗대는 짓을 하여, 그 임금도 없이 무험한 것과 패역하고 지나치게 침범하는 짓을 한 것은 거의 고금 천하에 있지않았던 바이니, 이는 진실로 황조(皇朝)의 삼황(三皇)의 역적이자 우리나라 삼조(三朝)의 역적으로서 하루도 천지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자입니다.
선정을 무함하고 모욕한 말에 있어서는 천만가지 말이 한없이 흉악하고 참혹한 것이어서, 단지 다 변명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로 또한 성토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 대의(大義)가 곤란을 받아온 지 오래입니다.
무릇 윤선거(尹宣擧)가 강도(江都)에서 절개를 지키지않음으로부터 토복(討復)의 의논을 원수처럼 여기며,‘구천(句踐)은 속이고 경연광(景延廣)120)은 미쳤다’는 말이 멋대로 그들의 입에서 나오매, 일번(一番)의 흉악한 무리들이 싹 쓸리어 따르게 되었으니, 선정께서 시종 화를 만나게 된 것이 대개 이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 뒤에 서종하(徐宗廈)·송내성(宋來成)·황욱(黃昱)·김범갑(金范甲)의 상소가 똑같은 심인(心印)이었고, 적신(賊臣) 이진유(李眞儒)에 이르러서는 원액(院額)을 부수기를 청했었지만, 하늘의 해가 비추고 있으므로 금지하지 않아도 스스로 저지되었습니다.
이는 곧 갑진년121) 무렵의 일입니다만, 마음에 품고서 엿보아온 지는 이미 오래이고 빚어온 지 이미 깊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명휘의 상소는 또한 매우 늦게야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원대하고 깊게 생각하고 도모하시어 확연하게 건단(乾斷)을 발휘하시어, 시급히 이명휘를 주벌하고 머리를 고가(藁街)에 내걸어, 온 나라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임금과 스승의 중요함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하니,
상소한 유생들을 불러 보고 비답하기를,
“내가 아직 이명휘를 짐작하여 처결하지 않고 있는 것은 대개 뜻이 있은 것이지만, 관학(館學)이 고요하기만 하므로 마음에 그윽이 의아스러웠다. 지금 너희들이 진달한 말은 선비의 기개를 잃어버리지아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마음에 가상하게 여긴다. 처분은 이 뒤에 마땅히 헤아려서 하겠으니, 너희들은 이러한 마음으로 오도(吾道)를 호위하도록 하라”하였다.
註114]위적(委積):쌀을 저축했다가 흉년에 보태어 먹는 것 註115]자양(紫陽):주자의 별칭. 註116]갑신년:1644 인조22년 註117]궁검(弓劍)을 남기고:임금의 승하를 말함. 황제(皇帝)가 용을 타고 승천할 때에 따라 타지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에 매달렸다가 수염이 뽑혀 떨어지고 황제의 활이 떨어지니 백성이 그 활을 안고 울부짖었다는 고사와 황제가 스스로 죽을 날을 택하고 여러 신하들과 헤어지자 교산(橋山)에 장사지냈는데, 텅빈 관(棺)이 나타나고 그 속에는 오로지 황제의 칼과 신만 남아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임 註118]군탄(涒灘):고갑자(古甲子)의 12간지(干支)의 하나인 신(申)을 말함 註119]진호공(陳胡公):주(周)나라 무왕(武王)때의 순(舜)임금의 후손 註120]경연광(景延廣):오대(五代)때 진(晉)나라 사람. 출제(出帝)가 즉위한 뒤 대신(大臣)들이 의논하여 거란(契丹)에 신하로 자처하자고 하였는데, 경연광만이 이에 반대하고 호언장담하다가 뒤에 거란이 쳐들어와서 잡히자 자살하였음 註121]갑진년:1724 영조즉위년.
○乙丑/幼學洪履猷等上疏曰:
凶人明徽之疏出, 而所以誣皇朝與我國, 辱百世之賢師者, 罔有紀極。 彼所謂三重之說, 出自《思傳》, 而卽言其聖人御世制禮興樂, 天地萬物, 一齊剪截, 定爲一王之制, 布之四海之廣, 其規模之大, 功用之博, 非有位有德者, 不能爲也。 從古以來, 得其位行其道者, 惟周公一人而已, 而其餘許多聖賢, 皆以不得其位之故, 雖不能制之作之, 行乎天下, 而若其私室之所講, 一身之所行, 則國不之禁焉, 人不之罪焉。 苟如明徽之言, 則經界乃王者之政, 而橫渠議行井田於一鄕, 其可謂僭乎, 委積乃周官之法, 而朱子創設社倉於崇安, 其可謂濫乎, 由是言之, 則禮儀三百, 威儀三千, 無其位者, 都廢不講, 而又益推盡其類, 則黜陟褒貶, 以其有嫌於天子之事, 而《春秋》不可作矣。 位天地育萬物, 以其有逼於堯、舜之業, 而一家之中和, 亦不可行矣。 是可謂識三重之義乎, 若先正者, 卽所謂無其位有其德者。 無其位故不能使天下之人, 信而從之也, 有其德故猶能講之於私室, 行之於一區也。 其理致之極, 精義之微, 有非俗士拘儒所可窺測。 況明徽之怪鬼罔狀, 尤安敢僭論而妄議哉, 彼疏又以爲蒼梧山下有舜祠當也, 而明天子之於華陽有何毫分交涉, 噫嘻! 痛矣。 夫舜廟事實, 紫陽所撰碑文詳矣。 其文曰, 傳記所稱南巡不返, 遂葬蒼梧者, 旣非經語, 無所考信, 則張候之所修葺, 朱子之所贊頌, 只爲其幸敎後世者, 非爲其陟方之所也。 廟之始立, 未知昉於何時, 而假使因襲傳記之謬, 而姑借蒼梧之名, 抑必識理君子, 戀德慕仁, 因名起義而已。 豈復拘拘於陟方與不陟方乎, 若以陟方之所, 則必皆立廟, 而他則不可云爾, 則須城之祀唐堯, 滑縣之祀顓頊, 鄠縣之祀神農, 滎河之祀商湯, 與虞舜之廟之又在寧遠者, 果皆有取於陟方之義耶, 若使中原, 果非今日之中原, 而有忠臣義士者, 有取乎陟方之義, 而享神皇於弘德之址, 祀毅皇於萬歲之山, 則名實俱得, 夫誰曰不可, 而今則四海九州, 盡入腥羶, 無論陟方與不陟方, 初無尺土片地之可以立祠而崇享者。 則一隅海東, 豈非兩皇之所眷顧, 而一區華陽, 又是一介忠臣寤寐薖軸之所, 則明天子之廟, 不立於此, 而立於何處乎, 彼疏又以爲穆穆顯相, 奚宜於斯, 而以賓階主階, 屬己屬人等語, 擧以詰之, 淩蔑侮辱, 全沒倫理, 噫嘻! 痛矣。 夫有天子廟, 斯有天子禮樂。 臣等亦曰云云, 何以明之, 虞帝廟迎送樂歌可考也。 夫豈無於禮之禮, 而朱夫子創之哉, 但華陽狹小, 棟宇粗成, 禮樂儀文, 特未及備耳。 假令有之, 而先正躬薦, 則周旋升降之際, 自有當立之處, 頌德祝嘏之辭, 亦必有所屬之地。 苟如明徽之言, 則靜江將事之際, 張侯之奉承牢醴, 俯伏灌薦, 亦復致詰於賓階主階之間, 而皇之祜沛皇澤之詠, 將謂之無所於屬乎, 彼疏又引孔子、冉有之言, 以證神道之受誣, 噫嘻! 痛矣。 泰山之旅, 自是魯君之所主, 而季氏僭之, 所以見斥於夫子也。 假使魯亡而季氏祭魯君於泰山, 則夫子其將褒奬之不暇。 則夫豈有林放之歎乎, 此於華陽之事, 其相懸不啻千里, 而今明徽急於誣辱, 捏而合之, 比而同之, 此誠不滿一哂, 而適露其奰慝之態也。 彼疏又以爲聖朝崇報之道, 不過設壇, 而以陪臣之卑, 創二廟之重, 噫嘻! 痛矣。 夫萬東之設, 已在皇壇之前, 而其後肅廟興慨於《風》、《泉》之思, 又聞先正臣文純公權尙夏之議, 初命有司, 爲建廟於禁苑, 畢竟廷議以虜人之致詰爲慮, 遂至於改廟爲壇。 何嘗以廟之不敢, 而易之以壇耶, 且壇之與廟, 本無輕重。 祭天之圜邱, 祭地之方壝, 獨非壇乎, 蓋國家之享三皇, 華陽之建二廟, 皆出於懷忠寓慕, 因思起義之擧, 則壇亦可也, 廟亦可也。 夫何疑於壇廟之輕重乎, 華陽之祠旣成, 大報之享繼擧, 則洋洋皇靈之左歆右饗, 有何不快於明徽之心耶, 苟如渠言, 則上所謂寧遠之祠, 卽朝家之所享也, 靜江之祠, 卽士民之所享也, 虞舜之南北二祠, 君臣各祭, 而自古及今, 無一人非之者何也, 彼疏又引孝廟配享之議, 歸之於分五廟之重, 噫嘻! 痛矣。 夫先正固孝廟之忠臣, 而孝廟乃兩皇之忠臣也, 先正之不配於孝廟之庭, 識者至今恨之。 況以兩皇之忠臣, 腏食兩皇之遺廟, 實天理人情之所不容已, 而豈不上有光於兩皇, 下有榮於孝廟哉, 若以分重而致疑, 則夫子之廟, 遍天下州郡, 而滄洲之舍, 私行釋菜之禮, 是亦有分重之嫌耶, 嗚呼! 《春秋》之書大義數十, 尊攘爲重, 人而不知此義, 則中國而裔戎矣, 冠裳而禽犢矣。 蓋甲申之歲, 十陵入於灰燼, 九宇沈於腥穢, 於是乎毅皇殉社之靈, 靡有依歸之所, 而神皇再造之恩, 永無可報之地矣。 惟我聖祖赫然奮發, 志欲一灑, 至於至痛在心, 日暮途遠之敎, 直令千古志士, 哀冤而雪涕也。 時則先正密贊大計, 期以身殉, 蓄憾懷憤, 以有待焉。 不幸志業未半, 弓劍遽遺, 而先正血誠, 亦無以自效, 則四字御筆之刻, 煥章小菴之竪, 皆出於哀慕之意, 而萬東之議, 又因此而作矣。 此朱夫子所謂忍痛含冤, 迫不得已, 以存天下之防者, 而其義則蓋取於古, 而非由於一時之創見也。 昔巴人祀昭烈之廟, 則杜甫詩所謂: “歲時伏臘走村翁” 是也, 楚民祭昭王之廟, 則韓愈詩所謂: “一間茅屋祭昭王” 是也。 惟以體貌至重, 事力未備, 又以南竄北謫, 有志未就, 固爲先正難瞑之恨, 而臨歿遺書之托, 烏可已乎, 其門人文純公不負遺托, 竭力經營, 廈屋之制, 乃成於涒灘重回之甲, 則非但先正九原之恨, 得以少伸, 抑亦孝廟尊周之義, 昭如日星。 然而文純猶以擅便爲嫌, 因故相臣鄭澔稟于筵席, 得蒙允許矣。 又因此而我肅廟建築皇壇之擧, 同時而成矣, 及至我先大王, 旣承寧考之遺志, 幷擧兩皇之崇享, 又命摹印煥章所藏石刻御筆親覽之, 又命劃給田結, 以助粢盛之需, 猗歟盛矣。 夫然後環東土愚夫愚婦, 皆知神皇再造之恩, 同於泰山深海, 毅皇殉社之正, 卓如靑天白日, 又皆知孝廟討復之忠, 亘萬世而有辭, 肅廟與先大王繼述之盛, 與前聖而一揆, 又皆知先正一心同德, 血腔苦衷, 至死未渝。 彼明徽者, 有耳有目亦人耳, 抑獨何腸, 蓄忿懟之心, 發匈悖之言, 其不滿於於毅皇, 則乃引陳胡公之說, 而斥其幷享於神皇, 至於餒而二字, 引喩絶悖, 其不滿於孝廟, 則外假侮辱先正之說, 謂之提空名而弄虛景, 隱然以聖祖未卒之志業, 幷歸之有名而無實。 其不滿於肅廟及先大王, 則以爲惟天子郊之, 而諸侯無與焉。 又以巍卓光明, 秩秩粲粲之禮, 擬之於檜邦之無譏, 其無君無嚴, 悖逆淩犯, 殆古今天下之所未有也, 此實皇朝三皇之逆, 我國三朝之賊, 不可一日容貸於覆載之間者也。 至於誣辱先正之說, 千言萬語, 極口匈慘, 非但無足悉辨, 實亦無暇於聲討也。 噫! 大義之受困久矣。 自夫尹宣擧之失身江都, 討復之論, 視若仇讎, 句踐詐延廣狂之說, 肆發於其口, 而一番凶徒, 靡然從之, 先正之終始遘禍, 蓋由於此矣。 其後厦、成、昱、甲之疏, 同一心印, 至於賊臣眞儒, 則請毁院額, 而天日所照, 不禁自沮。 此乃甲辰年間事, 而蓄伺已久, 醞釀已深。 然則明徽之疏, 亦可謂發之太晩。 伏乞聖上長慮深圖, 廓揮乾斷, 亟誅明徽, 懸首藁街, 使一國含生之倫, 咸知有君師之重焉。
召見疏儒, 批曰: “予之姑不酌處明徽, 蓋有意焉, 而館學寥寥, 心竊訝之。 今爾等所陳, 可謂不失士氣, 心庸嘉尙。處分從當酌量,爾等以此心,衛吾道。”
정조 9권, 4년(1780 경자/청건륭(乾隆)45년) 5월 19일 정유 1번째기사
선농제, 옥추제에서 신농씨를 향사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다
옥추제식(玉樞祭式)2250)을 의정(議定)하였다.
승지(承旨) 서유방(徐有防)이 아뢰기를,
“남교(南郊)의 선농제(先農祭)에서 신농씨(神農氏)를 향사(享祀)해왔는데 내국(內局)2251)의 옥추제에서도 신농씨를 향사합니다.
똑같이 신농씨의 제사라면 축식(祝式), 제물(祭物)에 경중(輕重)을 나눌 수 없는데, 선농제의 축식에는 어압(御押)이 있고 중사(中祀)에 실려있으나
옥추제의 축식에는 어압이 없어서 소사(小祀)와 같이 되었습니다.
악무(樂舞)를 선농제에서는 쓰고 옥추에서는 쓰지않는 것까지도 다 차별이 있는데, 제물로 논하면 선농제에는 양새끼를 쓰고 옥추제에는 양을 쓰는 것은 더욱이 차별하는 것인 듯합니다.
전자에 의하여 말하면 선농을 중히 여기고 옥추를 경하게 여긴 것이나 후자에 의하여 말하면 옥추를 중히 여기고 선농을 경하게 여긴 것이니, 참으로 그 혹 경하게도 여기고 중하게도 여긴 까닭을 모르겠으며, 또 듣건대 옥추제를 설행(設行)하는 날 향과 축문, 제물은 모두 제사와 같으나 다만 향관(享官)의 의차(擬差)는 해조(該曹)를 거치지않고 의관(醫官)에게 일임하며 전사(典祀)의 배진(陪進)은 시관(寺官)을 임명하지 않고 사사로이 데려오므로 둑제(纛祭)2252)보다 도리어 못하게 되어있다하니, 참으로 아주 미안합니다. 향사를 중히 여기고 체모(體貌)를 높이는 도리로는 구습에 따라 잘못된 것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될 것이므로 한번 바로잡는 거조(擧措)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이 전례(典禮)에 관계되니, 널리 묻고 널리 의논하여 처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이 제사가 오례(五禮)에 들지않고 재령(齋令)에 끼지않은 것은 대략 융쇄(隆殺)의 뜻을 붙인 것일 뿐만아니니, 혹 뒤에 나온 예(禮)이기 때문에 이렇게 빠진 것일는지 모른다.
《문헌비고(文獻備考)》로 말하면 실려있지않은 제사가 없는데, 이 조목은 또 빠지는 것을 면하지못하여 도리어 마조(馬祖)2253)를 제사하고 선목(先牧)2254)을 향사하는 의식이 상세한 것만도 못한 것은 더욱 알 수 없다.
이미 언단(言端)을 내어 수의(收議)하는 거조가 있게 되었으면 획일(劃一)된 규례를 행해야할 것이므로 널리 물어서 충정(充定)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들은 각각 소견을 아뢰라”하고,
이어서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고사(故事)를 널리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 홍문관에서 아뢰기를,
“신들이 역대의 전례를 가져다 상고하였으나 별로 의거할 만한 글이 없고,《대명회전(大明會典)》벽사조(辟祀條)에‘가정(嘉靖)2255)15년에 성제전(聖濟殿)을 세워 선의(先醫)2256)를 제사하는데 해마다 양 하나, 돼지 하나, 형(鉶)2257) 둘, 보궤(簠簋)2258) 각각 둘, 변두(籩豆)2259) 각각 여덟을 쓰고 태의원(太醫院)의 정관(正官)을 보내어 행례(行禮)한다.
또 21년에 태의원에 경혜전(景惠殿)을 세워 위에 삼황(三皇)을 제사하고 양무(兩廡)에 역대의 의사(醫師)를 붙였는데, 삼황은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이며 해마다 예부(禮部)의 당상(堂上) 1원(員)을 보내어 행례하고 태의원의 당상 2원이 분헌(分獻)하며 축문(祝文)에는 황제가 관(官) 모(某)를 보내어 치제(致祭)한다고 하는 것을 격식으로 한다’하였으니,
명나라 선농단(先農壇)의 제식(祭式)에 비하여 융성함과 감쇄(減殺)함의 절차가 매우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신농의 제사인데 선농, 선의는 정제(正祭), 벽사(辟祀)의 구별이 있어서 그러한 듯합니다. 이제 이 옥추제를 설치한 것은 대개 상약(嘗藥)하는 곳에서 근본에 보답하는 뜻을 확충하려 한 것인데, 그 의문(儀文)의 등차(等差)로 말하면 가정 때에 시작한 제도를 본뜬 듯합니다.
축식에 어압이 없고 향관(享官)으로 태의(太醫)를 쓰는 것은 본디 성제전에서 이미 행한 예(例)인데, 축식에 어압이 없으면 악무를 쓰지않는 것은 참으로 그럴 듯하거니와, 태의가 주사(主祀)하면 시관이 나아가지않는 것도 이상할 것 없겠습니다”하니, 곧 고례(古例)대로 설행하되
경희궁(慶熙宮)의 내의원(內醫院)에서 행사하라고 명하였다.
註2250]옥추제식(玉樞祭式):도교(道敎)에서 신에게 지내는 제사의 의식 註2251]내국(內局): 내의원(內醫院) 註2252]둑제(纛祭):대가(大駕)나 군대의 행렬앞에 세우는 대장기(大將旗)에 지내는 군기제. 대체로 뚝섬[纛島]에서 지냈음 註2253]마조(馬祖):말의 수호신인 이십팔수 중의 천사성(天駟星:房星) 註2254]선목(先牧):말을 처음으로 길러 먹였다고 전하는 사람. 註2255]가정(嘉靖):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註2256]선의(先醫):삼황(三皇)인 복희, 신농,황제를 말함.註2257]형(鉶):국을 담는 제기 註2258]보궤(簠簋):서직(黍稷)을 담는 제기
註2259]변두(籩豆):과일, 포등과 식혜, 김치등을 담는 제기.
○丁酉/議定玉樞祭式。 承旨徐有防啓曰: “南郊先農祭, 旣享神農氏, 內局玉樞祭, 亦享神農氏。 均是神農氏祭, 則祝式、祭物, 宜無輕重之可分, 而先農祭祝式, 有押而載於中祀, 玉樞祭祝式, 無押便同小祀。 至於樂舞之用於先農, 而不用於玉樞者, 皆涉斑駁, 而以祭物論之, 先農則用羔, 玉樞則用羊者, 尤似逕庭。 由前而言, 先農爲重, 而玉樞爲輕;由後而言, 玉樞爲重, 而先畏爲輕。 實未知其或輕或重之所以然。 而且聞, 玉樞祭設行之日, 香祝、祭物, 幷同他祀, 獨享官差擬, 不經該曹, 而一委醫官, 典祀陪進, 不任寺官, 而私自領來, 比諸纛祭, 反有遜焉者, 誠萬萬未安。 其在重祀享、尊體貌之道, 恐不可因循襲謬, 宜有一番釐正之擧, 而事係典禮, 博詢廣議, 而處之似好矣。” 敎曰: “本祭之不編於五禮, 不列於齋令者, 不但略寓隆殺之意也, 或者以後出之禮, 有此見遺耶。 至如《備考》一書, 無祀不載, 而此條, 又未免闕漏, 反不若祭馬祖, 享先牧儀式之爲詳且備焉者, 殊未可曉也。 旣發言端, 至有收議之擧, 則合行畫一之例, 不可不博詢充定, 卿等各陳所見。” 仍令弘文館博考故事以聞。 弘文館啓言: “臣等取考歷代典禮, 別無可據之文, 而《大明會典》《辟祀條》有曰: ‘嘉靖十五年, 建聖濟殿, 以祀先醫, 歲用羊一、豕一、鉶二、簠ㆍ簋各二、籩豆各八, 遣太醫院正官行禮。 又於二十一年, 建景惠殿于太醫院, 上祀三皇, 附歷代醫師於兩廡。 三皇, 卽伏羲、神農、黃帝也。 歲遣禮部堂上一員行禮, 太醫院堂上二員分獻。 祝文則以皇帝遣官某, 致祭爲式。’ 比皇朝先農壇祭式, 隆殺之節, 逈然不同。 均是神農之祭, 而先農、先醫, 似有正祭、辟祀之別而然也。 今此玉樞祭之設, 蓋於嘗藥之地, 欲推報本之義, 而若其儀文品節, 則似倣嘉靖始創之制矣。 祝式之無御押, 享官之用太醫, 自是聖濟已行之例, 而祝式無押, 則樂舞之不用, 誠似然矣。 太醫主祀, 則寺官之不進, 亦無怪矣。” 尋命依古例設行, 行事于慶熙宮內醫院。
정조 11권, 5년(1781 신축/청건륭(乾隆) 46년) 윤5월 8일(경술) 1번째기사
선농단에 나아가 관예하고 노주례를 행하다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관예(觀刈)하고, 노주례(勞洒禮)를 행하였다.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선농단에 나아가 단상(壇上)으로 올라가서 봉심(奉審)하고 대차(大次)로 들어갔다.
관예할 때에 이르러 인의(引儀)가 경적사(耕籍使)·봉상시정(奉常寺正)·적전령(籍田令)·독시관(督視官)·관찰사(觀察使)·읍령(邑令)과 종친(宗親)·문무백관(文武百官)을 인도하여 배위(拜位)로 나아갔다.
【이에 앞서 유사(有司)가 어좌(御座)를 관예대(觀刈臺) 위에다 설치하였고, 또 대차(大次)를 선농단 동쪽에 있는 유문(遺門)밖 남쪽안에다 설치하였다. 전의(典儀)가 경적사의 위차를 동쪽 계단 아래에 설치하였고, 봉상시정의 위차는 남쪽으로 조금 물려서 설치하였으며, 적전령의 위차는 봉상시정의 위차에서 남쪽으로 조금 물려서 설치하였고, 독시관의 위차 둘은 적전령의 위차에서 남쪽으로 조금 물려서 설치하였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게 하였으며, 각각 조복(朝服)을 입었다.
서인(庶人) 40명은 푸른 옷에 푸른 수건을 쓰고 그 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10보(步) 밖에 서 있게 하고, 기민(耆民) 40명은 푸른 옷과 푸른 수건으로 또 그 남쪽에 서있게 하였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게 하였다.
관찰사와 읍령의 위차는 서민들 위차의 동쪽에 설치하였는데, 위차를 달리하여 중간줄에 서게 하고 서쪽을 향하게 하였으며, 곡식을 벨 때에 밭둑에 서게 하였다.
또 종친과 문무백관의 서립위(序立位)를 여러 집사(執事)들의 뒤에서 조금 남쪽으로 위치하도록 설치하였는데, 문관은 동쪽, 무관은 서쪽으로 서서 서로 마주보게 하였다.
배위(拜位)를 대하(臺下)의 동쪽과 서쪽에 설치하였는데, 모두 북쪽을 향하게 하였다.
경적사이하의 배위는 백관의 반열에 있게 하였다.
전악(典樂)이 등가악(登歌樂)을 대상(臺上)에 설치하고 헌가악(軒歌樂)을 대하(臺下)에 설치하였는데, 모두 북쪽을 향하게 하였다. 태상시(太常寺)에서 보리를 베어 담는 대나무 상자를 서민들의 뒤에다 설치하였다.】
임금이 대차(大次)에서 나와서 관예대 앞에 이르니, 헌가악이 풍년장(豊年章)을 연주하였다. 뜰 밑에 이르러 여(輿)에서 내리니, 등가악이 숭단장(崇壇章)을 연주하였다.
어좌로 나아가니, 경적사 이하 문무백관이 네 번 절하였는데, 헌가악이 종공장(宗公章)을 연주하였다.
경적사 이하가 각각 위차로 나아가니, 예의사(禮儀使)가 관예할 것을 청하였다. 적전령이 보리를 베게 하겠다고 아뢰니, 독시관 2인이 서인(庶人)을 인솔하고 각각 기계(器戒)를 잡은 다음, 동서로 나뉘어 전묘(田畝)로 들어갔는데, 이 때 헌가악이 중전장(中田章)을 연주하였다.
보리 베기를 끝마치니, 봉상시 정이 대나무로 된 상자에 벤 것을 담아 보리를 취하여 대하(臺下)로 나아가 꿇어앉아 경적사에게 주었다.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오니, 등가악이 숭단장을 연주하였다.【이에 앞서 판위(版位)를 어좌 앞에 설치하였다.】임금이 꿇어앉으니, 위차에 있는 사람들이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경적사가 보리가 든 상자를 근시(近侍)에게 주니, 근시가 이를 어좌 앞으로 가지고 나아갔다. 이때 등가악이 울기장을 연주하였다.
예의사가 태상(太常)에게 주어 진헌(進獻)에 대비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구례(舊例)에는 자성(粢盛)에 대비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번의 의식에서는 천신(薦新)할 때가 지났다는 것으로 진헌으로 고쳤다】임금이 어좌로 올라가니, 등가악이 숭단장을 연주하였다. 기민(耆民)들이 대하(臺下)로 나아가 네 번 절하자, 도승지가 전교(傳敎)를 받들고 남쪽 계단 위로 와서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서서 좌통례(左通禮)에게 선교(宣敎)하게 하자,
좌통례가 전교를 받들어 서쪽을 향하여 선교하기를,
“기민들을 삼가 위로한다”하자. 기민들이 네 번 절하였다.
예의사가 예(禮)가 끝났음을 아뢰니,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왔다.
이때 등가악이 숭단장을 연주하였다. 뜰아래에 이르러 여(輿)를 타니, 헌가악이 예의장(禮儀章)을 연주하였다. 대차(大次)로 돌아가서 조금 있다가, 장차 노주례(勞酒禮)를 행하려 하였다.
【이에 앞서 유사(有司)가 어좌를 관예대(觀刈臺) 위에다 설치하였고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각신(閣臣)·구경(九卿)·삼사(三司)·봉상시 정(奉常寺正)·적전령(籍田令)·독시관(督視官)·관찰사(觀察使)·읍령(邑令)의 위차를 대(臺) 위에다 동·서로 서로 마주보도록 설치하였으며, 기민(耆民)·서인(庶人)의 위차는 대(臺) 아래에 동·서로 서로 마주보도록 설치하였다. 배위(拜位)는 모두 대 아래에서 북쪽을 향하도록 설치하였다. 사옹원(司饔院)에서 주정(酒亭)을 대(臺) 위에다 북쪽을 향하도록 설치하였으매, 내자시(內資寺)에서는 여러 신하들의 주탁(酒卓)을 대(臺) 위에다 동·서로 설치하고, 기민·서인의 주탁은 뜰 아래에다 동·서로 설치하였다. 응당 참여할 관인(官人)과 기인·서인의 복색(服色)은 관예(觀刈)할 때와 같다.】
때가 되자, 임금이 원유관에 강사포를 갖추고 대차에서 나와서【음악의 연주는 관예(觀刈)할 때와 같다】어좌에 앉으니, 응참(應參) 여러 신하들 이하가 모두 네번 절을 하고 나서 각각 자리로 나아갔다. 사옹원에서 주기(酒器)와 찬안(饌案)을 내어 오니, 음악이 연주되었다. 집사자(執事者)가 응참한 여러 신하들의 음식을 내어 왔고, 또 집사자가 기민 등의 음식을 각각 분배하였다. 사옹원 제조가 제일작(第一爵)을 올리니, 등가악이 역기장(亦旣章)을 연주하였다.【삼작(三爵)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장(章)을 썼다】
임금이 술잔을 드니, 내자시 관원이 술을 따라서 주었다.
뜰아래와 뜰위의 집사자들이 응참한 여러 신하들과 기민·서민들에게 술잔을 돌렸다. 이것이 끝나자, 제조(提調)는 안상(案床)을 치우고, 집사자는 음식을 치웠다. 응참한 여러 신하들과 기민·서민들이 함께 다시 배위(拜位) 나아가 사배(四拜)하였다. 임금이 어좌(御座)에서 내려와 대차(大次)로 돌아가니, 여러 신하들도 또한 물러갔다.
노주례(勞酒禮) 때에 입참한 여러 신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시임대신은 영의정 서명선(徐命善), 우의정 이휘지(李徽之), 원임대신 봉조하 김치인(金致仁), 영부사 김상철(金尙喆), 영돈녕 이은(李溵), 판부사 정존겸(鄭存謙)이다.
시임 각신은 제학 김종수(金鍾秀), 직제학 심염조(沈念祖), 직각 서정수(徐鼎修), 원임 각신은 제학 서명응(徐命膺), 채제공(蔡濟恭)·이복원(李福源), 직각 정지검(鄭志儉)·김우진(金宇鎭), 대교 서용보(徐龍輔)·정동준(鄭東浚)이다.
구경(九卿)은 우참찬 권도(權噵), 이조판서 홍낙성(洪樂性), 호조판서 정상순(鄭尙淳), 예조판서 정민시(鄭民始), 병조판서 이연상(李衍祥), 형조판서 이성원(李性源), 공조판서 이명식(李命植), 한성판윤 김노진(金魯鎭)이다. 삼사(三司)는 부교리 박천형(朴天衡), 수찬 정연순(鄭淵淳), 부수찬 권이강(權以綱), 장령 김만구(金晩耉), 지평 이우진(李羽晉), 대사간 임희증(任希曾), 헌납 송악(宋樂), 정언 송전(宋銓)이다.
봉상시정 조사충(趙思忠), 적전령인 봉상시첨정 석종극(石宗克)·독시관인 봉상시판관 손석주(孫碩周), 주부 문약연(文躍淵), 경기관찰사 이진형(李鎭衡), 읍령 양주목사(楊州牧使) 김이주(金頤柱)이다.
○庚戌/詣先農壇觀刈, 行勞酒禮。 具遠遊冠、絳紗袍, 詣先農壇。 陞詣壇上, 奉審入大次。 觀刈時至, 引儀引耕籍使、奉常寺正、籍田令、督視官、觀察使、邑令及宗親、文武百官, 就拜位。【先是, 有司設御座, 以觀刈臺上, 又設大次於先農壇東壝門外南內。 典儀設耕籍使, 位於東階下。 奉常寺正位於南少退。 籍田令位於奉常寺正之南少退, 督視官二位於籍田令之南少退, 俱西向, 各服朝服。 庶人四十, 靑表靑巾, 在其南少東十步外。 耆民四十, 靑衣靑巾, 又在其南, 亦皆西向。 觀察使、邑令位於庶民之東, 異位中行西向, 刈時立於田畔。 又設宗親、文武百官序立位於諸執事之後稍南。 文東, 武西相向。 設拜位於臺下東西, 俱北向。 耕籍使以下拜位, 在百官之列。 典樂設登歌之樂於臺上, 軒架於臺下俱北向。 太常設刈麥竹箱庶民之後。】上出次, 至觀刈臺前, 軒架樂作《豐年之章》。 至階下, 降輿, 登歌樂作崇《壇之章》, 卽座。 耕籍使以下, 文武百官四拜, 軒架樂作《宗公之章》。 耕籍使以下, 各就位, 禮儀使請觀刈。 籍田令啓刈麥, 督視官二人率庶人, 各執器械, 分東西, 入就田畝。 軒架樂作《中田之章》。 刈麥畢。 奉常寺正, 以竹箱盛刈, 取麥進于臺下, 跪授耕籍使。 上降座, 登歌樂作《崇壇之章》。【先是, 設版位於座前。】上跪, 在位者亦如之。 耕籍使, 以麥箱授近侍。 近侍進于座前。 登歌樂《作菀其之章》。 禮儀使請授之太常, 以備進獻。【舊例, 請以備粢盛, 而今儀以薦新時過, 改以進獻。】上降座, 登歌樂作《崇壇之章》。 耆民進臺下四拜, 都承旨承敎, 至南階之上, 東西向立, 宣敎左通禮。 左通禮承敎, 西向宣之曰: “敬勞耆民。” 耆民四拜。 禮儀使啓禮軍, 上降座。 登歌樂作《崇壇之章》。 至階下乘輿, 軒架樂作《禮儀之章》。 還大次, 有頃, 將行勞酒禮。【先是, 有司設御座於觀刈臺上。 時ㆍ原任大臣、閣臣、九卿、三司、奉常寺正、籍田令、督視官、觀察使、邑令, 位於臺上東西相向。 耆民、庶人, 位於臺下東西相向拜位, 俱在臺下北向。 司饔院設酒亭於臺上北向。 內資寺設諸臣酒泉於臺上東西, 設耆民庶人酒卓於階下東西。 應參官人、耆民、庶人服色, 同觀刈者。】時至, 上具遠遊冠、絳紗袍出次。【樂與觀刈時同。】卽座。 應參諸臣以下, 皆四拜訖, 各就座。 司饔院進酒器及饌案樂作。 執事者, 進應參諸臣饌。 執事者又各排耆民等饌。 司饔提調進第一爵, 登歌樂作《亦旣之章》。【至三爵, 皆用此章。】上擧酌, 內資寺官員, 酌酒以授。 階下、階上執事者, 行爵於應參諸臣及耆民、庶民訖, 提調撤案, 執事者撤饌。 應參諸臣及耆民、庶民, 俱復拜位四拜。 上降座還大次。 諸臣亦退。 勞酒時入參諸臣, 時任大臣領議政徐命善、右議政李徽之、原任大臣奉朝賀金致仁、領府事金尙喆、領敦寧李溵、判府事鄭存謙、時任閣臣提學金鍾秀、直提學沈念祖、直閣徐鼎修、原任閣臣提學徐命膺ㆍ蔡濟恭ㆍ李福源、直閣鄭志儉ㆍ金宇鎭待敎徐龍輔ㆍ鄭東浚。九卿,, 右參贊權導,吏曹判書洪樂性,戶曹判書鄭尙淳,禮曹判書鄭民始,兵曹判書李衍祥,刑曹判書李性源,工曹判書李命植,漢城判尹金魯鎭,三司副校理朴天衡,修撰鄭淵淳,副修撰權以綱,掌令金晩耉,持平李羽晋,大司諫任希曾,獻納宋樂,正言宋銓,奉常正趙思忠,籍田令奉常僉正石宗克,督視官奉常判官孫碩周,主簿文躍淵,京畿觀察使李鎭衡,邑令楊州牧使金頤柱。
정조 11권, 5년(1781 신축/청건륭(乾隆)46년) 윤5월21일(계해) 2번째기사
관왕묘의 제품과 의식을 이정하다
관왕묘(關王廟)의 제품(祭品)2745)과 의식(儀式)을 이정(釐正)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병신년2746)때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여보니, 나 소자(小子)가 명을 받들어 섭행(攝行)했었는데, 그때는 정위(正位)와 배위(配位)에 모두 제품이 있었다. 그리고 《오례의(五禮儀)》에도 찬실(饌實)과 준뢰(樽罍)를 선농단(先農壇)과 같게 한다는 글이 있다.
그런데 오늘 고유제(告由祭)의 제품에 배위의 제품이 없었으며 그 밖의 다른 제품도 또한 고르지못한 데가 많았으니, 제때에 이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본묘(本廟)의 향사(享祀)는 모두 선무사(宣武祠)와 둑소(纛所)2747)를 모방하였는데, 선무사에는 문간에 협실(挾室)이 있어 여기에서 관군(官軍)의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본묘의 문신제(門神祭)도 또한 당연히 이를 모방하여야 한다.
둑소에는 악무(樂舞)가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다시 상량해야 하니,
이런 내용을 예조로 하여금 알게 하고 태상제조와 함께 제품을 이정하여 아뢰게 하라”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태상의 제례(祭禮)에 관한 의절(儀節)을 참고하여 보니, 정위(正位)의 제품은 선농단의 예(例)에 의거하여 하게 되어있고, 배위의 제품은 다른 배향위(配享位)의 예에 의거하여 하게 되어있으며, 헌관(獻官)은 무신당하관(堂下官) 3품가운데서 차정(差定)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門祭)의 제품은 선무사에서 관군의 제품에 절반을 쓰는 예에 의거하여 하고, 헌관은 무신당하관 6품가운데서 차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곳의 재축(齋祝)은 무신 6품 이하로 차의(差擬)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타의 의절은 다른 배위와 관군의 제례(祭例)에 의거하여 하도록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하였다.
註2745]제품(祭品):제물(祭物) 註2746]병신년:1776 영조52년 註2747]둑소(纛所):대가(大駕)나 군대의 행렬앞에 세우는 대장기(大將旗)에 지내는 군기제(軍旗祭)를 지내는 곳. 서울의 동쪽, 지금의 뚝섬[纛島]에 사당이 있었음.
○釐正關王廟祭品、儀式。 敎曰: “取考先朝丙申謄錄, 予小子承命攝行, 而正位配位, 皆有祭品。 且《五禮儀》, 有饌實、樽罍, 與先農壇同之文, 而今日告由祭祭品, 無配位之祭, 而其他祭品, 亦多不齊處, 不可不及時釐正。 且本廟享祀, 皆倣宣武祠與纛所, 而宣武祠, 則有門間挾室, 祭官軍, 本廟門神之祭, 亦當倣此矣。 纛所則有樂舞, 而此則更合商量。 以此令儀曹知悉, 與太常提調, 祭品釐正以聞。” 禮曹啓言: “參考太常祭禮儀節, 正位祭品, 依先農壇例, 配位祭品, 依他配享位例。 獻官, 以武臣堂下三品中差定。 門祭祭品, 依宣武祠官軍, 祭品用折半之例。 獻官, 以武臣堂下六品中差定。 兩處齋祝, 以武臣六品以下差擬。 其他儀節, 依他配位及官軍祭例, 定式施行。”
정조 13권, 6년(1782 임인/청건륭(乾隆)47년) 5월 28일(갑자) 1번째기사
대신을 보내 선농단에 기우제를 지내다
대신(大臣)을 보내어 선농단(先農壇)에 기우제를 지냈다.
○甲子/遣大臣, 祈雨于先農壇。
정조 15권, 7년(1783 계묘/청건륭(乾隆)48년) 2월 19일(경진) 10번째기사
우의정 김익의 사직소
우의정 김익이 차자를 올리기를,
“아! 오늘날 국사는 날마다 글러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람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의리뿐인데 의리가 밝지못하면 윤리가 점점 폐지되며, 나라가 나라구실을 하는 것은 기강뿐인데 기강이 진작되지않으면 제방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형정(刑政)이 타당성을 잃으면 역적이 어떻게 두려워하겠으며, 법도가 해이해지면 백성의 뜻이 어떻게 안정되겠습니까?
조정에는 명절(名節)이 땅을 쓴듯이 없어져 바른 말을 들을 수 없고 초야에는 유술(儒術)이 일어나지않아 사기가 매우 떨어져 있습니다.
이 두어가지에서 세도가 융성하고 쇠하며 음양이 사그라지고 커지는 기미가 이미 판가름이 나는 것이니, 서리를 밟는 두려움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정의 기상은 흩어지려는 조짐이 있어서 온갖 법도가 무너지고 있으며, 백성은 마치 거꾸로 매달려있는 듯이 다급하여 팔도가 시달리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위태로운 형세와 실낱 같은 위태로움을 비유하자면 사람에게 뼈속깊이 병이 들어서 안으로는 가슴과 배, 밖으로는 사지에 이르기까지 터럭 하나도 병들지않은 것이 없어서 증세에 따라 교착되고 겉과 안이 모두 급해져서 위태롭고 망가지는 조짐이 날과 달로 심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비록 진월인(秦越人)3360)이 물을 알맞게 붓고 화타(華佗)가 침을 주더라도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더구나 신처럼 못난 것이 걸맞지않은 자리에 앉아 한 해가 넘도록 하는 일없이 녹만먹은 채 하나도 도움된 바가 없음으로 해서 시사(時事)가 이 지경에 이르고 지존(至尊)만 수고하게 하였으니, 옛 말에 이른바‘저런 정승을 쓸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는 말이 사실 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 흉도들과 체결하여 동궁을 해치려고 도모했던 요망한 역적과 왕위를 농락하며 국가의 명맥을 딴 데로 옮기려는 흉악한 역적은 사실 온 나라사람들이 다 같이 원수로 여기고 있는 바이며 국법으로 보아 반드시 죽여야할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귀양을 보냈다가 곧바로 용서해주어 집에서 태연히 살게 하고 자리에 누워 스스로 죽어도 여전히 해당의 법을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의리가 어찌 더욱 어두워지지 않을 수 있겠으며 기강이 어찌 더욱 실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점점 가다가 인심이 함닉되고 변괴가 거듭 생김으로써 처음에는 역적을 징계하고 토벌하자는 의논이 제기되었다가 결국에는 다시 가라앉아버리고, 흉악한 것들의 기세가 잠시 동안 움츠러들었다가 또다시 치성하여 앞으로 사람이 사람구실을 못하고 나라가 나라구실을 못하는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이 전후로 이에 대해 아뢴 것이 한두 번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심혈을 짜내어 죄다 말씀드려 성상의 마음을 돌이키지못하였고 또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쌓아 얻지못하면 시행하지도 못하였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못한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은총에 연연하여 물러나지않은 채 쭈그리고 앉아 있을 경우 필시 부딪치는 곳마다 혹이 생기고 일마다 죄만 더 지을 것입니다.
아! 정위(精衛)가 동해를 메우려는 마음3361)처럼 간절하지만, 우공(愚公)이 북산(北山)을 옮길 때3362)처럼 힘이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나아갔다가 결국 죄를 짓느니보다는 물러나서 분수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아! 과부가 주(周)나라의 기움을 걱정하는 것과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기울어질까 근심하는 것도 타고난 이성에서 나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아니되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마는, 일찍이 대부들의 뒤를 따라다녔는데, 특별히 알아줌만 입었을 뿐 조그만 보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면직을 청하고 물러나면서도 현재의 근심이 마음에 걸려 있고 임금의 은혜는 보답하지 못하니, 구구하게 연민에 맺힌 충심이 어찌 마음속에 왔다갔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찮은 재질이 쇠잔한 병까지 겹쳤으므로 조정을 하직하고 한산한 곳에 있으면서 장차 성덕(聖德)을 노래하며 보답하지 않는 보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석씨(釋氏)가 이른바‘내 몸과 마음을 가지고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는 말이 실로 신의 심사를 그려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슬기롭고 자비스러운 성상께서는 다시 살펴주시고 빨리 신의 중한 책임을 체차해 주심으로써 편안히 요양하게 해주소서”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어찌하여 이처럼 사양하는가? 차자의 말이 천여 마디뿐만이 아니었는데, 말이 은미하고 뜻이 깊었으므로 내가 정말 좌우를 돌아보아도 까마득하여 어떻게 비답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아! 현재의 일이 어려워 나 혼자만 이 수고를 한다는 것을 경이 이미 알았고 또 말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바로잡을 방법은 생각지않은 채 날로 무너지는 세도로 하여금 더욱더 무너지도록 한단 말인가?
내가 듣건대, 대신의 거취(去就)에 따라 정치와 교화의 성쇠가 판가름난다고 하였는데, 경이 지금 떠나면 나는 누구와 같이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더구나 엊그제 경연에서 대략 나의 구구한 쌓인 회포를 말하였는데, 이때에 책려하고 권면하는 것이 더욱 간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은 어찌 차마 물러나려 한단 말인가? 경은 빨리 사직소를 그만 올리고 국사를 구제하기를 간절히 바란다”하였다.
註3360]진월인(秦越人):편작(扁鵲)의 이름 註3361]정위(精衛)가 동해를 메우려는 마음:옛날 염제(炎帝)의 딸 여와(女娃)가 동해에서 놀다가 빠져죽어 정위(精衛)라는 새로 변하였는데, 항상 서산(西山)의 목석(木石)을 물어다가 동해를 메웠다는 고사(故事) 註3362]우공(愚公)이 북산(北山)을 옮길 때:옛날 북산의 우공이 나이 90 가까이 되었는데, 집앞에 태행(太行)·왕옥(王屋) 두 큰 산이 가로막아서 출입하기에 곤란하자, 산을 헐어서 평평하게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지수(智叟)가 어리석다고 비웃자, 우공이 말하기를,“내가 죽으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있고 손자가 또 아들을 낳지만 산은 불어나지않을 터인데 왜 평평해지지 않겠는가?”하고, 날마다 쉬지않고 산을 헐어내자, 상제(上帝)가 감동하여 과아씨(夸娥氏)의 두 아들을 파견하여 산을 옆으로 옮겼다는 고사.
○右議政金熤上箚曰:
噫! 今日國事, 可謂日將非矣。 人之所以爲人, 義理而已, 義理不明, 倫彝漸斁, 國之所以爲國, 綱紀而已, 綱紀不振, 隄防蕩然。 刑政失當, 亂賊何所懲畏, 法度凌夷, 民志何所底定, 位著之上, 名節掃地, 而讜言莫聞, 草野之間, 儒術不興, 而士氣甚餒。 凡此數者, 世敎之汙隆, 陰陽之消長, 其幾已判, 不特爲履霜之懼而已。 以至於朝象, 則有洋渙之漸, 而百度廢壞, 民生則有倒懸之急, 而八域困瘁。 顧今扤捏之勢, 綴旒之危, 譬如人疾入膏肓, 內而心腹, 外而四體, 一毛一髮, 無不受病, 因症交錯, 標本俱急, 危証敗兆, 日深月加。 雖使越人秤水, 華佗下石, 猶懼其不濟, 況如臣湔劣, 濫叨匪據, 經歲伴食, 無一裨補, 致使時事至此, 至尊獨勞。 古所謂: ‘安用彼相爲者,’ 實臣之謂也。 噫! 締聯凶徒, 圖危貳極之妖逆; 竊弄神器, 謀移國脈之凶賊, 實是國人之所同讎, 王章之所必誅, 而薄竄旋宥, 自在家居, 臥席自斃, 尙靳當律。 如是而義理安得不益晦, 綱紀安得不益墜, 駸駸然人心胥溺, 變怪層生, 以致懲討之論, 始倡而還息; 凶孽之氣, 乍戢而復熾, 將至於人不得以爲人, 國不得以爲國。 臣之前後執奏, 亦非一再。 而旣不能披肝盡言, 孚格天聽, 又不能齋心積誠, 弗得弗措, 不職之罪, 到此益著。 今若低徊恩寵, 蹲冒不退, 必將觸境生疣, 隨事添罪。 噫! 精衛之塡東溟, 寸心雖切; 而愚公之移北山, 綿力莫逮。 與其進而終底乎罪戾, 曷若退而獲全其分守乎, 噫! 娶婦宗周之恤, 杞人天傾之憂, 亦出於秉彝之天, 不容自已者。 臣雖無狀, 嘗從大夫之後, 徒荷特達之知, 未效涓埃之報, 而今當乞免而退, 時憂係心, 主恩莫酬, 區區戀結之忱, 安得不耿耿於方寸之內哉, 不幸綿薄之材, 重以孱疾, 不得不乞謝朝著, 寄在散地, 將以歌詠聖德, 不報爲報。 釋氏所謂: ‘願將身心報佛恩者’, 實是說出臣心事也。 伏乞聖慈, 更垂鑑憐, 亟許遞臣重負, 俾得安意調治。
批曰: “卿胡爲而有此巽避之擧也, 箚辭不啻屢千百言, 言微而旨邃, 予誠左右顧, 而懜然不知何以爲批也。噫!時事艱虞,一人之獨勞,卿旣知之矣,又言之矣。奈之何不念矯救之方,使日壞之世道,以至於愈壞也耶,予聞大臣去就, 係治敎之汚隆,卿今決去,予將疇與共理,況於日前筵席,略布區區之蘊,此時所以策勵而期勉之者,爲尤懇。卿何忍巽避,卿何忍巽避,切冀卿之亟斷來章,康濟國事。”
정조 42권, 19년(1795 을묘/청건륭(乾隆)60년) 2월 22일(갑술) 1번째기사
원소의 행행에 따른 고유제를 행하고 선농제에 쓸 향축을 친압하다
원소(園所)의 행행(幸行)에 따른 고유제(告由祭)를 경모궁에서 직접 행하였다. 환궁하다가 인정전(仁政殿)에 가서 선농제(先農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압(親押)하였다.
○甲戌/親行園幸告由祭于景慕宮, 還詣仁政殿, 親押先農祭香祝。
정조 44권, 20년(1796 병진/청순치(順治)1년) 1월 27일(갑술) 1번째기사
선농단 제향을 마친 후 위판이 노차에 머물지않게 할 것을 명하다
전교하였다.
“선농단(先農壇) 제향때 위판(位版)을 태상시에서 받들고 나갔다가 제향을 마치고는 다시 본시(本寺)에 봉안한다.
그런데 제향을 마치고 다시 봉안하는 일이 매양 성문이 열리기 전에 있기 때문에 매양 노차(路次)에 머물러 새벽종이 울리기를 기다리게 된다고 하니, 이는 성경(誠敬)이 크게 부족한 것이다.
차후에는 선전관이 표신(標信)을 가지고 미리 성문에 가서 있다가 위판을 모시고 오는 것을 기다려 즉시 문을 열어 맞이해들이고, 헌관(獻官)은 그대로 모시고 들어가게 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으라.”
○甲戌/敎曰: “先農壇祭享時, 位版自太常奉出, 過享後還安於本寺, 而撤享還奉, 每在城門未開之前, 故未免遲留路次, 以待曉鍾云, 大欠誠敬。此後則宣傳官持標信,預往城門,待位版還奉,卽爲開門迎入,獻官仍爲陪進,著爲式。”
정조 50권, 22년(1798 무오/청가경(嘉慶)3년) 11월 30일(기축) 1번째기사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에 대한 배의등 27명의 상소문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내년 기미년은 바로 선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히 밭을 간 해다.
50년간을 임금자리에 계시면서 온 나라를 덕으로 함육하셨는데, 대개 백성들을 위해 부지런하고 농사를 중히 여기는 것으로 정사와 교화의 근본을 삼았으며, 오래 사는 공효의 바탕으로 삼았다.
크고도 높은 공으로 크게 무궁한 터전을 닦으셨는데, 태세성(泰歲星)6938)이 한 바퀴 돌아서 예전의 그 기미년이 눈앞에 다가왔으니, 나 소자가 어찌 감히 선왕께서 남기신 뜻을 공경히 이어받아 그 빛나는 위업을 만분의 일이나마 드날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농사를 지어 살아간다.
그러니 농사가 잘 되지못하면 백성들에게 곡식이 없게 되니, 백성들이 곡식이 없으면 나라가 어찌 다스려지겠는가?
나 자신이 먹는 것은 줄일 수 있지만 백성들이 끼니를 거르게 할 수는 없으니, 백성들이 끼니를 거르는 것은 그 책임이 농사를 잘못짓는데 달려있다. 농사를 부지런히 짓지않으면 어찌 가을걷이할 것이 있겠는가?
백성들이 농사지음에 있어서는, 비록 천시(天時)를 따라야 하나 마땅히 지리(地利)를 다하여야 하며, 비록 지리에 의지한다하더라도 마땅히 사람이 해야할 일을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
오행(五行)이 교대로 운행하는 것을 따르고 사계절에 붙어 왕성하는 토(土)의 성질을 체득하여 흙에 의지해 농사짓는 것이 백성들의 사명(司命)인바, 밭에서 일하는 수고로움이 또한 많다.
거름을 져내는 수고와, 물을 대는 수고, 호미질하여 풀뽑는 수고, 밭갈이하는 수고, 씨뿌리는 수고, 김매고 북돋아주는 수고, 들밥나르는 수고, 짐승 기르는 수고가 바로 그것이다.
겨울부터 봄까지 1백일은 족히 수고하는데다가 가을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또 이를 베어 거두어들이는 수고와 타작을 하는 수고가 있다.
그러나 수고를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에 따라 풍년이 드느냐 흉년이 드느냐가 결정되니 아, 우리 농민들이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주부자(朱夫子)가 천주(泉州)와 장주(漳州)에서 관리가 되었을 때 산골에서 농민들을 위로하면서 새로 빚은 술을 마주하고‘곡식을 적기에 수확할 것에 대한 시[銍艾中熟之詩]’를 지었는데, 그것은 대개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고하는 자는 백성들이고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아전들이다.
백성들이 수고하고 있는데 관리들이 어찌 감히 편안히 지내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나라는 산으로 덮이고 바다로 둘러쌓여있으며 기름진 들판이 많아 본디부터 입을 것과 먹을 것이 풍족한 지역이라고 칭하여 왔다.
그런데도 농사짓는 방법에 어둡고 게으른 습속이 있으며, 권농관(勸農官)은 제 직책을 다하지못하고 시기를 놓치고 있다.
그리하여 한번 수재나 가뭄을 만나기만 하면 입을 것이나 먹을 것이 모두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어째서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지리를 다 이용하지못해서 그런 것이다.
농사짓는 근본은 부지런함과 수고함에 달려있는데, 그 요체는 역시 수리(水利)사업을 일으키고 농작물을 토질에 맞게 심으며 농기구를 잘 마련하는 것뿐이다.
이 세 가지가 그 요체인데, 그 가운데서도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 것이 첫번째를 차지한다.《주역(周易)》에서 수(水)와 지(地)가 합쳐진 것이 비괘(比卦)이고 지와 수가 합쳐진 것이 사괘(師卦)가 되는데, 이것이 정전법(正田法)의 기본 원리이다.
토질에 잘 맞게 하고자 한다면 물을 놔두고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공류(公劉)6939)가 황무지에 살다가 황간(皇澗)을 끼고 있는 곳으로 옮겼고, 태왕(太王)6940)이 서호(西滸)가에 집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농삿일에 밝은 원성(元聖)6941)도 먼저 장인(匠人)을 두어 크고 작은 수로를 만들었으며, 이를《주관(周官)》에 기록하였다.
위(魏)나라에는 이회(李悝)가 만든 하천이 있었고, 진(秦)나라에는 정국(鄭國)의 도랑6942)이 있었으며, 한(漢)나라에는 문옹(文翁)의 못이 있었고 당(唐)나라에는 위단(韋丹)의 못이 있어서 물을 끌어 저축해놓았다가 이것으로 밭에 물을 대었다. 그리하여 비록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더라도 6, 7월에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지금은 제언(堤堰)에 관한 정사를 오랫동안 버려두어 제언에다 불법적으로 경작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호남지방의 벽골제(碧骨堤)와 호서지방의 합덕지(合德池), 영남지방의 공검지(恭儉池), 관북지방의 칠리(七里), 관동지방의 순지(蓴池), 해서지방의 남지(南池), 관서지방의 황지(潢池)와 같은 제언은 나라안에서 큰 제언이라고 칭해지는데 터놓을 곳을 터놓지않고 막을 때 막지않아서 장마가 지나간 뒤 즉시 말라붙어 해마다 흉년이 들고있다.
오늘날의 커다란 계책으로서는 이미 만들어져있는 큰 제언들을 먼저 손보는 것보다 더 앞서는 일이 없으며, 이를 미루어 나가서 모든 일을 골고루 베풀어야 한다.
그리하여 여러 도로 하여금 각자 자기 관할구역안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다 바치게 한다면 정성과 노력이 이르는 바에 따라 그 효과가 금방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수리의 효과는 토질의 적절함과 서로 잘 맞은 뒤에야 나타나는 법이다. 평평한 땅과 습한 땅, 밭두둑과 밭고랑은 각각 등급이 다르고, 늦벼와 올벼, 기장과 조는 성질이 다르며, 습한 땅에는 벼가 잘 자라고 마른 땅에는 오이를 심는 법이다.
빈(豳)땅 사람들은 밭을 새로 일구어서 보리를 심었고, 기(岐)땅 사람들은 잡초를 베고 밭을 갈았으며, 온(溫)땅 사람들은 보리를 중하게 여기고 낙(雒)땅 사람들은 벼를 중하게 여겼으니, 이는 바로《시경(詩經)》에서 읊고 있는 것이다.
벼는 높고 건조한 땅에 심고 기장은 평평하고 비옥한 땅에 뿌리는가하면 기름진 땅은 모두 다 담배와 차를 심는 밭이 되고 말아서 농사가 형편없게 되었고, 명산(名山)은 대부분 화전(火田)으로 일궈졌으나 곡식은 흔해지지않고 있다.
남쪽지방에서 잘 자라는 것이 북쪽지방에는 적당치않으며, 산골짜기에 잘 자라는 것이 들판에서는 잘 되지않는 법이다.
그런데 남쪽 지방이나 북쪽 지방이나 농사짓는 방법이 똑같고 언덕과 습지를 구별하지 않고서 이앙법(移秧法)만을 위주로 하고 씨를 심는 자가 드무니, 세상에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의 이해가 엇비슷하다고 하지만 필경에는 해로운 점이 둘일 경우 이로운 점은 한 가지가 될 뿐이다.
이에 제때에 비가 내리지않으면 흉년이 드는데,
이는 어느 곳이나 다 그러하다.
농기구를 편리하게 이용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더욱 어두워서 복희씨(伏羲氏)나 신농씨(神農氏)시대 이전과 다름이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시경》에 나오는 창고나 풀베는 기구가 진실로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단지 그 가운데서 긴요한 것만 말한다면, 수차(水車)는 가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수레는 두 사람몫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며, 대바구니는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것이고, 방아는 곡식을 찧기위한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를 사용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돌아보건대, 그 일을 제대로 해서 그 이익을 다하지못하면서도 오히려 농사가 잘 되지않는다느니 농사지어 보아야 굶기만 할뿐이라느니 한다면, 이는 나무를 거꾸로 심어놓고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구공(九功)6943)으로 독려하고 구가(九歌)로 권장하여 도롱이를 입고 논밭에서 일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다 각자의 힘을 다하게 하고 지혜를 다 쓰게 하여서, 밭은 개간되지않은 곳이 없고 개간된 밭에는 씨뿌리지않은 곳이 없으며, 씨뿌린 곳은 먹지못하는 곳이 없게 한다면,《관자(管子)》에 이른바‘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부지런한데 달렸으니 부지런하면 굶주리지않는다’고 한 것과,《위지(魏志)》에서 이른바‘사람들이 모두 부지런히 일하면 풍년드는 해가 자주 있을 것이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될 것이다.
내가 일찍부터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제적인데 힘쓰는 정사에 뜻을 두고 농서(農書)를 편찬하여 여러 주와 군에 반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서로 다르고 풍토(風土)가 똑같지 않으며, 가난하고 부유함을 고르게 하기 어렵고 일과 힘이 미치지 못하여서, 획일적으로 정하여 놓고 그것만을 지키게 할 수가 없었다.
대궐은 만리나 멀리 떨어져있지만 사람마다 각자 좋은 방책을 진달하라.
그러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 절충해 쓸 것이니 그런즉 농가(農家)의 대전(大典)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무릇 농삿일이란 위로 중성(中星)에 속하고 겉으로는 기운(氣運)과 잘 맞아야만하는 법이다. 축월(丑月)6944)의 중간은 대한(大寒)의 절기로서 토(土)의 기운이 처음으로 생겨나고, 미월(未月)6945)의 중간은 대서(大署)의 절기로서 토를 습하게 하는 태음(泰陰)의 기운이 비로소 생겨나니, 축월이 미월과 더불어 상대되어서 토가 비로소 용사(用事)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미 지나간 일은 뒤쫓기 어려움을 개탄하고 앞으로의 도움이 있기를 기대함으로써 다가오는 새해를 일으키고 농부들을 격려하는 바이다.
중요한 것은 일찍 서두르는 것이니, 어찌 새봄이 오기를 기다려 교서를 내리겠는가? 오늘은 축일(丑日)이고 내일이면 축월(丑月)이 된다.
미시(未時) 정각에는 절기가 교대로 이르니 토우(土牛)를 빚어놓고 풍년들기를 기원하기에는 지금이 바로 적기이다. 더구나 전의 공적을 일으키기를 도모하고 그때의 날과 달을 따르는 것이 실로 내가 선왕의 뜻을 우러러 이어받는 한 가지 일이 되는데이겠는가?
아, 경외(京外)의 대소 관료와 백성들은 모두 다 모름지기 잘 듣고 알도록 하라. 농삿일에 도움이 될 만한 자신의 견해가 있으면, 상소를 올리거나 책으로 엮거나 하여, 서울은 묘당에 바치고 지방에서는 감사에게 바치라.
그리고 이속(異俗)에 빠지거나 예전 방법에 구애되지 말고, 바닷가와 산골,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에 맞추어서 각자 마땅한 방법을 진달하라.
사람들의 계책이 진실로 훌륭하면 능히 하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풍년을 내려 곡식을 많게 하여 우리 백성들이 쌀밥을 먹고 태평세월을 누리게 된다면, 이것은 우러러 우리 선왕께서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농정에 힘쓴 훌륭한 덕과 지극한 사랑에 부응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 나 소자(小子)의 씨뿌리고 수확하는데 대한 지극한 정성과 애달픈 마음을 돕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농정(農政)을 일으키고 농서(農書)를 한 곳으로 모으려고 하는 것은 농부들이 가을 수확을 고대하는 것보다도 더 간절하다.
내가 즉위한 지 22년째되는 해 축월(丑月)이 되기 하루 전날인 기축일(己丑日) 미시 정각에 교서를 내린다”하였다.
이에 이 구언전지에 응하여 글을 올린 자가 27인이었는데,
충의위 배의(裵宜), 홍주(洪州)의 유학 신재형(申在亨), 전동지(同知) 김천숙(金天肅), 대구(大邱)의 유학 유동범(柳東範), 부호군 복태진(卜台鎭), 영암(靈巖)의 유학 정시원(鄭始元), 전감찰 이우형(李宇炯), 수위관(守衛官) 윤보(尹溥), 전영(令) 염덕우(廉德隅), 수위관 유종섭(劉宗燮), 전찰방 강요신(康堯愼), 전충의(忠義) 장지한(張志瀚), 전순릉참봉(純陵參奉) 이상희(李尙熙), 부사과 이인영(李仁榮), 전군수 윤홍심(尹弘心), 신계(新溪) 유생 정석유(鄭錫猷), 순장(巡將) 정도성(鄭道星), 전라도사 김하련(金夏璉), 영월부사(寧越府使) 이경오(李敬五), 삼가(三嘉)유학 정응참(鄭應參), 언양(彦陽)유학 전만(全萬), 후릉영(厚陵令) 김응린(金應麟), 전동지 김양직(金養直)·최세택(崔世澤), 상주(尙州)유학 이제화(李齊華), 순안(順安)진사 김치대(金致大)였다. 전지평 윤재양(尹在陽) 역시 시무상소(時務上疏)를 올리면서 농정(農政)에 대해서도 덧붙여 진달하였다.
농서(農書)를 올린 자는 40인이었는데,
남원(南原)유학 장윤(張)·허호(許顥)·허질(許耋)·노익원(盧翼遠), 공주(公州)생원 유진목(柳鎭穆), 공주유학 임박유(林博儒), 양주(楊州)유학 안성탁(安聖鐸), 서울사는 서민 이필충(李必忠), 홍천(洪川)유학 이광한(李光漢), 고성(高城)유학 권현(權炫)·노재황(盧再煌), 흡곡(歙谷)유학 조지영(趙之榮)·정치일(鄭致一)·표헌정(表憲正), 보은(報恩)유학 이동응(李東膺), 덕산(德山)유학 이의주(李宜璹), 수원(水原)의 절충(折衝) 원재하(元在夏), 정산(定山)유학 김훈(金勳), 서울사는 유학 이만록(李晩祿), 교하(交河)유학 이문철(李文哲), 나주(羅州)유학 나민휘(羅敏徽)·나학신(羅學愼), 순창(淳昌)유학 신보권(申輔權), 영광(靈光) 진사 이대규(李大奎), 전주(全州) 유학(幼學) 김상직(金尙直)·이여효(李汝孝)·송상휘(宋相彙)·이장렬(李章烈) , 진안(鎭安)유학 박종혁(朴宗赫), 고부(古阜)유학 박도흠(朴道欽), 능주(綾州) 진사 남익(南熤), 광주(光州)진사 이의우(李宜우), 유학 박문찬(朴文燦)·정윤국(鄭潤國), 무장(茂長)유학 강석운(康錫運)·강순(康洵), 남원(南原) 전현감 장현경(張顯慶), 장련(長連) 진사 박재설(朴載卨), 해주(海州)유학 김호(金皓)·이훈(李薰)이었다.
배의(裵宜)의 상소에 아뢰기를,
“농사에는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전에는 곡우(穀雨)에 씨를 뿌리고 하지에 모내기를 하였으니 농사철이 오히려 일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씨뿌리기와 모내기를 곡우와 하지 두 절기보다 먼저 하고 그렇게 하지않으면 늦다고 여깁니다. 이에 씨뿌리기와 모내기를 일찍하도록 힘쓰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보리가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점이 벼 못지않은데, 사람들은 보리를 밭에 심는 것만 좋은 줄 알고 논에다 심는 것도 좋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릇 논은 추수한 뒤에는 그대로 빈땅이 되어버리는데 빈땅으로 되었을 때 물을 빼내고 건답(乾畓)을 만들어서 수만평의 논에 모두 보리를 심었다가 보리를 수확한 뒤 곧바로 모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간혹 벼가 가을에 제대로 여물지않았을 경우에도 보리로 굶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서로 돕는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경우에는 밭갈고 씨뿌릴 철에 소와 종자가 없어서 농사를 못짓는 자가 많습니다.
이러 병통을 고치자면 고을의 수령들이 면이나 리의 부로(父老)를 골라뽑아서 그들에게 권농관(勸農官)의 책임을 지운 후 각기 면과 리의 부자와 가난한 자를 조사하여 장부를 만든 다음 부자로 하여금 종자곡식을 내어 가난한 자에게 꾸어주게 합니다.
면이나 리에 부자집이 없을 경우에는 관청에서 곡식을 내어주었다가 가을이 되거든 도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이 제도가 시행된다면 부자는 손해가 없고 가난한 자는 의지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 소를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엄하게 하면 소가 저절로 흔해질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에 안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수령들에게 달렸는바, 수령들을 적임자로 임명하기만 하면 농사에 힘쓰는 것은 그 가운데서 저절로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농정(農政)에 대해서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듣고자해서 특별히 교서를 내려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나의 말이 사리에 어두워서 합당치않다고 말하지말라. 현재의 급선무가운데 어찌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교서를 내린지 여러 날이 되도록 의견을 개진하는 상소가 올라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었다.
너는 공신(功臣)의 후손으로서 교서에 응하여서 조목별로 의견을 개진하였는데, 모두가 실용에 적당한 것이었다.
씨뿌리기와 모내기를 반드시 일찍해야 한다는 말과, 벼가 혹 미처 여물지 않더라도 보리로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고 한 것이나, 부자가 종자와 식량을 내어 꿔주었다가 가을에 도로 받아들이며 또 면이나 리의 부로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권농관의 책임을 지우라고 한 것등은 모두가 정확히 보고 충분히 헤아려보고서 그렇게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죽은 말 뼈다귀를 사서 천리마를 구한다는 뜻에서 가장 먼저 의견을 개진한 사람을 가상히 여기고 포상해야 마땅하겠으나, 혹 말하려고 하던 자들이 이를 혐의스럽게 여겨 물러나버릴까 염려되기에 우선은 교지를 내리지않겠다. 그러니 너는 물러가서 묘당에서 부르기를 기다렸다가 사실대로 다 말하라”하였다. 신재형(申在亨)의 상소에 아뢰기를,
“무(戊)와 기(己)는 천간(天干)에 있어서 토(土)에 해당되고, 축(丑)과 미(未)는 지지(地支)에 있어서 토(土)에 해당됩니다.
천간과 지지가 합하여 기미(己未)가 되었는바, 기와 미는 모두 토에 속하는데, 토는 농사의 근본이 되고, 농사는 먹는 것의 근본이 되며, 먹는 것은 백성들의 근본이 됩니다. 백성들을 농사에 힘쓰도록 이끌고 농삿일을 절기에 맞추도록 힘쓰는 것은 오로지 다음해인 기미년에 있습니다.
대개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나서 지리(地利)를 다 이용하고, 지리를 다 이용하고 나서 천시(天時)를 기다려야 하는 법입니다.
수리사업을 일으키고 토질에 맞는 것을 잘 살피며, 농기구를 잘 정비하는 것이 모두 사람이 응당 하여야할 일들입니다.
천시(天時)에 있어서는 3년동안 가뭄이 들고 3년동안 홍수가 지며, 10년에 한 차례 크게 가뭄이 들고 10년에 한 차례 크게 홍수가 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가뭄의 피해가 홍수의 피해보다 더 심하니, 우리나라는 논이 많아서 일단 가뭄을 만나기만 하면 농민들이 속수무책입니다.
이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모판을 만들었다가 모내기를 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성(箕聖)이 처음에 정전법(正田法)을 가르친 때부터 높고 건조한 곳은 마른 땅에 씨를 심고 낮고 습한 곳에서는 물을 대고 씨를 뿌렸는데,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그것을 일러 마른씨뿌리기[乾播], 물씨뿌리기[水播]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중기부터 비로소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移秧法)이 생겨났습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이 이앙법은 임진왜란 때에 비로소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 법이 한 번 유행되자 농사를 망치는 백성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절기가 곡우 때가 되어서야 모판에 볍씨를 뿌리는데 이때 만약 가뭄이 들면 아무리 부지런한 농사꾼이더라도 매번 하늘의 구름만 쳐다보다가 시기를 놓친 다음에야 볍씨를 뿌리게 됩니다.
또 하지때에 가서는 모내기를 할 수 있지만 하늘이 이때에 가뭄을 내리면 번번이 비가 적은 것을 걱정하는데, 한 번이라도 제 시기를 놓치기만 하면 농사를 망치고 맙니다.
씨를 심는 부종법(付種法)의 경우에는, 겨울에 쌓인 눈이 녹고 봄비가 촉촉이 내릴 때에 올벼는 일찍심고 늦벼는 늦게심으며, 마른 땅에는 마른씨뿌리기를 하고 물이 있는 곳에는 물씨뿌리기를 하므로, 종자가 싹트고 줄기가 서는데 있어서 가뭄과 홍수가 피해를 입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만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김매는데 있어서 이앙법의 경우에는 두어 차례만 김을 매주면 그만이지만 부종법의 경우에는 적어도 3, 4차례 이상 매주어야만 합니다.
부유한 백성들은 토지를 겸병(兼幷)하여 농사를 많이 짓고자하여 적게는 3, 4석씩, 많게는 6, 7석씩을 한꺼번에 모를 부어 노동력을 줄이고 한꺼번에 모내기를 하여 수고를 줄입니다.
그리고 비록 가뭄을 당하더라도 좋은 논이 많으므로 수확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의 경우에는 모를 붓고 모내기하는 것을 맨 나중에야 하게 되므로 가뭄이 들거나 흉년을 만나면 입에 풀칠할 길이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내년부터 모 붓는 법을 폐지하고 부종법을 쓴다면 비록 한때의 수고로움은 있을지언정 한 해동안 먹을 것은 넉넉해지리라 생각됩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오로지 고식적인 것만 좋아하고 영구적인 계책은 세울 줄을 모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삼농(三農)의 일에 힘쓰고자 하신다면
만대를 두고 전해질 법을 세우소서.
수리(水利)사업을 일으키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하께서‘이미 있는 큰 제언(堤堰)부터 착수하여야 한다’고 하교하셨습니다.
대개 산에 가까운 곳은 제언을 만들어서 물을 가두고, 들에 가까운 곳은 보(洑)가 있어서 물을 끌어대며, 바다에 가까운 곳에서는 제방을 쌓아서 바닷물을 막습니다.
이 둑과 보, 제방 세 가지는 수리(水利)를 일으켜서 가뭄과 재앙에 대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산과 들판을 낀 고을들이 수놓은 것처럼 뒤섞여 있고 호수와 바다를 낀 고을들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는데, 옛사람들이 수축해놓은 것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언은 모래에 막히고 보는 돌에 파괴되고 제방은 조수에 무너졌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이를 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언사(堤堰司)에서 감사와 수령들에게 신칙하여 작은 곳은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큰 곳은 관가의 힘을 들여 초봄에 역사를 시작하여서 물을 끌어다 채우게 하되, 혹 부지런히 하지않을 경우에는 고과(考課)하여 징계합니다.
또 새로 쌓을 만한 곳이 있을 경우에는 늠료(廩料)를 출연하고 인력을 내어 역사를 시작하며, 그러고서도 또 힘이 모자라면 국곡(國穀)을 내어 공사를 끝내게 합니다.
그리고 만약 부유한 백성이 재물을 출연하고 힘을 내어 백성들이 그 이익을 입게 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상을 내려서 다른 백성들을 흥기시키는 방도로 삼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산간 고을이나 바닷가 고을이 어찌 올해와 같이 크게 흉년이 들겠습니까?
토질에 잘 맞는 것을 살피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하교하시기를
‘남쪽지방에 잘 맞는 것은 북쪽지방에 맞지않고 산골짜기에서 잘 자라는 것은 들판에서는 잘 자라지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토질을 잘 살피고자하지않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조그마한 땅뙈기마저 모두 다 양안(量案)에 올라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진 들판이 지금 혹 묵어가고 넓디넓은 습지가 지금 혹 버려진 채 있으니, 누군들 그것을 개간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봄에 개간을 하여 경작하기만 하면 가을에는 세금을 매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토지를 개간하고 백성들을 모여 살게 하라’고 책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개간할 만한 토지는 백성들에게 개간하게 하고, 경작할 만한 토지는 백성들로 하여금 경작하게 한 다음, 토질이 기름지고 메마른 정도에 따라서 세금의 많고 적음을 정하되, 6, 7년이나 혹 4, 5년간 세금을 면제해주어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넓은 은혜 아래에서 배부르고 따뜻하게 지내게 한다면, 토질에 맞는 것을 살피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부연 설명한‘무(戊)와 기(己)는 천간(天干)의 토(土)이고 축(丑)과 미(未)는 지지(地支)의 토인데, 천간과 지지가 합하여 기미(己未)가 되었으니, 기와 미는 모두 토에 속한다.
토는 농사의 근본이 되고, 농사는 먹는 것의 근본이 되며, 먹는 것은 백성들의 근본이 되고,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이 된다’라는 말은 이치를 잘 터득한 것으로서 참으로 취할 만한 말이다.
그리고‘기성(箕聖)께서 처음 정전법을 가르친 때부터 마른 땅에는 마른대로 씨를 뿌렸고 습한 땅에는 물을 대고 씨를 뿌렸는데, 우리 조선조에서 마른씨뿌리기니 물씨뿌리기니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앙법이 유행되자 농사를 망친 사람이 많다.
그러니 내년 기미년부터 모붓는 것을 폐지하고 부종법(付種法)을 행하면 그 이익이 클 것이다’고 한 것은, 바로 요즈음 묘당에서 강구하고 있는 계책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따르게끔 할 수는 있어도 이치를 알게끔 할 수는 없으며, 또 백성들을 다스리는 법은 생선국을 끓이는 것과 같아서 뒤흔들면 옛날의 훌륭한 법을 본받는다하더라도 반드시 효과를 거두지못할 것이니,
지나친 것을 제거하는 방도는 감사나 수령들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리고‘산 가까운 곳에는 제언이 있는데 물을 가두기 위한 것이고, 들판에 가까운 곳에는 보가 있는데, 보는 물을 끌어대기 위한 것이며,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는 제방이 있는데 제방은 바닷물을 막기 위한 것이다.
산과 들판을 낀 고을들이 수놓은 것처럼 섞여있고, 호수와 바닷가의 고을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는 곳마다 옛사람들이 수축해놓지 않은 곳이 없지만, 제언은 모래가 쌓여 묻히고 보는 돌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제방은 조수에 의해 무너졌다.
작은 곳은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큰 곳은 관가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초봄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수리하되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조사하여 고과할 때 성적을 매긴다.
예전에는 쌓지않았으나 지금은 쌓을 만한 곳은 또 공곡을 내어 역사를 마친다. 혹 재물을 출연하여 여러 사람에게 혜택을 입히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포상한다’고 한 것도 적절한 의견이라고 할 만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초기(草記)를 올리게 해서 개간하기 전에 조처를 취할 수 있게 하겠다.
또‘묵고 버려진 땅을 누군들 개간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봄에 개간하여 농사지으면 가을이면 곧바로 세금을 매긴다.
이렇게 하면서 토지를 개간하고 백성들이 모여 살게 하라고 책할 수 있겠는가? 개간하고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함에 따라 세금의 높낮이를 정하며, 6, 7년이나 4, 5년 동안을 기한으로 해서 입을 것 없고 먹을 것 없는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따스하고 배부르게 지내게 하라’고 한 것은, 바로 3년동안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차등을 두어 속전(續田)으로 등급을 내려주는 뜻이다.
얼마 전에 영남 지방에 이런 뜻을 알린 일이 있는데, 근래에 과연 성과가 있었는가? 끝부분에서 진달한 조항과 함께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하였다.
이에 대해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제언과 보·제방을 수축하라고 신칙하는 일에 있어서는,‘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관에서 인력을 동원하며,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조사해서 고과에 반영하라’고 한 그의 말은, 바로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관에서 인력을 동원하는 가운데에는 또 자연히 얼마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작지않은 역사를 일으킨 곳에는 으레 반드시 힘을 들여서 해마다 수리해야 합니다.
먼저 각 고을의 제언과 보·제방가운데서 많은 이익을 주면서도 심하게 무너지거나 막힌 곳을 각각 몇 군데씩 정한 다음, 천명이나 만명의 백성을 동원해야될 곳에 대해서는 진휼할 곡식으로 떼어놓은 곳가운데서 몇석을 떼내어 양식으로 삼은 뒤 날짜를 따져서 기어이 완공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는 실로 흉년에 공사를 일으키는 정사에 합당한 것이며, 장정들이 여기에서 품삯을 받아먹으면 필시 진구할 대상자가 줄어서 민간에 곡식을 나누어주는 것에도 기대 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이런 내용으로 삼남(三南)의 감사에서 분부하여 수령들과 직접 의논한 다음 수축하기에 합당한 곳을 즉시 계문하게 하고, 반드시 얼음이 풀린 뒤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맞춰 모두 공사를 끝내게 하며, 그에 대한 상황을 본사(本司)에 치보하게 합니다.
그러면 본사에서 품지(稟旨)하여 각별히 농삿일을 잘 알고 수리(水利)에
해박한 사람을 택하여 이들을 나누어 보내어 살펴보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수축하지못하였으나 지금은 수축할만한 곳에 대해서는,
십분 의심이 없는 곳을 제외하고는 한꺼번에 영을 내려 소요를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대소민인(民人)을 막론하고 형편을 보아서 공사를 이룬 자가 있다면 그 가상함이 어찌 재물을 출연하여 진휼을 보탠 공에만 그치겠습니까? 감사가 그런 사람을 계문하면 특별히 논상해야 합니다.
수령들의 업적을 고과하는 것은 본디 수령칠사(守令七事)6946)를 따지는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농정은 칠사가운데서 으뜸을 차지하는바, 농사를 장려한 것을 가지고 고과를 하는 것은 바로 법의 본뜻입니다.
이 뒤로는 먼저 농정(農政)의 우열(優劣)을 기록하고 그 다음으로 다른 정사를 기록하라는 내용으로 규정을 정하여 알려야 합니다.
대개 이 제방의 수축에 대한 일은 삼남 지방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 다른 여러 도에서도 똑같이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경기와 관동·관서·관북 지방은 사정이 각각 조금씩 다르니 이 복계(覆啓)한 내용을 간추려서 알려야 하겠습니다”하니, 윤허하였다.
유동범(柳東範)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은 단지 영남지방 일대에서 보고들은 것만을 가지고 진달드리겠습니다. 대체로 농사에 재앙을 끼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뭄이 가장 큰 재앙이 되며, 농사에 중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소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환곡을 나눠주는 것이 균등치않아서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생업을 잃고, 첨정(簽丁)이 많이 숨어있어서 잔약한 농민들이 견디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 일군 토지에 대해 세금을 정하여서 개간하는 면적이 넓지못합니다.
벼는 습한 땅에 맞고 기장은 마른 땅에 맞으며, 목화는 햇빛을 좋아하고 삼은 비를 좋아한다는 등의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농사꾼들이 잘 알고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요체가 되는 것이 여섯 가지가 있는데, 제언과 못을 깊게 파내는 것, 물을 절도있게 쓰는 것, 가축을 번식시키는 것, 환곡을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것, 누락된 장정을 찾아내어 신역을 부담시키는 것, 새로 개간한 밭에는 세금을 거두지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근년에 들어서 해마다 가뭄이 들고 있는데, 사람들은 하늘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신은 사람들이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여름에는 반드시 비가 내리나 때때로 가물 때도 있으며, 겨울에는 반드시 눈이 내리나 때때로 가물 때도 있으며, 또한 겨울에 이미 눈이 내렸는데 봄에 또 비가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눈이 녹은 물과 비가 고인 물을 한 국자도 낭비하지않고 가는 물줄기까지 모두 가두어 둔다면, 겨울과 봄 5, 6개월동안에 받은 물로 여름 3개월간의 가뭄을 막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제언과 못은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었는데, 깊기때문에 물을 가둔 것이 많았고, 많았기 때문에 가뭄을 막기에 넉넉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않아 뚝을 쌓은 것이 점점 깍여 흘러든 모래가 쌓인 것이 몇 천섬이나 되는데도 10년동안에 한 번도 쳐내지못하고 있습니다.
공검지(恭儉池)는 예로부터 아무리 흉년이 든 해라도 마르는 것을 보지못하였는데, 지금은 가문 지 몇 달도 안되어서 물이 고갈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단지 바깥만 수축하고 안을 파내지 않은 탓입니다. 안을 파내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어떤 제언의 물을 받아쓰는 백성들의 힘이 넉넉하지 못할 경우에는 관가에서 다른 제언의 물을 받아쓰는 백성들을 조발하여 힘을 합하여 함께 쳐내게 해야 합니다.
이 제언을 쳐낸 다음에는 다른 제언을 쳐내며, 해마다 반드시 한 차례씩 쳐내되 깊게 파내도록 하며 파낸 흙으로는 그 제방을 더 쌓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제언이 어찌 깊어지지 않겠으며,
물이 어찌 많아지지 않겠으며, 가뭄이 어찌 재앙이 되겠습니까?
이른바 제언과 못을 깊이 쳐낸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체로 백성들은 생각이 멀리까지 미치지 못하여 가뭄이 들었을 때에 한 국자의 물도 얻지못하다가도 비가 조금 내리기만하면 아끼지않으면서 말하기를‘이미 땅이 젖었는데 물을 가두어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합니다.
무릇 논에서 이미 수확을 한 뒤에도 물이 남아있을 경우에는 봄에 미쳐 갈아엎기에 급급하므로 차례차례 물을 뽑아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언을 쌓았을 경우에는 참으로 터진 곳을 수리하여 물을 가두어 두어야만 합니다.
여름철에 모내기할 때를 당하여서는 하룻 동안만 물을 대면 4, 5일간의 가뭄을 견뎌내기에 충분하니, 아침에 물꼬를 트고 저녁에 막고 다시 4, 5일이 되기를 기다려서 물꼬를 틉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야지 한결같이 모두 쏟아버려서 이곳에는 물이 남아돌고 저곳에는 남는 물이 없게해서는 안됩니다.
이른바 물을 씀에 있어서 절도가 있게 한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무릇 농사짓는데 있어서는 깊게 가는 것이 중요한데, 깊게가는 것은 소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못하게 하는 법이 법전에 실려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들 가운데에는 소가 없는 탓에 밭갈이를 못하는 자가 10에 5, 6은 됩니다. 그리고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는 반드시 소가 있는 자를 먼저 장부에 올려 그로 하여금 소를 팔아서 곡식을 납부하도록 독촉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거듭 밝힌다음 한 통(統)내에서 재물을 합하여 소를 마련하게 하고, 3, 4년에 한 차례씩 고치는 것을 허락해주며, 또 환곡을 받아들일 때 소를 팔아서 곡식을 납부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장차 사람마다 모두 소를 소유하여서 모두들 깊게 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가축을 번식시켜야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물이 풍족하고 소가 있는데도 오히려 농사짓지못하는 것은 농사철 동안의 양식이 없어서입니다.
환곡은 본디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고르게 먹게 하기 위한 것으로, 봄에 고르게 받아가게 하므로 가을에 거두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자 백성은 하나도 환곡을 받지않고 있으니, 가난한 백성이 치우치게 많이 받게 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치우치게 받아먹으면 곤궁하게 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하며, 곤궁하게 되면 농사를 망치는 것 역시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비단 호별(戶別)로 내주는 환곡뿐만 아니라 전결(田結)에 따른 환곡도 있는데, 가난한 자는 전결이 없으니 이치상 당연히 환곡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간혹 양호(養戶)를 하는 간사한 백성이 많이 있는바, 가난한 백성에게 전결에 따른 환곡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받아들이기를 일시 중지한 묵은 환곡이 있을 경우 비록 한 해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여러해동안 쌓인 환곡을 갚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양호(養戶)를 하거나 부자를 빼어놓는 폐습을 통렬히 혁파한다면 가난한 백성들의 환곡이 줄어들 것이며, 이웃집에서 징수하거나 소를 팔아내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른바 가난한 자와 부자에게 환곡을 고르게 나누어 준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예전에는 군포(軍布)가 2필이던 것이 지금은 1필로 되었으니 백성들이 더욱 넉넉해져야 마땅한데 도리어 더욱 가난해진 것은 어째서입니까?
누락된 군정(軍丁)을 찾아내지 못해서입니다. 파총(把摠)이나 초관(哨官)들은 모두 자기 일가를 보호하고 있고 풍헌(風憲)이나 약장(約長)들 역시 일가 전체를 비호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수령들을 엄하게 신칙해서 이른바 파총이나 초관, 풍헌, 약장 같은 자들에 대해서 본인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역에 충당시키게 하고, 그 나머지 숨겨둔 자들을 엄명하게 조사해 찾아내도록 한다면 군정이 전보다 열 배는 많아지고 양정(良丁)과 부유한 자들도 모두 다 편호(編戶)의 역에 충당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른바 누락된 군정을 찾아낸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체로 풀이 없는 목장터나 버려진 빈터가운데 개간할 만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토지가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감히 개간하여 농사짓지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개간하자마자 곧바로 세금을 매기는데, 새로 개간한 땅의 소출이 혹 세금을 내기에도 부족한 경우마저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어찌 경작하려고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버려진 땅을 개간한 것에 대해서는 10년동안을 기한으로 세금을 물리지않고 10년후에라도 절대로 높은 등급으로 세금을 매기지않는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경작하기를 원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른바 세금을 매기지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는 영남사람으로서 농서(農書)를 구한다는 교서를 보고서 전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진달한 것이 모두 근거할 만한 점이 있는바,
인재는 거리가 멀고 가까움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더욱더 알 수 있겠다. 몹시 가상하다.
이른바‘농사에 재앙이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가뭄의 재앙이 가장 크며, 농사에 중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소가 가장 중요하다.
가난한 농사꾼은 환곡때문에 생업을 잃고 잔약한 농부는 첨정(簽丁)때문에 지탱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는 제언과 못의 깊이가 헤아릴 수조차 없이 깊어서 물고기나 용이 숨어 살고 배가 떠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공검지와 같이 큰 제언도 가뭄이 들면 그 즉시 말라버려서 한번 흘러가 버리면 그만인 물과 같으니 물을 씀에 절도가 없다. 풀이 없는 목장이나 내버려진 밭들을 백성들이 감히 개간하지 못하며 이익을 보기도 전에 피해가 먼저 미친다’고 한 것등은
너의 말이 옳다.
사람마다 각자 힘을 다해 부지런히 농사지으면서 천시(天時)를 인하여 지리(地利)를 일으킨다면 재해가 유행할지라도 어찌 식량이 부족한 지경에야 이르겠는가?
사람의 노력을 대신하고 사람의 노동력을 돕는 것으로 있으면 땅이 개간되고 없으면 땅이 묵는바, 소 한 마리의 힘은 백 명의 인력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소의 도살을 금하는 법이 사람을 죽인 살인죄에 비해 두 등급만 감하도록 법전에 실려 있는데, 근래에 대신의 말로 인하여 금령을 거듭 신칙하였다.
환곡과 첨정에 대한 폐단 및 물길을 소통시키고 개간을 권장하는 일에 대해서는 묘당에 회부하여 다른 사람들이 올린 상소를 참조해 보고 좋은 쪽으로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하였다.
복태진(卜台鎭)의 상소에 아뢰기를,
“농삿일에 있어서 급선무는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며, 수리의 공효는 제언을 쌓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고처사 유형원(柳馨遠)이 지은《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어보니, 거기에‘부안(扶安)의 눌제(訥堤), 임피(臨陂)의 벽골제(碧骨堤),
만경(萬頃)의 황등제(黃藤堤)는 소위 호남지방의 3대 제언이다.
처음에 그 제언을 쌓을 때에는 온 나라의 힘을 다 들여서 완성시켰는데 중간에 훼손되자 내버려두었다.
지금 불과 몇 고을의 힘만 동원하여 예전처럼 수선해 놓으면 노령(蘆嶺) 이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이며 호남 지방의 연해고을이 중국의 소주(蘇州)나 항주(杭州)처럼 살기좋은 곳이 될 것이다’하였습니다.
근세에 국가를 경륜할 만한 선비로는 유형원을 으뜸으로 꼽는데 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 세 제언의 이익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조정의 신하가운데 이 분야에 능숙한 자를 잘 가려뽑아 봄이 되기를 기다려 공사를 시작하게 하되, 굶주리는 백성을 정밀히 뽑아 그들을 부역시키고 관가에서 먹을 것을 대주어, 보리가 익을 때까지 그렇게하소서.
그러면 이 제언이 완성되자마자 백성들의 먹을 것이 넉넉해질 것입니다.
담배와 차의 재배로 곡식의 생산이 줄어드는 피해가 몹시 심합니다.
신은, 원장(元帳)에 등재되어 있는 토지에는 차를 심는 것을 허락하지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산을 깎고 숲을 불사르는 버릇을 금지시켜야 하니, 무익한 작물을 지어 유익한 것을 해치지못하게 하는 것으로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술과 소와 소나무에 대한 금령은 실로 국가의 금석과 같은 법전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술에 대한 금령이 몹시 해이해졌습니다.
이에 술에 빠져 화를 부르며 곡식을 낭비하는 해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사에 쓰는 것과 손님을 접대하는데 쓰는 술까지 모두 금지시킬 수는 없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사사로이 술을 빚는 것은 금하지말고 술을 매매하는 것만 금지시킨다면, 백성들의 식량에 도움을 주는 것이 결단코 적지않을 것입니다. 소에 대한 금령은 아마도 일률적으로 정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수레를 뒤집어엎는 사나운 소나 늙어서 쓸모없는 소는 처리할 방도가 없어서 가두어둔 채 여물만 먹입니다.
그리고 1백일동안 수고한 뒤 하루를 즐기는 날이 바로 설날로, 사람들이 모두들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친구들이 모여 잔치하면서 마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은,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영은 엄하게 해야만 하나,
설날에 한 차례 도살하는 것은 특별히 너그럽게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네 부류의 백성들 가운데에는 농사꾼이 몹시 적으며, 관리들이 농사꾼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주 심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관리의 정원수를 정하여서 큰 고을은 40, 50명을 넘지 않게 하고 작은 고을도 반 정도 줄인 다음 그 나머지 관리들은 모두 돌아가서 농사짓게 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팔도를 통틀어 계산하면 토지를 개간할 수십만 명의 백성을 더 얻게 될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3일 동안 정무를 본 뒤끝에 무언가 목에 걸려있는 듯한 것은, 호서의 너와 호남에 사는 장현경(張顯慶)을 등용하려다가 번거롭게 특별히 제수하는 것이 혹 너무 서두르는 듯하여 제수하지 못해서이다.
너와 장현경은 모두 여러해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었는데, 너는 다시 등용된 뒤 임기가 차서 자급이 올라갔으나 아직 실직(實職)에 임명되지 못하였고, 장현경은 임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내년이면 70이 되는데도 아직도 당하관자리에 있다.
이번에 너의 상소를 보건대 경륜(經綸)의 계책을 성대히 진달하였는바,
몹시 가상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하였다.
정시원(鄭始元)의 상소에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기름진 들판이 수천리나 되는데 그 가운데에는 간혹 공한지로 내버려둔 것이 많습니다.
이는 바로 물을 끌어댈 방도가 없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통(筒)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부터 지형에 따라 흘러내리는 것이 물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논을 만든 곳이 물 아래쪽에 있더라도 그 사이에 구릉으로 가로막혀 있거나 깊은 골짜기가 놓여 있으면 끌어오는 물길이 중간에서 끊어지고 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기름진 들판이 있더라도 버려두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인 것입니다.
신이 말한 통을 설치하는 법은, 질그릇 통을 굽되 속은 통하게 하고 밖은 둥글게 만들어 상류에서부터 고기비늘처럼 차례로 이어 땅 속에 묻은 다음 통 속으로 물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약 시내나 골짜기를 만나면 지형에 따라서 물 밑으로 통을 묻어서 낮은 곳을 넘어가게 하며, 높은 언덕이 가로막혀 있을 경우에는 지세에 따라서 언덕가에 통을 세워 높은 곳을 넘어가게 합니다.
이것은 딴 이치가 아닙니다. 원류(源流)가 높은 곳으로부터 흘러 통 속으로 들어가면 물이 통속에 가득 차서 끊임없이 흐르기때문에 높은 곳을 올라가 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물을 끌어댈 경우 높거나 낮거나 멀거나 가깝거나를 따질 것 없이 물을 대어 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제언과 보를 만들어 얻는 이익뿐이겠습니까?”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이미 통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특별한 방법이 있어 옛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방법을 개발하였다고 상소에서 분명히 말하였다.
그리고 이어 그 방법을 말하면서 질그릇 통을 굽되 안은 텅비어 통하게 하고 밖은 둥글게 만들며, 골짜기를 만날 경우에는 통을 파묻어 낮은 곳을 뛰어넘고 언덕을 만나면 통을 세워서 높은 곳을 넘어가게 한다고 하였다.
그것에 대해서는 시험해 보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니, 즉시 호조와 선혜청의 당상관들로 하여금 상소를 가져다가 따져본 뒤 초기(草記)를 올리게 하겠다”하였는데,
호조 판서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신과 선혜청 당상 정민시(鄭民始)가 정시원을 불러다가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은 물의 본성이 그런 것이다.
만약 기계를 설치하여 물을 쳐서 올라가게 한다면, 이는 물의 본성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잠시는 그렇게 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은 불가능하며, 작은 양은 할 수 있으나 많은 양은 할 수가 없다.
지금 진달한바, 통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것도 역시 물을 쳐서 올라가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사실은 상류의 물을 받아들이는 곳이 하류의 물이 흘러나오는 곳보다 높아서, 비록 수백보나 되는 먼 거리를 구부러지면서 돌고 높이 올라가기도 하고 낮게 내려가기도 하나, 결국에는 물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물이 흘러드는 통 입구에 비하면 얼마쯤은 낮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물의 성질이 끝내는 반드시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기 때문이다. 일찍이 시골에 있으면서 대나무로 통을 만들어 시험해 보았으므로 그것이 의심할 바 없음을 분명히 안다.
만약 진흙을 구워 통을 만들어 서로 맞붙는 부분의 양쪽 아가리를 맞물리게 하고 바깥쪽에다 작은 고리를 끼운 다음 그 틈을 유회(油灰)로 채우면 물이 새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그의 말대로 대나무 통을 가지고 시험해보았더니 여러 차례 돌려서 높였다 낮추었다하여 산(山)자 모양을 만들었는데도 과연 물을 끌어들이고 토해내기를 법과 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글 등을 보니 두 쪽에 불과하였는데, 단지 이 법에 대해서만 논하고 다른 제도에 대해 언급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체로 예로부터 용골(龍骨)이나 옥형(玉衡)과 같은 물에 관한 기구들은 모두 다 땅에서 물을 끌어올려 충격을 주어 높이 올려보내는 것으로, 물의 본성에 따라 자연적으로 흐르게 한 것이 아니기때문에 오랫동안 시행하지못하였고 폐단이 없지 않았습니다.
농서(農書)에 들어있는 통을 연결하여 물을 끌어대는 법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이를 미루어 크게 한 것일 뿐으로, 물을 끌어대는 다른 기구에 비하여 쉽게 시행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여름에는 장맛비에 모래가 밀려들어 속이 막히기도 하고, 겨울에는 물이 혹 미처 다 빠지기 전에 안에서 얼어터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봄 가을로 보수하여야 하는 것은 형세상 뻔한 일입니다.
비록 진흙을 구워 만든다 하더라도, 수백보나 혹은 몇리나 되는 먼 거리를 끌어올 경우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야 여사(餘事)이고 구워 만든 것이 흠이 없어서 쓰기에 알맞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말에는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그는 남쪽 지방에 사는 사람이니 지형이나 수세(水勢)로 보아 설치할 만한 곳을 아마도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지방관에게 알려 그의 말에 의거해서 알맞은 곳을 골라 설치하여 시행해보게 한 다음 성공하기를 기다려 여러 도에 반포하소서”하니, 따랐다.
이우형(李宇炯)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은 수리(水利)에 대한 설을 약간 강구해 본 바가 있어서 일찍이 수차 바퀴를 만들어서 물을 대는 논의를 진달하여 한편으로는 호조에서 만들게 하고 한편으로는 감사로 하여금 시험해 보게 하라는 비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공역은 방대하고 힘은 딸려서 지금까지 질질 끌어왔습니다.
그런데 신이 전에 상소를 올릴 때 미처 진달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를 막고 제언을 쌓는 법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보를 쌓는 자가 몹시 많으나 모두 그 방법을 제대로 몰라서 재력만 헛되이 낭비하고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해 보건대, 제언을 쌓는 데에도 역시 방법이 있습니다.
네모난 벽돌을 많이 굽되 기와보다는 조금 크게 하며 너비는 각각 몇 자 가량되게 구운 다음 이를 차례차례 쌓아 도랑을 만들되 아래로부터 점차 위로 쌓아 올라갑니다. 그런 다음 물을 가두고자 할 때는 닫아서 막고 물을 빼려고 할 때에는 열어서 빼내면 되니 돌을 쌓고 나무로 가로막는 법에 비해서 훨씬 편리하며 쌓은 것도 자연 견고합니다.
신이 일찍이 《농정전서(農政全書)》에서 그 도보(圖譜)를 상고하여 수책(水柵)만드는 방법을 알아낸 다음에야 비로소 보를 쌓는 묘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평평한 습지가 개울가에 있어서 못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만한 곳이 있을 경우 5리나 10리쯤되는 상류의 여울이 많은 곳에 가보아 돌이 서려있어서 보의 입구를 만들기에 합당한 곳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말뚝을 박되 간가(間架)를 반드시 긴 복도와 같이 만들어서 개울의 너비를 가로질러 쭉 뻗게 만듭니다.
그런 다음 목책(木柵)의 아래 위 양쪽 곁에다가 나무를 엮어 세워두고 큰 돌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뒤 큰 돌이나 작은 돌을 가리지 않고 뒤섞어서 쌓되, 나무를 엮은 곳까지 쌓아 올립니다.
그 목책이 일단 완성되면 돌산이 개울을 가로질러 뻗은 것 같아서 물을 아주 단단히 막으면서도 사용하는 나무는 매우 적게 들고 돌을 쌓은 것이 실로 많으면, 그 사이에 모래와 진흙이 엉겨 붙어서 장마가 지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만전의 계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래가 많은 개울일 경우에는 짚이나 갈대 같은 것으로 목책의 주위를 둘러막고 그 안에다 흙과 돌을 채워 넣어 물이 새지않게 하면 역시 쌓은 것이 견고해집니다.
이렇게 한 뒤에도 언덕이 개울보다 한두 장쯤 높고 반드시 축과 바퀴가 있어야만 물을 가두었다가 관개할 수 있습니다.
수차(水車)의 제도가 몹시 많으나 오직 용미(龍尾)가 가장 좋습니다.
용미는 둥근 나무로 축을 만들되 아래와 위가 고르게 되게 하고, 도랑[溝]은 비스듬히 나선형(螺旋形)으로 만들되 판자를 엮어 칸을 막고 얇은 널판으로 둘러싼 다음 석회나 역청(瀝靑)으로 발라 틈이 없게 합니다.
또 철추(鐵樞)를 만들되 양쪽 끝이 직각삼각형 모양이 되게 만들어 세우고 곳곳마다 톱니가 8개가 되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 축(軸)을 눕히고 바퀴를 세운 뒤 그 톱니가 맞물리게 하고, 그 곁에 있는 한 바퀴에 물을 받는 날개[箑]를 붙이면 세 개의 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서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물이 흐르는 힘으로 인해 저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물이 판자로 만든 도랑을 따라 위로 솟아오르게 되는바, 그 제도가 다른 수차에 비해 더욱 묘합니다.
이 밖에도 고전통차(高轉筒車)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 역시 흐르는 물에서 쓸 수 있습니다.
강언덕의 높이를 살펴보고 큰 바퀴를 만들어 물 흐름에 맞추어 설치합니다. 그런 다음 그 바퀴테[輞]에다 판자를 가로로 매어 물살에 부딪혀서 돌아가게 하고, 거기다 물통을 세로로 매달아 물을 퍼가지고 올라가서 쏟아붓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효과가 용미보다 못지않으나 물을 퍼올리는 것이 약간 적습니다.
못이나 우물과 같이 땅이 약간 깊은 곳에서는 항승차(恒升車)로 물을 퍼 올릴 수가 있습니다.
물통의 길이를 언덕과 나란히 되게 하고 하단(下端)을 얇은 판자로 막고 모나고 둥글고에 따라 구멍을 뚫은 다음, 쇠를 벼리어서 혓바닥을 만들어 여닫는 기구를 만들고, 판자에다는 별도로 긴 장대를 박아 오르내리게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마치 풀무에서 바람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물이 통속으로부터 끊임없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옥형(玉衡)의 반호(盤壺)나 쌍통(雙筒) 및 홍흡법(虹吸法)과 같은 것은 모두 구리나 주석으로 만들어야 하기때문에, 신이 시험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상이 수차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삼남 지방과 경기에는 수리(水利) 공사를 일으킬 만한 곳이 마을마다 있으니, 새로 쌓거나 예전에 있던 곳을 수리하여 보를 만들거나 제언을 쌓으면 그에 따른 이익이 몹시 클 것입니다.
그러나 드넓은 평야 지대로 큰강을 끼고 있어서 보를 막을 수 없는 곳에서는 수차를 이용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수리(水利)에 대하여서 부지런히 힘쓰고 있다는 것을 익히 듣고는 너의 성의가 가상해서 한번 만들어 시험해보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시험해보지 않았다고 하니, 근래의 일이 모두 다 이 모양이다. 너의 상소를 묘당에 내려보내어서 이 뒤에 모여서 의논할 때에 너를 불러 자세히 물어본 다음 반드시 한 차례 시험해보게 하겠다”하였다.
염덕우(廉德隅)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잘 가르치는 것이 몸소 실천하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대왕(先大王)께서 이미 시행한 규례를 준행하여 친경(親耕)과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는 국가에서 농가를 장려하는 큰 정사이므로 장려하지않더라도 저절로 장려될 것입니다.
농정에 있어서는 첫째는 백성들을 소요시키지 않고 농사철을 빼앗지않는 것이며, 둘째는 농사지을 종자(種子)를 보조해 주고 농사지을 동안 먹을 양식을 대주는 것이며, 셋째는 미리 씨를 뿌리면 잘 자라고 부지런하면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이며, 넷째는 전정(田政)을 균등히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의(義)로 가르치고 형(刑)으로 징계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냐하면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으로서 근본이 흔들리면 나라가 존재하기 어려우며, 농사짓는 데에는 철이 있는데 철을 놓치면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고 농사지을 종자를 보조해 주고 농사지을 동안 먹을 식량을 대주라고 한 것은, 맹자가 말한 ‘봄에는 밭갈이하는 것을 살펴보아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가을에는 가을걷이하는 것을 살펴보아 넉넉하지 못한 것을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불쌍한 우리 농민들은 한 해 동안 내내 고생하였는데 가을에 추수할 때가 되어서는 모조리 관가로 실어가 버립니다.
이에 실곡(實穀)은 모두 감영이나 고을로 들어가고 모곡(耗穀)은 간사한 아전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버리며 농민들이 받아먹는 환곡은 피곡(皮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흉년이 들게 되면 혹 탕감해 주거나 기한을 연기해 주거나 다른 곡식으로 대신 바치는 것을 허락해 주기도 하지만 탐욕스럽고 교활한 무리들이 공문(公文)을 숨기고는 마구 매질을 해대며 독촉해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 토지가 없고 인족(隣族)이 없어서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 뒤에 이르러서야 관문(關文)을 뜯어봅니다.
이에 이른바 탕감해 주고 연기시켜 준 실제 혜택은 모두다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리는바, 이는 실로 농민들의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폐단이 북쪽 지방에 가장 심한 것은 다름아니라 계축년과 갑인년 이후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법을 혁파하였기 때문입니다.
미리 씨를 뿌리면 잘 자라고 부지런하면 수확할 것이 있다고 한 것은, 봄에 일찍 밭갈이를 하지않으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농민들이 어찌 일찍 서둘지 않겠습니까? 여름동안 도롱이를 입은 채 밭갈고 씨뿌리고 김매기를 하여 가을에 추수하는 것은, 《시경》 칠월편(七月篇)에서 말한 모든 것을 다 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정(田政) 역시 농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북도(北道)는 병오년에 양전(量田)한 뒤 무신년과 기유년 이후부터 물길이 변하였는데도 전세(田稅)는 한결같이 병오년의 양안(量案)에 따라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전세가 이와 같이 불균등한데 농정을 어떻게 장려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와 수령을 각별히 잘 가려뽑아 전정을 균등히 한 다음에야 농사에 수확을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토지를 개간해야 한다고 한 것은, 우리나라의 폐사군(廢四郡)을 오랫동안 내버려 둔 채 개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찍이 갑인년에 서쪽의 자성(慈城)과 북쪽의 후주(厚州) 두 진(鎭)의 지역을 백성들이 개간하도록 허용한다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후주는 진을 설치한 지 3년만에 민호(民戶)가 8백호로 불어났는데 나라의 금법에 구애되어 더이상 개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군(四郡) 지역을 개간하도록 허락하여 날마다 모여드는 백성들로 하여금 이곳에 들어가 농사짓게 한다면, 이는 실로 농사를 권장하는 하나의 큰 정사가 될 것입니다.
의로 가르치고 형벌로 징계한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이겠습니까?
토지를 개간하여 농사짓고 배불리 먹고 편안히 지내는데 의로 가르치지 않을 경우 백성들의 윤리 기강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쳤는데도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형벌로 다스린 다음에야
인륜이 밝아지고 왕법이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친정과 친잠은 바로 우리 열성조들께서 시행하던 전례(典禮)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돌아보건대 정사나 교화가 열성조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먼저 의식 절차에 관한 일에서부터 선대왕들이 하시던 바를 따라 하겠는가?
선대왕들의 뜻을 잘 받들어 이어가는 실제는 지난 축월(丑月)에 반포한 교서가 조금이라도 실제적인 효과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관북 지방에 아직까지 암행 어사를 차임해 보내지못하고 있는 것은 미처 겨를이 없어서가 아니다.
전에 이미 대신(臺臣)에게 내린 비답에서 말하였으니, 앞으로 형세를 살펴보고서 내려보내겠다. 이 외에 진달한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유의하겠다”하였다. 유종섭(劉宗燮)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다스리는 방도에 있어서는 책임을 전담시키지 않으면 일이 한결같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주관(周官)》사도(司徒)의 관직에 의거해서 권농사(勸農司)를 별도로 설립하고 토지를 균등히 하는 관리, 물을 다스리는 관리, 농기구를 담당하는 아전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각자 여러 고을과 마을들을 감독하면서 편리한 방법을 들어주고 품의한 뒤 시행하게 하고, 때때로 감사와 수령들의 근만(勤慢)과 허실을 살펴서 모두 논계하게 하소서.
그러면 방백과 수령들이 반드시 고무되는 바가 있어서 농삿일을 권장하는 데 힘쓸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농부들의 걱정은 전세가 균등치 못하고 물을 이용하기가 힘들며 농기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전세를 균등히 하고 수리(水利)를 일으키고 농기구를 제대로 갖추게 한다면 하늘과 땅, 사람의 때와 힘이 저절로 합치될 것인바,
또한 어찌 위에서 명령을 내려 일일이 신칙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전세(田稅)와 수공(水功)과 농기구 세 가지에 대하여 조목별로 진달한 너의 말이 몹시 이치에 맞다. 권농함에 있어서 마땅히 이를 주관하는 관서가 있어야 한다고 한 것도 너의 말이 맞다.
모두 묘당에서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하였다.
윤재양(尹在陽)의 상소에 아뢰기를,
“오늘날에 있어서 시급하게 변통해야 할 것이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병작(並作)하는 것을 고르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백징(白徵)을 견감해 주는 것이며, 셋째는 담배의 경작을 금지하는 것이며, 넷째는 백성들에게 버려진 땅을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양역(良役)을 충당시키는 것이며, 여섯째는 환곡법을 바로잡는 것이며, 일곱째는 아전들의 정원수를 줄이는 것이며, 여덟째는 과거의 폐단을 없애는 것입니다.
병작하는 것을 고르게 하는 것은 실로 토지가 없는 자에게 토지가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백징을 견감해 주는 것은, 논의 경우에는 당초에 씨를 뿌리지 못하였거나 모내기를 못한 땅에 대해 재결(災結)로 처리해 주는 규정이 있어서 특별히 세금을 내지 않도록 허락해 주는데, 밭의 경우에는 현재 묵었거나 전부터 묵어서 나무가 숲을 이룬 땅에 대해서도 모두 세금을 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에 현재 백성들은 모두 진전(陳田)을 조사하여 한 줌, 한 단이라도 백징하는 폐단이 없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담배의 경작을 금하는 것은,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백성들의 생활의 어려움이 더욱더 심해지고 있으니, 담배의 해로움이 이에 이르러 극심한바, 금지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백성들에게 버려진 땅을 경작하도록 허락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5군문(軍門)과 각 궁방(宮房), 충훈부(忠勳府), 세도가의 전지를 막론하고 경작할 만한 곳을 묵혀버린 곳이 많은데, 그 주위에 사는 백성들이 경작을 하면 본주인이 도로 빼앗아가버리므로 영원히 묵혀버린 채 경작하지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땅을 백성들로 하여금 경작하여 먹도록 허락한다면 백성들에게는 곡식을 생산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며,
국가에는 세금을 거두는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양역(良役)을 충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정이 부실한 폐단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는바, 입번(立番)을 면제받은 군관(軍官)과 시골에 있으면서 신역을 면제받은 자들을 일체 혁파한다면 죽은 사람의 번(番)을 채워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환곡법을 바로잡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환곡과 향미(餉米)를 모두 절반은 창고에 보관해 두고 절반은 나누어 주되, 경사(京司)에서 발매(發賣)하는 규례에 의거해서 봄에 작전(作錢)하고 이어 싯가에 준하는 범위 안에서 값을 낮추어 파는 것을 허락하며, 가을이 된 뒤 싯가에 따라서 그 돈을 가지고 햇곡식을 사들이며, 다음해 봄에는 작년 봄에 창고에 남겨두었던 나머지 절반을 발매하도록 합니다.
대체로 봄과 가을의 싯가가 싸고 비싼 차이는 있겠지만 값을 낮춘 가운데서 한 말당 반드시 3전(錢)의 우수리를 관가에서 취하고 그 나머지의 이익을 전부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합니다.
그럴 경우 관가에서는 독촉해 받아들이느라 수고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백성들은 이웃이나 친척들의 것까지 물어내는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전들의 정원을 줄이는 것은,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아전들로 인한 피해가 백성들에게 미치는 만큼 그 고을의 크기를 따져서 정원을 알맞게 조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과거의 폐단을 혁파하는 것은,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서울의 유생들에 대해서는 사학교수(四學敎授)가 오부(五部)의 거안(擧案)을 받고 각 문체별로 과거시험의 제목을 내어 시취(試取)한 다음, 합격자의 방(榜)을 성균관에 제출하면, 대사성(大司成)이 사학에서 합격한 사람들을 모아 앞에서 시험치른 후 예조에 합격자의 명단을 통보합니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유생들의 경우에는 각각 해당 고을에서 각 면에서 올린 단자(單子)를 받아 과제(科題)를 내어 뽑기를 한결같이 사학(四學)에서 하는 것과 같이 한 다음 각각 예조에 제출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고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를 치를 때 예조에 비치되어 있는 것과 대조하여 조사하면 영원히 억울함을 당하거나 요행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
“네가 농삿일에 대해 진달하면서 곁들여서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진달하였는 바, 몹시 가상하다.
병작(並作)을 고르게 하는 것은 정전제도(井田制度)나 한전제도(限田制度)를 제외하고는 가장 좋은 제도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기강이 확립된 다음에야 부차적인 항목이 시행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와 같이 재주와 식견이 뛰어났던 사람도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늘상 신중하게 처리하면서 하루아침에 즉시 고쳐야 된다고 말한 적이 일찍이 없었는바, 이 일 역시 그와 비슷한 일이다. 백징(白徵)을 견감하는 일은 너의 말이 참으로 옳다.
조금 풍년이 든 해를 기다려서 진전(陳田)을 조사하도록 하겠다.
담배의 경작을 금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금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껄끄러운 점이 있을 듯하다.
백성들에게 관가의 전지나 부자들의 전지로서 묵혀버린 곳을 경작해 먹도록 허락해 주는 일은, 그것은 전적으로 감사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양역(良役)을 어린이와 노인에게까지 지우는 것에 대한 폐단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번(番)을 면제하고 역(役)을 면제하는 것을 없애느냐 그대로 두느냐 하는 문제 역시 조정에서 다시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것은 여러 고을에서 제대로 잘 시행하고 있는가만 조사하면 되는 일이다. 환곡의 폐단에 있어서 반을 창고에 남겨두는 일은 바로 요즈음에 방도를 강구하고 있는 중이다.
크고 작은 고을의 아전들을 줄이는 일은, 일찍이 다른 사람의 상소로 인하여 묘당에서 여러 차례 복계(覆啓)하였었다.
과거의 폐단을 개혁하는 일은, 내가 처음 즉위하여서 물어본 일 가운데 한 가지 일인데, 지금까지 세월만 끌어온 것은, 시행할 만한 좋은 법이 없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법만 부질없이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향거(鄕擧)와 이선(里選) 및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孝悌] 농사에 힘쓰는 사람[力田]을 추천하는 등의 제도를 지금 시행하였다가 만에 하나라도 명목만 있고 실재가 없게 될 경우, 애당초 경솔하게 시행하지않는 편이 차라리 처음부터 잘 계획하는 체모에 합당할 것이다.
근년 들어 내가 수령을 반드시 삼사(三司)의 관원 중에서 뽑고 사람을 쓸 경우 반드시 수령들 가운데서 뽑아쓰는 것은 등용하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게 하고자 해서이다.
그러나 두루 물어본 다음에야 결정을 내릴 수 있겠다”하였다.
정석유(鄭錫猷)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은 먼저 우리나라의 지리(地利)와 전토(田土)와 농기구에 대하여 논한 다음 시기를 놓치지않는 방도와 살 곳을 잃지않는 방도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옥저(沃沮)는 산이 많고 바다를 끼고 있으며, 대방(帶方)은 골짜기가 깊고 냇물이 깊으며, 낙랑(樂浪)은 서북쪽은 산을 등지고 있고 동남쪽은 들판이 널려 있습니다. 삼남 지방은 물이 깊고 토질이 비옥하며, 해서와 경기 지방은 토질이 척박하고 산이 가파른데다가 바닷가에는 염분이 많고 바다 가까운 곳에는 모래와 돌이 많습니다.
신이 일찍이 집에 있으면서 궁리한 바가 있는데, 온 나라에서 두루 쓸 수 있는 것으로 마른 땅이나 습한 땅이나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쓰기에 알맞은 기구는 오로지 달구지[田車]뿐입니다.
대개 달구지를 쓰면 이로운 점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봄에는 거름 수레가 되는데, 수레 1대가 운반하는 양이 소 5마리에 싣는 것만큼이나 되니 한 사람이 수레 한 대를 쓰면 소 네 마리와 사람 네 사람을 줄이는 격으로 소와 사람의 노동력이 모두 여유가 있게 되는 바, 이것이 첫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농사가 한창 바쁠 때에는 밭에 거름주는 일이 더욱 급하여 한시라도 먼저 내면 소출이 배로 불어나고 한시라도 늦으면 수확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이때 만약 거름 수레를 쓰면 제때에 맞춰 일을 민첩하게 할 수 있는 바,
이것이 두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가을에는 부리는 수레[役車]가 되는데, 곡식은 한창 거두어들일 때 소가 있으면 노동력이 남게 되고 소가 없더라도 지게로 지고 다니는 수고가 없는바, 이것이 세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각 군현(郡縣)에서 환곡을 받아들일 때 눈이나 빙판으로 길이 막히게 되면 소발굽은 미끄러질까 겁나고 사람들의 어깨는 빠질듯 아프게 되는데,
이때 만약 부리는 수레[役車]를 이용하면 큰 수레는 멍에를 지워 끌고 작은 수레는 뒤에서 밀면서 갈 수 있는바, 이것이 네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그리고 소나 말의 병은 항상 어깨와 발에 나는데, 이는 짐은 무거운데 힘이 딸려서 그런 것입니다. 만약 수레를 쓰면 소나 말이 모두 병나지않을 것인바, 이것이 다섯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신이 듣건대, 조종조때 전화(錢貨)를 통용시키려고 하였지만 백성들이 좋아하지않자, 당시 고(故)상신 김육(金堉)이 역참(驛站)에서부터 시행하기를 청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역참에서부터 시행하기를 청한 것은, 역참은 사람들이 길을 가면서 모두 지나는 곳이며 익숙히 보고 들어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수레에 대한 제도도 역참에서부터 시행한다면 반드시 점차적으로 본받아서 백성들이 소요하지않을 것입니다.
대개 팔도의 공부(貢賦)를 운반하는 때에 으레 모두 말을 전세내어 운반하는데, 1천리를 운반하는 경우 2천전(錢)을 전세값으로 주는바, 짐 한바리를 운반하는 값이 거의 말 한 마리 값과 맞먹습니다.
만약 군현에서 운반하여야 하는 모든 짐바리들을 죄다 수레로 운반한다면 역참에서 말을 세놓는 자들도 앞으로 말 대신 수레를 세놓아 생업을 잃지 않을 것이며, 점차적으로 이를 서로 본받아서 온나라에 두루 퍼질 것입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에 있어서 급선무는 두 가지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 네 가지 이로운 것을 일으키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두 가지 해로운 것이냐하면 쓸데없는 관리와 쓸데없는 군사가 그것입니다. 무엇이 네가지 이로운 것이냐하면 어진 인재를 가려뽑고, 전제(田制)를 고르게 하며, 노는 토지를 개간하고 환곡법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그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환곡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미 책문(策問) 제목으로 내어 물었으니 어찌 혹시라도 쓸데없는 빈말을 하였겠는가?
수십 년 전에 감사나 병사가 녹봉을 출연(出捐)하거나 방역(防役)하는 등과 같은 자질구레한 명색(名色)에 대해서는 거의 다 그 문서를 없애고 빚을 받는 것을 중지시켰지만 필경에는 이자로 받아들인 곡식에다 손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서울에 있는 관청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원도의 삼(蔘)이니, 노비의 신공(身貢)이니 하는 것들은 그 가운데 특히 큰 것이고 그 나머지는 일일이 거론할 수 조차 없다.
무릇 법이란 것은 그릇을 땅에 놓아둔 것과 같아서 오로지 어떻게 쓰는가 하는데 달려있는 것이다.
환곡이 백성들에게 있어서 절박한 폐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공물을 줄여서 다른 물품으로 대체해 주고 은택을 내려 부담을 덜어주어야 할 것이 수십 만 가지도 넘는다.
그런데 만약 그에 대해서는 양쪽이 다 편리한 방도를 별도로 강구하지 않고서 지시만 내리면서 어쩌고저쩌고 한다면 어찌 옳겠는가? 첨부하여 올린 견해에 대해서는 묘당에 내려 상세하게 살펴본 뒤 조처하게 하겠다”하였다.
정도성(鄭道星)의 상소에 아뢰기를,
“대체적으로 볍씨는 강한 종자도 있고 약한 종자도 있는데, 약한 종자는 가뭄을 당하면 잘 자라지 못하고 쉽게 말라죽으며, 강한 종자는 홍수나 가뭄에도 피해를 입지않습니다.
대개 볍씨에는 강한 종자가 세 가지가 있는데, 천상도(天上稻), 두어라산도(斗於羅山稻), 순창도(淳昌稻)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볍씨는 그 성질이 아주 강하기때문에 논에는 모를 붓고 밭에는 씨를 뿌리는데, 2월에 땅을 갈고 3월에 씨를 뿌리면 늦모를 낼 때쯤 이 세 종류의 벼는 줄기가 이미 절반정도 성장하며, 결실 역시 빨라서 비록 가뭄이나 홍수를 만나더라도 조금도 손상되지않습니다.
삼남 지방에는 논이 많고 나머지 다섯 도에는 밭이 많으니 이 세 가지 벼 종자를 심는 법을 시행한다면 삼남지방에는 그 이익이 더욱 클 것입니다.
춘궁기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종자곡을 마련하기가 어려워 걸핏하면 농사철을 놓치고 마니 특별히 환곡을 꿔주어 그들로 하여금 농사철을 놓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관가에서 시골 백성들에게 지시를 내려 농토를 일구게 하면 들판이 묵고 황폐해지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 가운데 게을러서 농사짓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놀고먹는 백성들을 찾아내게 한다면 백성들이 모두 농사에 힘쓸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올린 글이 10여줄에 불과하지만 세가지 벼종자를 심는 법과 소의 도살을 금지하라고 진달한 것은 모두가 실용(實用)에 힘쓴 적당한 말들이다. 유사당상(有司堂上)이 이미 전라감사를 지낸 자인만큼 그를 불러다가 의견을 묻는 한편, 너의 말대로 시험해볼 만한 남쪽 고을에서 시험해볼 것이니, 뒷날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다”하고,
전교하기를,
“물어보는 것은 실제적인 것에 힘쓰기 위한 것이니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는 것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근래에 올라온 여러 글들 가운데서 실속이 있는 것은 이 사람의 글에서 처음으로 보겠다.
좌상이 불러보고 등용하기에 합당할 것같으면 초기(草記)를 올리라”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정도성을 불러다가 내력을 물어보니, 살림살이가 웬만큼 넉넉하여 진구곡(賑救穀)을 내고 직첩(職帖)을 받는 은혜를 입었으며, 글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남에게 말을 해주고 대신 쓰게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착실하고 말 역시 믿을 만하나 등용하기에 합당한지의 여부는 감히 분명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김하련(金夏璉)의 상소에 아뢰기를,
“수차(水車)를 만드는 재목으로는 참나무와 박달나무만을 쓰는데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이를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자성(慈城)·우예(虞芮)·여연(閭延)·무창(茂昌)등 사군에는 아름드리가 넘는 나무로서 수차 바퀴나 배의 돛대, 집의 대들보감으로 쓰기에 충분한 좋은 재목이 산과 들에 가득 차있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백성으로서 그곳에 가서 수차와 배의 재목을 베어오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공문을 내주어 각자 원하는 바에 따라 수차를 만들거나 배, 뗏목을 만들게 한 다음, 자성 부근에서부터 강물을 타고 내려오게 하면,
용천(龍川) 바다 어귀까지 3, 4일정도면 도착하고, 용천서부터 경강(京江)이나 삼남지방까지는 열흘을 넘지않아서 도착할 수 있습니다.
수차를 만드는 법은 전찰방 이우형(李宇烱)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우형을 특별히 자성에 보내어 수차를 많이 만들게 한 뒤 그것을 바닷가의 고을마다 1대씩 나누어주어 각 고을의 농민들이 이를 본받게 하면 몇 해 안가서 수차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법이 온 나라에 두루 퍼질 것이고 어민들이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논의해본 뒤 품의하여 조처해서
농정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하였다.
이경오(李敬五)의 상소에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논밭이 많이 황폐해지고 베틀마저 텅비어 있는데, 이것은 농서(農書)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마땅히 먼저 손을 써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한 사람이 농사짓지않으면 천하사람들이 굶주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아전이나 하인들의 무리 속으로 함부로 의탁하고 저자거리의 거간꾼 무리를 쫓아다니며, 이보다 못한 무리들은 편한 길을 따라 장사를 배우거나 기회를 틈타 도적질을 하면서 모두들 놀고 먹으려고만 합니다.
이에 떠돌아다니는 자가 꼬리를 물고 호구수가 날로 줄어들어서 팔도의 백성들 가운데 농사를 짓지않는 자가 거의 절반이나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현재 농정에 있어서의 급선무는 놀고먹는 백성들을 모조리 몰아다 농토로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야 농서가 필요할 것으로 여겨집니다”하고,
이어 본부(本府)의 삼(蔘)을 캐는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이를 중지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이른바 백성들로 하여금 고향에서 농사짓게 한 뒤에야 농서가 필요한 것이라고 한 것은, 간략하면서도 할 말을 다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의 잘못된 습속은 오로지 조그마한 이끗만 노릴 줄 아는 것인데,
이를 억제하지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어떻게 근본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먼저 네가 살고있는 고을의 노는 땅부터 시작하여 몸소 전준(田畯)이 되어 오늘 한 모퉁이를 개간하고 내일 한 고랑을 개간하여 날마다 개간하는 성과가 나타나게 한다면 너를 알아준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에게 하유하여 앞으로 있을 여름과 겨울의 근무평정때 해당 수령의 실적을 항목 아래에다가 주를 달아 기록하게 하겠다.
이른바‘삼캐는 것을 권장하는 규정이 한갓 삼상(蔘商)들이 이끗을 노리는 길만 열어놓았고 온 도의 농사를 방해하는 해독을 빚어낼 뿐이다’고 한 것은, 사리가 분명하다. 이미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어찌 그 폐단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감사에게 하유하여 이에 대해 속히 장계를 올리게 하겠다”하였다.
김만(金萬)의 상소에 아뢰기를,
“천시(天時)를 따르고 지리(地利)를 이용하며 인사(人事)를 닦는 것이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 본령(本領)이며, 수리 사업을 일으키고 토질에 알맞은 것을 살피며 농기구를 이용하는 것이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급선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남쪽과 북쪽 지방에 잘 맞느냐 안맞느냐하는 것과 산골짜기와 들판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느냐하는 것 및 모를 붓고 씨를 심는 것의 이해(利害), 담배와 차를 심고 화전(火田)을 일구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 등은 작은 절목에 해당되는 일들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남북이 수천리나 되니 풍토와 기후가 같지않고 토질이 현저히 다른 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모를 붓는 것에 대한 득실 여부는 가장 신중하게 헤아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이 풍부한 경우에는 물씨뿌리기를 하는 것이 좋고 토질이 부드러울 경우에는 마른씨뿌리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습하여도 비옥하지않고 가물어도 마르지않는 곳이나 혹은 흙덩이가 단단하여 쟁기가 들어가지않아 물을 대면 갈 수 있고 마른 채로 갈면 갈 수가 없는 땅이 곳곳마다 반반씩 뒤섞여있으니, 모를 붓는 것은 농사에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토질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것을 금지하는 경우에는 법으로 금하여야 하겠지만 신은 감히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화전을 일구는 이익 역시 큽니다.
명산(名山)을 벗겨내는 것이 과연 염려되기는 하지만 천백년 동안 전해 내려온 폐단을 하루아침에 금지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통렬히 금지해야 할 것은 담배와 차를 재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재배하는 것을 금하자면 반드시 먼저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는 것을 금지해야 합니다.
환곡에서 발생하는 허다한 폐단은 그 근본 원인이 뒤섞어 보관해두는데 있으니, 그 폐단을 구제하자면 면(面)별로 창고를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각 고을에 그 전에 있던 창고를 그대로 두고 그 안에다 그 고을의 면수에 따라서 벽을 쌓아 칸을 막되, 칸의 크기는 면의 대소에 따라 적당히 하며, 해당 면에서 바친 곡식은 다른 칸으로 옮겨 쌓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벽에다가는 해당 면의 이름을 써서 구별합니다.
그리고 곡식을 바칠 때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창고에 바치게 하고 곡식을 내줄 때에도 그와 같이 하여 창고문에서 지급해 주도록 합니다.
그리고 위에다 자물쇠와 열쇠를 설치하여 아무때나 함부로 여닫지 못하게 합니다. 또 각영(各營)의 모곡(耗穀)과 관청에서 내려주는 잡역곡(雜役穀)은 수시로 출납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별도로 창고 하나를 세웁니다.
이상과 같이 할 경우 백성들이 관가의 창고를 보기를 개인의 창고 같이 보아 오로지 곡식이 깨끗하지 못할까만 걱정할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상소에서 진달한 바는 갑자기 구언 전지에 응하여 올린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바, 너의 정성이 몹시 가상하다. 묘당에서 논의해본 다음 방안을 첨부하여 아뢰게 하겠다”하였다.
비변사가 복주(覆奏)하기를,
“모내기는 토질에 따라서 하고 화전을 일구는 것은 금할 수 없으며 담배와 차의 경작을 금하는 것과 제언을 수리하는 등의 일은 모두가 이미 전후로 올린 복계(覆啓)에서 이미 진달드린 것입니다.
환곡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있던 창고에다 면의 숫자에 따라 벽을 쌓아 칸을 막는 일은, 관고(官庫)에다 사창(社倉)의 뜻을 붙여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개인의 물품처럼 여겨 서로 자신을 위해 모의하게 하자는 것이니, 지금 논한 것이 채택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을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면수는 많고 적음이 있는 만큼 일률적으로 시행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언양(彦陽) 한 고을에서부터 백성들의 의견을 널리 물어보고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히지 않으면서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시험해본 뒤에 과연 성과가 있을 것 같으면 여러 고을에서 이를 본받아 차례로 시행해나가도록 해당 도에 분부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환곡의 폐단에 대해서는 해당 고을에서 먼저 시험해 보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 해당 수령에게 엄히 신칙해서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김양직(金養直)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농가잡설(農家雜說)》에 말하기를‘부용꽃이 필 때 가장 먼저 핀 꽃 한송이를 따가지고 그 무게를 달아보아 이듬해의 쌀값이 쌀지 비쌀지를 알 수 있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다음해에 어떤 곡식이 풍년이 들 것인지를 알고자하면 먼저 올해에 다섯가지 나무가운데 어느 것이 무성하게 자랐는가를 알아보고 그에 따른 곡식을 심는다.
벼는 대추나무나 버드나무에서, 기장은 느릅나무에서, 콩은 느티나무에서, 팥은 오얏나무에서, 삼은 버드나무나 가시나무에서 알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작년에는 대추나무잎이 무성하였고 늙은 버드나무가 무성하였는바, 금년에는 벼농사를 권장할만 하겠습니다.
또 사시입절가(四時立節歌)를 보건대, 거기에‘동짓날 날이 맑고 햇빛이 희미하면 이듬해에는 태평가가 울려퍼진다’고 하였고, 입춘시(立春詩)에는 ‘입춘날 하루만 맑게 개어라. 농부들이 농삿일에 힘들지 않으리’라고 하였으며, 제석가(除夕歌)에는‘이날에 청명한 좋은 날씨 만났으니 농가에 분부하여 마음 기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작년 동지에는 하늘빛이 과연 맑고 햇빛이 희미하였으며, 입춘날에도 또다시 맑게 개였으며 이날이 또 제일(除日)6947)을 겸하였습니다. 신이 이 세구(句)의 시의 뜻을 미루어 생각해보건대 이것은 모두 다 길한 징조입니다.
또 보건대 설날에는 서풍이 약하게 불고 동쪽에 누런 구름의 길한 기운이 있었는바, 올해 풍년이 들 것임을 점칠 수 있겠습니다.
또《고방(古方)》을 보니, 거기에 이르기를‘정월 3일에 비가 내리면 4월달에 물이 풍부하고 4일에 비가 내리면 5월달에 물이 풍부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금년 정월 3일에는 하늘에서 눈이 내렸고 4일날 저녁에는 비가 내렸으니 이것은 길한 징조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4월과 5월은 농가에서 가장 중요한 달로서 농민들이 이 두 달 동안에 제때 일찌감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면 그 뒤에 비록 작은 가뭄이 있더라도 크게 농사에 해가 되지는 않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신의 생각에는 금년에는 농사를 일찌감치 시작하도록 권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진달한 바에 모두 소견이 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하였다.
이제화(李齊華)의 상소에 아뢰기를,
“《농정전서(農政全書)》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좋은 농사법입니다.
이 책을 출간하여 중외에 널리 유포한다면 농사에 힘쓰도록 하는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을 조사해내어 부자집에 나누어 배정한 뒤 토지를 주고 종자와 식량을 주게 하면 그해 안으로 신역(身役)을 지거나 환곡을 갚지못하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 이를 몇 해동안 시행하면 자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안에는 제언이 없는 고을이 없지만 막히고 말라붙었습니다.
또 아랫보가 있으면 윗보를 만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이미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보를 만들 만한 곳에 일체 보를 열게 한다면 실로 백성들과 나라에 있어서 다행이겠습니다.
고구마를 심는 것은 구황(救荒)하는 데 있어서 가장 알맞은 것입니다.
여러 도에 널리 유포한다면 실로 식량을 보충하는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경진년부터 영남의 조세 곡식을 영남의 백성들이 영남의 배로 실어다가 바치기 때문에 60여척이나 되는 배를 다시 만들고 고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으며 그 재목을 대느라 원래 정해준 그루 수 외에 함부로 더 베는 것이 3, 4배가 넘는 바람에 주위에 있는 봉산(封山)들이 지금은 모두 민둥산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1천여석이나 실은 배의 선주와 사공이 모두 뱃일에 서투른 농사꾼들이기때문에 배가 전복되는 걱정을 해마다 면치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창(漕倉)에다 예전대로 보관해 두고 경강(京江)의 뱃사람들로 하여금 각 조창으로 배를 끌고 내려가서 나누어 싣고 올라와 바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럴 경우 전혀 뱃일에 서투른 사람들이 자주 파선시키는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60척의 배를 3대(隊)로 나누어 배정한 뒤, 그 대에서 각자 특별히 단속하게 하고 혹시라도 배가 전복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선대 20척의 배에서 힘을 합해 다시 마련해 바치게 합니다.
그러면 영남지방의 백성들은 저절로 농삿일에 돌아가 안착할 수 있을 것이고, 봉산(封山)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는 폐단과 해당 고을 백성들에게 세곡을 거듭 징수하는 폐단을 모두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진달한 내용 중에 쓸 만한 말이 많았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내용을 첨부하여 품의한 뒤 조처하게 하겠다”하였다.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농정전서》를 중외에 널리 유포하는 일은, 농가류(農家類)의 저서 가운데에서 이 책이 가장 상세하게 쓰여져 있다고 칭해지고 있는바, 양남(兩南) 지방에 조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간행하여 반포하게 하겠습니다.
가난한 백성을 뽑아내어 부자집에 나누어 맡기는 문제는, 궁한 백성을 먼저 돌보아 주는 일로서, 바로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는 의리입니다. 이는 마을에 좋은 풍속이 있으면 권면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해나갈 것이며, 관가에서 명령을 내릴 경우에는 반드시 어거지로 배정할 염려가 있습니다. 신역을 옮겨지우고 환곡을 대신 징수하는 것은 더더욱 백성들을 인도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도리가 아닙니다. 내버려두소서.
제언에 대한 일은, 제언에 함부로 법을 어기고 경작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 지극히 엄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제언을 수축하기를 신칙하는 때를 당해서 도리어 개간하는 것을 허락하라고 청한 것은 사체를 잘 모른 소치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 아울러 우선은 내버려두소서.
고구마를 심는데 대한 일은, 고구마는 구황하는데 있어서 실로 중요한 종자입니다. 남쪽 바닷가의 고을 가운데 심는 곳이 많이 있고 연전에도 이미 심도록 신칙하였는데, 실제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시금 여러 도에 신칙하겠습니다.
영남 지방의 조운선에 대한 일은, 조운선은 실로 소나무를 해치는 좀벌레인바, 이 때문에 배 만드는 제도를 변경하자는 논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경강(京江)의 뱃군들에게 나누어 실어오게 하자는 논의는 비록 나름대로 소견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창을 설치하고 조졸(漕卒)을 단속하는 데 대해서는 이미 정해놓은 규례가 있으니 사소한 폐단으로 인해서 갑자기 뜯어고치자고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우선은 내버려두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농정전서》를 중외에 널리 유포시키는 일은, 근래에 찍어낸 책이 있는 곳이 드무니, 이것이 어찌 편찬하도록 명하고 인쇄하도록 명한 본뜻이겠는가?
이번에 진달한 여러 설들 가운데 채용할 만한 설들을 종류별로 보충해 편찬하여 널리 배포할 바탕으로 삼도록 할 일을 주자소(鑄字所)에 분부하라.
고구마를 심는 일은, 그 효과가 콩이나 조와 거의 같은데 배를 채우고 위장을 기름지게 하며 맛 역시 좋다.
사다가 심는 방도에 대해서도 역시 별도로 새로운 영을 반포할 필요가 없다. 각 해당 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각자 심어 먹을 방도를 생각하되,
혹시라도 으레 신칙하는 지시로 보아넘기지 말게 하라.
영남의 조운선을 다시 경강선(京江船)으로 바꾸고 조운선을 대(隊)로 편성하는 일은, 곡식을 배로 실어나르는 정사에 대해서 밤낮으로 고심하고 있는데, 이것은 배 만드는 숫자를 줄이고 병선(兵船)과 경선(京船)을 통용하여, 산에 나무가 헐벗지 않고 강물의 흐름이 막히지 않게 함으로써, 농정(農政)과 함께 다같이 이익을 보는 방도에 있다하겠다.
전에 이미 이에 대하여 두루 물어보았으니 다만 한 차례 말한 것을 실천해 보는 것이 마땅할 뿐이다.
이 조항은 우선 내버려두라. 앞으로 여러 도에서 구언전지에 응하여 올린 상소와 책자 및 묘당의 회계(回啓)와 비답(批答) 내용까지를 반드시 모두다 기록하여 해당 도에 내려보내서, 감사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관청으로 불러다 놓고 정복을 갖추어 입은 뒤 직접 전해주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조정의 명령을 미덥게 하고 한편으로는 체모를 높이도록 하라”하였다.
이때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대부분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상이 한결같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김천숙(金天肅)·윤보(尹溥)·염덕우(廉德隅)·강요신(康堯愼)·장지한 (張志澣)·이상희(李尙熙)·이인영(李仁榮)·윤홍심(尹弘心)·정응삼(鄭應參)·김응린(金應麟)·최세택(崔世澤)·김치대(金致大)등의 상소는
분명하게 건의한 바가 없었다.
김치대는 문장이 다른 사람에 비교하여 뛰어났으므로 특별히 주자서(朱子書) 한 질을 하사하였다.
장윤(張윤)이하 농서(農書)를 바친 자에 대해서는 그때마다 묘당에 명하여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였고, 조금이라도 취할 만한 좋은 점이 있으면 내각(內閣)에 명해서 새로 편찬하는 농서에 채택하여 넣게 하였다.
이만록(李晩祿)과 이문철(李文哲)은 가장 먼저 전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으며, 이만록은 또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인재를 얻는 것보다 더 좋은 방도가 없다고 하였는데, 상이 근본을 제대로 알았다고 하면서《대전통편(大典通編)》을 하사하였고, 이문철에게는 운서(韻書)를 하사하였다.
유진목(柳鎭穆)이 올린 상소는 전지의 내용에 가장 잘 맞았으므로 관직을 제수하였다.
유진목이 농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신은 삼가 교서를 받들어 읽고서 감히 농사를 가르치는 것, 농삿일을 다스리는 것, 농사에 이로운 것, 농사에 해가 되는 것들을 조목별로 나열하여 15가지 항목을 만들었습니다.
1. 향약법(鄕約法)을 거듭 밝히고 농민들을 부지런히 힘쓰도록 권장하는 것입니다.
1. 토지를 3등급으로 나누고서 씨를 뿌리거나 모내기를 하는 것을 각각
그 토질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1. 바닷가나 평야지대 고을의 각 창고에 보관하는 잡곡을 종자곡으로
나누어주어 대신 파종할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1. 널리 제언을 쌓아서 물을 잘 이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1. 산의 나무를 베는 것을 엄히 금하여
수원(水源)을 풍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1. 수차의 제도를 반포하여서 물을 끌어대는 것을 편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1. 물을 균등하게 이용하게 하여 농민들이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1. 《농가집성(農家集成)》을 참고하여 오늘날의 실정에 맞는 농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1. 여름 농사철에 백성들을 소요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1. 목화밭에 대해 재결(災結)로 처리해주어 목화농사를 권장하는 것입니다.
1. 논에 가을보리를 심도록 신칙해서 농사철의 식량을 넉넉하게 하는 것입니다.
1. 사창법(社倉法)을 모방하여 시행함으로써 농량(農粮)을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
1. 봄과 여름에 밭갈고 김매는 것을 가난한 농부집부터 먼저하게하는 것입니다.
1. 소의 돌림병에 대한 치료법을 널리 물어서 농서에 첨부하는 것입니다.
1. 농민을 귀하게 여기고 선비들을 권장하며 마을의 풍속을 바로잡는 것입니다”하였다.
임박유(林博儒)도 농서를 진달하였는데, 유진목과 같은 마을 사람이었다. 유진목과 함께 책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1. 농사를 담당하는 관리를 잘 가려 임명하고 제대로 농사를 장려하였는가하는 것을 근무평정에 반영하여 게으른 농민들을 권장하게하는 것입니다.
1. 산의 벌채를 금지하여 나무를 길러 수원(水源)을 풍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1. 냇가의 둑을 다시 수축하고 제언을 더 설치하여 수리(水利)를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1. 둑을 수리하고 제언을 설치한 뒤 법조문을 엄하게 세워 관개를 균등히 하는 것입니다.
1. 수차(水車)의 제도를 반포하여 물을 이용하기에 편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1. 한전법(限田法)을 정립하여 게으른 농민을 진작시키는 것입니다.
1. 논을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모내기를 하거나, 씨뿌리기를 하거나,
다른 작물을 파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 연해 고을의 각 창고의 곡식은 잡곡으로 바꾸어 보관해 두고 이를 환곡으로 나누어주어 벼대신 파종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1. 환곡을 나누어 줌에 있어서는 반드시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한 차례 넉넉하게 나누어줘 농사지을 동안의 양식을 마련할 수 있게하는 것입니다.
1. 향약법을 신명하여서 농사에 힘쓸 바탕을 마련해 주는 일입니다.
1. 농민을 귀하게 여겨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지을 마음이 생기게 하는 일입니다.
1. 차와 담배의 재배를 엄하게 금지시켜 농사짓는 전지를 넓히는 일입니다.
1. 토질을 살피고 곡식의 성질을 잘 파악하여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는 일입니다”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유진목이 올린 책자를 가져다가 보니, 그 조목이 문란하지않았고 그 내용이 근거할 만하였는데, 필경에는 그 요지가 향약법을 시행하는데로 귀결되었습니다. 다만 농정이 점차 성과가 있는가를 살펴보아 한(漢)나라에서 시행하였던 법과 똑같이 별도로 효제(孝悌)와 역전(力田)의 과목(科目)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니, 우선은 내버려두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송문정공(宋文正公)6948)이 공주목사(公州牧使) 신숙(申洬)이 편찬한 《농가집성(農家集成)》의 서문을 쓴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말하기를‘주자가 쓴 책가운데 권농문(權農文) 몇 조목은 참으로 뭇 백성들이 일용(日用)으로 할 것들이다.
효제(孝悌)니 예의니 하는 것이 일찍이 제언을 수축하고 토지를 일구는 것에 대한 방문(榜文)과 아울러 언급되지않은 적이 없었은 즉, 다른데서 구하지않더라도 그 힘을 쏟아야 할 곳을 알 수 있다’고 하였는바,
그 말뜻이 절실하기도 하다. 참으로 농가(農家)의 지침이 되는 것이며, 풍속을 교화시키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근래에 날마다 올라와 쌓이는 상소문을 보건대 여기에 대해 언급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오로지 공주 생원 유진목만이 능히 말하였다.
이 책을 편찬한 자가 바로 공주 목사였는데, 지금 1백46년이 지난 뒤에 그 말이 또 공주에 사는 선비에게서 나왔으니,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
진달한 15조항은 모두 주자가 남강(南康)에서 내린 방문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다.
이른바 향약법을 거듭 밝혀 농민들을 격려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2월에 술과 음식을 싸가지고 교외로 나가 부호들을 만나보고서 농상(農桑)에 힘쓸 것과 효제(孝悌)를 돈독히 할 방도를 일러준다는 것이다.
이른바 씨를 심거나 모를 내는 것을 각각 토질에 맞게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주자가 말한 씨를 물에 담궈두었다가 모를 부으며 깊게 갈고 얕게 김매라고 한 뜻이다.
이른바 잡곡을 대신 파종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제때에 논을 갈아엎고 밀과 보리를 많이 심는다는 법이다.
이른바 수레의 제도를 널리 반포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숙(塾)이 있는 자는 수레와 두레박의 힘을 힘입는다는 방법이다.
이른바 수리(水利)를 균등히 나눈다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못과 연못이 얕거나 샐 경우에는 힘을 합쳐서 파낸다는 방책이다.
이른바 농사철에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지말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빈민이나 하호(下戶)가 억울하게 불려나간다는 깨우침이다.
이른바 목화농사를 장려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성자현 지사(星子縣知事) 왕문림(王文林)의 뽕나무를 심는 방법 등을 알아내어 세 현(縣)에 내려보낸 규례이다.
이른바 사창제도(社倉制度)를 모방하여 시행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제갈가(諸葛家)와 천능가(千能家)등 집안의 쌀을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대신 나누어주자고 한 논의이다.
이른바 갈고 김매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가난한 농민의 집부터 먼저 하게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빈궁한 농민을 기쁘게 하는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이른바 소의 돌림병을 고치는 방법을 두루 물어보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농사짓는 품은 전적으로 소의 힘에 의지하는바 제때에 잘 먹여 기르고 잡아먹지 못하게 하라는 훈계이다.
이른바 농민을 귀하게 여기고 선비들을 권면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도를 배우고 몸을 닦아 민호(民戶)를 흥기시킨다고 한 뜻인 것이다. 이른바 산을 벌채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주부자가 언급하지않은 것인데, 이것은 주부자가 있던 남방지방에는 물이 많고 산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예전에 시험해 본 것들로서, 오로지 수령들이 어떻게 독려하고 신칙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묘당에서 그가 진달한 책자 가운데 있는 여러 조항들을 문서 뒤에다 기록하여 본도 이외의 7도 및 화성부(華城府)에 내려보내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자 상세히 살펴본 다음 관하의 수령들을 잘 신칙해서, 본받을 만한 조항들을 관심을 두고 채택해 시행해서 기어이 실효가 있게 하라.
그 가운데서도 밭에 거름을 주는 것은 농사짓는데 있어서 더욱 요긴한 것이다. 버들가지를 밭에 펴고, 개흙을 재[灰]에 섞고, 지붕의 짚을 썩히고, 짠물을 흙에 붓는 등의 방법을 써서, 땅이 비옥해지면 갈나무 잎을 펴서 지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고, 흙이 부풀어 오르면 가는 모래를 고르게 섞어서 소출을 배로 거두는 것은, 그 나름대로 묘리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를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사람들이 부지런하냐 게으르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에 내린 교서에서‘근(勤)’이라는 한 자를 뽑아내어 교서문의 핵심 글자로 삼았는데, 지금 이 글에서 조목조목 분석하면서 능히‘근’자에다 귀결시켰으니, 몹시 가상하다.
이 비답 내용을 해당 도에 내려보내어 그로 하여금 유진목에게 등사해서 주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또 아뢰기를,
“임박유(林博儒)가 진달한 14개 조목가운데 10개조목은 유진목이 진달한 것과 내용이 같습니다.
그 가운데 한전제도(限田制度)를 정하자는 것과 몇 기분의 환곡을 합하여 나누어 주자는 것, 담배와 차의 재배를 엄히 금지시키라는 것, 백성들에게 절약하도록 장려하라는 것은 유진목이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전제도를 시행하자는 것은 말은 그르지 않지만 갑자기 논의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담배와 차의 재배를 금지하는 것은, 금지시키기는 참으로 쉬우나 역시 효과와 피해가 서로 엇비슷할 것입니다.
어공(御供)은 빠뜨릴 수 없다고 운운한 것에 이르러서는 그 말이 극히 외람스럽습니다. 시골 유생이 비록 사체를 제대로 몰랐다고 하더라도 감사가 어찌 살펴보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해당 감사를 추고하소서.
그 가운데 환곡을 나누어주는 한가지 일은 채용할 만한 점이 없지않습니다. 그러니 감사로 하여금 영하(營下)의 고을백성들에게 시행해보게 하고, 편리하다고 여겨지면 여러 고을에 시행하는 것 역시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한전제도에 대한 일은 말인즉 좋으나 형세상 용이하게 논의하기가 어렵다. 비록 성세였던 하·은·주 삼대 때를 두고 말하더라도, 한 사람이 받는 전지가 하나라에서는 50묘(畝)였고 은나라에서는 70묘였으며, 주나라에서는 1백 묘였었으니,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비용이 점점 불어남에 따라 전지 역시 늘려주었다는 것을 대개 알 수가 있다.
진(晋)나라 태강(泰康)6949)때에는 한 사람당 70묘를 받는 제도가 있었지만 토지를 주고받는 제도가 역사책에 쓰여져 있지 않다.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비로소 균전제도를 시행하였는데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전지를 균등히 나눈데 지나지 않았다.
당 태종(唐太宗)이 시행한 호구별로 나누어서 대대로 이어가게 한 규정 역시 이것을 모방한 것이었는데, 영휘(永徽)연간에 토지의 겸병(兼並)이 옛날과 같게 되었다.
대개 진(秦)나라에서 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이 1천6백년이 되었는데 능히 전지를 나누어주고 토지를 균등하게 하는 법을 시행한 기간은 2백년에 불과하였으니, 저절로 혁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형세가 그러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6도(道)의 토지대장에 등재되어 있는 전지의 총수를 경외의 사람 숫자에 비교해 보면 문무관(文武官) 3천여명을 제외하고 사람마다 1결(結)씩만 나누어준다고 할 때 6백63만6천여결이 부족하게 된다.
조정에서는 내가 즉위한 초기부터 가장 먼저 전정(田政)을 바로잡는 데 유의하여, 매번 이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밤까지 평상을 빙빙돌면서 생각해 보았으나 그 요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몇 기분의 환곡을 합하여 나누어 주는 일은, 양반이라는 명색만 있고 거느리고 부리는 사람이 없는 자들은 이웃 사람들에게 구걸하여서 환곡을 받아가는데, 늘상 이들에게 뜯겨서 잃어버리는 것이 원래부터의 공통된 폐단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몇 말의 환곡을 받아갈 때에도 오히려 관속들의 침탈과 점주(店主)들의 비용으로 뜯기는 것을 면치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더구나 몇 섬을 한꺼번에 아울러서 받아갈 경우, 능히 종자곡과 농사지을 양식으로 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우선은 한두 고을에서만 시험해 보는 것도 안될 것은 없다.
담배와 차의 재배를 금지하는 일은,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이 엇비슷하여 술을 빚는 것과 같은 점이 있는바, 가볍게 논의해서는 안된다.
이는 신풍장공(新風張公)6950)의 말에서 충분히 근거삼을 수 있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절약하도록 장려하는 일은, 오히려 조정에서 어떻게 이끌어 나가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어찌 백성들에게 책할 문제이겠는가?
경들부터 참으로 검소한 생활에 솔선수범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자연히 우역(郵驛)으로 명을 전하는 것처럼 빠르게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점에 대하여 스스로를 반성하겠다”하였다.
그리고는 장윤(張윤)과 안성탁(安聖鐸)이 또 유진목에 다음간다고 칭찬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장윤이 올린 농서(農書)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토질을 잘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곡식을 심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토질을 잘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곡식을 심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내린 교서에서 유시한 바가 있으니 대소의 백성들 가운데 이를 환히 아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분발하여서 성과를 거두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어떤 땅에는 어떤 곡식을 심으라고 말하여 마치 규정을 정해놓는 것처럼 하기는 어렵습니다. 내버려두소서.
1. 농기구가운데에서 수차(水車)와 역거(役車)가 농삿일에 있어서 더욱더 긴요한데, 그 가운데서도 역거는 외바퀴수레를 쓸 수 있다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수차의 제도는 일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효과가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 법이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그 만드는 법이 교묘하고 비용이 많이 들기때문에, 일반 장인(匠人)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 민호(民戶)에서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이 바로 우리나라가 수차 만드는 제도를 잘 몰랐던 것이 아니면서도 그것을 편리하게 이용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말하는 자들은‘중국에서 쓰는 것을 어느 곳에서인들 쓰지 못하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장인은 솜씨가 뛰어나고 중국의 재물은 풍족합니다. 그리하여 아주 가난한 자를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의 가난한 백성들과 다름이 없지만, 조금 부유한 자를 놓고 본다면 그 재산이 우리나라의 부유한 자들보다 천만배도 넘습니다.
그러므로 수차 한 대가 만들어지면 뭇 공장들이 이를 본따고 한 동네가 만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에 응합니다.
이 때문에 만들기가 쉽고 광범위하게 시행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 도에서 이를 시험해 보고자 할 경우 반드시 영읍(營邑)이 힘을 합친 다음에야 한두 대의 수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일반 백성들이 서로 모방한다는 것은 결코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역거에 이르러서는, 각도의 습속이 서로 다른바,
역시 영을 내려서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버려두소서.
1. 호남 지방에 오랫동안 양전(量田)을 하지 않아서 전지(田地)가 균등치 않고 부세(賦稅)가 공평치않다는데 대해서입니다.
토지를 다시 양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복계(覆啓)에서 진달드렸습니다. 풍년을 기다려서 품정(稟定)하여 거행하겠습니다.
1. 무주(茂州)와 순천(順天)사이에는 사금(沙金)을 캐는 자가 줄을 잇고 농부가 아주 드물게 있는바, 이를 일체 금지시킬 경우 놀고먹는 무리들이 저절로 돌아가 농사지을 것이라는데 대해서입니다.
금의 채취를 금하는 것은 원래 법전에 엄격히 실려있고 농사를 해치는 일로도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각별히 엄하게 금지시키라는 뜻으로 감사들을 엄하게 신칙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그 가운데에서도 농사철에 대해 상세히 진달한 것은 모두 일리가 있는 것들이다. 거기에서 말한‘우수(雨水)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驚蟄)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春分)에는 올벼를 심고 청명(淸明)에는 올기장을 심으며, 곡우(穀雨)에는 호미질하러 나가고 입하(立夏)에는 들깨를 심으며,
망종(芒種)에는 모시와 삼을 거두고 하지(夏至)에는 가을보리를 거두며, 입추(立秋)에는 메밀을 심고 처서(處暑)에는 올벼를 수확한다.
반드시 절기에 앞서 갈고 심으며 절기에 앞서 물을 가두며, 또한 제때에 모를 내고 제때에 김을 매준다.
모를 낸 지 20일 뒤에 초벌김을 매며, 초벌김을 맨 지 13일이 지난 뒤에 두벌김을 매며, 두벌김을 맨 지 15일이 지난 뒤에 세벌김을 매면 곧바로 추수할 때가 된다.
만약 제때를 어긴다면 곡식이 잘 자라나게 하려 해도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말한 바가 형식적인 것을 벗어던지고 실제적인 것이었으니 기쁘다. 또 김을 매는 과정도 일일이 조목조목 진술하였다.
그러니 해당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그를 특별히 권농관의 직임에 차임하고 가을 추수 뒤에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고과한 뒤 감영에 보고하게 하고, 그런 뒤에 감사가 장계를 올리라고 해당 도의 감사에게 분부하라”하였다.
註6938]태세성(泰歲星):목성을 말함 註6939]공류(公劉):후직(后稷)의 증손 註6940]태왕(太王):고공단보(古公亶父). 주문왕의 조부로 처음 주나라를 세웠음 註6941]원성(元聖):이윤(伊尹) 註6942]진(秦)나라에는 정국(鄭國)의 도랑:전국(戰國)시대에 한(韓)나라가 진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수공(水工) 정국(鄭國)을 시켜서 진(秦)나라에 가서 대대적인 수리(水利)사업을 일으키게 하여 진나라를 피폐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결국 진은 이 관개사업으로 관중(關中)이 비옥해져서 막대한 국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사기(史記)》권29 하거서(河渠書) 註6943]구공(九功):구공은 육부(六府)와 삼사(三事)를 가리키는데, 육부는 수(水)·화(火)·금(金)·목(木)·토(土)·곡(穀)을 맡은 곳이며, 삼사는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을 말한다.《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 註6944]축월(丑月):음력 12월 註6945]미월(未月):음력 6월 註6946]수령칠사(守令七事):고려때부터 지방관의 행정 지침이었던 일곱 가지 조목. 농상을 장려하는 일[農桑盛], 호구를 증가시키는 일[戶口增], 학교를 흥기시키는 일[學校興], 군정을 정비하는 일[軍政修], 부역을 고르게 하는 일[賦役均], 송사를 처리하는 일[詞訟簡], 간활한 짓을 종식시키는 일[姦滑息] 등인데 고과에 반영되었다.《경국대전(經國大典)》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 註6947]제일(除日):섣달 그믐날 註6948]송문정공(宋文正公):송시열(宋時烈)을 말함 註6949]태강(泰康):무제(武帝)의 연호 註6950]신풍장공(新風張公):장유(張維)를 가리킴.
○己丑/下勸農政, 求農書綸音曰: “明年己未, 卽我先王親耕耤田之年也。 五紀光御, 八方涵育, 蓋以勤民重農, 爲治敎之原, 而基壽考之功。 豐功巍烈, 誕造無彊, 太歲星周, 舊甲嚴臨, 予小子其敢不欽承前寧人遺志, 以對揚耿光之萬一也哉, 國以民爲本, 民以農爲生。 農不殖則民不穀, 民不穀則國何乂, 予食雖可減, 民不可以闕食也, 民食之闕, 其責在農。 農若不勤, 曷云有秋, 民之爲農也, 雖因天時, 而當盡其地利也, 雖資地利, 而當修其人事也。 撫五行之交運, 體四季之寄旺, 土爰稼穡, 爲民司命, 而服田之勞, 勞亦多矣。 曰糞壤之勞也, 曰引水之勞也, 曰鋤鉫之勞也, 曰耕耨之勞也, 曰播植之勞也, 曰耘耔之勞也, 曰饁嗿之勞也, 曰飼牧之勞也。 自冬徂春, 恰爲百日之勞, 及夫秋熟, 又有刈穫之勞, 場圃之勞。 而勞之淺深, 年分豐歉, 嗟! 我農人, 曷敢言勞, 昔朱夫子, 爲吏於泉、漳, 勞農山間, 對新釀而有銍艾中熟之詩, 蓋所以勞之也。 勞者民也, 勞之者吏也。 民之勞矣, 吏焉敢逸, 顧我國被山帶海, 野多膏腴, 素稱衣食之鄕。 而興作昧方, 惰敖成習, 田畯失其職, 保介違其時。 一有水旱, 杼軸俱空, 玆曷故焉, 蔽一言曰, 人事之不能修, 而地利之不能盡也。 農之本, 在乎勤與勞, 而其要則亦惟曰興水功也, 相土宜也, 利農器也。 三者爲要, 水功居先。 在《易》水地爲《比》, 地水爲《師》, 此井田之所由法耳。 欲相土宜, 捨水功奚爲哉, 故公劉荒居, 皇澗是夾, (大)〔太〕王胥宇, 西滸是率。 且以元聖之明, 農先立匠人, 以制溝洫, 而載之《周官》。 魏有李悝之河, 秦有鄭國之渠, 於漢文翁之溲, 於唐韋丹之陂, 導之貯之, 以滀以漑。 雖時雨不降, 六七月之間, 其苗勃興。 而今也隄政久抛, 冒耕相續。 如湖南之碧骨, 湖西之合德, 嶺南之恭儉, 關北之七里, 關東之蓴池, 海西之南池, 關西之潢池, 號稱國中大堤, 而疏處不疏, 停時不停, 行潦其涸, 歲比不登。 爲當今之碩畫, 莫先乎已有之大堤而着手, 推而及於均舍百事。 使諸路各就掌內, 咸效其能, 誠力所到, 其應如響。 且水功之於土宜, 相須而行。 畇隰畛甽之異等, 穜稑秠糜之殊性, 滮池則浸稻, 疆埸則有瓜。 豳人新畬而來牟, 歧人載芟而耘耦, 溫人重麥, 雒人重禾, 卽《詩》書之所詠歌者也。 禾藝高燥, 稷播衍沃, 美壤率歸於烟茶, 而農則爲厲, 名山多入於火粟, 而穀不加賤。 宜南者不宜於北, 喜峽者不喜於野。 而雲夢均業, 原隰無別, 從以注秧盛而付種者罕, 則世稱利害相半, 而畢竟害二而利一。 愆雨則歉, 在在皆然。 至於農器之便利, 東俗尤昧昧, 無異於羲農以前, 乃庤斯趙固尙矣。 只言其緊且要者, 水車者, 所以備旱也, 役車者, 所以兼人也, 篝(窶)簍者, 所以貯穀也, 碓確者, 所以舂糧也。 自古及今, 行者無聞。 顧不能修其事而盡其利, 尙曰農也不熟, 耕也其餒云爾, 則不其近於倒植而求茂乎, 董之以九功, 勸之以九歌, 俾緣畝襏襫之民, 靡不極其功而竭其智, 田無不闢, 闢無不種, 種無不食, 則《管》書所謂: ‘人生在勤, 勤則不匱,’ 《魏志》所謂: ‘人皆力勤, 歲數豊穰’ 是耳。 竊嘗有意於敦本務實之政, 命編農書, 欲頒州郡。 而古今之各異也, 風土之不幷也, 貧富之難齊也, 事力之未逮也, 不可以硬定而膠守。 階庭萬里, 人人各進良策。 我則受之, 折衷而用之, 可謂農家之大全。 夫農作之工, 仰屬中星, 旁叶氣運。 丑之半大寒之節, 土運始生, 未之半大暑之節, 太陰濕土之氣始生, 丑與未相對, 而土始用事。 則慨已往之難追, 擬方來之資益, 以興嗣歲, 以勖農夫。 所貴乎孔夙, 奚待春元之發綸, 今日丑日也, 明日丑月也。 未刻之正, 節侯交至, 土牛祈年, 此政其時。 況丕圖前功, 日月依辰, 寔予仰述之一端乎, 咨! 爾京外小大臣庶, 咸須聽悉。 如有己見, 可以有裨於三農者, 或以章疏, 或以簿冊, 京而呈于廟堂, 外而納于監司。 而毋泥乎異俗, 毋拘乎古方, 山沿饒瘠, 各陳其當。 人謀允臧, 克享于天。 天以康年, 貽我十千, 粒我烝黎, 同我太平, 則斯可以仰副我寧考康功田功之盛德至善, 而又可以助予小子肯播肯穫之至誠苦心。 起我農政, 絿我農書, 不翅如農夫之望秋。 予卽阼二十二年建丑月前一日己丑未正。” 於是應旨陳疏者, 二十七人, 忠義衛裵宜、洪州幼學申在亨、前同知金天肅、大邱幼學柳東範、副護軍卜台鎭、靈巖幼學鄭始元、前監察李宇炯、守衛官尹溥、前令廉德隅、守衛官劉宗燮、前察訪康堯愼、前忠義張志瀚、前純陵參奉李尙熙、副司果李仁榮、前郡守尹弘心、新溪儒生鄭錫猷、巡將鄭道星、全羅都事金夏璉、寧越府使李敬五、三嘉幼學鄭應參、彦陽幼學全萬、厚陵令金應麟、前同知金養直ㆍ崔世澤、尙州幼學李齊華、順安進士金致大也。 前持平尹在陽, 亦因時務疏, 附陳農政焉。 進農書者四十人, 南原幼學張、許顥、許耋、盧翼遠, 公州生員柳鎭穆, 公州幼學林博儒, 楊州幼學安聖鐸, 京居庶民李必忠, 洪川幼學李光漢, 高城幼學權炫、盧再煌, 歙谷幼學趙之榮、鄭致一、表憲正, 報恩幼學李東膺, 德山幼學李宜璹, 水原折衝元在夏, 定山幼學金勳, 京居幼學李晩祿, 交河幼學李文晢, 羅州幼學羅敏徽、羅學愼, 淳昌幼學申輔權, 靈光進士李大圭, 全州幼學金尙直、李汝孝、宋相彙、李章烈, 鎭安幼學朴宗赫, 古阜幼學朴道欽, 綾州進士南熤, 光州進士李宜、幼學朴文燦ㆍ鄭潤國, 茂長幼學康錫運、康洵, 南原前縣監張顯慶, 長連進士朴載卨, 海州幼學金皓、李薰也。
裵宜疏曰:
“農事有三。 其一, 古者落種於穀雨, 移秧於夏至, 則農時尙早。 而今則種與秧, 先時於兩節候, 而不然則爲晩。 是知種之移之以早爲務可也。 其二, 麥之有補於人, 不下於稻, 而民知其種田之爲好, 不知其種水田之亦好。 夫水田秋穫之後, 便作空地, 當其空地之時, 決水作乾坪, 萬頃千畦, 悉以種麥, 刈麥之後, 乃揷秧之始設。 或稻未秋稔, 足可麥以免饑也。 其三, 貧富相資也。 民之窮者, 當耕播之時, 無牛無種, 失農者多。 欲捄此病, 郡縣之官, 選面里之父老, 爲勸農之任, 訪其面里之富戶貧戶, 錄成冊子, 使富者出種糧, 貸其貧者。 若里無富戶, 自官出貸, 待秋還納。 此法若行, 富者無損, 而貧者有所賴。 牛禁之令不弛, 牛蓄自賤。 使民安業, 係於守宰, 倘守宰得其人, 則懋農自在其中也。”
批曰: “思聞裨益於農政之事, 別下十行, 辛勤求助。 莫謂予言之近於迂遠而無當。 目下先務, 豈有過此, 令下多日, 公車未聞投匭。 爾以勳裔, 應旨條陳, 皆適實用。 其云種之移之必早, 稻或未秋, 麥足免饑, 富出種與糧, 秋卽還償, 又於面里父老中一人爲勸農, 凡此云云, 必有的見熟料而然者。 其在買馬骨之義, 先從登聞人, 當施嘉奬, 或恐欲言者之嫌於如何, 反又却步, 姑不下敎。 爾其退待廟堂之招, 叩其實。” 申在亨疏曰:
“戊己, 天干之土也, 丑未, 地支之土也。 干支合而爲己未, 則已與未, 皆屬於土, 而土爲農之本, 農爲食之本, 食爲民之本。 導民以農, 務農以時者, 其惟在明年乎。 蓋修人事以盡地利, 盡地利以竢天時。 而水功之興也, 土宜之相也, 農器之利也, 無非人事所當爲者。 天時三年旱三年水, 十年一大旱, 十年一大水。 然而旱害甚於水之害, 而我國多水田者也, 而一遇亢旱, 農民束手。 此曷故焉, 有注秧移種之法而然也。 自箕聖之始敎井田, 高燥處乾付種, 卑濕處水付種, 我國承之, 謂之乾播、水播。 而自中年始有移秧之法。 諺傳自龍蛇之變, 始有此法, 此法一行, 民之廢農者多矣。 時當穀雨, 始爲注秧, 而若遇流行之災, 則雖勤農者, 每瞻雲漢, 節晩之後, 始得注秧。 夏至之節, 可以移秧, 而天於此時, 陽亢用事, 每患靳霈, 一失其時, 則稼穡之事廢矣。 至於付種, 則冬雪之所瀜, 春雨之所霑, 早稻早播, 晩稻晩播, 乾處乾播, 水處水播, 種生苗立, 旱與水不能爲損。 而但春以種夏以耘, 移種者則鋤不過數次, 付種者不下三四次。 而富民務其兼幷, 貪於多作, 小而三四石, 大而六七石, 一時注秧, 以省其力。 一時移種, 以除其勞。 雖或遇旱, 多有美田, 所收夥然。 貧殘之民, 注秧移種, 最爲居後, 遇旱値歉, 糊口無路。 以臣愚見, 自明年爲始, 廢注秧爲付種, 則雖有一時之勞, 可裕一歲之食。 小民惟知姑息之爲好, 而不知永久之爲計。 殿下苟欲務三農之業, 立萬世之法。 若夫興水功, 則殿下敎之曰: ‘因其已有之大堤而着手。’ 蓋近於山而有堤以貯水也, 近於野而有洑以引水也, 近於海而有堰以防水也。 堤洑堰三者, 所以興水功備旱災者也。 我國山野之郡, 如繡錯, 湖海之縣, 如碁布, 昔人所築, 無處無之。 但沙堤之淤塞, 石洑之衝破, 潮堰之壞圮, 而爲農者不得修治。 若自堤堰司, 申飭道伯守宰, 小者借民之力, 大者致官之力, 春初始役, 引水貯水, 苟或不勤, 懲以殿最。 若又有可以新築處, 捐廩出力, 以始其役, 亦又不足, 出此國穀, 以完其役。 若有富民, 出財施力, 民被其利, 特施賞典, 以爲興起他民之道。 則山沿之邑, 豈如今年之大歉耶, 若夫相土宜, 則殿下敎之曰: ‘宜南者, 不宜於北, 喜峽者不喜於野。’ 然而土地非不欲相矣。 蓋尺地寸土, 盡入於量案。 而膴膴之原, 今或陳荒, 畇畇之隰, 今或廢棄, 孰不欲起墾, 而今春纔起來秋執卜。 如此而責之曰: ‘土地闢人民衆乎。’ 以臣愚見, 可起之土, 勸民起之, 可耕之土, 使民耕之, 隨土肥瘠, 定稅多少, 限六七年或四五年, 使吾民之無衣無食者, 得以飽煖於博施之下, 則相土之宜, 不外乎此矣。”
批曰: ‘戊己, 天干之土也, 丑未, 地支之土也, 干支合而爲己未, 則己與未, 皆屬於土。 而土爲農之本, 農爲食之本, 食爲民之本, 民爲國之本。 爾所敷衍爲說者, 識解誠可取。 而其云: ‘自箕聖之始敎井田, 燥處, 乾付種, 濕處, 水付種, 我國所謂乾播水播者是也。 移秧之法行, 而廢農者多。 自明年己未, 廢注秧爲付種, 其利博哉者。’ 卽近日廟堂講究之策也。 然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治民如烹鮮羹, 擾之則雖師古之美制, 未必有立效, 去泰去甚之道, 在方伯守令矣。 其云: ‘近於山有堤, 堤所以貯水, 近於野有洑, 洑所以引水, 近於海有堰, 堰所以防水。 山野繡錯, 湖海碁布, 昔人所築, 無處無之, 而流沙塞堤, 轉石衝洑, 驅潮壞堰。 小者借民力, 大者致官力, 自春初始役, 修治考勤慢, 爲殿最之高下。 古未築而今可築者, 又出國穀完役。 或有出財蒙利之人, 特施賞典者。’ 亦可謂切實。 令廟堂, 指一草記, 以爲未墾前措處之地也。 其云: ‘陳荒廢棄, 孰不欲起墾, 而今(秋)〔春〕纔起, 來秋執卜。 如此而責之曰, 土地闢人民衆乎, 勸起勸耕, 隨土定稅, 限以六七年, 或四五年, 使吾民之無衣無食者, 得以煖飽者,’ 此三年勸耕, 次等降續之意也。 年前嶺南有所知委, 近果有效乎否, 與尾陳條件, 亦令廟堂稟處。” 備邊司覆啓言: “堤洑堰申飭事, 其所謂: ‘借民力致官力, 考勤慢爲殿最者,’ 卽不可緩者也。 然於借民力致官力之中, 又自有多少層節。 如小小役處作者, 例必運力, 年年修治。 先就各邑堤洑堰之蒙利廣而壞塞甚者, 名定其幾處, 而用民之當以千萬計者, 以所劃賑資中劃出幾石, 作爲糧資, 量其日字, 期於竣役。 則此實合於荒年興作之政, 而丁取雇食, 賑口必減, 穀散閭里, 亦有餘效。 爲先以此分付三南道臣, 面議守令後, 以其可合修築之處, 竝卽令狀聞, 而必趁氷解之後, 農殷之前, 一齊訖役, 以其形止馳報本司。 自本司稟旨, 另擇識農務解水利者, 分行考察。 至於古未築, 今可築者, 除非十分無疑, 不必一時發令, 以致煩擾。 此則毋論大小民人, 若有相形便而就功役者, 其爲可尙, 豈止捐財補賑之功乎, 道臣狀聞, 拔例論賞。 守令考績, 本不出於七事, 而農爲七事之首, 則以課農爲殿最, 卽是法意也。 此後則先書農政優劣, 次及他政之意, 定式知委。 蓋此修築之政, 不但三南爲然, 諸路亦當一體擧行。 而畿庭西北事情稍異, 就此覆啓中辭意, 節略行會。” 允之。 柳東範疏曰:
“臣只以嶺南一路所見聞者陳之。 凡菑於稼者非一, 而惟旱爲最, 重於農者非一, 而惟牛爲大。 還穀不均, 貧富失業, 簽丁多匿, 而孱農莫支, 新田執卜, 而墾闢不廣。 至於稌宜濕而黍宜燥, 綿喜暘而麻喜雨, 皆農者之習焉者也。 最其大要有六, 曰深濬堤澤也, 曰用水有節也, 曰繁殖畜産也, 曰糴均貧富也, 曰役蒐漏丁也, 曰勿稅新田也。 近來歲比旱暵, 人則委之於天, 臣則曰人自旱。 夫夏必有雨, 而有時而旱, 冬必有雪, 而有時而旱, 又或有冬旣雪, 而春又雨者。 雪之所瀜, 雨之所渟, 無費一勺, 俱滀細流, 則冬春五六朔之所得, 足以禦夏三朔之乾。 故古之堤澤, 其深不測, 深也故貯水也多, 多也故禦旱也優。 今則不然, 堆阜之捎囓, 流沙之積聚, 凡幾千百斛, 而十年之內, 不一疏鑿。 恭儉池, 自古極無之歲, 未見其涸, 今則旱未數月, 水已告竭。 此無他, 只築其外, 不濬其內也。 濬之當如何, 一堤仰漑之戶, 力或不給, 則官調他堤之民, 合力共濬。 此堤旣濬, 他堤又濬, 歲必一濬, 以深爲準, 所濬之土, 增築其防, 則堤安得不深, 水安得不多, 旱安得爲災乎, 所謂深濬堤澤者此也。 凡民慮不及遠, 旱之時, 一勺莫得而纔得小雨, 更無所恡曰, ‘苟已浸矣, 貯之何爲,’ 夫田旣獲而水有餘, 則以其及春翻耕之急也, 雖不得不以次瀉去。 而堤築則固當修其缺而貯之也。 至於當夏浸秧之時, 一日受灌, 足支四五日之旱, 則朝決暮塞, 更待四五日而決之。 以此爲率, 不當(不)〔一〕向洞瀉, 有賸水於彼, 而無餘者於此。 所謂用水有節者此也。 夫農貴深耕, 耕深在牛。 故牛禁, 著之金石也。 貧民坐無牛, 失耕者十之五六。 且捧糴之時, 必先籍有牛者, 督使賣牛納穀。 臣之愚計, 申明五家作統之法, 一統之內, 合財備牛, 三四年聽其一改, 且當捧糴之時, 勿令賣牛納穀, 則將見人皆有牛, 人皆深耕。 所謂繁殖畜産者此也。 有水有牛矣, 而尙不得耕者, 無農糧也。 糴法本欲富貧均食, 春頒也均, 故秋斂也易。 而今則富民, 無一受糴, 貧民之偏受勢也。 偏食則受困勢也, 受困則廢農亦勢也。 非獨戶還, 又有結還, 貧者無結, 理當無還。 而間多養戶之奸民, 貧民之多結還此也。 且有停捧之宿還, 則雖蒙一年之豐, 難償屢年之還矣。 臣之愚計, 痛革養戶富拔之習, 則貧民少還, 且無(懲)〔徵〕隣賣牛之弊。 所謂糴均貧富者此也。 古之二疋, 今爲一疋, 民宜益饒而反益貧者何也, 軍丁不能蒐匿也。 把摠哨宮, 皆庇一門, 風憲、約長, 亦護一室。 臣謂嚴飭守宰之臣, 所謂把、哨、風、約之類, 只渠一身外, 一幷充役, 其他掩覆者, 嚴明査櫛, 則丁口十倍於前, 良丁富實, 擧入編戶之役。 所謂役蒐漏丁者此也。 夫茭牧廢壖之可墾者多矣。 貧民無土者, 不敢起墾者何也, 纔已起墾而便皆執卜, 新墾者或不足以當其卜。 則民何以願耕乎, 臣謂起廢之田, 限十年勿稅, 雖十年後, 切勿高等執卜, 則民必願耕。 所謂勿稅取用者此也。”
批曰: “爾以嶺外之人, 見求農書之綸音, 有此應旨對章, 其所陳皆有所據, 益知人才之無隔遠邇。 嘉乃嘉乃。 所謂: ‘菑於稼者非一, 旱爲最, 而重於農者非一, 牛惟大。 貧農失業於還穀, 孱農莫支於簽丁。 古之堤澤其深不測, 魚龍窟而艇艓泛。 今則恭儉大堰, 旱卽告竭, 竝與一過之流, 用水無節。 茭牧廢壖之民, 不敢起墾, 利未及而害先及’ 云云者, 爾言是矣。 使人人服力勤作, 因天時而興地利, 流行之災, 豈至於艱食, 而替人之功, 助人之力, 有則墾, 無則荒, 一牛之力, 當百人之力。 所以殺牛之禁, 比殺越之律減二等, 著在典憲, 近因大臣之言申禁矣。 還穀簽丁之弊, 疏淪與勸起, 付之廟堂, 與諸疏參看, 使之從長稟處。”
卜台鎭疏曰:
“農功之所先務, 莫要於興水利, 水利之效, 莫要於堤也。 臣嘗讀故處士柳馨遠《隨錄》曰: ‘扶安之訥堤、臨陂之碧骨堤、萬頃之黃藤堤, 是謂湖南三大堤。 當其始築之際, 竭一國之力以成者, 而中間毁棄。 不過動數郡之力, 依舊葺成, 則蘆嶺以北, 永無凶荒之年, 湖南沿海之郡, 可比於蘇、杭。’ 近世經綸之士, 柳馨遠爲最, 而其言如是, 則三堤之利, 不言可知。 伏望明揀廷臣之習於此術者, 待春興役, 精抄飢民, 使之赴其役而食於官, 以至麥秋之時。 則此隄纔成, 民食將裕矣。 烟茶之糜穀, 其害孔甚。 臣謂元帳之田, 勿許種茶。 又禁劚山燒林之習, 其爲不作無益, 害有益者, 莫此爲要也。 牛酒松三禁, 實爲國家金石之典也。 近年以來, 禁酒弛太。 酒流生禍, 糜穀之害, 的然甚明。 而祭祀之需, 賓客之供, 不可盡禁, 臣謂勿禁其私釀, 但禁其買賣, 則民食之所補益, 決有顯效也。 牛禁則恐不可一定也。 泛駕僨轅之犢, 老敗無用之牸, 周處無路, 立而飼養。 且百日之勞, 一日之樂, 在於歲時, 莫不屈指顒望, 伐牛釃酒, 朋集燕飮。 臣謂私屠之令, 不可不嚴而至於歲時一屠, 特許寬假。 吾東四民之中, 農者甚少, 官吏之害於農者酷矣。 臣謂定其額數, 大邑不過四五十, 小邑亦減其半, 其餘皆驅之歸農。 則通計八路, 當添累十萬墾土之民矣。”
批曰: “三日莅政之餘, 如物在喉者, 湖西之爾, 與湖南之張顯慶, 欲爲收用, 而特除之繁絮, 或近渴縵未果焉。 爾與顯慶, 皆多年兼史, 而爾則甄復後滿瓜陞資, 未爲實職, 顯慶壬申年登科, 明年爲七十, 猶在角圈之列也。 際見爾疏, 盛陳經綸, 殊可嘉也。 許令廟堂稟處。” 鄭始元疏曰:
“我東沃野數千里, 間多空地之棄, 以其灌漑之無計也。 今臣別有設筒引水之法。 自高而流, 從地形而下者, 水之本性也。 作田處雖在水下, 然間阻邱陵, 及有深壑, 則引水中斷, 難以踰越。 故雖有沃野, 廢棄者以此也。 臣所謂設筒之法, 陶甄瓦筒, 而中通外圓, 自上流鱗次埋之於土中, 導水於筒中。 而若逢川壑, 則隨地形埋筒於水底, 越其低, 若阻高岸, 則從地勢而立筒於岸邊, 踰其高者。 無他理也。 源流自高而入于筒中, 則水積中而流不息, 故陞高而踰者也。 如是引水, 則不計高低遠近, 灌水作田, 奚特築堰防洑之利乎,”
批曰: “爾旣別有設筒引水之法, 發前人所未發, 質言於章奏。 仍言其制之陶甄瓦筒, 中通外圓, 壑則埋而越其低, 岸則立而踰其高。 試之則可知其利用與否, 卽令戶惠堂, 取考論理草記。” 戶曹判書趙鎭寬啓言: “臣與惠廳堂上鄭民始, 招問鄭始元, 則其言以爲: ‘水之趨下, 其性然也。 若夫設機激巧以行之, 終非水之性, 故可暫而不可久, 可少而不可多也。 今所陳設筒引水, 亦似乎激而行之。 其實則上流受處, 高於下流, 洩處雖引之, 數百步之遠, 紆回曲折, 或起或伏, 畢竟噴起處, 較之筒口, 蓋落下幾許。 此無他。 水之性, 終必趨下故也。 嘗裁竹筒試之鄕中, 明知其無疑。 若異瓦爲筒, 其交接處, 兩口相銜, 外設小圍, 間實油灰, 可免滲漏之患云。’ 臣等依其言, 以竹筒試之, 則數轉起伏, 如山字形, 而亦果引起吐噴如法。 且見其所爲書等, 不過兩葉, 只論此法, 別無他制之旁及矣。 大抵從古水器如龍骨王衡之類, 皆是卽地引水, 激而高起, 終非水性之自然, 故不能久行無弊。 至若農書中連筒法, 特推而大之耳, 比他取水之器, 似可易行, 然而夏則沙或遇潦而中壅, 冬則水未盡洩而內凍, 春秋修補, 勢所必至。 雖以瓦陶爲之, 引之數百步或幾許里, 則費用多少, 特其餘事, 其所燔成者, 能不苦窳而合於用, 有未可必。 但其所言, 不爲無理。 渠是南土之人, 地形水勢之可設處, 想必稔知。 令本道知委地方官, 使之依其言擇地設施, 待其事功之成就然後, 頒示諸道。” 從之。 李宇烱疏曰:
“臣於水利之說, 粗有講究, 曾以造輪灌漑之論, 陳疏蒙批, 一則令度支詰造, 一則令道伯驗試。 事鉅力綿, 荏苒至此。 而臣前疏所未及陳者。 卽(伏)〔洑〕堰之法也。 今世築洑者甚多, 而皆不得其法, 枉費財力, 不見成效。 臣竊以爲築堰亦有道。 多燔方甓, 稍大於瓦, 而廣各數尺許, 鱗次作溝, 自下漸上。 欲其蓄水則閉塞之, 欲其泄水則開導之, 比之疊石扃木之法, 尤爲便利, 而所築自堅確。 臣嘗於《農政全書》, 攷其圖譜, 而得水柵之法, 始知築洑之妙方。 何者, 有衍平沮洳之地在於川邊, 可作澤農者, 就其上流之多灘處五里十里之間, 有石岸盤結, 合作洑口者, 設柱施杙, 而其間架, 必如長廊之制, 橫截一川之廣。 而柵之上下兩傍, 植以編木, 使大石不漏, 而石則不計巨細, 雜聚而亂庤之, 以其所編之木爲界限。 則其柵一成, 隱然若石巒, 橫亘防水甚鞏, 而用木至少, 築石實多, 則泥沙凝合其間, 雖有潦不少撼, 其策可以萬全。 若於沙川, 則用藁葦等物, 周遮于水柵之旁, 而塡土石其中, 使不得滲漏, 則所築亦堅矣。 過此以往, 其岸若高於川, 至一丈二丈, 必有軸有輪而後, 可以貯水而灌漑之。 水車之制甚夥, 惟龍尾爲最。 其器以圓木爲軸, 而上下均之, 其溝作螺旋之斜勢, 而隔以編墻, 圍以薄板, 用柒灰與瀝靑而塗之, 使之無罅。 作鐵樞兩端, 倣句股而竪之, 隨所處而作八齒。 次以臥軸之立輪, 其齒相接, 其旁一輪, 附以受水箑, 則三輪相應, 不用人力, 隨湍勢而自轉。 其水沛然, 由墻溝而湧上, 則其制視他車尤妙矣。 此外有高轉筒車者, 亦可用於流水。 視其岸而作大輪, 順流而架設之。 其輞則橫繫以板, 使之激水而轉之, 縱懸以筒, 使之挹水而瀉之。 則其功不下龍尾, 而得水差少矣。 至於陂澤井泉處, 地稍深卑者, 可以恒升車挈水。 其筒之長, 與岸均齊, 下端以薄板隔之, 隨其方圓而作孔, 鍛鐵爲舌, 以爲開闔之具, 別植長竿于板而上下之。 則此如皷爐鞴而風生, 水從筒中出, 而滾滾不撤。 若夫玉衡之盤壺雙筒, 與夫虹吸之法, 皆璘錫作之, 臣不能試之。 此其車制之大略也。 臣竊謂三南畿甸, 可以興水功者, 邑邑有之, 或爲新築, 或因舊址, 爲洑爲堰, 其利甚博。 然平郊廣陸, 旁帶大川, 不可築洑者, 水車不可無也。”
批曰:“飽聞爾孜孜於水利, 嘉乃誠力, 所以有造試之命。 而尙未爲焉云者, 近來事皆如此。 爾疏下廟堂, 此後籌坐時, 招爾細叩, 必令一試之。”
廉德隅疏曰:
“臣聞善敎不如躬行。 伏願殿下, 遵先大王已行之規, 行耕蠶之禮。 則此國家勸農之大政, 不勸而自勸矣。 農政, 一曰不擾民不奪時, 二曰助農種給農糧, 三曰豫則立勤則得, 四曰均田政闢土地, 五曰敎以義懲以刑。 何者, 民惟邦本, 本擾則難立, 時有農節, 節違則無成。 助農種給農糧云者, 孟子所謂: ‘春省耕而補不足, 秋省歛而助不給’ 之意。 今也則不然, 嗟我農民, 終歲作苦, 及其秋熟, 盡輸官府。 而實穀則盡歸於營府, 耗穀姦吏囊橐, 而農民受食之還, 不過皮穀而已。 年分告歉, 則或蕩減或停退, 或代穀許捧, 而貪墨姦猾之輩, 掩其行關, 鞭扑督捧。 至於無田土無族隣, 難捧者然後, 開示關文。 所謂蕩減與停退之實效, 盡入於中間弄幻, 實爲農民之大瘼。 而此弊最甚於北路者, 無他, 自癸甲以後, 罷暗行繡衣之故也。 豫則立, 勤則得云者, 春不早耕, 秋無所獲。 凡我農民, 胡不蚤蚤乎, 襏襫三農, 銍刈三秋者, 此《七月篇》所謂無非豫也。 且夫田政, 亦農政也。 北道量田在丙午, 而自戊己以後, 水道變易, 而田稅則一從丙午量案田稅。 若是不均, 而農政何以勸哉, 另擇道守臣, 均田政然後農可以穫也。 至若闢土地云者, 我國之廢四郡, 久廢不闢。 曾於甲寅, 西之慈城, 北之厚州, 兩鎭之地, 有許民闢菜之敎矣。 厚州設鎭三載, 民戶至八百之多, 而拘於邦禁, 不敢加闢。 許闢四郡, 使日聚之民, 入此作農, 則此實勸農之一大政也。敎以義懲以刑者,何也,闢土作農,飽食逸居,而不以義敎之,則民彝斁矣。敎之而若有犯科之人,則刑以治之,然後人倫可明,王章可擧矣。”
批曰: “親耕親蠶, 卽我列朝已行之典禮。 而顧今治敎政謨, 萬萬不及於列朝, 何敢先從儀節間事爲而修述乎, 修述之實, 在於丑月頒綸之有一分實效也。 北關之姑未差遣繡衣, 非未遑也。 前此旣言於臺臣之批, 而行將觀勢下送。 外此所陳, 當留意。” 劉宗爕疏曰:
“爲治之道, 責不專則事不一。 依《周官》司徒之職, 別立勸農司, 有土均之官, 有均水之職, 有簡器之吏, 俾令各自董飭於列州列邑, 一聽其便宜, 稟咨以行, 而以時巡審方伯守宰之勤慢虛實, 皆有以論啓。 則方伯守宰, 必有所勸, 而知所以蕫力矣。 農夫所患, 在於地征之不均, 水功之難力, 器械之不備。 若使地征均水功興器械備, 則天地人之時與力, 自然沕合, 亦豈待自上命令之一一提飭者耶,”
批曰: “地征與水功與器械三者敷陳, 爾說極有理。 勸農之宜有所掌之司, 爾言亦然。 竝許廟堂稟處。” 尹在陽疏曰:
“當今之世, 所當變通之時急, 若有八焉。 一曰均倂作, 二曰蠲白徵, 三曰禁南草, 四曰許民耕, 五曰充良役, 六曰矯糴法, 七曰減吏額, 八曰革科弊。 均倂作者, 實爲無土者之有土也。 蠲白徵者, 水田則有初不落種, 未移秧等災, 特許無稅, 獨於旱田, 雖有今陳舊陳, 樹木成林之地, 亦皆納稅。 目今民情, 皆願査陳, 俾無把束白徵之弊。 禁南草者, 生穀之土漸縮, 民財之艱益甚, 南草之害至此而極, 可不禁哉, 許民耕者, 毋論五軍門、各宮房、忠勳府、勢家田可耕處, 陳棄者多, 而居民起耕, 則本主還奪, 故永棄而不耕。 如此之地, 許與民耕食, 則民有生穀之利, 國有收稅之利矣。 充良役者, 良丁無實之弊, 去而益甚, 凡有除番軍官及除役村里者, 一倂革罷, 則可以充死者之番矣。 矯糴法者, 自今爲始, 糴穀與餉米, 皆折半留庫, 折半分給, 春間作錢, 一依京司發賣例, 乃於時準價之內, 減價許賣, 秋後從時直, 以其錢貿置新穀, 明春則以前春折半留庫者發賣。 凡於春秋市直之間, 雖有貴賤懸殊者, 減價之中, 每斗必取三錢之剩, 其餘盡歸之民。 則官無督捧之苦, 民免族隣之徵矣。 減吏額者, 毋論大小邑, 害及生民, 計其邑之大小, 稱其額之多寡宜矣。 革科弊者, 爲今之計, 京儒等四學敎授, 受五部擧案, 出各體科文之題, 試取其入格者, 各以其榜, 呈于太學, 則大司成以四學榜中人, 試于前, 呈于禮曹。 鄕儒則各其本官, 受各面單子, 出題試取, 一如四學之例, 各呈于禮曹。 大小科設行時, 照驗於禮曹所在, 則永無一人之蹂傷, 亦無一人之倖占矣。”
批曰: “爾因農務, 而敷陳諸條, 殊可嘉也。 竝作之均, 井田限田以外, 最好之規。 而綱擧然後目張。 雖以朱夫子通才達識, 亦於令行規制, 每致鄭重, 未嘗言其一朝卽改, 則此亦類是矣。 白徵之蠲, 爾言固是。 容俟稍熟之年, 擬試査陳之擧矣。 南草之禁, 禁之非難, 意或有窒礙處矣。 許民耕食於官田富民田, 陳棄處事, 此在於道伯矣。 良役黃白之弊, 可勝言哉, 除番除役之革與不革, 亦非朝家之更煩辭敎者。 但當以此考察列邑擧行之勤慢矣。 糶弊之半留事, 卽近所講究者矣。 大小邑吏減額事, 曾因他疏, 廟堂屢有覆奏矣。 科弊釐革, 卽初元詢諮中一條, 而荏苒至今者, 非謂無可施之良法, 法不能徒行。 鄕擧里選, 與孝悌力田等項名目, 施之於今, 萬有一有其名而無實, 則莫若初不輕施之爲合謀始之體也。 近予所以百里則必施於三司, 用人則必求諸牧民者, 欲使所用如所求也。 然而歷詢然後可決矣。”
鄭錫猷疏曰:
“臣請先論我國之地利田土農器, 後論不失時之義不失所之方。 沃沮, 山多而濱海, 帶方, 峽窮而川深, 樂浪, 西北背山, 東南開野。 三南, 水深土饒, 海西畿甸, 土薄而山峻, 瀕海多斥鹵, 近海多沙石。 臣嘗於級之中, 有所揣摩者, 可以遍用於一國, 而宜於燥濕高下者, 惟田車是已。 蓋其利有五。 春則有糞車, 一車之運, 當五牛之載, 一人用一車, 減四牛四人, 牛力紓而人力寬, 其利一也。 方農之時, 糞田尤急, 先一時則穀倍, 後一時則穀減。 若用糞車, 則敏事而及時, 其利二也。 秋則有役車, 方其收穫之時, 有牛有餘力, 無牛亦無任負之勞, 其利三也。 郡縣捧糴之時, 氷雪塞塗, 牛足怯滑, 人肩將穿, 若用役車, 則大者駕之, 小者推之, 其利四也。 且夫牛馬之病, 常在於背足, 由於駄重而力竭。 若用車, 則牛馬竝全, 其利五也。 臣聞祖宗朝, 欲行錢貨, 而民不悅, 時則有若故相臣金堉, 請行之自站舍。 始站舍者, 行路之所共由也, 耳目之所共慣也。 今車制亦自站舍始, 則必漸效而民不撓矣。 凡八路貢賦之輸, 例皆貰馬, 計千里而償二千錢, 一駄之貰, 殆當一馬之價。 若自郡縣凡駄運之物, 皆以車輸, 則站舍之貰馬者, 亦將以車代馬, 不失生涯, 轉轉相效, 將遍於國也。 (失其所則器不足賴也。)” 又曰: “當今之急務, 莫如祛二害興四利。 何謂二害, 曰冗官也, 冗兵也。 何謂四利, 曰擇賢材也, 均田制也, 闢閑土也, 和糶糴也。”
批曰: “還弊, 旣發策以問之, 寧或爲無用之空言, 數十年前營閫之臣, 捐俸防役等瑣屑名色, 幾皆罷其券而停其債, 畢竟卽不過容手於取耗之穀, 內而京司亦然。 江蔘也, 婢貢也, 特其大者, 餘不可殫擧。 夫法也者, 如器之置於地, 惟在用之之如何。 還穀之爲小民切痼之瘼, 非不知也。 外此減貢而給代, 被惠而息肩者, 又不啻幾十萬。 則若不從他, 別般講究於行之兩便之道, 徒然發令曰, 云云, 豈可乎哉, 附陳經綸, 下廟堂, 看詳措處。” 鄭道星疏曰:
“凡稻種, 有强者有柔者, 柔者遇旱則難茁而易枯, 强者於水於旱, 竝無害焉。 蓋稻種之强者有三, 天上稻, 斗於羅山稻, 淳昌稻是也。 三稻之種, 其性最强, 故小畬則注秧, 乾田則付種, 而二月翻耕, 三月付種, 則晩秧移揷之時, 此三色苗, 半已成長, 而結實亦早, 雖遇水旱, 少無所損者也。 三南多水田, 五道多旱田, 若使種三稻之法施行, 則於三南其利尤博矣。 春窮之時, 貧難辦種, 易致失時, 特貸還穀, 俾免失時。 又自官分付里民, 使之起墾, 則野無陳荒之弊矣。凡民惰其四肢,不歸於農者,別遣繡衣,廉探遊衣食之民,則民皆力穡矣。”
批曰: “爾疏不過十許行, 而三稻之種法, 牛禁之敷陳, 皆懋實適用之言。 有司堂上, 旣經完伯, 招問意見, 一以爾說, 試之於南邑可試處, 向後食效必也。” 敎曰: “所以問之者, 懋其實也, 應旨亦當然。 近來諸疏中質實, 初見於此人。 左相招見, 如可合用, 草記。” 備邊司啓言: “鄭道星招問來歷, 則渠以家計稍饒, 補賑蒙帖加之恩, 其不頗解文字, 故意授搆呈云矣。 人旣務實, 言亦近質, 而合用與否, 有不敢質言。” 金夏璉疏曰:
“水車之材, 專用眞檀兩木, 沿海之民, 辦得無路。 今夫慈城、虞芮、閭延、茂昌四郡, 連抱之木, 可作車輪舟楫棟樑之美材, 彌滿山野。 沿海之民, 自願往取水車舟楫之材者, 成給公文, 各從所願, 或作水車, 或造船筏, 自慈城界順流而下, 則至龍川海口三四日程, 自龍川達于京江及三南, 不過一旬之間。 水車制作之法, 前察訪李宇烱外, 無人知者。 特送李宇烱于慈城, 多作水車, 沿海邊每州各賜一乘, 使每邑農民效之, 未滿數年, 水車利農之法, 遍行國中, 而舟楫之相資於農民者, 必不少矣。”
批曰: “疏辭竝令廟堂, 論理稟處, 俾益農政。” 李敬五疏曰:
“我東之田疇多荒, 杼軸俱空, 非由乎農書之不備。 自有其本之當先者。 傳曰: ‘一人不耕, 天下有飢。’ 我國之民, 冒托於吏胥輿儓之藪, 追逐於廛市駔儈之叢, 下於此則乘便學商, 闖機爲盜, 皆欲不勞而食。 流亡相續, 戶口日縮, 而八域黎庶, 不耕者殆過半矣。 臣愚竊以爲, 當今農政, 先務在於盡驅遊食之民, 緣南畝而歸於農, 而後農書可用也。”
仍論本府採蔘之弊, 乞賜停罷。 批曰: “爾所謂使民緣南畝, 歸於農然後農書可用, 爾說約而盡。 今之弊俗, 惟知趨錐利, 任他不抑, 何望反本, 先從爾邑之曠土, 躬作田畯, 今日闢一隅, 明日墾一頃, 能有日闢之效, 則可謂不負知爾。 下諭道臣, 來頭夏冬殿最時, 該倅實績, 措語懸註於題目之下。 所謂 ‘勸採之規, 徒開蔘商牟利之路, 釀成一道妨農之害’ 云者, 事理皎然。 旣聞之後, 何可任其爲弊, 下諭道臣, 斯速狀聞。” 金萬疏曰:
“因天時資地利修人事, 爲農之本領, 興水功相土宜利農器, 爲農之先務。 則南北之宜不宜, 峽野之喜不喜, 注秧付種之利害, 烟茶火粟之便否, 此乃節目間事。 而我東雖小, 南北爲數千里, 風氣之不竝, 土性之逈殊, 固其理也。 注秧得失, 此最可商。 水根源源, 則水付可矣, 土性柔細, 則乾付可矣。 濕不沃旱不乾, 或土塊頑硬, 鍬犂不入, 水治則成, 旱治則不成者, 在在參半, 注秧非嬾農之爲, 蓋土品之使然。 禁其太過則可用法禁之, 臣不敢謂必爾也。 火粟之利亦大矣, 名山陊剝, 果有其慮, 而千百年流來之弊, 恐非一朝之可禁也。 所可痛禁者, 烟茶也。 欲禁其種, 必也先禁其吸。 糶糴之許多奸弊, 其本在於混置, 欲捄其弊, 莫若面庫之爲得也。 臣以爲各於其邑, 仍舊倉舍, 就其中隨面數立壁隔間, 而間之闊狹, 視面大小, 該面所納, 不許越間推移, 而壁揭面名, 區以別之。 糴時令民自納于庫, 糶亦如之, 庫門上下。 上設鎖鑰, 不許無時開閉。 各營耗穀及官下雜役穀, 不得不以時出納者, 別立一庫。則民視官庫如私藏, 惟恐穀之不精矣。”
批曰: “爾疏所陳, 不可以草草應旨言, 爾誠可嘉。 廟堂論理粘啓。” 備邊司覆奏曰: “移秧隨土宜, 火粟不可禁, 禁烟茶修堤堰等事, 此皆已陳於前後覆啓。 糶糴仍其倉舍, 隨面數立壁隔間事, 如欲以官庫而寓社倉之意, 使民視同己物, 相爲自謀, 則今此所論, 非無可採。 而邑有大小, 面有多寡, 有難一例施行。 先從彦陽一邑, 使之博詢民情, 無煩民力, 試其便否, 如果有效, 則列邑視傚, 以爲次第推行之地事, 分付該道。” 敎曰: “還弊先試該邑甚當。 嚴飭該倅擧行。” 金養直疏曰:
“臣聞《農家雜說》曰: ‘芙蓉花開之時, 取其第一朶, 秤其輕重, 以知來年米價之貴賤。’ 又曰: ‘欲知來年某穀之爲豐, 先看今年五木茂盛, 種之。 禾生於棗或楊, 黍生於楡, 大荳生於槐, 小荳生於李, 麻生於楊或荊。’ 臣見昨年棗葉盛而老楊茂, 今歲禾農可勸。 又見《四時立節歌》曰: ‘冬至天晴無日色, 來年正唱太平歌。’ 立春詩曰: ‘但得立春晴一日。 農夫不用力耕田。’ 《除夕歌》曰: ‘但逢此日淸明好, 分付農家好做懷。’ 臣見昨年冬至, 天色果晴, 而日光依微, 立春又復淸明, 兼是除日。 臣以三句詩意推之, 皆是吉兆。 又見正朝, 微有西風, 東方有黃雲吉氣, 今歲之豐穰可占。 又見《古方》云: ‘正月初三日雨, 四月水多, 四日雨, 五月水多。’ 臣見今年正月初三日, 天有雪, 初四日夕雨, 是爲吉兆。 臣以爲四月五月, 卽農家最緊之月, 農民趁早耕種, 及是兩月, 無失其務, 則其後雖有小旱, 不甚爲害。臣以爲,今年勸稼, 以早爲可。”
批曰: “所陳儘有意見。 許令廟堂稟處。” 李齊華疏曰:
“《農政全書》, 自古傳授良法。 刊出此書, 廣布中外, 則爲務農之一助矣。 抄出貧民, 分授富戶, 授田土助種糧, 則當年內已無身役還上之難, 而行之數年, 能自樹立矣。 國內堤堰, 無邑無之, 而堙塞乾涸。 且不洑之禁上洑, 已成痼弊。 可合開洑處, 一幷開洑, 則實爲民國之幸。 甘藷之種, 最宜救荒。 廣布諸道, 實爲補穀之一助矣。 一自庚辰年, 嶺南稅穀, 以嶺民嶺船運納, 六十餘船之改造改槊, 無年無之, 元定株數之外濫斫, 不啻爲三四倍, 故左右沿封山, 今焉童濯。 且下餘石船主沙格, 俱是農民生手之故, 臭載之患, 歲所不免。 無寧漕倉依舊仍置, 只使京江船人, 曳船下來於各漕倉, 分載以納。 則判異生手可免頻頻致敗之患。 六十船隻, 分定三隊, 各自其隊, 另加檢飭, 亦或有臭載, 則令當該隊二十船, 幷力備納。 則嶺民自歸安業, 封山松濫所之弊, 該邑民再徵之患, 可竝除矣。”
批曰: “所陳多有可用之語, 許令廟堂, 粘啓稟處。” 備邊司覆奏曰: “《農政全書》, 廣布中外事, 農家者流, 此書最稱詳備, 兩南中稍待年豐, 使之刊布。 抄貧民授富戶事, 先恤窮農, 卽同井相助之義。 鄕有善俗, 自可不勸, 而能自官發令, 則必有抑配之慮。 至於身還移徵, 尤非導民成俗之意。 置之。 堤堰事, 堤堰冒耕, 法禁至嚴。 當此申飭修築之時, 反請許墾, 似由於未諳事體之致, 竝姑置之。 甘藷事, 甘藷實爲救荒之要種。 南沿諸邑, 間多有之, 年前亦已申飭培養, 而實效有無, 姑未可知。 更爲另飭諸道。 嶺南漕船事, 漕船實爲松田之耗蠧, 此所以有船制變通之議也。 今此京江分載之論, 雖不無意見。 漕倉設置, 漕卒團束, 已有定制, 不可以些少弊端, 遽議更張。 請姑置之。” 敎曰: “《農政全書》, 廣布中外事, 近來印本, 在處稀闊, 是豈命撰命印之本意乎, 今番所陳諸說中, 有可採用者, 就類補輯, 以爲廣頒之地事, 分付鑄字所。 甘藷取種事, 其功之幾與菽粟等, 充腸潤胃, 味亦悅口。 所以購貿栽植之方, 亦不必別頒新令。 令各該道臣, 各思食效之道, 無或看作例飭。 嶺漕船更作京作隊船事船粟轉運之政, 夙宵苦心, 在於減其造船, 通用兵船京船, 使山木不濯, 江流不塞, 竝與農政, 爲俱益之道。 前旣歷詢, 第當一番踐言而已。 此條姑置之。 以待來頭諸道應旨之疏與冊, 廟堂回啓與批旨, 必皆錄送該道, 使道臣, 招致其人於公堂, 具公服面傳, 一以信朝令, 一以尊體貌。”
時投疏者多草野, 而上一例優批, 令廟堂稟處。 金天肅、尹溥、廉德隅、康堯愼、張志瀚、李尙熙、李仁榮、尹弘心、鄭應參、金應麟、崔世澤、金致大等疏, 無所建明。 致大文辭, 視諸人較長, 特賜《朱子書》一部。 張以下, 進農書者, 輒命廟堂稟處, 有寸善可取, 令內閣, 採入於新編農書。 李晩祿、李文哲首先應旨, 晩祿又言, 爲治莫尙於得人, 上, 以爲知所本, 賜《大典通編》, 文哲賜韻書。 柳鎭穆最稱旨, 除官。 鎭穆農書曰: “臣伏奉綸音, 敢將訓農治農利農害農者, 條列爲十五目。 一曰申明鄕約法, 蕫勸農民也。 一曰分田三等而付種移秧, 各隨其宜也。 一曰沿野邑各倉儲置雜穀, 種還以備代播也。 一曰廣開隄堰, 以通水利也。 一曰嚴山禁以厚水源也。 一曰頒下水車之制, 以利引水也。 一曰均平水利, 以惠小民也。 一曰參考《農家集成》, 成爲今農書也。 一曰夏月農時之不擾民也。 一曰綿田給災, 以勸綿農也。 一曰水田飭種秋牟, 以裕農食也。 一曰倣行社倉法, 以助農糧也。 一曰春夏耕耘, 必先窮農也。 一曰博訪治牛疫法, 附之農書也。 一曰貴農勸士, 化成鄕俗也。” 林博儒亦進農書, 鎭穆鄕人也。 與鎭穆同進書曰: “一, 擇立農官, 以勸課勤慢, 付之殿最, 蕫勸惰農也。 一, 禁山養木, 以厚水源也。 一, 改修川防, 增置堤堰, 以通水利也。 一, 修防置堰之後, 嚴立科條, 以均灌漑也。 一, 頒行水車制度, 以利水功也。 一, 定立限田法, 以起惰農也。 一, 畓分三等, 以爲移秧付種代播也。 一, 沿邑各倉, 換置雜穀還, 以備代播也。 一, 還餉分給, 必於當農前。 一次優給, 以備農糧也。 一, 申明鄕約法, 以爲資力務農也。 一, 貴重農夫, 使民趨農也。 一, 嚴禁烟茶, 以廣農田也。 一, 相土品卞穀性, 以備耕種也。” 備邊司覆啓言: “取見柳鎭穆冊子, 其條不紊, 其說有據, 畢竟以鄕約之講行爲歸趣。 第觀農政之漸有成效, 一依漢法, 別立孝悌力田之科, 亦未爲晩, 請今姑置之。” 敎曰: “嘗見先正宋文正敍公州牧使申渢所編《農家集成》曰: ‘朱子書中勸農文數條, 固群黎百姓之所日用者。 其曰孝悌, 其曰禮義, 未嘗不竝及於修堤翻土之榜, 則不待他求而知所以用其力矣,’ 旨哉言乎。 可以爲農家之指南, 化俗之源委。 而近見公車日堆之章, 未有說及此者。 惟公州生員柳鎭穆能言之。 編是書者, 卽公牧也, 今於一百四十有六年之後, 其言又出於公之士者, 可謂奇哉。 所陳十五條, 皆是南康榜文之支流也。 其所謂申明鄕約, 蕫勸農民者, 卽朱夫子中春之月, 載酒食出郊, 延見父老, 以告農桑之務, 孝悌之方也。 其所謂付種移秧, 各隨其宜者, 卽朱夫子浸種下秧深耕淺耨之意也。 其所謂雜穀代播者, 卽朱夫子趁時犂翻, 多種二麥之法也。 其所謂頒下車制者, 卽朱夫子有塾者賴車戽之術也。 其所謂均分水利者, 卽朱夫子陂塘淺漏, 合力開掘之策也。 其所謂農時不撓者, 卽朱夫子貧民下戶, 枉被追呼之諭也。 其所謂綿田勸農者, 卽朱夫子以星子知縣王文林種桑等法, 發下三縣之規也。 其所謂倣行社倉者, 卽朱夫子以諸葛、千能等家米, 置倉給代之論也。 其所謂耕耘必先窮農者, 卽朱夫子窮民歡喜之本也。 其所謂訪治牛病者, 卽朱夫子耘犂之功, 全藉牛力, 及時餧飼, 不得宰殺之訓也。 其所謂貴農勸士者, 卽朱夫子學道修身, 興起民戶之旨也。 若其嚴山禁者, 卽朱夫子所不言, 而以其南方多水而少山也。 此固已試於古昔者, 專係於守令蕫飭之如何。 自廟堂, 以所進冊子中條件, 關後錄, 行會於本道外七道及華城府, 俾各看詳, 勸飭管下守令, 可以效倣者, 着意採施, 期有實效。 其中糞田之利, 尤爲要切於作農。 柳條之排田也, 浦泥之和灰也, 蓋屋之朽藁也, 醎水之澆土也, 以至地肥, 則鋪檟葉而防蹲縮, 土浮則均細沙而收倍利, 自有妙方。 惟人不行, 此在勤與惰之間耳。 故向於綸音, 拈出勤之一字, 以爲一篇之字眼, 今此敷析, 能以勤爲歸, 亦甚嘉。 乃以此批旨, 下送該道, 使之謄給於柳鎭穆處。” 備邊司又啓言: “林博儒所陳十四條中, 十條, 與柳鎭穆所陳同。 其中定之限田也, 分還合等也, 嚴禁烟茶也, 勸民節用也, 乃是鎭穆所不言。 而限田則言非不是, 有難遽議。 烟茶則禁之固易, 亦不無效害之相參。 至若御供不可闕云云, 其說極爲猥屑。 鄕儒雖不識事體, 道臣豈可不察, 該道臣推考。 惟是分還一事, 不無可採。 令道臣試之營下邑民, 若爲便, 行之列邑, 亦無不可。” 敎曰: “限田事, 言非不好, 勢難容議。 雖以三代盛時言之, 一夫受田, 夏爲五十畝, 殷爲七十畝, 周爲百畝, 民生日用之繁, 田亦加畝, 蓋可知也。 晋太康時, 雖有一夫七十畝之制, 而其還其受, 史不傳法。 魏孝文始令均田, 而不過因田之在民者而均之。 唐太宗口分世業之規, 亦倣於此, 及至永徽間, 兼竝如故。 蓋自秦至今千六百年, 能行授田均田者, 不過二百載, 自不得不罷, 其勢然也。 以我國六路帳付之田, 摠較之京外人口, 除文武官三千餘人, 雖人給一結, 不足爲六百六十三萬六千餘結。 朝家自御極之初, 首先留意於經界之政, 每一念至, 夜輒繞榻, 而未得其要者此也。 分還合等事, 有班名而無率丁者, 借乞隣里而受還也, 每每閪失, 自是通患。 而雖於數三斗受去之時, 猶不免官屬之侵漁, 店主之費用, 況其數三包竝受, 其能專一於種資農糧, 有未可必。 姑爲試可於一二邑, 亦未爲不可。 烟茶事利害相半, 有如禁釀, 不可輕議。 新豐張公之言, 足爲可據。 勸民節用事, 惟在朝廷導率之如何。 何責乎民, 自卿等苟存心於(師)帥儉, 自可如置郵。 予亦以此自省矣。” 張、安聖鐸, 又稱亞於鎭穆。 備邊司啓言: “張農書, 其一, 相土宜播其種事也。 相土播種, 向下綸音, 有所提諭, 大小民人中, 如有通曉之人, 則可以興起慕効。 姑難以某土某種爲言, 有若條令者然, 置之。 其一, 農器中水車役車, 尤緊於農功, 而其中役車則可用獨輪車事也。 水車之制, 非謂無其理也, 非謂無其效也, 亦非謂無其法也。 第念其制巧而其費多, 故有非庸匠之可造, 凡戶之可辦。 此我東所以未嘗昧其制而不能興其利也。 說者以爲: ‘中國之所用者, 何處不可云,’ 而中國之匠巧而工, 中國之財豐而裕。 自其至貧而觀之, 則無異我國之貧民, 自其稍饒者觀之, 其爲資産, 不啻千萬於我國之饒戶。 故一車成而衆匠效, 一村成而萬戶應。 此所以造之易而行之廣也。 今欲試之於諸道, 則必也營邑合力, 然後可造一二車, 而小民人之轉相模倣, 萬無其道。 至於役車, 土俗各異, 亦非可以發令而行之者, 置之。 其一, 湖南改量久曠, 田地不均, 賦稅不平事也。 改量之政, 已陳於他覆啓。 待年豐稟定擧行。 其一, 茂朱、順天之間, 淘金者絡繹, 農夫益鮮, 一切禁斷, 則游食之徒, 自然歸農事也。 採金之禁, 法典本嚴, 害農之事, 亦莫甚於此。 各別痛禁之意, 嚴飭道臣。” 允之。 敎曰: “其中農時之詳陳, 儘有意見。 其云: ‘雨水翻麻田, 驚蟄備農器, 春分耕早稻, 淸明耕早黍, 穀雨造鋤, 立夏耕水荏, 芒重收苧麻, 夏至收秋牟, 立秋耕蕎麥, 處署穫早稻。 必先時翻耕, 先時蓄水, 亦趁時移秧, 趁時耘耔。 移秧之過二十日後, 卽初耘, 初耘之過十三日後再耘, 再耘之過十五日後三耘, 則奄觀銍艾矣。 若違此時, 則欲助苗長, 其可得乎,’ 云者, 其所爲說, 擺脫科臼, 質實可喜。 且以鋤耞耘耔之經歷, 一一條陳。 令該邑倅, 別差保介之任, 考其秋成後, 勤慢報營後狀聞事, 分付道臣。”
정조대왕 애책문(哀冊文)
애책문(哀冊文)
경신년 6월 임자삭(壬子朔) 28일 기묘일에 정종(正宗)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이 창경궁(昌慶宮) 정침(正寢)에서 훙어하시고, 그해 겨울 11월 기묘삭 6일 갑신일에 건릉(健陵)으로 영원히 옮겨모시게 되었는데 예에 의한 것이다.
관의 굄틀이 열리고 상여도 동시에 채비가 되어 이 좋은 날을 택하여 저 현궁(玄宮)으로 가시는 것이다.
사람도 영령들도 다 흐느껴 울고 하늘도 땅도 빛을 잃었다.
이 넓고 화려한 궁궐을 떠나 어두운 저 세상으로 떠나시려고 한다.
이때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시고 하직하는 상엿줄에 아픔이 서리었다. 구름 타고 가시는 길 붙들려해도 붙들 수가 없고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복받쳐 목이 메는 것이다.
하루에 세번 문안할 길이 영원히 막혔으며 어느덧 5개월이 지나 장례치를 날이 되었다. 그리하여 하신(下臣)에게 말씀을 내려 이 애책을 쓰도록 하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 복희(伏羲)·신농(神農)으로부터 성탕(成湯)·문왕(文王)에 이르기까지는 성(聖)과 성(聖)이 계승하여 제왕(帝王)의 문호를 이루었으나 공자(孔子)는 지위를 얻지못해 사도(斯道)가 아래있기 시작했고 한(漢)과 당(唐)을 지나면서 세상은 기나긴 밤이었습니다.
한번 가면 다시 오는 법이기에 우리 성군께서 그 시기에 맞추었으니 천운으로도 다시 빛날 때였으며 타고난 상지(上知)의 바탕이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합문[閤]을 나와 영준(英俊)으로 뽑히시고 성조(聖祖)께서는 효성스럽다 하시면서 은인(銀印)을 내리셨습니다.
정무를 총감하시면서는 천지의 질서가 다시 정돈되고 밝은 태양이 내리비쳐 쌓였던 음(陰)들이 무너져나갔습니다.
즉위 벽두의 하교가 인륜을 세우자는 것이었으니 뉘라서 그 기강을 범하여 베임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성내지 않아도 다 무서워하고 나라 전체가 심복을 했습니다.
너희 조상을 생각지 않느냐고 교목세신들을 타이르시고 이 세상 모든 일이 오직 의리뿐이라시면서 내가 사도(師道)를 맡은 것은 마지못해 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정유일(惟精惟一)의 심법(心法)은 물려받으신 전통이며 저울추같이 저울대같이 구차함이 추호도 없으셨습니다.
도를 따르면 길하고 어기면 패덕(悖德)이 되나니 둘로도 말고 셋으로도 말고 순(順)과 역(逆)을 살피라고, 20여 년에 걸친 정치의 강령(綱領)이 바로 그것이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늘의 법도에 순응하는 것은 요(堯)를 본받으시고 선왕을 못잊어 사모하기는 순(舜)과 같이 하셨으며, 일각이라도 아껴 부지런히 공부하시고 중도(中道)를 세움에 법도에 맞게 하셨으며, 원대한 규모와 거룩하신 공렬로 집대성을 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그 명성 그 밝음이 넘쳐흘렀습니다.
사석에서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상제를 대하듯 지성스러웠으며 종묘에 들어서는 오직 경건과 진실을 생각하고 궁원(宮園)에 있어서는 규모를 모두 알맞게 정하셨습니다.
가고 안계신 어버이 생각에 때로 단에 올라 분향을 하였으나 물은 흘러 꼭 동으로 가듯 왕실의 정통만은 그대로 지켰으며 밤낮으로 피로도 잊은 채 경사(經史)에서 도를 찾고, 가을 겨울 즈음에 농사일이 대강 끝나면 과거를 보여 인재를 선발하면서 그 평점을 엄밀히 하고 모든 평점의 기준은 오직 주자학에다 두셨습니다.
상자를 메운 수많은 책들이 은하수가 돌아 비치듯 법식이 되고 교훈이 되어 자손을 돕는 길이었으며, 성균관에서 훌륭한 선비를 길러내고, 표기(豹旂)·조장(鳥章)을 세우고는 군대 조련도 하셨습니다.
낮은 집에 검소한 생활과 화색(貨色)을 멀리했던 엄한 규모는 사관이 이루 다 쓸 수 없을 만큼 백왕(百王)의 모범이었으니 해와 달처럼 밝아 비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흐르는 강과 바다 같아 만물이 다 무젖었습니다.
맑고 평이한 길을 걸으시고 아무 하는 일 없이 팔짱 끼고 보위를 지키신 것 같았는데도 때맞추어 이슬내리고 바람이 불어 하늘의 사랑이 내리도록 하셨으니 지난 역사를 다 들추어도 이보다 더 큰 공로를 남긴이는 없었습니다.
정통은 삼황(三皇)·오제(五帝)의 정통이요, 학문은 주자(周子)·정자(程子)를 겸하신 학문으로 그 군자(君子) 만년토록 복록이 진진하고 떠오르는 태양처럼 차오르는 달빛처럼 끝이 없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풍상(馮相)7497)이 갑자기 요기를 아뢰자 자연의 조화 따라 하늘로 오르시고 궁궐을 비운 채 임어하지 않으셨으니, 아, 슬픕니다.
용수염이 턱에서 빠지고7498) 상여가 떠날 채비를 차렸으며 새벽 파루가 시간을 알리고 운아삽이 앞길을 알리고 있습니다.
훨훨 타는 화톳불은 빛나신 덕이 아닌가 싶고 뜰에 진열된 장식들은 장엄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온누리를 덮으신 은혜 아득하기만 하여 하늘과 땅을 보고 울어도 따를 길이 없으니, 아, 슬픕니다.
떠오르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하는 조화의 기틀은 미묘하여 알 도리가 없기에 성인(聖人)이 하는 일은 그 몸에 도(道)를 쌓는 것입니다.
효성은 신명을 감동시켰고 사랑은 우주를 감싸셨습니다.
그는 신에게 제사 모시는 일로도 나타났으며 문장과 덕행으로도 나타나 삼고(三古)에 비해보아도 뛰어나 유감될 것이 없었으며 육위(六位)7499)가 각기 때맞추어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였습니다.
수많은 시냇물이 흘러 한 곳에 모이듯이 백성을 교화하시고 효도를 표방하여 백성들이 느끼고 따르도록 하셨는데, 왜 그 뜻을 못다 펴시고 뭇 백성에게 원통함을 안겨주셨습니까? 아아, 슬픕니다.
태양은 빛을 잃고 하늘이 궤도를 이탈했습니다. 성교(聲敎)가 아직도 부족한데 휴운(休運)이 중간에 막혀 님께서는 이미 멀리 떠나시고 앞으로 험한 길이 많을 것인데《춘추》를 읽고자 한들 어디에서 읽을 것이며, 준수한 선비들은 누구를 본받을 것이냐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거리를 누가 있어 밝혀주며 거센 물결은 누가 있어 막아줍니까?
다만 백성들 생활이 족하고 안정되었기에 그 덕을 잊지않고 받들어 주선할 뿐입니다. 아, 슬픕니다.
정사를 대신 살피시는 성모의 모습도 처참하고 상중에 계신 어린 왕의 얼굴 또한 너무 가엽습니다. 자리에 계신 지가 어제와도 같은데 지금 어느 곳에서 만사를 잊고 노시는 것입니까? 긴긴 밤은 새지 않고 시간만 자꾸 흘러, 가고 또 가는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슬픔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영결할 때가 되었습니다. 고요하고 아늑한 궁궐을 버리시고 저 험준한 산으로 가신단 말입니까? 술을 부어 옮겨가는 것을 고하옵고 상여끈을 늘여 조도(祖途)로 나가고 있습니다. 쌓이고 쌓인 그리움에 터지는 통곡소리 아, 어느새 천고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아, 슬픕니다.
남쪽에 선원(仙園)과 이웃하고 있는 산릉은, 세상 끝까지 미쁨을 받으셨기에 땅에도 좋은 기운이 맺혀 백호가 정기를 날리고 청룡도 그와 맞먹게 좋으며 샘물 연연히 흐르고 선대의 능도 가까이 있습니다.
수려한 기운이 한 줄기 산자락에 모여있고 천봉의 아름다운 정기가 거기 집결되었으니 유명(幽明)이 정녕 다름이 없을진대 영혼인들 무슨 간격이 있겠습니까? 아아, 슬픕니다.
세상에 장차 도가 흥하려고 우리 임금되시고 스승되셨더니, 백성들이 복이 없어 우리 부모를 여의었구려.
한번 가신 길 다시 못 돌아오셔도 지극한 은택은 여기 남아있습니다.
형범(型範)은 금석(金石)과 함께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예악(禮樂)은 우로(雨露)가 되어 우리를 풍요롭게 할 것이니 그 크신 덕을 무어라 이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빛난 업적 이루 다 쓸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시며 날마다 밝게 비추어 보셔서 사왕(嗣王)이 광명하시고 현신들이 잘 보필하도록 길을 열어주소서. 남이 다 아는 사실만을 푸른 옥돌에 새겨 만분의 일이나마 그 덕을 나타내보려고 한 것이니, 아, 슬픕니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제술하였다.】
註7497]풍상(馮相):주(周)나라때 관직이름. 천문(天文)에 관계된 일을 맡아보았음.《주례(周禮)》춘관(春官) 註7498]용수염이 턱에서 빠지고:임금의 승하를 이른 것.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서 솥을 주조하여 그 솥이 완성되자 용이 긴 수염을 늘어뜨려 황제를 맞아 올렸는데, 함께 용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70여명의 측근 외에 미처 못 따라간 소신들이 모두 용수염을 잡고 늘어져 용의 수염이 빠졌다고 한다 《사기(史記)》권28 봉선서(封禪書). 註7499]육위(六位):건괘 단사(彖辭)에 “종시에 훤하면 육위가 각기 제때를 맞추어 이루어진다[大明終始 六位時成]”하였음.《주역(周易)》건괘(乾卦).
○哀冊文。 維歲次庚申六月壬子朔二十八日己卯, 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薨于昌慶宮之正寢, 是年冬十一月己卯朔初六日甲申, 永遷于健陵, 禮也。 龍輁纔啓, 蜃衛旣同, 簡此元辰, 卽彼玄宮。 人靈浩其於悒, 天地爲之慘淡。 離楓宸之赫弘, 指柏城之幽闇。 于時主上殿下, 哀結崩天, 痛纏辭紼。 攀雲馭而莫逮, 緬風樹而增咽。 廓三朝之永違, 倐五朔之斯遄。 降雍言於下臣, 託休光於瑤鐫, 其詞曰: “粤自羲、農, 曁于湯、文, 聖聖繼統, 帝王之門, 孔未得位, 斯道在下, 歷漢越唐, 世入長夜。 無往不復, 我后膺期, 運撫重熙, 姿挺上知。 髫齡出閤, 妙選英俊, 聖祖曰孝, 錫以銀印。 比總監務, 重整乾坤, 离明煥臨, 積陰崩奔。 初元之敎, 立我人極, 誰其干紀, 以誅以殛, 不怒而威, 薄海率服。 無念爾祖, 咨乃喬木, 天下萬事, 惟義與理, 任以師道, 予非獲已。 精一心法, 矧有所受, 金秤玉衡, 毫芒不苟。 惠迪則吉, 違曰悖德, 勿貳勿參, 審哉順逆, 二紀之治, 此其綱領, 愼終如始, 壹是以正。 欽昊法勛, 見墻儀華, 惜寸孜工, 建中視柯, 丕謨丕烈, 爰集大成, 天覆地載, 洋溢聲明。 燕不露寢, 對越潛誠, 穆穆淸廟, 洞屬其思, 有侐宮園, 隆殺咸宜。 風泉之感, 壇香時升, 萬折必東, 符于寧陵, 宵旰忘疲, 經史凝道, 曰秋冬交, 民事粗了, 經選手圈, 儼乎朱黃, 集粹會衷, 宗我紫陽。 百編在箱, 雲漢昭回, 爲典爲訓, 燕翼後來, 乃造吉髦, 泮水洋洋, 乃詰戎兵, 豹旂鳥章。 儉崇卑菲, 戒嚴貨色, 史不勝書, 百王所則, 日月有明, 容光無遺, 江河流澤, 庶物咸滋。 皇道淸夷, 寶扆垂拱, 調露時風, 導揚天寵, 歷選往牒, 功莫與京。 統接三五, 學兼周、程, 君子萬年, 茀祿穰穰, 如升如恒, 方期無彊。 胡皇天之降割, 怱馮相之告祲, 循大化而陟方, 閟宸景而厭臨, 嗚呼, 哀哉。 龍髯脫胡, 鷖輅上靷, 晨漏警節, 畫翣告引。 門燎怳其德輝, 廞衛儼其威容。 恩覆燾而已邈, 淚穹壤而無從, 嗚呼! 哀哉。 化機升沈, 眇不可窮, 聖人之作, 道積厥躬。 孝感神明, 仁包寰宇。 集于禮神之囿, 純于文德之圃, 軼三古而無憾, 御六位而時成。 紛川流而敦化, 撫孝理而感亨, 何志事之未卒, 抱至冤於群生, 嗚呼! 哀哉。 虞日淪精, 杞天傾軌。 聲敎未訖, 休運中否, 帝鄕已遠, 黃道多巇, 麟經無可讀之地, 髦士抱安倣之悲。 昏衢迷兮莫燭, 橫流倒兮孰障, 惟關和之則有, 奉周旋而不忘。 嗚呼! 哀哉。 聖母攝政, 簾儀悽惻, 沖王在疚, 戚容深墨。 黼座如昨, 眞遊何處, 脩夜不暘, 靈辰斯遽, 去復去兮安適, 悲莫悲兮永訣。 違閭闔之靚穆, 卽岡坂之嵽嵲, 㪺斗黃流而告遷, 纚素紼而就祖。 齎孺慕而一慟, 遂奄成於千古。 嗚呼! 哀哉。 惟南有岡, 隣于仙園, 感孚終天, 氣結厚坤, 白虎騰精, 靑烏叶吉, 泉源綿聯, 松梓邇密。 蘊靈秀於一麓, 結佳氣於千嶂, 諒無間於幽明, 豈有隔於精爽, 嗚呼! 哀哉。 道之將興, 兼我君師, 民之無祿, 喪我考妣。 仙輧不返, 至澤空留。 型範與金石不泐, 禮樂幷雨露同流, 蕩乎大德之難名, 煥乎至業之莫述。 冀於昭之日監, 牖緝熙與肩怫。 徵顯謨於翠珉, 庶彷像其萬一, 嗚呼! 哀哉。【領議政沈煥之製。】
정조대왕 묘지문[墓誌文]
지문(誌文)
우리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이 왕위에 계신 지 13년 되던 해인 기유년에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水原府) 화산(花山)으로 옮겨모시고 그 원의 재전(齋殿)에다 어진(御眞)을 걸어두고는 거기에 혼정신성의 뜻을 담은 다음 그 읍에다 성을 크게 쌓고 또 호위의 뜻으로 갖가지 형상을 세웠다.
그리고 1년에 한 차례 배알할 때마다 눈물을 쏟으며 차마 일어나지 못하였다. 경신년 1월에는 현륭원 배알을 마치고 동쪽 산기슭에 오르시더니 위연히 탄식을 하며 이르기를,
“아름답다 이 산이여, 수신(守臣) 너는 여기에 비를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해 두도록 하라.”하였는데,
바로 그해 6월 11일 임술일에 병을 얻어 28일 기묘일에 창경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셨다. 그리고 앞으로 11월 6일 갑신일이면 그 동쪽 기슭을 따라 남쪽을 면으로 하여 성인(聖人)의 대장례를 치를 것이다.
아, 이 역시 하늘의 뜻인 것을 어찌하랴.
금상께서 신 행임(行恁)이 누구보다 남다른 인정을 받고 오랜 기간 가까이서 모시고 있었다하여 신에게 현궁(玄宮)의 기록을 맡으라고 명하셨다.
우둔하여 따라 죽지도 못한 이 신이 차마 그 일을 맡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 학식이 천박하여 성인을 이해하기에도 부족한데 천지같이 크고 해와 달처럼 빛난 그 덕을 감히 만분의 일인들 그려낼 수가 있겠는가?
아, 도(道)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기때문에 하늘이 성인(聖人)을 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고 스승으로 삼아 그 도를 온 천하에 퍼뜨리게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이들이 복희(伏羲)·황제(黃帝)·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였고, 공부자(孔夫子)만은 임금이라는 지위를 못 얻었기 때문에《시(詩)》·《서(書)》를 손질하고《춘추(春秋)》를 저작하여 소왕(素王)으로서의 일을 했던 것이다.
공부자가 죽고 그로부터 1백여년 후 맹씨(孟氏)가 나와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정화시킴으로써 공부자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진(秦)·한(漢)시대부터 이후로는 이단(異端)이 판을 치는 바람에 정학(正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었다.
송대(宋代)에 와서야 정자(程子)·주자(朱子)가 서로 이어 세상에 나와서 선왕(先王)의 도를 다시 밝혀내고, 이미 가버린 성인들의 뒤를 이어 후대
학자들의 길을 열어주었으니 그들 역시 맹씨 못잖은 공로를 남긴 분들이라 할 것이다.
정자·주자시대가 멀어지자 사설(邪說)들이 또 일어나고 중구 난방으로 너도나도 떠드는 통에 표준이고 법식이고 도무지 없었는데, 이때 하늘이 문운(文運)을 열어 그 도가 드디어 우리나라로 오게 된 것이다.
우리 선왕(先王)께서 왕위에 오르시고 천명을 지키면서 임금으로서 스승까지 겸하셨기에 덕이 높고 행실이 빈틈이 없었으며 학문이 높고 업적이 많았다. 주경(主敬)으로 근본을 다지고, 궁리(窮理)로서 앎을 넓혀나갔다.
오묘한 성명(性命)의 이치를 터득하고 조화(造化)의 원리를 꿰뚫어보는 지(知)와 만물을 동일체로 생각하고 천하를 한집으로 여기는 인(仁)과, 사사로운 자아를 극복하고 유구한 사업을 성취할 수 있는 용(勇)을 겸비하였던 것이다. 항상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감히 일을 폐하거나 안일에 빠지지 않았으며, 방대하고도 중후한 은택이 군생들에게 골고루 미쳐 체온으로 감싸주고 따뜻하게 길러주고 수많은 백성들이 오고 가고 번성하여 거의 삼고(三古) 시절의 기상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조종(祖宗)들이, 후손들이 번창할 만큼 덕을 쌓고 인(仁)을 쌓았기 때문에 하늘이 그를 위해 모든 상서를 모아두었다가 한 분의 성인을 내시어 이 나라가 한번 잘 다스려질 수 있는 운을 열어주신 것으로 남긴 풍도와 미진한 복이 앞으로 억만년을 두고두고 후손 대대의 힘이 될 수 있게 하셨으니 아, 그 얼마나 훌륭한가? 이에 드디어 손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피눈물을 닦고 돌에다 이렇게 쓰는 것이다.
왕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산(祘)이요, 자는 형운(亨運)이며, 영종현효대왕(英宗顯孝大王)의 손자이고, 사도장헌세자(思悼莊獻世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혜빈홍씨(惠嬪洪氏)인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요,
왕비 김씨는 증좌의정(贈左議政)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다.
이보다 앞서 왕의 백부(伯父)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일찍 죽고 자식이 없었는데, 급기야 장헌세자가 죽자 영종이 왕으로 하여금 효장의 계통을 잇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왕이 즉위하여 효장을 추존, 진종(眞宗)이라 하고, 비(妃) 조씨를 왕후로 하였으며, 장헌의 사당을 세워 경모궁(景慕宮)이라 했으며,
혜빈(惠嬪)은 혜경궁(惠慶宮)으로 추존하였다.
처음에 장헌세자 꿈에 용이 잠자리로 들어와서 그 꿈을 깨고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용 모양을 벽에다 그려두었는데, 임신년 9월 22일 기묘일에 왕이 탄생하였다.
탄생하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마치 큰 쇠북소리 같았으며, 정신기운이 번쩍번쩍하고 두 눈이 깊고 영채가 있어 하늘이 내린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2세때 벌써 문자(文字)를 알았고, 3세때는 사부에게서《소학(小學)》을 배웠는데 날이 갈수록 슬기로워 사부를 번거롭게하지 않았었다.
8세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10세에 학궁에 들어갔는데《소학》의 제사(題辭)에 명명 혁연(明命赫然)이라는 구절을 짚으면서 그 뜻을 박사(博士)에게 묻기를,
“밝은 명[明命]이 내 몸에 있다는 것은 과연 어느 경지를 가리킨 것이며, 그것이 훤히 빛나게 하려면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하니,
박사가 그 대답을 못했고 교문(橋門)에 둘러서서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안색을 바꾸며, 참으로 성인이라고 서로들 축하하였다.
춘저(春邸)에 있으면서는 날마다 빈료(賓僚)들과 어려운 문제를 놓고 서로 토론하였는데, 가령 사단 칠정(四端七情)의 구별이라든지 중화(中和)의 설, 또는 성(性)과 도(道)의 이발(已發)·미발(未發)등등의 문제들에 대하여 실오라기 하나 털끝 하나도 남기지 않고 세밀히 분석하여 그 모두가 사문(斯文)에 있어 바꿀 수 없는 당연한 논리로 정립되었다.
급기야 큰 길이 눈앞에 점점 보이고 나이와 덕도 점점 높아지면서는 인의(仁義)가 더 정밀하면서도 익숙해지고 교화(敎化)도 성숙되어 그 파급의 범위도 매우 넓었는데, 그것은 어정(御定)의 제서(諸書)들을 보더라도 많은 것이 속에 쌓여 자연 겉으로 나타난 것이었음을 그중 한둘만 보고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왕적(王跡)의 근본을 추적하고 자손들 복록이 끝이 없을 길을 부연 설명하여 우리 자손들이 만세를 두고 지켜야할 법칙을 물려준 것으로《국조보감(國朝寶鑑)》이라는 것이 있고, 황조(皇祖)의 교훈을 눈물을 흘리며 받들어 혐의점을 밝혀내고 희미한 점을 분명하게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것으로《궁원의(宮園儀)》가 있으며, 빛나는 부월(鈇鉞)로 간사한 흉물들을 쓸어 없애 위태로웠던 왕실을 의롭게 바로 세우고 국가 기반을 튼튼히 하여 윤리와 기강을 후세에 수립한 것으로《명의록(明義錄)》원편과 속편이 있고, 순(舜)시대의 오교(五敎)를 표방하여 덕있는 이를 후대하고 인후한 자를 신임한 것으로《오륜행실(五倫行實)》이라는 책이 있으며, 인욕[慾]을 막고 천리[理]를 보존하며 왕도[王]를 존중하고 패도[覇]를 물리쳤던 것으로《추서경선(鄒書敬選)》이 있다.
구름과 용, 바람과 호랑이처럼 기백이 서로 맞고, 두려워 아우성치는 저문 밤에 적군이 나타나도 걱정이 없으리라7502)는 것으로《군려대성(軍旅大成)》이라는 것이 있으며, 늙은이는 쉬게 하고 농부의 노고를 치하하여 질서가 정연하고 풍류가 있고 인정이 두터우며 모든 아름다움이 집결되게 하는 것으로《향례합편(鄕禮合編)》이 있고, 옛것을 상고하고 현대를 참작하여 육관(六官)의 서열을 정하고 그리하여 찬란한 일개 왕국의 제도를 만들어서 후세 자손의 표본이 되게 한 것으로 《대전통편(大典通編)》이라는 것이 있다. 많은 데서 요약해 간추려 언제나 보고 참고하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공자가 산술(刪述)했던 뜻을 본딴 것으로《오경백편(五經百篇)》이 있고, 갑을병정(甲乙丙丁)으로 전적의 원본을 찾아 중요한 사실을 캐내고 또 가로 세로 교정을 가한《경사자집수권(經史子集手圈)》이 있으며,
한만한 부분을 삭제하여 체재를 바로잡고 화이(華夷)의 한계를 엄히 하여 정통성을 부여한 것으로 《송사진전(宋史眞詮)》이 있다.
시(詩)란 사람으로 하여금 읊조리고 감탄하고 정서가 넘쳐흐르게 하는 것이라 하여 쟁글쟁글한 순(舜)의 소악[韶] 9장과도 같은《아송(雅誦)》을 편집했으며, 범위가 넓고 뜻이 깊은 학문, 집집마다 존경하고 숭배해야 할 학문, 그 말이 곧 가르침이요 그 행동이 바로 법으로서 사문(斯文)의 유일한 정통임을 표방한 것으로《주문제편(朱文諸編)》이 있고, 성인이 창작하고 현인이 서술한 것으로서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구준(丘濬)의《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부문별로 엮어 세상을 경륜하는 중요한 규범으로 남긴 것으로 《대학유의(大學類義)》라는 것이 있으며,
충절을 표창하고 절의를 숭상하며 효자·열녀를 기록하고 마성(馬城)의 사당과 용만(龍灣)의 단으로 훌륭함은 명성을 세상에 선양하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좋은 소리가 돌아오게 하는《존주록(尊周錄)》이 있고, 예(禮)를 만들어 일을 절도있게 처리하며 악(樂)을 만들어 뜻을 선양하는 것으로《춘관통고(春官通考)》라는 것이 있으며, 어려운 것 삼가야할 것은 오직 옥(獄) 다스리는 일이 그것이기에 오청(五聽)7503)의 자애로움을 넓히고 삼유(三宥)7504)의 혜택을 주기 위한 것으로《추관심리록(秋官審理錄)》이 있는데 이는 모두 왕께서 만들고 정하신 것들로서 그 위대한 업적과 끝없이 전해질 명성이야말로 풍아(風雅) 다음에다 엮어두고 그 가락을 관현(管絃)에 올려《시경(詩經)》의 한록(旱麓)·생민(生民)등의 편과 함께 영원히 전해져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궁리 격물[窮格]과 존심양성[存養] 공부에 있어서는 그 정밀도가 주돈이(周敦頤)와 주자(朱子)도 미처 발명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으니,
태극(太極)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태극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해도 먼저 존재한 것이 아니며 뒤에 존재한다고 하여도 뒤에 존재한 것도 아닌 것이다.
정(靜)은 동(動)의 뿌리인 것이며, 유(柔)는 강(剛)의 뿌리인 것이다.《역(易)》에도 이르기를 ‘일음일양(一陰一陽) 그것을 도(道)라고 한다’하였고, 또 이르기를‘문을 닫는 것을 곤(坤)이라고 한다’했으며, 또 이르기를 ‘낳고낳고 하는 것을 역(易)이라고 한다’하기도 하였는데 음을 먼저 양을 뒤에 한 데서 낳고낳고 한다는 뜻을 볼 수 있다. 상(商)나라의 역에서는 맨 첫머리가 곤괘(坤卦)인 것이 이러한 까닭이 있어서인 것이다”하였다.
또 심성(心性)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심(心)은 대우모[禹謨]에서 처음으로 말을 했고, 성(性)은 탕고(湯誥)에서 처음으로 말했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성(性)은 서로가 비슷하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하늘의 도를 잘 이어가는 것이 선(善)이다’하여 드디어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로 나누어 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송유(宋儒)들이 이른바, 본연지성(本然之性)이니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니 한 것들이 다 공자의 그것을 조술하여 한 말들인데 성인은 가신 지가 오래 되고 그가 남긴 말도 퇴색하여 성을 말하는 자들이 선(善)이라고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자는 악(惡)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선악을 겸했다고 하기도 하여, 오직 중(中)인 그 본연의 정체를 후세 사람들이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맨 먼저 성선(性善)을 말했던 맹자(孟子) 역시 부득이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 뒤를 이어 정숙자(程叔子)가 또 그를 밝혀 사람들마다 모두 본연지성이 있다는 것만을 알고 또 본연이면 다 순선(純善)일 것이라는 것만 알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갓 본연지성은 순선이라는 것만 알고 도리어 기질 쪽은 내버리는 자들도 가끔 있으니 만약에 공자가 맹자 뒤에 나왔더라면 공자도 맹자처럼 그 본연지성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은 또 기질 쪽을 말하려 들 것이니 이를 보아 나는 공자·맹자의 교훈도 때에 따라서는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겠다”하였다.
또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 까닭은 모든 이치를 다 궁구하지 못해서이다.
그 이치만 궁구하면 그 사물의 궁극을 아는 일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치(致)와 격(格)은 서로 혼동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서로 떼어놓아도 또 안 되는 것이다”하였고,
또 함양성찰(涵養省察) 공부에 관하여 말하면서는 이르기를,
“함양은 몸에 익도록 지속적으로 해야 하고 성찰은 되도록 빨리 해야 한다. 몸에 익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경계하고 삼가야 한다고 말하고서 또 두려워해야 한다고도 말하여 다시 말하고 거듭 말하였던 것이고, 되도록 빨라야 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요약해내고 사람으로 하여금 체험의 자세로 살피기에 전심하도록 한 것이다”하였다.
또 기미(幾微)에 대하여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성(誠)은 하는 것이 없다[無爲]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발동하기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幾)는 선(善)과 악(惡)이 갈라지는 갈림길로서 이른바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발동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했으며,
또 지행(知行)에 대해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알고 행하고[知行]는 그 어느 하나만을 하고 하나는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참으로 안다[眞知]고 하는 것은 즉 선은 꼭 해야 하고 악은 꼭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알기를, 마치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목마르면 마셔야 하며 물에 빠져서는 안되고 불을 너무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아는 것,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므로 그렇게 알면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알기를 참으로 아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아는데 있어 골라서 아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다”하였고,
또 근독(謹獨)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마음이 천군(天君)이므로 마음을 속이는 것은 바로 하늘을 속이는 일이다. 하늘을 속일 수 있겠는가? 천덕(天德)과 왕도(王道) 그 모두가 요점은 오직 근독(謹獨)에 있는 것이다”하였다.
그리고 또 벽사(闢邪)를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오랑캐는 오직 응징 그뿐인 것이고, 용과 뱀 따위는 몰아내면 그뿐인 것이다. 올바른 학문이 정립되면 사설(邪說)들은 저절로 없어지기 마련인데, 그렇기 때문에 위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했으며,
이연평(李延平)이 말한 “고요한 속에서 발동 이전의 상태를 체인해야 한다[靜中體認未發之旨]”는데 대해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체인이라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일단 생각했다면 그것은 이미 발동한 것이다. 사람 마음이 아무것도 없이 맑고 비어있어 고요하고 조금도 치우친 데가 없어야지만 일을 대했을 때 착오가 없는 법인데, 고요한 상태로 있을 때 만약 주경(主敬)을 하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다른 생각을 한다면 일단 발동했을 때 어떻게 절도에 맞을[中節]것인가?
비유하자면 10월은 음[坤]뿐인 달이다. 양기(陽氣)라고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찬 서리와 눈이 쌓이며 초목들도 모두 시들고 잎이 지는데, 양기가 비록 맨 밑에서 자라고는 있지만 아직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봄이 오면 모든 것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 힘과 공로는 오로지 자취를 감추고 응고 상태에 있던 양기가 원동력이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주자(周子)가 정(靜)을 말하고 정자(程子)는 경(敬)을 말했던 것이 모두 그러한 맥락에서 한 말이었던 것이다”하였다.
그리고 또 성(誠)과 인(仁)의 글자 뜻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인(仁)은 마음의 덕이고, 성(誠)은 행위의 실제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는 천지(天地)의 이치를 모두 갖추고 태어나기 때문에 창자 속 가득히 전부가 생의(生意) 뿐인 것이다.
그 생의가 일단 발동하면 갓난애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발동하는 것에서부터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고 그리하여 온 누리를 덮어주고 감싸주고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그것을 발원으로 하여 적재적소로 적용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 무슨 사의(私意)나 이욕(利慾)이 그 사이에 끼어들겠는가?
사의·이욕이 끼어드는 것이 없으면 순수한 한 덩어리일 것이고 한 덩어리이면 그게 바로 성(誠)인 것이니 그렇다면 인과 성이 어찌 둘일 수가 있겠는가?”하였고, 또 정치하는 법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임금된 자라면 다만 삼대(三代)시절같이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비·바람·서리·이슬을 맞고 사는 것들이면 그 모두가 저들이 좋아하는 위치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미래를 상징하는, 가령 기린·봉·거북·용과 같이 복을 불러오는 여러 사물들을 내가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지만 비로소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을 번창하게 한 큰 공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했으며,
문장(文章)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문장에도 도(道)와 술(術)이 있어 도는 바르지 않으면 안되고, 술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이(理)를 주안으로 하고, 기(氣)를 보조로 하여 가만히 당기기도 하고 널리 늘이기도 하는 신묘한 기틀이 정로(正路)에서 한 발짝도 이탈함이 없어야지만 비로소 중언부언 말자랑이나 하는 꼴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광대하기가 은하수와 같은 문장도 그것이 후세에 남길 거리가 못 되는 것은 이치가 올바르지 못해서이며, 그림 그리듯이 아로 새기듯이 한 화려한 저작도 그것이 명가(名家) 축에 못드는 것은 기운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구나 치교(治敎)가 잘 되고 못 되는 데 영향을 주고, 세도(世道)가 그를 따라 오르내릴 수도 있는 문장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주서(朱書)를 온 세상이 배워야 할 목표로 삼는 것은 그의 도(道)를 존중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문장으로서도 역시 참된 이치와 기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하였다.
이상이 바로 왕께서 세우신 덕으로써 학문을 어떠한 순서로 했는가를 볼 수 있고, 따라서 뚫으려고 하면 더욱 굳기만 하고 보면 볼수록 높아만 보이는 경지와, 종묘·백관을 다 갖추고 금성옥진(金聲玉振)의 아름다움이 구비된 것과 같은 문장, 그리고 세상의 모든 정수를 한몸에 다 모아 앞으로 만세를 위해서 태평의 길을 열어주신 것을 볼 수 있는데, 그야말로 천덕(天德)을 통달한 이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 경지에 이를 것인가?
왕은 아침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의관을 정제하고 북을 향해 북극성을 우러러보고 아무리 더울 때라도 일단 누우면 문을 닫고서 감히 하늘을 대면하지 않기를 40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시경》에 이른바“조심조심 조심스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잘 섬긴다”한 그 사실을 왕은 실천했던 것이다.
영종(英宗)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10년을 두고 시질(侍疾)하였지만 일찍이 띠를 풀러본 일이 없었고, 급기야 상을 당하자 그 슬픔은 신하들을 감동시켰으며, 환왕(桓王)을 원묘(原廟)에다 올려모시고 장헌의 사당을 세웠으며 자전(慈殿)7505)과 자궁(慈宮)7506)을 받들면서 화기에 찬 얼굴빛으로 봉양의 도리를 다하고 옥첩(玉牒)에다 금니(金泥)로 그 덕행을 밝혀놓았으니《시경》에 이른바“효도하는 이 있고 덕있는 이 있어 앞에서 인도하고 좌우에서 보필한다”한 말대로 왕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대리 청정을 할 때 척당(戚黨)들이 왕의 영특하고 명철한 것을 꺼려한 나머지 안팎에서 위기를 조성하여 마치 철류(綴旒)7507)처럼 된 상황이었으나 왕은 그때그때 조용하게 대처하면서 그 모든 옳지 못한 무리들을 다 적당하게 처리하였고, 급기야 재신(宰臣) 서명선(徐命善)의 상소문이 올라오자 영종(英宗)께서 대책(大策)을 확정하여 결국 왕에게 기무(機務)를 맡겼는데, 이때 왕은 맨 먼저 자기 개인의 슬픔을 아뢰면서 눈물로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효성에 감격한 영종이 상서(尙書)의 기록에서 차마 못할 말들은 삭제하도록 하였으며, 즉위하던 날에는 명령을 반포하고 더욱 불이본(不貳本)7508)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잘못이 있으면 서로 바로잡아가며 선왕의 도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법도를 따르지 않고 앞장서서 흉론(凶論)을 퍼뜨린 완악한 자는 영고(寧考)의 영령께 고한 후 법에 따라 처벌하였으니《시경》에 이른바 “네 죄인에게 벌을 내리자 온 세상이 다 심복했다”한 것과 옛 기록에 이른바 “성인(聖人)은 변란을 당해도 그를 처리하는데 있어 정당한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다”한 말대로 왕은 실천했던 것이다.
제사에는 조심과 정성을 다해 정숙 화락하고 재계하고 명결히하여 친히 모시지 않는 제사라도 지킬 의식은 다 지키어 사소한 예라도 함부로 다루지 않으면서 정신을 집중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앉아서 아침까지 기다렸으며, 능(陵)이나 원(園)에 일이 있을 때면 곧 분지(粉지)를 내오게 하여 맛을 보고, 영전(影殿) 배알을 할 때면 새벽종이 나기 전에 길을 챙기면서 안개가 끼나 바람이 부나 눈이 내리거나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매월 비궁(閟宮)을 가 뵈오면서는 죽도록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그 속에는 말못할 슬픔이 있었고 휘신(諱辰)이 돌아오면 반드시 열흘 가량을 재거(齋居)하면서 처음 초상 때와 같이 하였다.
《시경》에 이른바“봄 가을로 게을리않고 제사모시는데 틀리는 점이 없다”한 말을 왕은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3천가지의 예를 그 절문(節文)을 다 밝혀 영고 장례를 모실 때는 아침에 조전(祖奠)하는 것이 잘못임을 바로잡았으며, 왕위를 이을 때는 면류관을 벗는 것이 정도가 아님을 개탄하였다. 명유(名儒)를 공자 사당 곁채에다 모시게 하고, 대로(大老)를 선조의 묘정에다 배향했다.
예경(禮經)에 이른바“예(禮)란 실천하는 것이고 의(義)란 옳은 것이다.”한 말을 왕은 그대로 했던 것이다.
서제(庶弟)로 이인(李䄄)과 이진(李禛)과 이찬(李禶)이 있었다.
인은 역모에 가담되어 법으로 볼 때 꼭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귀신도 사람도 용서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왕은 그래도 차마 사형을 가하지 못하고 그를 가족과 함께 강화(江華)로 보내 거기에서 살게 하면서 내부(內府)에 명하여 의복·음식 등을 풍족하게 대주게 하고, 안부를 묻는 사행을 길이 파이도록 보냈으며, 연말 연초면 불러들여 만나보곤 하였다.
그에 대해 정신(廷臣)들이 강력하게 간하면 왕은“내가 잘못이다. 내가 잘못이다”하면서도 끝까지 정신들 주장을 듣지 않았으며, 진은 영종때 탐라(耽羅)로 귀양가 거기에서 죽었는데 왕은 그를 슬픈 마음으로 추념하면서 좋은 시호를 내리고 그의 사당에 직접 가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찬은 흉한 무리들의 추대를 받았다가 죽었는데 왕은 그를 두고 늘 한탄하기를,
“찬이 죽은 것은 홍국영(洪國榮) 때문이었으니 국영이 폐기를 당한 것은 그 보복을 받은 것이다. 내가 후일 후궁 중에서 아들을 낳는 자가 있으면 꼭 찬을 위해 양자를 세워주리라”하였다.
또 영종(英宗)의 딸로서 정치달(鄭致達)의 처가 된 자가 있었는데 그가 제 자식 후겸(厚謙)과 역적 홍인한(洪麟漢)을 끼고 왕이 대리 청정때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할 모의를 하다가 다행히 왕대비의 성스러운 덕과 더할 나위 없는 공로에 힘입어 낌새를 미리 알고 싹부터 꺾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흉모가 부려지지 못한 채 정토(廷討)가 행해졌었다.
그런데 왕은 그가 영종이 퍽 사랑하던 딸이라 하여 잠시 경기도 내의 섬으로 귀양보냈다가 섬에서 뭍으로 뭍에서 다시 서울로, 심지어는 대내(大內)로 불러들여 만나보기까지 하였으므로 정신들이 역시 다투었지만 그도 되지 않았었다. 전(傳)에 이른바“노여움을 감추어두지도 않고 원망을 잠재우지도 않았다”한 그대로 왕은 실천한 것이다.
되도록 검소하게 먼 장래를 생각하면서 그릇도 조각한 것을 쓰지않고 옷은 세탁한 것을 입으며 무명베 요에 부들자리도 아주 평안하게 여겼다.
계시던 집도 겨우 몇 칸짜리에다 단청도 하지않은 채 창문이나 벽에는 매연이 시꺼멓게 붙어 있어 유사가 수리할 것을 청하면 왕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 비용을 아끼려고 그러는 것이겠는가?
내 성품이 이것이 좋아서다”하였는데,
경(經)에 이른바“나라에 대하여는 부지런하고 집에 있어서는 검소했다”한 것을 왕은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성품이 활달하여 어느 사람이건 오직 성심으로 대했기에 호월(胡越)도 한집안이었고 뜰 앞이 바로 사방팔방이었으며, 한가한 틈이거나 조회 때이거나 겉과 속이 따로 없고 속이 시원시원하여 사람을 대해 말 못할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천명월 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자호하면서 그것을 대서특필하여 전각(殿閣)에다 걸어두기도 했는데,
경(經)에 이른바 “왕의 가는 길이 확 열려있어 편당도 없고 치우침도 없다”한 그 모습이 왕에게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덮고 있는 모두와 땅이 싣고 있는 모든 것을 총망라하여 전부 자신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성력(星曆)에서부터 병가(兵家)·농가(農家)등 구류(九流)·백가(百家)할 것 없이 그 모든 분야를 찾고 캐고 하여 실지 응용에다 이용하고, 그리고 그 마음을 또 남에게까지 미루어 나이 젊은 문학(文學)의 신하들을 추려뽑아 고과(考課)·강제(講製)등으로 날마다 달마다 갈고 닦게하여 마치 뭇 짐승들이 함께 바다를 마시면 각기 제 양이 차서 말지, 바다는 한도 끝도 없는 것과 같은 형상이었으니 이는《시경》에 이른바“그러므로 성인(成人)은 덕이 있고 소자(小子)들은 조예가 있게 되었다”한 그것을 왕은 실천했던 것이다.
현자를 발탁하고 외척(外戚)은 되도록 억제했으며,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멀리하고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자주 대하였다.
규장(奎章)이라는 관서를 두어 늘 여러 학사(學士)들을 인견하고 경사(經史)를 강론했으며, 심지어 병이 위중했을 때도 측근의 시신들은 오히려 가까이 못했어도 보필하는 신하들은 늘 좌우에 있으며 시중을 들었었다.
언젠가 누가, 사류(士類)가 나라를 해치는 자들이라고 말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사류(士類)를 나라를 해치는 자들이라고 여겨서야 나라가 잘 되겠는가? 내가 함께하고 있는 자들은 사류이다”하고서는
그 사람을 물리치고 쓰지 않았는데《시경》에 이른바“제제다사(濟濟多士)들로 하여 문왕(文王)은 마음이 편하였다”한 그것이 왕에게도 적용되었었다. 언젠가 여러 신하들과 부용정(芙蓉亭)에서 술자리를 가졌었는데, 자리가 다 마련되고 거문고 등도 다 차려놓았을 때 그 들보 위에 둥지를 틀었던 제비가 새끼에게 무엇을 먹이려고 빙빙돌면서 들어오지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를 가엾게 여겨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으며, 그 후로는 그 정자에 나올 때면 그 제비둥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항상 이르기를,
“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때문에 사람을 해치고 싶지는 않다”하고는
꿩과 생선 공물을 견감하고 노루와 멧돼지 사냥도 하지 않았다.
경(經)에 이른바“사람이 그 물건을 다른 물건으로 바꿔서가 아니라 그 물건이 덕이 함유된 물건이기 때문이다”한 말대로 왕도 실천하였던 것이다.
오직 백성들 생각에 밤이나 낮이나 쉴새없이 아무리 작은 일도 살피지 않은 것이 없고 일단 폐단이 있으면 모두 손을 대서 위에서 털어다가 아래에다 보태주고 어루만져주고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스며든 이택(利澤)이 짙고 진하게 젖어들어 오래가면 갈수록 효과가 나타났는데 그러고서도 백성들 보기를 마치 부상이라도 당한 자를 보듯 하여 그중 한 사람이라도 자기 성취하고 싶은 바를 다 못할까 염려했다.
그리하여 약물을 나눠주어 병을 구제하고, 곳집을 덜어내어 매장을 돕기도 했으며, 내탕(內帑)을 이용하여 흉년 대비의 물건을 별도로 저장해 두기도 하고, 장영(壯營)을 설치하여 균역(均役)의 법을 혁파해 보려고도 하였다. 그리고 서얼(庶孽)이라도 적임자면 추려 쓰는 일, 노비(奴婢) 신분을 대를 물리지 않는 일, 조적(糶糴)제도를 개혁하는 일등을 차근차근 추진하고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나타난 효과만 가지고도 시중에서 장사하는 백성들은 토색질이 없어졌다고 말하였고, 들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은 쌓여있던 문서가 청산되었다고 했으며, 조세를 납부하는 백성들은 정량외에 더 내는 제도가 없어졌다고 했고, 법이 공정함을 좋아하는 백성들은 억울한 누명을 씻었다고 했으며, 도비(都鄙)의 백성들은 농경지가 더 넓어졌다고 했고, 창고 관리하는 백성들은 출납이 정당하다고 했으며, 의관을 갖춘 백성들은 인재를 육성하고 등용하는 제도가 문왕(文王)시대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고 사방팔방이 다 화답했으며, 상서가 내리고 풍년이 들고 하여 따스하기 봄날 같았고, 촉촉이 비가 내린 듯했으며 마음이 편안하기 마치 빛나는 하늘, 이글대는 태양 아래있는 것과 같았었다.
왕이 승하하시던 날 왕궁과 서울로부터 시작하여 저 멀리 국경 지대와 심산유곡의 남녀 노소할 것 없이 무릇 발로 걷고 입으로 숨쉬는 무리라면 모두가 날뛰고 울부짖으면서 더 살고싶지않은 듯이 하였는데, 이야말로 《시경》에 이른바“모든 백성들이 두루 그대를 덕스럽게 여기네”한 그 덕을 왕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은 왕이 세운 공로가 이 나라 전역에 나타나 있어 백성들이 무어라
이름할 수 없을 만큼 높고도 넓은 그것인 것이다.
그밖에도 천만 가지 일을 응수해 처리함에 있어서 그 모두를 의리(義理)에 맞게 절충하고 속에 가득찬 소양을 발휘하여 강건(剛健)하고 순수하게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란 조금도 용납됨이 없이 오직 천리(天理)의 공정함 그대로 하였으며, 경전(經傳)의 뜻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우선 그 강령을 들어 대의를 통찰하였으나 어떠한 문제를 변별하는 데 있어서는 한치 한눈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세밀히 헤아렸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명령을 반포하거나 경연에서의 유시까지도 모두가 전모(典謨)에 맞았으며 시속을 바로잡고 선을 드러내고 악을 응징하려는 뜻이 백성들을 가엽게 마음 아프게 여기는 쪽으로 나타나 그 마지막 명령까지도 그 정성이 금석(金石)을 뚫고 지극히 아둔한 사람까지 감복시키기에 족했으니 그를 어찌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언젠가 이르시기를,
“내가 원하는 것은 공자(孔子)를 배우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공자를 배우려면 주자(朱子)부터 배워야 한다”하고는,
주자가 강목(綱目)을 썼던 것처럼《춘추(春秋)》의 좌씨전(左氏傳)을 편정하고 어원(御苑)속에다 집을 지어 주자의 유상(遺像)을 안치해두고《대전(大全)》·《어류(語類)》 그리고 주자가 쓴 각종 서적의 전주(箋注)들을 책으로 엮어 그 속에다 쌓아두려 했다가 미처 못하였다.
평상시 언제나 남면(南面)의 자리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왕위를 신짝을 벗어 던지듯이 버리고 싶어하는 개연한 생각을 가졌었으며 조정에서 누차에 걸쳐 휘칭(徽稱)을 올릴 것을 청했으나 그것도 끝내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수원성 수축의 역사를 일으킨 것은 남모르는 은미한 뜻이 있어서였기 때문에 그곳의 당(堂)은 이름하여 노래(老來)라고 하고 정자는 미로한(未老閑)이라고 이름했던 것인데 하늘이 결국 몇 해 좀 더 계시도록 수한을 주지 않아 천고 제왕(帝王)들이 일찍이 하지 못했던 훌륭한 업적이 당세에 실현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었던 것이다.
아, 큰 규모를 가지고 그렇게 화신이 되어버린 것을 성(聖)이라고 하고,
성이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을 신(神)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성인이면 하늘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명(命)은 너무 심원하고 잠시도 쉴 틈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하늘이 하늘된 까닭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능호(陵號)를 건(健)으로 했는데 이는 쉬지않고 가고있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니 그 얼마나 걸맞는 이름인가?
복희·신농에서부터 문왕·무왕까지는 그 빛나는 공훈이 그들이 한 일에 나타나 있고, 공자·맹자로부터 정자·주자까지는 빛나는 공훈이 그들이 한 말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그대로 본받아 그 여택이 만세를 이롭게하는데는 말과 일이 원래 같은 것으로서 서로 입장을 바꾸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왕은 성인이었다. 사도(斯道)의 정체를 밝혀내고 사도가 지향할 바를 주장하였다. 왕이 한 일은 복희·신농·문왕·무왕이 했던 일이며, 왕이 한 말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앞으로 천세후에 옛것을 논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이를 《시경》의 청묘(淸廟) 악장에다 실어 연주하여 역시 한 사람이 창을 하면 세 사람이 감탄을 하리라. 여기에는 특히 남들의 귀와 눈에 배어있는 천덕(天德)·왕도(王道)만을 추려뽑아 굉장한 유자이고 현철한 임금이었던 그의 법도를 이 정도로 소개했을 뿐이다.【이조참판 윤행임(尹行恁)이 제술하였다.】
註7502]두려워 아우성치는 저문 밤에 적군이 나타나도 걱정이 없으리라:준비가 있으면 불의의 변란이 있어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주역(周易)》쾌쾌(夬卦)에 “구이(九二)는, 두려워 아우성을 치고 어두운 밤에 융병이 있더라도 걱정이 없으리라.[惕號 暮夜有戎 無恤]”하였음 註7503]오청(五聽):죄인을 심리하는 법으로 사청(辭聽)·색청(色聽)·기청(氣聽)·이청(耳聽)·목청(目聽)의 다섯 가지가 있음.《주례(周禮)》추관(秋官) 소사구(小司寇). 註7504]삼유(三宥):죄인을 용서하는 제도로 모르고 지은 죄가 일유, 과실(過失)인 경우가 이유, 잊어버리고 한 짓이 삼유에 해당함.《주례(周禮)》추관(秋官) 사자(司刺) 註7505]자전(慈殿):영종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註7506]자궁(慈宮):정조의 생모 혜경궁(惠慶宮). 註 7507]철류(綴旒):임금이 신하들 세력에 의하여 좌우되는 상태를 말함.《논형(論衡)》변동(變動) 註7508]불이본(不貳本):왕위(王位)를 계승한 자는 비록 사친(私親)이 있을지라도 그를 인정하지않고 오직 왕통(王統)만을 이어받는 것. 정조(正祖)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자기 사친이지만 중간에 폐위되었기 때문에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음을 말함.
○誌文。 我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在宥十有三年己酉, 遷顯隆園于水原府之花山, 揭御眞于園之齎殿, 以寓晨昏之義, 大城厥邑, 以拱衛象設。 歲一謁, 輒涕泣不能起。 及庚申春正月, 旣拜園, 遂御東麓, 喟然歎曰: “美哉! 斯邱。 守臣汝其伐石以識之。” 粤六月十一日壬戌, 有疾不豫, 二十八日己卯, 禮陟于昌慶宮之正寢。 將以十有一月六日甲申, 因東麓面南而大葬聖人焉。 嗚呼! 豈非天哉, 今殿下, 以臣行恁, 最被殊遇侍軒墀日久, 命臣以玄宮之志。 臣頑然不能下從, 忍執斯役, 而學術譾薄, 不足以知聖人, 則天地之大, 日月之光, 其敢曰摹畫萬一云乎哉, 嗚呼! 道之大原, 出於天, 而天生聖人, 爲之君爲之師, 以弘道於天下。 伏羲、黃帝、堯、舜、禹、湯、文、武是也, 惟孔夫子不得其位, 而刪詩、書作《春秋》, 行素王之事。 夫子歿百有餘年, 孟氏出而明天理淑人心, 以接夫子之統, 自秦、漢以來, 異端橫流, 正學遂泯。 及宋程、朱相繼而興, 講明先王之道, 繼往聖開來學, 其功不在孟氏下。 程、朱旣遠, 邪說又作, 衆口爭豗, 靡所準式, 天開奎運, 吾道遂東。 我先王正位凝命, 以君兼師, 德尊而行備, 學崇而業廣。 主敬以立其本, 窮理以致其知。 知有以窮性命之奧, 而達造化之原, 仁有仁萬物之體, 而普天下之公, 勇有以克有我之私, 而成悠久之業。 嚴恭寅畏, 不敢荒寧, 厖恩厚澤, 延及群生, 喣嫗覆育, 熙熙穰穰, 庶幾乎三古之氣像焉。 葢天以我祖宗積德累仁, 克昌其後, 爲之含弘亭毓, 篤生聖人, 啓東方一治之運, 而遺風餘庥, 將萬億年是賴, 於乎! 盛哉, 遂拜手稽首, 抆血而書之石。 曰王姓李氏, 諱祘字亨運, 英宗顯孝大王之孫, 思悼莊獻世子之子。 母惠嬪洪氏, 領議政鳳漢之女, 妃金氏, 贈左議政時默女。 先是, 王伯父孝章世子, 聘左議政趙文命女, 早薨無子, 及莊獻薨, 英宗命以王承孝章統, 王卽阼, 尊孝章爲眞宗, 妃趙氏爲后, 立莊獻廟曰景慕宮, 尊惠嬪曰惠慶宮。 始莊獻世子夢見神龍入寢, 覺而異之, 畫其狀於壁, 王乃以壬申九月二十二日己卯誕降。 喤喤之聲, 若巨鍾然, 神彩燁如日月, 穆穆有天人之表。 二歲知文字, 三歲就傅受《小學》書, 睿智日長, 不煩師承。 八歲冊爲王世孫, 十歲齒于學, 拈《小學》題辭明命赫然之義, 問于博士曰: “明命在吾身, 果指何境, 欲求赫然, 當下何工,” 博士不能對, 圜橋門觀者, 無不動色相賀曰, 眞聖人也。 其在春邸, 日與賓僚相問難, 如四七之辨, 中和之說, 性道之已發未發, 縷析毫分, 皆可爲斯文定論。 及夫大猷時升, 年德俱進, 仁精而義熟, 敎成而化敷, 則觀乎御定諸書, 而積中彰外之文, 尙可得其一二焉。 推王跡之所興, 演景籙之無疆, 以貽我子孫萬世之柯則, 曰《國朝寶鑑》也, 皇祖有訓, 涕泣以受, 別嫌明微, 得盡我所得爲, 曰《宮園儀》也, 煌煌鈇鉞, 掃除奸兇, 義闡乎金縢, 象列乎夏鼎, 樹倫綱於千秋, 曰《明義》原續之編也, 虞廷五敎, 惇德允元, 曰《五倫行實》之書也, 遏慾存理, 尊王黜覇, 曰《鄒書敬選》也。 雲龍風虎, 蔚焉合章, 惕號暮夜, 有戎勿恤, 曰《軍旅大成》也, 休老勞農, 秩然有序, 風流篤厚, 百嘉鬯遂, 曰《鄕禮合編》也, 稽古酌今, 序列六官, 燦然爲一王之制, 以昭來許, 曰《大典通編》也。 由博反約, 常目存玆, 追刪述之遺旨, 曰五經百篇也, 甲乙丙丁, 元元本本, 搴英摭實, 縱橫丹鉛, 曰《經史子集手圈》也, 刪繁蕪正, 體裁嚴華夷寓袞鉞, 曰《宋史眞詮》也。 詩道敎人, 詠歎淫液, 鏗然如舜韶之九成, 曰《雅誦》也, 地負而海涵, 家戶而戶祝, 言有敎動有法, 揭斯文之一統, 曰《朱文諸編》也, 聖作而賢述, 眞衍而丘補, 纂次部分, 垂經世之要範, 曰《大學類義》也, 顯忠崇節, 載棹載楔, 馬城之祠, 龍灣之壇, 義問宣昭懷我好音, 曰《尊周錄》也, 制禮以節事, 修樂爾志, 曰《春官通考》也, 其難其愼, 曰維庶獄, 廣五聽之慈, 布三宥之澤, 曰《秋官審理錄》也。 此王之立言而鴻號鉅跡, 聲流無窮, 可以撰次風雅, 被諸管絃, 與旱麓生民之詩, 同其傳也。 其窮格之精, 存養之密, 又有濂、閩諸賢之所未發者, 論太極則曰: “太極在天地之先, 而不爲先, 在天地之後, 而不爲後。 靜爲動之根, 柔爲剛之本。 《易》曰: ‘一陰一陽之謂道。’ 又曰: ‘闔戶謂之坤。’ 又曰: ‘生生之謂易。’ 先陰後陽, 生生之義見矣。 商易首坤, 蓋有以也。” 論心性則曰: “言心自《禹謨》始, 言性自《湯誥》始。 而孔子曰性相近也, 又曰: ‘繼之者善。’ 遂分形而上下而言。 宋儒所謂本然之性也, 氣質之性也, 蓋祖於此, 聖遠言湮, 言性者不惟不言善, 或曰惡, 或曰善惡, 而本然大中之體, 無以闡發於後世。 則首言性善孟子, 蓋亦不得已也, 程叔子又繼而明之, 俾人人者, 知有本然之性, 而本然則皆純善也。 然而徒知本然之爲純善, 而反遺乎氣質者, 往往有之, 如孔子後於孟子, 不可不言本然如孟子。 而在今之世者, 又將言氣質, 予以是知孔、孟之訓, 隨時而不同焉。” 論格物致知則曰: “知之未至, 由於理之未窮。 窮此理也, 物格在其中。 曰致曰格, 雖不可以相混, 亦不可以相離也。” 論涵養省察之工則曰: “涵養要熟, 省察要疾。 要熟也故旣曰戒愼, 又曰恐懼, 不憚其重言而複言, 要疾也故, 一言以蔽之, 使人專心乎體察。” 論幾微則曰: “誠無爲, 何也, 未發也。 幾善惡之所由分, 而所謂動之微也。 旣曰動之微, 則豈非已發耶,” 論知行則曰: “知行不可偏廢。 而所謂眞知者, 知善之可爲也, 惡之不可爲也, 如飢食渴飮, 水不可蹈, 火不可狎, 是謂眞知, 知則可以行耳。 知固貴眞, 而其求知也亦宜擇術焉。” 論謹獨則曰: “心爲天君。 欺心卽欺天也。 天可欺乎, 天德王道, 其要祗在謹獨。” 論闢邪則曰: “戎狄膺而已矣, 龍蛇驅而已矣。 正學明邪說自熄, 此所以蕫之以威, 開自新之路也。” 論李延平 ‘靜中體認未發之旨,’ 則曰: “體認則思也, 思則已發。 夫人之心, 湛然虛靜, 無偏倚而後, 應事不差, 靜時若不主敬, 發使能中節, 譬如十月純坤, 陽氣斂藏, 霜雪凝冱, 草木凋落, 陽雖生於下, 而隱而未露。 春來發生之功, 專資於斂藏凝固。 周子之言靜, 程子之說敬, 皆此理也。” 論誠仁之訓則曰: “仁爲心之德, 誠爲行之實。 夫人之生也, 具天地之理, 故滿腔皆生意也。 生意旣發, 自赤子入井, 以至於仁民愛物, 覆冒四海, 而罔不自此焉推之, 曷嘗有私意利欲, 間乎其間哉, 無私意利欲以間之則一矣, 一則誠也, 仁與誠, 豈有二也,” 論爲治之法則曰: “君人者, 但恥不及乎三代, 使動植之物, 風雨霜露之所霑被者, 皆得其所, 而休徵嘉瑞, 如麟鳳龜龍諸福之物, 爲我能事, 如此然後, 始可謂位育之極功也。” 論文章則曰: “文章有道術, 道不可不正, 術不可不愼。 必主之以理, 而輔之以氣, 使潛彀曠引之神機, 不敢離正路一步, 可免於哆言夸辭之歸矣。 夫汪洋河漢之談, 不足以垂後者, 詘於理也, 藻繪雕篆之作, 不足以名家者, 薄于氣也。 況治敎爲之汙隆, 而世道隨以升降者乎, 予以朱書爲一世之學的者, 不惟尊其道, 亦爲其文章理氣之眞也。” 此王之立德, 而可以見爲學用工之次序, 鑽彌堅仰彌高, 宗廟百官之盛, 金聲玉振之美, 集衆之粹, 會聖之精, 爲萬世開太平, 苟非達天德者, 孰能與此, 王, 每朝起整衣, 北面瞻仰辰極, 雖盛暑, 臥則閉戶不敢對天, 四十年如一日, 《詩》所云: ‘小心翼翼, 昭事上帝。’ 王實有焉。 事英宗至孝, 十年侍疾, 未嘗解帶, 及宅宗, 哀動臣隣, 躋桓王於原廟, 樹莊寢之配墠, 奉慈殿、慈宮, 婉容愉色, 致其養, 玉牒金泥, 揚其徽, 《詩》所云: ‘有孝有德, 以引以翼。’ 王實有焉。 王之代理也, 戚黨憚王英明, 內外危逼, 勢如綴旒, 王, 從容應變, 處群不逞, 曲當其宜, 及宰臣徐命善之疏出, 英宗誕定大策, 卒畀王機務, 則王首陳私痛, 泣而請。 寧考感其孝, 就尙書記注, 刊其不忍者, 踐位之日, 渙發絲綸, 致嚴乎不貳本之義, 胥匡以遵先王之道。 而有頑不率, 皷倡凶論, 則告于寧考之靈, 誅竄如法, 《書》所云: ‘四罪, 而天下咸服。’ 志所云: ‘聖人處變, 而不失其正。’ 王實有焉。 所愼在祀, 肅雝齊明, 攝儀無間乎親祼, 疏節克謹乎縟文, 凝神致虔, 坐而待朝, 陵園有事, 輒進粉以嘗之, 拜影殿戒蹕, 先於曉鐘, 霧露風雪, 未始或闕。 月覲閟宮, 優然有終身慕, 而至痛在心, 每諱辰, 必浹旬齋居, 若喪之初。 《詩》所云: ‘春秋匪懈, 享祀不忒。’ 王實有焉。 優優三千, 克昭節文, 葬寧考則正朝祖之失禮, 嗣寶位則慨釋冕之非經。 名儒享夫子之廡, 大老配先祖之庭。 經所云: ‘禮者履也, 義者宜也。’ 王實有焉。 有庶弟䄄、禛、禶。 而䄄坐逆當誅, 神人所不容, 猶不忍加辟, 幷家室移置江華, 命內府衣服飮食之極其豐足, 問訊織於路, 歲輒召見。 廷臣爭之力, 王曰: ‘吾過矣。 吾過矣。’ 終不聽, 禛於英宗時, 謫死耽羅, 王追念衋然, 錫美謚, 臨其廟親奠之。 禶爲凶徒所推載而死, 王每歎曰: “禶之死, 由於洪國榮, 國榮之廢, 所以報也。 予於異日, 有媵御擧丈夫子, 必爲禶立後。” 英宗女有爲鄭致達妻者, 挾其子厚謙與逆臣洪麟漢, 當王代理時, 謀危宗社, 而賴王大妃聖德神功, 炳幾折萌, 凶謀不得售, 而廷討遂行。 王, 以其爲英宗所鍾愛, 暫流畿島, 自島而陸而京, 至引入大內見之, 廷臣亦爭不得。 傳所云: ‘不藏怒焉, 不宿怨焉。’ 王實有焉。 愼乃儉德, 維懷永圖, 器無彤鏤, 衣有澣濯, 綿褥蒲茵, 處之裕如也。 所御之堂, 僅數架, 不施丹艧, 牕壁烟煤如塗, 有司請葺理, 則王曰: “予豈惜其費乎, 顧素性安此耳。” 經所云: ‘克勤于邦, 克儉于家。’ 王實有焉。 性豁達, 待人一以誠, 胡越一家, 庭衢八荒, 蜎涓之暇, 會朝之時, 表裏無間洞然無不可, 對人言者。 嘗自號以萬川明月主人翁, 大書特書, 昭揭殿閣, 經所云: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實有焉。 際天之所覆, 極地之所載, 摠以攬之爲己分之所有, 而星曆兵農九流百家, 罔不包羅搜剔, 措諸實用, 又推以及人, 妙選年富文學之臣, 考課講製, 日月琢磨, 有如群飮于河, 各盡其量, 而不見其涯涘, 《詩》所云: ‘肆成人有德, 小子有造。’ 王實有焉。 右賢而左戚, 屛宦官宮妾而接賢士大夫。 置奎章之署, 常引諸學士, 講論經史, 及至大漸, 暬御猶不敢近, 而承弼諸臣, 左右擧扶。 嘗有人言, 士類國之戕斧者, 王曰: “謂士類戕斧, 而國其乂乎, 予所共者, 士類也。” 斥其人不用, 《詩》所云: ‘濟濟多士, 文王以寧。’ 王實有焉。 與諸臣, 觴于芙蓉之亭, 筵几旣肆, 琴瑟旣張, 有燕巢樑將哺子, 飛繞不入, 王憐之遂起, 後御是亭, 輒問燕巢。 常曰: “吾不欲以養人者害人。” 遂蠲雉鮮之貢, 侵鹿豕之獵。 經所云: ‘人不易物, 惟德其物。’ 王實有焉。 一念黎元, 蚤夜孜孜, 靡隱不察, 靡弊不擧, 損上益下, 撫之綏之。 利澤之滲漉人者, 浸灌醲郁, 久而愈著, 而猶且視之 如傷, 恐一物之不獲自盡。 頒珍劑以救病, 傾廩財以掩骼, 因內帑而別儲備荒之需, 設壯營而擬罷均役之法。 以至庶孽之甄拔也, 奴婢之勿世也, 糶糴之更張也, 蓋欲次第施措而未遑。 然其已然之効, 則市廛之民曰橫索絶矣, 在野之民曰積案淸矣, 輸將之民曰羡耗除矣, 嘉肺之民曰幽冤洗矣, 都鄙之民曰田疇墾矣, 筦庫之民曰出納允矣, 衣冠之民曰菁莪棫樸之化, 不知文王何如也。 於是乎三元調八風協, 嘉瑞降豐年應, 曖然如春, 油然如雨, 恬然如在光天化日之中。 而及夫昇遐日, 自夫王宮國都, 以至荒徼絶塞, 深山邃谷男婦稚老, 岐踵喙息之倫, 率皆奔走號哭, 如不欲生, 《詩》所云: ‘群黎百姓, 徧爲爾德。’ 王實有焉。 此王之立功, 著之八域之廣, 而嵬嵬蕩蕩民無能名者也。 若其酬酢萬變, 折衷義理, 充養發揮, 剛健純粹, 無所容乎人欲之私, 而有以全夫天理之公, 硏窮經傳之旨, 則提綱而挈領, 辨別事爲之故, 則銖量而錙較。 是以綸告筵諭, 動合典謨, 矯時正俗, 彰善癉惡之志, 哀矜惻怛, 于末命, 有足以透金石而感豚魚, 則非言語文字所由述也, 嘗曰: “予所願學孔子也。 學孔子, 當自朱子始。” 旣倣《朱子綱目》, 定《春秋》左氏傳, 將建閣御苑之中, 妥朱子遺像, 取《大全》、《語類》群書箋注之出於朱子者, 編以爲書, 庤其中而不及行焉。 居常無樂乎南面, 慨然有脫屣千乘之想, 朝廷請加徽稱者屢, 終不許。 築華之役, 葢有微意存焉, 故堂曰老來, 亭曰未老閑, 而卒不能假我數年, 俾千古帝王所未有之盛節, 不得見於當世則天也。 嗚呼! 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之謂神, 葢謂聖人之所以配天也。 維天之命, 於穆不已, 葢謂天之所以爲天也。 陵號曰健, 取諸天行, 不其然乎, 自羲、農至文、武, 功烈見於事, 自孔、孟至程、朱, 功烈見於言。 其範圍天地澤利萬世, 則言與事, 未始不同, 而易地則皆然也。 王, 聖人也。 發明斯道之體, 主張斯道之命。 其事則羲、農、文、武, 其言則孔、孟、程、朱。 千世之下尙論者, 庶幾乎登《淸廟》之瑟, 愀然一唱而三歎。 特撮其天德王道, 布濩人耳目者, 以揭夫宏儒哲辟之憲度章程, 如此云爾。【尹行恁吏曹參判製。】
순조 28권, 27년(1827 정해/청도광(道光)7년) 2월 18일(갑자) 5번째기사
병조판서 김노경이 세자궁 대리청정에 따른 의장의 사용법을 아뢰다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이 아뢰기를,
“세자궁(世子宮)에서 대리(代理)한 뒤로 의장(儀仗)을 영묘조(英廟朝)
을미년5005)의 하교에 의하여 법가(法駕)의 의장을 사용하겠는데,
오늘 조참(朝參) 때부터 거행하겠습니다.
다만 의장을 배열(排列)하는 데는 3등급이 있습니다.
첫째는 대가 의장(大駕儀仗)인데 조칙(詔勅)을 맞이하고 묘사(廟社)에 제향할 때에 사용하고, 둘째는 법가의장(法駕儀仗)인데 진전(眞殿)이나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한다든지 선농사단(先農射壇)5006)에 사용하며, 셋째는 소가의장(小駕儀仗)인데 성내외(城內外)를 거둥할 때 사용합니다.
소조(小朝)의 의장을 한결같이 법가의장으로만 거행한다면, 등급을 분리한다든지 체감(遞減)하는 절차가 없으니 반드시 장애되는 것이 있습니다.
을미년 하교 이후로 반드시 여기에 대한 의논이 있었을 터인데 지금에 와서 상고할 곳이 없으니, 불가불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역시 3등급으로 배열하는 예에 의하여, 대조(大朝)께서 의장을 대가의장(大駕儀仗)으로 쓸 때에는 소조는 법가의장을 사용하고, 대조께서 법가의장을 사용할 때에는 소조는 소가의장을 쓸 것이며, 대조께서 소가의장을 사용할 때에는 소조는 상시의장(常時儀仗)을 쓰게 한다면, 융쇄(隆殺)하는 것에 알맞고 구애되는 단서가 다시는 없을 것이니, 이로써 영구히 정식(定式)을 삼아 준행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5005]을미년:1775 영조51년 註5006]선농사단(先農射壇):선농단은 신농씨와 후직(后稷) 신을 제사 지내는 곳.
○兵曹判書金魯敬啓言: “世子宮代理後, 儀仗謹依英廟朝乙未下敎, 用法駕儀仗矣。 自今日朝參時擧行, 而第鹵簿排班, 自有三等, 一曰大駕儀仗, 用於迎詔勑享廟社, 二曰, 法駕儀仗, 用於眞殿文廟酌獻及先農射壇, 三曰, 小駕儀仗用於城內外幸行矣。 小朝鹵簿, 若一例以法駕儀仗擧行, 無分等遞減之節, 必致掣礙, 乙未下敎後, 亦必有議到者, 而今無可考, 不可不及今釐正。 今亦依三等排班之例, 大朝鹵簿之用大仗時, 小朝用法仗, 大朝用法仗時, 小朝用小仗, 大朝用小仗時, 小朝用常時儀仗, 則隆殺適宜, 更無掣礙之端, 請以此永爲定式遵行。” 從之。
순조 30권, 28년(1828 무자/청도광(道光)8년) 1월 22일(임술) 1번째기사
왕세자가 선농단에 쓸 향·축을 전하다
왕세자가 선농단(先農壇)에 쓸 향·축(香祝)을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서 임금을 대신하여 전하였다.
○壬戌/王世子代傳先農壇香祝于仁政殿月臺。
헌종 6권, 5년(1839 기해/청도광(道光)19년) 10월 18일(경진) 1번째기사
척사 윤음을 경외에 내리다
척사 윤음(斥邪綸音)을 경외(京外)에 내리기를,
“아!《중용(中庸)》에 이르기를,‘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한다’하였고,《상서(尙書)》에 이르기를,‘거룩하신 상제(上帝)께서 온 세상 백성에게 선(善)함을 내려 주셔서 고유(固有)의 성품(性品)을 순하게 하셨다’하였다.
그 동일한 근원의 성품을 부여한 시초를 논하기를,‘하늘’이라 이르고 ‘상제(上帝)’라고 하였는데, 하늘은 형체(形體)를 말하는 것이고, 상제는 주재(主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명하셨다’하고,‘선함을 내려주셨다’한 것은 정성스럽게 실제로 가르쳐 고하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니, 한 이치가 일어나는 바에 이기(二氣)348)가 운행되고 사서(四序)349)가 운행되어 만물(萬物)이 생육(生育)하는 것이다.
이에 사람들이 그 이치를 얻어 성(性)으로 삼는 것인데, 그 덕(德)에 네 가지가 있으니, 인(仁)·의(義)·예(禮)·지(智)이고, 그 윤(倫)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이는 모두 당연히 그러한 것이요, 안배(安拜)하여 포치(布置)하거나 힘써 억지로 작위(作爲)함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하늘이 많은 백성을 내시니 만물이 있고 법칙이 있다. 이를 좇으면 하늘에 순종하는 것이 되고, 이를 어기면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하였으니, 무릇 하늘을 받들고 상제를 섬기는 것이 어찌 사단(四端)350)과 오륜(五倫)에서 벗어나겠는가?
아! 복희씨(伏羲氏)·신농씨(神農氏)·요제(堯帝)·순제(舜帝)로부터 천위(天位)를 이어받아 대중지정(大中至正)한 도덕의 표준을 세우니, 그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해서 받들고 돈독하게 질서를 세워 삼가서 편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또한 우리 공부자(孔夫子)께서 헌장(憲章)을 조술(祖述)하신 후로 송(宋)나라 군현(群賢)에 이르기까지 그 천리(天里)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착하게 인도한 것도 오직 이것뿐이었다.
털끝만한 차이가 있어도 오히려 이단(異端)이라고 말해 왔는데, 더구나 음려(陰沴)351)와 황탄(荒誕)하여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기괴한 외도(外道)이겠는가? 국가에는 상형(常刑)이 있으므로, 반드시 죽이고 용서함이 없어야 하니, 이는 이른바 죄를 줌으로써 죄를 그치게 하는 방법인 것이다.
아! 우리나라는 문명(文明)한 고장에 처하여 어질고 현명한 교화(敎化)와 미풍(美風)·선교(善敎)를 계승해 온 지 오래 되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조(聖朝)에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강역(疆域)을 처음 구획(區劃)하시고는 이륜(彝倫)을 밝혀 인기(人紀)를 세우고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국속(國俗)을 바로잡으셨는데,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경계(警戒)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크게 하늘에 보답하니, 아름다운 국운(國運)이 영원히 보전(保全)되고 유현(儒賢)이 배출(輩出)되어 위로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수사(洙泗)352)의 행실을 좇아 행하고 낙민(洛閩)353)의 글을 외면서 남자는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삼고 여자는 정렬(貞烈)을 소중하게 여겼으니, 관혼상제(冠婚喪祭)에는 반드시 예(禮)를 준수(遵守)하였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은 각각 그 업(業)을 이루어서 지금까지 서로 바르게 살아왔고 나라에서도 의지해왔다.
더구나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께서는 하늘이 내신 빼어난 성덕(聖德)으로 백왕(百王)의 대통(大統)을 이어 성명(聲明)과 문물(文物)을 찬연히 구비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흉적(凶賊) 이승훈(李承薰)이라는 자가 서양(西洋)의 책을 사가지고 와서 천주학(天主學)이라고 일컫고는 선왕(先王)의 법언(法言)이 아닌데도 몰래 서로 속여 유인(誘引)하자, 성인(聖人)의 정도(正道)가 아닌데도 자연히 탐혹(耽惑)되어 점차 이적(夷狄)·금수(禽獸)의 지역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정종대왕(正宗大王)께서 오랠수록 더욱 치성(熾盛)해질 것을 근심하셔서 그 괴수를 다스리고 나머지는 용서하시었다.
이는 그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미루어 스스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니, 더할 수 없는 후은(厚恩)이요 성덕(盛德)이다.
비록 어리석기가 돼지와 물고기 같고 흉악하기가 효경(梟獍)같다하더라도 마땅히 느끼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미 본성(本性)을 상실하여 구습(舊習)을 고치지 않으니, 신유년354) 사학(邪學)을 토죄(討罪)한 옥사(獄事)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던 것이니, 얕은 재예(才藝)를 가진 자가 그 새로운 것을 선망하여 창도(唱導)하면, 몽매하여 지각(知覺)이 없는 자가 그 탄망(誕妄)함을 좋아하여 따르니, 경재(卿宰)의 지위에 있는 몸으로 스스로 소굴을 만들어서 가정에 전해 오던 전통적인 교훈(敎訓)이나 예법(禮法)까지 오염(汚染)된 바가 있었다.
주문모(周文謨)는 깎은 머리 모양을 바꾸어서 감히 도시(都市)로 활보하였고, 황사영(黃嗣永)은 백서(帛書)를 마련하여 해양의 선박을 불러들이려고 하였으니, 그들의 흉도(凶圖)와 역절(逆節)이 이에 이르러 다급해졌던 것이다. 진실로 우리 순종대왕(純宗大王)과 우리 정순대비(貞純大妃)께서 이 도깨비 같은 무리의 간교함을 죄다 통촉(洞燭)하셔서 크게 부월(斧鉞)355)의 위엄을 떨치시어 시원하고 통렬하게 제거하지 않으셨더라면, 나라가 나라답고 사람이 사람다운 도리를 지켜왔을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 이제 신유년부터 40년이 되어 금망(禁網)이 점차 해이(解弛)해지자,
사교(邪敎)가 다시 치성(熾盛)해지면서 독한 물여우 같은 무리는 모습을 감추고 허다한 가라지 같은 종자를 바꾸어서 역수(逆竪)는 성(姓)을 바꾸어 출몰(出沒)하고 요망(妖妄)한 역관(譯官)은 재물을 싣고가서 교통하여 몰래 양인(洋人)을 불러들인 것이 두세 번에 이르니, 성기(聲氣)가 이역(異域)까지 접속되고 맥락(脈絡)이 동당(同黨)에 두루 통한 바가 신유년에 견주어 거의 더함이 있다.
이에 나 소자(小子)는 삼가 황조(皇祖)의 모유(謨猷)를 준수하고 공경히 자성(慈聖)의 명(命)을 받들어 감히 천벌(天罰)을 시행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혼미(昏迷)하여 돌이킬 줄 모르고, 깊이 빠져들어 건질 수 없게 되어 머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스스로 대륙(大戮)의 형장으로 나가고 있으나, 내가 오직 백성의 부모(父母)가 되어 애통(哀痛)하고 측달(惻怛)한 마음이 가슴속에 없을 수 있겠는가?
아! 내가 듣건대, 가르치지도 않고 형벌하는 것은 백성에게 재앙(災殃)을 주는 것이다’라고 한다고 하니, 내가 마땅히 사교(邪敎)의 원위(源委)356) 를 조목마다 변명 분석하여 그대 조정의 신하들과 우리 팔도(八道)의 사녀(士女)들에게 포고(布告)하여 각각 분명히 알게 하니, 그대들은 공경히 받들라.
아! 저 천주학(天主學)을 하는 자들이 말하기를,‘이 학문은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존숭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하늘은 본시 공경할 만하고 존숭할 만하다.
그러나 저들이 공경하고 또 존숭하는 것은 죄를 씻고 은총(恩寵)을 구하는 여러 가지 비사(鄙事)357)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이는 스스로 하늘을 속이고 하늘을 업신여기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공경하고 또 존숭하는 것은 곧 앞에서 이른바 사단(四端)과 오륜(五倫)의 하늘이 명하신 성(性)을 밝히고 상제(上帝)께서 내려주신 선(善)에 순종하여 날마다 하는 일이 이치에 합당하여야 한다는 것이니, 그 사정(邪正)을 구분함에 있어 두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저 야소(耶蘇)라고 이르는 자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하겠는데, 저 무리가 말하기를,‘처음에 천주(天主)로 내려오셨다가, 죽어서 다시 올라가 천주가 되어 만물(萬物)과 민생(民生)의 큰 부모[大父母]가 되셨다’한다.
그러나 하늘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사람은 몸도 있고 껍질도 있으니, 결단코 서로 섞일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늘이 내려와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사람이 올라가서 하늘이 되었다고 하니, 무슨 어렴풋하게 의혹할 만한 단서가 있어서 이와 같이 거짓 속이고 있는 것인가?
그대들은 시험삼아 생각해 보라.
고금(古今)을 통하여 이런 이치가 있었던가?
아! 아비없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미없이 어떻게 양육(養育)될 수 있겠는가?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면 높은 하늘같이 그지없어서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소멸될 수 없는 대본(大本)인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곧 나를 낳은 이는 육신(肉身)의 부모(父母)가 되고 천주(天主)는 영혼(靈魂)의 부모가 된다고 하여, 친애(親愛)하여 숭봉(崇奉)함이 저 천주에 있고 이 부모에게 있지 않아서 스스로 그 부모를 절연(絶緣)하고 있으니, 과연 혈기(血氣)의 천륜(天倫)으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제사(祭祀)의 예(禮)는 조상(祖上)을 추모하며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니,
효자(孝子)가 그 어버이를 차마 죽었다고 생각할 수 없음은 신리(神理)·인정(人情)이 그렇게 하지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곧 신주(神主)를 부수고 제사를 폐지하고는 죽은 자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저들이 말하는 영혼은 또 무엇에 의거한다는 말인가? 앞뒤를 제멋대로 결단을 내려 조리가 맞지 않는 말이다.
범과 이리는 포악한 짐승이지만 오히려 부자(父子)의 정(情)이 있고,
승냥이와 수달은 미물(微物)이지만 오히려 제사를 지내는 의리가 있는데,
저들이 비록 둥근 꼭두머리와 모난 발꿈치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범·이리·승냥이·수달만도 못하여 사람으로서 양심(良心)이 없음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아! 군신(君臣)의 의리는 천지(天地)에서 도피할 곳이 없는 것인데, 저들은 곧 교황(敎皇)·교주(敎主)라고 칭호(稱號)를 만들어서 융적(戎狄)의 추장(酋長)과 적도(賊盜)의 괴수 같을 뿐만이 아니다.
이는 사목(司牧)358)의 권병(權柄)을 훔쳐서 정화(政化)가 미칠 곳이 없고 명령을 시행할 곳이 없게 하려는 것이니, 화란(禍亂)의 근본이 어찌 이보다 심함이 있겠는가?
아! 음양(陰陽)이 있으면 반드시 부부(夫婦)가 있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이치인데, 저들은 시집가고 장가들지 않는 것을 망령되게 정덕(貞德)으로 가탁(假托)하면서 아랫사람들은 남녀가 섞여 살면서 풍교(風敎)를 더럽혀 어지럽히고 있으니, 앞의 것으로 말미암으면 인류가 진멸(殄滅)할 것이고, 뒤의 것으로 말미암으면 인륜(人倫)이 더럽혀질 것이다.
아비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김이 곧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부의 관계를 또 어떻게 논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성모(聖母)·신부(神父)·영세(領洗)·견진(堅振) 등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명색이 나올수록 더욱 변환(變幻)이 심하니,
요컨대 마귀에 홀린 무격(巫覡)이 부적이나 정화수로 신(神)에게 빌면서 저주하여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식견(識見)을 갖춘 자라면 어찌 혹시라도 의심하거나 현혹되겠는가?
그리고 천당(天堂)·지옥(地獄)에 대한 이야기는 어리석은 사람은 쉽게 속일만한 일이다.
이는 석씨(釋氏)의 진부(陳腐)한 이야기로서, 이전 사람들이 이미 남김없이 변해(辨解)하였으므로, 거듭 일을 설파(說破)할 것도 못되는데, 이를 전에 누가 보고 누가 전하였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황당한 말이다.
저들 또한 고루 천성(天性)을 받아 함께 인류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곧 오상(五常)을 무너뜨리고 삼강(三綱)을 멸절시키고는 황홀하고 어두운 곳에서 그 자신이 죽은 후의 복(福)을 구하려는 것은 또한 미혹됨이 심하지않은가? 복을 구하는 도리가 진실로 있으니,《시경(詩經)》에 이르기를,‘영원히 하늘의 명에 배합되게 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추구한다’하였고, 또 이르기를,‘온화한 군자(君子)는 복을 구하되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늘의 명에 배합한다[配命]’함은 이치에 합당함을 말함이고,‘어기지 않는다[不回]’함은‘간사한 행위를 하여 요구하지않는다’는 말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복이 저절로 이르겠지만, 이와 같이 하지않는다면 복을 구하고자 해도 도리어 화(禍)만 얻게 될 것이다.
나는 듣건대, 야소(耶蘇)는 가장 참혹하게 죽은 자라고 하니, 그 학문이 복이 되고 화가 되는 것을 이에서도 증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를 보고 징계(懲戒)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처형되어 죽는 것을 즐거운 장소로 여기며 도거(刀鋸)359)·항양(桁楊)360)을 견디어 내며 혼몽하게 두려움조차 알지못한 채 취한 듯이 미친 듯이 하여 꺼내어 깨우칠 수가 없으니, 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망령된 자이다.
아! 불쌍하도다. 이것이 만약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교(敎)라면 어찌하여 반드시 어두운 밤에 밀실(密室) 가운데에서 강론(講論)하고, 심산궁곡(深山窮谷) 사이에서 불러 모으며, 폐고(廢錮)된 종족(種族)의 서얼로 뜻을 잃어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와 지극히 어리석은 하류(下流)로서 재물을 탐내고 음란한 짓을 하는 무리가 서로 교우(敎友)라고 부르면서 각각 사호(邪號)를 베풀고는 머리를 감추고 꼬리를 숨긴 채 한편이 될 것인가?
이러한 자취만으로도 이미 지극히 흉악하고 지극히 요사한 것임이 판명되었으니, 그들이 최후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황건적(黃巾賊)361)·백련교(白蓮敎)362)등의 포장(包藏)하려는 뜻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이 나라에서 생장(生長)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 나라에서 먹고 산단 말인가?
이 나라의 풍속은 단지 사단(四端)을 확충하고 오륜(五倫)을 배식(培植)하는 것이니, 부조(父祖)가 서로 이어오고 사우(師友)가 서로 의뢰하는 것이 모두 이에 있는데, 무엇때문에 이 나라에서 함께 좇는 평탄한 길을 버리고 거의 만리밖의 이류(異類)의 사설(邪說)을 달갑게 여겨 스스로 함정으로 나아간단 말인가?
아! 저 점차 물들어서 깊이 금고(禁錮)된 자와 반핵(盤覈) 죄상이 다 드러난 자는 이미 복죄(伏罪)되었으나, 미처 드러나지않은 자는 또 규결(糾結)을 어떻게 하고 자만(滋蔓)363)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죽은 자는 불쌍히 여길 것이 못된다고 하나, 살아 있는 자는 아직 크게 변개(變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저들도 모두 나의 적자(赤子)인데, 차마 한결같이 미혹에 빠졌다고 해서 어둠을 깨우쳐 밝은 길로 나아가게 할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마음속을 포고해 보이는 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바로 하늘이 사람을 다스리는 법이며, 옛 성인(聖人)들의 교훈(敎訓)이니, 아! 그대 신료(臣僚)와 백성들은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비는 그 아들을 훈계하고 형은 그 아우를 훈계해, 그릇된 자는 반드시 개도(開導)할 것을 생각하고, 미처 빠지지않은 자는 반드시 권계(勸戒)할 것을 생각하도록 하라.
또 혹 개도(開導)하고 권계해도 끝내 따르지않는 자는 반드시 진멸(殄滅)하여 징계할 것을 생각해서 이러한 일종(一種)으로 하여금 감히 다시 용서받을 수 없게 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으며,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맹자(孟子)가 이르기를,‘상도(常道)가 바로잡히면 서민(庶民)에게 선한 기풍(氣風)이 일어나고, 서민에게서 선한 기풍이 일어나면 이에 사특함이 없어진다’하였다.
오늘날을 위한 방도는 오로지 행의(行誼)를 돈독히 하여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길을 닦고, 경술(經術)을 독실히 하여 시(詩)·서(書)·역(易)·예(禮)를 익히게 하고, 방종(放縱)을 추향(趨向)하여 전성(前聖)의 법도를 위배하지 말게 하고, 잗단 것을 참고하고 의거하여 선현(先賢)의 훈고(訓詁)를 업신여기지 말게하여 우리 장보(章甫)와 금신(衿紳)으로 하여금 순수하게 천덕(天德)·천이(天彝)의 자연스런 법칙에서 한결같이 나오게 한다면, 우리의 도(道)는 부식(扶植)을 기필하지않아도 부식될 것이며, 이학(異學)은 배척을 기필하지않아도 배척될 것이니, 저 감발(感發)하여 스스로 분기(奮起)하는 자와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후회하는 자가 어찌 사학(邪學)을 버리고 정도(正道)로 돌아올 리가 없겠는가?
아! 《서경(書經)》에,‘백성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하지않았느냐?
지금 이 사교가 제멋대로 횡행(橫行)하고 있는 것은 실로 과매(寡昧)한 내가 거느려 인도하지 못한 허물에 연유하므로, 스스로 돌아보며 자책(自責)하고 있었는데, 그 아픔이 내 몸에 있는 것 같다.
곧 그대들의 춥고 따뜻함과 굶주리고 배불리 먹는 세절(細節)까지 생각하면 나 소자(小子)가 밤낮으로 안타까워하지 않음이 없는데, 그대들의 성명(性命)이 유지되는 바와 사람과 짐승의 한계가 나뉘어지는 일에 내가 어찌 거듭 되풀이해서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통(哀痛)해 하면서 유시(諭示)하노라.”하였다.
【검교 제학(檢校提學) 조인영(趙寅永)이 제술(製述)하였다.】
註348]이기(二氣):음(陰)과 양(陽) 註349]사서(四序):봄·여름·가을·겨울의 네 계절 註350]사단(四端):인(仁)·의(義)·예(禮)·지(智) 註351]음려(陰沴):재앙 註352]수사(洙泗):수수(洙水)와 사수(泗水). 공자(孔子)가 수수와 사수사이에서 제자들에게 도(道)를 가르쳤으므로, 공자의 유학(儒學)의 뜻으로 쓰임 註353]낙민(洛閩):정주학(程朱學)을 일컫는 말. 정자(程子:정호(程顥)와 정이(程頤))는 낙양(洛陽) 사람이고, 주희(朱熹)는 민중(閩中) 사람이므로, 이와 같이 일컫게 되었음 註354]신유년:1801 순조원년 註355]부월(斧鉞):형벌 註356]원위(源委):본말(本末) 註357]비사(鄙事):천한 일 註358]사목(司牧):군주(君主) 註359]도거(刀鋸):칼과 톱. 모두 형구(荊具)임 註360]항양(桁楊):칼과 차꼬 註361]황건적(黃巾賊):중국 후한(後漢)말에 장각(張角)을 수령(首領)으로 하여 하북(河北)에서 일어난 유적(流賊). 그 무리는 13만으로 모두 황건을 쓰고 황로(黃老)의 도(道)를 받들어 태평도(太平道)라 하고 일시 세력을 떨쳐 난을 일으켰으나 장각의 병사(病死)로 쇠퇴, 곧 평정되었음 註362]백련교(白蓮敎):중국 송대(宋代) 이후에 성행된 민간의 비밀결사 종교. 미륵(彌勒)보살이 이 세상에 나타나 복(福)을 내린다고 우민(愚民)을 현혹하여 세력을 크게 뻗쳤으며 당시의 정부와 자주 충돌했음. 홍건적(紅巾賊)도 이 교도(敎徒)임. 청나라때에 이르러 그 무리는 1796년부터 9년 동안에 걸쳐 반란을 일으켜 청조(淸朝)는 고심(苦心)하였음 註363]자만(滋蔓):무성하게 퍼짐.
○庚辰/下斥邪綸音于京外曰:
嗚呼! 《中庸》曰, ‘天命之謂性,’ 《尙書》曰, ‘惟皇上帝, 降衷于下民, 若有恒性。’ 其論一原畀賦之初, 曰天曰上帝者, 天以形體言, 上帝以主宰言也。 曰命曰降衷者, 非諄諄然眞有詔告也, 一理所發, 二氣斡焉, 四序所運, 萬品育焉。 人得之爲性者, 其德有四, 曰仁義禮智也, 其倫有五, 曰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也。 此皆當然而然, 無待乎安排布置, 勉强作爲。 故曰 ‘天生烝民, 有物有則, 率之則爲順天, 悖之則爲逆天。’ 凡所以奉天而事上帝者, 豈有出於四端五倫之外哉, 嗚呼! 粤自羲、農、堯、舜, 繼天立極, 其寅畏而祗承, 惇敍而敬敷者, 惟此而已。 亦粤我夫子, 祖述憲章之後, 至于有宋群賢, 其明天理淑人心者, 惟此而已。 毫釐有差, 猶謂之異端, 況乎陰沴荒誕, 怪詭不經之外道乎, 國有常刑, 必殺無赦, 此所謂辟以止辟也。 嗚呼! 我東處文明之鄕, 襲仁賢之化, 美風善敎, 厥惟久矣。 洪惟我聖朝, 受天明命, 肇造區宇, 明彝倫以立人紀, 崇道擧以正國俗, 聖子神孫, 儆戒不怠, 丕克對越于天, 而休運永孚, 儒賢輩出, 上自公卿大夫, 下逮閭巷匹庶, 戶服洙泗之行, 家誦洛閩之書, 男以忠孝爲本, 女以貞烈爲重, 寇昏喪祭, 必遵乎禮, 士農工商, 各遂其業, 式至今胥匡以生, 國家賴焉。 矧惟我正宗大王, 挻天縱之聖, 紹百王之統, 聲明文物, 粲然具備, 而不幸有凶賊承薰者, 購來西洋之書, 號爲天主之學, 非先王之法言, 而潛相誑誘, 非聖人之正道, 而馴致耽惑, 駸駸然入於夷狄禽獸之域。 於是乎正廟憂其久而愈熾也, 治其魁宥其餘。 克推欲生之念, 俾開自新之路, 恩莫厚矣, 德莫盛矣。 雖豚魚之頑, 梟獍之凶, 亦當有所感悟, 而本性旣喪, 舊習不悛, 以至辛酉討邪之獄而極矣, 其薄有才藝者, 艶其新而倡之, 矇無知覺者, 樂其誕而從之, 身處卿宰, 自作窩窟, 家傳詩禮, 亦有染汚。 而文謨則變薙制敢行都市, 嗣永則裁帛書欲招海舶, 匈圖逆節, 於斯爲急。 苟非我純宗大王曁我貞純大妃, 悉燭魑魅之奸, 大振斧鉞之威, 廓闢而痛鋤之, 則國之爲國, 人之爲人, 有未可知也。 嗚呼! 今距辛酉, 四十年所, 禁網寖疏, 邪敎又盛, 虺蜮匿影, 稂莠易種, 逆竪變姓而出沒, 妖譯齎貨而交通, 潛募洋人 至於再三, 而聲氣接於異域, 脈絡遍於同黨, 比諸辛酉, 殆有浮焉。 肆予小子, 謹遵皇祖之謨, 恭奉慈聖之命, 不敢不行天之罰。 雖其迷昏而莫之返, 淪沒而莫之拯, 駢首連肩, 自底大戮, 而予惟爲民父母, 其能無哀痛惻怛之心, 戚戚于中哉, 嗚呼! 予聞不敎而刑, 謂之殃民, 予當以邪敎源委, 逐條卞析, 用播告于爾在廷臣隣及我八方士女, 俾各曉然, 爾尙欽哉。 嗚呼! 彼爲天主之學者, 曰 ‘是學也, 乃敬天也, 尊天也。’ 天固可敬可尊, 而彼所以敬且尊者, 不過如滌罪邀寵之諸鄙事, 自歸於慢天褻天也。 吾所以敬且尊者, 卽向所謂四端五倫之昭天命順皇降, 而日用事爲之當於理也, 邪正之分, 不待兩言。 且彼耶穌云者, 不知其是人是鬼, 是眞是假, 而其徒之言, 以爲 ‘始以天主下降, 死復上作天主, 爲萬物民生之大父母。’ 天也者, 無聲無臭, 人也者, 有軀有殼, 斷不可相混。 而今以天謂之降而爲人, 以人謂之上而爲天, 是有何依俙可惑之端, 而若是之矯誣也, 爾試思之。 往古來今, 有是理耶, 嗚呼! 匪父何生, 匪母何育, 欲報之德, 昊天罔極, 而生民以來, 凘滅他不得之大本也。 彼乃以生我者爲肉身父母, 天主者爲靈魂父母, 親愛崇奉, 在於彼不在於此, 以自絶其父母, 是果血氣之倫所可忍乎, 祭祀之禮, 所以追遠報本, 而孝子之不忍死其親也, 神理人情, 不得不然。 而彼乃毁主廢祭, 謂死者不知。 苟如是也, 彼所謂靈魂, 又何所依靠, 首尾橫決, 不成倫脊。 虎狼惡獸也, 尙有父子之情, 豺獺, 微物也, 尙有祭祀之義, 則彼雖圓顱方趾, 曾虎狼豺獺之不若, 人之無良, 胡至此極, 嗚呼! 君臣之義, 無所逃於天地, 而彼乃以敎皇、敎主, 作爲稱號, 不啻如戎狄之酋長, 賊盜之渠率, 是欲攘司牧之權, 使政化無所底, 命令無所施也, 禍首亂本, 孰有甚焉, 嗚呼! 有陰陽必有夫婦, 不易之理也, 彼乃以不嫁不娶, 妄托貞德, 其下焉者, 男女混處, 穢亂風敎, 由前則人之類滅矣, 由後則人之倫瀆矣。 無父無君, 卽至於此, 夫婦之際, 又何可論, 至若聖母、神父、領洗、堅振等種種名色, 愈出愈幻, 要之爲狐魔巫覡, 符水詛呪之惑世者也, 粗具見識, 寧或疑眩, 而最是天堂地獄之說, 易哄蚩蠢。 然此釋氏之陳腐也, 前人之辨, 已無餘蘊, 不足更事劈破, 而是曾孰見而孰傳之也, 蔽一言曰, 謊說也。 彼亦均受天賦, 竝充人類, 而乃欲斁棄五常, 滅絶三綱, 以求其身後之福於慌惚茫昧之地者, 不亦惑之甚哉, 求福之道, 誠有之矣, 《詩》曰 ‘永言配命, 自求多福。’ 又曰, ‘豈弟君子, 求福不回。’ 配命者, 合於理也, 不回者, 不爲回邪之行, 以要之也, 如是則福自至, 不如是則欲求福而反取禍也。 予聞耶穌, 凶死之㝡酷者也, 其學之爲福爲禍, 於此可驗。 而不惟不爲之視以爲懲, 乃以刑死爲樂地, 刀鋸桁楊, 民不知畏, 如醉如顚, 莫可提醒, 非愚則妄, 吁可哀矣。 嗚呼! 此若爲光明正大之敎, 則何必講授於昏夜密室之中, 嘯聚於深山窮谷之間, 而廢種錮孼, 失志怨國之徒, 下流至愚, 騙財誨淫之輩, 互稱敎友, 各設邪號, 藏頭隱尾, 打成一片也哉, 卽此形跡, 已判其至凶至妖, 而究竟爲計, 不出於黃巾白蓮之包蓄耳。 彼豈非生長於此邦, 食息於此邦者乎, 此邦之俗, 只是四端之擴充, 五倫之培植, 而父祖之所相沿, 師友之所相資, 皆在於是, 則何故捨此邦所共由之坦路, 甘心於幾萬里外異類之邪說, 以自就罟擭乎, 嗚呼! 彼浸漬之深錮者, 盤覈之畢露者, 固已咸伏厥辜, 而其未及現發者, 又不知紏結如何, 滋蔓如何, 死者雖不足恤, 生者猶可丕變。 彼皆吾赤子耳, 忍使之一向沈蠱, 不思所以牖昏嚮明之方乎, 今予敷示心腹, 非予言也, 乃惟天之經人之維, 古昔群聖之訓也, 嗟! 爾臣黎, 欽哉欽哉。 父詔其子, 兄詔其弟, 其所訛誤者, 必思所以開導焉, 其未陷溺者, 必思所以勸戒焉。 又或有開導勸戒, 而終不率者, 必思所以殄殪而懲創焉, 俾此一種, 毋敢更容, 則豈不休哉, 豈不休哉, 孟子曰, ‘經正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 爲今之道, 其惟敦行誼, 以修其孝悌忠信, 篤經術, 以習其詩、書、易、禮, 而勿以趨尙放縱, 背前聖之規矩, 勿以考據細瑣, 侮先賢之訓詁, 使我章甫衿紳, 粹然一出於天德天彝自然之則, 則吾道不期扶而扶, 異學不期斥而斥, 彼感發而自奮, 警惕而自悔者, 庸詎無去邪歸正之理哉, 嗚呼! 《書》不云乎, ‘百姓有過在予一人。’ 今玆邪敎之橫肆, 職由予寡昧, 不能導率之咎, 反躬自責。 若恫在已, 而載念爾一寒一煗, 一飢一飽之節, 罔非予小子夙宵憧憧, 則其於爾性命之所關係, 倫彝之所維持, 爲人爲獸之所界限剖判者, 予又安得不重言復言, 哀痛而諭之也。【檢校提學趙寅永製。】
헌종 12권, 11년(1845 을사/청도광(道光)25년) 2월 7일(무술) 1번째기사
선농단의 절제에 쓸 향·축을 친히 전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선농단(先農壇)의 절제(節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戊戌/上詣崇政殿, 親傳先農壇節祭香祝。
헌종 13권, 12년(1846 병오/청도광(道光) 26년) 2월 12일(무술) 1번째기사
선농단의 절제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선농단(先農壇)의 절제(節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戊戌/上詣仁政殿, 親傳先農壇節祭香祝。
헌종 14권, 13년(1847 정미/청도광(道光)27년) 1월 30일(경술) 1번째기사
선농단의 절제에 쓸 향·축을 친히 전하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선농단(先農壇)의 절제(節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庚戌/上詣仁政殿月臺親傳先農壇節祭香祝。
철종 4권, 3년(1852 임자/청함풍(咸豊) 2년) 1월 23일(갑술) 1번째기사
선농단 춘향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선농단(先農壇) 춘향(春享)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甲戌/詣仁政殿, 親傳先農壇春享香祝。
철종 8권, 7년(1856 병진/청함풍(咸豊)6년) 2월 10일(무술) 1번째기사
선농단제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선농단제(先農壇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戊戌/詣仁政殿, 親傳先農壇祭香祝。
철종 13권, 12년(1861 신유/청함풍(咸豊)11년) 2월 4일(임술) 1번째기사
선농제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다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선농제(先農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壬戌/詣崇政殿, 親傳先農祭香祝。
고종 7권, 7년(1870 경오/청동치(同治)9년) 2월 14일(경술) 1번째기사
근정전에 나아가 선농제 등에 쓸 향축을 친전하다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선농제(先農祭), 종묘(宗廟)·경모궁(景慕宮)의 망제(望祭), 영릉(英陵)과 홍릉(弘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十四日。 詣勤政殿,親傳先農祭、宗廟·景慕宮望祭、英陵·弘陵忌辰祭香祝。
고종 8권, 8년(1871 신미/청동치(同治)10년) 1월 20일(경술) 1번째기사
선농단에서 친제하다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二十日。 詣先農壇, 親祭。
고종 8권, 8년(1871 신미/청동치(同治)10년) 2월 10일(경오) 1번째기사
선농단에 나아가 봉심하고 적전을 친경하다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적전(籍田)을 친경(親耕)하였다. 기민(耆民)에게 선교(宣敎)하기를,
“공경히 기민을 위로하라”하였다.
봉상시정(奉常寺正)이 올곡식의 씨를 밭갈이 한 곳에 뿌리고나자 위로하는 술자리를 벌였는데, 시임대신과 원임대신들이 입시(入侍)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일전에 대원군(大院君)이 내린 화자(鞾子)를 받들었는데, 바로 전하의 뜻이 깃든 물건이었습니다.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왕조를 세우고 이 제도를 창제하여 만대토록 끝없는 복을 전하셨습니다.
신이 선원전(璿源殿)과 경기전(慶基殿)에서 어진(御眞)을 우러러 보았는데, 곤의(袞衣)의 소매와 화자의 제도가 바로 오늘날 새로 만든 모양과 같았습니다. 아! 우리 전하께서 옛 제도를 준수하여 나라를 반석같이 다지고 거듭 빛내는 것은 실로 여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신들은 축복하는 마음 금할 수 없으며 더없이 영광스럽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옛날 제도와 관계되므로 변통시켜 만든 것이다.”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친히 제단에 제사를 지내고 존귀한 임금으로서 적전(籍田)에 나가 땅을 밟아 신을 더렵혀가며 오퇴례(五推禮)를 행하였습니다.
권농윤음(勸農綸音)을 반포하여 백성들을 이끌어 직접 밭을 간 것은 또한 성인들이 때에 맞게 교화를 펴는 뜻이니 보고들은 사람치고 누군들 기뻐하며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옛날 맥구(麥邱)의 노인이 제(齊)나라 임금에게 이야기를 올리기를‘원컨대 온 나라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송축을 잘한 것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농사의 상서로운 징후가 있고 화창한 바람이 음률에 어울리며, 누른 구름과 자색 기운이 상서로운 해를 감싸고 있으니 주(周)나라의 훌륭한 정사를 다행히 이 날에 다시 보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육부(六府)를 다스리고 구곡(九穀)을 귀중히 여겨 아랫사람들을 이끌며 스스로 쉼 없이 가다듬고 힘쓰는 도리를 다하소서”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의견이 절실하므로 마음에 새겨두겠다”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신도 일전에 대원군이 내린 화자를 받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전하의 뜻이 깃들어 있음을 들었는데 이것으로 법식을 반포하여 옛날의 훌륭한 전례를 회복하시니, 신은 흠앙과 찬송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남별전(南別殿)의 어진들을 우러러보았는데, 태조(太祖)와 세조(世祖)가 곤룡포 차림에 목 긴 신을 신은 모양은 모두 옛날 제도대로였습니다.
옛 제도에 의거하여 실행하며 잊지 않게 하려는 뜻은 실로 후세의 본보기가 되고 이번에 계술하신 훌륭한 일은 또한 천명을 맞이하여 이어갈 계기입니다. 이른바 당요(唐堯)나 우순(虞舜)을 본받으려면 조종(祖宗)의 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기뻐서 축복하는 것도 여기에 있고 나라 운수의 영원한 성장도
여기에 있으므로 신들은 서로 바라보며 기뻐하고 있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옛제도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뜻에서 어느 정도 변통시킨 것이다”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오늘을 경축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동료 재상들이 이미 말을 올린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100여년이 지난 오늘 전하께서 이 예식을 거행하셨으니,
어찌 혹시라도 보기 좋게 꾸미려 하고 천하가 태평하여 풍성하고 즐거워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첫째도 백성을 위한 것이고 둘째도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농사를 중시하고 근본에 힘쓰는 훌륭함과 뜻을 잊고 일을 계승하는 아름다운 덕에 대해서는 온 나라 사람들이 매우 축복하고 있습니다.
무릇 농사일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늘 오늘의 성상의 마음을 미루시고 추위와 더위의 원망스러움에 대하여 돌보려는 마음을 더욱 간직한다면 하늘이 상서를 내려 만백성들이 창고를 높이 쌓고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다 생업에 안착하여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지금 이에 대해서 크게 기대합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므로 마음에 새겨두겠다”하였다.
우의정(右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대원군이 전하의 정성을 베풀려는 뜻에서 신에게 새로운 모양의 화자를 하사하였으므로 더할 나위없는 감격과 칭송의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의 곤룡포와 목이 긴 신은 그 제도를 약간 고친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계술할 뜻을 간직하고 능히 새로 만들어내는 방도를 체득하시어 온 나라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왕조 초기의 전형(典型)을 다시 보게 하였습니다. 신들은 훌륭한 시대를 만나 지극한 혜택을 받게 되었으므로
우러러 축복하는 마음 간절합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옛 제도가 이러하였기에 법식을 반포한 것이다”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일찍 일어나 수레를 타고 동쪽 교외에 행차하여 땅을 밟아 신을 더럽혀가면서 적전을 간 것은 100년내에 처음 있는 훌륭한 일이었으며, 이어서 위로하는 주연을 베풀어 임금과 백성들이 마치 한 집안의 부자간처럼 다정히 지냈으니, 반열에 있는 신하와 일반 사람들이 만수를 축원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영조(英祖)는 직접 적전을 갈고 나서 하교하기를,‘이제부터는 언제나 손에 쟁기를 잡은 듯한 마음을 가지겠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의 말씀은 위대하였습니다. 《모시(毛詩)》〈칠월(七月)〉과《상서(尙書)》의 〈무일(無逸 )〉을 통해 비록 농사일을 그림을 그려서 본다지만, 농사일의 어려움으로 말하면 어찌 직접 쟁기를 잡는 것과 같겠습니까?
만약 깊은 대궐 안 호화로운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이 성상의 하교를 생각하고 백성들을 근본으로 삼는다면 실로 나라와 백성들의 복으로 될 것입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므로 마음에 새겨두겠다”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포의(袍衣)와 화자가 점차 변하여 옛날과 같지않은 것이 매우 온당치 못하므로 한결같이 남별전 제1실의 포의와 화자의 법식대로 고쳤는데, 간편할 뿐 아니라 바로 왕조 초기의 옛 규식이다. 이런 식으로 화자를 만들면 수화자(水鞾子)로 통용할 수 있으니 매우 좋을 것이다”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새로 만든 화자가 아주 보기 좋습니다. 그리고 내년 임신년(1872)은 개국한 지 480년이 되는 해입니다.
왕조 초기 옛 제도의 신이 이때에 와서 회복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다시 변경시키지 말고 억만년을 준수할 규례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록 소매의 제도로 말하더라도 그 너비가 좀 좁은 것이 또한 옛 규례입니다. 그러나 30년을 오면서 그 제도가 점차 넓어져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논란한 지 오래입니다.
지금 이미 옛 제도를 회복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하니,
하교하기를,
“다만 30년내의 일뿐이 아니라 갑자년(1864)이후에도 넓어지는 폐단이 있었는데 이번에 옛제도를 회복하였으니 마땅히 길이 법으로 삼아야할 것이다”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번의 포의 화자의 제도로 말하면 변통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옛 법식을 회복한 것입니다. 영상(領相)이 아뢴‘의장(衣章)은 자주 고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매우 원칙을 지키는 정확한 주장입니다.
이번에 반포한 모양을 길이 백대의 장정(章程)으로 정하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하고,
홍순목이 아뢰기를,
“포의 화자의 제도를 조금 고친 것은 실로 옛날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
국가의 제도가 한번 정해진 다음에는 쉽사리 고칠 수 없는 만큼 이 의식(儀式)을 영원히 만대토록 준수하는 규례로 삼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하고,
김병학이 아뢰기를,
“이 연석에서 한 이야기를 조지(朝紙)에 반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 원소(園所)의 비석을 고쳐 세우는 등의 절차를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거행할 것을 지난번에 아뢴 적이 있었습니다.
봄철이 이미 절반이 지난 만큼 곧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니 도감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을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하교하기를,
“크게 벌일 것없이 영건도감(營建都監)으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적왕손(嫡王孫)과 왕손의 흉배의장(胸背儀章)을 토의하여 결정하고 후일에 다시 아뢰라는 하교를 지난번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상의 하교 중 기린(麒麟) 다음은 벽사(辟邪)만 한 것이 없고 백택(白澤) 다음은 산예(狻猊)만 한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은 대성인(大聖人)이 형상을 취해서 제도를 정하신 것이니,
신은 천만번 우러러 경모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기린을 벽사에 대비해보면 그 형상이 매우 근사하고 백택을 사자에 대비해보면 그 형상이 근사하므로 적왕손의 흉배에는 응당 벽사를 사용하여야 하고 왕손의 흉배에는 산예를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품식(品式)과 절문(節文)이 모두 예법의 뜻에 맞고 여러 신하들 의견도 또한 다른 말이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하니,
하교하기를,
“흉배는 이번에 바로잡아 놓았으니 이것을《오례편고(五禮便攷)》의〈의장권(儀章卷)〉에 싣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유지의(襦紙衣)는 이미 대전(代錢)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습니다. 관북(關北)의 유지의도 관서의 규례대로하여 일체(一體) 대전으로 마련하고, 해도(該道)에서 서울에 상납하는 것 중에서 해마다 해당 수량을 환산하여 북병영(北兵營)에 획송(劃送)하여 관서에서 주관하게 하고, 관세청(管稅廳)에서 평안병영(平安兵營)에 보내주는 것도 주관하게 하면 편리한 방도에 맞을 듯합니다.
관서와 관북을 막론하고 나누어줄 때 만약 농간하는 폐단이 있을 경우 속히 군율을 적용한다는 뜻으로 엄격히 과조(科條)를 세워 꼭 실효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初十日。 詣先農壇奉審, 親耕耤田。 宣敎于耆民曰: “敬勞耆民。” 奉常正以種稑之種, 播于耕所, 畢, 仍行勞酒禮, 時原任大臣入侍。 判府事李裕元曰: “日前伏奉大院君下賜鞾子, 乃聖意攸在也。 我太祖大王定鼎鴻基, 寔創此制, 誕垂萬億無疆之休。 臣於濬源殿、慶基殿, 仰瞻御眞, 衮衣之袖, 鞾子之制, 卽今日新製之樣。 猗! 我殿下式遵舊章, 磐泰重熙之運, 實基於此。 臣等不任攢祝, 繼切與榮之忱。” 敎曰: “係是舊章也, 故有所變制矣。” 裕元曰: “我殿下親祼壇祀, 以千乘之尊, 遊場染履, 行五推之禮。 綸綍渙宣, 命布農事, 道民躬親, 亦聖人順時行化之意, 環堵觀聽, 孰不蹈舞, 昔麥邱老人獻言于齊君曰: ‘願賜一國之饑’者, 此頌之善也。 顧今農祥晨正, 協風應律, 黃雲紫氣, 捧抱乎瑞日璇樞, 成周熙洽之治, 幸而復覩於此日。 惟殿下治六府, 寶九穀, 勤身率下, 克懋自强不息之道焉。” 敎曰: “所陳切實, 當服膺矣。” 領議政金炳學曰: “臣亦於日前, 伏奉大院君下賜鞾子, 承有聖意攸在。 而以此頒式, 光復古懿, 臣不任欽仰攢頌。 臣嘗仰瞻南殿御眞, 太祖、世祖衮袖鞾樣, 皆舊章也。 率由不忘之義, 實爲後世法。 今此繼述之美, 卽亦迓續之會, 所謂欲法堯、舜, 當法祖宗者也。 人心之歡祝在此, 國祚之靈長在此, 臣等相顧欣抃矣。” 敎曰: “其在率由之義, 有所通變矣。” 炳學曰: “今日慶祝之忱, 僚相已有所仰奏。 而今於百有餘年之後, 我殿下誕行是禮, 夫豈或賁飾觀瞻、豐亨豫大而然哉, 一則爲民, 二則爲民。 重農務本之盛, 繼志述事之美, 朝野群情, 胥切攢頌。 凡於稼穡艱難, 恒推是日聖衷, 寒暑怨咨, 益軫存恤之念, 則惟天降康, 萬億高廩, 八域黎獻, 皆有以安業樂生。 臣方以是顒俟矣。” 敎曰: “所陳切實, 當服膺矣。” 右議政洪淳穆曰: “大院君以有匪頒聖眷, 下賜臣新樣鞾子, 伏不勝感頌之至。 今玆袍鞾之稍改其制, 我殿下深軫繼述之念, 克體創造之謨, 使八方含生, 復覩國初典型。 臣等遭逢熙運, 衣被至澤, 胥切欣禱之忱矣。” 敎曰: “舊制如此, 故有所頒式矣。” 淳穆曰: “命夙駕稅于東郊, 坻場染屨, 爰擧百年內初有之盛事, 仍行勞酒禮, 君民相親, 如家人父子。 在列臣庶, 萬壽獻祝之誠, 容有極哉, 英廟親耕畢, 有敎曰: ‘從今以往, 常如手執耒耟時’, 大哉王言! 《七月》詩、《無逸》書, 雖作圖省覽, 稼穡艱難, 則曷若身親臨之乎, 倘於九重錦玉之中, 每念此聖敎, 一以元元爲本, 實社稷生靈之福矣。” 敎曰: “所陳切實, 當服膺矣。” 又敎曰: “袍鞾之漸變不古, 甚未安。 一遵南殿第一室袍鞾之式變之, 非但簡便, 卽是國初古規。 以此爲之鞾子, 則水鞾子通用甚好矣。” 炳學曰: “鞾子新制甚美, 而明年壬申卽開國八回甲也。 國初舊制, 迨此光復者, 事不偶然。 從此以後, 更不變改, 以爲億萬年遵式甚好。 雖以袖制言之, 稍狹其廣亦舊章, 而三十年來, 其制漸廣, 有識之議, 厥惟久矣。 今則已復舊制, 誠爲之萬幸。” 敎曰: “非但三十年以來事也, 甲子以後, 亦有歸廣之弊。 今旣復舊, 則可當永爲遵式矣。” 裕元曰: “今此袍鞾之制, 非變通也, 卽復舊式也。 領相所奏‘衣章不宜頻數變改’之言, 甚是守經之確論。 以今所頒之樣, 永作百世章程, 甚好矣。” 淳穆曰: “袍鞾之稍改其制, 寔遵舊章, 而國家制度一定之後, 有不可容易變更, 以此儀式, 永作萬世遵守, 甚好矣。” 炳學曰: “此筵說頒布朝紙, 恐好矣。” 允之。 又曰: “各園所碑石改樹等節, 設都監擧行事, 向有所仰奏矣。 春序旣半, 宜卽始役, 都監堂郞差出何如,” 敎曰: “不必張大, 令營建都監斯速擧行也。” 炳學曰: “嫡王孫、王孫胸褙儀章, 向伏承‘商議敦定, 後日更奏’之下敎。 而其時聖敎中, ‘麒麟之次, 莫如辟邪; 白澤之次, 莫如狻猊’, 大聖人取象著制, 臣不任欽仰萬萬。 麒麟之於辟邪, 其形甚似; 白澤之於狻猊, 其實相近。 嫡王孫胸褙之宜用辟邪, 王孫胸褙之宜用狻猊, 品式節文, 俱合禮意。 而諸臣之議, 亦無他辭, 故敢此仰達矣。” 敎曰: “胸褙今旣歸正, 以此載之於《五禮便攷》儀章卷可也。” 炳學曰: “關西襦紙衣, 以代錢定式矣。 北關襦紙衣, 亦依關西例, 一體以代錢磨鍊, 而就該道京上納中, 每年準折劃送北兵營, 以爲主管。 關西則自管稅廳輸送平安兵營, 亦爲主管, 則似合方便之道。 毋論關西、關北, 頒給之會, 若有作奸之弊, 亟用軍律之意, 嚴立科條, 期有實效何如,” 允之。
고종 8권, 8년(1871 신미/청동치(同治) 10년) 5월 17일(병오) 1번째기사
선농단에서 보리 수확을 구경하다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곡식을 수확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어 늙은 백성들과 일반 사람들에게 노주례(勞酒禮)를 행하였다.
시임대신(時任大臣)과 원임대신(原任大臣)을 인견(引見)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이미 친경(親耕)을 하였는데, 또 곡식을 수확하는 것을 구경하는 행사는 대체로 우리 왕조의 옛 규례로써 모두 훌륭한 일입니다.
가을에 풍년들 경사가 있을 것을 오늘 징험할 수 있으니,
온 나라의 백성들치고 누군들 즐거운 기색으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절기가 5월로 접어들어 적전(籍田)에 심은 보리가 익으면 임금이 직접 나가 수확하는 것을 구경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 행사는 영묘(英廟) 때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칠순의 보령에도 오히려 직접 나가서 거행하였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밭을 가는 의식만 가지고 수확하는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예법상 미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선대 임금들의 업적을 잘 계승하여 자성(粢盛)을 공상(供上)하여 만백성들에게 솔선수범하였으니,
하늘이 기뻐하고 사람들도 이에 대해 기뻐하며 축복합니다.
더구나 반가운 비가 흠뻑 내려 모든 농사가 잘될 수 있게 되고,
팔도(道)의 보리가 모두 이렇게 잘 익었는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보리 풍년에 이어 모든 곡식이 잘될 것이니, 가을에 풍년이 들게 될 것을 신은 또한 손을 맞잡고 고대합니다”하고,
우의정(右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이미 친경을 행하고 지금 또 이렇게 수확하는 것을 구경하였으니 이것은 처음과 마감을 잘 맺는 훌륭한 일입니다.
농사에 힘쓰는 전하의 마음이 이렇듯 정성스러운 결과 하늘이 많은 복을 내려주고 때에 맞게 비가 오고 볕이 나서 보리풍년이 든 것입니다.
이로부터 풍년이 들어 모든 창고가 차고 넘치게 될 것이니,
온 나라 농부들의 경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선조(先祖)때부터 이런 행사를 하였기때문에 나도 거행할 것이다”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오늘의 행사는 백년 이래에 처음있는 성대한 의식입니다.
전하께서 직접 나와서 곡식을 수확하는 것을 구경하였고, 마음속으로 농사일이 어렵다는 것을 특별히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이 많은 복을 내려주었으니, 온 나라에 풍년이 들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하고,
홍순목이 아뢰기를,
“오늘의 훌륭한 행사에 대해 온 나라 사람들이 몹시 기뻐하며 찬송하고 있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을 미루어 양맥(兩麥)이 잘 여물고 온 나라에 똑같이 풍년이 들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을 바랄 뿐이다”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번에 늙은 백성들 중에 나이 70세이상 되는 사람들에게 체가(帖加)하려고 한다”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이것은 실로 노인을 우대하는 훌륭한 조치이므로 더욱 공경하여 우러르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十七日。 詣先農壇, 觀刈。 仍行勞酒禮於耆民庶人。 引見時原任大臣。 判府事李裕元曰: “旣行親耕, 又此觀刈, 蓋我家古禮, 而俱盛擧也。 有秋之慶, 可徵於今日, 八域民庶, 孰不欣欣有喜色哉,” 領議政金炳學曰: “節屆仲夏, 耤田麥告熟, 親勞玉趾, 誕行觀刈之儀。 是擧也, 始自英廟朝, 七旬寶齡, 猶復親臨而行之。 蓋其耕而不穫, 于禮有缺故耳。 今我殿下, 善繼善述, 于以上供粢盛爲萬民先, 天心之所悅豫, 人情亦此歡祝。 況喜雨周洽, 慰滿三農, 八路之麥, 均如此麥之穰穰遂遂。 繼玆而百穀用成, 乃亦有秋, 臣又攢手而俟之。” 右議政洪淳穆曰: “旣行親耕, 今乃觀刈, 乃終始之盛擧也。 務本之聖衷, 若是眷眷, 所以天休滋至、雨暘調均致有來牟之穰穰。 從玆而迄用康年, 千倉萬廂, 八域農夫之慶, 於斯可占矣。” 敎曰: “粤自先祖, 旣有是擧, 故予亦行之” 炳學曰: “今日之擧, 卽百年來初有盛典也。 親臨觀刈, 聖衷特軫於稼穡之艱難, 天休滋至, 八路之均登, 可占矣。” 淳穆曰: “今日盛擧, 朝野群情, 胥切攢頌矣。” 敎曰: “推此, 而兩麥之豐稔, 八路之均登, 亦可期。 以是爲望也。” 又敎曰: “今此耆民中年七十以上者, 方欲帖加矣。” 炳學曰: “此固優老之盛典, 尤不任欽仰矣。”
고종 13권, 13년(1876 병자/청광서(光緖)2년) 윤5월 11일(임신) 1번째기사
선농단의 기우제에 의빈을 보내어 치제하다
선농단(先農壇)의 별기우제(別祈雨祭)에 의빈(儀賓)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十一日。 先農壇別祈雨祭, 遣儀賓, 設行。
고종 16권, 16년(1879 기묘/청광서(光緖) 5년) 7월 9일(신사) 1번째기사
이유원과 북양대신 이홍장이 주고받은 편지
일본을 견제하고 러시아 사람들이 엿보는 것을 방지할 것을 권하였는데,
이때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원(李裕元)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에,
【“2월경에 객(客)이 도착하여 작년 섣달보름에 보낸 혜서(惠書)를 받았습니다.
외교문제를 가지고 이득과 손실에 대해 구명하고 정세에 대한 분석을 되풀이 해가면서 설명한 것은 충성스러운 시책과 커다란 계획으로써 감복하는 마음이 한량없습니다.
요사이 많은 나이에 건강하게 지내고 나랏일도 잘 처리하여 국토를 보전하고 외적을 방어하는 조처가 모두 합당하니 매우 칭송하고 뜻을 받들게 됩니다.
일본이 귀국과 교섭하는 여러가지 절차에 대해서는, 왜인(倭人)의 성정이 포학하고 탐욕스러운 까닭에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디디려는 계책을 쓰는 것을 귀국이 그때마다 응수하기란 틀림없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작년에 왜국에 주재한 공사(公使) 하시독(何侍讀)이 글을 보내왔는데, 왜인들이 소개해 줄 것을 청하면서 귀국과 진심으로 친하게 지내고 서로 속이지 말기를 바란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습니다.
제가 또 생각하기에 자고로 교린(交隣)의 도는 진실로 타당하다면 구적(仇敵)이 원조자가 되고 진실로 타당하지 않다면 원조자가 구적이 될 것입니다.
왜인의 말이 비록 반드시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기회를 맞아서 잘 유도하여 그들의 트집을 막고 영원토록 화목하기를 바랍니다. 이 때문에 일찍이 편지를 부쳐서 먼저 의심을 보여서 구실이 되도록 하지는 말라고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최근에 살펴보면 일본의 처사가 잘못되고 행동이 망측하므로 미리 방어해야 하므로 감히 은밀히 그 개요를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은 근래 서양 제도를 숭상하여 허다한 것을 새로 만들면서 벌써 부강해질 방도를 얻었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창고의 저축은 텅비고 국채(國債)는 쌓이고 쌓여서 도처에서 말썽을 일으키면서 널리 땅을 개척하여 그 비용을 보상하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강토가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 북쪽으로는 귀국이고 남쪽으로는 중국의 대만(臺灣)이니 더욱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유구(流球)도 역시 수백년의 오랜 나라이고 모두 일본에 죄를 지었다고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올봄에 갑자기 병선(兵船)을 출동시켜 그 나라 임금을 폐위하고 강토를 병탄하였습니다. 중국과 귀국에 대해서도 장차 틈을 엿보아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고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은 병력과 군량이 일본의 10배나 되기 때문에 스스로 견뎌낼 수 있겠지만 귀국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은밀히 무비(武備)를 닦고 군량도 마련하고 군사도 훈련시키는 동시에 방어를 튼튼히 하면서 기색을 나타내지 말고 그들을 잘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이웃나라 왕의 정상적인 관계로는 조약을 성실하게 지키어 그들에게 이용될 단서를 주지 않는 것이며, 하루아침에 사건이 발생되었다하더라도 그들이 그르고 우리가 옳으면 승부는 그것에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귀국은 이전부터 문화를 숭상하는 나라로는 불리었지만 반면에 경제력은 대단히 약하기 때문에 즉시 명령을 내려 신속히 도모하여 한다해도 짧은 시일에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일본이‘봉상호(鳳翔號)’, ‘일진호(日進號)’두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오랫동안 부산포(釜山浦) 밖에 정박시키고 대포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사태가 엄중하여지면 중국이 힘을 다해 돕겠지만 거리가 멀기 때문에 제시간에 미치지 못할까봐 우려됩니다. 더욱이 걱정되는 것은 일본이 서양 사람들을 널리 초빙해다가 해군과 육군의 병법을 훈련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대포와 군함이 우수한 면에서는 서양사람들에 만 분의 일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귀국으로서는 대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일본이 서양의 여러 나라들에 아첨하면서 그들의 세력을 빌려서 이웃나라를 침략하려는 생각을 하지않는 적이 없습니다. 작년에 서양 사람들이 귀국에 가서 통상을 하자고 하다가 거절당하고 갔으니 그들의 마음은 종시 석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일본이 뒤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들과 결탁하여 개항에 대한 이득을 가지고 유혹시키거나 혹은 북쪽으로 러시아와 결탁하여 영토 확장의 음모로 유인한다면 귀국은 고립되는 형세가 될 것이니 은근한 걱정이 큽니다.
시무(時務)를 알고있는 중국 사람들은 모두 의논하기를,‘사건이 벌어진 다음에 뒤늦게 가서 구원하는 것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다른 대책을 생각해보는 것만 못하다’라고 합니다. 말썽도 없게 하고 사람도 편안하게 하는 도리로써 과연 능히 시종일관 문을 닫아걸고 자체로 지켜낼 수 있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서양 사람들은 가볍고 편리하고 예리한 자기들의 무기를 믿고 지구상의 여러 나라를 왕래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사실 천지개벽 이후에 없었던 판국이며 자연적인 추세이니 사람의 힘으로는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귀국이 이미 할 수 없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고 통상을 한다는 사실이 벌써 그 시초를 연 것이니, 여러 나라들도 반드시 이로부터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며 일본도 도리어 이것을 좋은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지금의 형편으로는 독(毒)으로 독을 치고 적을 끌어 적을 제압하는 계책을 써서 이 기회에 서양의 여러 나라와도 차례로 조약을 체결하고 이렇게 해서 일본을 견제해야 할 것입니다. 저 일본이 사기와 폭력을 믿고 고래처럼 들이키고 잠식(蠶食)할 것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유구를 멸망시킨 한가지의 사실에서 단서를 드러내놓은 것입니다.
귀국에서도 어떻게 진실로 방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데, 일본이 겁을 내고있는 것이 서양입니다. 조선의 힘만으로 일본을 제압하기에는 부족하겠지만 서양과 통상하면서 일본을 견제한다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서양의 일반 관례로는 이유 없이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대체로 각 나라들이 서로 통상을 하면 그 사이에 공법(公法)이 자연히 실행되게 됩니다.
작년에 터키가 러시아의 침범을 당하여 사태가 매우 위험하였을 때에 영국, 이탈리아와 같은 여러 나라에서 나서서 쟁론(爭論)하자 비로소 러시아는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났습니다. 저번에 터키가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면 러시아인들이 벌써 제 욕심을 채우고 말았을 것입니다. 또 구라파의 벨기에와 덴마크도 다 아주 작은 나라이지만 자체로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자 함부로 침략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강자와 약자가 서로 견제하면서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또한 남의 나라를 뛰어넘어서 먼 곳을 치려 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어려운 일로 여겼습니다. 서양의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은 귀국과 수만리 떨어져 있고 본래 다른 요구가 없으며 그 목적은 통상을 하자는 것뿐이고 귀국의 경내를 지나다니는 배들을 보호하자는 것뿐입니다.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고엽도(庫葉島), 수분하(綏芬河), 도문강(圖們江) 일대는 다 귀국의 접경이어서 형세가 서로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귀국에서 먼저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과 관계를 가진다면 비단 일본만 견제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엿보는 것까지 아울러 막아낼 수 있습니다.
러시아도 반드시 뒤따라서 강화를 하고 통상을 할 것입니다. 참으로 이 기회를 타서 계책을 빨리 고치고 변통할 도리를 생각할 것이지 따로 항구를 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일본이 통상하고 있는 지역에 몇 개 나라의 상인이 더 오겠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의 무역을 나누어갈 뿐이지 귀국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관세(關稅)를 정하면 나라의 경비에 적으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으며 상업에 익숙하면 무기 구입도 어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조약을 체결한 나라들에 때때로 관리들을 파견하여 서로 빙문(聘問)하고 정의(情誼)를 맺어둘 것입니다.
평상시에 연계를 맺어둔다면 설사 한나라에서 침략해 오는 것과 맞닥트려도 조약을 체결한 나라들을 모두 요청하여 공동으로 그 나라의 잘못을 논의하여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일본도 감히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이며 귀국에서도 먼 지방의 사람들을 접대하는 방도로서도 옳을 것입니다. 사건마다 강구(講求)하여 강유(剛柔)를 적절하게 하는 것을 힘쓰고 모두 협력하도록 조종한다면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방도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으며, 왜인을 방어할 수 있는 계책으로서도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요즘 각 국의 공사들이 우리 총리아문(總理衙門)에다 자주 귀국과의 상무(商務)에 대해 말해오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귀국은 정사와 법령을 모두 자체로 주관해 오고 있으니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간섭하겠습니까?
단지 중국과 귀국은 한집안이나 같으며 우리나라의 동삼성(東三省)을 병풍처럼 막아주고 있으니 어찌 입술과 이가 서로 의존하는 그런 정도뿐이겠습니까?
귀국의 근심이 곧 중국의 근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넘은 줄 알면서도 귀국을 위한 대책을 대신 생각하여 진정으로 솔직히 제기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곧 귀국 임금에게 올려서 정신(廷臣)들을 널리 모아서 심사원려(深思遠慮)하여 가부(可否)를 비밀리에 토의하기 바랍니다.
만일 변변치 못한 말이지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먼저 그 대강을 알려주기 바랍니다. 우리 총리아문에서도 그런 내용을 서로 알고 있어야 여러 나라들이 이 문제를 언급할 때에 기회를 보아가며 말을 하여 국면이 전환되어 가고 있다는 뜻을 서서히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종전에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내부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힘을 합쳐 압력을 가하려고 하였으며 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옥백(玉帛)으로 하지않고 무력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 조약을 오랫동안 이행해 오면서 제재를 받았던 것이 매우 많았다는 것은 원근에서 다 충분히 들어서 아는 바입니다. 귀국에서 만약 무사할 때에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저들은 뜻밖의 일에 기뻐하여 당치않은 요구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편을 판매한다든가 내지(內地)에 선교(宣敎)하는 여러 큰 폐단들에 대해서 엄하게 금지시켜도 아마 저들은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로서 만약 다른 견해가 있게되면 또한 수시로 한두 가지 적당히 참작해서 충고의 의견을 올려 전반적 국면에서는 잘못된 것이 없게 할 것입니다. 대개 정사하는 데서는 때맞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그렇게 해야 정사가 오래 유지되는 것입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하여 이해(利害)를 잘 도모하는 것이 병가(兵家)에서 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오직 집사(執事)만이 실제로 도모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드게트〔崔鎭勝:V.M.Deguette〕가 귀국에 나금(拿禁)되어 있는데 북경(北京)에서는 해국(該國)의 사신이 우리나라의 예부(禮部)에 공문을 보내 석방시키도록 청해 달라고 간곡히 요구하였습니다.
사실은 이 사건을 조정해서 말썽을 없애려는 생각이었는데, 아마 이미 조사해서 시행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편지를 받는 족족 이웃 나라를 사귀는 도리에 대하여 친절히 말해주는데 어찌 번거롭다고 해서 마음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털어놓지 않겠습니까? 문안을 드립니다. 글로는 간곡한 뜻을 다하지 못합니다.”】하였다.
이유원(李裕元)의 회답 편지에,
【“이중당(李中堂) 문화전(文華殿)태학사(太學士) 숙의백야작(肅毅伯爺爵)께 올립니다.
그동안 헌서계관(憲書啓官) 이용숙(李容肅)의 편에 삼가 글을 써서 부치면서 유태수(游太守)에게 부탁해서 가져다 전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10월 20일경에 이용숙의 수본(手本)을 받았습니다.
이미 그 글이 전달되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자세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궁금한 생각이 맺혀 있습니다. 이제 공문을 바치러 가는 사신편에 외람되게 마음속에 품고 있던 바를 고백하면서 꼭 전달될 것을 바랍니다.
올해 7월 9일에 보내준 편지를 8월 그믐 경에 받아 읽었으나 그 후 또 이럭저럭하다가 지금까지 회답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예사 소식을 알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태만해서는 안될 것인데, 더구나 거듭 말한 사연이 순전히 우리나라의 기밀에 속하는 것을 깨우쳐준 것인데도 멍청히 듣지도 알지도 못한 것처럼 있자니 저로서도 제자신의 변변치 못한 죄과를 얼마나 책망하게 되겠습니까? 이제 외람되게 심정을 털어놓으며 더욱 시간을 재촉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양해하여 줄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와서 우리나라에서 일본과 화친하고 조약도 맺고 통상도 하는 것은 사실상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일이지만 그들과의 접촉에서 부디 의심하는 뜻을 보이지 말라고 한 높은 가르침은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참으면서 겉으로 유순하게 대하는 것은 사나운 체하는 성기(性氣)를 꺾자는 것인데 그들의 언동에는 엉뚱한 요구가 없지 않습니다.
규정한 이외의 딴 항구를 지적하여 개방해 달라는데 어디나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두시간이나 승강이한 뒤에 원산진(元山津)으로 승낙해 주었습니다.
인천(仁川)은 수도 부근에 속하기 때문에 마침내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더니 어느 정도 불평을 품게는 되었으나 교제가 파탄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탐욕스럽고 교활한 수작으로 말하면 순전히 고래처럼 들이키고 잠식하자는 것입니다.
올봄에 유구국(流球國)을 멸망시킨 것이라든지 요즘 대포와 군함을 연습한 일들은 이렇게 비밀리에 기별해서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눈과 귀를 다 막고 앉아있는 우리로서 어디서 얻어 듣겠습니까? 당신이 어진 덕으로 작은 우리나라를 돌보아준 지는 매우 오래 전부터이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이렇게 위험이 닥치거나 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방지할 대책까지 강구해 주는 것이 이런 정도에까지 이를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오늘 서양 사람들의 판국은 사실상 자연적인 기운입니다. 우선 환난(患難)을 방어해야 할 중요성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또 독으로 독을 치고 적을 끌어 적을 제압하는 계책에 대해서 찬찬히 보여주니, 아무리 볼품없는 인물로 소견이 암둔하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데야 어찌 환히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서양 각 국과 먼저 통상을 맺기만 하면 일본이 저절로 견제될 것이며, 일본이 견제되기만 하면 러시아가 틈을 엿보는 것도 걱정없을 것이라는 것은 바로 당신의 편지의 기본 내용입니다. 이 밖에 관세를 정하는 데 대한 문제, 장사 형편을 알았다가 적용하는 데 대한 문제, 각종 폐단을 엄격히 금지할 데 대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대책이 그리도 세밀합니까? 참으로 황송하고 감사합니다. 어찌 감히 그 말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스스로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한쪽 모퉁이에 외따로 있으면서 옛 법을 지키고 문약(文弱)함에 편안히 거처하며 나라 안이나 스스로 다스렸지 외교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서양의 예수교는 오도(吾道)와 달라 사실 인간의 윤리를 그르치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맹렬히 타오르는 불처럼 두려워하고 독한 화살처럼 피하고 귀신을 대하듯 조심하고 멀리합니다. 요사이 몰래 숨어들어온 프랑스 사람을 체포하였다가 자문을 받고 해송(解送)하였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예수교에 물든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미루어 보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편을 판다든지 예수교를 퍼뜨린다든지 해도 바로 약하고 순한 우리의 힘으로는 성난 짐승처럼 덤벼드는 저들을 당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밝게 알 수 있습니다. 옛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먼 나라와 교류하고 가까운 나라를 친다’라고 하였고, 또‘오랑캐를 끌어들여 오랑캐를 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적을 끌어 적을 막는 계책인 것입니다.
그러나 목전의 형편은 옛날과 달라서 아무리 강성하여 힘있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아침에는 외교, 저녁에는 무력 두 방면에서 상대하다가는 장차 분주한 통에 힘이 다하여 자기부터 먼저 패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처럼 문약한 나라가 어떻게 옛일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실로 할 수 없는 것이지 하지않는 것은 아닙니다. 신농씨(神農氏)는 백 가지 풀을 맛보다가 독을 만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나 신농씨가 아닌 사람이 그대로 본받아 했다가는 한번 독을 만나 죽으면 그만이지 다시 살아날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적을 제어한다는 노릇이 먼저 적의 공격을 받게 되고 독을 치려는 노릇이 먼저 독에 중독 될 것입니다. 은근히 걱정되는 것은 한번 독에 걸리면 다시 일어날 수 없으니 어느 겨를에 적을 제어하겠습니까? 당신의 위엄과 명망이 천하에 떨치고 계교와 책략이 내외의 정세에 들어맞아 저 강대한 러시아나 복잡한 서양 나라들이나 변덕이 많은 일본 사람들도 진심으로 굽혀들어 무릎 꿇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일본 사람들이 대만(臺灣)을 노린다고 하여도 해를 입을 턱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오랫동안 당신의 덕을 입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공법(公法)은 이미 이유없이 남의 나라를 빼앗거나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러시아와 같은 강국도 귀국에서 군대를 철수하였으니, 혹시 우리나라가 죄없이 남의 침략을 당하는 경우에도 여러 나라에서 공동으로 규탄하여 나서겠습니까?
한가지 어리둥절하여 의심이 가면서 석연치않는 점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유구왕(流球王)을 폐하고 그 강토를 병탄한 것은 바로 못된 송(宋)나라 강왕(康王)의 행동이었습니다. 구라파의 다른 나라들 중에서는 응당 제(齊)나라 환공(桓公)처럼 군사를 일으켜 형(邢)나라를 옮겨놓고 위(魏)나라를 보호하거나, 혹은 일본을 의리로 타이르기를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허(許)나라의 임금을 그대로 두게 한 것처럼 하는 나라가 있음직한데 귀를 기울이고 들어봐도 들리는 말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터키를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준 것으로 보아서는 공법이 믿을 만한데, 멸망한 유구국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공법이 그 무슨 실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일본 사람들이 횡포하고 교활하여 여러나라들을 우습게보면서 방자하게 제멋대로 행동해서 공법을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까?
벨기에와 덴마크는 사마귀만한 작은 나라로서 여러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지만 강자와 약자가 서로 견제함으로써 지탱되는데 유구왕은 수백년의 오랜 나라로서 그대로 지탱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지역이 따로 떨어져 있고 여러나라들과 격리되어 있어서 공법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우리나라는 기구하게도 지구의 맨 끄트머리에 놓여있어 터키, 유구국, 벨기에, 덴마크와 같은 작은 나라들보다도 더 가난하고 약소합니다. 게다가 서양과의 거리도 아주 멀어 무력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더욱 어림없는 일이고 옥백으로 주선하려고 하여도 자체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저 일본 사람들은 통상에 경험이 있고 영업에 재능이 있어서 부강하게 되는 방도를 다 알고 있지만 오히려 저축이 거덜나고 빚만 쌓이게 된 것을 탄식한답니다.
설령 우리나라가 정책을 고쳐서 항구를 널리열어 가까운 나라들과 통상하고 기술을 다 배운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들과 교제하고 거래하다가 결국 창고를 몽땅 털리고 말 것입니다. 저축이 거덜 나고 빚이 쌓이는 것이 어찌 일본 사람의 정도에만 그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나라는 토산물도 보잘것없고 물품의 질이 낮다는 것은 세상이 익히 아는 바입니다. 각국에서 멀리 무역하러 온다하여도 몇 집끼리 운영하는 시장과 같아서 천리 밖에서 온 큰 장사를 받아주기는 어려우니, 주인이나 손님이나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자체로 어떻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 그러한 것입니다. 절름발이로서 먼 길을 갈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외교란 말을 하지말고 앉아서 제 나라나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중국의 규모는 비유하면 하늘과 땅처럼 광대하기 때문에 크건 작건 한 풀무로 불어치우고 곱건밉건 한 모양으로 만들어 기린이건 봉황이건 뱀이건 용이건 모두 다 포함하여 그때그때의 형편에 부합시켜도 태산반석에 올려지고 따라서 모든 나라가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섣불리 본받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하루살이가 큰 새처럼 날아보려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진심으로 타일러주어 되도록 우리를 잘되게 하고 해를 면하게 하려는 생각이 간절하고 진지하니 부형이 자제에게 대한 생각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러나 형편이 허락지않아 그대로 받들어 실행하지 못하니,‘워낙 어리석은 사람은 종신토록 깨닫지 못한다.’고 한 말이 바로 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딴에 의탁하고 믿는 것으로 말하면 서양나라들과 일본도 당신의 위엄 아래에서는 감히 방자하게 놀지못하는 만큼 우리나라가 길이 당신의 덕을 입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도를 받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밤낮으로 바라는 소원입니다.
생각이 궁하고 말이 모자라 더 쓸 바를 모르니 어리석은 사람을 가엾이 여기어 그 죄를 용서하기 바랍니다. 다 쓰지 못하니 살펴주기 바랍니다.”】하였다.
初九日。 中國北洋大臣李鴻章, 勸我國與英、德、法、美、通商, 欲爲牽制日本, 防止俄人窺伺。 際此, 致書於領府事李裕元。 其文曰:
【二月間, 接到客臘望日惠書。 反覆於邦交一事, 推究得失, 剖晣情勢, 忠謨碩劃, 傾佩無涯。 比諗頤養, 脩斷平章, 大政保疆, 禦侮措注, 咸宜至爲, 頂頌承示。 日本與貴國效涉各節, 倭人性情桀驁, 貪校爲得步進前之計, 貴國隨時應時, 正自不易。 客歲, 駐倭公使何侍讀來書屢稱: “倭人倩爲介紹, 願與貴國, 誠心和好, 兩無虞詐。” 鄙人且念, 自古交隣之道, 固應得其宜, 則仇敵可爲外援, 固應未得其宜, 則外援可爲仇敵。 倭人之言, 雖未必由中, 尙冀迎機善導, 杜彼爭端, 永相輯睦。 是以曾寄書, 奉勸勿先示以猜嫌, 致令藉爲口實也。 近察日本行事乖謬, 居止叵測, 宜早爲之防, 有不敢不密陳梗槪者。 日本比年以來, 宗尙西法, 營造百端, 自謂已得富强之術。 然因此, 庫藏空虛, 國儥累累, 不得不有事四方, 冀拓雄圖, 以償所費。 其疆宇相望之處, 北則貴國, 南則中國之臺灣, 尤所注意。 琉球亦數百年舊國, 竝未開罪於日本。 今春忽發兵船, 刦廢其王, 呑其疆土。 其於中國與貴國, 難保將來, 不伺隙以逞。 中國兵力、餉力, 十倍日本, 自恃尙可勉支。 唯當代貴國, 審度躊躇似宜。 及此時, 密修武備, 籌餉鍊兵, 愼固封守, 仍當不動聲色, 善爲牢籠。 凡交隣事, 宜恪守條約, 勿予以可乘之端。 一朝有事, 則彼曲我直, 勝負攸分。 第思貴國, 向稱右文之邦, 財力非甚充裕, 卽令迅圖整頓, 非朝夕所能見功。 現間日本派鳳翔、日進兩艦, 久住釜山浦外, 操鍊巨礮, 不知何意。 設有反覆, 中國宜竭力相助, 而道里遼遠, 終恐緩不及事, 尤可慮者。 日本廣聘西人, 敎鍊水陸兵法。 其船礮之堅利, 雖萬不逮西人, 恐貴國尙難爲敵。 況日本諂事泰西各國, 未嘗不思藉其勢力, 侵侮隣邦。 往歲, 西人欲往貴國通商, 雖見拒而去, 其意終未釋然。 萬一日本陰結英、法、美諸邦, 誘以開阜之利, 抑或北與俄羅斯句合, 導以拓土之謀, 則貴國勢成孤注, 隱憂方大。 中國識時務者, 僉議以爲“與其緩救於事後, 不如代籌於事前。” 夫論息事、寧人之道, 果能始終閉關自守, 豈不甚善? 無如西人恃其僄銳, 地球諸國無不往來, 實開闢以來, 未有之局面、自然之氣運, 非人力所能禁遏。 貴國旣不得已而與日本, 立約通商之事, 已開其端, 各國必將從以生心, 日本轉若視爲奇貨。 爲今之計, 似宜痢攻毒、以敵制敵之策, 乘機, 次第亦與泰西各國立約, 藉以牽制日本。 彼日本恃其詐力, 以鯨呑蠶食爲謀, 廢滅琉球一事, 顯露端倪。 貴國固不可無以備之。 然日本之所畏服者, 泰西也。 以朝鮮之力, 制日本, 或虞其不足; 以統與泰西通商, 制日本, 則綽乎有餘。 泰西通例, 不得無故, 奪滅人國。 蓋各國互相, 通商而公法行乎其間。 去歲土耳其爲俄所伐, 勢幾岌岌。 英、奧諸國, 出而爭論。 俄始領兵而退。 向使土國孤立無援, 俄人已獨亨其利。 又歐洲之比利時、丹馬, 皆極小之國, 自與各與立約, 遂無敢妄肆侵陵者。 此皆强弱相維之明證也。 且越人圖遠, 古人所難。 西洋英、德、法、美諸邦, 距貴國數萬里, 本無他求。 其志不過欲通商耳, 保護過境船隻耳。 至俄國所踞之庫葉島、綏芬河、圖們江一帶, 皆爲貴國接壤, 形勢相逼。 若貴國先與英、德、法、美交通, 不但牽制日本, 竝可杜俄人窺伺。 而俄亦必隨卽講和通商矣。 誠及此時, 幡然改圖, 量爲變通, 不必別開口岸。 但就日本通商之處, 多來數國商人。 其所分者, 日本之貿易於貴國, 無甚出入。 若定其關稅, 則餉項不無少裨; 熟其商情, 則軍火不難購辦。 更隨時派員分往有約之國, 通聘問、聯情誼。 平時旣休戚相關, 倘遇一國有侵, 佔無禮之事, 儘可邀集有約各國, 公議其非鳴鼓而攻之。 庶日本不敢悍然無忌。 貴國亦宜於交接遠人之道。 逐事講求務使剛柔得中, 操縱悉協, 則所以鈐制日本之術, 莫善於此, 卽所以備禦倭人之策, 亦莫善於此矣。 近日各國公使在我總理衙門, 屢以貴國商務爲言。 因思貴國政敎禁令, 悉由自主。 此等大事, 豈我輩所可干預? 惟是中國與貴國, 誼同一家, 必爲我東三省屛蔽, 奚啻唇齒相依? 貴國之憂, 卽中國之憂也。 所以不憚越俎, 代謀直紓衷曲。 望卽轉呈貴國王, 廣集廷臣, 深思遠慮, 密議可否。 如鄙言不謬, 希先示覆大略。 我總理衙門, 亦欲以此意相達, 俟各國議及之時, 或可相機措詞, 徐示以轉圜之意。 從前泰西各國, 乘中國多故, 倂力要挾, 立約之時, 不以玉帛而以兵戎所以行之。 旣久掣肘頗多想, 亦遠近所稔知。 貴國若於無事時, 許以立約。 彼喜出望外, 自不致格外要求。 如販賣鴉片煙、傳敎內地, 諸大弊懸爲厲禁, 彼必無詞弊處。 如有所見, 亦當隨時參酌一二, 以陳忠告之義, 總期於大局, 無所虧損。 夫政貴因時治期可久, 知己知彼, 利害宜謀, 兵家所尙, 惟執事實圖之。 法國敎士崔鎭勝經貴國, 拿禁。 該國使臣在京, 婉求我禮部, 行文轉請釋放。 實爲調停息事起見想, 已査照施行。 緣送奉來函, 諄諄於交隣之道, 用敢不憚覶縷, 密布腹心。候起居。書不盡意。】
李裕元答書。 其文曰:
【李中堂文華殿太學士肅毅伯爺爵前。 間因憲書啓官李容肅謹裁上函, 屬游太守轉呈, 卽於十月念間, 獲見李容肅手本, 縱知書緘似經勻鑑, 未得其詳, 下懷結轖。 今於年貢使行, 冒白衷曲, 庸冀付達焉。 本年七月九日所賜下, 伏仗奉於八月晦間, 拜手盥讀伊後, 便使蹉違至今, 謝忱未申。 雖尋常奠儀, 尙不宜逋慢如是。 矧承諄複辭旨耑爲鄙邦, 機密事布喩。 而曚然若罔聞知者, 不敏之咎, 內訟曷已? 猥玆進籲, 所以愈急, 切於錫辰。 庶蒙矜察否? 邇年弊邦之與日本交好立約通商, 固出於萬不得已。 而其接應之宜, 寔遵前後勻敎, 勿示猜嫌之意。 所以含容巽順, 要挫其桀驁性氣。 而惟彼言動, 不無逕庭干請矣。 在科外指開別港, 無非重地。 相持兩時而後, 以元山津施許。 仁川係是畿甸竟, 不得副其求, 則其去也, 頗懷怏怏。 而其諧際, 幸不至相失。 若其貪狡之志, 專在於鯨呑蠶食。 今春廢滅球國、近日操演礮艦等事, 苟非此密諭開示, 顧玆聾瞽, 那由得知? 我爵前之仁德, 庇護我小邦, 厥惟久矣。 而乃玆䘏患于未危、未亂, 爲之代籌, 何圖至此之極? 今日西人之局面, 寔由自然之氣運。 旣是至訓, 以防患之要, 又有痢攻毒、以敵制敵之策, 縷縷下示者焉。 雖以款啓昧晦, 細細蘊繹, 詎無灑然而有省者乎? 泰西各國先與交通, 則日本自可牽制, 日本旣已牢制, 則俄國窺伺, 亦無可憂。 斯如勻敎綱領。 而以至定關稅也, 襲商情也, 諸弊之禁厲也, 又何其處分之詳密也? 誠惶誠感, 敢不聞命。 而第自念弊邦, 僻在一隅, 謹守規度, 恬居文弱。 自治方內, 未暇外交。 而況泰西之學, 有異吾道, 實乖民彝, 則嘗畏之如烈火, 避之如毒矢, 駭而遠之如鬼神。 近拏法國人潛踪者, 雖奉咨解送, 而鄙邦人染敎駭者, 罔或肆赦。 推此庶有因諒。 而販煙行敎, 卽其嬴豕之孚, 恐非豶牙之攸制, 亦庶可以燭照矣。 古昔謀國者, 有曰: “遠交而近攻”, 有曰: “以蠻而攻蠻”, 斯乃以敵制敵之術也。 而目下局面, 與昔頓異。 雖武强自力者, 朝幣夕弋, 待於二境, 將疲於奔命, 我先取敗而已。 豈文弱如鄙邦者, 而可以效古昔乎? 寔不能也, 非不爲也。 神皇之嘗百草, 遇毒而死, 死而復起。 非神皇效爲, 則一遇毒而能起者鮮矣。 今要制敵而我先受敵, 要攻毒而先中毒。 竊恐一遇毒而不復起也。 奚暇以制敵乎? 惟我爵前威望震於陬澨, 謨畫協於中外, 以彼俄國之强禦、泰西之虎雜、日人之反覆, 靡不折心焉, 屈膝焉, 則日人之耽視臺灣, 無足爲害。 而弊邦久沐仁覆, 亦尙恃而不恐。 且泰西公法, 旣不復無故奪滅人國, 以俄之强, 亦斂兵於大國, 則弊邦之無辜, 或遇呑噬之毒, 亦庶幾諸國之所共禁乎? 惟獨有懜懂懷疑, 而不釋然者。 日人之廢琉王、呑其疆卽桀、宋之行耳。 歐洲別邦, 似宜有齊桓興師遷邢封衛之擧, 或義喩日本, 俾護置許君, 如鄭莊之所爲而側耳, 無聞何也? 救土國於垂亡, 則公法可仗, 而興琉邦於已滅, 則公法有難行歟? 抑日人之桀點輕視各國, 雖縱恣專制, 而公法莫能行歟? 利時、丹馬以痣小之國, 介於諸大國, 賴以强弱相維。 而琉王以累百年舊國, 不能相維者, 以其所處孤另, 與各國隔絶, 而公法有不及行而然歟? 弊邦則崎嶇在乎地維盡處。 其視土、琉、利、丹諸國, 尤貧儉呰窳。 距泰西, 又踔遠, 莫攀兵戎頡頏尙矣。 勿論玉帛周旋, 亦難自振。 夫日人之慣於通商、巧於營造, 盡得富强之道焉。 尙致枵其藏、累其債之歎, 則設令弊邦改圖, 廣置港阜, 畢通遐邇, 悉學技巧, 必於藉茅承筐, 應酬之際, 竟稛橐蕭然矣。 奚翅藏枵債累蹈, 日人之轍也? 且況偏邦地産之蔑裂、貨物之沽惡, 四方所稔聞耳。 各國之遠來交貿, 恐如三家之市, 難容千里之商。 不亦主客俱無利乎? 其難於自振, 實際然也。 蹙痿而思行遠, 無寧粤交之坐守爲得歟? 蓋上國規模, 譬則天地之大也。 巨細咸宥橐鑰, 媺惡畢就鈲槻, 麟鳳蛇龍, 無適無莫, 時式制宜, 而旋措泰盤, 因萬方所歸極。 而小邦遽欲, 則傚不猶盬雞之學阜鳥乎? 我爵前心腹敷喩, 務欲趨吉避害之念, 惻恤肫摰。 雖父兄之於子弟, 曷以過此? 而形格勢禁, 未由奉承。 ‘大遇終身不靈’, 無乃謂是歟? 然而私自依怙者, 泰西與日本, 旣無敢恣肆於爵前威鎭之下, 則小邦永賴大德, 機事輒荷提命, 是所日夜祈祝之至。 情窮辭迫, 不知攸裁。 伏惟哀其愚, 而宥其罪焉。 不備勻下察。】
고종 19권, 19년(1882 임오/청광서(光緖)8년) 5월 29일(갑인) 1번째기사
인정전에 나아가 선농단의 기우제에 쓸 향축을 친전하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선농단(先農壇)의 별기우제(別祈雨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二十九日。 詣仁政殿, 親傳先農壇別祈雨祭香祝。
고종 19권, 19년(1882 임오/청광서(光緖)8년) 6월 1일(을묘) 1번째기사
선농단에서 기우제를 지내다
선농단(先農壇)에서 별기우제(別祈雨祭)를 지냈다.
初一日, 乙卯。 行別祈雨祭于先農壇.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대한광무(光武)1년) 9월 29일(양력) 2번째기사
김재현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리다
치사(致仕)한 봉조하(奉朝賀) 김재현(金在顯)등 관원 716명이 올린 연명상소(聯名上疏)의 대략에,
“신등이 생각하건대,‘우리 폐하(陛下)께서는 뛰어난 성인의 자질과 중흥(中興)의 운수를 타고 왕위에 오른 이후 34년동안 총명한 지혜로 정사에 임하였고 신무(神武)를 발휘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밤낮으로 정력을 기울여 나랏일이 잘되게 하려고 애썼으며 변란을 평정하는 데 있어서는 형벌을 쓰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 크나큰 공렬은 천고(千古)에 으뜸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주권을 잡고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여 드디어 연호(年號)를 세우고 조칙(詔勅)을 시행하며 모든 제도가 눈부시게 바뀌었으니 이는 참으로 천명(天命)이나 인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어찌 지혜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주(周) 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천명은 오히려 새롭다’는 것이니
아! 거룩하고 훌륭합니다.
그런데 미처 하지 못한 것으로는 오직 황제의 큰 칭호를 정하지 못한 일입니다. 신들이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체로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은‘황(皇)’이라고 불렀고 요(堯)나 순(舜)은‘제(帝)’라고 불렀으며 하우(夏禹)나 성탕(成湯), 주문왕(周文王)이나 무왕(武王)은‘왕(王)’이라고 불렀습니다.
역대의 변천은 비록 다르지만 가장 높인 것은 한결같았습니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후로‘황’과‘제’를 합쳐‘황제(皇帝)’로 불렀으며‘왕’의 지위는 드디어 오작(五爵)의 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구라파의 각 나라는 우리와 문화나 제도가 같지않지만‘황’과‘왕’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로마가 처음으로 황제의 칭호를 썼는데 게르만이 로마의 계통을 이어 그 칭호를 답습하여 썼고 오스트리아〔奧國〕는 로마의 옛 땅에 들기때문에 역시 황제라고 불렀습니다.
독일〔德國〕은 게르만의 계통을 이었으므로 극존의 칭호를 받았으며 러시아〔俄國〕, 터키〔土耳其〕는 모두 자주의 나라이므로 다 가장 높은 칭호를 썼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역 경계가 중국과 잇닿아있고 나라가 나누어지고 통합된 것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세 나라는 각각 그 땅의 주인으로 다같이 왕의 칭호가 있었으며 심지어 송양(松讓), 가야(伽倻), 예맥(濊貊), 여진(女眞), 탐라(耽羅)등의 작은 나라들도 각기 왕으로 불렀습니다. 고려때 통합하여 다만 묘호(廟號)만 썼으며 본조(本朝)에서는 옛 관습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이후 그 나라들이 멀리서 존호(尊號)를 견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폐하(陛下)께서는 성덕(聖德)이 날로 새로워져 문교(文敎)가 멀리 미치고 머나먼 외국들과 외교 관계를 맺어 만국(萬國)과 같은 반열에 놓이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옛 칭호를 그대로 쓰고 있으니 실로 천심(天心)을 받들고 백성들의 표준이 되는 도리가 아닙니다.
적이 살펴보건대, 구라파와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다 평등하게 왕래하고 높고 낮음의 구분이 없는데 아시아의 풍속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 칭호를 보고 혹 불평등하게 대우한다면 교류함에 있어서 지장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이 밤낮으로 분개하는 것입니다.
이제 빨리 황제의 칭호를 올려 여러 나라에 공포한다면 시기하고 의심하는 것이 날로 없어지고 우의(友誼)가 더욱 돈독해져 앞으로 길이 천하 만대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 나라와 당(唐) 나라의 옛 땅에 붙어있고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은 다 송나라나 명(明)나라의 옛 제도를 따르고 있으니, 그 계통을 잇고 그 칭호를 그대로 쓴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다같이 로마의 계통을 이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립과 자주는 이미 여러 나라가 공인하였으니 당당한 존호(尊號)에 거하는 것은 응당 실행해야 할 큰 법도인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입니까?
신 등이《공법(公法)》을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거기에 쓰여 있기를,
‘나라의 임금이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가져야만 칭제(稱帝)하는 나라들과 평등하게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는데 신들은 이 말이 황제를 칭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하지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독립하였다는 명분은 있으나 자주(自主)의 실체는 없으며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으니 백성들의 의혹이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을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위의를 바로세우고 존호를 높임으로써
백성들 마음이 추향(趨向)하는 방향이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또 그 공법의 주석(註釋)에‘러시아의 임금이 칭호를 고쳐 황제로 하였는데 각 나라들에서 좋아하지 않다가 20년을 지나서야 인정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등이 이에서 보건대 우리가 우리나라의 일을 행하고 우리가 우리나라의 예(禮)를 쓰는 것은 우리 스스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인을 빨리 받는가 늦게 받는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미리 예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논의하는 자들이 말하기를,‘「왕」이나 「군(君)」이라고 하는 것은 한 나라 임금의 칭호이며「황제」라는 것은 여러 나라를 통틀어 관할하는 임금의 칭호이므로 넓은 영토와 많은 백성들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통합하지 못하였다면 황제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인구는 2천만을 밑돌지 않으니 폐하의 신민(臣民)된 사람치고 누군들 우리 폐하가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지존의 칭호를 받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옛 것을 인용하여 오늘에 증명하고 여정(輿情)을 참작하고 형세를 헤아려 보아도 실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여정(輿情)을 굽어 살피셔서 높은 칭호를 받아들여 만국에 공표하여 천하에 다시 새로운 관계를 세우신다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하여 더없이 다행하고 신민에게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짐에게 무슨 일인들 권하지 못하겠는가마는 전연 당치않는 칭호로 부르자고 말하는 것은 실로 경들에게서 기대하던 바가 아니니, 시국을 바로잡을 계책이나 강구하고 다시는 이에 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致仕奉朝賀金在顯等搢紳七百十六人聯名疏, 曰: “伏以臣等欽惟我陛下挺上聖之姿, 撫中興之運。 御極三十有四載, 聰明而有臨, 神武而不殺, 宵旰憂勤, 勵精圖治, 勘定禍亂, 期致刑措。 其弘功盛烈, 卓冠千古。 握自主之權, 定獨立之基, 遂乃建年號而行詔勅, 凡所制作, 煥然改觀。 此誠天命人心之莫之爲而爲者也, 夫豈智力所可容措哉, 是所謂‘周雖舊邦, 其命維新。’ 猗歟! 盛矣。 但所未遑而不擧者, 惟皇帝之大號是已。 臣等請泝其源而歷陳之。 夫羲、農稱皇, 堯、舜稱帝, 禹、湯、文、武, 稱王。 歷代之沿革, 雖不同, 其爲至尊, 則一也。 秦、漢以降, 合皇與帝, 而以皇帝稱之。 王位則遂列於五爵之上矣。 歐西各國, 文軌不同, 亦有皇王之別, 羅馬始用皇帝之號。 日耳曼接羅馬之統, 而襲其位號。 奧地利, 以其與於羅馬古地也, 故亦稱皇帝。 德國承日耳曼之統, 而膺其尊號。 俄羅斯、土耳其, 皆自主之國也。 故俱用至尊之號。 我邦地界, 毗連中土, 分合無定。 然新羅、高句麗、百濟三國, 各主其地, 均有王號。 至若松讓、伽倻、穢貊、女眞、耽羅等滕小之國, 亦各稱王。 麗朝統合, 只用廟號, 本朝受禪, 舊貫斯仍。 寔由唐、宋以下遙相控制故也。 惟我陛下聖德日新, 文敎遠被, 梯航交聘, 萬國同列, 而猶復襲用舊號, 則實非所以對揚天心、標準斯民之道也。 竊觀歐美諸國, 率皆平行往來, 無分軒輊。 而亞俗不然, 視其位號, 偶或不等, 則在交際, 不免有所妨礙。 此誠忠臣義士夙宵憤慨者也。 今若早進大號, 聲明萬國, 則猜嫌日銷, 友誼益敦, 其將永有辭於天下萬世矣。 我邦疆土, 係是漢、唐古地, 衣冠文物, 悉遵宋、明遺制, 接其統, 而襲其號, 無所不可。 正如德、奧之均接羅馬之統也。 獨立、自主, 旣經萬國公認, 居正履尊, 寔係應行大典, 陛下何憚而不爲乎, 臣等取考其公法書, 有曰: ‘國主非必有帝號, 方與稱帝之國平行。’ 臣等以爲此說非曰不可。 而在我邦則不然, 何也, 甲午更張之後, 有獨立之名而無自主之實, 國是靡定, 民疑莫銷, 爲今之計, 亶宜正威儀尊瞻視, 使民心有所趨向也。 又其公法疏註曰: ‘俄君改稱皇帝, 各國不悅, 越二十餘年, 方認之。’臣等以爲觀於此則我行我事我用我禮, 均可自由行之。 若乃公認之遲速, 不必先事料度。 且論者曰: ‘王者、君者, 有一國之稱, 而皇帝者, 統轄衆邦之稱。 不有拓土廣民統合各邦, 則不當稱之’云。 然我邦統合三韓, 陸地疆土, 延互四千里, 人口不下二千萬, 在今日爲陛下臣民者, 孰不望我陛下處至尊之位而膺至尊之號哉, 援古證今, 酌情度勢, 寔所不容不行之者也。 伏願陛下俯循輿情, 誕受鴻號, 聲照萬國, 與天下更始。 則宗社幸甚, 臣民幸甚。” 排曰: “今此艱虞之會, 所可勉朕者, 固何限, 而乃以萬萬不當之稱爲言者, 實非所佇於卿等也。 究所以矯時之策, 勿復以此爲煩。”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대한광무(光武)1년) 10월 1일(양력) 3번째기사
심순택등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정청하여 황제로 칭할 것을 아뢰다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살펴보니,‘자주권을 행사하는 각 나라는 자기 뜻대로 스스로 존호를 세우고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추대하게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로 하여금 승인하게 할 권리는 없다’고 하였으며, 또 그 아래의 글에는‘어떤 나라에서 왕을 일컫거나 황제를 일컬을 때에는 자기 나라에서 먼저 승인하고 다른 나라는 뒤에 승인한다’하였습니다.
대체로 존호를 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자립(自立)’이라고 하였으며 승인하는 것은 남이 하기 때문에 승인하도록 할 권리는 없다고 한 것입니다.
남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 존호를 세울 권리마저 폐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왕을 일컫거나 황제를 일컫는 나라는 다른 나라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존호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에서 먼저 승인하고 다른 나라는 뒤에 승인하는 사례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른바 먼저 승인한다고 하는 것은 칭호를 정하기 전이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나라보다 먼저 승인한다는 뜻이니, 어찌 스스로 존호를 정하지도 않고서 먼저 다른 나라의 승인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폐하의 높고 큰 덕은 하늘과 같이 크고 모든 것을 통달하는 도는 하늘과 같이 빈틈없이 살핍니다.
크기 때문에‘황(皇)’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살피기 때문에‘제(帝)’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폐하는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요(堯)임금, 순(舜)임금과 같은 성인으로서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의 계통을 이었으니, 오늘날 대황제(大皇帝)의 위호를 올리는 것은 옛 전례에도 맞고 지금의 제도에도 맞는 것으로서, 그 시기를 살펴보아도 옳고, 예(禮)에 의거해 보아도 역시 당연한 것입니다.
천명에 응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따르는 의리로 보나 하늘이 도와주어 새롭게 하는 천명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나라를 온 나라의 한결같은 의견을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하는 조화의 자취를 감추고 마치 만물을 길러내는 뜻이 없는 듯이 하면서 성인이면서도 성인으로 자처하지 않으니 그에 대해서 사람들은 물론 우러러 흠모하기는 하지만, 옛날 훌륭한 정사를 하고 겸손한 도리를 지킨 제왕들 가운데도 존호를 마다하고 받지 않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목욕재계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한 목소리로 우러러 청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윤허를 내려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연석(筵席)에서 이미 짐의 뜻을 다 말하였는데, 또 이렇게 서로 이끌고 와서 호소하니, 실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반드시 애써 따를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줄곧 번거롭게 청하니,
그것이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다”하였다.
議政府議政沈舜澤、特進官趙秉世等, 率百官庭請奏: “伏以《記》曰: ‘德侔天地者, 稱皇帝。’ 蓋三皇五帝之功德, 與合皇天, 故尊以稱之也。 德尊無上而位號與尊, 功大莫尙而禮敬爲大, 以至大莫敬之禮, 闡無上極尊之號, 寔聖帝明王之所同由也, 天理人心之所不咈也。 所以臣等於前席積誠罄陳, 聖心不槪, 靳旨乃降, 誠不勝徊徨齎鬱之至。 猗! 我邦開國五百年, 聖神相繼, 重熙累洽, 禮樂典章衣冠制度, 損益乎漢、唐宋帝, 一以明代爲準, 則郁文醇禮之直接一統, 惟我邦是耳。 我聖上聰睿勇智, 卓冠百王, 天姿合於兩儀, 玄德通于神明, 述三皇之道, 傳五帝之心, 臨御三紀, 功化則郅隆之所由尙也, 治法則典謨之所紀載也。 曩値艱會, 多難以固邦國, 殷憂以啓聖明。 乾斷廓奮, 百度惟貞, 宗社賴安, 轉綴旒而措磐泰。 方隅砥平, 銷氛祲而凝絪縕, 重恢弘業, 治化興隆, 建獨立之基, 行自主之權, 是天眷宥密景命迓續之會也。 按萬國公法, 有云‘各國自主者, 可隨意自立尊號, 令己民推戴, 但無權令他國認之也。’ 下文有‘某國稱王稱皇之時, 某國先認之, 他國後認之’之語。 夫尊號在我, 故曰自立, 認之在人, 故曰無權。 未聞以無權於人之故而廢我自立之權也。 是以稱王稱皇之國, 不待他國之承認而自立尊號, 所以有‘某國先認之, 他國後認之’之例。 其所謂先認者, 不在乎立號之先, 而先於他國之謂。 則安有不自立尊號而先求他國之認者哉, 今陛下巍蕩之德, 與天同大, 通達之道, 與天同諦。 以大而言皇也, 以諦而言帝也。 以羲、農、堯、舜之聖, 接漢、唐、宋、明之統, 惟今日尊大皇帝位號, 準古合今, 考其時則可矣, 據於禮亦當然。 在應天順人之義、眷顧維新之命, 不容不仰答也。 擧國大同之議, 不可不勉循也。 乃造化之跡, 斂而若無沖牧之衷, 聖不自居, 雖固欽仰, 而古昔帝王朕蠁之治、挹遜之規, 未曾有咈而不受、讓而不居之文。 用敢齋沐相率, 齊聲仰籲。 伏願亟賜兪音, 獲擧賁章。 千萬顒祝。” 批曰: “昨筵, 已悉朕意, 又此相率庭籲, 實未可曉也。 此是必不可勉從之事, 而一直煩請, 未知其穩當矣。”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대한광무(光武)1년) 10월 2일(양력) 2번째기사
심순택 등이 정청하여 두 번, 세 번 아뢰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과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등이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하늘과 사람이 서로 부합하는 이치를 살펴보건대, 대체로 하늘은 저처럼 높고 멀리 있으나 사람에게 듣는 것은 또한 저처럼 낮고 가깝습니다.
하늘을 어떻게 명명하겠습니까마는, 오히려 사람들이‘유황상제(惟皇上帝)’라고 하거나‘호천상제(昊天上帝)’라고 말하였으니, 하늘은 그 이름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성인도 역시 명명할 수 없었지만 복희씨(伏羲氏)와 신농씨(神農氏)는‘황(皇)’이라고 하였고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은‘제(帝)’라고 하였으니, 성인도 그 이름을 사양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한결같은 논의도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폐하의 덕은 하늘처럼 큰데 스스로 성인으로 여기지 않아서 존호를 사양하지만 그 덕은 더욱 빛납니다.
신들은 이에 대해 더욱더 우러러 칭송해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경장(更張)을 한 뒤로 이른바 독립과 자주에 대해서는 이미 만국(萬國)의 공인을 받았고 모든 의식 절차는 모두 천자의 전례(典禮)를 쓰고 있으며 머나먼 외국과 교빙(交聘)할 때에도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옛 것을 답습하여 쇠퇴한 상태에 있어서 독립했다는 명분은 있으나 자주한 실상은 없고 지금까지도 황제의 대호(大號)를 널리 거행하여 만국에 공표하지 않고 있으니, 실로 천명(天命)을 대양하고 백성들의 표준이 되는 방도가 아닙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이미‘온 나라의 여론은 실로 막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신들의 청을 굽어 살펴 따르소서”하니,
비답하기를,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마음에 부끄러운 바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경들은 어찌하여 이해해 주지않는가?”하였다.
정청하여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매번 경들이 아뢴 것을 볼 때마다 더욱 스스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하였다.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다시 수응(酬應)하는 것도 지겹다.”하였다.
네 번째로 아뢰니,
“상하가 할 말이 없으니 이제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다섯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서로 버티니 어쩔 수 있겠는가?”하였다.
議政府議政沈舜澤、特進官趙秉世等, 率百官庭請奏: “伏以臣等竊稽, 天人相與之理, 蓋天如彼其高也遠也, 而其聽之於人, 亦如彼其卑也, 近也。 天何名哉, 人猶曰惟皇上帝, 曰昊天上帝, 則天不得以讓其名矣。 聖人亦無能名焉, 而羲、農曰皇, 堯、舜曰帝, 則聖不得以辭其名矣。 今此大同之論, 卽天理人情之所不容已也。 惟我陛下之德, 其大如天, 聖不自聖, 謙尊而光。 臣等非不欽誦萬萬, 而我邦自更張之後, 所謂獨立自主, 旣經萬國公認, 凡百儀文, 皆用天子典禮於梯航交聘之時矣。 然而因循萎靡, 有獨立之名而無自主之實, 迄未克誕擧大號, 聲明萬國者, 實非對揚天命、標準斯民之道也。 公法旣云有擧, 輿論實由莫遏。 伏願陛下俯循臣等之請焉。” 批曰: “非爲撝謙, 實所內愧, 卿等何不見諒,” 庭請再奏。 批曰: “每見卿等之奏, 彌切自愧也。” 三奏批曰: “酬應亦復支離也。” 四奏。 批曰: “上下之辭意已窮, 汔可止矣。” 五奏。 批曰: “如是相持, 得不如何乎,”
고종 39권, 36년(1899 기해/대한광무(光武)3년) 3월 7일(양력) 1번째기사
중화전에 나아가 선농단에 치제 때 쓸 향축을 친전하다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선농단(先農壇)에 지내는 제사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전(親傳)하였다.
七日。 詣中和殿, 親傳先農壇祭香祝。
고종 39권, 36년(1899 기해/대한광무(光武) 3년) 6월 2일(양력) 1번째기사
선농단에 별우제를 지내도록 명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어제 단비가 흡족하게 내리기도 전에 개어 버렸으니, 간절히 비가 오기를 갈망하던 터라 한층 점점 더 근심스럽고 답답하다.
선농단(先農壇)에 지낼 별우제(別雩祭)는 모레 정1품을 보내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설행(設行)하라”하였다.
二日。 詔曰: “日昨甘霈, 未洽而旋霽。 渴望之餘, 轉益憂悶, 先農壇別雩祭, 再明日遣正一品虔誠設行。”
고종 39권, 36년(1899 기해/대한광무(光武)3년) 6월 4일(양력) 1번째기사
선농단에 별우제를 지내다
선농단(先農壇)에 별우제(別雩祭)를 행하였다.
四日。 行別雩祭于先農壇。
고종 41권, 38년(1901 신축/대한광무(光武)5년) 8월 12일(양력) 1번째기사
선농단의 별우제에 대하여 명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모레 선농단(先農壇)의 별우제(別雩祭)는 대신(大臣)을 보내어 성의껏 지내게 하고 제문(祭文)은 문임(文任)에게 지어올리게 하라.”하였다.
十二日。 詔曰:“再明日先農壇別雩祭,遣大臣虔誠設行,祭文,令文任撰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