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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공(齊景公)...강 무야(無野) 1/2

작성자송훈(松薰)|작성시간13.01.01|조회수745 목록 댓글 0

제경공(齊景公),무야(無野), 제위기간 (기원전 598 - 582)

이름은 무야(無野)고, 환공(桓公)의 손자다 제나라 20대 왕


중종 32권, 13년(1518 무인/명정덕(正德)13년) 2월 26일(을미) 3번째기사

석강에서 국본을 세우는 일과 원자를 보양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석강에 나아갔다. 특진관(特進官) 김극핍(金克)이 아뢰기를,

“아침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한 글에 제환공(齊桓公)의 일이 있습니다. 환공은 비록 인(仁)을 위장한 임금이나 삼대(三代) 이후에는 그와 같은 이도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본(國本)을 일찍 정하지 못했으므로 나라를 어지럽게 하여 오랫동안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적자(嫡子)를 세우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고 나이 많은 사람이거나 어진이를 세우는 것은 권도입니다. 의당 일찍 선택하여 정할 것이요, 또 민심과 물정이 귀속하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옛날 성인(聖人)은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고 받을 즈음에 인심과 물정의 귀속하는 것을 보아서 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회하고 노래하며 송사를 하는 자가 요(堯)임금의 아들에게 가지 않고 순(舜)임금에게 갔으며, 순임금의 아들에게 가지 않고 우(禹)임금에게 갔으며, 익(益)에게 가지않고 계(啓)에게 갔으니 과연 위에서 시켜서 그렇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제환공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의를 다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지않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의에 빠져들어가되 한결같이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만약에 마음을 바르게 하며 성심을 다하여 정애(情愛)에 치우치지 않고 저사(儲嗣)를 선택해 세웠다면, 만대에 영원히 힘입었을 것이니 어찌 환관이 일어날 리가 있었겠습니까?”하고,

시독관(侍讀官) 정응(鄭應)은 아뢰기를,

“천한 것이 귀한 것을 해롭히거나 작은 것이 큰 것을 능멸하는 일이 없이 귀천의 한계를 엄격히 하여, 용모와 위의를 차릴 때에 절도있는 태도로 대하면 등급이 분명하여 자연 간범(干犯)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대개 부부간에도 삼가고 분별하지 아니하면 그 폐단은 반드시 적자를 빼앗게 되리니, 이 일이 작은 것 같으나 실은 큰 일입니다. 다시 체념하소서. 지금 극픽이 아뢴바 ‘적자를 세우는 것은 상도이고 어진이를 택하는 것은 권도이다’했는데, 이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종사(宗社)의 위망에 관계되는 것이라 어진이를 택하는 것은 부득이하여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적자가 단주(丹朱)나 상균(商均)같이 크게 무도(無道)한 자가 아니라면, 세우지 못할 자에게 함부로 대기(大器)를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같이 천지의 이기(理氣)를 받아 태어났으므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성(德性)을 처음에는 갖추지 않음이 없으니, 만약 보양하고 교회(敎誨)하는 도리가 바르다면, 어찌 그를 세우지 못하고 어진이를 택하여 세우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하고,

참찬관 문근은 아뢰기를,

“후세에 어진이를 세우게 된 것은 곧 적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적자가 있다면 마땅히 가르쳐 보도(輔導)하여 덕성을 함양하여 그 성과를 보는 것이 옳거늘, 어찌 그리 급히 적자를 버리고 어질거나 나이 많은 이를 세우기까지 하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경공(齊景公)은 세자(世子)가 없어서 여러 아들 중에서 어진 맏아들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세자가 출생하였다면 가르칠 따름이다.

어찌하여 선택을 일삼겠는가?”하매,

검토관 기준이 아뢰기를,

“위장공(衛莊公)의 일로 보면 환공(桓公)은 장공(莊公)의 적자이고 공자(公子) 주우(州吁)는 장공의 서자인데, 그가 장공의 총애를 받고 또 병장기를 좋아하자, 석작(石碏)이 간하기를 ‘자식을 사랑함에는 옳은 도리로 가르쳐 그 좋지못한 기미를 예방하여 사특한데 빠지지 않게하고, 지위가 낮은 자가 지위가 높은 자를 능가하거나 천한 자가 귀한 자를 해롭히거나 방종한 자가 정의로운 자를 무너뜨리게 할 수 없게 해야한다’하였는데, 장공이 이를 듣지아니하므로 주우가 끝내 환공을 죽였으니, 주우가 어찌 처음부터 시해(弑害)할 마음을 두었겠습니까?

장공이 총애하기만 하고 제재하지아니하여 스스로 큰 화(禍)를 빚어내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어찌 유독 주우에게만 죄가 있겠습니까? 일찍 그 등위(等威)를 밝혀서 스스로 습관이 되도록 하였어야 옳았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연관(經筵官)을 자주 체직해서는 안된다는 뜻은 전일 경연에서 여러번 말하였거니와, 이 직책은 오랫동안 맡긴 뒤에야 학문이 정숙해지고 교도(敎導)에 효과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극픽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원자(元子)는 기도(氣度)를 잘 타고났다하니 실로 우리나라의 복입니다. 보양대신(輔養大臣) 네사람을 택정(擇定)하였는데, 혹 병이 있거나 유고(有故)하여 가르침에 열중하지 못합니다.

지금 아직 나이가 어리니 날마다 억지로 가르칠 수는 없으나 또한 가르치다 말다 할 수도 없습니다. 또 꼭 글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말하는 사이에도 족히 취할 것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나이 젊고 단정한 조사(朝士)를 택하여, 혹 대신이 나오지 못할 때에 나아가서 가르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자가 과연 글을 아니 보양의 일에 대해 그 방법을 다하라.

만일 시강원(侍講院)을 설치한다면 당상 요좌(堂上僚佐)가 갖추어지리니, 이제 꼭 연소한 사람만 참여시킬 필요는 없고 대신으로 하여금 항상 가서 가르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대신의 병이 어찌 오래가랴”하매,

기준은 아뢰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려는 것은, 급박하게 하지않고 여유를 두어 점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3∼4품의 위계나 혹 당상(堂上)에 오른 사람으로 학식이 있어 모범이 될 만한 자로 하여금 드나들며 가르치게 하면, 대신의 존엄함과는 같지않으나 족히 원자의 총명을 열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정응(鄭應)은 아뢰기를,

“사람이 태어날 때 그 기질이 일정하지 않으나, 성지(聖智)의 자질은 어릴 때부터 이미 이루어지는 법이니, 규구(規矩)의 보양은 일찍부터 해야합니다. 대신에게 가르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여유를 두어 급박하게 하지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송(宋)나라때 정자(程子)가 태자가르치는 법을 논하면서, 사대부의 자제중 연소하고 영리한 자를 택하여 같이 거처하며 수업하게 하라 하였으니, 대저 가르치는 도가 어찌 반드시 한 길뿐이겠습니까?”하였다.

○御夕講。 特進官金克愊曰: “朝經筵進講書, 有齊桓公之事。 桓公雖假仁之君, 然三代以下, 亦不易得。 然不能早定國本, 使其國亂久不定。 夫立嫡, 經也; 立長且賢, 權也。 當擇而早定, 又察民心、物情之所屬可也。 古之聖人, 於禪授之際, 亦以人心、物情之所歸而定之, 故朝覲、謳歌、訟獄者, 不之堯之子而之舜, 不之舜之子而之禹, 或不之益而之啓。 是果上之所使而然耶? 齊桓公不以正心誠意爲急, 故於情意比昵之私, 一向陷溺, 不之察焉。 若正心誠意而不偏於情愛, 擇立儲嗣, 則萬世永賴, 何有禍亂之作也?” 侍讀官鄭譍曰: “毋以賤妨貴, 〔以〕小加大。 貴賤之分, 所當嚴峻。 容貌威儀之際, 截然待之, 則等級分明, 而自不能干犯矣。 大抵夫婦之間, 不能謹別, 則其漸必至於奪嫡。 此事似微而實大, 更當體念。 今克愊所啓, 立嫡常道, 擇賢權道, 此言是也。 然必關於宗社之危亡, 則猶可不得已而爲之, 若不至如丹朱、商均之大無道, 則不可輕以大器, 授於不當立者也。 夫人同受天地之理氣以生, 仁義禮智之德, 初無不備。 若輔養敎誨之得其道, 則豈至於不可立, 而必擇賢者以立之哉?” 參贊官文瑾曰: “後世有立賢者, 此乃無嫡子故也。 若有嫡子, 則當敎養輔導, 涵養德性而有所成效可也。 何可遽至於棄嫡子而立賢長乎?” 上曰: “齊景公無世子, 擇諸子中賢且長者爾。 若世子旣生, 則敎誨而已, 何事於擇也?” 檢討官奇遵曰: “以衛莊公之事見之, 桓公, 莊公之嫡子也, 公子州吁, 莊公之庶子也, 寵愛而好兵。 石碏諫曰: ‘愛子敎以義方, 防微杜漸, 不納於邪, 不可以小加大、賤防貴、淫破義也。’ 莊公不聽, 州吁竟弑桓公。 夫州吁初豈有弑逆之心哉? 莊公寵愛無制, 自釀大禍, 以至於此也。 豈獨州吁之罪也? 須自蚤歲, 明其等威, 使自成習, 可也。” 上曰: “經筵官不得數遞之意, 頃於經筵屢言之, 此職不得已久任, 然後學問精(孰)〔熟〕, 而敎導有效也。” 克愊曰: “臣竊聞之, 元子氣度天成, 俗方之福也。 輔養大臣, 擇定四人, 或有病或有故, 不能勤於敎誨。 當此幼沖之時, 不可逐日拘迫而敎之, 亦不可或作或輟也。 又不必敎之以書也, 周旋進退語默動靜之間, 有足取則。 臣之意, 又擇端方年少朝士, 或於大臣未進之日, 往誨當矣。” 上曰: “元子果能解文, 輔養之事, 當盡其方。 若設侍講院, 則堂上僚佐, 固當備具, 今不必以年少之人參之, 令大臣常常往誨當矣。 大臣之病, 亦豈久哉?” 遵曰: “其所以欲令大臣敎之者, 必能優游漸漬, 不急迫也。 位至三四品, 或陞堂上, 有學識可爲法則者, 使之進退敎誨, 則非如大臣之嚴, 足以發其聰慧也。” 譍曰: “人生天地, 氣質非一, 聖智之資, 自孩提之時已成。 規矩養之, 其可不蚤乎? 以大臣敎之者, 必能優游不迫也。 然宋之時, 程子論敎太子之法, 擇士大夫子弟年少穎悟者, 使與同處受業。 大抵敎之之道, 豈必一途哉?”

중종 42권, 16년(1521 신사/명정덕(正德)16년) 7월 6일(을묘) 5번째기사

사헌부대사헌 홍숙등이 치도에 절실한 다섯가지의 일을 들어 봉사를 올리다

사헌부 대사헌 홍숙(洪淑)등이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한 마음의 발로는 꼭 붙들어 잡기가 쉽지않기때문에 닥쳐오는 모든 일 또한 헤아려 절제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드시 안으로는 성실(誠實)을 주로 삼고 당연한 이치로써 헤아린 다음에야 호령과 조처가 모두 올바르게 되는 것이고, 한가지 생각이나 한가지 일이라도 중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옛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가 사해(四海)를 다스리고 만기(萬機)를 시행함에 있어 큰 중도에 입각해서 행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형세를 이루었습니다. 그 요점은 선(善)을 택함이 정밀하고 덕(德)을 지킴이 확고하여 다른 생각으로 바뀌지 않은 바에 있습니다.

후세 임금은 다스림의 근원을 바루지 못하여 요란스럽고 시끄럽기만 하고 일에 응하여서도 어그러지고 온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정령(政令)이 날로 비루한 데로 치닫고 치효(治效)가 옛날에 미치지 못하니 참으로 탄식할 일입니다.

신등은 모두 불초한 몸으로 간직(諫職)을 맡고 있습니다만, 전하께서 바야흐로 마음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도모하시는데도 조그마한 보좌도 못했습니다. 때문에 치도(治道)에 절실한 다섯가지 일을 들어 삼가 올립니다.

첫째는 내치(內治)를 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저 왕자(王者)의 도는 반드시 먼저 가정을 바루어야 하는 것으로 가정이 바루어져야 천하가 다스려집니다. 가정의 일이 천하에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천하의 다스림은 반드시 가정을 바룸에서 비롯됩니다.

대개 인자함이 지나치면 엄함이 없어지고 정(情)이 많으면 의(義)로움이 가려집니다. 이 때문에 예법(禮法)이 무너지면 거만한 마음이 생기고 거만한 마음이 생기면 명분(名分)이 문란해지고 명분이 문란해지면 가정의 법도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 소위가 이와 같으면 필부(匹夫)의 가정도 오히려 보전(保全)할 수 없는데, 더구나 임금의 한몸은 천하의 의표(儀表)가 되는 것이니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래서 옛날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몸을 닦고 가정을 바루는 것을 앞세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몸을 닦는 것이 가정을 바루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삼가 살피옵건대, 전하께서는 자전(慈殿)을 효성으로 받드시고 궁위(宮闈)를 엄하게 다스리셔야 존비(尊皂)의 차서가 서게되어 상하가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안으로는 유란(帷㡩)을 정제하고 밖으로는 청알(請謁)을 끊으시어, 외척(外戚)을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혼시(閽寺)는 명령만을 전하게 해야 내화(內化)의 아름다움이 옛 성왕(聖王)에 뒤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친애하는 사이에는 인자한 마음과 치우친 생각이 더욱 싹트기 쉬운 것이므로 상성(上聖)의 자품이 아니고서는 참으로 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 몸을 닦고 가정을 바루었다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게으른 마음이 생기면 안됩니다. 게으른 마음이 싹트면 가정일에 있어서 내 생각대로 하게되어 못할 짓이 없게 됩니다.

옛날 한고조(漢高祖)는 호걸스러운 임금이었습니다.

그의 활달한 기상은 사사로운 생각에 빼앗기지 않을 듯하였으나 그 내치(內治)는 옛날 임금에 비해 부끄러움이 있으니 어찌 자신을 바루는 공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후대 임금이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바입니다.

아, 한개의 횃불이 커다란 들판을 태우고 한잔의 물이 큰둑을 무너뜨리게 합니다. 무릇 화(禍)는 미미한 데서부터 뚜렷해지고 세세한 데서부터 커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 더구나 궁중의 일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미미할 때 더욱 삼가야 합니다. 대아(大雅)에서 문왕(文王)을 찬미한 시에 ‘온화하게 궁(宮)에 계시며, 나타나지않아도 임한 듯하네’하였고,

또‘아내에게 모범을 보여 형제에게 이르게 하여 가방(家邦)을 다스리셨네’하였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문왕(文王)을 본받으시어 혼자계실 때 삼가는 공부를 더욱 힘써야 하며, 형체가 없는 데에서 복(福)을 구하고,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환란을 막으시되 시종(始終) 한결같이 하시어 지치(至治)를 도모하소서.

둘째는 세자(世子)를 보양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저이(儲貳)10623)를 일찍 세우는 것은 위로는 종묘(宗廟),사직(社稷)을 높이고 아래로는 천하의 사람들의 마음이 매일 데가 있게 하는 것이니, 이는 옛사람이 이른바 형세가 밝으면 백성이 안정되어 정사가 일도(一道)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삼왕(三王)이 세자를 가르칠 때는 태부(太傅)가 앞에 있고 소부(少傅)가 뒤에 있으며, 들어가면 보(保)가 있고 나와서는 사(師)가 있어, 악(樂)으로써 마음을 기르고 예(禮)로 외모를 배양하여 어려서부터 익히고 커서 실행하기까지 덕의(德義)가 아님이 없게 하였으니, 세자를 보양(輔養)하는 도가 이처럼 지극하였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세자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학문을 일찍 이루었으므로, 나이는 어리지만 명위(名位)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우리나라의 태산반석과 같은 기틀이 실로 이에서 나타났습니다.

전하께서는 사부(師傅)를 가려 두시어 강독(講讀)하고 탁마하게 하시면 가르치고 인도하는 공이 극히 세자의 인(仁)을 기르고 덕(德)을 더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보양하는 방법은 옛날과 달라서 세자가 하루동안 강독하는 곳에 있는 시간은 적고 깊숙한 궁위(宮闈)에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기질(氣質)을 변화시키기가 쉽지 않겠고 덕기(德器)를 성취시키기 또한 쉽지 않으니, 이것이 신등이 매우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어려서 이루면 이는 천성(天性)과 같은 것이고 습관은 바로 자연과 같은 것이다’하였으니, 반드시 사부로 하여금 힘써 정도로 지도하게 하고 또 시강(侍講)하는 요속(僚屬)도 신중히 가려뽑아야 합니다. 환시(宦寺)까지도 반드시 근신하는 자를 임명하고 여시(女侍)도 반드시 단정한 자를 뽑음으로써 비록 깊은 궁중 그윽한 곳에 있더라도 마치 사부 대하는 것처럼 하게 하소서.

그리고 소인(小人)들은 눈에 띄지 말게 하고 아첨하는 말은 듣지않게 하시며, 비록 왕자군(王子君)은 지친(至親)이지만 마땅히 예(禮)로써 대하고 방자하지 못하게 하소서.

이리하여 몽양(蒙養)10624)의 시초에 거룩한 공을 이루게 되면 이는 실로 종묘사직이 만세토록 끝없이 이어가는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국본(國本)10625)의 중함을 생각하시어 보양(輔養)의 공을 다하심으로써 종묘를 받들고 백성의 바람에 부응하소서.

세째는 취사(取捨)를 자세히 살피시는 일입니다.

무릇 임금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여러 사람의 지혜를 자신의 지혜로 삼아야, 비록 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자신의 뜻을 다하게 하고 한가지 일이라도 반드시 그 이치를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비(是非)가 몰려들고 가부(可否)가 뒤섞이더라도 자신의 권도(權度)를 미루어 그 중(中)을 택하여 써야 합니다.

진실로 여기에서 살피는 것이 밝지 못하게 되면 갈피를 잡지못한 채 망연히 이해의 귀결을 모르게 됩니다.

이는 옛 사람이 이른바 ‘취사의 표준이 마음에 정해지면 안위(安危)의 싹이 밖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조정의 재상과 국사를 논의하면서 가부를 결정할 때에 간혹 머뭇거리면서 독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금번 대행 황제(大行皇帝)가 유녀(幼女)와 환시(宦寺)를 뽑아들이라는 명이 있자 주문(奏聞)에 대한 의논이 일었습니다.

그때 대간(臺諫),시종(侍從)은 가하다고 하였고 대신은 불가하다하였는데, 전하께서 처음에는 대간, 시종의 말이 옳다하였고, 뒤에는 대신의 의논이 옳다하다가 그 의논이 드디어는 잠잠해지고 말았습니다.

전하의 취사가 전도됨이 어쩌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태종대왕(太宗大王)때에 태감(太監) 황엄(黃儼)이 황제의 명으로 제주(濟州)에서 동불(銅佛)을 가져다 태종에게 절을 하도록 했었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불가하다하였는데, 대신 하윤(河崙)등은 ‘황제가 부처를 좋아하니 임시방편으로 절해야 합니다’하니, 태종은‘나의 신하들은 한사람도 의(義)를 지키는 자가 없구나!’하고는 끝내 절하지 않았습니다.

아, 태종의 이 말씀은 당시 신하들을 놀라게 하였을 뿐아니라 전하의 가법(家法)으로 삼기에도 족합니다.

금번에는 태종의 영단을 좇지 못하셨고, 대신 또한 하윤의 잘못을 되풀이하여 대인(大人)의 은혜를 바란다는 것으로 말함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환시(宦寺)에게 욕을 당하게 하였으니, 조정의 수치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 경우 취사의 실수가 이번 경우와 같게 된다면 국사가 장차 구제할 수 없는데까지 이를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으로 시비를 살피시고 밖으로 취사를 정하시면 그때그때의 조처가 마땅함을 얻게 될 것이고 국시(國是)를 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네째는 간쟁(諫諍)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옛날에는 선(善)을 진달하는 정(旌)이 있었고 간(諫)을 받아들이는 기(器) 10626)가 있어서 관직이 비로소 중해지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길이 넓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간언을 듣는 자는 반드시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간언을 좇았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였으므로 사람이 모두 자기 생각을 진언하기 좋아하였습니다.

우왕(禹王)이 선한 말을 들으면 절했고 탕왕(湯王)이 간언을 좇아 어기지 않은 것은 후세에서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당태종(唐太宗) 또한 간함을 받아들이는 데에 과감하여 안색을 부드럽게 해서 극언(極言)을 하도록 하였으므로 정관(貞觀)의 다스림10627)을 이루었으니, 그 또한 현명한 임금이었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말을 받아들이고 간함을 좇음에 있어 일찍이 옛 성왕(聖王)이 하신 것을 본받으셨으나 좇겨나 반대함을 헤아림에 있어 왕왕 겉으로 꾸며 임하심을 면하지 못하는데, 게다가 지난번의 폐단을 징계하십니다. 요즘의 언자(言者)들 가운데도 과격한 이가 있어 간혹 직언(直言)과 정론(正論)이 있는데도 혹 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직언과 정론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大臣)과 그 시비(是非)를 상의하여‘대신의 의논은 이러하다’하고, 대신의 의논이 혹 적당하지 못하면 대간(臺諫)의 말도 참용(參用)하여 결정하소서.

대간 또한 어찌 지난번의 폐단을 모르고서 감히 교격(矯激)하겠습니까?

대저 사람에게 언관의 직책을 주고도 말을 채택하지 않고 계획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비단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민생(民生)의 이병(利病)이나 국가의 치란(治亂)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멀리 우(禹),탕(湯)을 본받으시고 또 당태종이 언로(言路)를 널리 열었던 것을 본받으시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심으로써 선비의 기개를 북돋우소서.

다섯째는 재변(災變)을 그치게 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과 하늘 사이는 현격한 것 같지만 그 이치는 한 가지입니다.

때문에 선(善)과 악(惡)의 극(極)은 서로 유통합니다.

나의 한가지 생각이 선하면 하늘이 상서를 내리고, 나의 한가지 생각이 악하면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인데, 항차 일[事]에 나타나는 것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옛날 제경공(齊景公)때에 혜성(彗星)의 변이 있자 그의 신하 안영(晏嬰)이 아뢰기를‘공께서 못을 팔 땐 깊이 파지 못할까 걱정하고 누대를 지을 땐 높이 짓지 못할까 걱정하므로 하늘이 이를 경계하는 것입니다’하니, 경공이 두려워하여 덕(德)을 닦았는데, 16일이 지나자 혜성이 없어졌습니다.

경공은 제 나라의 보통 임금이었는데도 한 생각이 선하자 하늘이 뜻을 돌렸으니, 하늘과 사람사이는 무간하다는 것을 이로써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일국에 군림하신지 16년인데 천재, 지변과 인요(人妖), 물괴(物怪)가 서책에 기록된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금년에는 기내(畿內)가 농사철에 가물어 백성들이 근심하였고 또 여름철에는 장마가 그치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마도 전하께서 하늘 공경하기를 지극하게 하지 못한 소치가 아닌가 합니다.

아, 오늘의 일은 제 경공의 잘못처럼 그렇게 심한 게 아니건만 재변의 발생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신등은 알 수 없습니다만 서관(庶官)이 어찌 모두 적격자를 얻었겠으며, 형상(刑賞)이 어찌 모두 공평하겠으며, 민생이 어찌 모두 생업에 편안하겠으며, 풍속이 어찌 모두 돈후(塾厚)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고서 재변이 그치기를 바란다면 이는 되지않는 것입니다.

무릇 재상(災祥)이란 각각 유에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임금은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리면 모든 정사에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무르익은 화기(和氣)가 천지에 충만하게 되면 비오고 개고 덥고 추운 것이 각각 그 순서를 따르게 됩니다.

또한 음과양(陰陽) 두 기(氣)가 어긋남이 없어서 혹 재이(災異)의 변이 일어난다하더라도 이것이 변하여 상서가 되기도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위엄을 공경하고 하늘의 재이를 두려워하시어 하늘 받드시기를 실답게 하시고 더욱 조심하고 두렵게 여기소서. 아,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흔들려 흐려지면 태산도 보이지 않고 맑혀 깨끗해지면 머리카락 하나도 비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공정한 다음에야 천하의 사사로움을 알 수 있고, 바른 다음에야 천하의 사악함을 알 수 있고, 고요한 다음에야 천하의 동향을 알 수 있고, 통한 다음에야 천하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養心)의 근본은 또한 학문의 용공(用功)에 있습니다.

송(宋)나라 신하 범조우(范祖禹)는 아뢰기를‘임금이 덕을 성취시키는 곳은 경연(經筵)입니다’하였습니다.

무릇 임금이 경연에 나아가시면 진신(縉神)이 둘러서서 바른말을 다투어 아뢰므로, 허물을 들으면 고치고 의(義)를 들으면 실행하여 날마다 새롭게 되어 비익(裨益)되는 바가 큰 것이니, 어찌 신하를 접하여 문구나 풀이하는 데 그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한추위와 한더위에라도 경연을 폐하지 마소서. 또 강독(講讀)에 구애되지 말고 문답(問答)에 빠지지 마시어 정신을 맑게 하시고 생각을 집중하여 자신을 반성하고 고요히 관찰함으로써 이욕(利慾)의 나뉨을 살피시고 안위(安危)의 기틀을 밝히신다면, 신등이 아뢴 다섯가지 일이 어디서나 합당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註10623]저이(儲貳):세자.註10624]몽양(蒙養):어릴때의 교육註10625]국본(國本):세자.註10626]선(善)을 진달하는 정(旌)이 있었고 간(諫)을 받아들이는 기(器):선언(善言)과 간언(諫言)을 진달하는 것을 말한다. 요(堯)임금 때 네거리에 깃발을 세워 놓고 선언을 진달할 자가 있으면 그 밑에 가서 서있게 했는데, 이것이 진선정(進善旌)이다. 또 대문(大門)에다 북을 달아 놓고 간할 것이 있는 사람은 북을 치게 했는데, 이것이 감간고(敢諫鼓)이다. 註10627]정관(貞觀)의 다스림:정관은 당태종(唐太宗)의 연호. 당태종이 방현령(房亦齡)등의 명신을 등용하여 율령(律令)의 찬정(撰定),군정(軍政)의 정비, 학예(學藝)의 장려등에 힘써 선정을 베풀고 국세를 내외에 떨쳤다. 이것이 당나라의 전성시대였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제경공: 이름은 무야(無野)고, 환공(桓公)의 손자다 제나라 20대 왕

○司憲府大司憲洪淑等上封事, 其辭曰:

一心之發, 未易執持, 故萬事之來, 亦難裁度, 必須內主於誠實, 而揆之以當然之理, 然後號令、措置, 皆適其可, 而無一念、一事不得其中矣。 是以, 古之堯、舜、禹、湯、文、武之君, 撫御四海, 酬酢萬機, 而行大中之道; 成久安之勢。 其要, 在夫擇善精、執德固, 而不爲他念之所移矣。 後世人主, 不能正出治之原, 而膠膠、擾擾, 應事乖舛, 政令日趨於卑, 治效不及於古, 誠可歎哉。 臣等俱以無似, 以諫爲職。 殿下方銳意圖治, 而顧無絲毫之補, 故謹掇其切於治道者五事, 而獻焉。 一曰, 嚴內治: 大率王者之道, 必先正其家, 家正而天下治矣。 家之事似不關天下, 而天下之治, 必由夫家正。 蓋慈過則無嚴; 情勝則掩義, 故禮法缺, 而瀆漫生; 瀆漫生而名分紊; 名分紊, 而家道喪。 其所爲如是, 而匹夫之家, 尙不能保, 況人主一身, 爲天下儀表者乎, 故古之聖王治天下國家, 莫不以修身、正家爲先, 修身乃正家之本也。 伏見, 殿下奉慈殿以孝; 御宮闈以嚴, 尊卑有序, 上下截然。 帷幔整於內, 請謁絶於外, 外家無得與政, 閽寺只傳命令, 其內化之美, 無讓於古聖王矣。 然在一家親愛之間, 而慈心、僻意, 尤所易發, 自非上聖之性, 固所難免, 不可以吾身旣修、吾家旣正, 而少有怠忽之心。 怠忽之心萌, 則其於家事, 惟我所爲, 無所不至。 昔漢之高帝, 豪傑之主也。 其豁達氣像, 似不爲私念所奪, 而其內治, 視古有愧, 豈非無正己之功, 而然也, 此, 後代人主所當戒也。 嗚呼! 一炬燎原, 勺水陷大。 凡爲禍, 無不自微而著、自細而大。 況宮壼之事, 尤當謹之於微也。 《大雅》美文王之詩曰: “雝雝在宮, 不顯亦臨。” 又曰: “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 伏願殿下, 以文王爲法, 益勵謹獨之功, 養福於無形; 防患於未兆, 終始惟一, 以圖至治。 二曰, 養世子: 自古人君, 早建儲貳者, 上以尊宗廟、社稷, 下以係天下群情, 此, 古人所謂, 勢明則民定, 而出於一道者也。 是故, 三王之敎世子也, 太傅在前; 少傅在後, 入則有保; 出則有師, 樂以養其內; 禮以養其外, 幼習、長行, 無非德義, 其輔養之道, 若是其至也。 伏見, 世子挺自天姿, 學問夙成, 年在幼沖, 名位已定, 我國家泰山盤石之基, 實兆于是。 殿下選置師傅, 講讀劘切, 其涵養熏染之功, 足以長仁、益德矣。 然今輔養之方, 與古有異。 世子一日之中, 在講讀之地, 少, 處宮闈之邃, 多, 氣質恐未易變化; 德器恐未易成就。 此, 臣等所深懼也。 古人云: “少成若天性; 貫慣如自然。” 必使師傅, 勉率以正, 而侍講僚屬, 亦當愼選。 至於宦寺, 必任謹愼; 女侍, 必取端方, 雖在深宮幽奧之中, 如對師傅。 桑雍之類, 不接於目; 讒侫之言, 不入於耳, 而雖諸君、至親, 當以禮相接, 無使狎慢。 蒙養之初, 便作聖功, 則實宗社萬世無彊之休也。 伏願殿下, 念國本之重, 盡輔養之功, 以奉宗祧、以副民望。 三曰, 審取舍: 夫人主, 以衆心爲心; 以衆知爲知, 雖一夫必盡其情; 一事必窮其理。 故是非輻湊, 可否混淆, 而推吾之權度, 執其中而用之耳。 苟於此, 審之不明, 則如東西迷路, 茫然不知利害之歸矣。 此, 古人所謂: ‘取舍之極, 定於內, 而安危之萌, 應於外,’ 者。 伏見, 殿下與朝廷宰執, 謀議國事, 商確可否, 而間或依違未能獨斷者, 多矣。 今者, 大行皇帝有採女、宦之命, 而奏聞之議, 起。 臺諫、侍從曰: “可。” 大臣曰: “不可。” 殿下初以臺諫、侍從之言爲是, 而後以大臣之論爲然, 其議遂寢, 是何殿下取舍, 顚倒至此也, 我太宗大王之朝, 太監黃儼以帝命, 迎銅佛于濟州, 使太宗拜之, 太宗曰: “不可。” 大臣河崙等曰: “皇帝好佛, 可從權拜之。” 太宗曰: “予之群臣, 無一人守義者。” 竟不拜。 噫! 太宗此言, 非徒起當時群臣之驚懼, 而亦足爲殿下之家法。 今者, 不遵太宗之英斷, 大臣又蹈河崙之失, 至以 “望大人恩惠” 爲辭, 使殿下見辱於宦寺, 朝廷之恥, 庸可雪乎, 此則已矣, 脫有大於此, 而取舍之失, 亦類於是, 則國事將至於不可救矣。 伏願殿下, 察是非於內, 定取舍於外, 時措得宜, 以定國是。 四曰, 納諫諍: 古者, 進善有旌, 受諫有器, 官職始重, 而納言之路廣矣。 是以, 聽言者必舍己從之, 虛懷受之, 而人皆樂進其所有也。 禹之拜昌言; 湯之從諫弗咈, 皆後世莫及, 而唐之太宗亦勇於納諫, 假以顔色, 要須極言, 以成貞觀之治, 其亦賢矣哉! 伏見, 殿下聽言從諫, 嘗慕古聖王之爲, 而其於從違、覆逆, 往往未免有飾外, 而臨之, 又懲頃者之弊。 恐今之言者, 猶有過激, 間有直言、正論, 而或不見察。 必與大臣商其是非, 而曰: “大臣之議如是。” 大臣之議, 或有不得其宜, 則臺諫之言, 亦當參用, 以相濟焉。 臺諫亦豈不知頃者之弊, 而敢爲矯激者乎, 夫授人以言, 而言不採、計不從, 則非徒不能匡君之非, 民生利病; 國家治亂, 俱不暇顧矣。 伏願殿下, 遠法禹, 湯, 又慕唐宗, 洞開言路, 以達四聰, 以壯士氣。 五曰, 弭災變: 蓋天、人之間, 雖似懸絶, 而其理則一, 故美、惡之極, 相爲流通。 吾之一念善則天爲之降祥; 吾之一念惡則天爲之降罰, 況發於事爲者乎, 昔齊景公時, 有彗星之變, 其臣晏嬰曰: “公, 穿池沼恐不深; 起樓臺恐不高, 是, 天爲公戒耳。” 景公懼而修德, 後十六日而星沒。 景公, 齊之中主, 而一念之善, 尙回天意, 益可知天、人之無間也。 伏見, 殿下君臨一國, 十有六年, 天災地變、人妖物怪, 書諸史策不一, 而今年畿甸之內, 農月旱乾, 民生嗷嗷, 又於夏季, 霖霾不止, 是豈殿下敬天之誠, 有所未至也。 噫! 當今之事, 不甚如齊國之失, 而災變之來, 至於此極, 豈無所自, 臣等不知, 庶官豈盡得人, 刑賞豈盡得中, 民生豈盡安業, 風俗豈盡敦厚, 若此而求災變之弭, 不可得也。 夫災祥, 各以類應。 人主, 體天理物, 庶政無有虧闕, 而和氣融液, 充塞兩間, 則雨暘燠寒, 各順其序。 陰陽二氣, 無有違拒, 雖或有災異之作, 亦變而爲之祥矣。 伏願殿下, 敬天之威、懼天之災, 應天以實, 益加兢惕。 嗚呼! 心猶水。 然撓而濁之, 則太山不見, 澄而淸之, 則毛髮可燭。 故此心至公, 然後可以見天下之私; 至正, 然後可以見天下之邪, 至靜, 而天下之動可知; 至通, 而天下之變可知。 然其養心之本, 則亦在夫學問之用其功耳。 宋臣范祖禹曰: “君德成就, 在經筵。” 夫人主之御經筵也, 縉紳環列, 讜言爭奏, 聞過而改、聞義而遷, 日新又新, 裨益弘多, 豈但接群臣, 解句讀而已哉, 伏望殿下, 雖隆寒盛暑, 勿廢經筵。 不拘於講讀、不泥於問答, 必澄神凝慮, 反己靜觀, 察利欲之分; 炳安危之機, 以之而爲臣等所陳五事, 無所處而不當矣。 伏惟殿下, 潛心焉。

중종 57권, 21년(1526 병술/명가정(嘉靖)5년) 10월 22일(임신) 4번째기사

간언, 부세, 옥사, 인사등에 관한 홍문관의 상소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김유(金)등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길,

“전하께서 긴박한 하늘의 견책을 받아 피전감선(避殿減膳)하고 계시면서 잘못된 점을 반성하여 통렬히 자책하고 계시니, 하늘을 공경하는 뜻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허공 위의 하늘을 공경하는 것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하늘을 공경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자신의 거동(擧動)과 자신의 정사(政事)가 모두 하늘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찮은 말 한마디와 하찮은 행동 하나, 한번 어진 사람을 올려주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쫓아내는 것, 한번 상주어 영화롭게 하고 벌주어 욕되게 하는데 있어 진실로 자신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하늘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20여년간 상서로운 일은 들리지않고 나쁜 징조만 속출하고 있어, 10월에 눈이 내리면서 천둥치는가하면 땅은 정고(靜固)해야 되는데 진동했으며, 또 원근(遠近)에서 올리는 상소도 거의 전부가 재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신등이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언행과 거동과 정사에 있어 자신의 마음에 부끄러운 점이 있지 않으십니까?

요(堯)임금과 주문왕(周文王)은 지치(至治)를 이룬 임금으로서 화기(和氣)가 온 천하에 가득차고 백성들이 태평을 구가했습니다.

그랬지만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춥고 배고픔에 시달리면‘내가 춥고 배고프게 한 것이다’하면서 백성을 다친 사람 보살피듯 했습니다.

대저 백성은 나라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병들면 온갖 기운이 화평하지 못해서 원기(元氣)가 시들게 됩니다. 지금 가뭄과 흉년에 시달린 나머지 전염병마저 치열하므로 곳곳에 겨우 생존해 있는 사람도 부황이 들어 얼굴이 누렇고, 도랑에는 주려죽은 시체가 잇달았습니다. 게다가 간교하고 탐욕스런 관리들이 멋대로 부세를 가혹하게 거둬들이고 있으므로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전하께서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보살펴야 할 때요, 민력(民力)을 동원하고 재물을 고갈시킬 때가 아닙니다. 진실로 관대한 조서(詔書)를 내리시어 곤궁에 시달리는 목숨을 구휼하시고, 급하지 않은 일을 정지시켜 지치고 주린 민력을 쉬게 하시고, 깊은 인자함과 두터운 덕으로 따뜻이 감싸주심으로써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떠돌지 않게 해야 합니다.

중니(仲尼)13758)가‘천자(天子)에게 간쟁하는 신하가 있으면 비록 무도(無道)하더라도 천하를 잃지않고, 제후(諸侯)에게 간쟁하는 신하가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나라를 잃지않는다’했습니다.

대개 신하가 나아가 간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임금의 잘못을 바루고 임금의 실책을 바루려는 것입니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허물이 없었어도 진선정(進善旌)과 비방목(誹謗木)을 세웠으니13759), 이 어찌 깊숙이 숨어 있는 병통을 우려해서 천하에 약(藥)을 구한 조처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정성이 점차 처음만 못하십니다.

밖으로는 겸허한 마음가짐을 보이시지만 안으로는 실상 듣기를 싫어하시므로, 한 사람을 탄핵하고 한 가지 일을 논해도 이것이 10일 내지 한달이 걸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등은 고리를 굴리듯 간언을 받아들인 한고조(漢高祖)에 견주어 부끄러움이 있고, 간하지않아도 선(善)한 일을 한 주문왕(周文王)에게 견주어도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군자(君子)가 ‘간언을 따르는 것이 간언을 기뻐하는 것만 못하고 간언을 기뻐하는 것이 간언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했습니다.

간언을 기뻐하고 즐긴 다음이라야 사람들이 즐겨 고(告)하는 것이고 임금도 절로 허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여형(呂刑)에 ‘입만 나불거리는 사람에게 옥사(獄事)를 결단하게 해서는 안되고, 인격이 있는 장자(長者)가 옥사를 결단하게 해야 한다’했습니다.

대저 옥사는 왕법(王法)에 의당 갖추어져야 하는 것으로 인명(人命)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게되면 이보다 더한 억울함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의 제왕(帝王)이 폐석(肺石)을 설치하고 문고(聞鼓)를 달아놓은 것은 옥사를 지체시키거나 억울함이 없게 하려는 조처였습니다.

지금 내외(內外)의 옥사가 거개 모두가 잘 처리되는 일이 드문 것은 물론, 법의 조문을 교묘하고 각박하게 적용시키고 있으므로 올바름은 앞세우지 않은 채 법으로 얽어 죽이려고만 하고, 죄를 매김에 있어도 가볍게 할 것은 따지지 않은 채 무겁게만 매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죄인을 잡으면 먼저 수없는 매질만을 가할 뿐 죄수를 살릴 방도는 찾지 않습니다. 또 옥사를 처결하는 사람이 간리(奸吏)의 술책에 빠지기도 하고 권세가의 청탁에 위축되기도 하여, 법을 멋대로 조종해서 굽히고 있으므로 죄수들은 원통함을 품은 채 하소할 데가 없습니다.

이러니 천지(天地)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이루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아, 형옥(刑獄)을 삼가라는 말은《서경(書經)》우서(虞書) 순전(舜典)에 실려있고, 구악(舊惡)을 쇄신해야 한다는 《송사(宋史)》의 조서(詔書)는 지금도 훌륭한 일로 일컬어져 오고 있으니, 형옥의 억울함은 임금에게 관계되는 바가 중대합니다.

서민(庶民) 여자가 하늘에 하소연하니 벼락이 제(齊)나라 경공(景公)의 궁(宮)을 쳤고13760), 동해군(東海郡)에 사는 효부(孝婦)가 원통하게 죽으니 3년간 가뭄이 들었습니다.13761) 이 두 사람은, 지위는 도꼬마리보다도 천하고 권세는 날리는 깃털보다 가벼웠지만 그래도 그 정신이 구천(九天)에 통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원통함을 품고 답답해하는 사람이 한둘도 아닌 수백인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진실로 그 죄가 고의인가 실수인가를 헤아리고 일의 경중(輕重)을 살펴서 인자한 마음으로 실정을 찾고 의로운 마음으로 법에 견주어 세월을 지체시키는 일이 없게 한다면, 어긋난 기운이 없어지고 천화(天和)가 점차로 회복될 것입니다.

공도(公道)는 천리의 자연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하늘은 공도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만물을 덮어주고 땅도 공도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만물을 길러주고 해와 달도 공도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두루 비쳐주는 것입니다.

임금은 이 세가지를 본보기로 삼으면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먼저 지극한 공도를 세우면 온 사해가 이를 표준으로 삼아 공변되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인욕(人慾)이 난무하여 천리가 궤멸되었으므로 염치를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날마다 이(利)만을 다투어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항(閭巷)에는 풍속을 격발시키는 사람이 없고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자신을 바르게 가지는 사람이 부족하여, 날마다 구제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등은 전하께서 법을 세워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미진함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저어합니다.

아, 하늘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천지의 기(氣)와 사람의 기가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의 응보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재변(災變)으로 사람에게 경계를 보였다가 만약 반성하여 수거(修擧)하지않으면 끝내는 극심한 화패(禍敗)를 내리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노여움을 만나 그 노여움을 그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인사(人事)를 극진히하지 못한 탓입니다.

한 마음의 동정(動靜)과 만사(萬事)를 수작(酬酢)함에있어 내궁(內宮)의 사적인 부탁에 견제되거나 인척(姻戚)의 청탁에 말려들게 되면, 한번 생각이 발하는 것은 미미한 것이지만 만화(萬化)의 근본은 이미 어긋난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의 싹은 은미해도 하늘의 견고는 밝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덕을 닦으시고,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시어 상제(上帝)의 명 보전할 것을 생각하소서. 이어 다스림에 도움이 되는 좋은 말을 연방(延訪)하여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시고, 만백성의 고통을 생각하시어 인덕(仁德)을 베풀어 편안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보이지않는 곳의 침체 때문에 화기가 상하는 것을 유념하시어 공도(公道)를 확충시켜 만물에 미치게 하시며, 위로 오제(五帝)13762)와 아래로 삼대(三代)13763)를 이어 삼가는 마음가짐으로 큰 계책을 내어 잘 다스려지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러자면 마음 방위(防衛)하기를 성을 쌓아 나라를 방위하듯 함으로써 사적인 마음이 싹트지 못하게 하시고, 하늘 공경하기를 어버이 공경하듯 함으로써 태만한 마음이 자라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조정에 있을 때나 연거(燕居)할 때나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잠시도 소홀히 하지 말고 더욱 정성을 다하소서.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재변이 있을 때마다 구언(求言)하고 전례에 따라 피전감선(避殿減膳)하더라도 이는 모두 겉치레일 뿐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상소의 내용이 매우 지당한 말이니 내가 유념하도록 하겠다.

상소에 ‘죄수를 위해서 살릴 방도를 찾지 않는다’했는데, 외방(外方)의 추안(推案)이 하자가 없는 것같았기 때문에 번번이 대신과 의논, 추안에 의거 결단했던 것이다. 옥사를 맡은 관원이 상세히 추핵(推覈)한다면 억울한 일은 절로 없어질 것이다”하였다.

註13758]중니(仲尼):공자(孔子)의 자.註13759]진선정(進善旌)과 비방목(誹謗木)을 세웠으니:나라의 정사(政事)에 대해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고 유익한 말을 전달해 달라는 뜻. 진선정은 요(堯)임금때 사통오달한 네거리에 깃대를 세워놓고 정사에 유익한 말을 할 사람은 그 아래 서있게 하던 깃대다. 비방목(誹謗木)도 요임금때 다리 가에다 정사의 잘못된 점을 기록하게 하던 나무이다.《대대례(大戴禮)》보부(保傅).註13760]서민(庶民) 여자가 하늘에 하소연하니 벼락이 제(齊)나라 경공(景公)의 궁(宮)을 쳤고:한 여자의 원망이 오뉴월에 서리를 내리게 한다는 뜻. 제(齊)나라의 어떤 과부가 아들이 없었는데도 시집가지않고 늙은 시어머니를 섬겼다. 시어머니에게는 다른 아들은 없이 딸만 하나 있었다. 그 딸이 친정어머니의 재산을 노려 올케를 시집보내려 했으나 듣지않자, 자신이 어머니를 죽이고 그 죄를 올케에게 뒤집어씌웠다. 올케는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어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니, 경공(景公)의 궁(宮)에 벼락이 떨어졌다.《회남홍열집해(淮南鴻烈集解)》권6 남명훈(覽冥訓).註13761]동해군(東海郡)에 사는 효부(孝婦)가 원통하게 죽으니 3년간 가뭄이 들었습니다:한(漢)나라때 동해군에 사는 어떤 효부(孝婦)가 청상과부가 되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그러나 개가(改嫁)하지않고 시어머니를 효성스럽게 모셨지만, 시어머니는 자기때문에 며느리가 개가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자살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시누이가 “올케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고발해서 마침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동해군에 3년간 심한 가뭄이 들었다.《한서(漢書)》 우정국전(于定國傳).註13762]오제(五帝):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註13763]삼대(三代):하(夏),은(殷),주(周).

○弘文館副提學金鏐等上疏, 略曰:

殿下遭天切譴, 避殿、貶膳, 慮顧咎愆, 痛自刻責, 敬天之意, 靡所不至。 然敬在天之天, 孰若敬在己之天, 吾之擧動; 吾之政事, 皆天也。 一言之細、一行之微、一賢否之黜陟、一賞罰之榮辱, 吾苟無愧於心, 則無怍於天矣。 殿下卽祚以來, 二十餘年間, 福瑞無聞; 咎徵層出。 純陰之月, 雪且雷, 地宜靜固而動, 遠近奏簡, 災居十九。 臣等不知 殿下言行之微; 擧動之間, 政事之際, 其有愧於在己之天耶, 帝堯周文, 至治之君, 而和氣充塞, 百姓熹皞, 然而一民飢寒, 則曰: “我乃飢寒也。” 視之如傷。 蓋民者, 國之心也。 心病則百節不和, 元氣萎籋。 今旱荒之餘、癘扎之中, 菜色僅存於郡國, 殣殍相望於溝壑。 加以饞官黠吏, 橫斂苛索, 邦本失固, 此正殿下如保赤子之時, 非勞力竭財之日也。 誠宜下寬大之詔, 䘏窮困之命、停不急之務、息疲餒之力, 煦之以深仁; 幬〔之〕以厚德, 使鴻雁不至嗷嗷也。 仲尼曰: “天子有爭臣, 則雖無道, 不失天下; 諸侯有爭臣, 則雖無道, 不失其國。” 蓋人臣之進諫者, 非爲身也, 將欲以匡君之過; 矯君之失也。 雖無過, 而建旌、立木, 豈非慮深伏之病, 而求天下之藥石也。 殿下納諫之誠, 漸不如初, 外視虛懷, 內實厭聞。 彈一人、論一事, 動浹旬月, 臣等恐轉圜之美, 有愧於; 不諫亦入, 未及於周文也。 君子曰: “從諫不如喜諫; 喜諫不如樂諫。” 喜之樂之然後, 人亦樂告, 而君自無過矣。 君子曰: “非侫折獄, 惟良折獄。” 蓋獄者, 王法之所具; 人命之所關, 毫忽小謬, 冤屈莫大。 隆古帝王, 肺石之設, 聞鼓之懸, 欲使之不滯其冤也。 今內外犴獄, 率皆鮮仁, 巧法深文, 不先正而殉法; 不問輕而求重, 一獲罪人, 百榜先加, 無有爲囚求生道。 或陷於奸吏之術; 或縮於權勢之囑, 撓法出入, 抱冤莫白, 傷天地之心者, 可勝道哉, 嗚呼! 欽䘏之戒, 著在《虞書》; 洗滌之詔, 稱仁《宋史》, 刑獄之冤, 人主所重也。 庶女告天, 電擊臺; 孝婦叩心, 旱涸東海。 此二者, 位賤尙葈, 權輕飛羽, 猶能精通九天, 況今含冤鬱抑者, 不二而百耶, 誠宜酌罪故誤, 審事輕重, 仁以求情; 義以況法, 無滯留歲月之深, 則戾氣消歇, 天和稍回矣。 公者, 天理之自然也。 天以公, 故廣覆; 地以公, 故厚載; 日月公, 故照遍, 爲人主者, 法三者而已。 人君先立公道之極, 而四海標準, 人無不公矣。 今人慾橫流, 天理汨沒, 芻狗廉恥, 日事奔騖。 閭巷無激俗之人, 縉紳乏正己之士, 悠悠靡靡, 裔流難救, 豈不寒心, 臣等恐殿下建極之道, 猶未盡而然也。 嗚呼! 天人之際, 精祲相盪; 善惡相報, 不爽毫髮。 始以災異而示儆人, 若不省修, 則終以禍敗而篤降, 可不懼哉, 遭天怒而使不得霽者, 人事之不盡故也。 若一心之動靜; 萬事之酬酢, 或牽於宮闈之昵, 或出於戚畹之私, 一念之發雖微, 而萬化之本已謬。 萌蘖隱微, 譴告昭彰。 伏願殿下, 畏天之威, 修己之德, 兢惶惕若, 思保帝命。 訪輔世之嘉言, 虛襟以納; 念蒼生之隱痼, 深仁以安; 軫幽滯之傷和, 擴公道而及物, 上胤五帝; 下紹三代, 翼翼小心, 期理大猷。 防意如城, 而私不得螮蝀焉; 敬天如親, 而慢不得稂莠焉。 大庭如是; 燕居如是, 無少暫忽, 益殫厥誠。 不然, 條事求言, 循例減輟, 皆文具而已。

傳曰: “疏意甚當, 予當省念。 疏云: ‘無有爲囚, 求生道。’ 外方推案, 似無瑕隙, 故輒與大臣議之, 依推案施斷矣。 若司獄之官, 詳加推覈, 則自無冤悶之事矣。”

중종 61권, 23년(1528 무자/명가정(嘉靖)7년) 5월 20일(경인) 1번째기사

조강에 나아가 가뭄과 송인강의 추고 및 양계의 납곡하는 폐단에 대해 의논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시강관 원계채(元繼蔡)가 아뢰기를,

“재변은 터무니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초래한데가 있는 법이어서 인사(人事)가 잘못되면 재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재변을 근신하는 도리를 다하여, 재변을 만나게 되면 성대한 음식을 치우고 성대한 의복을 감하여 삼가고 공경하는 뜻을 보인 것인데, 이는 곧 공경하고 삼가는 것 중의 말단적인 일입니다.

이 글에 ‘제(齊)나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나매 제후(齊侯)가 빌게 하자, 안자(晏子)14414)가 경공(景公)에게 「임금께서 덕을 더럽힌 일이 없다면 어찌 빌 것이 있으며, 만일 덕을 더럽혔다면 빈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한갓 제경공에게만 약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곧 천만세토록 법이 될 말입니다.

임금은 천지의 온갖 귀신을 주관하여 천지와 서로 통하게 되었기때문에 비록 소소한 일이라도 잘못하고 혹시 한가지 생각이라도 성실하게 하지못하면 재변이 금방 감응하게 되지만, 만일 측신(側身)하고 반성하며 덕을 닦고 일을 올바르게 해가면 또한 재변을 반전시켜 상서가 되게 할 수 있는 법이니, 이로 본다면 재변을 근신하는 도리가 실다운 덕을 닦는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말단적인 비는 일이 어찌 하늘의 마음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요사이 우박이 내리는 재변은 매우 놀라운 일인데, 어찌 인사가 잘못된 일이 없는데도 그렇겠습니까? 상께서 더욱 반성하셔야 합니다.

또 올봄에는 비가 넉넉하여, 먼 지방의 전답들은 알 수 없어도 교외(郊外)의 전답들은 돋아난 싹이 자못 무성하므로 백성이 추수할 가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의 날씨는 가물 징조가 있으므로 아랫사람들이 모두 의구(疑懼)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상께서 미리 수성(修省)하여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하고,

영사 장순손(張順孫)은 아뢰기를,

“경연관(經筵官)이 아뢴 말이 지당합니다. 근래에 해마다 풍년이 들다가 올봄에는 비가 넉넉했기 때문에 백성이 장차 추수할 가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사이 비가 오지않으므로 아래 백성들이 모두 우구(憂懼)하게 되는 것은 왕년에 모두 풍년들지 않았기 때문이니, 상께서 실다운 덕을 닦기 힘써 하늘의 마음이 감격되게 하소서.

상께서 몸소 실행하신 다음에는 아랫사람들이 또한 받들어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사이 생기는 재변이 한가지만이 아닌데다 또한 가물 징조가 있으니, 형옥(刑獄)에 관한 일을 더욱 신중하게 살펴야 하는데, 죄가 있는 사람을 풀어주고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게 됨은 모두 다 형벌을 잘못한 것이다.

지금 평안도의 계본(啓本)을 보건대, 심사손(沈思遜)이 갑자기 적변(賊變)을 만났을 때 와서 적을 쏘라고 외쳤는데도, 아랫사람들이 거개 모두 도망하여 피했다고 한다.

이엽(李葉)과 김중견(金仲堅)에게는 이미 도망해 피한 죄로 군율(軍律)을 썼거니와, 같은 때에 죄지은 송인강(宋仁剛)은 아직 자복받지못했는데, 잡다한 일을 아울러 추고(推考)하기때문에 지금까지 자복받지못하는 것이다.

【추격(追擊)했다고 거짓말을 해 조정을 기만한 일을 아울러 추고하기때문에 한 말이다】

송인강이 도망하여 피한 상황이 지극히 분명하니, 도망하여 피한 것을 자복받아 결죄(決罪)하여 군령(軍令)을 엄숙하도록 해야 한다”하매,

장순손이 아뢰기를,

“송인강이 도망하여 피한 상황은 지극히 분명해졌는데 지금도 자복하지 않습니다”하고,

원계채는 아뢰기를,

“신이 경차관(敬差官)으로 만포(滿浦)에 갔을 때 항간에 전파되는 말을 물어보고 또한 자세히 추문(推問)해 보건대, 심사손이 피인(彼人)들의 땅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심사손, 이엽, 김중견, 송인강 네사람뿐, 데리고 간 사람도 많지않아 심사손이 거느린 군관(軍官)과 복종(僕從) 두어 사람이고 송인강이 거느린 사람도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다시 다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사손이 살해될 때의 일도 자세히 본 사람이 없는데다 비록 자세히 아는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은휘(隱諱)하고 말하지 않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이엽과 김중견이 원정(元情)한 것을 보건대, 단지 그 적들이 나온 것과 자기들이 도망하여 피한 경위만 말했기에, 신이 말하기를‘심사손이 적을 만났을 적에 비록 외치지 않았더라도 너희들이 마땅히 자신을 잊어버리고 구원했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장수를 버리고 도망하여 피했느냐?’하니, 이엽등이 ‘장수를 버리고 도망하여 피한 것은 곧 중한 죄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실지로 그랬기에 진실로 승복하는 것이다’하고, 다시 발명(發明)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로 본다면, 송인강이 도망하여 피한 일도 어찌 발명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장순손은 아뢰기를,

“송인강이 공술한 말을 보건대, 송인강은 길 서쪽, 심사손은 길 동쪽으로 각각 서로 나누어 달려갔다고 했으니, 이곳이 곧 도망하여 피한데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인강의 일은 다시 깊은 뜻이 없으니, 도망하여 피하고 구원하지않은 사연만 가지고 추고하면 된다. 그 나머지 추격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조정을 기만한 일은 곧 지엽적인 것이다”하매,

동지사 윤은보(尹殷輔)가 아뢰기를,

“당초에 심사손, 송인강, 이엽, 김중견이 함께 앉았다가 적을 만나 심사손이 적 한사람과 말 한마리를 쏘았다고 했으니, 만일 그때 송인강이 도망하여 피하지 않고 네사람이 힘을 합쳐 쏘았다면, 그 적들이 또한 몸을 아끼느라 아마 물러서서 도망하게 되어 이런 큰 변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심사손이 세 사람들과 함께 피하여 도망한 것이 아니라, 심사손은 접전(接戰)하는데 세사람은 도망하여 피했으니, 송인강도 구원하지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나머지 추격했다고 거짓말한 것은 추고하지않아도 되고,

도망하여 피하느라 구원하지않은 것이 곧 큰 죄입니다”하고,

장순손은 아뢰기를,

“심사손이 적을 쏘고 말을 쏜 일을 송인강에게 물으니 알지못한다고 했는데, 알면서도 말을 하지않는지 알지못해서 말을 하지않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윤은보【호조판서】에게 이르기를,

“조만간에 변방 지역에서 무력을 쓰게 될 것이므로 마땅히 군량을 조치해야 하는데, 다른 데의 곡식을 옮겨오기는 사세가 또한 곤란하다.

양계(兩界)에서 납곡(納穀)14415)을 받는 것은 곧 곡식을 저축하기 위한 것인데, 이전에는 납곡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수가 적다.

납곡에 관한 일을 이미 절목(節目)을 만들어 수교(受敎)했었으니, 만일 사세가 곤란한 일이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그 절목대로 한 다음에야 거의 백성에게 신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어제 평안도의 납곡한 수량은 서계(書啓)했는데 함경도의 것은 서계하지 않았으니, 납곡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비록 납곡을 했더라도 이미 값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하매,

윤은보가 아뢰기를,

“양계의 납곡하는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쌀을 그 도로 실어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잡물(雜物)을 가지고 가서 그 도의 곡식을 무역하여 바치기 때문에 민간에 곡식이 귀해져서 더욱 어렵고 모자라게 됩니다.

이 때문에 함경도 관찰사【조계상(曺繼商)】가 본조(本曹)에 이관(移關)하되, 납곡이 도리어 폐단이 있는 것을 들어 올해에는 납곡을 받지말기바란다고 했으므로 우선 정지한 것입니다. 대리 납곡을 받는 것이 좋기는 합니다.

그러나 변방의 수령들이 어찌 모두 현명한 사람이겠습니까?

불행히 구세장(具世璋)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속이는 일이 반드시 많이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본사(本司) 안의 모두의 의논이, 만일 올해 조금 풍년든다면 마땅히 관(官)의 무명을 내려보내 시가대로 무역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쓸데없는 말이 아닙니다.

앞에 납곡한 사람들에게는 자원(自願)에 따라 값을 주었고, 납곡을 하고도 아직 값을 받지못한데는 평안도 성천(成川)과 위원(渭原) 등 고을입니다. 함경도는 지금 납곡하려는 사람이 있지만, 본조가 감사의 요청에 따라 아직 바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계의 납곡하는 사람들이 민간에서 곡식을 무역하여 바친다면 과연 민간의 곡식이 귀해지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양편의 의사가 서로 있는 것으로써 없는 것과 바꾸자는 것이니, 또한 그다지 그른 일이 아니다. 납곡을 하면 값을 주어야 하는 법이 이미 세워졌으니, 마땅히 수교(受敎)한 대로 하고 백성에게 신의를 잃게 해서는 안된다.

전일에 호조의 공사(公事)를 보건대, 경창(京倉)의 곡식을 자원에 따라 제급(題給)한다고 했었는데, 이를 만일 수교하지 않은 것이라면 제급할 것이 없다”하매,

윤은보가 아뢰기를,

“경창의 오래 묵은 쌀은 자원하는 대로 제급한다는 이전의 수교가 있기 때문에 위원(渭原) 경주인(京主人)14416)이 그의 고을에 납곡을 하고 경창의 쌀을 인수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창의 군량미 원수(元數)가 68만8천여 석인데, 이전에는 저축된 수량이 1백만여석이다가 지금은 또한 70만여석이 못됩니다. 경창의 쌀을 자원에 따라 제급하는 것이 비록 수교가 있기는 하지만 군자(軍資)가 부족하므로 이를 제급할 수 없으니, 어전(魚箭)14417)이나 동철(銅鐵)로 제급하는 것도 가하고, 그렇지 않다면 하삼도(下三道)의 곡식으로 제급하는 것도 가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계의 군자는 다각도로 조치해야 한다. 불행히 군사를 일으키는 일이 있게 되면 군량이 중요하니,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하매,

윤은보가 아뢰었다.

“군량은 다른 조건으로 조치할 수는 없습니다.

본조의 의논이, 올해 조금 풍년이 들 경우 미리 양계에 관(官)의 면포(綿布)를 보내 시가(市價)대로 곡식을 무역한다면 거의 될 수 있을 것이고,

군량조달하는 방법을 다른 도의 것으로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註14414]안자(晏子):춘추시대 제나라의 어진 재상. 이름은 영(嬰)이고 자는 평중(平仲)이다.註14415]납곡(納穀):군량 및 구호(救護) 양곡으로 구황 정책의 한가지. 곡식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명예직 벼슬을 주거나 청을 들어주고, 죄지은 자에게는 죄를 면해주었다.註14416]경주인(京主人):외방(外方) 고을의 이서(吏胥)나 또는 서민(庶民)으로서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고을의 사무(事務)를 연락하고 대행(代行)하는 일을 맡아보는 자. 공물(貢物)을 방납(防納)하고 그 대가(代價)를 배로 받는 등 많은 폐단이 있었다. 경저리(京邸吏)라고도 한다.註14417]어전(魚箭):어로(漁撈)방법의 한가지. 대나무로 울타리를 쳐 밀물때 고기들이 따라들어왔다가 썰물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庚寅/ 御朝講。 侍講官元繼蔡曰: “災不虛生, 必有所召, 人事有所失則災變作矣。 是故, 古人盡謹災之道, 而遇災則去盛饌、損盛服, 以示敬謹(敬)之意, 此乃(敵)〔敬〕謹之末也。 此書言: ‘齊有彗星, 齊侯使禳之, 晏子謂景公曰: 「君無穢德, 又何禳(馬)〔焉〕, 若德之穢, 禳之何益,」’ 此言, 非徒景公之藥石, 乃爲千萬世之法矣。 人君爲天地百神之主, 與天地相爲流通, 故雖小事差失, 或一念不誠則災輒應之, 若側身省念, 修德正事則亦可以轉災爲祥矣。 以此見之, 謹災之道, 不過乎修實德而已, 祈禱之末, 豈可以回天乎, 近日雨雹之災, 甚爲驚愕, 豈無人事之失, 而然耶, 自上當加省念。 且今春, 雨水周足。 遠方之田未可知也, 郊外之田, 立苗頗盛, 民有西成之望。 近日日候, 似有旱徵, 下人皆爲疑懼, 須自上預爲修省, 而感回天心也。” 領事張順孫曰: “經筵官所言至當。 近來連歲凶荒, 今春雨水周足, 故民將有秋成之望。 今以近日之不雨, 下民皆爲憂懼者, 以其已往之年皆爲不稔故也, 請自上務修實德, 而感激天心。 自上躬行之然後, 下人亦有所奉行也。” 上曰: “近日, 災變之作非一, 而旱徵亦有之。 刑獄之事, 尤當愼恤。 開釋有罪; 殄戮無辜, 皆是失刑。 今見平安道啓本則沈思遜卒遇賊變, 呼唱曰: ‘來射賊。’ 而下人等率皆走避云。 李葉、金仲堅旣以走避之罪, 用軍律矣。 以一時之罪, 宋仁剛則時未取服, 以雜事幷推, 故至今不服,【以詐稱追擊, 欺罔朝廷事, 幷推故云。】仁剛走避之狀, 至爲分明。 以走避之事, 取服而決罪, 以嚴軍令可也。” 順孫曰: “仁剛之走避形狀, 至爲分明, 而至今不服矣。” 繼蔡曰: “臣以敬差官往滿浦時, 詢問閭巷傳聞之言, 而且詳推之, 沈思遜入歸彼地時, 人不多往, 但思遜、李葉、金仲堅、宋仁剛四人, 而帶率人亦不多, 思孫所率軍官、僕從數人, 仁剛所率亦不過如是, 而更無他人。 思遜被害時事, 人無詳見者, 雖有詳知之人, 隱諱不言, 未可知也。 臣見李葉、金仲堅元情則只言彼賊出來事及其人等走避節次矣。 臣謂之曰: ‘思遜遇賊, 雖不呼唱, 汝等所當忘身救之。 何爲棄將走避乎,’ 則李葉等曰: ‘棄將走避, 乃重罪也。 然此我實爲之, 固當承服。’ 云, 而更無發明之意。 以此見之, 宋仁剛走避之事, 亦何能發明乎,” 順孫曰: “‘見仁剛招辭, 仁剛則路西; 思遜則路東, 各相分馳。’ 云, 此乃走避處也。” 上曰: “仁剛之事, 更無深意。 其以走避, 而不救辭緣推之則可也。 餘詐稱追擊、欺罔朝廷事則乃枝葉也。” 同知事尹殷輔曰: “當初沈思遜、宋仁剛、李葉、金仲堅同坐遇賊, 思遜則射彼賊一人、馬一匹云。 若於此時, 仁剛不爲走避, 而四人同力射之則彼賊亦愛其身, 庶有却走, 而無此大變矣。 且思遜, 非與三人同爲避走也, 思遜則接戰, 而三人則走避, 仁剛之不救則分明。 餘詐稱追擊事則雖勿推之, 走避不救, 乃大罪也。” 順孫曰: “思遜射賊、射馬之事, 問于仁剛則不知云。 知而不言與不知而不言, 未可知也。” 上謂殷輔【戶曹判書。】曰: “早晩當用武於邊地也, 軍糧所當措置, 移轉他穀, 勢亦難矣。 納穀於兩界者, 乃所以儲穀也。 前則納之者多, 而今則數少。 納穀之事, 已爲節目而受敎。 若勢難之事則已, 不然則當依節目, 而爲之然後, 庶無失信於民矣。 昨日, 平安道納穀數則書啓, 而咸鏡道則不爲書啓, 無奈無納穀之人, 而然耶, 雖納之, 而已受其直, 故不爲書啓乎,” 殷輔曰: “兩界納穀之人, 非以在京之米, 輸納於彼道也, 齎去雜物, 販貿彼道之穀, 而納之, 故民間穀貴, 而尤爲艱乏。 以此, 咸鏡道觀察使【曺繼商。】移關于本曹, 以納穀還爲有弊, 請於今年, 勿爲納穀云, 故姑停之矣。 大抵, 納穀之事好矣, 然邊方守令豈盡爲賢乎, 幸有如具世璋之事, 則欺罔之事必多有之。 且司中僉議曰: ‘今年若小稔則當以官布下送, 而從市直貿易可也。’ 此則不爲虛矣。 已前納穀者則從自願給其直矣, 納穀而時未受直者, 平安道成川、渭原等官矣。 咸鏡道則今有欲納者, 而本曹因監司之請, 姑勿納之耳。” 上曰: “兩界納穀之人, 貿穀於民間, 而納之則民間穀貴之弊, 果不無矣。 然此乃兩情相願, 以有易無之事, 亦不甚非矣。 納穀給直之法已立則當依受敎, 不可失信於民。 前見戶曹公事則京倉之穀, 亦以從自願題給云。 此若不爲受敎則不必題給。” 殷輔曰: “以京倉陳久之米, 從自願題給事, 前有受敎, 故渭原京主人, 納穀於其官, 而欲受京倉之米。 然京倉軍資米元數, 六十八萬八千餘石, 而古則儲在之數, 百萬餘石, 今則亦不滿七十萬餘石。 京倉從自願題給, 雖有受敎, 軍資不足, 此則不可題給也, 其以魚箭銅鐵, 題給可也。 不然則以下三道穀, 題給亦可。” 上曰: “兩界軍資, 多般措置可也。 幸有興師之事, 則軍糧爲重, 不可忽也。” 殷輔曰: “軍糧, 不可以他條措置。 本曹之議: ‘今年若小稔則預送官布於兩界, 從市直貿穀則庶乎可也。’

生財之道, 不可以他道爲之也。”

중종 64권, 23년(1528 무자/명가정(嘉靖)7년) 11월 24일(임술) 3번째기사

세자교육·지방의 탐오·부인의 청탁·직언수렴·인재관리등에 대한 홍문관부제학 유여림등의 상소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유여림(兪汝霖)등이 상소하기를,

“생각하건대, 하늘과 사람이 응하는 것은 영향(影響)보다 빨라서, 일의 득실(得失)에 다르게 응하여 상서와 재앙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쇠퇴하고 타락한 정치에는 응하는 것이 늘 덥고 포학하고 참혹한 정치에 응하는 것이 늘 추워서, 주(周)나라의 말기에는 추운 해가 없었고 진(秦)나라가 망할 때에는 따뜻한 해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주나라와 진나라에 경계를 보인 것이 이토록 간절하였으나, 오히려 깨닫지 못하여 마침내 망하게 되었습니다.

예부터 국가의 형세는 융성하지 않으면 쇠퇴하여지고 쇠퇴하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우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하는 것은 망하는 당일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짐이 융성하지 않은 날에 이미 나타나는데, 밝은 자는 먼저 보고서 바로잡아 망하게 되지않게하나 어두운 자는 흐릿하게 알지 못하여 망하는 날에 가서야 망하는 것을 압니다.

요는 임금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재앙을 삼가는데에 달려 있는데, 두려워하고 재앙을 삼가는 참된 공은 정심성의(正心誠意)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 정심성의 넉자는 넉넉히 어지러움을 바꾸어 다스림이 되게 하고 재앙을 바꾸어 상서가 되게 할 수 있거니와, 성의정심의 공이 있으면 성의정심의 보람이 있는 것은 마치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데, 씨뿌리면 반드시 나는 것은 이치가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보건대 근년 이래로 상서가 응하지 않고 재앙이 잇달아, 올해까지 겨울의 천둥이 이변을 보이고 일이(日珥)가 경계를 보이며, 절기가 동지(冬至)를 지났는데도 따뜻한 기운이 봄날같고 비린 안개가 짙은 장독(瘴毒) 같으니, 어찌해 전하께서 정심성의하시는 공이 이처럼 보람을 얻기어려운 것입니까? 나라의 형세(形勢)가 위축되어 점점 쇠약하여지고 정치의 보람이 천박하여 점점 낮아지는 것이 날마다 더하고 해마다 더하면 10년 뒤에는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당국자는 정신이 어두워서 깨닫지 못하고 곁에서 보는 자는 먼저 알고서 은근히 비웃는다면, 임금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근심하고 부지런히 힘쓰더라도 여기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태자(太子)는 종묘(宗廟)의 제사를 맡는 사람이니,《춘추(春秋)》에 아들과 동생을 쓴 것은 종통(宗統)을 중시한 것이며, 좌우전후가 모두 바른 사람이고 출입기거(出入起居)에 모두가 바른 사람을 대하게 하는 것은 소양이 있도록 보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낭(智囊)을 등용하여 가령(家令)으로 삼고15113) 박망(博望)을 개설하여 빈객(賓客)을 맞이하는 것15114)이 어찌 보도하는데에 마땅한 사람을 얻은 것이며 거처하는 데에 마땅한 곳을 가린 것이겠습니까?

주무왕(周武王)이 태자였을 때에 포어(鮑魚)를 즐겨먹었으나 태공(太公)이 바르지않은 것을 먹는다하여 말렸는데, 고기는 예기(禮器)에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옛사람은 음식을 먹을 즈음에도 교양(敎養)하는 방도(方道)가 있었으니, 그 훈도(薰陶)하고 함양(涵養)하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보건대, 세자(世子)의 순일(純一)한 덕(德)이 삼선(三善)15115)을 높이고 밝은 학문이 날로 새로와지나, 밝히기 어려운 것은 이치이고 어둡기 쉬운 것은 마음이므로 잠시라도 게을리하면 그 마음이 곧 변할 것이니, 단정한 인사와 함께 의리를 강론(講論)해야 하고 글을 외거나 뜻풀이를 하는 것만을 주로 하지않아야 합니다.

어진 사람을 만나 학문을 논하되 시정(時程)에 얽매이지않고 혹 청연(淸讌)의 밤에도 요속(僚屬)을 인대(引對)하여 경의(經義)를 강구(講究)하면 어찌 덕을 진전시키는 공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종사(宗社)가 의탁하는 바이고 신민(臣民)이 추대하는 바임에리까? 보호하는 방도를 지극하게 하지않는 것이 없는데도 지난번 간사한 자가 엿보았는데, 정상은 숨겨졌으나 형적은 드러났습니다. 다행히 명철하신 성단(聖斷)에 힘입어 음흉한 자가 죄를 받고 국시(國是)가 크게 정하여졌는데, 감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품고서 악(惡)을 숨기고 은혜를 바라며, 한편으로는 조정(朝廷)의 경중(輕重)을 엿보고 한편으로는 전하의 천심(淺深)을 엿보며, 남몰래 교결(交結)하여 글을 지어 은혜를 베풀고 위에 아뢰도록 꾀었으니 유식한 자도 이러하다면 불령(不逞)한 자는 알 만합니다. 의지하여 인심을 어루만질 수 있는 바는 성의(聖意)가 굳게 정하여지시는 것뿐입니다.

수령(守令)의 직임은 백성을 돌보는 일인데, 자상한 자는 적고 침탈하는 자가 많습니다. 백성의 재물에는 한정이 있는데 침탈이 끝이 없으되 요로에 아첨하여 뇌물이 잇나니, 뭇사람이 원망하나 원통함을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바다나 산너머 먼 지방에서는 늙은 유민(遺民)이 울면서 성종(成宗)때의 일을 말하기를 ‘그때의 수령은 그래도 염치가 있고 그리 탐욕하지 않아서 자못 세종(世宗)때의 유풍이 있었는데, 한번 변하여 폐조(廢朝)가 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탐오하여 염치가 없다’합니다.

아, 이 백성에게 이런 말이 있으니, 어찌 성조(聖朝)의 몹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지금의 수령으로서 백성을 괴롭히는 자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마음가짐은 깨끗한 듯하나 재기(才器)가 용렬하므로 위엄이 서리(胥吏)에게 미치지않아서 폐단이 더욱 큰 자가 있고, 재능은 조금 있으나 기세를 믿고 위엄을 지어 가혹하게 징색(徵索)하여 한없는 욕심을 채우고 창고의 저장이 텅 비게 하는 자가 있고, 여러 가지로 침탈하되 자기가 쓰지않고 권귀(權貴)에게 후히 뇌물을 주어서 명예를 낚으면서 스스로 깨끗하다고 하는 자가 있는데,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뭇 양(羊)을 모아서 한 이리가 마음대로 잡아먹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출척(黜陟)의 권한을 오로지 방백(方伯)에게 맡겼으므로 방백의 직분은 오직 전최(殿最)를 엄하게 해야 하는데, 어두운 자는 이목(耳目)이 미치지 못하고 나약한 자는 위세가 그 마음을 두렵게 하므로, 흑백(黑白)의 명목이 어지럽고 동서(東西)의 법도가 다르니, 맑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용루(龍樓)15116)·계장(계障)15117)을 엄하게하고 계전(桂殿)·초방(椒房) 1511 8)을 그윽하게 한 것은 내외를 분별하여 출입을 삼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궁(宮)을 깊게 하고 문(門)을 굳게 하여 혼시(閽寺)15119)가 지키고 응문(應門)15120)에서 격탁(擊拆)15121)하며 고인(鼓人)15122)이 당(堂)에 오르고 여사(女史)15123)가 환(環)을 주고 동관(彤管)15124)이 허물을 적는 것은 모두가 집을 바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옥루(屋漏)의 그윽한 곳을 천일(天日)이 비추어보고 일념(一念)의 간사한 것을 신명(神明)이 굽어 살피거니와, 여희(驪姬)가 한밤에 울고15125) 소동(蕭同)이 대상(臺上)에서 웃고15126) 정수(鄭褏)가 위매(魏妹)를 그르치려 코를 가리게 하고15127), 여후(呂后)가 척씨(戚氏)를 시기하여 귀를 지졌는데15128),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남들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나 열눈과 열손이 함께 보고 함께 손가락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궁중의 일을 외인(外人)이 모두 알거니와, 여알(女謁)15129)이 행해지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게 하는 것은 마치 종(鍾)을 훔치면서 귀[耳]를 가리는 얕은꾀와 같습니다. 한번 간사한 말이 문안에 드나들면, 부인(婦人)과 환시(宦寺)가 정사에 간여하고 임금의 마음이 글러진 것을 바로잡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전에 폐조(廢朝)때에 있어서는 어둡고 어지러워서, 폐행(嬖幸)15130)이 화(禍)를 일으키고 혼우(昏愚)와 포학(暴虐)을 도와 이루었고, 작록(爵祿)의 중한 권세가 다 그들의 손에 들어갔으므로, 완악하고 비루한 염치없는 무리가 공공연하게 붙좇아 아첨하고 빌붙으며 금백(金帛)을 마구 써서 미관(美官)이 되었는데, 듣는 사람은 지금까지도 침뱉고 욕합니다.

여알(女謁)이라는 것은 외간(外間)의 말이 문안에 들어가고 여총(女寵)이 궁중에서 성행하는 것을 뜻하는데, 칭찬하는 말이 귀에 들리고 기이한 기예가 눈에 닿으며 인척(姻戚)이 후한 작록을 바라고 충직한 사람은 혹 배척당하며 작명(爵名)이 때때로 외람되게 나와서 국사(國事)가 날마다 글러져가는 것이니, 자꾸자꾸 더해 가면 마치 수영에 서툰자가 물에 들어가서는 더욱더 깊은 못 쪽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은 분별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내폐(內嬖)15131)에 인연하여 특별한 은혜를 바라는 자는 소인이고, 조정에 우뚝 서서 뚜렷하게 스스로 지키는 자는 군자이니 밝게 살피면 선악이 저절로 나타날 것입니다. 사기(士氣)를 기르는 것은 곧 국맥(國脈)을 기르기 위한 것이니, 사기의 성쇠에 정치의 흥폐가 달려 있습니다.

서한(西漢) 때에는 충후(忠厚)를 숭상하였으나 충후가 지나쳐서 마침내 아첨하는 버릇을 이루어 상서하여 왕망(王莽)을 칭송하는 자가 4백여인에 이르렀고, 동한(東漢)이 일어나매 그 굽은 것을 곧게 바로잡아 오로지 기절(氣節)을 숭상하였으므로 인재가 허다하여 볼 만하였는데, 환제(桓帝)·영제(靈帝)가 임금답지 못하여 당고(黨錮)의 화(禍)15132)를 빚어내매 사류(士類)를 제거하여 나라까지 망하니, 더운 국에 덴 놈이 냉채도 불듯이 지나치게 겁내어 진(晉)나라때에는 청담(淸談)으로 돌아갔으나 청담이 마침내 진나라를 그르쳤습니다.

대저 사기를 배양하는데에 있어서는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비유하건대 높은 장대를 세워 재주 부리는 자가 왼쪽으로 치우치면 오른쪽으로 기울고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왼쪽으로 기우는 것과 같으니,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바로 서서 흔들리지않아야 마땅한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충후와 기절을 치우치게 버릴 수 없으나, 완둔한 자를 격려하고 나약한 자를 떨쳐 일으켜서 풍화(風化)를 부식(扶植)하는 데에는 절의(節義)보다 앞세울 것이 없으므로, 선비가 입신(立身)하는 데에는 명절(名節)을 근본으로 삼고 입조(立朝)하는 데에는 정직(正直)을 근본으로 삼는데, 임금이 이를 배양하는 데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바르게 하고 근본과 말단을 살펴야, 짧은 자를 길게 하고 모자라는 자를 넉넉하게 하여 그 변하는 것에 따라 바로잡힐 것입니다.

오늘의 배양은 뒷날에 보상이 있습니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회남왕(淮南王)이 반역하려 하였으나 급암(汲黯)의 절의를 두려워하였고, 헌제(獻帝)의 말기에 조만(曹瞞)15133)이 구정(九鼎)15 134)을 엿보았으나 오히려 한(漢)나라의 신하라는 이름을 누리려 하였으니, 어찌 당고 때의 여러 어진 이가 죽는 것을 마치 집에 가는 것처럼 여긴 힘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종(成宗)께서 배양에 도리가 있었으므로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으나, 무오년15135)과 갑자년15136)에 거의 다 제거되었으므로 선비들이 전철을 두려워하여 풍속이 위축되었는데, 중흥(中興)15137)한 뒤로 20여년동안 진작(振作)하여도 사기가 꺾여서 다시 떨치지 않아, 아부하고 구차하게 살아가려는 버릇이 있고 충직하고 성실한 기풍이 없으므로, 사대부(士大夫)가 상대하여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서 서로 남의 입만 바라보고 감히 한마디 말을 먼저 내지못하며, 당시의 재상(宰相)에 관계되는 일이면 두려워서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나약한 자는 크게 당시의 칭찬을 듣고 강직한 자는 어리석은 놈이라 지칭하므로 뇌동(雷同)하여 순종하고 말하지 않아서 드디어 쇠퇴한 풍속을 이루었으니, 아마도 남들을 따라 쏠리는 버릇이 더욱더 심하여져 곧은 말을 하는 선비가 세상에서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될 듯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된 까닭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직무를 분담하는 데에 있어서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뭇 공적을 넓힐 수 없으므로, 명철한 임금은 관작(官爵)이 사사로이 가까운 자나 악덕(惡德)한 자에게 미치지 않았습니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어진 이를 높이고 재능있는 사람을 쓰며 준걸(俊傑)이 관위(官位)에 있으면 선비가 다 기뻐서 그 조정(朝廷)에 서기를 바랄 것이다’하였거니와,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임금으로서 누가 어진이를 뽑아 쓰고 재능있는 사람을 들어 쓰려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어진이와 어리석은자가 거꾸로 놓이는 것을 늘 걱정하게 되는 까닭은 총명이 그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여 등용이 그 재능에 맞게 하지못하기 때문입니다. 혹 높이는 바가 반드시 어진 이가 아니고 쓰는 바가 반드시 재능있는 사람이 아니며 공적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가 아닌데도 물리친다면, 어떻게 뭇 직무를 총리(總理)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온갖 관사(官司)의 뭇 직무에 광폐(曠廢)한 것이 많아서, 게으른 것이 버릇이 되어 놀면서 날을 보내고, 기강이 무너져서 권장하고 징계하는 것이 밝지 않으며, 전형(銓衡)하는 곳에서는 자격(資格)에 따라 제수(除授)하는데에 급급하고, 청렴한 사람을 등용하고 탐욕하는 자를 물리치는 정사(政事)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요행의 문이 크게 열려 조급하게 출세하려는 마음이 더욱 심하므로 낭관(郞官)은 위로 열수(列宿)15138)에 응하는 것인데 우둔한 자가 혹 외람되게 차지하고, 강사(强仕)15139)에는 본디 나이의 한계가 있는 것인데 유취(乳臭)가 이미 환첩(宦牒)15140)에 오르며, 음재(蔭才)15141)를 시험할 때에는 눈으로 반줄의 글도 못읽는 자가 다 참여되니, 이것이 어찌 예전에 벼슬을 위하여 인재를 가리던 본의이겠습니까?

학궁(學宮)15142)에 오래 있으면서 여러해 공부하고서 한가히 초야에 숨어있는 재행(才行)이 상당한 사람 중에 반드시 백집사(百執事)로 쓸 만한 한두 사람이 없지않을 것인데 뽑아쓰는 정사를 폐기하여 거행하지않으니, 이것은 근년에 어지러웠던 뒷폐단이기는 하나, 월자(刖者)15143)를 보고서 천하의 신[屨]을 버리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요(堯)·순(舜)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허물이 없을 수 없고 스스로 그 허물을 알수도 없으므로, 명철한 임금과 나라를 일으키는 임금은 고리를 굴리듯이 막힘없이 간언(諫言)을 따라 허물을 듣고 고치려 합니다.

그러나 허물을 고칠 즈음에 조금이라도 억지로 하여 즐겨듣는 정성이 없다면, 간언을 어기게 되지않는 일이 드물 것입니다.

당태종(唐太宗)과 위징(魏徵)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말하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고 다시 의심하는 것이 없었는데도 오히려‘이 시골 늙은이를 죽여야 한다’하고 마침내 혼인을 멈추고 비석을 쓰러뜨리기에 이르렀으니 그 밖의 것이야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권하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선을 아뢰고 간사를 막는 것을 경(敬)이라 합니다만, 어려운 일을 권하는 말은 임금이 싫어하는 낯빛을 무릅쓰기 쉽고 간사를 막는 말은 흔히 귀를 거스르니, 순종하는 자는 기뻐할 만하나 거스르는 자는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넌지시 밀어내고 드러나게 쫓아내어 점점 멀리 가게 되어, 충성스럽고 곧은 사람은 조정에 용납되지 않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는 틈타서 그 술수를 부리게 되니, 그렇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않을 것입니다.

예부터 임금이 지술(智術)로 간신(諫臣)을 배척하면 그 나라가 반드시 위태로와졌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귀를 거스르는 자를 용납하고 싫어하는 낯빛을 무릅쓰는 자를 권려하고 격렬한 말이 날마다 임금 앞에서 아뢰어지는 것은 신하의 이(利)가 아니라 국가의 복입니다.

보건대, 전하께서 간언을 받아들이실 즈음에는 자주 면전에서만 따르는 빛이 있고 즐겨듣는 정성이 없는 듯하십니다.

무릇 대간·시종이 울린 소장(疏章)은 한번 신람(宸覽)을 거치면 곧 정원(政院)에 붙이고 다시는 보고 살피지 않으십니다. 성총(聖聰)이 물에 비추어보듯 털끝만큼도 놓치지는 않으시나, 충언(忠言)은 약과 같아서 오래 써야 깊은 병폐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채용할 만한 소장이 있으면, 좌우에 두어 단의육잠(丹扆六箴)15144)의 옛일대로 때때로 한번씩 펴보아 온서(溫書)15145)에 갈음하고 성려(聖慮)를 두어 채용할 방도를 생각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강석(講席)을 거두었을 때에도 어진선비를 대한 듯하고 한가히 계실 때에도 뭇 신하를 대하신 듯하여야 아래의 뜻이 위에 통달하고 아름다운 말이 숨어있지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발언(發言)이 뜰에 가득하고 소장이 책상에 쌓인들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생각하건대, 지금의 국세(國勢)는 원기(元氣)를 잃은 사람이 먹고 마시며 말하고 웃는 것은 여전하나 편작(扁鵲)15146)은 그것이 고질임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헛된 겉치레인 말단의 일은 예전에 보던 것과 다름 없으나, 원기가 위축된 것은 위에 아뢴 것과 같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맹자가 이르기를‘정성을 지극히 하면 감동하지 않는 것이 없다’하고,

또 ‘자기를 바루고서야 만물이 바루어진다’하였습니다.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루어 의리에 통철(通澈), 근본이 흔들리지 않게 함으로써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기미를 분별하여 체험하고 확충하는 소지로 삼으소서.

그리하여 자신에서부터 집과 나라의 일에 이르기까지의 언행(言行)과 정사(政事)는 물론 모든 일상의 행위와 사람을 기용하고 이끌어 씀에 있어서도 모두 정심성의에 입각하여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뜻이 없게 하소서.

실정(實政)에 나타나고 백성에게 베풀어진 것이 모두 헛된 겉치레가 아니고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지키는 것은 간략하되 미치는 것은 넓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국본(國本)이 길이 굳어져서 명위(名位)가 안정되고, 수령(守令)이 어루만지고 돌보아 백성이 소생하고, 궁곤(宮壼)15 147)이 엄하여 여알(女謁)이 그치고, 사기(士氣)가 떨쳐서 풍절(風節)이 높아질 것입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을 등용하고 미치지 못할세라 간언을 따르면, 쇠퇴하고 타락한 정치가 일변하여 새로와져서 맑고 밝은 정치로 돌아가서, 중화(中和)의 공(功)을 이루고 위육(位育)15148)의 보람을 이룰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천심(天心)이 돌이켜지지않아서 재변이 사라지지 않고 음양(陰陽)이 고르지 않아서 한서(寒暑)가 순하지 않을리는 없을 것입니다.

전에 사대부가 집안에서 음란한 짓을 하고 조정의 관원이 이서(吏胥)에게 모욕을 받아, 예교(禮敎)가 무너지고 명분(名分)이 어지러웠던 것은 다 풍화(風化)가 아름답지않은데에서 말미암았으나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다스리는 것은 한번 옮겨 운전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자질로 시종(侍從)으로 있으면서 눈으로 현재의 폐단을 보니 근심되어 잊혀지지 않고 마음이 속에서 격앙되어 차마 침묵한 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채납(採納)하소서”하니, 답하였다.

“이제 상소를 보니, 말한 것이 매우 마땅하다.

요즈음 재변이 거듭 나타나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상하가 살펴야 할 것이다. 그 중에 ‘대간·시종이 올린 소장(疏章)을 좌우에 두고 때때로 펴 보라’고 한 것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거니와 말한 것이 매우 마땅하다. 그러나 이 소장안에 거론된 일은 써서 좌우에 두고 수시로 살필 것이므로 낱낱이 답할 것 없겠다.

청궁(靑宮)15149)을 보양(輔養)하는 일은 지금 급한 일이므로 말할 것이 유익하다. 이제 듣건대, 세자(世子)는 주강만을 갖는다하니, 석강이나 야대(夜對)15150)가 없는 것은 사부(師傅)등이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는 것인가? 나이가 점점 많아지는데 어찌 강학(講學)을 그만두겠는가?

요즈음 시강원(侍講院)이 세자에게 진계(進戒)하는 말이 있는 것을 보지못하니 어찌 보양하는 부지런함이 있겠는가?

석강·야대의 일을 사부에게 일러야 하겠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나라의 근본이 날로 파리하여가는 것은 수령때문이며 출척(黜陟)이 엄하지않은 것은 방백(方伯) 때문이다. 유서(諭書)를 내린 것이 한갓 겉치레가 되었으니 어찌 마음아프지 않겠는가?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마땅함을 잃으면 국가의 치란(治亂)에 관계되니 전조(銓曹)를 맡은 자가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사기(士氣)가 꺾여서 현시의 재상(宰相)에 관계되는 일은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다면 어찌 폐단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註15113]지낭(智囊)을 등용하여 가령(家令)으로 삼고:지낭은 지혜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 한문제(漢文帝)때에 조조(鼂錯)가 가령(家令:태자(太子)의 가무(家務)를 맡은 벼슬)이 되었는데 말을 잘하는 것으로 태자가 괴어 지낭이라 불렀다. 조조는 자주 상서하여 변방의 대비등을 말하고 법령의 개정을 청한 것이 많았는데 경제(景帝:전의 태자)때에 많이 받아들여졌다. 조조는 사람됨이 각심(刻深)하고 권세를 부렸으므로 공경(公卿)·열후(列侯)·종실(宗室)들에게 미움받았다. 뒤에 오(吳)·초(楚) 지방의 7국(國)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조조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참형(斬刑)당하였다.註15114]박망(博望)을 개설하여 빈객(賓客)을 맞이하는 것:한무제(漢武帝)가 여태자(戾太子) 거(據)를 위하여 박망원(博望苑)을 세우고 빈객이 출입하게 하였다. 문제 맡기에 당시 권세를 부리던 강충(江充)이 무고(巫蠱)의 사건을 기회로 삼아 태자를 무함하였는데, 태자가 소부(少傅) 석덕(石德)의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강충을 죽이고 나서 패하여 자살하였다 註15115]삼선(三善):세가지 착한 일. 군신(君臣)·부자(父子)·장유(長幼)의 도리를 잘하는 것. 또 공신(恭信)하고 충관(忠寬)하고 명단(明斷)한 것. 또 남의 한가지 선을 보면 그 사람의 온갖 그른 것을 잊고, 남의 선을 보면 자기가 지닌 듯이 좋아하고, 선을 들으면 몸소 실행하는 것이다 註15116]용루(龍樓):한대(漢代) 궁정(宮廷)의 문 이름. 문루(門樓)에 구리로 새겨 만든 용이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지었다.註15117]계장(雞障):궁정의 안팎 경계에 세운 장벽인 듯하나 미상하다.註15118]초방(椒房):한대 황후(皇后)가 거처하던 전(殿)의 이름. 완기(暖氣)를 준다는 산초(山椒)를 흙에 섞어 발랐으므로 이렇게 이름지었다 한다.註15119]혼시(閽寺):내시.註15120]응문(應門):옛 궁정(宮廷)의 정문.註15121]격탁(擊拆):딱다기를 치며 경계함.註15122]고인(鼓人):주대(周代)의 벼슬이름. 육고(六鼓)·사금(四金)의 소리를 가르쳐서 음악을 절제(節制)하고 군려(軍旅)를 조화(調和)하고 전역(田役)을 바루는 일을 맡는다.註15123]여사(女史):기록을 맡은 여관(女官).註15124]동관(彤管):붓대가 붉은 붓. 여사(女史)는 이 붓으로 궁중의 정령(政令)과 후비(后妃)의 공과(功過)등을 적는다.註15125]여희(驪姬)가 한밤에 울고:춘추(春秋)때 진헌공(晉獻公)이 여융(驪戎)을 쳐서 이기고 잡아와 부인(夫人)으로 삼은 여희는 태자를 죽이고 자기 소생을 세우려고 꾀하였다. 태자가 어머니를 제사하고 그 술과 고기를 보냈는데, 6일동안 두었다가 헌공이 사냥에서 돌아오니 독을 타서 바쳤다. 술을 마시기 전에 땅에 부었더니 땅이 솟아오르므로, 개와 소신(小臣)에게 주어보니 모두 죽었다. 이때 여희가 울면서 “도둑이 태자로 말미암습니다”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태자를 지칭하지못하고 악한 자가 태자를 거쳐서 반역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헌공이 태자부(太子傅)를 죽였고, 태자는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자살하였으며, 헌공이 죽은 뒤에는 여희도 편살(鞭殺)되었다 註15126]소동(蕭同)이 대상(臺上)에서 웃고:제경공(齊頃公)때에 네 나라에서 사자(使者)가 왔다. 노(魯)의 계손행보(季孫行父)는 대머리, 진(晉)의 극극(郤克)은 애꾸눈이, 위(衛)의 손양부(孫良夫)는 절뚝발이, 조(曹)의 공자(公子) 수(手:首로 쓰기도 함)는 곱사등이였는데 제나라에서는 각각 같은 불구자를 시켜 인도하게 하였다. 소동질자(蕭同姪子:《사기(史記)》에는 소동숙자(蕭桐叔子)라 하였고, 두예(杜預)는 이를 풀이하여 ‘경공의 외조부인 소동숙의 딸, 곧 경공의 어머니’라 하였다)가 대상(臺上)에서 이 광경을 보고 웃었으므로, 사자들이 불쾌하게 여겼다. 이 일을 아는 제나라사람이 “제나라의 환난(患難)이 여기서 시작되리라”하였는데, 과연 뒤에 이들이 합력하여 제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註15127]정수(鄭褏)가 위매(魏妹)를 그르치려 코를 가리게 하고:정수는 정나라의 여자인데 초회왕(楚懷王)에게 와서 사랑받아 부인(夫人)이 되었고, 춤을 잘 추므로 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위(魏)나라에서 미인을 보내오매 회왕이 이 새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이 위매다. 정수는 짐짓 위매에게 거처나 일용을 특별히 가려주어 임금보다 더 아끼는 듯이 보여 질투하지않는 것으로 믿게 하고는, 위매에게 “임금이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나, 그대의 코를 싫어하니 임금을 뵈거든 반드시 코를 가리게”하니, 위매가 정순의 말대로 하였다. 회왕이 정수에게 “새 사람이 나를 보면 코를 가리니 무슨 까닭인가?”하매, 정수가 “임금의 냄새를 맡기 싫어하는 듯합니다”하니, 회왕이 노하여 위매의 변명도 듣지않고 그 코를 베게 하였다 註15128]여후(呂后)가 척씨(戚氏)를 시기하여 귀를 지졌는데:여후는 한고조(漢高祖)의 후이다. 고조가 한왕(漢王)이었을 때에 척씨를 얻어 사랑하여 조왕여의(趙王如意)를 낳았는데, 고조가 여후의 소생인 태자(太子:뒤의 혜제(惠帝)임)는 사람됨이 인약(仁弱)한데 여의는 자기를 닮았다하여 태자를 폐하고 여의를 세우려하였고, 척씨도 자기 소생을 태자로 세워달라고 임금에게 호소하였다. 뒤에 고조가 죽고 나서 여후가 척씨를 궁중의 옥에 가두고 수의(囚衣)를 입혀 방아를 찧게하였는데, 척씨가 방아를 찧으며 “아들은 왕이건만 어미는 수인(囚人)이 되어 저물도록 방아 찧어 사수(死囚)와 함께 있네. 3천리 떨어졌으니 누가 네게 알리랴?”라고 노래하였다. 이 일로 여후가 노하여 조왕 여의를 죽이려 하였는데, 혜제가 보호하였으나 틈을 타서 독살하였다. 그리고 척씨의 손발을 자르고 눈을 빼고 귀를 지지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굴속에 살게 하고 ‘사람 돼지’라 불렀다. 혜제가 사람돼지를 보고는 병이 나서 한해 남짓 앓았는데, 사람을 시켜 여후에게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나는 태후의 아들로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하고 정사를 돌보지않다가 7년만에 죽었다.註15129]여알(女謁:부인의 청탁.註15130]폐행(嬖幸):임금의 사랑을 받는 여자.註15131]내폐(內嬖):임금의 사랑을 받는 여인.註15132]당고(黨錮)의 화(禍):환제때에 진번(陳蕃)·이응(李膺)등이 당시 전권(專權)하던 환관(宦官)들을 크게 공박하였으나 환관들이 도리어 이들을 당인(黨人)이라 하여 종신금고(終身禁錮)에 처하고, 영제때에 두무(竇武)·진번등이 환관들을 죽이려고 꾀하였으나 모의가 누설되어 도리어 이들 1백여인이 몰살된 일을 말한다.註15133]조만(曹瞞):조조(曹操)의 어릴 때 이름이 아만(阿瞞)으로 조조를 낮추어서 부르는 말.註15134]구정(九鼎):하우왕(夏禹王)때에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만든 정(鼎:세 발과 두 귀가 달린 솥)인데, 하나라고도 하고 아홉이라고도 하며, 그 뒤로 천자(天子)의 보기(寶器)로 전하였다한다.“구정을 엿본다”는 것은 천자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는 뜻이다.註 15135]무오년:1498 연산군4년.註15136]갑자년:1504 연산군10년.註15137]중흥(中興):중종 반정을 가리킴.註15138]열수(列宿):하늘에 벌여있는 별들. 또 낭관(郞官)의 별칭으로도 쓴다.註15139]강사(强仕):40세가 되어야 비로소 벼슬하는 것. 사람은 40세가 되어야 지기(志氣)가 굳어 이해(利害)·화복(禍福)에 동요되지않으므로 벼슬할 수 있다는 뜻이다.註15140]환첩(宦牒): 관위(官位)를 기록한 문서이다.註15141]음재(蔭才):문음(門蔭)의 재주. 곧 과거(科擧)에 급제하지않고 부조(父祖)의 음덕(蔭德)으로 벼슬길에 오를 사람의 관리로서의 재능을 말한다.註15142]학궁(學宮):성균관(成均館).註15143]월자(刖者):발뒤꿈치를 자른 자. 여기서는 작은 신에 맞추기 위하여 발뒤꿈치를 자르는 것으로, 잘 하려다가, 주객(主客)이 전도되어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뜻이다.註15144]단의육잠(丹扆六箴):천자 뒤에 세우는 붉은 병풍에 쓴 6가지 경계. 당경종(唐敬宗)이 놀이를 자주 가고 소인들을 가까이하고 정사를 돌보지않으므로, 이덕유(李德裕)가 단의 육잠을 올려“정사에 부지런하고 의복을 바르게 하고 진기한 물건을 구하지말고 충언을 받아들이고 소인들을 쓰지말고 놀이하러 자주 나가지말 것”을 경계하였다.註15145]온서(溫書):글을 되익힘.註15146]편작(扁鵲):전국(戰國)때의 명의(名醫).註15147]궁곤(宮壼):왕비의 거처.註15148]위육(位育):상하가 다 제자리에 안정하고 만물이 충분히 생육하는 것이다.註15149]청궁(靑宮):세자.註15150]야대(夜對):임금이 밤에 불러서 경연(經筵)을 여는 것이다.

○弘文館副提學兪汝霖等上疏曰:

竊惟天人之應, 捷於影響。 事之得失, 異而應之, 休咎隨之, 故委靡、頹墮之政, 其應爲常燠; 苛暴、慘刻之政, 其應爲常寒。 末無寒歲, 亡無燠年。 天之示警於, 諄諄然至此, 而尙不覺悟, 終至於亡。 自古國家之勢, 不盛則衰, 衰則亂, 亂則亡。 亡非亡於亡之日, 其兆已見於不盛之日。 而明者先見而救之, 使不至於亡; 暗者懜然莫之知, 至于亡之日, 而知其亡。 要在人君畏天、謹災, 而畏天、謹災之實, 不過曰正心、誠意而已。 嗚呼! 正心、誠意四字, 足以變亂爲治, 轉災爲祥矣。 有誠正之功, 斯有誠正之效。 如投種于地, 種則必生, 理之必然也。 伏見頃年以來, 休祥不應, 災沴荐仍。 迄于今歲, 冬雷示異, 日珥告警。 節過至日, 暖氣如陽春, 腥霧如茅瘴。 是何殿下正心、誠意之功, 如是其難獲效耶, 國勢委靡, 漸至衰微; 治效蹇淺, 浸成卑汚。 日復日、歲復歲, 十年之後, 亦復何如, 當局昏忘而莫悟, 旁觀先知而竊笑。 未審宵肝憂勤, 其亦及此乎, 國儲、君副, 匕鬯攸主。 《春秋》書子同生, 重宗統也。 左右、前後無非正人, 出入、起居, 罔非正人, 所以導之有素也。 用智囊爲家令, 開博望延賓客。 豈輔之得其人, 處之擇其地乎, 周武王爲太子時, 好啗鮑魚, 太公以爲食不正而止之。 以肉不登俎也。 古人於飮食之際, 亦有敎養之方, 其薰陶、涵養至矣。 伏見靑宮一德, 聿隆三善, 緝熙之學, 日新又新, 然難明者理, 易昧者心。 斯須之怠, 其中卽遷。 宜與端人、正士, 講論義理, 不以佔畢訓詁爲主。 接賢、論學, 不拘時程。 或於淸讌之夜, 引對僚屬, 講究經義, 豈無進德之功, 況宗社所托, 臣民攸戴。 保護之方, 無所不至, 而頃者, 奸窺、邪伺, 情遁、迹露。 幸賴聖斷之明, 陰兇抵罪, 國是大定。 敢懷僥倖, 匿惡希恩, 一以窺朝廷之輕重, 一以覘殿下之淺深, 至有潛交、陰結, 作書市恩, 誘令上聞。 有識尙爾, 不逞可知矣。 所恃以慰人心者, 只爲聖意之堅定耳。 守令之任, 字牧是寄。 (慈祥)〔慈詳〕者少, 割剝者多。 民財有限, 漁奪無窮。 謟事津要, 苞苴絡繹。 萬口嗷嗷, 冤默無訴。 海嶺遐陬, 斑白遺民泣道, 成廟時事, 以爲其時守令, 猶有廉恥, 無甚貪饕, 頗有世宗之風。 一變而廢朝, 以至今時, 貪黷無恥極矣。 噫! 斯民之有斯言! 豈非聖朝之深恥乎, 夫今之守令病民者, 有三焉。 或持心似廉, 而才劣、器庸, 威不及吏胥, 爲弊滋大。 或稍有幹能, 而挾氣作威, 徵索太苛, 以充無厭之欲, 庫藏所儲, 蕭然一空。 或侵漁多端, 而不自奉己, 厚賂權貴, 以釣聲譽, 自以爲廉, 其病民一也。 是猶聚群羊而牧之, 以一狼, 恣其啖食也。 黜陟之權, 專付方伯。 方伯之職, 惟嚴殿最, 而暗者, 耳目所未及, 懦者, 威勢怵其心。 黑白混名, 東西異軌。 澄淸不可冀也。 龍樓、雞障之嚴, 桂殿、椒房之邃, 所以辨內外, 而謹出入也。 深宮固門, 閽寺守之; 應門擊柝, 鼓人上堂; 女史授環, 彤管記過; 無非所以正家也。 屋漏之幽, 天日照臨; 一念之邪, 神明降監。 驪姬夜半之泣, 蕭同臺上之笑, 鄭裒魏妹而掩鼻, 呂后戚氏而煇耳, 自以爲人所不聞、不覩, 而十目、十手, 共視、共指。 是故宮中之事, 外人皆知之。 女謁之行, 欲人之不知, 有同盜鐘而掩耳。 一有邪詞、詖說, 出入於梱, 則婦寺與政, 君心之非, 未能格矣。 往在廢朝, 泯泯棼棼, 嬖幸煽禍, 助成昏虐, 爵祿重權, 皆落其手。 頑鄙無恥之徒, 公然攀附, 諛處容下。 塵金帛, 做美官, 聞者至今唾罵。 所謂女謁者, 謂外言入于梱, 女寵盛于中。 譽言聞於耳, 奇技接于目。 姻婭覬求膴仕, 忠讜或遭疏斥。 爵命時出於濫; 國事日趨於非。 駸駸然如不善游者入於水, 愈入深淵而不能出也。 夫君子、小人, 辨之不難。 夤緣內嬖, 希望異渥者, 小人也; 獨立朝端, 確然自守者, 君子也。 明以察之, 淑慝自見矣。 養士氣, 所以養國脈也。 士氣之盛衰, 而治之隆替係焉。 西漢尙忠厚, 而忠厚之過, 終成諛侫之風, 至於上書頌者, 四百餘人。 東漢之興, 矯其枉而直之, 專尙氣節, 人才之盛, 蔚然可觀。 桓靈不君, 釀成黨錮之禍, 薙獮士類, 國隨以亡。 懲羹吹薤, 轉爲晋氏之淸談, 而淸談卒誤室。 夫培養士氣, 其好惡不可偏也. 比之建危竿者, 左偏則右傾, 右偏則左傾。 不左、不右, 正立不搖, 必有其道。 要之, 忠厚氣節, 不可偏廢, 而激頑起懦, 扶植風化, 莫先於節義。 士之立身, 以名節爲本, 立朝, 以正直爲本, 人主之養之, 正好惡、審本末, 短者而長之, 不足者而足之, 隨其變而正救之。 今日之養, 乃他日之報也。 武帝時, 淮南王欲反, 畏汲黯之節義。 獻帝之末, 曺瞞睥睨九鼎, 而猶欲享臣之名。 豈非黨錮諸賢, 視死如歸之力耶, 我成廟培養有道, 多土輩出。 至戊午、甲子, 芟夷殆盡。 士懲前軌, 俗成委靡。 中興之後, 振作二十餘年, 士氣摧沮, 不復自振。 有依阿、苟容之習, 無忠純直諒之風。 士大夫相對議國事, 俛首、帖尾, 相視其口, 莫敢先發。 一言事關時宰, 畏刼而不敢言。 軟懦者, 大獲時譽, 讜直者, 指爲癡漢。 雷同循默, 遂成衰俗。 竊恐靡靡之漸, 益復滋甚, 謇謇諤諤之士, 世不復見也。 殿下盍思所以致此之由乎, 設官、分職, 非其人, 莫可以熙庶績, 故明王, 官不及私昵, 爵罔及惡德。 孟子曰: “尊賢、使能, 俊傑在位, 則天下之士, 皆悅而願立於其朝矣。” 願治之主, 孰不欲選賢、擧能, 而常患於賢愚之倒置者, 明不能知其人, 用不能稱其才也。 如或所尊未必賢, 所使未必能、 非功而賞之, 非罪而斥之, 則安能摠理庶務, 綏寧生民乎, 百司庶官, 關曠居多。 懶慢成習, 翫愒度日。 綱(隋)〔墮〕紀裂, 勸懲不明。 銓衡之地, 惟循資差除之是急, 未聞有進廉、退貪之政。 倖門大開, 躁進尤甚。 郞官上應列宿, 而闒茸或有忝竊。 强仕自有年限, 而乳臭已登宦牒。 其試陰才也, 目不知半行書者, 皆與焉。 玆豈古者, 爲官擇人之本意, 久居學宮, 切磋有年, 閑遯于野。 才行可稱者, 未必無一二。 可用之百執事, 而甄拔之政, 廢而不擧, 是雖頃年紛擾之弊, 不幾於見刖者, 而廢天下之屨乎, 人主非, 不能無過、亦不能自知其過。 故哲后、興王, 從諫若轉圜。 欲其聞過而改之也。 然其改過之際少, 有出於黽勉, 而無樂聞之誠, 則鮮不至於愎諫。 以太宗魏徵君臣之間, 言無不從, 無復疑貳, 而猶曰: ‘會須殺此田舍翁。’ 卒至停婚、仆碑。 他尙何說哉, 責難於君, 謂之恭。 陳善閉邪, 謂之敬。 但責難之論, 易至犯顔; 閉邪之言, 類多逆耳。 順適者可善, 而觸忤者難容, 故陰擠顯遂, 稍稍遠去, 忠直不容於朝廷, 奸諛乘間, 而逞其術, 若然則國非其國矣。 自古人主, 以智術, 排擯諫臣, 其國必危。 可不戒哉, 逆耳者容之, 犯顔者奬之, 危言、激論, 日陳於前, 非人臣之利, 乃國家之福也。 伏見殿下於聽納之際, 屢有面從之色, 似非樂聞之誠。 凡臺諫、侍從所上章疏, 一經宸覽, 旋付政院, 不復觀省。 雖聖聰如水鑑照, 不遺毫末, 然忠言如藥石, 久服乃醫膏肓。 宜自今有章疏可採者, 置諸左右, 依丹扆六箴故事, 時一繙閱, 用代溫書, 凝留聖慮, 思所以採用之, 則雖輟講之際, 如對賢士, 燕居之時, 若臨臣庶, 庶幾下情達上, 嘉言罔攸伏矣。 不然, 雖發言盈庭, 積疏成案, 有何益哉, 臣等竊惟, 今之國勢, 如人之病元氣者, 飮食、言笑自若, 而扁鵲知其爲痼疾矣。 虛文、末節, 視曩昔無異, 而元氣萎薾, 如上所陳。 豈不寒心, 孟子曰: “至誠而不動者, 未之有也。” 又曰: “正己而後物正。” 苟能誠其意、正其心, 義理融澈, 根本不撓, 卞天理、人欲之幾, 爲體驗、擴充之地, 自身而家而國, 言行、政事之間, 動作、云爲之際, 擧而措之, 引而伸之, 皆自正心、誠意中來, 而無一毫私意之雜, 見諸實政, 施及群生, 類非虛文, 一以至誠, 則其操也約, 而其及也廣; 國本永固而名位定, 守令撫字而民生蘇; 宮壼嚴而女謁息, 士氣興而風節高。 用人惟其賢, 從諫如不及, 委靡、頹墮之政, 一變而新之, 歸之淸明之治, 致中和之功, 成位育之效。 如是而天心不回, 災沴不消, 陰陽不調, 寒澳不順, 必無之理也。 乃者, 士夫宣淫於帷薄, 朝紳受侮於吏胥。 禮敎以毁, 名分以紊。 皆由風化之不美, 而道以德、齊以禮, 只在一轉移、斡運耳。 臣等俱以無狀, 待罪侍從。 目覩時弊、耿耿懷憂, 情激于中, 不忍悶默。 伏願殿下採納焉。

答曰: “今觀上疏, 所言至當。 近者災變疊見, 豈不恐懼乎, 上下所當省察也。 其曰: ‘臺諫、侍從所上章疏, 置諸左右, 時時繙閱。’ 前有如此之事, 所言至當。 然此疏章內他事, 則書置左右, 予當省念, 故不須一一答之。 靑宮輔養之事, 當今急務, 所言有益。 今聞世子但有晝講, 不有夕講、夜對之事。 師傅等以爲年幼而如是乎, 年歲漸長, 豈廢講學乎, 近不見侍講院有進戒世子之言, 豈有輔養之勤乎, 夕講、夜對之事, 當諭于師傅也。 民者邦本, 邦本日瘁, 守令之故也。 黜陟不嚴, 方伯之故也。 委下諭書, 徒爲文具, 豈不痛哉, 用人失當, 係於國家之治亂。 爲銓曹者, 豈不察哉, 亦曰: ‘士氣摧沮, 事關時宰, 畏刼而不敢言。’ 實有如此, 則豈非爲弊也,”

중종 72권, 26년(1531 신묘/명가정(嘉靖)10년) 11월 19일(기사) 4번째기사

임금이 권병을 장악하여 정령을 세울 것을 청한 심언경·권예등의 상소문

대사헌 심언경(沈彦慶)과 대사간 권예(權예)등이 상소하였다.

“복(福)은 근본이 있는데서부터 반드시 커지고 화(禍)는 조짐에서 시작하여 반드시 만연됩니다.

화가 작을 때 삼가지못하고 커진 다음에도 다스리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못하고 끝내는 망하게 됩니다.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부지런히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기를 도모하시어 강구하지 않은 방법이 없었으니, 응당 나라가 편안하고 음양이 조화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 조정이 화합하지 못하고 사습(士習)이 착하지 못하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여 음양이 뒤바뀌어 재변을 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참으로 위복(威福)의 권한이 아랫사람에게로 옮겨지고 권병(權炳)이 다른 데로 옮겨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에 따라 추향을 달리하는데에 기인된 것입니다.

대체로 위복이란 임금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도구입니다.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 자루를 잡고 있어야 하고 잠시라도 남에게 빌려 주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근본을 잃으면 위에서는 허기(虛器)만을 안고 있을 뿐 아래로 권간(權奸)을 붙좇기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화가 곧 닥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충신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말을 다하면 명주(明主)가 곧 깨달아 권병을 총람(總攬)하는데에 그 관건이 달려 있습니다.

지난번 이항과 김극핍등은 본래 흉악한 자질로 경상(卿相)의 자리를 차지하여 박씨에게 빌붙어 세자[國本]를 위태롭게 할 비밀스런 음모를 거리낌없이 꾸몄습니다. 작서(灼鼠)의 변에 이르러서 그들의 정상이 드러났고 일이 종묘사직에 관계되었으므로 전하께 죄를 얻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죄의 괴수로서 거점 잃는 것을 분하게 여겨 위로는 전하를 원망하고 아래로는 공론을 두려워하더니, 마침내 위복(威福)을 몰래 펴고 언로(言路)를 막고자하여 먼저‘조광조(趙光祖)의 여습(餘習)이 있다’는 말을 꺼내어 전하의 마음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이는 지론자(持論者)를 일망타진하여 그들로 하여금 묵묵히 말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당시 대신들이 시비를 분별하지 않고 비호해주어 그들의 형세를 가중시켰습니다.

김극핍은 시세를 엿보고는 기회를 틈타 독기를 부려서 자기를 논박한 사람들을 드러내어 배척함으로써 위세가 성한 것을 보였습니다.

심정은 몰래 뇌물을 받고 기꺼이 그들과 교결하여 잇몸과 광대뼈처럼 서로 보존하는 형세를 이루어 간사한 무리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세 사람이 솥발처럼 자리잡아 그 기세가 하늘을 흔드니 충량(忠良)한 사람은 기개를 앗기고 간사한 사람은 영합하여 전일에 사류라는 사람들조차 종처럼 굽실거리며 그들의 사주를 받아 미처 못하면 어쩌나 하는 식으로 분주히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심복(心腹)이 내외에 널려있고 우익(羽翼)과 조아(爪牙)가 현요직(顯要職)에 바둑알처럼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원들의 전최(殿最)를 마음대로 하고 가까운 도(道)의 사나운 도적(盜賊)들과 교통하여 보호해 주었습니다.

【심정이 형조판서로 있을 때 살려준 대도(大盜)가 많았다】

이들을 탄핵하려 하면 대간이 거짓으로 놀라는 척하고, 글을 올려 저지하려 하면 간관이 승낙하지 않는 반면,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제거하려 도모하면 시종(侍從)이 바람에 쓸리듯 하였습니다. 위권(威權)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짓눌려 말을 못하고 전하는 고립되어 못듣게 되었으므로 위복의 큰 권한이 모두 세 간인(奸人)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종묘사직의 영령의 은밀한 도움과 전하의 예지와 성명에 힘입어 간사한 모의가 저절로 드러나 잇따라 외방으로 내쫓기니,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위복의 권한은 전하의 소유가 되지 못하고 또 다른데로 옮겨졌습니다.

때문에 조정이 날로 화합하지 못하고 사습이 날로 아름답지 못하고 인심이 날로 정해지지 않아서 군상(君上)의 정령(政令)을 허구(虛具)로 보게 됨에 따라 권간의 위복은 후일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지난날의 파리나 개같은 무리와 물여우나 독사같은 무리가 그 소굴을 잃고 뼈에 사무치는 분심을 품고, 임금이 널리 살려준 은혜는 망각한 채 권간들이 돌보아 감싸준 은혜만 생각하여 교묘한 말로 헐뜯고 백가지로 헤아려 흉모부릴 틈을 엿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이행은 자기를 논박한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자기의 지위를 잃지않을 비루한 계책으로 문족(門族)들을 두루 돕고 간악한 무리들을 옆에서 도와 정부(政府)를 턱끝으로 부리고 육조를 기세로 모아서 사림을 무함하여 자기의 터전을 다지려 하였으니, 어찌 마음만 참혹할 뿐이겠습니까?

역시 위복(威福)의 권한이 자기들에게 있는 것을 믿어서 입니다.

이제 성명께서 이를 통찰하여 그들을 차등있게 죄주는데 대소의 신료(臣僚)들은 흉악한 무리가 두려워 미리 뒷날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묵묵히 바라만 볼 뿐, 감히 시비하지 못하고 서로 경계하기를‘전후 권간의 흉악한 모의가 밝게 드러났으니, 그들의 정상으로 보면 죽여야 하고 그 죄는 징계해야 한다. 그러나 더없이 악하고 교활한 심정과 이항이 오히려 서북(西北)에 웅거하여 있으며, 저토록 많은 이행의 문당(門黨)이 조정에서 분심을 품고 있으며, 조계상은 잇따라 왕실(王室)과 혼인을 맺었으며, 김극성은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잡고 있으니, 모두 난을 일으킬 수 있다.

심정과 이항 두 사람만으로도 조정을 다시 어지럽힐 수 있는데, 더군다나 심정·이항보다 배나 많은 숫자인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런 때를 당하여 대신으로서 구제하지 않는다면 훗날 원망이 돌아올 것이고 소신(小臣)으로서 과감하게 말한다면 후일 멸망될 근본이 될 것이니, 차라리 나라를 저버릴지언정 어찌 감히 권신의 비위를 건드릴 수 있겠는가?’하고는 친척들에게만 이런 말로 경계할 뿐만 아니라 붕우(朋友)에게도 이런 말로 뒤에서 말립니다. 심지어는 동료들과 일을 의논할 때에도 일단 권간이 노여워한다는 말을 들으면 뒷날의 처지를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려 얼굴빛을 잃고 망설이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아! 전하의 위복의 권한이 이미 이렇게 옮겨갔으니, 국가의 대세(大勢)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데 어떻게 조정이 화합할 수 있고 사습이 아름다와질 수 있고 인심이 안정될 수 있겠습니까?

양호(陽虎)가 큰 활을 훔치자《춘추(春秋)》에서 이를 미워하였고16372), 중해(仲奚)가 번영(繁纓)을 청하자 공자(孔子)가 이를 중하게 여겼습니다. 16373) 보기(寶器)는 하찮은 물건인데도 옛사람들이 오히려 이처럼 삼갔는데, 더군다나 임금의 권병(權柄)을 앗아다가 권신에게 맡겨 사용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유식한 선비들은 모두‘조정에 사람이 없어 전하를 고립시켰다’고 하니, 심히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빨리 위복의 권한을 잡으시어 전하의 형상(刑賞)을 만드시고 명분을 바루어 군신의 계급(階級)을 분명히 하시고, 천지(天地)의 인(仁)을 넓히시어 충후(忠厚)의 체(體)를 삼으시고 자강(自强)의 용기를 분발하여 강대(强大)의 용(用)을 삼으소서.

재상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임무를 다하도록 책임지우되 전하께서 머리가 되어 운용하시고, 대간에게 이목(耳目)의 규찰을 다하도록 책임지우되 전하께서 주사(主司)가 되어 운용하소서.

문의(文義)의 말단에 견제받지 마시고, 평상적인 것에 구애되어 우유부단하지 마소서. 죄에 알맞게 처벌하시면 위엄이 우레같이 울리고 공(功)에 맞게 상을 주시면 자애가 봄볕처럼 따뜻해져서, 벌과 상이 알맞게 되어 기강(紀綱)이 확립될 것입니다. 위복(威福)의 권한이 모두 상에게 있게되면 장차 정부가 도를 논하고 육경이 직임을 잘 수행하고 대간이 바른 말하기를 좋아하고 시종(侍從)이 임금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비로소 권병이 전하의 것이 되면 조종(祖宗)의 성업(盛業)을 다시 떨치게 될 것이요, 저 권간들의 옷깃에 빌붙어 정사를 어지럽히던 무리들도 마땅히 마음을 고쳐 전하의 형상(刑賞) 안에서 분주히 봉명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므로 조정은 화합하지않으려 해도 저절로 화합되고 사습은 착하게 하려하지않아도 저절로 착해지고 인심은 안정시키려하지 않아도 저절로 안정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크게 교활한 사람이 조정에 말을 붙여 위복의 권한이 끝내 상께 돌아갈 때가 없어 망할 날이 곧 닥치게 됩니다.

옛날 자가기(子家羈)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계씨(季氏)와 맹씨(孟氏)가 전횡했고,16374) 안영(晏嬰)의 계책이 쓰이지않아 여러 전씨(田氏)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고,16375) 왕장(王章)과 매복(梅福)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왕씨(王氏)가 성해졌으니,16376) 서리가 내리면 얼음이 얼 징조인데 두려운 일이 아니겠으며 경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는 손흥종(孫興宗)등이 권신에게 빌붙은 죄를 다스릴 때 무거운 법으로 처단하려 하였습니다. 이는 조종께서 큰 권병을 잡으시고 미리 은미한 조짐을 막으려는 뜻이었습니다.

신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지만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습니다.

전하의 고립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종묘사직이 위태로와진 것을 민망하게 여긴 나머지 말이 여기에 이른 것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답하였다.

“이제 상소를 보니 지금의 병통을 잘 말하였다. 마땅히 심중에 품어두고 유념하겠다. 근래 국시(國是)가 완전히 정하여졌는데도 시끄러운 논의가 그치지않고 있으니 재변이 생기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가?

이 상소를 마땅히 가까이에 두고 더욱 더 성념(省念)해야 되겠다.”

註16372]양호(陽虎)가 큰 활을 훔치자《춘추(春秋)》에서 이를 미워하였고 :양호는 춘추시대 노(魯)나라 권신인 계손씨(季孫氏)의 가신(家臣)이다. 양호는 후에 그의 주인 계손씨를 대신하여 노나라의 권력을 잡았는데, 그가 노나라의 보옥(寶玉)과 대궁(大弓)을 훔치자, 공자(孔子)는 《춘추(春秋)》에다 “도둑이 보옥과 대궁을 훔쳤다”하고 크게 써서 그의 죄를 밝혔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정공(定公)8년9월.註16373]중해(仲奚)가 번영(繁纓)을 청하자 공자(孔子)가 이를 중하게 여겼습니다:중해는 춘추시대 위(衛)나라 대부 중숙우해(仲叔于奚)를 말한다. 위나라와 제(齊)나라의 싸움에서 위급하게 된 손환자(孫桓子)를 중숙우해가 구해 주었다. 위나라에서는 그 공으로 고을을 떼어 상으로 주려하자 중숙우해는 사양하면서 번영(繁纓)을 청했다. 번영이란 제후(諸侯)들이 쓰는 말의 뱃대끈이다. 그래서 그 청을 들어주었는데, 공자는 그 말을 듣자 “애석한 일이다. 많은 고을을 떼어줄 지언정 명기(名器)는 남에게 빌려줄 수 없는 것이다. 남에게 빌려주면 정치가 어지럽게 되고 따라서 나라도 망하게 될 것이다”하였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성공(成公)2년.註16374]자가기(子家羈)의 계책을 쓰지않았기 때문에 계씨(季氏)와 맹씨(孟氏)가 전횡했고:자가기는 노(魯)나라의 어진 대부(大夫)다. 계손씨가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자 노소공(魯昭公)은 계씨를 치기로 하였다. 궁지에 몰린 계씨가 소공에게 조건을 내걸면서 포위를 풀어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자가기는 그 조건을 들어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소공은 이를 거절하고 싸우다가 패하여 제(齊)나라로 쫓겨가야만 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조공(昭公)25년.註16375]안영(晏嬰)의 계책이 쓰이지않아 여러 전씨(田氏)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고:안영은 춘추시대 제(齊)나라 대부인데 안평중(晏平仲)이라고도 한다. 제의 집권자 경봉(慶封)이 진씨(陳氏:후에 전씨(田氏)가 됨)와 포씨(鮑氏)의 세력을 꺾는다며 안영에게 군사를 청했다. 그러나 안영은 이에 반대하였는데, 경봉은 고집하다 패하여 노나라로 피하고 이 때부터 제나라에 전씨(田氏)의 세력이 강성해졌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28년.조공(昭公)10년.註16376]왕장(王章)과 매복(梅福)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왕씨(王氏)가 성해졌으니:왕장은 한(漢)나라때 사람으로 외척(外戚) 왕씨(王氏)들의 횡포를 배척하다가 왕봉(王鳳)의 미움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매복(梅福) 역시 한나라 때 사람으로 왕씨들이 권력을 잡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후에 신선이 되었다한다. 그후 마침내 왕망(王莽)이 신(新)나라를 세웠다

○大司憲沈彦慶、大司諫權輗等上疏曰: “

福因基而必大, 禍有漸而必蔓。 旣不能謹之於微, 而又不能治之於後, 則國非其國, 而終至於亂亡矣。 殿下臨御以來, 宵旰孜孜, 礪精圖治者, 無所不用其極, 宜乎國家寧謐, 陰陽調和, 而近年以來, 朝廷不和, 士習不淑, 人心不定, 以至干陰陽而召災沴者, 良由威福下移, 而柄有所歸, 利害懸殊, 而人有所趨也。 夫威福者, 人主之所以生殺與奪, 而率厲一世之具也。 居其位、操其柄, 不可斯須, 而假人也。 苟失其本, 則上擁虛器, 下附權奸, 危亡之禍, 可立而待也。 唯在忠臣不愛死而盡言, 明主(及)〔乃〕覺悟而總攬耳。 頃者李沆金克愊等, 本以虺蜴之資, 濫居卿相之位, 黨附朴氏, 圖危國本, 陰謀密計, 無所不至。 及灼鼠變發, 情狀敗露, 事關宗社, 得罪殿下, 則自以罪魁, 失據怏忿, 上怨殿下, 下懼公論, 遂欲竊張威福, 杜塞言路, 首發光祖餘習之說, 以試殿下之淺深。 蓋欲網掩持論之人, 使之喑啞莫言, 而當時大臣, 不辨是非, 營救佑助, 以增其勢。 克愊窺揣時勢, 乘機肆毒, 顯斥駁己之人, 以示淫威之盛。 彼, 陰受賄賂, 甘心締結, 輔車相依, 作爲奸魁。 三人鼎居, 勢焰掀天, 忠良奪氣, 侫邪趨風, 前日之名爲士類者, 亦且奴顔婢膝, 反爲其用, 奔走承事, 猶恐不及。 於是腹心耳目, 布列內外, 羽翼爪牙, 碁布顯要, 方面殿最, 頷可等第, 近道劇賊, 交通護全。沈貞爲刑曹判書時, 所活大盜者多。】言逼門黨, 則臺諫佯驚, 折簡抵止, 則諫官無諾, 謀去異己, 則侍從風靡, 威權至此, 惟所欲爲耳。 臣僚鬱抑而不言, 殿下孤立而不聞, 威福大權, 盡歸於三奸之手矣。 尙賴宗社默祐, 殿下睿聖, 奸謀自敗, 相繼竄外, 一國臣民, 罔不稱快, 而然所謂威福之權, 則亦不爲殿下之有, 而又移於他矣。 由是朝廷日益不和, 士習日益不淑, 人心日益不定, 君上政令, 視爲虛具, 權奸威福, 希望後日。 於是前日之蠅營、狗聚之輩, 鬼蜮、蝮蛇之徒, 失其窟穴, 怏怨切骨, 忘君父洪造之恩, 變權奸畜舐之惠, 巧言詆辭, 百計比方, 覬逞兇謀, 而李荇惑於駁己之飛語, 遽生患失之鄙計, 門族周助, 奸黨旁贊, 頤合政府, 氣聚六曹, 構陷士林, 以爲己地。 豈但其心之慘酷, 亦恃威福之在我耳。 今者聖明洞照, 罪責有等, 而大小臣僚, 怵於凶邪之衆, 預爲後日之地, 緘口擊視, 莫敢是非, 私相戒之曰: ‘前後權奸, 凶謀昭然, 情可誅也, 罪可懲也。’ 然而之毒猾何如, 而猶據西北, 李荇之門黨何如, 而蓄忿在朝, 繼商之聯姻王室, 克成之久處兵權, 皆足以致亂而作虞也。 二人耳, 猶能激朝廷再亂。 況數倍於者乎, 當此之時, 大臣不救, 則爲異時歸怨之府, 小臣敢言, 則爲後日糜粉之資。 寧負公家, 何敢忤權臣, 不但親戚以此戒之於家, 朋友亦且止之於後, 甚至寮宷議事, 一聞權奸之怒, 深懼後日之地, 狼顧失色, 枝梧不決。 嗚呼! 殿下之威福已移, 國家之大勢可知也。 如此而朝廷安得而和, 士習安得而淑, 人心安得而定哉, 陽虎竊大弓, 而《春秋》惡之, 仲奚請繁纓, 而孔子重之, 寶器細物, 古人猶謹。 況替人主之柄, 任權臣之用哉, 有識之士皆曰: ‘朝廷無人, 致殿下孤立。’ 豈不深可痛哭哉, 伏望殿下, 亟欖威福, 以爲殿下之刑賞; 正示名分, 以截君臣之(陛)〔階〕級, 廓天地之仁, 以爲忠厚之體, 奮自强之勇, 以爲强大之用。 責宰相盡經邦之任, 而殿下爲元首而運之; 責臺諫竭耳目之司, 而殿下爲主司而用之。 勿牽制於文義之末, 勿優游於循常之拘。 罪當其罪, 則雷霆以震之, 賞當其功, 則春陽以煦之。 刑賞得中, 而紀綱立。 威福之權, 盡在於上, 則將見政府論道, 六卿奉職, 臺諫喜謇愕之言, 侍從盡啓沃之責, 始爲殿下之有, 而復振祖宗之盛矣。 彼枝附葉著, 變白亂黑之徒, 當革心易面, 奔走殿下, 刑賞中之不暇, 朝廷不期和, 而自和, 士習不期淑, 而自淑, 人心不期定, 而自定矣。 不然則巨猾接迹於朝廷, 威福之權, 終無歸上之時, 亂亡無日矣。 昔子家覇之策不用, 而季孟顓, 晏嬰之計不行, 而諸大; 王章梅福之言不納, 而王氏成。 履霜堅氷, 可不懼哉, 可不戒哉, 我太宗大王, 治孫興宗等附權臣之罪, 欲置重典。 此祖宗操持大柄, 謹微防漸之意也。臣等俱以無狀,職在言列,痛殿下之孤立,憫宗社之將危,不覺言之至此。伏願殿下留心焉。

答曰: “今觀上疏, 正中時病, 當留念服膺。 近來國是大定, 囂議不止, 災變之生, 豈非昭昭乎, 此疏當置座右, 更加省念。”

중종 76권, 28년(1533 계사/명가정(嘉靖)12년) 11월 16일(갑인) 2번째기사

비현각에서 야대하여 조정의 폐단등을 논의하다.

비현각에 나아가 야대하였다. 검토관 구수담(具壽)이 아뢰기를,

“한왕(漢王)이 초기에 인(印)을 새겨 육국(六國)을 세우려다가17015) 장양(張良)의 간언을 듣고 즉시 그만두어 끝내 대업(大業)을 성취하였습니다. 좋은 말을 들으면 즉시 따르고 옳지 못한 말을 들으면 즉시 그만두는 것이 인주(人主)의 미덕(美德)입니다.

대개 이 세상 모든 일이 이미 잘못 되어버린 뒤에 바로잡으려 하면 1백갑절의 힘을 쓰더라도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니, 폐단이 한가지라도 생기면 반드시 그 폐단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우선 규명해야만 쉽게 막을 수 있습니다. 그 폐단을 바로 잡을 생각만 하고 그 폐단의 근원처를 밝혀내지 않는다면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근래 조정이 정령(政令)을 내리고 상벌을 시행함에 있어 인심과 선비들의 기풍에 좋지못한 폐단이 보이는데, 그것이 일시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두 유래가 있습니다.

나이 젊은 무리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아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요즘의 폐단을 지적하자면 많습니다.

우리 조정의 기풍(氣風)은 선왕들께서 지극히도 배양하여 왔는데 연산에 이르러 10여년동안 정령과 제도와 기강이 남김없이 탕진되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조(聖朝)에 이르러 폐단을 아시고 잘 바로잡으셨으므로 폐조때의 인심과 선비의 습속이 한결같이 옛모습으로 변하였고 기강 역시 뒤이어 떨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사람들은【기묘년 사람들을 지적한 것임】 옛일만을 알 뿐 시의(時宜)에는 어두웠는데 상께서 그들의 간언이라면 물흐르듯 순응하셨기에 그들로서는 이제 명주(明主)를 만났으니 역량을 다 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옛것을 참작하여 지금에 맞도록 활용할 줄을 모르고 모든 일을 과격하게 처리하다가 인심을 격발하기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친 일이 많았으므로 그 사람에게 죄를 주어 그 습속을 고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인들 어찌 손상된 것이 없었겠습니까? 그들의 본심을 말한다면 염치를 중히 여기고 학문을 숭상하여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하려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는 탐오의 풍습이 없었고 외방에는 청탁하는 일들이 적어 민폐가 없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그르쳤기 때문에 그들에게 죄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겐 죄를 내렸다하더라도 염치를 중히 여기는 풍습이 좋은 것이라면 그것을 배양하여 존속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고, 학문을 숭상하는 풍습이 좋은 것이라면 그것도 배양하여 존속시키는 것이 옳을 것인데, 그 후로는 그들때문에 그 일까지 폐기하여 한때나마 법도를 지키는 자가 있으면 그를 지적하여 그 무리라 하여 배격하므로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책을 끼고 다니는 자만 있어도 그를 그들의 당여로 지목하여 배척하므로 학문하는 사람이 없게 되어 염치는 없어지고 탐오의 풍습이 생겼습니다. 한때 국가에서 쓰기 위하여 길러 놓은 대간과 시종까지도 거의 모두가 폐습을 빙자하여 외방에 나아가 자기 실속을 챙기려 들고 사기는 시들대로 시들어서 그럭저럭 세월이나 보낼 뿐 유자(儒者)의 기상이라곤 전혀 없이 벼슬자리나 찾고 다니는 실정이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폐습을 바로잡는 것이 지나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폐단들이 어찌 일시적인 잘못에서 온 것이겠습니까? 그 유래를 따져보면 오랜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지당하다. 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좋은 점까지 싸잡아 폐기한 꼴이 되었다. 조광조(趙光祖)의 일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취할 만한 일이 왜 없었겠는가?

만약 그 사람을 그르다하여 그가 하던 일까지 폐기한다면 끝에 가서는 더 큰 폐단을 초래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바로잡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하였다.

수담이 아뢰기를,

“나무를 심는 자도 10년 후에 쓸 것에 대비하여 심는데, 인재를 배양하는 일이 일시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묘년간에 배양의 공이 많았으므로 행한 일들은 잘못되었어도 인재는 많이 배출되었던 것인데, 그로부터는 권간들이 권세를 잡아 위세와 복록을 멋대로 쓰고 있으니, 상께서 그 폐단의 유래를 아신다면 바로잡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하고,

사경(司經) 이준경(李浚慶)이 아뢰기를,

“구수담이 한 말은 일찍이 신과 함께 논의했던 말입니다.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 일조일석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국초(國初) 세종조(世宗朝)때 배양의 공이 많았으므로 인재가 극히 성했는데, 세조에 와서 변란을 겪는 동안 선비의 무리가 많이 죽었으므로 사기가 꺾였습니다.

그 후 세조가 배양에 힘썼지만 인재가 그리 많지 않았다가, 성종조에서 배양의 공이 많았으므로 문학(文學)의 선비들이 배출되어 문장도덕(文章道德)이 찬연하여 볼 만하였습니다.

그 일시의 인물들이 두터운 은총만을 믿고 충성스럽고 곧은 말을 다하다가 폐조를 만나서는 선비가 모조리 섬멸되어 조정이 텅비었던 것입니다.

그 후 반정(反正)하고 나서 다시 배양의 공이 많아 인재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때 인물들은 모두 반정 후에 배양된 인물들입니다. 나이 젊은 무리들이 성명(聖明)하신 임금을 만나 당우(唐虞)의 시대를 오늘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잘못 처리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부득이 그들에게 죄를 내렸지만 국가로 보아 잃은 것이 많았으며 사기가 꺾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인재양성이 어디 그리 쉽게되는 일입니까? 지난번 이기와 김형 사건에 대하여 하교하시기를‘조종조에는 사대부에게 중죄를 내린 일이 드물었다’하고, 또‘간사한 모략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사형을 감한들 어떨 것이며, 그 모략에 현혹된다면 날마다 중죄로 다스리더라도 소용 없는 일이 될 것이다’하셨는데, 그 상교가 지당하여 아랫사람들로서는 감격하지않은 자 없었으며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이기나 김형이 들었어도 반드시 감격했을 것입니다.

소인이 아무리 있어도 성상의 마음만 확고하시면 사특한 말이 발동되지 못하고 자연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부터 성명한 임금은 소인들을 멀리하였을 뿐 꼭 죽이려 들지 않았습니다.

김형과 이기 사건만 하더라도 상께서 확고한 신념만 가지시면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기묘년 사건도 당초 그 사람들이 그르다 하여 폐단을 지나치게 바로잡은 것이 도리어 폐단이 되어 마침내 권간이 뜻을 얻고 거리낌 없이 방자한 행동을 일삼다가 끝내는 법률의 저촉을 받았는데, 그 때에 상의 신념만 확고하셨다면 어찌 권간의 사건이 있었을 것이며 또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김형과 이기를 지적한 것이다】

대체로 소인은 없는 시대가 없으나 위의 마음만 확고하다면 자연히 자취를 감추어 꼭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성묘(成廟)시대에는 풍속이 순후하여 조정 선비로서 죄에 저촉되어 죽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성종이 임사홍(任士洪)을 죽이지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폐조(廢朝)의 화란을 남겼다’하지만, 그 말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종께서 죽이지않았던 것은 그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홍이 살아있더라도 성묘와 같은 성명(聖明)이 계셨으니 1백명의 사홍이 있을지라도 어디 독(毒)을 뿜어낼 틈이라도 있었겠습니까?

폐조가 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홍의 간교한 술책이 끝내 큰 화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체로 소인을 다 죽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임금의 신념이 확고하다면 술책을 부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금번 전교를 보고 아랫사람으로서 감격하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니 이야말로 후세 임금들이 마땅히 모범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하고,

수담은 아뢰기를,

“형륙(刑戮)이란 정치의 보충 도구로서 죄를 범한 자가 있을 때 부득이 쓰기는 할 것이나, 형을 쓰는 사이라도 살리기 좋아하는 마음만은 언제나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하고,

준경은 아뢰기를,

“살리기 좋아하는 덕(德)은 어느 때고 없지 아니하여 곳곳에 나타나고 있으나 그것이 언어에 나타났을 때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제명왕(聖帝明王)으로서 마땅히 살펴야 할 일입니다”하고,

수담은 아뢰기를,

“성종조때는 형륙을 드물게 썼으므로, 김견수(金堅壽)의 아들 맹광(孟光)이 잘못한 일이 있어서 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성종께서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가를 물어 시종이 김견수의 아들이라고 하자 성종께서‘김견수라면 바로 지난날 2품으로 절도사를 지냈던 구임인(久任人)인데 그의 자식이 죄를 범하였더라도 어떻게 차마 형을 가하겠는가?’하시고는 그대로 관용을 베푸시어 그 당시 미담으로 남았습니다.

이렇게도 살리기 좋아하는 뜻이 지극하셨습니다”하고,

참찬관 조인규(趙仁奎)는 아뢰기를,

“모든 일이 시작을 삼가지 않으면 말류(末流)에 가서는 모든 폐단이 생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털끝만큼 틀렸던 것이 종말에 가서는 1천리나 차이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기묘년 때의 사람들이 지나치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 적용한 법 역시 너무 지나쳐서 취할 만한 일이 있어도 그쪽 사람이라하여 쓰지않았기 때문에 풍속까지 따라서 변해버렸으니, 그것이 어디 옳은 일이겠습니까?

모든 일은 시작할 때 계획을 잘 세워야 하는 것이니 인재를 임용하는 일도 처음에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인재를 배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인재를 아꼈는데 소식(蘇軾)이 출척(黜斥)당하자 신종은‘인재를 오래 묵혀둘 수 없다’하고 드디어 기용하였으니, 임금은 그 말을 거울삼아야 할 것입니다”하고,

준경은 아뢰기를,

“인재를 배양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요즘 와서는《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세상에서 크게 금하여 그 책을 끼고 다니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기묘의 무리로 지목하여 비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묘때 사림이라 하여 모두 꼭《소학》과 《근사록》을 읽었던 것도 아니련만 그 뒤의 사람들이 그때 사람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런 유라면 모두 칼질을 하여버립니다. 가령 기묘년때의 사람들이 좋지못하다고 하더라도 그 책이야 나쁠 것이 뭐 있습니까?”하고,

수담은 아뢰기를,

“《소학》과《근사록》은 꼭 배워야 할 책인데도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보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찢어서 벽이나 바르고 배우려들지 않으니, 그게 큰 폐단입니다. 또 신이 명을 받들고 어사(御史)로 경기 내의 군현을 순찰하였는데 민폐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천(利川)에서 광주(廣州)로 돌아올 때 경안역(景安驛) 5리쯤 거리에 10여리에 뻗친 전지(田地)가 구릉으로 황폐되었고 그 사이에는 1백여호에 달하는 인가(人家)가 철거되어 폐허로 되어 있기에, 신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곳의 패망 원인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곳 사람이 설명하기를‘안처겸(安處謙)이 그 땅에 농장을 개간하기위하여 근처의 사람들과 향도계(鄕徒契)를 만들고 다음해에 역사(役事)를 하려고 하였는데, 때마침 처겸의 난(亂)이 터지는 바람에 그곳 사람들이 혹은 죄를 입고 철거되기도 하고 혹은 도망가고 흩어져서 심지어 개나 닭까지도 모두 없어지고 말아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역(大逆)사건으로서 국가가 이미 그 죄를 정한 것인데, 이렇게 아뢰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고 이처럼 밝은 세상에 혹시 애매한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어서입니다”하고,

준경은 아뢰기를,

“대역죄에 대하여는 말할 수 없으나, 그 고장에 살던 사람들이 향도계를 하기 위하여 모여든 것이지 선비 무리로서야 그의 역모를 듣고 따른 자 과연 몇이나 되었겠습니까?

다만 전일 그의 아비가 재상으로 있을 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책을 만들고 이름을 적어 두었을 뿐이었는데 그 죄가 워낙 컸기 때문에 옥석(玉石)이 가려지지 못하고 모두 패망했던 것입니다”하고,

수담은 아뢰기를,

“그 죄가 너무 커서 가볍게 논의할 수는 없으나 성종조 경오년17016)에 성삼문(成三問)에 연좌된 4∼5촌들이 모두 정배당했는데 때마침 가뭄이 심하여 별도로 야대(夜對)를 하면서 재이(災異)에 대하여 묻자, 채수(蔡壽)등이 답하기를‘경오년간의 사건이 죄가 크기는 하였으나, 서로 얼굴도 모르는 4∼5촌까지 모조리 정배하였는데 동모자(同謀者)라면 그만이거니와 4∼5촌이야 애매한 자가 어찌 없었겠습니까?’하니 성종께서‘내 생각에도 의심되는 것이 있다’하고 드디어 석방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이런 일들은 아뢰기 어려운 일들이나 신들의 소견을 아뢰었을 뿐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애매한 자가 어찌 없었겠는가? 안처겸 집을 수탐(搜探)할 때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책을 발견하고는 그들이 모두 동모자인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쓰여있는 자중에는 상중에 있는 사람도 있었고 외방에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참으로 동모를 했다면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내 생각에도 자못 의심이 가는 일이다. 다만 그 죄가 너무 컸기 때문에 풀어주지 않은 것인데 거기에 혹 이름이나 자(字)가 적혔다하여 무조건 죄에 걸렸던 그 일만은 과연 의심이 가는 일이다”하였다.

수담이 아뢰기를,

“신이 보았던 1백여호도 어찌 그들이 다 동모했겠습니까? 그 사이에는 애매한 일도 있었으리라 생각되었지만 큰 죄에 관계된 일이라 정식으로 아뢰지는 못하고 소견만을 말했을 뿐입니다”하니,

말이 끝나자 술 석잔을 내렸다. 물러가려 할 때 상이 이르기를,

“성종조에서는 혹 야대때 경연관(經筵官)으로 하여금 역대 제왕의 치란과 흥망에 관계된 일에 대해 서로 강론하게 하여 한 사람이 묻고 한 사람은 대답하였는데 그게 매우 좋은 일이었다.

지금도 승지는 묻고 경연관은 대답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인규가 묻기를,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시대에는 별로 법도(法度)가 없었고 요(堯)와 순(舜) 이후에야 비로소 법도가 있어 말할 만합니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다’하였는데, 사람의 허령(虛靈)한 지각(知覺)은 누구나 똑같은데도 사람에 따라 선과 악이 있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하니,

수담이 답하기를,

“복희시대에는 서계(書契)가 처음 나와서 인문(人文)이 밝기만 하다가 요와 순때에 와서는 공경스럽고[欽] 통명하고[明] 문채가 찬연하고[文] 의사가 심원하고[思] 천성을 자연 그대로[安安] 유지했다고 하는데, 이른바 흠(欽)이란 《서경(書經)》을 폈을 때 제일의 의의를 가진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태극(太極)의 이치를 받을 때 이오(二五)17017)의 정기가 묘하게 결합되어 태어났으므로 자연 허령하고 지각이 있어 마음속에 있는 성정(性情)이 겉으로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性)을 말할 때는 누구나 다 선한 것이므로 맹자(孟子)도‘사람은 선하지않은 사람이 없다’하였던 것입니다.

성은 누구나 선하지만 그것이 발동(發動)한 뒤에는 선과 악이 구별됩니다. 인심과 도심이 같지않은 것은 인심은 형기(刑氣)의 사사로움에서 발현되고 도심은 의리(義理)의 올바름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와 순은 의리의 성을 그대로 간직했기 때문에 상지(上智)의 성(聖)이 되었고 탕(湯)과 무왕(武王)은 중(中)과 극(極)을 세워17018) 노력 끝에 그 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하였다.

인규가 묻기를,

“인심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발현되고 도심은 의리의 올바름에서 발현된다고 하였는데, 거기에서‘위태롭다’‘은미하다’한 것은 무엇입니까?”하니, 수담이 답하기를,

“인심은 형기(刑氣)에서 발현되는 것이므로 사사로와지기는 쉬워도 공정해지기는 어렵기 때문에 위태롭다고 한 것이고, 도심은 의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밝아지기는 어렵고 어두워지기가 쉽기 때문에 은미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움직이지않고 있을 때는 마치 거울처럼 맑고 저울대처럼 조금도 기울지 않으므로 모든 사물(事物)을 응접(應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형기에 의해 혼동되지 않고 의리의 올바름을 응접(應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자(天子)가 어질지 못하면 사해(四海)를 보전하지 못하고, 제후(諸侯)가 어질지 못하면 종묘(宗廟)를 보전하지못하고, 경대부(卿大夫)가 어질지 못하면 선조(先祖)를 보전하지 못하고, 사서인(士庶人)이 어질지 못하면 사체(四體)를 보전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모두가 위태로운 인심이 작용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하였다.

인규가 말하기를,

“역대의 치란과 흥망이 같지않았던 것은 왜 그렇습니까?”하니,

수담이 답하기를,

“임금의 한 마음은 바로 사해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그 마음이 바르면 다스려지고 바르지못하면 어지러워집니다. 당(唐)·우(虞)·삼대(三代)시대 임금들은 한 마음을 사해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아 바름을 그대로 얻었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바름을 잃지아니하여 치화(治化)를 이루었고, 삼대 이하의 임금들은 마음이 바르지 못하여 혹은 토목(土木)을, 혹은 성색(聲色)을, 혹은 잡된 술수를, 혹은 노장(老莊)의 학술을 좋아하였습니다. 한(漢)나라는 기본 강령은 올발랐으나 모든 제도가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당(唐)나라는 모든 제도는 갖추었으나 기본 강령이 바르지 못하여 현종(玄宗)과 고종(高宗)이 다 덕목에 부끄러움을 남겼습니다.

송태조(宋太祖)는 사람죽이기를 좋아 아니하고 인자한 마음을 사해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삼대이하의 임금중에서 가장 뛰어났습니다”하였다. 인규가 묻기를,

“역대 임금의 학술은 누가 바르고 누가 바르지 못했습니까?”하니,

수담이 답하기를,

“삼대 이상에서는 심학(心學)이 서로 전수된 지 오래되었으나 삼대 이하는 한문제(漢文帝)는 현묵(玄默)을 실행하였고, 당태종(唐太宗)은 규문(閨門)이 바르지못했으니 모두 말할 것이 못됩니다”하였다.

인규가 말하기를,

“한문제가 현묵을 실행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하니,

준경이 답하기를,

“한문제가 실행한 현묵은 유자(儒者)의 학문이 아니고 바로 황로(黃老)의 학술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룩한 지척의 공이 거기에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하였다.

인규가 말하기를,

“한문제는 학술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하니,

수담이 답하기를,

“한문제는 노대(露臺)의 비용을 아끼고17019) 검소한 기풍을 실천했던 것뿐입니다”하였다.

인규가 말하기를,

“송나라는 가법(家法)이 가장 발랐으므로 하자가 없었다고 보겠는데, 이종(理宗)이 이학(理學)을 숭상했으면서 당대의 유학자들을 쓰지 않았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습니까?”하니,

준경이 답하기를,

“이종의 학술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程)17020)과 장(張)17021)등 유자들을 추봉(追封)한 것으로 보아 도학(道學)을 숭상한 듯하였으나 참된 유학자를 아끼는 마음이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대의 진덕수(眞德秀)등이 하루도 조정에 머문 날이 없었으니, 그것은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지못했던 것입니다. 그를 조정의 웃자리에 기용하여 그와 함께 일을 했더라면 옛 법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니, 그것이 어디 우연한 일이겠습니까?”하고, 수담이 말하기를,

“학술이 바르면 사람의 사정(邪正)과 일의 경중(輕重)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부터 임금이 그 학술의 정부정(正不正)에 따라 흥망이 가름되었던 것입니다. 학술이 바르지 못하면 마음도 밝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입니다”하였다.

인규가 말하기를,

“역대에서 숭상했던 것도 각기 달랐습니까?”하니,

수담이 답하기를,

“당·우시대는 무어라 논의할 수 없고 삼대 이하로는 각기 숭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夏)에서는 충(忠)을 숭상하고, 은(殷)에서는 경(敬)을 숭상하고, 주(周)에서는 문(文)을 숭상하고, 서한(西漢)은 충후(忠厚)를 숭상하고, 동한(東漢)은 절의(節義)를 숭상했었습니다”하였다.

인규가 말하기를,

“끝에 가서 그것이 폐단을 일으킨 경우는 없었습니까?”하니,

수담이 말하기를,

“충을 숭상했던 폐단은 자질구레해진 것으로 은에서는 그것을 경으로 바로잡았고 경을 숭상하던 폐단은 속됨을 낳았으므로 주에서는 그것을 문으로 바로잡았습니다.

문을 숭상하던 폐단은 전국 시대에 와서 종횡(縱橫)의 기습으로 바뀌었으므로 서한이 그 폐단을 징계하여 충후를 숭상했지만 그 폐단이 결국은 다시 투미(偸靡)하게 되어 왕망(王莾)이 찬역(簒逆)을 하였고, 광무(光武)는 다시 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절의를 숭상하였으므로 엄광(嚴光)17022)의 무리가 세상의 표준이 되었었는데, 그 폐단이 다시 당고(黨錮)를 낳게 하여 한의 어진 선비들이 많은 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국맥(國脈)이 그 때문에 부지되었으므로 조조(曹操)와 같은 간웅(奸雄)으로서도 감히 신하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건 다 절의를 숭상했던 힘입니다”하고,

준경은 말하기를,

“서한은 충후를 숭상하다가 그 폐단이 투미해져 장우(張禹)와 공광(孔光)이 왕씨(王氏)에게 아첨하여 끝내 찬역을 이루었으니 그것은 충신(忠信)이 지나쳤기 때문이고, 동한은 절의를 숭상하여 나중까지 국맥을 유지하였으니, 임금으로서 절의를 숭상하여 무너진 기강을 붙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인규가 말하기를,

“당고는 바로 권간들이 한 짓이지만 그 당시 현인이라고 할 만한 자는 누구이겠습니까?”하니,

준경이 말하기를,

“당시의 서유자(徐孺子)17023)같은 사람은 한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곽태(郭泰)와‘큰 집이 기울게 되면 나무 하나로 지탱할 수는 없는 것이다’하였는데 그러한 사람을 성현(聖賢)의 도(道)로 규정한다면 좀 지나치지만 그 기개(氣槪)만은 가상한데가 있으니, 국가가 의지할 것은 명분과 절의(節義)만한 것이 없습니다”하고,

수담은 말하기를,

“요임금때에는 팔원(八元)과 팔개(八凱)가 있었고, 주대에는 난신(亂臣)17024) 10명이 있었으니 붕당이 있은 지가 오랩니다. 한나라 당고의 여러 현자들과 당나라 청류(淸流)의 무리들과 송나라 염락(濂洛)의 여러 유자들17025)은 모두 한때의 명현(名賢)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소인들이 모두 당(黨)이라고 지목하였으므로 그들이 끝내 세상에 쓰이지못했으니, 사람이 쓰이는 것이 치란과 관계됨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하고,

준경은 말하기를,

“예부터 착한 사람이나 군자가 나라를 다스리려 할 때는 반드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소인이 그들을 해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당이라고 지목하여 임금의 마음을 쉽게 동요시켜 군자들이 끝내는 찬축(竄逐)을 당하고 말았었습니다”하고,

수담은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 평소의 뜻을 펴보려고 할 때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들을 당이라고 지적합니다. 근래의 일로만 보더라도 착한 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기묘년의 당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하고,

준경은 말하기를,

“그러한 일들은 반드시 위에서 밝게 살펴야 조정의 변란을 미연에 막을 수 있습니다”하고,

수담은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청류이니 탁류에다 던져버리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던 그러한 일들은 예부터 그래왔었습니다”하였다.

인규가 말하기를,

“절의(節義)로 인한 폐단이 진(晉)나라에 이르러 완적(阮籍)무리가 속세의 예절에 구애없이 자유로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일삼더니, 남북조시대에 와서는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리가 쓸어버린 듯 없어졌으며, 수(隋)나라때는 교화가 말할 수 없이 무너지고 풍속이 천박해졌습니다”하니,

수담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그 당시에 학문하는 선비가 있어도 모두 쓰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왕통(王通)17026)이 하분(河汾)에서 도(道)를 강마하였으나 그의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이 마침내 쓰이지 않았고, 당(唐)의 한퇴지(韓退之)에 와서는 한때 그를 태산이나 북두에 비유하였으나, 그 역시 고르기는 하였지만 정밀하지 못하고 말하긴 하였지만 자세하지 못하였습니다”17027)하였다. 인규가 말하기를,

“그 당시 이고(李)와 한유(韓愈)만이 이름을 날렸을 뿐이었는데 송대(宋代)에 이르러 문운(文運)이 크게 트이어 참된 유학자가 배출되어 전일의 성인이 발명하지 못했던 것을 발명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끝내 그 포부를 세상에 펴지 못하였고 게다가 무략(武略)이 강하지 못하여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세상에 쓰였던들 그렇게까지야 되었겠습니까?”하니,

수담이 말하기를, 참된 유학자를 기용하여 궁리(窮理)와 정심(正心)의 학문을 다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장재(張載)·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등이 어찌 배운 것을 실천하여 융성하고 태평한 세상을 만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당시의 임금이 써주지않았기 때문에 그 배움을 끝내 펴보이지 못했던 것입니다”하고,

준경은 말하기를,

“송나라가 무략은 강하지 않았으나 사마광(司馬光)같은 유학자를 등용했더라면 인심이 안정을 유지하여 태평성대가 되었을 것인데, 오직 소인만을 기용하여 백성들이 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쉽게 망했던 것입니다”하고,

수담은 말하기를,

“나라 다스리는 방법은 인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인재를 기용하면 인심을 얻게 되고 인심을 얻으면 천하는 다스려지는 것이지만, 선한 인재를 등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인심을 얻으며 인심을 얻지못하면 어떻게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한 군자가 기용되면 뭇군자가 각기 그러한 유(類)로 나오게 되고, 한 소인이 기용되면 뭇 소인이 각기 그러한 유로 나오게 되어 국가의 치란과 흥망이 여기에 매였으니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인규가 말하기를,

“예부터 임금이 재난을 만났을 때에 그 재난을 없애기 위하여 무슨 방법을 펴왔습니까?”하니,

수담이 말하였다.

“임금이 재난을 만났을 때 자기의 마음을 바로하고 몸을 닦는 일을 다한다면 천변(天變)이 자연 없어집니다.

주선왕(周宣王)은 몸둘 바를 모르고 행실을 닦아 한재(旱災)를 물리쳤고, 제경공(齊景公)은 말 한마디로 형혹성(熒惑星)17028)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그밖에 9년홍수(洪水)와 7년가뭄도 요(堯)와 탕(湯)에게 피해가 되지않았던 것은, 모두 덕(德)을 닦음으로써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삼대 이상에서는 재해를 만나면 임금이 스스로 반성하여 덕을 닦았는데, 그 이후부터는 재해를 만나면 임금이 거처를 옮기느니 찬의 가짓수를 줄이느니 하는 등 형식만 숭상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은 살피지않으므로, 천재와 시변(時變)이 겹치고 잇따라 별별 일들이 다 생겼던 것입니다.

임금이 참으로 자기 성심을 다하여 하늘과 일체가 된다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신은 논한다. 구수담과 이준경의 겨레붙이로 기묘년 사건에 가담된 자가 있었는데 그날 야대에서 기묘년간의 사건, 그리고 안처겸의 난으로 한 마을이 텅비게 된 사건에 언급이 있었으므로, 삼공(三公)들이 사정(私情)을 둔 말이라 하여 결국 파직되었다.

자세한 것은 뒤에 나와 있다. 대체로 논할 때 대현(大賢)이 아닌 이하 사람으로서는 피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수담과 준경이 남들이 자기를 의심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솔직하게 그런 말들을 아뢰었으니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러나 ‘사정을 두고 지척에 있는 임금의 귀를 속인 것이다’고 한 것은 아무래도 너무 지나친 속단인 듯하다.

註17015]인(印)을 새겨 육국(六國)을 세우려다가:초(楚)의 잦은 침탈을 걱정하던 한왕(漢王)이 역이기(酈食其)의 말을 듣고 이미 멸망한 육국(六國)의 후예들을 다시 세워줌으로써 천하에 덕의(德義)를 표하려고 했던 일을 말한다.註17016]성종조 경오년:성종조에는 경오년이 없으니 이 부분은 잘못이 있는 듯하다.註17017]이오(二五):음양(陰陽)과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 음양오행의 정기가 현묘한 이치로 응결되어 거기에서 인물(人物)이 형성된다는 것.《주염계(周㾾湲)》태극도설(太極圖說).註17018]중(中)과 극(極)을 세워:백성이 지향할 표준을 정립하는 것.《서경(書經)》상서(商書) 중훼지고(中虺之誥)에“왕은 힘써 큰덕(德)을 밝히어 백성에게 중(中)을 세우소서”하였는데, 이는 중훼가 탕(湯)에게 한 말이다.《서경(書經)》주서(周書) 홍범(洪範)에는 “임금이 그 극(極)을 세워줄 것이니”하였는데, 이는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한 말이다 註17019]노대(露臺)의 비용을 아끼고:한문제(漢文帝)가 관상(觀象)을 위한 노대를 짓기 위해 장인(匠人)을 불러 물으니 소요되는 비용이 1백금이라 하였다. 문제는 그 말을 듣고 “1백금이면 중인(中人) 10가구의 재산인데 그 많은 비용을 들여 굳이 노대를 지을 것이 무엇인가?”하고는 그만두었다.註17020]정(程):정호(程顥)와 정이(程頤)임.註17021]장(張):장재(張載).註17022]엄광(嚴光):동한(東漢)때 사람으로 자는 자릉(子陵). 소년시절 광무(光武)와 같이 배웠는데 그 후 광무가 제위(帝位)에 오르자 성명을 고치고 숨어버렸음. 광무가 물색 끝에 찾아내어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했으나 끝내 받지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일생을 마쳤음.註17023]서유자(徐孺子):유자는 서치(徐穉)의 자.註 17024]난신(亂臣):치신(治臣)의 뜻임.註17025]염락(濂洛)의 여러 유자들: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소옹(邵雍)·주희(朱熹) 등 송조(宋朝)의 육현(六賢)을 말함.註17026]왕통(王通):수(隋)나라때의 학자로 자는 중엄(仲淹). 장안(長安)에 가서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올렸으나 당시 상황으로 보아 되지않을 것을 알고 하분(河汾)사이로 돌아와 후진양성에 힘썼는데 방현령(房玄齡)·두여희(杜如晦)·위징(魏徵)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음.註17027]고르기는 하였지만 정밀하지못하고 말하긴 하였지만 자세하지 못하였습니다”:이 말은 원래 한유(韓愈)가 원도(原道)를 쓰면서 순자(荀子)·양자(揚子)를 상대로 하여“그들은 고른다고 골랐지만 제대로 고르지못했고, 말한다고 하였지만 제대로 깊은 뜻을 알고 한 말이 아니다”하였는데, 그 후 주희(朱熹)에 의하여 오히려 한유 자신에게 그 병통이 있다고 지적되었었다.註17028]형혹성(熒惑星):별 이름. 국가에 재난(災難)이나 병화(兵禍)가 있으려면 미리 나타나 그 징조를 보여준다고 함.

○御夜對于(丕顯閤)〔丕顯閣〕。 檢討官具壽聃曰: “王初刻印, 欲立六國後, 聞張良之諫, 卽止之, 故終成大業。 聞善卽從, 聞不善卽止, 人主之美德。 大抵天下之事, 已誤然後欲救之, 則雖百倍其功, 不能善其後。 一有弊端, 必先究其所從來, 然後可以易防之。 徒欲救弊, 而不究其弊根, 則無及矣。 近來朝廷政令刑賞之間, 人心、士氣不善之弊, 非一時所爲, 必皆有所由來。 少年之輩, 何事知之, 然在經幄之下, 不可不達。 近來弊端多矣。 我朝氣習、風化, 先王之培養至矣, 至燕山十餘年間, 政令、制度、紀綱, 蕩盡無餘, 國非其國。 至聖朝, 知弊善救, 故廢朝之人心、士習, 一變其舊, 紀綱亦從而振擧。 頃者士林, 【指己卯之人。】 徒知古事, 不識時宜。 自上從諫如流, 自以爲身逢明主, 可以展布所懷, 不知酌古、準今, 凡事過中, 至於詭激誤國之事多矣, 是以罪其人, 而革其習, 然朝廷之間, 豈無所傷乎, 其人之本心, 不過尙廉恥、崇學問, 以治其心, 一出於正, 故朝廷無貪汚之習, 外方少請托之事, 民之弊亦云無矣。 然以其事誤, 故論罪其人矣。 雖罪其人, 尙廉恥之習固善, 則培養而存之可也; 崇學問之習固善, 則培養而存之可也。 而其後以其人, 而廢其事, 一時律已者, 則指爲其類而排之, 故無爲國之人; 挾冊者, 則指爲其黨而斥之, 故無爲學之人。 廉恥之道喪, 而貪汚之風成。 至於一時臺諫侍從之人, 皆國家所養望用之者, 而類皆憑藉弊習, 營求外方。 士氣頹靡, 悠悠度日, 無儒者氣習, 而徒求宦達, 可謂寒心。 是矯枉過直, 終至如此, 其弊端之多, 豈一時所誤, 其所從來遠矣。” 上曰: “此言至當、欲矯其弊, 而竝革其可善之事, 趙光祖之事誤也。 然其間, 豈無可取之事, 若非其人, 而竝革其事, 則終成大弊, 豈非過直之甚乎,” 壽聃曰: “種木者, 求用於十年之後。 人才之培養, 非一時所爲也。 己卯之間, 培養之功多, 故所行之事, 雖誤, 而人才之出盛矣。 自此以後, 權奸攀據, 專擅威福。 自上知弊端之所由來, 則救之無難矣。” 司經李浚慶曰: “具壽聃之言, 臣嘗與同議之言也。 培養人才, 非一朝一夕之功。 在國初, 世宗朝培養之功多, 故人才極盛, 至世祖朝靖亂之後, 儒類多死, 士氣沮喪。 其後, 雖世祖培養, 而人才不甚多。 成宗朝培養之功多, 故文學之士, 輩出於世, 文章道德, 煥然可觀。 一時人物, (侍)〔恃〕其寵遇, 忠讜之論, 無所不至。 遇廢朝, 儒士盡殲, 朝廷一空。 自反正後, 多培養之功, 人才復出, 一時人物, 皆其後培養者也。 但其年少之輩, 遭遇聖明之主, 以爲之世, 復於今時, 而誤爲之事多, 故不得已罪之, 而所傷者亦多。 士氣摧沮, 無復振起, 養成人材, 豈可易得, 日者於李芑金泂事, 下敎曰: ‘祖宗朝, 士大夫稀置重典。’ 且曰: ‘不惑於邪謀, 則雖減死何妨, 惑於邪謀, 則雖日置於重典, 無益也。’ 上敎至當。 下人莫不感激。 非但他人, 李芑金泂聞之, 亦必感激矣。 雖有小人, 聖心堅定, 則邪說不足動, 而自然消散矣。 是以自古聖明之主, 於小人, 但遠之而已, 不必誅殺也。 金泂李芑之事, 自上堅定, 則將有何事乎, 己卯之事, 初以其人之非, 矯枉過直, 終至於權奸得志, 肆行無忌, 竟觸法律。 當此之時, 自上若堅定, 則何有權奸之事, 又何有今此之事乎,【蓋指金泂李芑。】大抵小人, 無世無之, 上心堅定, 則自然消散, 不必誅殺也。 成廟朝, 風俗淳厚, 而朝士自無抵罪死者, 故人有言曰: ‘成宗不殺任士洪, 故終貽廢朝之禍。’ 此言不然, 成宗之不殺, 非不知而然也。 士洪雖存, 若有成廟之聖明, 則雖百士洪, 何自而投間肆毒哉, 廢朝不善, 故有士洪之奸術, 終成大禍。 大抵小人, 不可盡殺。 自上堅定, 則自不得行其術。 今見傳敎, 下人莫不感激。 此後世人主所當規鑑也。” 壽聃曰: “刑戮, 輔治之具也。 人有犯罪者, 則不得已用之, 然雖於用刑之際, 好生之心, 不可不常存也。” 浚慶曰: “好生之德, 無時不有, 隨處發見, 形諸言語, 人無不感激。 此聖帝、明王所當省念也。” 壽聃曰: “成宗朝, 罕用刑戮, 故金堅壽之子孟光, 有誤事將被刑。 成宗問此誰人之子也, 侍從曰: ‘金堅壽之子也。’ 成宗曰: ‘金堅壽, 乃前日以二品爲節度使, 久任使之人。 其子雖犯法, 豈忍刑也,’ 乃宥之。 一時以爲美談。 其好生之意至矣。” 參贊官趙仁奎曰: “凡事, 始之不謹, 末流之弊, 無所不至。 是故, 差之毫釐, 謬以千里。 己卯之人, 雖過中, 用法亦過中。 雖有可取之事, 以其人而廢之, 風俗之事, 亦從而變之, 是豈可乎, 凡作事謀始。 人材之任用, 豈可不於其始謀之哉, 人才培養爲難。 神宗, 愛惜人材, 蘇軾被黜, 神宗曰: ‘人材不可久廢。’ 遂用之。 此言, 人主亦可鑑矣。” 浚慶曰: “人材不可不培養, 而近來《小學》《近思錄》, 爲世大禁, 若有挾此冊者, 則人皆指爲己卯之黨, 而非笑之。 己卯之人, 未必皆爲《小學》《近思錄》, 而其後之人, 疾其時之人, 故其類皆兵之。 己卯之人, 雖曰不善, 此書何非,” 壽聃曰: “《小學》《近思錄》, 固當學之, 而今則人所共見處, 公然裂破而塗壁, 不肯學焉, 此弊大矣。 且臣受命爲御史, 往京畿, 巡察郡縣。 民弊不可細知, 自利川廣州時, 景安驛五里許, 有田地十餘里, 荒廢爲丘隴, 其間人家百餘戶撤出, 爲敗亡之墟。 臣驚怪而問之曰: ‘此地何以敗亡,’ 其處人曰: ‘安處謙, 欲起墾此地爲農, 所與近處人, 爲鄕徒契, 將於翌年爲役事, 而處謙之亂適出, 其人等或被罪撤去, 或逃散流亡, 雖雞犬, 亦皆散亡, 是以如此耳。’ 云。 此大逆之事, 國家已定其罪, 所以啓者, 非有他意也。 盛明之世, 恐有曖昧之人耳。” 浚慶曰: “大逆之罪, 不可言之, 然其地居生人, 欲爲鄕徒契, 而聚會。 士類之間, 聽其逆謀, 而從之者, 能幾人哉, 但其前日其父爲宰相時, 攀緣之人, 皆成冊書名, 而其罪大矣, 故不辨玉石, 而皆敗亡矣。” 壽聃曰: “其罪至大, 不可輕議, 成宗朝庚午年, 成三問緣坐四、五寸, 皆分配。 適其時, 多有旱災, 別爲夜對, 問災異。 蔡壽等對曰: ‘庚午間事, 其罪大矣, 但四、五寸未識面者, 皆分配。 同謀者已矣, 四、五寸, 豈無曖昧者乎,” 成宗曰: ‘予意亦以爲疑。’ 遂釋之。 今此之事, 固難達之事, 然陳其所見而已。” 上曰: “果豈無曖昧者乎, 其搜探安處謙家時, 得書名之冊, 遂信其同謀也。 然其書名中, 有守廬之人, 有在外方之人。 若眞同謀, 則豈可若是乎, 予意亦頗疑之, 但其罪大, 故不果釋之。 或附名、或附字而見罹, 其事則果可疑也。” 壽聃曰: “臣所見百餘戶, 豈盡同謀哉, 其間慮有曖昧之事, 但涉於大罪, 不可上達, 只言所見而已。” 言訖, 賜酒三酌, 將退, 上曰: “成宗朝, 或於夜對, 使經筵官, 相與講論歷代帝王治亂、興亡之事。 一人問, 一人答。 此甚美事, 今亦承旨問之, 而經筵官答之可也。” 仁奎問曰: “伏羲神農黃帝之時, 別無法度, 以後, 始有法度, (可)〔何〕言人心惟危, 道心惟微, 其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人之有善惡何也,” 壽聃答曰:

“伏羲之時, 書契始出, 人文宣朗, 至於堯、舜, 則欽明文思安安。 所謂欽者, 乃尙書開卷中第一義也。 凡人稟太極之理, 二五之精, 妙合而凝, 自然虛靈知覺。 內有性情, 而發爲惻隱、羞惡、辭讓、是非之理, 言其性, 則莫不皆善。 孟子曰: ‘人無有不善。’ 性則皆善, 而其發動之後, 有善惡也。 人心、道心不同者, 人心, 發於形氣之私; 道心, 發於義理之正。 堯、舜能存義理之性, 故爲上智之聖, 湯、武建中、建極, 不能無用力, 而後反之也。” 仁奎問曰: “人心發於形氣之私, 道心, 發於義理之正, 而惟危、惟微何也,” 壽聃曰: “人心發於形氣, 易私而難公故危; 道心出於義理, 難明而易昧故微。 其不動之時, 如鑑空衡平, 故能應接事物矣。 苟能不爲形氣之所雜, 而純乎義理之正, 則能得出治之本矣。 是故天子不仁, 則不保四海; 諸侯不仁, 則不保宗廟; 卿大夫不仁, 則不保其先祖; 士庶人不仁, 則不保其四體。 是皆由於人心之危而然也。” 仁奎曰: “歷代治亂、興亡不同, 何也,” 壽聃曰: “人主一心, 乃四海之本。 一心正則治, 不正則亂。 唐、虞、三代之君, 以一心爲四海之本, 而能得其正, 故遠近莫不出於正, 而能成治化, 三代以下之君, 其心不正, 或以土木, 或以聲色, 或以雜作之術, 或以莊、老之學。 漢, 大綱正, 而萬目不張, 唐, 萬目張而大綱不正。 玄宗、高宗, 皆有慙德, 宋太祖不嗜殺人, 以仁心爲四海之本, 故三代以下之君, 皆歸重於宋太祖也。” 仁奎問曰: “歷代人君學術, 孰正、孰不正,” 壽聃曰: “三代以上, 心學相傳, 尙矣, 三代以下, 漢文帝躬行玄默, 唐太宗閨門不正, 皆不足道也。” 仁奎曰: “漢文躬行玄默, 何也,” 浚慶曰: “漢文躬行玄默, 非儒者之學, 乃黃、老之學也。 故其治效, 止於此而已。” 仁奎曰: “漢文有學術乎否,” 壽聃曰: “漢文惜露臺之費, 躬節儉之風而已。” 仁奎曰: “宋之家法最正, 故無瑕疵, 理宗崇尙理學, 而世儒不爲世用, 何也,” 浚慶曰: “理宗學術非偶然, 追封程、張諸儒, 似爲崇奬道學, 然愛惜眞儒之心不實, 故一時眞德秀等, 無一日留於朝廷。 是不能辨其君子、小人也。 若使其人, 用於朝廷之上, 而與之共濟, 則可以維持舊物, 夫豈偶然哉,” 壽聃曰: “學術正, 則人之邪正、事之輕重, 不難辨矣。 自古人君, 由其學術之正與不正, 而興亡判矣。 學術不正, 則其心, 從而不明, 故如此矣。” 仁奎曰: “歷代所尙, 有不同乎,” 壽聃曰: “唐、虞則無以議爲, 三代以下, 各有所尙。 夏尙忠、殷尙敬、周尙文、西漢尙忠厚、東漢尙節義。” 仁奎曰: “其終無其弊乎,” 壽聃曰: “尙忠之弊至於僿, 故殷以敬救之, 尙敬之弊至於野, 故周以文救之, 尙文之弊至於戰國, 爲縱橫氣習, 西漢懲其弊, 尙忠厚, 而其弊終至於偸靡, 至於王莽簒逆。 光武矯其弊, 崇尙節義, 嚴光之徒, 爲世標準, 而其弊至於黨錮。 漢之賢士, 於是盡矣。 然其國脈, 由是而扶持, 故以曹操之奸雄, 不敢去其臣位, 皆崇尙節義之力也。” 浚慶曰: “西漢尙忠, 而其弊偸靡, 張禹、孔光, 媚於王氏, 終成簒逆, 忠信之過也。 東漢尙節義, 而其終維持國脈, 人君可不崇尙節義, 以扶頹綱乎,” 仁奎曰: “目以黨錮, 乃權奸之所爲, 而其時賢人可稱者, 誰耶,” 浚慶曰: “一時如徐孺子, 知漢室將亡, 與郭泰言曰: ‘大廈將傾, 非一木之所支。’ 如此之人, 律以聖監之道, 則有所過矣, 其氣槪, 則有可尙者。 國家倚賴, 則莫如名節矣。” 壽聃曰: “堯時有八元、八凱, 周時有亂臣十人, 人之有朋, 尙矣。 漢之黨錮諸賢, 唐之淸流之輩, 宋之濂、洛諸儒, 此皆一時之名賢, 而一時小人, 皆指爲黨, 故其人終不用於世。 用人關於治亂, 豈不昭然哉,” 浚慶曰: “自古善人君子, 欲有爲國之心, 則必有同志之士, 小人欲害之, 則必指以爲黨。 易惑上心, 而君子之人, 終爲所竄矣。” 壽聃曰: “善人欲展素志, 而有同志之人, 則必指以爲黨。 以近來之事觀之, 有爲善之人, 則必指爲己卯之黨也。” 浚慶曰: “如此之事, 必自上明察, 然後可以消朝廷之亂矣。” 壽聃曰: “此輩淸流, 可投濁流。 如此之事, 自古而然也。” 仁奎曰: “節義之弊, 至於晋阮籍之徒, 放浪於形骸之外, 至於南北朝, 君臣、父子之倫, 掃地無餘。 隋時, 敎化斁, 而風俗澆漓, 不足論也。” 壽聃曰: “是以當時, 雖有學問之士, 皆不得有爲, 王通講道河汾, 而太平十二策, 終不見用。 至於唐韓退之, 一時以山斗爲比, 然其擇焉而不精, 語焉而不詳。” 仁奎曰: “當時李翺與韓愈, 翺翔上下而已, 至於宋, 文運極泰, 眞儒輩出, 發前聖所未發, 然終未展布於世, 而武略不競, 故終至於亡焉。 其人見用於世, 則豈至於此哉,” 壽聃曰: “用眞儒, 而致窮理、正心之學, 則治天下不難矣。 張、周、兩程, 豈不欲行其所學, 措世隆平, 而時君、世主不能用, 故其學終不見施也。” 浚慶曰: “宋時雖武略不競, 能用司馬光諸儒, 則人心維固, 大平自臻矣, 惟擧用小人, 而民被其害, 故易於亡。” 壽聃曰: “治國之道, 人心爲重, 故能用善人, 則人心得, 人心得, 則天下理矣。 善人不用, 則人心何從而得, 人心不得, 則天下何從而理乎, 一君子進, 則衆君子各以類進; 一小人進, 則衆小人, 各以類進。 而國家治亂興亡係焉, 其可忽哉,” 仁奎曰: “自古人君遇災, 其所以消之之由, 何道而致歟,” 壽聃曰: “人君遇災, 盡正心、修己之功, 則天變自消。 周宣王側身修行, 而旱災自消, 齊景公發一言, 而熒惑退舍。 以至九年之水, 七年之旱, 不爲堯、湯之病者, 莫不由修德故也。 三代以上, 人君遇災, 反身修德, 三代以下, 人君遇災, 避殿減膳。徒尙虛文,不察民困,故天災、時變,疊見、層出,無所不至也。人主苟能盡其誠心,與天爲一,則可以格天矣。”

【史臣曰: “具壽聃、李浚慶, 其族亦有己卯之人, 而是日夜對, 言及己卯間之事及安處謙之亂, 鄕里一空之事。 三公以爲有挾, 故終被罷官。 其詳見後。 大抵自非大賢以下, 不可不避嫌, 壽聃、浚慶, 不慮人之疑己, 率爾啓達, 固已失之, 然以此爲有挾, 而欺咫尺天聰云爾, 則亦甚矣哉!”】

중종 88권, 33년(1538 무술/명가정(嘉靖)17년) 9월 2일(임신) 1번째기사

대사간 신광한등이 절검·변방의 견고등에 관한 상소를 올리다

대사간 신광한(申光漢) 등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근래 민생이 매우 곤궁하고 변괴가 자주 나타나서 하늘의 견고(譴告)가 지시해주고 직접 명령하듯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이 대응함에 있어서는 귀머거리처럼 멍청하여 해야할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을 갖는 듯하나 부질없이 헛된 문사(文辭)만 일삼을 뿐 끝내 각성하지 못하고 까마득히 잊고 있으니, 어떤 화환(禍患)이 일어날 지 예측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통곡할 만한 일입니다. 《시경(詩經)》에‘번쩍거리는 천둥 번개가 몹시 사나운데 아, 지금 사람들은 어찌하여 마음을 가다듬지 않는가?’하였습니다. 천둥 번개가 대단한 변괴가 아닌데도 시인(詩人)은 이처럼 근심하였던 것입니다.

금년의 뇌진(雷震)은 참으로 비상한 변입니다. 전국에서 벼락맞아 죽은 사람이 한두사람이 아닌데다가 태묘(太廟)의 곁채에도 벼락이 떨어졌으니, 이것은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경계를 보여주신 것인데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벼락이란 천지의 사나운 기운이며, 우박은 겨울철에 내리는 것도 변괴라 일컫는데 더구나 한여름에 내리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흰 운기(雲氣)가 하늘에 퍼져있고 태백(太白)이 주현(晝見)하는 변괴가 동시에 나타났으니, 이것은 모두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쇠미한 까닭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하여 부인(婦人)이 정사에 간여하고 외척이 정권을 전임하거나, 소인들의 참소로 군자가 저지되거나 전쟁을 일으켜 민생이 피폐하여질 때는 이러한 변괴가 나타난다는 것을 고금의 역사가 역력히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 제경공(齊景公)의 한마디 말에 형혹성(熒惑星)이 30리를 물러났으니, 임금의 정신과 심술이 위로 하늘의 뜻에 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근일‘비상한 변괴에 대하여 비상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하교하였는데, 이 말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진의를 충실히 이행해 나간다면 이것이 바로 한 마디의 말이 국가를 흥륭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직(社稷)과 생령(生靈)의 복은 바로 전하께서 생각 한번 돌리시기에 달려있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앞으로 실행하실 방법을 어떻게 세우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의 일에 있어서 재변을 부를 수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우선 그중에서 절실한 것을 들어서 진술하겠습니다.

지난날 권간들이 빌붙어서 전하의 뜻을 헤아려 오로지 비위를 맞추고 앞질러 인도하며 전하의 좌복(左腹)에 들어가므로, 전하께서는 이미 그들의 술책에 빠져 그들의 감언이설을 충직한 바른 의논이라 하였고, 그들이 은혜와 원수를 갚는 것을 선악을 분별하라는 것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날로 높아지고 권병(權柄)이 그들에게 돌아가서 국세(國勢)가 위태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전하께서 명석한 판단을 내리어 간사한 무리들이 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큰 근본이 이미 잘못되어 살륙이 잇따라 일어났으므로 국맥(國脈)도 따라서 손상받게 되었으니, 비유컨대 독약으로 치료받은 사람이 병은 나아졌지만 체질이 허약하여졌기 때문에 간간히 풍사(風邪)가 발하게 되면 절대로 부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하께서 간신들에게 기만당하신 이후로 아무도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 위에서 신하를 믿지 못하자 신하도 위를 믿지 못하여 상하간에 정의가 미덥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조정에 바른말하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뒷일을 염려하여 자신들의 품은 뜻을 펴지 못하고, 대답만 네네’하는 것이 습성화되어 시비를 분간하려는 뜻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가 무엇을 물으시면, 말끝마다 상의 분부가 지당하다고만 하고 있으니, 자사(子思)가‘임금의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간다’고 한 말이 이러한 것을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임금이 재변을 만나 두려워하되 마땅히 가깝게는 자신을 살피고 멀리는 시정(時政)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임금 자신이 바르면 정사가 어찌 바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이 바른 다음에 가정이 바르게 되고 가정이 바른 다음에 조정에 미칠 수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궁금(宮禁)은 임금이 가정이며 정치하는 근본이기 때문에 언제나 궁금이 먼저 청명하여 내외(內外)가 엄숙해져야만 위로는 편사(偏私)의 관계를 없앨 수있고 아래로는 반연(攀緣)의 길을 없앨 수 있게 되어 여러 현인(賢人)들이 직위를 가지고 반열에 서서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공명정대한 의논이 조정에서 나오게 된다면 위복(威福)이 신하에게 넘어가지 않게되므로 권력의 기강이 절로 군상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안으로 이런 일에 힘쓸 줄 모르고 밖으로 신하들이 할 자질구레한 일을 세세히 살피려고 한다면 대체(大體)가 이미 상실되고 유익함이 없게 될 것이니, 이 때문에 간흉들이 기탄할 것이 없게 되어 그 사이에 함부로 뜻을 펴게 되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은(殷)나라가 거울삼아 볼 것이 먼데에 있지않고 하후(夏后)의 시대에 있다’고 하였으나 하후의 시대도 먼 것입니다.

옛사람이‘어제의 일을 징계하여 살펴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어제에 있었던 일을 징계하여 보시면 역시 거울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대체로 위세가 중한 것이 임금이니 중하게 하려고 하지않아도 절로 중해지는 것이고, 진작되기 어려운 것은 사기(士氣)이니 진작하려 해도 잘 진작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의 위중(威重)한 위엄으로 진작되기 어려운 사기를 누르면 꺾이지 않을 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처럼 사기가 매우 꺾였을 때에 그 폐단을 구제하려면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주는 방법만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 주운(朱雲)이 임금의 상방검(尙方劍)을 빌어 장우(張禹)를 베겠다고 직언을 하자 성제(成帝)는 나약한 임금이었는데도 오히려 부러진 난간을 고치지 아니하여 그의 직언(直言)을 정표(旌表)하였으니 성제가 주운의 직언을 정표한 것은 장우를 참하는데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은 시행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이 참으로 쓸만하면 쓰고, 쓸만하지않더라도 죄를 주지않는다면 공론이 펴지고 직간(直諫)이 이르게 되어 지난번과 같은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꺼려서 조금이라도 뜻에 거슬리는 말이 있을 경우 반드시 장형(杖刑) 아래 몰아넣는다면 부자와 형제의 사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주시하면서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하께서는 위에서 외롭게 되고 조신(朝臣)들은 아래에서 팔을 걷어 올리며 분개할 것인데, 이러한 시기에 간인(奸人)들을 베려고 칼을 빌리자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있다해도 말을 들어주지않을 뿐만 아니라, 죽이기에 이를 따름입니다.

때문에 환란을 겪은 뒤로는 사대부(士大夫)들이 겉은 엄연하지만 안으로는 생기가 없어 습속이 퇴미해져도 강개한 마음으로 일을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러한 폐단은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공자가‘나라에 도(道)가 없으면 말을 공손하게 해야한다’고 한데 대해 주자(朱子)는 해석하기를‘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선비들에게 말을 공손히 하게 한다면 그 나라가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하였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신들은 들으니‘궁중에서 상투를 높이틀자 사방의 백성들은 한 자[尺]나 높게 하였다’는 옛말이 있다합니다. 이와 같이 폐습이 이루어지는데는 반드시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사치가 극도에 달했고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폐단의 뿌리가 이미 고질화되었기 때문에 다시 구제할 수없게 된 것은 모두가 간흉(奸凶)들이 용사(用事)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치스러운 것을 나라를 빛내는 큰일로 여기고 재물 긁어모으는 것을 먼 미래를 경륜하는 훌륭한 꾀로 여겨, 군현(郡縣)에 세금을 거둬들이고 뇌물을 끝없이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뇌물을 바쳐 남을 섬기는 사람은 칭찬하는 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청렴근실하게 자신을 지키는 사람은 헐뜯는 말이 떼지어 일어납니다. 때문에 수령들이 이러한 풍습에 따라 끊임없이 짐바리를 싣고 와 한편으로는 전하의 좌우에 뇌물을 바치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웁니다. 게다가 부렴이 많고 공역(工役)이 끊이지 않아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은 아래에서 원망하고 하늘은 위에서 노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칠 줄을 모르고 여풍이 휩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간절한 분부를 여러번 내렸지만 실지의 혜택이 행하여지지 못하고, 승진시키고 좌천시키는 법전이 엄중하나 겉치레로만 보아넘겨서 상벌(賞罰)이 이 때문에 뒤바뀌고 내외(內外)가 이 때문에 혼탁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참으로 슬퍼집니다.

공자는‘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그러므로 풀에 바람이 불면 언제나 쓸린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몸가짐을 검소하게 하시고 궁내의 비용을 절약하여 몸소 아랫사람을 인도하시면 아랫사람이 임금을 기다리는 뜻을 가질 것이니 어찌 백성들의 원망이 위로되지 않겠으며 하늘의 노여움에 보답되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또 비운(否運)이 극도에 달하면 태운(泰運)이 돌아오고 태운이 절정에 달하면 비운이 돌아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라고 들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태평한 시대라고 할 수는 없지만, 1백년간을 태평하게 지냈으니 오래지 않다고할 수 없으며, 전(傳)에 오래되면 변한다고 하였으니 태평한 시대가 변한다는 것은 반드시 난세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남쪽지방에는 흔단이 생겼고 서쪽지방에는 오랑캐들이 가까이 와 살고 있으며 북쪽지방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군액(軍額)은 날로 감손되는 데 도적들은 점점 번성하고, 국가의 비용은 날로 국고의 재물을 축내게 되는데 상하의 재물이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게다가 근년에 오면서 군령이 더욱 해이하여 변방의 경비가 허술한데, 혹시 뜻하지 않은 사단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태평 시대에 관후한 정치를 하는 것은 참으로 일국(一國)의 신민들에게는 복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사신(史臣)이 한문제(漢文帝)의 정치에 대하여‘풍류스럽고 관후하여 금망(禁網)이 소활하나 군령에 있어서는 매우 엄중하였다’하였고, 병가(兵家)에서도‘늦춰졌으면 팽팽히 하고 팽팽하면 늦추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군령을 범한 사람은 조금도 용서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평상시 무사할 때에 신의를 세워 놓아야만 위급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않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변이 생기게되어 태평스럽게 살던 백성들을 시석(矢石)이 쏟아지는 전장으로 내몬다면 어찌 흩어져 도망가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럭저럭 구차스럽게 보내는 사이에 형세는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통례적인 병폐입니다.

전하께서는 급하지 않은 부역을 파하시어 백성들의 힘을 펴주시고 꼭 행해야 할 법전을 들어 군령을 엄하게 하소서. 이미 나타난 재변을 소멸시켜 화(禍)를 돌리어 복으로 만들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근일 분부하신 것을 보니, 자신을 탓하는 정성과 시대를 염려하는 절실함과 불우(不虞)를 근심하는 뜻이 언사의 밖에 넘쳐흐릅니다.

옛사람이‘임금이 근심하게 되면 신하는 곤욕스럽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전하의 근심이 이러하신데, 신하된 자로 어찌 마음속에 두려워하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제 대간(大奸)이 이미 제거되어 인심이 약간 안정되었으니, 이 기회에 조정에서는 화협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성상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시니, 신들은 서로 경하하여 마지않습니다.

옛날 송조(宋朝)의 조신들은 때로는 군자가 소인을 공격하기도 하고 또는 소인이 군자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군자가 군자를 공격하기도 하고 소인을 공격하기도 하여 저편이 득세하면 이편이 쫓겨나고 이편이 득세하면 저편이 쫓겨나게 되었으므로 현자들이 많았지만 끝내 조정에 오래있지 못하고 나라도 따라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공평하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고 치우치기 쉬운 것도 세도(勢道)입니다. 그러므로 공심을 잃는다면 세도에 치우침이 되므로 임금의 마음은 언제나 거울같이 비어있고 저울대같이 공평해야 하고 기울어져서는 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이 상을 줄 만하면 상을 내리고 악한 것이 벌을 줄 만하면 벌을 내려 편당을 버리고 왕도를 따른다면 아래로는 인심을 화합시킬 수 있고 위로는 하늘의 뜻을 순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지난날 권간들의 행적을 거울삼아 주상의 뜻을 앞질러 인도하는 소인들을 좋아하지 마시고 상하간의 정의를 미덥게 하여 현신들을 신임하며 편사한 관계를 끊어버려 위복의 권세를 수합하고 궁중의 금령을 청명하게 하여 간사한 무리들의 길을 막으소서.

그리고 사기(士氣)를 진작시켜 게으르고 사치스러운 풍조를 변혁시키고 언로를 넓혀 간신들의 현혹을 살피소서. 절검(節儉)을 숭상하여 사치를 억제하고 탐관오리들을 엄단하여 나라의 근본을 충실히 하소서.

또 군령을 엄중히 하여 변방의 장비를 견고히 하고 조정을 화합시켜 내정을 안정시킨다면, 재해를 소멸시키고 이변에 응하는 방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답하였다.

“지금 상소를 보니 타당한 말이다. 명심하겠다. 그리고 간신들을 제거했다고 해서 태평하게 지내지말고 앞날에 어떠한 변이 일어날까 우려하며, 태평시대라고 편안히 보내지 말고 곧 국경에 어떠한 일이 생길까 염려하라.

날로 삼가고 또 삼가서 조금도 해이하지 않는 것은 재변을 만났을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요, 평상시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壬申/大司諫申光漢等上疏曰:

臣等伏覩, 近來民生困極, 變異疊見。 上之譴告, 昭昭如指示面命, 而下之應答, 蒙蒙然褎耳冥行。 初若惕慮, 徒以虛文爲事, 竟不覺悟, 付諸杳茫之地, 禍患之作, 將不可測。 言念至此, 足爲痛哭。 《詩》曰: “燁燁震電, 不寧不令。 哀今之人, 胡憯莫懲,” 震電, 非變異之大, 而詩人憂之。 今年雷震, 實爲非常, 邦域之內, 震死人物, 非一二計, 而震及大廟之廡。 惟天惟祖宗, 所以示警者, 莫測其由。 震者, 天地之戾氣。 冬日之雹, 猶稱變異, 況於盛夏乎, 且如白氣布天, 太白晝見, 竝出於一時, 此皆陰盛陽微之應。 或宮闈預政, 外戚專權, 或小人讒譖, 君子消沮, 或兵戈興行, 民生糜爛, 古今著驗, 歷歷可指。 昔景公一言, 熒惑退舍。 人主精神心術, 足以上應天意。 臣等伏覩殿下, 近日下敎云: “有非常之變, 當以匪常應之。” 大哉斯言! 苟能充之, 此誠一言而興邦者也。 社稷生靈之福, 正在於殿下一轉念之間。 未知殿下, 將何以實之耶, 當今之事, 可以召災者非一, 姑擧其切近者陳之。 頃日權奸攀附, 揣摩殿下之意, 專用承順逢迎, 入于左腹。 殿下旣陷於其術, 以妖謟甘言, 爲忠直讜論, 以報復恩讎, 爲分別淑慝, 眷注日隆, 而權柄下移, 國勢幾至岌岌。 幸賴殿下之明斷, 奸黨雖服其罪, 然大本旣誤, 誅戮相連, 國脈亦從而傷矣。 比如毒藥攻腸之人, 病雖已而體卽虛、 風邪間發, 則決不可支矣。 殿下自見欺於奸侫之後, 以爲無足倚信者, 上不信下, 下不信上, 上下之間, 情意不孚。 非但朝無直言之士, 大臣亦拘於形迹, 不敢展布所蘊, 唯唯成習, 無曰可曰否之意, 殿下有問, 則言必稱上敎允當。 子思云: “君之國事, 將日非者”, 未必非此之謂也。 大抵人君, 遇災而懼, 當近察於一身, 遠求於時政, 身苟正矣, 政安有不正, 故身正然後, 家可以正, 家正然後, 可以及於朝廷。 夫宮禁者, 人主之家, 而出治之本。 必使宮禁先淸, 而內外斬斬然後, 上無偏私之係, 下無攀緣之路。 群賢在位, 穆穆布列, 而公平正大之論, 必出於朝廷, 則威福不移於下, 而權綱自歸於上矣。 爲人君者, 內不知務此, 外欲以明察, 下侵細務, 則其於大體, 固已有傷而無益, 此正奸兇之無所忌憚, 肆意於其間者也。 《詩》曰: “鑑不遠, 在夏后之世”, 夏后之世, 遠矣。 古人有云: “懲前日, 則知之矣”, 殿下懲於前日, 亦足爲鑑矣。 伏願殿下深察焉。 夫威重者人主, 不欲重而自重; 難振者士氣, 欲振之而不振。 以人主之威重, 加難振之士氣, 靡有不摧折者。 今之士氣, 摧折已甚。 欲救其弊, 莫如廣開言路。 昔朱雲請尙方劍, 欲斬張禹, 元帝懦弱之主, 猶不治折檻, 以旌其直。 帝之旌其直者, 亦非能有意於斬也。 蓋其言則雖已置之於不用之地, 而所言者爲國, 非爲身也, 故言苟可用, 則用之, 雖不可用, 不至於罪之, 則公論可伸, 直諫可來, 無頃者之弊。 以言爲諱, 少有觸犯, 必驅之於杖刑之下, 雖父子兄弟之間, 亦多寓目而不能言, 殿下孤危於上, 朝臣扼腕於下。 當此之時, 亦有爲奸侫請劍者乎, 非徒言之不聽, 又至於殺身而已, 是以, 經患以來, 士大夫, 外雖儼然, 內無生氣, 習俗頹靡, 無慷慨言事之人。 如斯之弊, 誠非細故。 孔子曰: “邦無道則言遜。” 朱熹釋之曰: “爲國者, 使士言遜, 豈不殆哉,” 伏願殿下留念焉。 臣聞古語有之曰: “宮中高髻, 四方高一尺。” 故弊習之成, 必有其來。 近者奢侈旣極, 貪汚成風, 弊根已痼, 不可復救。 此皆由於奸凶用事, 以侈靡爲華國之大務, 以割剝爲經遠之長謀。 徵索郡縣, 無有紀極, 苞苴事人者, 譽聲日至, 廉謹自守者, 毁言朋興, 守令承風, 駄載絡繹, 一以賂殿下之左右, 一以充自家之溝壑。 加以賦斂煩重, 工役不息, 以至于今, 民怨於下, 天怒於上, 而猶不知止, 餘風靡靡。 惻怛之敎屢下, 而實惠不行, 陞黜之典雖嚴, 而視爲文具, 賞罰因此而混淆, 內外以之而沈濁。 言之至此, 可爲於悒。 孔子曰: “君子之德, 風也, 少人之德, 草也, 草上之風, 必偃。” 願殿下, 崇儉於身, 節用於內, 躬以導下, 則下必有徯志者, 民怨豈不可慰, 天怒豈不可答乎, 臣等又聞, 否極則泰來, 泰極則否來, 必然之理也。 當今之時, 雖不足謂泰, 然百年昇平, 不爲不久。 《傳》曰: “久則變。” 昇平之變者, 必至於亂。 今者南方有釁, 西戎逼居, 北方飢饉, 軍額日至於減耗, 而盜賊繁滋, 國用日損其儲備, 而上下俱竭。 加以近年以來, 軍令益解, 邊鄙虛踈。 脫有不虞, 將何以禦之, 居昇平之世, 有寬厚之政, 此固一國臣民之福也。 史稱之治, 風流篤厚, 禁網踈闊, 然至於軍令, 未嘗不嚴。 兵家之言曰: “緩則急之, 急則緩之。” 凡干軍令, 不少假借, 必先信之於無事之日, 然後可以用之於急難之時。 不然, 一朝有變, 驅昇平之民, 赴之於矢石之所, 其有不渙然而離散者乎, 故因仍苟且之間, 勢至於不可救者, 此古今之通患也。 伏願殿下, 罷不急之役, 以寬民力, 擧必行之典, 以嚴軍令。 消災於已形, 轉禍以爲福, 此其時也。 伏覩近日下敎, 罪己之誠, 念時之切, 憂虞之意, 溢於言表。 古人云: “主憂則臣辱。” 使殿下之憂, 至於如此, 而爲臣子, 其有不惕然感動於中者乎, 今者大奸已除, 人心稍定。 朝廷當務協和, 此其幾也。 聖念及此, 臣等不覺相賀。 昔朝之臣, 或以君子攻小人, 或以小人攻君子, 或以君子攻君子, 或以小人攻小人, 彼入則此出, 此入則彼出, 賢者雖多, 終未能久於朝廷, 國從而亡矣。 夫難公者心也, 易偏者勢也。 苟失公心, 必有偏勢。 人主之心, 當如鑑空衡平, 尤不可有所偏倚。 善苟當賞則賞之, 惡苟當罰則罰之, 無偏無黨, 必遵王道, 則人心可和於下, 而天意可順於上矣。 伏願殿下, 鑑權奸之迹, 而勿喜逢迎, 孚上下之情, 而信任賢臣, 絶偏私之係, 以收威福, 淸宮禁藺邪逕, 振士氣以革偸靡, 廣言路以燭奸蔽, 崇節儉以抑奢侈, 正貪汚以實邦本, 嚴軍令以固外備, 和朝廷以安內治, 則其於消災之道, 應變之方, 庶或有補於萬〔一〕矣。

答曰: “今觀上疏至當。 當服膺焉。 勿以除奸爲泰, 憂念他日之如何, 勿以昇平爲康, 恐生邊事於朝夕, 日愼又愼, 少不懈弛, 非特在於遇災之時, 亦常時之所當軫念者也。”

중종 95권, 36년(1541 신축/명가정(嘉靖)20년) 5월 1일(병술) 1번째기사

가뭄으로 전폐에서 한데에 앉아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다

전교하기를,

“임금이 가뭄을 만나면 먼저 인사(人事)를 닦아야 하겠으나, 백성이 살곳을 잃고서 굶주리고 떠다니게 되면, 인사를 닦고자 하더라도 누구와 하겠는가? 더구나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인데, 곡식이 아니면 어찌 살겠는가?

요즈음 하늘을 보면 비가 내릴 형세가 여러날 있었는데 이처럼 산뜻하게 개어 열흘이나 끌고 다시는 아무 조짐이 없으니, 위아래 누구인들 크게 근심하지 않겠는가?

내가《사문류취(事文類聚)》를 살펴보니, 제경공(齊景公)때에 가물어서 뭇 신하를 불러 묻기를‘영산(靈山)에 제사하고자 한다’하자 안자(晏子)가 ‘영산은 돌로 몸을 삼고 풀로 머리를 삼았으므로, 하늘이 오래 비를 내리지 않으면 머리가 마르고 몸이 뜨거워질 것인데, 어찌 저만이 비를 바라지 않겠는가? 제사를 하더라도 도움이 없을 것이다’하니, 경공이‘그러면 하백(河伯)에게 제사할까 한다’하므로, 안자가‘하백은 물로 나라를 삼고 물고기와 자라등을 백성으로 삼으므로, 하늘이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않으면 온갖 냇물이 말라가고 백성이 죽어 갈 것인데, 어찌 혼자 비에 의지하지 않겠는가? 제사를 하더라도 도움이 없을 것이다’하니, 경공이‘어찌하여야 하는가?’하자, 안자가‘궁전을 피하여 한데에 나가 영산·하백과 근심을 함께 하면 어쩌면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하니, 경공이 들에 나가 한데에 사흘동안 있었는데 과연 큰 비가 내렸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한데에 앉아 비를 바라는 것만큼 도움이 되지못한다. 정전(正殿)을 피하는 것은 이미 하였다.

들에 나가 한데에 앉아있는 것은 형세상 실행하기 어려우나 나로서는 하고 싶은데, 경들은 백관을 거느리고 전폐(殿陛)에 서는 것이 어렵다고 여기고서 의논하지 않으나, 내가 근시(近侍)를 거느리고 전폐에서 사흘동안 한데에 앉아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임금의 거둥은 가벼이 할 수 없고 또한 절차가 있으니, 예관(禮官)을 시켜 마련해서 하는 것이 어떠한가?

위에서 이렇게 하면, 각사(各司)의 관원은 담당직무를 버려둘 수는 없겠으나, 또한 사흘동안 한데에 앉아야 마땅할 것이다.

사관을 보내어 의논하도록 하라”하였는데,

영의정 윤은보등이 의논드리기를,

“큰 가뭄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므로 무릇 재앙을 그치게 하고 비를 비는 방도를 지극히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비가 내릴 징조가 없으므로 대소(大小)가 근심하되 별다른 계책이 없는데, 성심(聖心)이 더욱 염려하여 옛일을 두루살펴, 몸소 옥체를 수고롭게 움직여 한데에 앉아 빌려 하시니 정성이 이르는 곳에 어찌 응답이 없겠습니까?

다만 옛날과 지금은 시의(時宜)가 달라서 시행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을 뿐더러 귀중한 성체(聖體)는 종사(宗社)와 백성이 관계된 바인데, 더구나 구중(九重)에 깊이 계시다가 주거와 음식을 바꾸는 것이겠습니까?

신민(臣民)처럼 노고를 견딜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러한 더위에 혹 한데에 앉아계시다가 성체가 편찮게 된다면 종사와 백성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정성스러운 일념은 절로 천감(天鑑)에 사무치겠거니와, 한데에 앉으시는 일은 아마도 쉽게 의논하기 어렵겠습니다”하니,

전교하였다.

“내가 비를 바라되 계책이 없으므로 옛일을 헤아려서 조정에 의논하였더니, 신하의 정리로 상체(上體)를 수고롭힐까염려된다고 아뢰었다.

내가 한데에 앉아있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어찌 방해가 있으랴마는, 조정의 의논이 저러하니 구태여 다시 의논하지 않겠다.

내가 생각하건대, 예전부터 가뭄의 재변은 음양이 조화를 잃기때문에 생기는데, 임금과 신하,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군자와 소인사이가 다 곧 음양이다. 한 집에서 가장 중한 것이 부부인데, 서민은 말할 것도 없고, 경외(京外)의 사대부들 가운데도 정처(正妻)를 소박하는 자가 있고 때로는 더 심한 자가 있기도 하여, 부부가 반목하여 가도(家道)를 어그러뜨리는 일이 있으니, 어찌 화기(和氣)를 손상하는 일이 없겠는가?

혹 사치때문에 나이찬 처녀가 혼인할 때를 잃으니, 이러한 일들은 법사(法司)가 규찰하여 그 가장(家長)을 추고(推考)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丙戌朔/傳曰: “人君遇旱, 當先修人事矣。 然若有民失其所, 飢荒流離, 則雖欲修人事, 與誰爲哉, 況食者, 民天, 非穀何生, 近觀天有雨勢累日, 而快晴如是, 荏苒旬日, 無復奈何, 上下孰不大憂哉, 予考《事文類聚》, 齊景公時, 天旱, 召君臣問之曰: ‘欲祀靈山。 晏子曰: ‘靈山, 以石爲身, 以草爲髮, 天久不雨, 髮將焦身將, 彼獨不欲雨乎, 祀之無益。’ 景公曰: ‘吾欲祀河伯。’ 晏子曰: ‘河伯, 以水爲國, 以魚鱉爲民, 天久不雨, 百川將竭, 國民將亡, 誰獨不用雨乎, 祀之無益。’ 景公曰: ‘奈何,’ 晏子曰: ‘避宮暴露, 與靈山河伯, 共其憂, 其幸而雨乎,’ 景公, 乃出墅暴靈三曰, 天果大雨云。 由此觀之, 祀之無益, 莫如露坐望雨也。 避殿則已爲矣, 出墅露坐, 雖勢難, 自上欲爲, 而卿等旣以率百官立殿陛爲難, 故不議也。 予率近侍, 殿陛間露坐三日,則不難也。 但人君擧動, 不可輕易, 亦有節次。 令禮官磨鍊, 爲之何如, 自上如是, 則各司官員, 雖不可廢事, 亦當露坐三日, 遣史官議之可也。” 領議政尹殷輔等議: “亢旱已極, 凡弭災祈雨之方, 靡所不至, 而尙無雨徵, 大小愛憫, 計無所出。 聖心益軫, 遍考古事, 至欲躬勞玉體, 露坐履。 精誠所感, 豈無其應, 但古今異宜, 非徒勢有所難, 聖躬之重, 宗社生民所係。 況復深處九重, 居養所移, 非如臣民能耐勞苦。 當此炎暑, 脫因露坐, 致愆聖體, 則奈宗社生民何, 一念之誠, 自應上徹天鑑。 露坐之擧, 恐難輕議。” 傳曰: “予望雨無計, 稽古事議于廷, 則臣子之情, 雖曰恐勞上體, 然予露坐不難, 豈有妨乎, 但廷議如彼, 不敢更議也。 予念自古旱災, 由陰陽之失和也。 君臣、華夷, 君子、小人之間, 皆是陰陽也。 最重於一家者, 夫妻也。 庶民不足言, 京外士夫, 不無踈薄正妻者, 時或有甚者。 夫妻反目, 有乖家道。 豈無感傷和氣乎, 或拘奢侈, 年壯處女婚姻失時, 如此等事, 法司糾檢, 推其家長似可。”

중종 98권, 37년(1542 임인/명가정(嘉靖)21년) 5월 22일(임인) 1번째기사

왕이 친히 기우제를 지내는 것에 대해 삼공과 의논하다

《사문유취(事文類聚)》가운데의‘제경공(齊景公)이 들에 나가 사흘동안 한데에 있었다’는 곳에 부표하여 정원(政院)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일은 대신이 모르는 것이 아니나, 명소(命召)하여 의논하라.

예조의 당상도 아울러 불러야 하겠다. 내가 날씨를 보니, 스무날 안으로 비가 내리지않으면 지극히 근심되겠다. 내가 종묘와 사직에 친제(親祭)하려 하나, 이달에는 친제할 수없는 일【중궁(中宮)이 공주(公主)를 낳았다】이 있다. 여기 부표한 옛일은 지극히 옳다.

다만, 들에 나가 사흘 동안 한데에 있으면서 분향(焚香)하고 정성을 지극히 하면 될 듯하므로 지난해에도 하려하였으나 경(卿)들이 무더위에 거행하기 어렵다고 하므로 멈추었는데 이제는 그리 덥지는 않다.

정성으로 비를 비는데 있어서 서늘하고 더운 것을 헤아릴 것 없겠다.

사흘동안 서있는 것은 어려운 형세이니, 예조를 시켜 의주(儀註)를 써서 아뢰게 하라. 내가 땅에 앉더라도 근시(近侍)를 시켜 분향하고 백관(百官)이 뜰에 서면, 도당(都堂)에서 비를 비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오늘 시작하여 사흘동안 하는 것이 옳겠다. 지난해에 흉년이 들고 이제 또 이러한 것은 예전에 듣지못하던 일이다. 지난해에는 위아래가 황급하여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아마도 인심이, 지난해에 여러 가지로 비를 빌었어도 비를 얻지 못해서 그런다고 여길 듯하다.

이것은, 미리 게을리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이렇게 한다면, 정성이 하늘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도 어찌 생각 없이 이렇게 하였겠는가? 사흘동안 비를 빌어도 비가 내리지않으면, 다음달에 종묘와 사직에 친제하려 한다”하니,

삼공(三公)등이 아뢰었다.

“가뭄의 재변이 절박하므로, 성려(聖慮)가 어찌하여야 비를 얻을지 몰라서 옛일을 살펴 사흘동안 한데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빌려고까지 하시니, 성려가 지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더위에 옥체가 어찌 잠시라도 한데에 앉으시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비를 얻는다하더라도 거행할 수 없습니다. 또, 근래에는 예전에 비를 얻은 일을 두루 거행하여 여러 가지로 빌었으나 아직 응험이 없으니, 한데에서 빌어서 비를 얻는 것도 어찌 반드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뭇사람의 의논이 다 결코 하여서는 안된다합니다.”

사신은 논한다. 지난해에 헌의(獻議)한 자가 있어, 백관을 도당에 서서 빌게 하였더니, 다들 번갈아 분향할 때에 으레 끓어앉는 것을 견디지 못하므로, 분향을 천천히 하는 것을 체모에 맞는다고 하며, 스스로 버릇없게까지 하여 불가(佛家)의 일과 같은 데가 있었다. 그 말단의 일을 하는 것이 이러하여 사람들이 그 의논을 비평하므로 이렇게 아뢴 것이다.

답하기를,

“아뢴 뜻은 알았다. 세자를 시켜 백관을 거느리고 빌게하여도 안되겠는가? 그것도 거행하기 어렵다면, 백관을 모아 궐정(闕庭)에서 비를 비는 것이 오히려 도당에서 비를 비는 것보다 낫겠다. 의논하여 아뢰라”하였는데,

삼공이 회계하기를,

“한데에 사흘동안 앉아있는 것을 세자 역시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백관이 뜰에서서 비를 비는 것이라면 오히려 빨리해야 하겠습니다”하니, 아뢴 뜻은 알았다고 답하였다.

○壬寅/以《事文類聚》中, 景公暴露於野三日處, 付標, 下于政院曰: “此事, 大臣非不知也, 然命召議之。 禮曹堂上亦可竝招也。 予觀日候, 二十日內不雨, 則至爲憂矣。 予欲親祭廟社, 今朔有未可親祭之事。【中宮誕公主。】此付標古事, 至可。 但出野暴露三日, 焚香至誠則似可, 故去年亦欲爲之, 卿等以爲, 苦熱難行, 故止之。 今則不至苦熱, 若以稅雨, 則不計涼熱也。 三日立則勢難, 令禮曹儀註書啓。 予雖坐地, 令近侍焚香, 百官庭立, 則與都堂祈雨有間矣。 雖今日始禱, 至于三日可矣。 去歲凶歉, 今又如此, 古所未聞也。 年前上下, 遑遑不暇, 而于今寂無所爲, 則恐人心, 以去年多般祈雨, 而未得雨, 故如是也。 此先示怠慢之意。 予親率百官, 如是爲之, 則未知其誠, 格于天與否也, 然古者豈無慮, 而若是爲也, 祈雨三日而不雨, 則來月欲親祭宗社矣。” 三公等啓曰: “旱災迫切, 聖慮不知何鎰雨, 至考古事, 欲爲暴露三日, 率百官祈禱, 聖慮至 矣。 然如此炎熱, 玉體豈可頃刻露坐, 定以此得雨, 亦不可行也。 且近來, 歷擧古者得雨之事, 多般祈禱, 未有其應。 暴露得雨, 亦安能必乎, 衆議皆以爲決不可爲也。”

【史臣曰: “前歲有獻議者, 使百官立禱於都堂, 皆不堪相遞焚香時例跪, 故以焚香舒遲者爲得體, 自至於褻慢, 有同於佛家事, 其爲末節如是。 人譏其議, 故以是啓之。”】

答曰: “啓意知道。 令世子率百官祈禱, 亦不可爲乎, 其亦以爲難行, 則會百官, 闕庭祈雨, 猶勝於都堂祈雨, 其議以啓。” 三公回啓曰: “露坐三日, 世子亦豈可爲乎, 百官庭立祈雨, 則猶可速爲也。” 答曰: “啓意知道。”

선수 2권, 1년(1568 무진/명융경(隆慶)2년) 1월 1일(신해) 1번째기사

이황이 상소하여 자핵하고 거듭 치사할 것을 빌다

지중추부사 이황(李滉)이 상소하여 자핵(自劾)하고 거듭 치사(致仕)할 것을 빌었다. 상소의 대략에,

“신은 듣건대 옛날 제왕들이 어진이를 존중하고 선비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급무(急務)로 삼지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진이와 선비라는 것은 모두가 진정한 그 사람을 얻은 것이고 또 실질을 취하였던 것인데, 만약에 혹시라도 어진이를 좋아하는 뜻과 선을 좋아하는 성의만을 가지고 인재를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 그의 인기(人器)가 어떻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칫 부재(不才) 부덕(不德)한 사람에게 잘못 초빙하는 수고를 베풀기 쉽고, 허명으로 세상을 속이는 사람에게 어진이를 존중하는 의식이 가해질 것입니다.

나쁜 사람을 거용하고 바른 사람을 버리는 결과가 되어 백성들이 승복을 않게 되고, 현우(賢愚)가 구별이 없어 국정(國政)이 날로 문란해질 것입니다.

신이 선왕조때 누차에 걸쳐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전번의 세번 소명은 모두 벼슬 품계가 낮아 별로 혐의가 없었으므로, 신이 소명을 들은 즉시 갔었고 한번도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두 번 소명은 혹 승질(陞秩)시키어 중책을 맡기려 하기도 하였고, 혹은 이미 승질하여 중임을 바로 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으로서는 구구한 조심스런 생각에 극력 사면(辭免)을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작년에 입도(入都)하였을 때 망극의 변을 당하고 또 천한 병이 갑자기 심하여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으므로, 일신을 돌보지않아야 할 입장에서 이미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을 바에야 물러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심히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에, 산릉(山陵)의 일이 앞에 있어도 머물지 못하고 경솔히 지레 돌아와버렸습니다.

이 역시 사리가 극에 달하고 의리에 변수가 생겨 부득이하게 취한 행동이었으나, 한때의 물정(物情)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을 것은 당연합니다.

혹은 명예를 좋아해서라느니 혹은 거짓병을 칭한다느니하여, 혹자는 신을 산새에 비유하기도 하고 이단자로 배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신이 신하로서의 도리를 잃었기 때문에 현재의 현인들에게 큰죄를 얻은 것인데, 이제 다시 무슨 도리로 성상의 권우(眷遇)에 부응하여 시대의 쓰임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우인(虞人)이 오지아니한 죄11)를 너그러이 봐주시고 선왕께서 사람을 물리치셨던 예를 참고하셔서 잘못 내려진 윤언(綸言)을 다시 거두시고 치사(致仕)에 관한 훌륭한 법을 거행하소서”하였다.

소(疏)를 들이자 상이 어찰(御札)로 답하기를,

“경의 상소내용을 보니 겸양이 너무 지나치다.

경은 누조(累朝)에 걸친 구신(舊臣)으로서 덕행(德行)이 높고 학문(學問)이 바르다는 것을 비록 여항(閭巷)의 사람인들 모르는 자 누구이며 내 역시 들은 지 오래이다. 경이 선왕조에서 누차에 걸친 소명을 받았고 또 선왕조 말년에는 서울에까지 왔다가 뜻하지 않은 망극의 변을 당하고는 금방 돌아가버렸다. 이는 필시 신정(新政)이 법도가 없고 어진이를 존경하는 성의가 부족했기 때문이니, 나의 회한(悔恨)은 이루 말할 수없다.

옛날의 임금들은 비록 명성(明聖)하였어도 반드시 어진이를 찾아 스승으로 삼았었는데 하물며 나같이 어린시절에 엄한 스승의 가르침도 받지 못한 채 뜻밖의 어렵고 큰 업을 이어받은 자이겠는가? 자교(慈敎)에서도‘나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더구나 상중에 있는 내가 어떻게 교도(敎導)할 것인가. 마땅히 이황(李滉)이어야 할 것이다. 항상 경이 올라오기만을 바란다’하였으니 자의(慈意)가 그러하신데도 경이 오려고 않는다면 그건 너무 생각을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조정에 숙덕(宿德)들이 비록 많지만 나로서는 경을 성두(星斗)처럼 바라고 있으니, 경은 진퇴로써 혐의하지 말고 병이 있더라도 올라와 조정에 머물면서 나의 어리석은 자질을 도와달라”하였다.

註11]우인(虞人)이 오지아니한 죄:임금이 자기에게 해당한 방법으로 부르지않았다하여 가지아니한 죄. 우인(虞人)은 원유(園囿)를 맡은 관리로서 그를 부를 때는 피변(皮弁)으로 부르게 되어 있는데 제경공(齊景公)이 그를 부르면서 대부(大夫)를 부르는 정(旌)으로 불렀으므로 우인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도 가지않았다는 고사.《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

○朔辛亥/知中樞府事李滉上疏自劾, 申乞致仕, 疏略曰:

臣聞, 古之帝王, 莫不以尊賢任士爲急務。 然其所謂賢士, 必皆正得其人, 而眞取其實, 苟或徒有好賢之志; 樂善之誠, 而不思知人之爲難; 人器之如何, 不才、不德之人, 謬加之以招延之勤, 虛名欺世之士, 遽被之以尊賢之儀, 則擧枉 錯直, 而萬民不服; 賢愚混淆, 而國政日紊。 臣在先朝, 累被召命之下, 其前之三召也, 皆官降其品, 別無嫌疑, 則 臣聞命卽行, 未嘗有遲疑不進之時矣。 惟其後之兩召也, 或將陞秩而擬重責; 或已陞秩而授重任。 臣以區區之危 懇, 不得不極力辭免。 況去年入都, 遭變罔極, 賤疾遽劇, 不能供職, 其於匪躬之地, 義旣不展, 則獨有退身一義, 的然明甚。 是以, 山陵在前, 不能留待, 率爾徑歸。 其亦理 極義變, 出於迫不得已也, 而一時物情, 固所咸怪。 或以爲好名; 或以爲佯病, 或比於山禽; 或斥爲異端。 是則臣爲 臣失道, 獲罪時賢大矣, 更將何道, 可以當聖眷, 而爲時 用乎, 伏願寬虞人不至之誅, 考先王退人之禮, 收還誤 下之綸言, 申擧致仕之盛典。

疏入, 以御札答之曰:

觀卿疏辭, 謙讓過矣。 卿以累朝舊臣, 德行之高; 學問之正, 雖閭巷之人, 孰不知之, 予亦聞焉久矣。 卿在先朝, 累被召赴, 至於末年, 又至都下, 奄遭罔極之變, 遽卽旋歸。 是必以新政之無道; 尊賢之不誠故也。 予之悔恨, 其 可勝言, 古之人君雖明聖, 必求賢爲師, 況予自少, 不 受嚴師之敎, 遽承艱大之業, 慈敎亦曰: “予無知識。 況 在煢疚之中, 我何敎導乎, 當如李滉則可也。 常望卿之 上來。” 慈意如是之勤, 而卿不肯來, 無乃未之思乎, 當今朝廷, 雖多宿德, 予之望卿, 亦如星斗。 卿須不以進退爲嫌, 而上來, 勉疾留廷, 以輔予愚末之質。

선수 8권, 7년(1574 갑술/명만력(萬曆)2년) 1월 1일(정축) 3번째기사

우부승지 이이의 시폐와 재변에 관한 만언소

우부승지 이이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에 관한 것과 재변을 없애고 덕을 진취시키는 것에 대한 설을 극진히 아뢰었다. 그 소에,

“신은 삼가 아룁니다. 정사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정사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다하더라도 치적(治績)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총명영의하시고 선비를 좋아하고 백성을 사랑하시매, 안으로는 음악과 주색을 즐기는 일이 없고 밖으로는 말달리고 사냥을 좋아하는 일이 없으시니, 옛날 군주들이 자신의 마음과 덕을 해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다하겠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노성(老成)한 신하를 믿어 의지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 쓰며, 뛰어나고 어진이를 특별히 불러쓰시어 벼슬길이 차츰 밝아지며, 곧은 말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공론이 잘 시행되므로 조야가 부푼 가슴을 안고 지치(至治)를 고대하고 있으니, 기강이 엄숙해지고 민생이 생업을 즐겨야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기강으로 말하면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도를 등지는 것이 예전 그대로이고 호령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그대로이고 백관이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이 그대로이며, 그 민생으로 말하면 집에 항산(恒産)이 없는 것이 예전과 마찬가지이고, 안주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마찬가지이고, 궤도를 벗어나 사악한 짓을 하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일찍이 이를 개탄하고 삼가 그 까닭을 깊이 찾아내어 한번 전하께 진달하려고 하면서도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데, 엊그제 삼가 전하께서 천재(天災)로 인하여 대신에게 하유하신 전교를 보니, 전하께서도 크게 의아해 하시고 깊이 탄식하시어 이 재변을 구제할 계책을 들어보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지사(志士)가 할 말을 다할 기회인데, 애석하게도 대신은 지나치게 황공하고 불안해 한 나머지 할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재이가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이 심원하여 참으로 측량하기 어려우나 역시 임금을 인애(仁愛)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역사를 두루 살펴보건대 옛날 명철하고 의로운 군주가 큰 사업을 이룰 수 있는데도 정사가 혹시 닦여지지 않으면 하늘은 반드시 견책을 내보여 경동(警動)시켰으며, 하늘과 관계를 끊은 자포자기한 군주에 있어서는 도리어 재이가 없었으니, 이 때문에 재이가 없는 재이야말로 천하에 가장 큰 재이인 것입니다. 이제 전하의 명철하고 성스러우신 자질로 큰사업을 할 수있는 지위에 계시고 또 그러한 때를 만났는데도 기강이 이와 같고 민생이 또 이와 같으니, 하늘이 부여한 것에 대하여 그 책임을 다하지못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설사 경성(景星)57)이 날로 나타나고 경운(慶雲)이 날로 일어나더라도 전하께서는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삼가고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재변이 거듭 나타나 무사히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이는 곧 하늘이 전하를 극도로 인애(仁愛)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잘못을 반성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게을리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시의를 모르고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치적은 끝내 요원할 것이니, 민생을 어떻게 보전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어떻게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제 약간 알고 있는 것을 다 토로하여 먼저 고질화된 폐단을 아뢰고 다음으로 그것을 구제할 계책을 거론하겠습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심기(心氣)를 가라앉히셔서 잡다한 글을 싫어하시거나 뜻에 거슬린다고 노여워하지 마시고 살펴주소서.

대체로 시의(時宜)라고 하는 것은 수시로 변통하여 법을 마련해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자(程子)가《주역》을 논하기를,‘때를 알고 형세를 아는 것이야말로 《주역》을 배우는 큰 법이다’하고, 또 말하기를,‘수시로 변혁하는 것이 곧 상도(常道)이다’하였습니다.

대체로 법은 시대 상황에 따라 만드는 것으로서 대가 변하면 법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순(舜)이 요(堯)의 뒤를 이었으니 의당 다른 것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12주를 고쳐 9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인이 변혁하기를 좋아하여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시대를 따라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하기를,‘요·순·우가 서로 뒤를 이었으나 그 문장과 기상은 역시 조금씩 다르다’고 한 것입니다.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이후 그 사이에 일어난 작은 변화를 낱낱이 예시할 수 없겠습니다만 그 중에 큰 것만 들어 말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라 사람은 충(忠)을 숭상하였으나 나중에 충폐(忠弊)가 생겼기때문에 질(質)로써 구제하였고, 질폐가 생겼기때문에 문(文)으로써 구제하였으며, 문폐를 구제하지 못하게 되자 그 뒤에 천하의 법도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져 강한 진(秦)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진나라는 포악한 정사로 시서(詩書)를 불태우고서 망하였고, 한(漢)나라가 일어나서는 그 폐단을 거울삼아 너그러운 덕을 숭상하고 경술(經術)을 존숭하였으나, 급기야 폐단이 생겨서는 허문(虛文)을 숭상하고 실절(實節)이 없어져 권세가 외척에게 돌아가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습니다.

세조(世祖)58)가 일어나 절의를 포숭(褒崇)하니 이에 선비들이 명절(名節)을 힘썼으나, 그것이 폐단이 생겼을 때는 예(禮)로써 절제할 줄을 몰라 죽음을 매우 하찮게 보는 등 고절(苦節)이 되어 중도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 그것을 싫어하였으나 당시에 어느 현주(賢主)가 나와서 구제한 일이 없기때문에, 고절이 위(魏)·진(晋)의 광탕(曠蕩)함으로 변하여 허무를 숭상하고 예법이 없어졌습니다.

예법이 없어진 뒤에는 이적(夷狄)과 다름이 없이 되었으므로 오호(五胡)가 중화(中華)를 어지럽혀 중원(中原)이 쑥밭이 되었습니다.

어지러움이 극도에 이르면 다스려지는 법이기 때문에 정관(貞觀)59)의 치적이 나오기는 했으나, 폐단을 구제함에 있어서 해야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오히려 이적의 풍조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삼강(三綱)이 바르지 못하여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못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못하니, 번진(藩鎭)은 빈공(賓貢)하지않고 권신(權臣)은 강포(强暴)하는 등 나라는 여전히 쇠미하여 오대(五代)의 혼란기가 있게 되었습니다.

송(宋)나라가 일어나서는 번진의 걱정을 경계하여 병권(兵權)을 풀어버리고 위세를 거두어 잡았으나, 진종(眞宗) 이후로 태평시대에 젖은 나머지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무략(武略)은 부진하였으며, 인종(仁宗) 때 재정은 비록 극도로 풍족하였으나 쇠퇴한 기상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당시 대현(大賢)들은 모두가 변통할 계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곧바로 신종(神宗)에 이르러 변통할 기회를 만나 큰 사업을 할 뜻을 갖게 되었으나, 신임하였던 자는 왕안석(王安石)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의(仁義)를 뒤로 하고 공리(功利)를 앞세우며 천인(天人)의 뜻을 어기고 난망(亂亡)을 재촉하였으므로, 도리어 변통하지않은 것이 더 나은 것만 못하였습니다. 결국 큰 재앙을 초래하여 중화가 이적으로 변하였으니, 다른 것이야 말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상하 수천년동안 역대 치란의 자취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시대에 따라 잘 구제한 경우는 삼대(三代)에만 보일 뿐, 삼대 이후로는 구제한 경우도 본래 적은데다 그 역시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시대에 따라 변경할 수 있는 것은 법제인 반면, 고금을 막론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은 왕도(王道)요, 인정(仁政)이요, 삼강이요, 오상(五常)입니다. 그런데 후세에서는 도술(道術)이 밝지못하여 변경할 수 없는 것을 고치는 때도 있고 변경할 수 있는 것을 굳게 지키는 때도 있었으니, 이것이 다스려진 날은 항상 적고 어지러운 날은 항상 많았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동방으로 말하면 기자(箕子) 팔조목(八條目)은 문헌에 그 증거가 없고, 삼국(三國)은 혼란하여 정교(政敎)가 있었다는 말이 없으며, 전조(前朝)60) 5백년은 온통 비바람속에 암울하였습니다.

아조(我朝)에 이르러 태조(太祖)께서 국운을 여시고 세종(世宗)이 그 제도를 계승하여 지키면서 비로소《경제육전(經濟六典)》을 썼고, 그 성묘(成廟) 때에 이르러 《대전(大典)》을 간행하였는데, 그 뒤 수시로 법을 세워 이를《속록(續錄)》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대체로 성군으로서 성군의 뒤를 이었으므로 서로 다른 것이 없었어야 할 것인데도 어느 때는《대전》을 쓰고 나중에는《속록》으로 추가했으니, 이는 시의를 따른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당시에는 건백(建白)하여 제도를 만들어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법이 막힘이 없이 시행되어 백성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산(燕山) 때에 이르러 황란(荒亂)하여 용도가 너무도 사치스러웠으므로, 조종(祖宗)의 공법(貢法)을 고쳐 날로 아래에서 덜어 위에다 보태는 것으로 일삼았습니다.

따라서 중종반정(中宗反正)때 진정 그전대로 환원했어야 할 것인데, 초년의 당국자는 그저 무식한 공신들뿐이었습니다. 그 뒤 기묘 제현(己卯諸賢)이 조금 큰 사업을 해보려고 하였으나 참소로 참화를 입어 혈육이 가루가 되었고, 그 뒤에는 기묘사화보다도 참혹한 을사의 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사림(士林)은 숨을 죽이고 눈치나 보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 감히 국사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권간(權奸)의 무리가 마음놓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구법(舊法)이라하여 준수하고 자기에게 해로운 것은 신법(新法)이라 하여 혁파하였으니, 그 결과는 백성을 수탈하여 자기를 살찌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라의 형세가 날로 기울고 나라의 근본이 날로 손상되어가는 일에 대해서 그 누가 털끝만큼이라도 생각했겠습니까?

이제 다행히도 성명(聖明)의 시대를 만나 학문에 마음을 두고 민생을 생각하시어 시대에 맞춰 법을 마련, 한 세상을 바로잡아 구제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위에서는 한단학보(邯鄲學步)를 우려하여 경장(更張)할 생각이 적으시고, 신하된 자들은 남에 대하여 논할 적에는 왕안석(王安石)같은 환란이 생길까 염려하고, 제 몸을 아끼는 입장에서는 기묘년과 같은 패배가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감히 경장하자고 주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시험삼아 오늘날의 정치에 대하여 말씀드릴까 합니다.

공법(貢法)은 연산군 때에 백성을 학대하던 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고, 관리의 임용은 권간(權奸)이 청탁을 앞세우던 습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문예(文藝)를 앞세우고 덕행을 뒤로하여 행실이 높은 이는 끝내 작은 벼슬에 머물게 되고, 문벌을 중시하고 어진 인재를 경시하여 문벌이 빈약한 자들은 그 능력을 펴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승지가 어전에 들어가 아뢰지 못하기 때문에 근신(近臣)은 소원해지고 환관(宦官)과 친근하게 되며, 시종(侍從)이 정의(廷議)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신(儒臣)은 경시되고 속론(俗論)이 중시되고 있습니다.

한 관직에 오래있지 않고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치는 것을 영예로 여기고, 직무를 나누어맡지 않고 조사(曹司)에 전담시키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폐습과 그릇된 규칙들은 낱낱이 아뢰기 어려울 정도인데, 이는 기묘사화 때 비롯된 것이 아니면 필시 을사사화 때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논자(論者)들은 이를 조종(祖宗)의 법도로 여기어 감히 경장하자는 논의를 꺼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시의(時宜)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성왕(聖王)이 만든 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적절히 변통하는 현명한 자손이 없으면, 마침내는 반드시 폐단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은 대 성인으로서 노(魯)나라를 다스렸지만 뒷날 쇠퇴해질 형세를 떨치게 해놓을 수는 없었고, 태공(太公)은 대 현인으로서 제(齊)나라를 다스렸지만 뒷날 왕위를 찬탈하게 될 조짐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 현명한 자손이 나와서 조종이 남긴 뜻을 잘 따르며 법에만 구애받지 않았던들, 어찌 쇠란(衰亂)의 화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 조종들께서도 입법(立法)하신 당초에는 그렇게 빈틈이 없었으나, 2백년이 지나오는 동안 시대도 바뀌고 일도 변화하여 폐단이 없지않다면, 또한 변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후일에 잘못 제정된 법의 경우이겠습니까?

마땅히 서둘러 개혁하여 불에 타는 자를 구하고 물에 빠진 자를 구해주듯 백성을 구제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주역》에 이르기를,‘궁(窮)함이 극도에 이르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통해진다’하였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시어 변통할 것을 생각하소서.

이른바 실공(實功)이란 것은 일을 하는데에 성의가 있고 헛된 말을 하지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정성이 없으면 어느 것도 성립되지않는다’하고, 맹자(孟子)는 말하기를,‘지극한 정성에는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 없다’하였습니다. 참으로 실공이 있다면 어찌 실효가 없겠습니까? 오늘날 치평(治平)의 성과를 얻지못하고 있는 것은 실공이 없기때문인데, 걱정되는 일이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와 아래가 서로 믿는 실상이 없는 것이 첫째이고,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려는 실상이 없는 것이 둘째이고, 경연(經筵)에서 성취되는 실상이 없는 것이 셋째이고, 현명한 사람을 초치(招致)하여 거두어 쓰는 실상이 없는 것이 넷째이고, 재변을 당하여도 하늘의 뜻에 대응하는 실상이 없는 것이 다섯째이고, 여러 가지 정책에 백성을 구제하는 실상이 없는 것이 여섯째이고, 인심이 선(善)을 지향하는 실상이 없는 것이 일곱째입니다.

‘위와 아래가 서로 믿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임금과 신하의 교제는 마치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주역》 구괘(姤卦)의 단사(彖辭)에 말하기를,‘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니 만물이 모두 빛난다’고 하였는데, 정자(程子)의 전(傳)에 해설하기를,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지못하면 만물이 생기지못하고, 임금과 신하가 만나지 못하면 정치가 일어나지못하고, 성인과 현인이 서로 만나지못하면 도덕이 형통하지 못하고, 사물(事物)이 서로 만나지못하면 공용(功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서로 만나 마음이 서로 통해서 부자(父子)와 같이 친밀하고 부신(符信)과 같이 마음이 맞게 되어, 골육지친(骨肉之親)이라 할지라도 그 사이를 이간시키지 못하고, 쇠를 녹이는 참소라도 그 사이에 용납됨이 없게 된 뒤에야 말이 시행되고 계책이 쓰여져 여러 가지 업적이 이룩되는 것입니다.

삼대(三代)61)의 성왕(聖王)들도 모두 이 도를 따랐으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깊이 믿지아니하고는 제대로 치적을 이룩한 경우는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명철하심은 부족함이 없으나 지니신 덕은 넓지 못하고, 선(善)을 좋아하심은 대단하시나 깊은 의심을 떨쳐버리지는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뭇 신하들 중에 건백(建白)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주제넘다고 의심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자를 과격하다고 의심하고, 여러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면 당파가 있다고 의심하고, 잘못된 자를 공격하면 모함한다고 의심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명을 내리실 때는 말씀 속에 감정이 들어있고 좋아하고 싫어하시는 것이 일정치 않으십니다. 심지어 며칠 전 하교에는‘대언(大言)을 다투어 아뢰고 전에 없던 일은 행하기 좋아하니 당연히 풍속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올바로 될 것이다’라고까지 말씀하셨는데, 이 하교가 한번 나오자 뭇사람의 의혹이 더욱 늘어났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선을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이 어렵다’하고, 소옹(邵雍)은 말하기를,‘잘 다스려진 세상에서는 덕을 숭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을 숭상한다’고 하였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대언을 다투어 아뢴다고 해서 풍속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올바로 되게 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는 대언을 옳다고 여기십니까? 그르다고 여기십니까?

만약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그 대언이란 것은 다만 임금을 인도하여 올바른 도(道)를 행하게 하고 기필코 지치(至治)에 이르게 하려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마땅히 그 의견을 서둘러 채택하셔야 하고, 다투어 아뢴다는 말씀으로 기롱하거나 풍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좋은 말을 올렸더라도 그것을 채용하지않으면 그 말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사(子思)가 신하가 되었어도 노목공(魯穆公)의 영토는 즐어들었고, 맹자가 경(卿)이 되었어도 제선왕(齊宣王)의 왕업(王業)은 흥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진언하는 자는 자사나 맹자와 같은 사람들도 아니거니와 그 말을 위에서 채택한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시사(時事)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뭐가 이상하겠습니까?

만약 대언(大言)이 그른 것이라면 그들이야말로 말을 지어내고 사단을 일으키는 무리일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마땅히 부화하고 경박한 것을 억누르고 돈독하고 착실한 것을 힘쓰시어 조정을 편안히 하고 인심을 진정시키셔야지, 대언을 아름다운 일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 곧은 말을 가지고 상께서 다투어 아뢴다고 탓한다면 사기가 손상되고 부정한 길이 열리게 될 것이며, 부화하고 경박한 것을 대언이라고 찬미한다면 허위가 자라나고 실질적인 덕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이 중 어느 하나에 해당되실 것인데, 혹시 전하께서 실상 깊은 뜻은 없이 우연히 실언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뭇 신하들에 대해 깊이 신임하시는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뭇 신하들도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못하여, 성상의 교지가 내릴 때마다 한마디 말씀만 이상하면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지고 두려워하여 항상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못을 대하는 듯합니다.

어저께 대신들이 부르심을 받았을 적에도 모두 황공해 할 뿐, 천심(天心)을 돌리고 세도(世道)를 구할 수 있는 계책을 아뢴 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만약 대신들이 전혀 식견이 없다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어찌 전하께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신다는 것을 미리 알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는 한 낭관(郞官)을 차출하여 한 잔읍(殘邑)을 맡긴 경우에 있어서도 성상께서 백성을 걱정해서 그러신 것이지, 반드시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니, 또한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정의 선비로서 훌륭한 명성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 불안해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이는 어찌 전하의 정성이 평소에 신임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다.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마음을 쓰는 것이나 일을 처리하는 것이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공명정대하여 만물이 모두 보았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뜻을 밝게 알지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죽인다 해도 원망하지 않았고 그들을 이롭게 해준다해도 은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까지도 성상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날 중묘(中廟)와 조광조(趙光祖)의 관계는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 것이라고 말할 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음흉하고 사악한 것들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마치 밝은 거울이 먼지와 때로 가려진 것같이 되었으니, 낮에는 어전에서 응대를 하다가도 밤에는 천길 골짜기로 떨어져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사림은 사화를 겪은 지 오래되지않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소신은 항상 천견(淺見)으로 논하기를, ‘중묘께서는 진정 성군이시나 지나치게 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군자의 말도 들어가기 쉬웠지만 소인의 참소도 들어가기 쉬웠다.

지금 성상께서는 그렇지 아니하시어 남의 말을 반드시 자세히 살피고 소홀히 듣지 아니하시므로 군자가 아무리 안타까와해도 계합(契合)되기 어려우나, 소인도 역시 감히 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속이지 못한다.

성상의 시대에는 사림의 화는 분명히 없을 것이나, 다만 백성이 궁해지고 나라가 피폐해지는데도 변통할 방책이 없어서 마침내는 토붕와해의 형세가 되고 말 것이 두렵다’하였는데, 지금 사류중에서 신의 말을 믿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어울림에 있어 정성과 신의가 부합되지 못하면서도 제대로 치평(治平)을 보전했다는 말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첫째입니다.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려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나라에서는 벼슬을 마련하고 직책을 나누어놓아 각기 모두 맡은 일이 있게 하였습니다.

삼공(三公)은 모든 기무(機務)를 총괄하고 육경(六卿)은 여러가지 업무를 나누어 다스리며, 시종(侍從)은 따지고 생각하는 책임이 있고 대간(臺諫)은 일을 살피고 듣는 임무가 주어져있으며, 아래와 여러 관아의 작은 벼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각기 그 책임이 있습니다.

감사(監事)는 지방에 교화를 펴고, 절도사(節度使)는 변방을 맡아 감독하고, 수령은 감사의 걱정을 나누어 맡고, 진장(鎭將)은 국경수비를 감독하는 등 각기 그 직책이 없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삼공은 진정 인망이 두터운 자들이기는 하나, 또한 감히 새로운 정책을 건백하여 시행하지못한 채 부질없이 공손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꺼리고만 있을 뿐,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잘살게 함으로써 세도(世道)를 만회할 가망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또 무엇을 책망하겠습니까? 대관(大官)은 위에서 유유히 지내며 오직 앞뒤 눈치보기에 힘쓸 따름이고, 소관(小官)은 밑에서 빈둥빈둥 지내며 오직 기회를 엿보아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나 일삼고 있습니다.

기강을 바로잡는 일을 대간에게 전담시키고 있는데, 한두명 간사한 조무라기들만 잡아냄으로써 책임이나 면하는 것에 불과하고, 관리의 전형과 선임(選任)은 오로지 청탁으로 이루어져 한두 명사(名士)만을 벼슬자리에 안배함으로써 공정하다는 구실로 삼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 관아의 벼슬아치들까지도 자신이 관장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날이 쌓이고 달이 감으로써 승진을 추구하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대소관원중에 어찌 봉공멸사(奉公滅私)하는 사람이 한두명쯤이야 없겠습니까? 다만 그들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여 도움이 되지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감사는 돌아다니며 스스로 즐기면서 대접을 잘하고 못하는 것과 문서를 잘 만들고 못만드는 것을 가지고 수령의 성적을 매기고 있으니, 그 처벌과 승진시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절도사는 엄한 형벌로써 자신의 위세나 드러내고 약탈을 하여 자신의 이익이나 추구하면서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케 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그 두 가지 일에 다 실책을 범하고 있으니, 곤외(閫外)의 책임을 욕되지 않게 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수령은 오직 가렴주구하여 자신의 이익이나 취하고 윗사람에게 아부하여 명예나 추구할 뿐, 백성을 아끼고 위하는데 제대로 마음을 쓰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매우 드뭅니다.

진장(鎭將)은 우선 군졸 숫자나 따지면서 자기에게 돌아올 면포(綿布)가 얼마나 될지 계산할 뿐, 나라의 방비를 걱정하는 자는 행여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서리배(胥吏輩)들만이 기회를 틈타 중요한 일의 처리를 장악하고 있으니, 백성들의 고혈은 서리배의 손에 거의 말라버린 형편입니다.

심지어는 군사를 뽑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인데도 뇌물이 요로에 횡행하고 가짜문서가 진짜기록을 혼란시키고 있는데, 촌민(村民)들이 소를 내주려고 해도 색리(色吏)들은 반드시 면포를 요구하여 소를 가지고 베를 바꾸게 되니 소값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이는 경외(京外)가 다 그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들끊고 있으니 하물며 다른 일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조식(曺植)이 일찍이 말하기를,‘우리라는 서리때문에 망할 것이다’하였습니다. 이 말이 지나치기는 하나 또한 일리가 있으니, 이는 뭇 신하들이 일에 책임을 지지않는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관원이 제각기 맡은바 직책을 다한다면 어찌 서리때문에 나라가 망할 일이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책임을 진 관원이 적절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를 바꾸고자 하더라도 한 때의 인물들이 모두 이 정도에 불과하므로 현명한 인재를 갑자기 마련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형벌과 법이 엄하지 않다하여 그것을 엄중하게 하려고 할 경우, 법이 엄중해지면 간사한 자들이 더욱 불어나게 됨과 동시에 법을 엄중하게 하는 것 또한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해 두면 온갖 폐단이 날로 늘어나고 여러 가지 일들이 날로 그릇되어 민생은 나날이 곤궁해지고 혼란과 쇠망이 반드시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둘째입니다.

‘경연에서 아무 것도 성취하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옛날에는 삼공(三公)의 관직을 두었으니, 사(師)는 임금에게 교훈으로 인도하여 주었고 부(傳)는 덕의(德義)를 가르쳐 주었으며 보(保)는 신체를 잘 보전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법도가 폐지된 뒤로는 사·부·보의 책임이 오로지 경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말하기를,‘임금의 덕의 성취는 그 책임이 경연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경연을 설치한 것은 다만 글을 강독하여 장구(章句)의 뜻이나 놓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혹을 풀어 도를 밝히고 교훈을 통해 덕을 진취시키고 정사를 논하여 올바른 다스림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종조에서는 경연관을 예로써 대우하고 은덕으로써 친근히 하여, 친족이나 부자간처럼 정의(情意)가 서로 잘 통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시신(侍臣)들은 학문이 많이 부족하고 성의도 대부분 결핍되어, 입시(入侍)하기를 꺼려하는 자가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경연직을 기피하는 자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정성과 깊은 생각을 품고서 성상을 가까이 모시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요즘에는 경연이 자주 열리지 않아 접견하는 일도 드물거니와, 예모(禮貌)가 엄숙하여 말을 자연스럽게 하지도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말을 주고받는 일이 매우 드물어 강문(講問)도 자세하지 못하며 정사의 요체와 시폐에 대하여도 물어보시는 일이 없습니다. 간혹 한두 명의 강관(講官)이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권하는 일이 있더라도 역시 범연히 들어넘기기만 할 뿐, 몸소 시험하고 실천해 보시려는 실상이 전혀 없습니다.

경연이 파한 뒤에는 대내(大內)가 깊으므로 시신들은 그리는 마음만 간절할 뿐, 전하의 좌우에는 오직 내시와 궁녀들만이 있으니, 전하께서 평소에 무슨 책을 보시고 무슨 일을 하시고 무슨 말을 듣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신하들도 그것을 알 수 없는 형편인데 더구나 밖의 신하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맹자는 아성(亞聖)이시고 제(齊)나라 임금이 존경하는 것 또한 지극하였는데도,‘하룻동안 볕을 쪼이고 열흘 동안 차게 하면 되겠는가?’하는 탄식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시신들은 자질이 옛 사람에 비하여 매우 부족한데다 그처럼 소외까지 당하고 있으니,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이 걱정할 일의 셋째입니다.

‘현인을 초치하여 거두어쓰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옛날의 제왕은 지극한 정성으로 현인을 구하면서 오직 힘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혹은 꿈속에서 감응되기도 하고 혹은 낚시질하고 있는 자를 만나기도 하였는데62) 그들을 현인으로 대우하여 포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맡겨주신 직위를 그들과 함께 누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늘의 녹을 먹게 하여 만백성에게 은택이 베풀어지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하여 여론을 묻고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그를 살피고, 일을 처리하는 것을 가지고 그를 시험하고 나서 과연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곧 그를 가까이하고 그의 계책을 채용하여 그의 도를 행하게 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을 두고 임금이 현인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선비를 사랑하고 현인을 구하시는 것이 옛날의 군주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숨어있는 곧은 이와 덕있는 이를 거의 모두 찾아내셨으니, 그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은 근고(近古)에 드문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사가 천거할 때에 형식적으로 아무개는 쓸 만하다고 말할 따름이고, 상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진달하는 일이 없습니다.

유사가 이미 적합하게 천거하지 못한 위에 성상께서도 또한 친히 그 사람을 보시고 그의 현부(賢否)를 살펴보시는 일이 없이 그저 관례에 따라 벼슬을 줄 따름입니다. 몸을 닦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것은 무엇을 구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니, 초야에 어찌 작록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선비의 거취는 본디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작은 벼슬이라도 낮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능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하께서 현인을 불러들임에 있어서는 벼슬만 내려줄 뿐, 만나보거나 살피고 시험하여 뽑아씀으로써 도를 실천하게 하는 실상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천거되어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모를 위하여 굴복하였다는 사람도 있고, 가난 때문에 벼슬한다는 사람도 있고, 다만 성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왔다는 사람도 있으니, 도를 실천하기 위하여 나왔다는 사람은 한사람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현인을 구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인데도 결국 헛된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 되고마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가 무엇을 통하여 이루어지겠습니까?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넷째입니다.

‘재변을 당하여도 하늘의 뜻에 대응하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늘과 임금의 관계는 마치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노여움이 일어나 말과 얼굴에 나타낸다면, 자식으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더라도 반드시 한층 더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 뜻을 받들고 따라 부모가 기뻐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잘못이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이 경우에는 더욱 허물을 자책하며 애절히 사죄하고, 마음을 고치고 행동을 바꾸어 공경과 효성을 다하여 반드시 부모가 기뻐하는 안색을 지니도록 하여야만 될 것이며, 두려운 마음만 품고서 문을 닫고 가만히 있기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왕으로서 천변(天變)을 당하였을 적에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자신을 돌이켜 보며 스스로 반성하고 정사를 잘못한 것은 없는가 두루 살펴서 자신에게 아무런 허물이 없고 정사에 결함이 없더라도 마땅히 더욱 닦고 힘쓰며 공경해 마지않아야할 것이고, 잘못이 없다하여 스스로 용서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런데 더구나 자신에게 허물이 있고 정사에 결함이 있는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많은 사람의 의견을 구하여 지식과 견문을 넓히고, 현인을 등용하여 부족한 능력을 메우고, 백성들을 돌보아 부지런히 무마해 주고, 폐단을 개혁하여 정사가 잘 다스려지게 함으로써 반드시 전일의 잘못을 보정(補正)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놓을 수 있도록 힘써야만 할 것이니, 허둥지둥 아무런 방책도 없이 마치 잘못을 저지른 자식이 문을 닫고 가만히 들어앉아 부모의 노여움이 저절로 가라앉기만 바라고 있듯이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예사로 여기고 두려운 줄을 모르게 되었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변고가 극히 참담하였기 때문에 전하께서 놀라시어 공경하고 두려워하심을 더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혼란을 돌려 치평을 마련할 조짐이 바로 오늘날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기회를 만나고서도 별로 닦고 다스리는 조치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정전(正殿)을 피하고 감선(減膳)하는 것은 재난을 두려워하는 형식이고 말단이며, 덕을 쌓고 정사를 닦는 것이야말로 재난을 두려워하는 실상이며 근본입니다.

형식과 말단도 물론 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실상과 근본이 지금 어떻게 조치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다섯째입니다.

‘여러 가지 정책에 백성을 구제하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법령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그 피해는 백성에게 돌아가는 것이니, 정책을 마련하여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백성을 이롭게 하는 길입니다.

성교(聖敎)에‘임금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는 것이니, 여러가지 벼슬자리를 마련하고 여러가지 직책을 나누어놓은 것은 오로지 민생을 위한 것이다. 백성이 피폐해지면 나라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여러번 거듭 읽어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위대하십니다, 임금의 말씀이시여. 한결같으십니다, 임금의 마음이시여.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백성을 편안케 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려놓을 일대 전기입니다. 삼대(三代) 이후로 임금과 신하들의 직책이 오로지 민생을 위하는 것임을 알았던 임금이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착한 마음만 있고 법도가 없으면 그 마음을 펴나가지 못하고, 법도만 있고 착한 마음이 없으면 그 법도를 행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본디 이와 같은데도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는 아직도 제대로 펴지지 않고 있습니다. 뭇 신하들이 정책을 건의하는 것은 오직 그 말단적인 것만을 바로 잡으려 하고 근본적인 것은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듣기에는 아름다운 것 같으나 행해보면 아무 내용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한가지 계획을 진언하여 명목없는 조세(租稅)를 없앨 것을 요청해 보아도 각 고을의 세금징수는 여전하고, 다음날 한가지 일을 건의하여 전호(田戶)의 부역(賦役)을 고르게 할 것을 요청해 보아도 호족(豪族)이 부역에서 빠지는 것은 전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선상(選上)을 줄인 것은 공천(公賤)을 소복(蘇復)시키기 위한 것인데도 치우치게 고통을 받은 자들은 예나 다름없이 떠돌아다니고, 방납(防納)을 금한 것은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한 것인데도 뇌물을 받으며 백성을 갈취하는 자들은 더 심하게 뛰고 있습니다.

탐욕을 부리는 관원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면 그 후임자가 반드시 앞 사람보다 훌륭한 것도 아닌데 공연히 마중하고 전송하는 폐나 끼치게 되고, 변장(炳將)을 가려 보낼 것을 청하면 인망(人望)이 두터운 자가 반드시 신진(新進)보다 우수하지도 않은데 도리어 방자하여 조심성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 밖에 훌륭한 명이 내려지고 아름다운 법이 반포된 것도 한두번이 아니지만 주현(州縣)에 그저 몇 줄의 문서 쪽지만 전달할 뿐, 시골 백성들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조차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가 조정에 진출하고 신하가 의논을 내더라도 민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되어 다만 어떤 사람은 벼슬이 높아 출세하였으니 부러운 일이라고나 할 뿐, 어떤 사람이 등용된 덕분에 그 혜택이 백성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훌륭한 말이 이와 같이 아무런 성과도 없다면, 비록 한(漢)나라의 주운(朱雲)과 급암(汲黯)같이 곧은 신하가 조정에 가득하고 바른 말이 빗발치더라도, 백성들이 궁하여지고 재물이 바닥나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다니게 되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와는 반대로 아뢰는 말이 한번 잘못되기만 하면 그 피해가 지체없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으니, 아, 괴이하게도 이는 고금을 통하여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비유하건대 이는 마치 만칸이나 되는 큰집을 오래도록 수리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크게는 들보에서부터 작게는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썩지않은 것이 없는데, 서로 떠받치며 지탱하여 근근히 하루하루를 보내고는 있지만 동쪽을 수리하려 하면 서쪽이 기울고 남쪽을 수리하려 하면 북족이 기울어 무너져버릴 형편이라서, 여러 목수들이 둘러서서 구경만 하고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는 형편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대로 방치하고 수리하지 않는다면 날로 더욱 썩고 기울어져 장차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니, 오늘날의 형세가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여섯째입니다.

‘인심이 선을 지향하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교화가 밝지못하여 백성들이 흩어진 지 오래된 결과 선한 성품을 타고 났다하더라도 너무나 심히 흐려지고 가리워졌다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처음 등극하셨을 때는 인심이 희망에 차서 그런 대로 선을 지향하려는 생각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그때에 성덕(聖德)이 날로 진취되고 치화(治化)가 날로 향상되었더라면 오늘날의 인심이 어찌 이 지경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오직 초년(初年)에 대신들의 보필이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하를 천근(淺近)한 법규로 그르치게 하고 민생을 비천한 지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대신들이 간혹 공명(公明)한 마음으로 공론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청론(淸論)은 약하고 저속한 견해가 고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한 말을 듣거나 선한 사람을 보면 남의 체면 때문에 흠모하는 자도 있고, 겉으로는 좋아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 꺼리는 자도 있고, 혹은 버젓이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하는 자도 있었는데, 진심으로 그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은 적고 허위가 성행하게 되었으니, 감옥에 갇혔다가 여러사람들에 의하여 구제를 받았다하더라도 꼭 죄가 없다고 할 수 없고, 수령으로서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은 자라고 해서 꼭 공적이 있다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관천(館薦)은 본디 학행이 뛰어난 이를 구하기 위함이었는데 술자리를 베풀어 많은 선비들을 유혹하는 자도 간혹 있고, 이선(里選)은 본디 단정하고 훌륭한 사람을 구하기 위함이었는데 바른 행실을 버리고 염치에 어두운 자들도 가끔 끼어들고 있습니다.

만약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는 사람까지 또 사람을 제대로 따라 가리지 않게 한다면 청탁(淸濁)이 뒤섞이고 현우(賢愚)가 엇섞여서 그 폐단을 구제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아래 백성들의 경우는 굶주림과 헐벗음이 절박하여 본심을 모두 잃어 부자형제 간이라도 서로 길가는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고 있으니, 그 밖의 일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강상(綱常)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형정(刑政)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의 길을 따르며 지금의 습성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성현이 윗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교화를 펼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향약(鄕約)을 널리 실시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습성을 가지고 향약을 실시한다면 또한 좋은 풍속을 이룩하는 성과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일곱째입니다.

대체로 이상 일곱가지 걱정은 지금 세상의 깊은 고질로써 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경에 빠진 것은 오로지 이것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일곱가지 걱정을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비록 성상께서 위에서 수고로우시고 청론이 아래에서 성행한다하더라도, 역시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성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임금이 덕망을 잃어 스스로 패망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은 이치상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하등 유감이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명께서 무슨 실덕이 있으시기에 나라의 형세가 이와 같이 위태롭게 되었단 말입니까?

신은 비록 병이 많고 재주는 적어 성상을 보필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으나, 구구한 혈성은 어느 사람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입궐하여 전하를 배알하면 영명한 모습이 통철하시고 슬기로운 의논이 명쾌하신데, 밖에 나와서 사방을 돌아보면 백성들은 신음하고 괴로와하며 위축이 되어 갈 곳을 모르는 형편이니, 매우 이상하여 긴 한숨을 쉬고 애타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아, 병이 위중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신의(神醫)라면 그래도 고칠 수 있고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하더라도 명철한 임금이라면 그래도 부흥시킬 수가 있습니다. 지금의 조정은 그래도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권간들도 자취를 감추었으며, 사경(四境)은 아직까지 완전하여 외란(外亂)이 일지않고 있으니, 지금이라면 그래도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나 조금이라도 늦춘다면 기회를 놓쳐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국가가 한가하면 이 때를 이용하여 나라의 정형(政刑)을 닦으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시어 나라를 떨쳐 일으킬 방법을 생각하소서.

이제 몸을 닦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요체를 진언하여 천명(天命)이 영원하기를 비는 방법으로 삼고자 합니다.

몸을 닦는데에는 그 요강이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성상의 뜻을 분발하여 삼대(三代)의 흥성했던 시대로 되돌려놓기를 기약하는 것이고, 둘째는 성학(聖學)을 힘써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공부를 다하는 것이고, 셋째는 편벽된 사사로움을 버려 지극히 공정한 도량을 넓히는 것이고, 넷째는 어진 선비를 친근히 하여 깨우치고 보필해 주는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에는 그 요강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심을 열어 뭇 신하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지나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애는 것이고, 셋째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스런 풍조를 개혁하는 것이고, 넷째는 선상(選上)의 제도를 바꾸어 공천(公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고, 다섯째는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성상의 뜻을 분발하여 삼대의 흥성했던 시대로 되돌려놓기를 기약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옛날에 제(齊)나라 대부(大夫) 성간(成覵)은 제경공(齊景公)에게 말하기를,‘그도 장부요 나도 장부인데 내가 어찌 그를 두려워해야 합니까?’여기서‘그’란 성현을 뜻합니다. 대체로 경공과 같은 보잘것없는 자질을 가지고도 분발하고 힘씀으로써 스스로 강하게 한다면 충분히 성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성간이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맹자는 양혜왕(梁惠王)이나 제선왕(齊宣王)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왕도(王道)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인정(仁政)이 아니면 권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양혜왕(梁惠王)이나 제선왕과 같은 자질을 가지고도 참으로 왕도를 실행하고 인정을 실시하기만 한다면 역시 삼왕(三王)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맹자가 그와 같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 분들이 어찌 큰 소리치기나 좋아하고 실질적인 효과는 헤아리지 않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자질이 매우 아름다우시어 인자하심은 백성을 보호하기에 충분하고, 총명은 간사함을 분별하기에 충분하고, 용맹은 어떠한 결단을 내리시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다만 성왕(聖王)이 되어보겠다는 뜻이 서있지 아니하고 치평을 추구하는 정성이 독실하지 아니하며, 아예 선왕(先王)같은 임금은 기약할 수 없다고 여긴 나머지, 뒤로 물러나 스스로를 작게 평가하심으로써 전혀 떨치고 분발하려는 생각이 없으십니다.

전하께서 무슨 소견으로 그러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뜻은 크나 재능이 모자라 일에 실패한다는 것은 몸을 닦는 일에는 힘쓰지 아니하고 실행하기 어려운 정책을 함부로 추진하며, 강약을 따져보지 않고 대적하기 어려운 적에게 함부로 도전하는 따위를 말합니다.

만약 몸을 닦는 일에 참다운 공부가 있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에 참다운 마음이 있다면, 어진 사람을 구하여 함께 다스릴 수가 있고 폐단을 개혁하여 시국을 구할 수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뜻이 커서 일에 실패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가 일찍이 말하기를,‘나라를 다스려서 국운을 영원히 하는데에 이르고, 몸을 보양해서 장생하는데에 이르고, 학문은 성인에 이르게 된다. 이 세가지 일은 분명히 인간의 힘으로 조화를 이길 수가 있는 것인데, 다만 사람들이 하지 않을 뿐이다’하였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예로부터 실질적인 공력을 쌓고서도 그 실효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힘써 선을 행하지 않고 그저 마음과 뜻이 외물(外物)에 따라다닐 뿐인데, 이는 정교(政敎)와 풍속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교화가 밝지않을 경우엔 사람의 욕망이 끝이 없어 부귀에 뜻을 두고 기욕(嗜慾)에 뜻을 두고 환난을 피하는 데에 뜻을 두는 법입니다. 그런데 학문을 하면 도(道)가 시대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부귀에 뜻을 둔 자는 멀리 피하고, 학문을 하면 사욕을 멀리하고 욕망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기욕에 뜻을 둔 자는 움츠려 물러서고, 학문을 하면 비방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환난을 피하는 데에 뜻을 둔 자는 학문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어찌 정교와 풍속이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부귀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나 도에 뜻을 두는 것이 어찌 오래도록 부귀를 지키는 방법이 되지 않겠으며, 기욕은 반드시 담담하실 것이니 욕망이 어찌 사직을 편안히 하고 나라의 명맥을 오래가게 하는데에 있지 아니하겠으며, 환란을 걱정할 일이기는 하나 환란을 막는 길이 어찌 한몸을 닦고 만민을 편안히 해주는데 있지않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뜻이 있는 사람은 꼭 성공한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낡은 견해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서 큰 뜻을 분발하시어 지치(至治)를 일으킬 것을 기약하소서.

이러한 뜻이 확립된 뒤에 대신들을 힘써 격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백관을 감독하고 다스려서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꾸어 자기 직책에 힘쓰게 한다면, 그 누가 감히 낡은 습성을 그대로 따라 일에 성실하지 않는 죄를 짓겠습니까? 이와 같이만 한다면 시사(時事)를 구제할 수가 있고 세상의 도를 회복시킬 수가 있으며 하늘의 재변도 그치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성학을 힘써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공효를 다하도록 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큰 뜻이 수립되었다하더라도 반드시 학문으로 그것을 충실하게 한 다음에야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겉과 속이 어울리게 되어 이미 세운 뜻을 어기지않게되는 것입니다.

학문의 방법은 성인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는데, 그 요체는 세 가지로서 곧 궁리(窮理)와 거경(居敬)과 역행(力行)일 뿐입니다.

궁리 또한 한가지 방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으로는 내 몸속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으로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데에 각기 그 규범이 있고, 밖으로는 만물에 있는 이치를 궁구하는 것인데 초목금수에도 각기 합당한 법칙이 있습니다.

가정에 있어서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아내를 올바로 거느리며 은혜를 두터이하고 인륜을 올바로 하는 이치를 잘 살펴야 하며,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 사악함과 올바름, 순수함과 혼탁함, 정교함과 졸렬함의 구별을 잘 분별하여야 하며, 일을 처리함에는 옳고 그름, 잘되고 잘못됨, 편안함과 위태로움,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의 기미를 잘 살펴야 합니다. 이는 반드시 책을 읽어서 밝히고 옛일을 상고하여 증명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궁리의 요체입니다.

거경(居敬)은 움직일 때나 조용히 있을 때나 모두 통용됩니다.

조용히 있을 때에는 잡념을 가지지 말고 맑고 고요한 가운데 정신이 또렷해야 하며, 움직일 때에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두세 가지로 하지말고 오직 한가지에만 전념하여 조금도 잘못이 없어야 하며, 몸가짐은 반드시 정제하고 엄숙해야 하며, 마음가짐은 반드시 신중하고 두려워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거경의 요체입니다.

역행(力行)이란 자신을 극복하여 기질의 병폐를 다스리는데에 있습니다.

부드러운 자는 교정하여 강해지도록 하고, 나약한 자는 교정하여 꿋꿋해지도록 하고, 사나운 자는 조화함으로써 조절하고, 성급한 자는 너그러움으로써 조절하고, 욕심이 많으면 깨끗하게 하여 반드시 청정한 경지에 이르도록 하고, 편사(偏私)가 많으면 바로잡아 반드시 공정해지도록 하면서 쉬지않고 스스로 힘써 아침저녁으로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역행의 요체입니다.

궁리는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이고, 거경과 역행은 바로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입니다. 이 세가지를 아울러 닦고 동시에 발전시켜 나가면 이치에 밝아져서 접촉하는 곳마다 막힘이 없게되고, 속이 곧아져서 의로움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며, 자신을 극복하여 원초적인 성품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의와 정심의 공력이 그의 몸에 쌓이게 되어 윤택하고 화락한 모습이 온 몸에 나타나고, 집안에 모범을 세워 형제들이 본받을 만하게 되고, 그것이 온집 온나라에 파급되어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주자가 말하기를,‘문왕(文王)의 정심·성의의 공력이 몸에 쌓이고 밖에 드러나 널리 두루 미쳤기때문에 남쪽 나라의 사람들이 문왕의 교화에 감복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주자가 상상하고 억측해서 한 말이겠습니까?

성의와 정심의 공효가 나라에 두루 파급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작은 일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늘 평소에도 학문을 중단하지 마시어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선현들의 격언 및《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같은 책을 번갈아가며 읽으시고 그 뜻을 깊이 연구하소서. 그리하여 성현의 뜻이 아니면 감히 마음에 두지 마시고 성현의 글이 아니면 감히 보지 마소서.

《예기(禮記)》 옥조(玉藻)편의 구용(九容)63)을 자세히 체득하시고, 어떤 생각이 나실 때에는 그것이 천리(天理)인가 인욕(人慾)인가를 잘 살피소서. 만약에 그것이 인욕이라면 밖으로 드러나기 전에 끊어 없앨 것이며 그것이 천리라면 계속 밀고나가 확충시키소서.

방심(放心)은 반드시 수습하시고, 사심도 반드시 극복하시고, 의관은 반드시 바르게 하시고, 바라보심은 반드시 높게 하시고, 기뻐하고 노여워함은 반드시 신중히 하시고, 말씀과 명령을 반드시 부드럽게 하심으로써 성의와 정심의 공효를 다하소서.

이른바‘편벽된 사심을 버리고 지극히 공정한 도리를 넓힌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병폐를 시정하는 방법에 대해 대략 앞에서 아뢰었습니다만, 편벽된 사심이라는 한가지야말로 고금을 두고 겪어 온 병폐이기 때문에 특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편벽된 사심을 털끝만큼이라도 떼어버리지 못하면 요순(堯舜)의 도에는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자질이 청명하시어 병폐가 본디 적긴 하지만 극복하지 못하고 계시니, 아마도 천지처럼 지공무사(至公無私)하지는 못하신 듯합니다.

지난번 내관(內官)이 수본(手本)을 올린 일에 대해서는 신이 밖에서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그 상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새로 탄생하신 왕자를 중전(中殿)아래에 두시겠다는 뜻이었는데, 정원이 그것을 고쳐 쓰게 한 것으로 들은 듯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명칭을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며, 글자 몇자를 고쳐쓴다는 것 역시 지극히 쉬운 일인데 환관(宦官)이 어째서 따르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 뒤에 전교를 보니 상께서 고치지 말고 정원으로 곧장 내려보내라고 명하신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신은 어리석어 사체를 모르겠습니다마는 정원이 이미 후설(喉舌)이라고 이름지어진 이상 크고 작은 모든 일이 그곳을 거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전(內殿)과 외전(外殿)에 어찌 두가지 체제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상의 명으로 특별히 나온 것이라면 아무리 미세한 일일지라도 그것은 곧 전교이니, 어찌 수본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일단 내관의 수본이었다면 더욱 정원을 거치지 않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공평한 마음으로 그 일을 살펴보신다면 그러한 이치는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정원에서야 상의 뜻에서 특별히 나온 것인 줄 어떻게 알아서 내관을 탓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공평한 마음을 지니지 못하시고 목소리와 얼굴빛을 매우 엄하게 하셨는데, 이는 후설의 신하를 멀리하고 환관을 친근히 함으로써 조신(朝臣)을 경멸하는 경향을 조장하게 하신 일입니다.

상께서 하교하시기를,‘시국의 일이 그릇되는 것이 많은 것은 임금이 엄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셨습니다.

아, 형을 받은 하찮은 환관들이 감히 후설의 신하들에게 대항하고, 관계가 소원한 내시가 감히 분수에 어긋나는 은총을 바라며, 귀척(貴戚)은 말을 타고 가다가 교서(敎書)를 마주쳐도 피하지 않으니, 전하의 정사는 엄하지않다고 말할 만합니다.

전하께서는 혹시 이 때문에 자책하신 것입니까?

한문제(漢文帝)때에 태자(太子)가 사마문(司馬門)을 지나면서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공거령(公車令)이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64) 등통(鄧通)이 총신(寵臣)으로서 무례하자 승상은 불러 목을 베려고 하였습니다.65)

상정(常情)으로 말한다면 태자를 공경하지않은 것은 바로 임금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니겠으며, 충신의 목을 베려고 한 것은 곧 위세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문제는 임금으로서의 위엄이 실추되지 않았고 세상을 잘 다스린 효과 또한 오늘날과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근신(近臣)보다 더 가까운 신하가 없는데도 환관으로 사사로운 신하를 삼고 계시며, 만백성보다 더 많은 백성은 없는데도 내시들로 사사로운 백성을 삼고 계십니다.

이러한 병폐를 없애지 않는다면 시국의 일을 바로잡을 길이 없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엄해질수록 시국의 일이 더욱 그르쳐질까 염려스럽습니다.

한무제(漢武帝)는 관(冠)을 쓰지않고 있다가 급암(汲黯)을 보고서는 장막 속으로 피하였고, 당태종(唐太宗)은 매[鷂]를 팔뚝위에 올려놓고 있다가 위징(魏徵)을 보자 품안에 감추었습니다.

이 두 임금은, 정치의 도는 순수하지 않았지만 정령(政令)이 엄하고 밝아 잘하는 자에게는 적절한 상을 주고 죄지은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었기 때문에, 귀척이나 내시들도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였으니, 역시 오늘날에 있어서는 미칠 수가 없는 임금들입니다.

그런데 임금으로서 신하를 두려워했으면서도 엄하지않은 듯이 보인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그것은 신하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의를 두려워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엄하기만 하고 의를 두려워하지 않은 자는 실패하지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스스로를 돌아볼 때 의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요즘 헌부가 다투고 있는 일에 대하여 신은 비록 그 전말을 알지못하겠습니다만, 헌부가 사실의 확인을 자세히 하지않은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 이유는 전하께서 아무리 사심이 있으시더라도 절대로 불문곡직하고 한 노비(奴婢)를 놓고 필부와 다투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군신(群臣)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지혜가 밝지못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하께서 이미 마땅히 내사(內司)에 속해야 함을 아셨더라도 병급(並給)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면 더욱 성상의 도량이 넓으심을 흠모하기에 충분하셨을텐데, 여러날 동안 고집을 굽히지않고 계시니, 어찌 신민들로서는 전하의 사욕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란 엄하지 못할까 걱정하지말고 공정하지 못할까 걱정하여야 합니다. 공정하면 밝아지게 되는데, 밝아지고 보면 엄한 것은 자연 그 속에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법을 시행하심에 있어 귀척과 근신으로부터 시작하시고, 인(仁)을 미루어 나가 백성에게까지 미치도록 하소서.

그리고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가 되어 환관이 임금을 가까이 모심을 믿고 조정의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게 하지말 것이며, 만백성을 한결같이 보시어 내노(內奴)가 임금을 사사로이 모심을 믿고 엿보아서는 안 될 일을 엿보게 하지마소서.

왕실의 재물을 유사에게 맡기시어 사물(私物)처럼 여기지 마시고, 한편에만 치우치는 생각을 마음속에서 끊으시어 공평한 도량으로 모든 것을 감싸고 널리 덮어주도록 하소서. 그와 같이 하신다면 나라의 창고가 모두 재물인데 어찌 쓸 것이 없을까 걱정될 것이며, 온나라 사람이 모두 신하인데 어찌 노비가 없을까 걱정이 되겠습니까.

이른바‘현사를 친근히하여 깨우쳐주고 보필해주는 이익이 되게 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임금의 학문으로는 올바른 선비를 친근히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보는 것이 모두가 바른 일이고 듣는 것이 모두가 바른 말이라면 임금이 아무리 바르게 되지 않으려고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올바른 사람을 친근히 하지 아니하고 오직 환관이나 궁녀만 가까이한다면 보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니고 듣는 것도 올바른 말이 아닐 것이니, 임금이 아무리 바르게 되려고 하더라도 되겠습니까?

선현의 말씀에‘하늘이 한 세상 사람을 내놓았을 때는 그들로써 한 세상의 일을 충분히 감당하게 한 것이니, 다른 시대에서 인재를 빌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진정 현인다운 현인을 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세상의 인물을 철저히 선발하되 출신(出身) 여부를 따지지 않고 조야(朝野)의 인물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어찌 임금을 보필할 만한 한두 명의 인물이야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널리 물으시고 정밀하게 고르시어 꼭 합당한 사람을 얻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출신한 자는 옥당(玉堂)에 모아 다른 자리에 옮겨가지 못하게 하고, 출신하지못한 자는 한직(閑職)을 주어 경연의 직명을 띠도록 하며, 당상관으로 오른 자도 그 직책에 따라 반드시 경연관을 겸하게 하소서.

그런 뒤 이 선발에 참여된 자는 교대로 날짜를 바꾸어 입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을 전개하게 하시고, 상께서도 겸허한 마음과 온화한 얼굴로 그들의 충성스런 도움을 받아들이소서.

학문을 강론할 때는 반드시 의리를 추구해야 하고 정사를 논할 때는 반드시 실효를 추구해야 합니다. 비록 진강하는 날이 아니라 하더라도 꾸준히 편전(便殿)으로 불러들이되 오직 사관(史官)만 함께 들어오게 하고 의심나는 점을 질문하시어 성상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소서.

승지같은 사람은 의례적으로 맡은바 공사(公事)를 가지고 하루에 한 번씩 각기 직접 성지(聖旨)를 받들도록 할 것이며, 대신이나 대간의 말에 있어서는 날짜와 때를 구애하지말고 반드시 들어와 직접 아뢰게 함으로써 조종조의 규범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상하관계가 날로 밀접해져서 서로의 뜻이 간격이 없게 될 것이며, 성리(性理)에 관한 이론이 날로 진취하여 성학(聖學)이 완성됨으로써 서로 즐겁게 어울림이 물과 고기의 관계처럼 되고 사악하고 더러운 것이 하늘과 해와 같으신 성상의 덕을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상 네 가지는 몸을 닦는 요목으로서 그 대강이 이상과 같은데, 더 상세한 사항은 전하께서 유의하여 알고 행하시는데에 달렸을 따름입니다.

이른바‘성심을 열어 군하(群下)의 충정을 얻는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성스러운 제왕이나 명철하신 임금은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한결같이 지성으로써 합니다. 상대가 군자라는 것을 알면 곧 그를 임용함에 딴 마음을 갖지 않으며, 상대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면 곧 그를 내침에 의심을 갖지않습니다. 의심이 나면 임용하지않고 임용을 하면 의심하지 아니하며, 허심탄회한 자세로 신하를 거느려 넓고 평탄하기만 합니다.

신하된 사람으로 임금을 부모처럼 존경하고 계절이 돌아가는 것처럼 믿게되어 진출시켜 등용하면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더욱 그의 충성을 다하고, 물리치면 스스로 죄과가 있음을 알고 오직 자신만을 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끓는 물이나 불 속에라도 들어가고 시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고, 어린 유복자(遺腹子)를 왕위에 앉히고 선왕(先王)의 옷을 모시고서 조회를 하게 한다하더라도 나라가 어지러워지지 않게 되어, 오직 임금이 계시다는 것만을 알뿐, 그 자신이 있다는 것은 모르게 됩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임금의 지성에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후세의 임금들은 성의는 부족한 채 오직 지혜와 권력으로만 신하를 부린 나머지 벼슬에 임용할 때에는 꼭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도 자기에게 영합하는 자를 취하고, 축출할 때에도 꼭 현명하지 못한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뜻과 다른 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비록 자기에게 영합한다하더라도 그의 속마음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를 임용하고도 의심이 없을 수가 없는데, 그를 의심하면서도 임용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이 나랏일을 맡아 직책을 다하면 뭇사람의 마음이 반드시 그에게로 기울어질 것인데, 어찌 그가 권력을 홀로 잡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으며, 간관이 어전에서 꿋꿋하게 간쟁하면 조야가 반드시 주목할 것이니, 어찌 그가 직언(直言)을 팔아 명예를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군자든 소인이든 간에 같은 무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니 그 누가 붕당을 이루는지 어찌 알 것이며, 선책(善策)과 사론(邪論)이 뒤섞여 나올 것인데 어느 것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인가를 어찌 알겠습니까? 그리하여 사정(邪正)을 분별하기 어렵고 시비를 판단하기 어렵게 되어, 전례대로 행하자니 더욱 무너지고 타락할까 고민하고, 개혁을 하자니 소요가 일어날까 꺼리게 됩니다. 이렇듯 임금의 마음이 뒤흔들려 갈피를 잡지못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대간(大奸)이 나타나 틈을 엿보면서 임금의 마음을 따라 행동하다가 점차 계교를 부려 물이 스며들듯 침투해 들어오고, 뜻을 영합하여 기쁘게 해주며 공갈을 늘어놓아 불안정하게 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은 점차 그를 믿어 그의 술책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량한 사람들이 반드시 죽음을 당하고 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되니, 이 또한 다름이 아니라 바로 임금의 정성이 없기때문에 빚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선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다만 군신(群臣)이 재덕이 부족하여 믿고 의지할 만한 인물이 적기때문에 일을 맡기실 뜻이 없는 듯한데, 심지어는 말씀을 하실 적에도 믿지 못하는 마음과 경멸하는 표현이 드러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군신들이 사실 자초한 것입니다마는 성명께서도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힘써 지성으로 아랫사람들을 대하시어 마음에 옳다고 생각되면 말씀으로도 옳다고 하시고, 마음에 그르다고 생각되면 말씀으로도 그르다고 하소서. 진용(進用)할 때는 반드시 그 현명함에 대하여 상주고 물리칠 때는 반드시 그 죄과를 따짐으로써 성상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시어, 군신으로 하여금 누구나 우러러 보고 조그만 장애도 없게 하소서. 이렇게 하신다면 군신들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이 없어져서 힘써 충정을 다 바치게 될 것이니, 군자는 충성을 다하려는 소원을 지니고 소인은 간계를 부리려는 생각을 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심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앤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조종조에서는 쓰임새를 매우 절약하여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도 매우 적었는데, 연산군(燕山君) 중년에 이르러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바람에 일상적인 공물로써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하게 되었으므로, 공물을 더 책정하여 그 욕망을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신은 지난날에 노인들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듣고도 감히 그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정원에서 호조의 공안을 가져다 보건대, 여러 가지 공물이 모두 홍치(弘治)66) 신유년67)에 더 책정한 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그때는 바로 연산군 때였습니다.

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안을 덮고 탄식하기를, 이럴 수가 있는가?

홍치 신유년이라면 지금부터 74년 전이니, 그 간에 성군(聖君)이 왕위에 있지않았던 것도 아니고 현사(賢士)가 조정에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법을 어찌하여 개혁하지 않았단 말인가?’하였습니다.

그 까닭을 추구해 보건대 그 70년동안은 모두 권간(權奸)들이 국사를 장악한 때로서 두세명의 군자가 간혹 조정에 있었다고는 하나 뜻을 펴보기도 전에 사화가 꼭 뒤따랐으니, 이에 대하여 논의할 겨를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그 일을 오늘날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산(物産)은 수시로 변하고 백성들의 재물과 전결(田結)도 수시로 증감하는 것인데, 공물을 나누어 책정한 것은 바로 국초(國初)의 일이었고 연산군 때에는 다만 거기에 더 늘려 책정한 것일 뿐이니, 역시 시대마다 적절히 헤아려 변통해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는 각 읍에다 바치는 공물이 그곳 산물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어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고 배를 타고 물에서 짐승을 잡으려 하는 일이나 같게 되었으니, 다른 고을에서 사들이거나 또는 서울에 와서 사다가 바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의 비용은 백배로 늘어나고 공용(公用)에는 여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민호(民戶)는 점점 줄어들고 전야(田野)는 갈수록 황폐해져서 몇년 전에 백명이 바치던 분량을 작년에는 열명에게 책임지워 바치게하고, 작년에 열명이 바치던 분량을 금년에는 한 사람에게 책임지워 바치게하고 있으니, 이 상태로 나간다면 반드시 그 한 사람마저 없어진 뒤에야 끝장이 날 형편입니다. 오늘날 공안을 개정하자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조종의 법은 가벼이 고쳐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곤 합니다.

그러나 조종의 법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고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연산군 때의 법이 아닙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일을 파악할 만한 슬기가 있고, 장래의 일을 미루어 알만한 심계(心計)가 있으며, 일을 잘 처리할 만한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공안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하되 대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연산군때에 더 책정한 분량을 모두 없애 조종의 옛 법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읍의 물산 유무와 전결의 다소와 민호의 잔성(殘盛)을 조사하고 상호 조절해서 한결같이 고르게 하고 반드시 본색(本色)을 각사(各司)에 바치도록 하면, 방납(防納)은 금하지않아도 자연히 없어지고 민생은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일로서 이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이른바‘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 풍조를 개혁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재물이 고갈된 것이 오늘날에 와서 극도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공물을 감해주지않을 수가 없는데 만약 소비하는 것을 조종의 법대로 하지않으면, 수입에 맞추어 지출할 수 없게 되어 마치 모난 그릇에 둥근 뚜껑을 덮는 것처럼 앞뒤가 들어맞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치하고 문란한 풍속이 오늘날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고 뽐내기 위한 것이 되었고, 옷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경쟁하기 위한 것이 되어, 한상을 차리는 비용이 굶주린 자의 몇 개월 양식이 될 만하고, 한벌의 비용이 헐벗은 자 열명의 옷을 장만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열사람이 농사를 짓는다해도 한 사람을 먹여 살리기가 어려운데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먹는 사람은 많으며, 열사람이 베를 짠다해도 한 사람의 옷을 마련하기가 어려운데 길쌈하는 사람은 적고 옷을 입는 사람은 많으니, 어찌 백성이 굶주리고 헐벗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옛 사람이 말하기를, ‘사치의 피해는 천재(天災)보다도 더하다’하였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상께서 먼저 절약과 검소함을 힘써서 이 병폐를 고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형법이 엄하고 호령이 자주 내린다하더라도 수고스럽기만 할 뿐,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입니다.

신은 고로(古老)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성종(成宗)께서 병환으로 누워계실 때 대신이 문안드리려고 들어가 보니, 침실에서 덮고 계신 다갈색(茶褐色) 명주 이불이 다 해어져가고 있는데도 바꾸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자는 지금까지도 흠모하여 마지않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종조의 공봉규례(供奉規例)를 상고하도록 명하시어, 궁중의 용도를 일체 조종의 옛날 검약하던 제도를 따르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내외에 모범을 보여 민간의 사치스런 풍조를 고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성대한 음식상을 차리거나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심으로써, 하늘이 내려준 재물을 아끼고 백성들의 힘을 펴게하도록 하소서.

이른바‘선상(選上)의 제도를 바꾸어 공천(公賤)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선상의 본뜻은 면포(綿布)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울 관청의 노복(奴僕)만 가지고는 역(役)을 세우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밖에 있는 공천들로 하여금 번갈아가며 경역(京役)을 서게 하고 이를‘선상’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공천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당하는 고통이 막심하여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비로소 면포로 부역에 대신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오직 베만을 거두어들일 뿐 한사람도 와서 부역을 치르는 자는 없게 되었습니다.

민생은 날로 곤궁해지고 호구(戶口)는 날로 줄어들고 있는데 공천도 백성이거늘 어찌 그들만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며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한번 선상의 대가를 치르고 나면 집안이 망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2년은 공물을 바치고 1년은 선상에 걸려 대체로 3년이 되면 반드시 한 번은 집안을 망치게 되니, 공천들의 고통은 극도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게다가 해조의 색리들이 나누어 배정하는 것이 고르지 못합니다. 비록 노비의 수효가 많은 고을이라도 뇌물이 있으면 적게 배정하고 겨우 몇 가구만 있는 고을이라도 뇌물이 없으면 많이 배정하는데, 지탱할 능력이 없고 보면 그 침해가 일족(一族)에게 미치게 되어 일반 백성들까지도 그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일단 곤경에 빠뜨린 뒤에는 비록 공정하게 균등히 배정한다하더라도 이미 구제할 수가 없을 것이니, 미리 변통하지 않으면 후환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신역(身役)을 고쳐 대신 면포를 받는 것은 이미 《대전(大典)》의 법이 아니니, 지금이라도 선상제도를 폐지하고 신공(身貢)을 받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해관(該官)에 명하시어 노비장부를 자세히 조사하여 현존하는 숫자에 의거, 매년 바치는 노복의 공납면포 두필과 여비(女婢)의 공납 면포 한필 반을 그 총계가 얼마인지를 계산하여, 그 중 5분의 2는 사섬시(司贍寺)에 비축하여 나라의 비용으로 쓰게 하고, 5분의 3은 각사에 나누어 주어 선상의 역에 충당하게 하되, 면포가 부족할 경우에는 적절히 요량하여 역을 세우는 숫자를 줄이게 하소서.

이렇게 하신다면 공천에게는 일정한 공물이 정해져 있어 미리 준비를 할 수가 있으니, 갑자기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 공물을 거두어들이는 데에도 일정한 장부가 있어 빼고 고치고 하는 일이 없게 되어 간리(奸吏)의 술책이 없어질 것이며, 호령이 번거롭지않고 백성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군정(軍政)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늘의 재변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사실 무슨 일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지적할 수가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옛날 역사를 가지고 증험해 보건대, 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것은 대부분 전란의 상징이었습니다.

현재 군정(軍政)은 무너지고 전 국경은 무방비 상태인데, 만약 급박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비록 장양(張良)·진평(陳平)같은 이가 지혜를 짜내고 오기(吳起)·한신(韓信)같은 이가 군대를 통솔한다하더라도 거느릴 병졸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홀로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가슴이 떨리고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시국의 폐단에 관해서는 앞에 이미 아뢰었으나 군정에 대해서는 상세히 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 먼저 그 폐단을 아뢴 다음 대책을 세워볼까 합니다.

우리나라 법제에는 결함이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단지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등의 벼슬만 설치해놓고 먹고 살 녹봉은 주지않아 사졸들에 의하여 해결하고 있으니, 변장(邊將)들이 사졸을 침해하는 폐단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국법이 날이 갈수록 해이해져 탐욕과 포악한 짓이 더욱 성해졌는데, 게다가 인재의 등용이 공정하지않아 채수(債帥)68)가 연달아 생겨 공공연히 아무 진(鎭)의 장수는 그 값이 얼마이고 아무 보(堡)의 벼슬은 그 값이 얼마이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무리들은 오직 군졸을 착취하여 발신(發身)할 줄만 알고 있으니, 다른 일이야 또 어떻게 걱정하겠습니까?

사졸들이 유방(留防)하는 것을 괴롭게 여긴 나머지 면포를 바치고 군역(軍役)을 면제받으려 하면 반드시 기뻐하며 그것을 허락하고, 진(鎭)에 유방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강요하고 하기 어려운 부담을 책임지워 마치 기름에 콩볶듯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목석(木石)이 아니니 그 누가 자신을 아끼지 않겠습니까?

수자리를 면제 받은 자들이 그의 집에 편히 누워있는 것을 보면 모두가 부러워하며 그들도 그런 것을 본받으려 하게 됩니다. 만약 수자리사는 군역을 많은 사람들이 면제받아 진열이 있을 때에 거짓 이름으로 대신 점호(點呼)를 받게 합니다. 그런데 지역을 돌면서 검열하는 관리는 그저 그 숫자만을 세어볼 뿐이니, 그 누가 진짜와 가짜를 따지겠습니까?

수자리를 면제받는 것이 편하기야 하지만 베를 마련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몇번 수자리에 걸리기만 하면 집안 살림이 결딴나 지탱할 수가 없어서, 도망치는 자들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다음해에 장부의 수효대로 수자리를 독촉하면 본 고을에서는 반드시 그 일족(一族)으로 군역에 응하도록 하고, 그 일족이 또 도망가면 그 일족의 일족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이처럼 환란이 만연되어 끝이 없는 지경이니, 장차 백성들은 한사람도 남는 자가 없게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 이른바 채수(債帥)들은 그래도 의기양양하여 짐을 바리로 싣고 집에 돌아와 그의 처첩(妻妾)에게 뽐내고 있으니 가난했던 자도 그로 인하여 부자가 되고, 권세가에게 뇌물을 써서 진급을 꾀함으로써 천했던 자도 그로 인하여 귀한 신분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일을 논하는 자들은 이런 폐단을 개혁할 생각은 하지않고 부질없이 군졸의 수효를 채우지 못하는 것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설사 군졸의 수효를 다 채운다 하더라도 이런 폐단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오직 변장이 얻는 면포만 더 보태줄 뿐 나라를 방비하는데에야 무슨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첫째 폐단입니다.

수륙(水陸)의 군사들에 대하여 반드시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유방(留防)하게 하지아니하고, 혹은 며칠이 걸리는 거리로 보내기도 하고 혹은 천리 밖으로 보내기도 하는데, 그 고장 풍토에 익숙치않아 병에 걸리는 자가 많습니다. 이미 장수의 학대에 떨고 있는데다가 또 그 지방 군사들의 횡포에 곤욕을 치르는 등, 객지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남쪽 군인으로서 북쪽 국경에 수자리사는 자들의 경우가 더욱 심합니다.

여위고 병들어 몸도 가누지 못하여 얼굴은 사색이 다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만약 적의 기병(騎兵)을 만난다면 비록 도망치려 한다해도 도망칠 기력이 없어 앉아서 어육을 당하게 될 것인데, 하물며 활을 쏘며 적을 막아내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황해도 기병으로서 평안도에 가서 수자리를 살게되는 사람의 경우, 그들 한명을 보내는 비용이 반드시 면포 30∼40필에 밑돌지 않는다고 합니다. 30∼40필이라면 곧 시골백성이 여러 가구에서 생산해 내는 양으로서 한명이 가면 반드시 여러 가구가 파산하게 되니, 어찌 궁해져서 도둑질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둘째 폐단입니다.

6년마다 군적(軍籍)을 정리하는 법이 폐지되어 행해지지 않다가 계축년69) 에 와서야 오래도록 폐지한 끝에 수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명을 받든 신하가 신속히 처리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으므로, 주현(州縣)에서도 그런 기풍을 받들어 그저 미치지 못할세라 서둘러 긁어모으면서 혹시라도 빠뜨릴까만 염려했을 뿐, 구차히 수효를 채움으로써 환란을 끼치게 될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거지들까지도 모두 넣어 수효를 채우고 닭이나 개 이름까지도 장부에 수록하여 한두해가 채 지나지 않아 태반이 빈장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20여년만에 다시 군적 정리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군졸의 수효가 부족한 것은 계축년보다도 심하고 남아있는 장정의 수효 또한 계축년보다 훨씬 적으니, 아무리 교묘하게 수괄한다하더라도 어찌 가루 없는 국수를 만들어낼 수야 있겠습니까? 이제 수괄한다고 해도 아이들이 아니면 거지이고 거지가 아니면 사족(士族)일 테니 건실한 장정이야 몇이나 되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군적정리를 한다하더라도 금방 또 빈장부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해조는 이런 사실을 듣고 보지못하지는 않았을 텐데도 이제 또 애써 반드시 정원수를 채우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매우 사리를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셋째 폐단입니다.

내외의 양역(良役)은 그 명목이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소위 조예(皂隷)·나장(羅將)등 원역(員役)이 가장 고달프다 하겠습니다. 역시 면포로 대역(代役)의 값을 치르고 있을 뿐인데, 그가 소속된 관아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을 대역으로 시켜놓고는 불시에 저리(邸吏)70)를 독촉하여 대역의 댓가를 갚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리는 이자를 따져서 바친 뒤에 거기에 든 기타 비용까지 통산하여 당사자에게 그 세배를 받아냅니다. 그러므로 한사람이 언제나 세사람의 부역을 감당하게 되는데,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으레 일족에게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넷째 폐단입니다.

이상 네가지 폐단을 지금 바로잡지 못한다면 몇년 뒤에는 비록 유능한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 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규정을 만드소서.

모든 병영(兵營)·수영(水營) 및 진(鎭)·보(堡)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고을 장부에 계상된 것 이외의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변장(邊將)의 양식으로 충분히 주도록 하되, 그 고을의 곡식으로 부족할 경우에는 이웃 고을의 곡식도 거두어서 반드시 변장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활을 지탱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법제를 엄하고 분명히 하여 한자의 베나 한말의 쌀이라도 군졸들로부터 거두어들이지 못하게 하고, 오직 기계를 잘 정비하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을 교습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병사·수사 및 순찰사는 군사들을 호명하여 부재자의 유무를 검열하는 일에 그치지 말고 반드시 그들의 무기를 검열하고 말타기 활쏘기 등 무예를 시험해 봄으로써 훈련이 잘 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가지고 우열을 가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만약 전처럼 재물을 거두어들이고 군졸을 놓아보내다가 발각되면 장률(贓律)로 다스리게 하소서.

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등의 관원을 지방의 남북이나 거리의 원근을 막론하고 모두 군직에 소속시켜 그 처자들로 하여금 녹봉을 받아 살아갈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처음 제수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 사람을 뽑도록 하고, 일단 제수한 뒤에는 다섯번 고사(考査)하여 다섯번 상(上)을 받으면 곧 권관에서 만호로, 만호에서 첨사로, 첨사에서 동반(東班) 6품의 직으로 올려 제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사하여 중간성적을 얻은 사람은 다른 진의 같은 등급의 자리로 옮겨주고 승진할 수 없게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지난 세월을 아깝게 느껴 부지런히 힘쓰도록 해야 합니다.

유방(留防)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고을의 군사들을 거느리게 하되 그 고을의 군사가 부족한 뒤에야 옆 고을에 배정토록 해야 합니다.

유방하고 있는 곳은 각색(各色)의 양역(良役)을 모두 폐지하고 오직 유방의 군역만 있게 하여 먼 곳에 부역하는 수고로움이 없도록 하는 한편, 번(番)을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쉬도록 하여야 합니다.

진(鎭)에 있을 때에는 또한 조금이라도 노력이 허비되거나 재물을 손해보는 일이 없게해야하며, 진장(鎭將)의 사령(使令)에 응하는 것은 땔감을 나르거나 물을 길어오는 일만 하게하고 기타 다른 일은 하는 일이 없게 하여, 활을 다루고 활쏘기를 익히는 일에 전념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황해도의 기병(騎兵)을 북방에 수자리사는 군역에 종사하도록 하는 일은 혁파하여 그렇게 하지말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국경의 경비가 허술해질까 걱정이 된다면 연변(沿邊)의 수령들에게 명을 내려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도록 하되 3개월에 한번씩 시험을 실시하여 많이 적중시키는 자는 상을 후하게 주고, 두번 일등을 차지한 자는 그 가족의 부역을 면제해 주고, 다섯번 일등을 차지한 자는 군졸의 경우에는 군관(軍官)으로 특진시키고, 그 중에서 지식이 여러 사람을 거느릴 만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해조에 그 이름을 아뢰어 권관(權管)에 보직시킴으로써 쓸 만한 지의 여부를 시험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그가 공사천(公私賤)일 경우에는 그 이름을 아뢰어 면천(免賤)을 특별히 허락하되, 사천은 본주인에게 그 댓가를 충분히 주도록 하소서. 이렇게 하면 다섯번이나 일등을 차지하는 자는 매우 드물 것이나 변경의 백성은 모두가 정병(精兵)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혹시 적이 변경을 침입할 경우라도 사람들은 제각기 스스로를 방위하려고 할 것인데, 그 누구라서 힘써 싸우지 않겠습니까?

상번(上番)한 군사에 대해서도 유사(有司)가 또한 수시로 그들의 무예를 시험하여 그중 가장 우수한 자는 계달하여 논상하고, 다섯번 일등을 한 자는 그가 사는 지역의 진(鎭)·보(堡)의 군관으로 특별히 보직함으로써 군무(軍務)에 힘쓸 뜻을 지니도록 하소서.

군적을 정리하는 일을 실질적인 군적관리가 되도록 힘써야지 정원수를 억지로 채우려 해서는 안됩니다. 15세가 채 안된 소년에 대해서는 이름과 나이만을 별도의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그들의 나이가 찰 때에 군적에 넣도록 해야 합니다. 날품팔이나 거지는 모두 삭제하여야 합니다.

열읍(列邑)의 군부(軍簿)는 옛 기록을 그대로 두되 다만 몇명이 모자란다는 것만은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수령들에게 명을 내려 그들을 부지런히 휴양시키고 위무하게 하였다가 장정이 생기는 대로 군적에 보충시키되, 일정한 기한을 정하지 말고 기필코 정원수를 채우도록 해야 합니다.

또 6년마다 한번씩 반드시 군적을 정리함으로써 갑자기 정리하는데 따른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군졸이 부족하여 여러 곳의 군역에 대응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상번 군사의 수를 적절히 줄이고, 그래도 부족할 때는 방비가 허술해도 무방한 곳의 군사 수를 적절히 줄이고, 그래도 부족한 때는 남쪽지방의 겨울철 유방군의 수를 적절히 줄이고, 그래도 부족할 때는 병역대신 가포(價布)를 바치는 보병(步兵)의 수를 반으로 줄여서 유방군사의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게 해야 합니다.

유방군사가 진장(鎭將)의 침해를 당하는 일이 없게 되면 보병들 역시 이리나 호랑이를 피하듯 군역을 싫어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조예(早隷)나 나장(羅將)등 원역의 경우는 각기 일정한 소속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그러한 명목을 모두 폐지하여 보병으로 다 편입시킨 뒤 가포를 병조에 바치도록 하고 병조는 각사에서 원역을 세우는 수를 헤아려 가포를 배정한다면, 저리(邸吏)는 불시에 독촉받는 것을 면하게 되고, 민간에서는 세배나 되는 가혹한 양의 베를 내게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군정(軍政)에 관한 좋은 계책으로서는 이것이 그 대략입니다.

이상 다섯가지는 백성을 편안히 할 수 있는 요목으로서 그 대강이 이와 같은데, 그에 대한 자세한 것은 전하께서 널리 의논하시어 계책을 세우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살펴보건대 지금의 시사(時事)는 날로 그릇되어가고 백성의 기력은 날로 소진되어가고 있는데, 권간이 세도를 부리던 때보다 더 심한 듯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권간이 날뛰던 시절에는 그래도 조종들의 남기신 은택이 어느 정도나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정치가 혼란했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힘은 그런 대로 지탱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경우는 조종들이 남기신 은택은 이미 다하고 권간이 남겨 놓은 해독이 바야흐로 작동하고 있기때문에, 청론이 비록 행해진다하더라도 민력은 이미 바닥이 나버린 상태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창 젊을 때 주색에 빠져 여러 가지로 몸을 해치는 일이 많았다하더라도 혈기가 왕성한 때라서 몸이 상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만년에 이르러서야 그 해독이 틈만 있으면 불현듯 나타나 아무리 근신하며 몸을 보양해도 원기가 이미 쇠퇴하여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시사가 실로 이와 같으니 앞으로 10년이 채 안되어 화란이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열칸의 집과 백마지기의 전답을 자손에게 물려주면 자손은 또 그것을 잘지켜 선조를 욕되지 않게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조종조 백년의 사직과 천리의 강토를 물려받으셨고 게다가 환란이 곧 닥칠 것같은 상황에 처해있음이겠습니까?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해결책을 구한다면 꼭 잘된다는 보장은 없어도 적어도 아주 엉뚱한 결과가 생기지는 않는 것이며, 능력이 부족하다하더라도 스스로 구제할 수는 있는 것인데,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권세의 중추를 관장하시고 사리에 밝으시어 시대를 구제할 능력이 있음이겠습니까?

소신(小臣)은 나라의 두터운 은총을 받아 백번 죽는다해도 보답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참으로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에 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하더라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 전하께서 언로를 넓게 열어놓고 의견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겠다고 간절히 수교(手敎)하셨음 이겠습니까? 신이 만약 발언을 하지 않는다면 실로 전하를 배반하는 것이 되겠기에 충정에 격동되어 극진하게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병을 치르고 난 끝이라서 정신은 흐리고 손은 떨리며 글은 비속하고 중복되었는가 하면 자획도 겨우 이루었으므로 볼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뢴 그 뜻이 요원한 듯해도 실은 가까운 것이고 계책이 오활한 듯해도 실은 절실한 것이니, 비록 삼대(三代)의 제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실로 왕정(王政)의 근본으로서 그대로 시행만 하면 효과가 드러나 왕정(王政)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자세히 보시고 익히 검토하시며 신중히 궁구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성상의 마음속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하신 다음, 널리 조정의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한 뒤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그 진행을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정성껏 그것을 시행하게 하고 확신을 갖고 지켜 나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보수적인 세속의 견해로 인하여 바뀌게 하지 말고, 올바른 것을 그르다하며 남을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도록 나랏일이 여전히 부진하고 백성이 편안해지지 않으며 군대가 정예로와지지 않는다면, 신을 기망(欺罔)의 죄로 다스리어 요망한 말을 하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다만 일이 경장(更張)에 관계된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하고, 이 소를 여러 대신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는 한편, 또 소를 등서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 당시 인심이 불안하던 차에 이이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고서는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註57]경성(景星):상서로운 별.註58]세조(世祖):후한광무제(後漢光武帝).註59]정관(貞觀):당태종(唐太宗)의 연호.註60]전조(前朝):고려를 말함.註61]삼대(三代):하(夏)·은(殷)·주(周).註62]꿈속에서 감응되기도 하고 혹은 낚시질하고 있는 자를 만나기도 하였는데:은고종(殷高宗)이 어진 신하를 구하던 끝에 꿈에서 그 사람을 보고 그 초상을 그린 뒤 온 세상에서 그와 같은 자를 찾아내게 하여 결국 부암(傅巖)의 들에서 노동일을 하고 있던 부열(傅說)을 찾아내 재상으로 삼은 일과, 주문왕(周文王)이 위수(渭水)바닷가에서 낚시질로 소일하던 여상(呂尙)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눈 뒤에 크게 기뻐하여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고 스승으로 모신 일을 말한다.《상서(尙書)》열명(說命),《사기(史記)》권32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제2.註63]구용(九容):군자가 몸을 닦고 처세할 때 마땅히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 곧 걸음거리는 무거워야 하고[足容重], 손가짐은 공손해야 하고[手容恭], 눈가짐은 단정해야 하고[目容端], 말할 때는 진중해야 하고[口容止], 음성은 온화해야 하고[聲容靜], 머리는 곧아야 하고[頭容直], 기세는 엄숙해야 하고[氣容肅], 서있는 자세는 덕스러워야 하고[立容德], 얼굴빛은 장중해야 한다[色容莊]는 것임.註64]한문제(漢文帝)때에 태자(太子)가 사마문(司馬門)을 지나면서 수레에서 내리지않자 공거령(公車令)이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사마문은 황궁(皇宮)의 외문(外門)으로서 궁위(宮衛)의 법에 그 문을 통과할 때는 모든 사람이 말에서 내리게 되어 있는데, 문제의 태자와 양왕(梁王)이 함께 수레를 타고 입조(入朝)하면서 그냥 지나가자 당시 문을 지키는 공거령 장석지(張釋之)가 뒤쫓아가 전문(殿門)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공문(公門)에서 내리지않자 불경하다는 것으로 탄핵소를 올렸다. 《사기(史記)》권102장석지전(張釋之傳).註65]등통(鄧通)이 총신(寵臣)으로서 무례하자 승상은 불러 목을 베려고 하였습니다:한문제(漢文帝)때 태중대부(太中大夫) 등통이 조회때 천자의 곁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자 승상 신도가(申屠嘉)가 등통을 승상부(丞相府)로 불러 꾸짖기를,“조정은 곧 고황제(高皇帝)의 조정인데 소신(小臣) 등통이 전상(殿上)에서 장난을 하다니 매우 불경(不敬)하다. 참수하는 것이 마땅하다”하고, 심하게 곤욕을 준 뒤에 문제의 부탁으로 돌려보냈다.《한서(漢書)》권42신도가전(申屠嘉傳).註66]홍치(弘治):명효종(明孝宗)의 연호註67]신유년:1501 연산군7년.註68]채수(債帥):뇌물을 주고 장수가 된 자.註69]계축년:1553 명종8년.註70]저리(邸吏):경저리(京邸吏)와 영저리(營邸吏).

○右副承旨李珥上萬言疏, 極陳時弊及弭災、進德之說。 其疏曰:

臣伏以, 政貴知時; 事要務實。 爲政而不知時宜; 當事而不務實功, 雖聖賢相遇, 治效不成矣。 恭惟, 殿下聰明英毅, 好士愛民, 內無音樂、酒色之娛; 外絶馳騁、弋獵之好, 古之人君, 所以蠱心害德者, 皆非殿下之所屑也。 倚仗老成, 擢用人望, 旁招俊乂, 仕路漸淸, 優容直言, 公議盛行, 朝野顒顒, 佇見至治, 宜乎紀綱振肅, 民生樂業。 而以言其紀綱, 則徇私滅公, 猶昔也; 號令不行, 猶昔也; 百僚怠官, 猶昔也。 以言其民生, 則家無恒産, 依舊也; 流轉失所, 依舊也; 放僻爲惡, 依舊也。 臣嘗慨歎, 竊欲深究其故, 一達冕旒, 而未得其會。 昨者伏覩, 殿下因天災, 諭大臣之敎, 則殿下亦大疑而深歎, 願聞振救之策。 此誠志士盡言之秋也, 惜乎! 大臣過於惶惑, 辭不盡意也。 夫災異之作, 天意深遠, 固難窺測, 亦不過仁愛人君而已。 歷觀古昔明王誼辟, 可以有爲, 而政或不修, 則天必示譴而警動之。 至於暴棄之君, 與天相忘則反無災異。 是故, 無災之災, 天下之至災也。 今以殿下之明聖, 居可爲之位; 値可爲之時, 而紀綱如是; 民生如是, 則皇天之付畀者, 未塞其責矣。 設使今者, 景星日現; 慶雲日興, 殿下之危懼, 尤無所自容矣。 衆災疊現, 日無虛度者, 乃皇天仁愛之至也。 殿下之矜惕脩省, 其可少緩乎, 雖然, 不知時宜; 不務實功, 則危懼雖切, 治效終邈, 民生豈可保; 天怒豈可弭乎, 臣今罄竭一得, 先陳沈痼之弊, 後及振救之策。 伏願殿下, 虛心易氣, 勿厭其煩文; 勿怒其觸忤, 以垂睿察焉。 夫所謂時宜者, 隨時變通, 設法救民之謂也。 程子《易》曰: “知時識勢, 學《易》之大方也,” 又曰: “隨時變易, 乃常道也。”蓋法因時制, 時變則法不同。 夫以, 宜無所不同, 而分九州爲十二; 以, 宜無所不同, 而革十二爲九州, 此豈聖人好爲變易哉, 不過因時而已。 是故, 程子曰: “之相繼, 其文章、氣象, 亦自少異也。” 降自, 其間小變, 不可枚擧, 而以言其大者則夏人尙忠, 忠弊, 故救之以質; 質弊, 故救之以文; 文弊不救然後, 天下壞亂, 入于强以暴虐, 焚《詩》《書》而亡; 興, 監其弊, 尙寬德, 崇經術。 及其弊也, 崇虛文、無實節, 權移外戚, 諛侫成風。 世祖之興, 褒崇節義, 於是, 士務名節, 而其弊也, 不知節之以禮, 視死如歸, 苦節不中。 人皆厭之, 而時無賢主出而救之, 故苦節變爲之曠蕩, 尙浮虛、亡禮法。 禮法旣亡, 與夷狄無異, 故五亂華, 中原糜爛。 亂極當治, 故有貞觀之治, 而救弊未盡其道, 猶有夷狄之風。 三綱不正, 君不君、臣不臣, 藩鎭不賓, 權臣跋扈, 陵夷有五代之亂。 興, 懲藩鎭之患, 釋去兵權, 收攬威柄, 而眞宗以後, 狃於昇平, 紀綱漸弛, 武略不競。 仁宗雖極富庶, 而頹靡之象, 已著, 當時大賢, 皆思變通之策。 直至神宗, 値可變之會, 奮有爲之志, 而所信任者, 王安石也。 後仁義而先功利; 違天人而促亂亡, 反不如不變之爲愈也。 馴致大禍, 變夏爲夷, 他尙何說哉, 上下數千年間, 歷代治亂之跡, 大槪如此。 隨時善救者, 只見於三代而已, 三代以後, 救者固鮮, 而亦未盡道焉。 大抵隨時可變者, 法制也; 亘古今而不可變者, 王道也, 仁政也, 三綱也, 五常也。 後世道術不明, 不可變者, 有時而遷改; 可變者, 有時而膠守, 此所以治日常少; 亂日常多者也。 且以我東方言之, 箕子八條, 文獻無徵; 鼎峙擾攘, 政敎蔑聞; 前朝五百, 風雨晦冥。 至于我朝, 太祖啓運; 世宗守成, 始用《經濟六典》, 至于成廟, 刊行《大典》, 厥後隨時立法, 名以《續錄》。 夫以聖承聖, 宜無所不同, 而或用《經濟六典》; 或用《大典》, 添之以《續錄》者, 不過因時而已。

當其時也, 建白創制, 人不爲怪, 而法行不滯, 民得蘇息。 燕山荒亂, 用度侈繁, 變祖宗貢法, 日以損下益上爲事。 中廟反正, 政當由舊, 而初年當國者, 只是功臣之無識者而已。 厥後己卯諸賢, 稍欲有爲, 而讒鋒所觸, 血肉糜粉, 繼以乙巳之禍, 慘於己卯。 自是士林狼顧脅息, 以苟活爲幸, 不敢以國事爲言。 而惟是權奸之輩, 放心肆意, 利於己者, 以爲舊法而遵守; 妨於私者, 以爲新法而革罷, 要其所歸, 不過剝民自肥而已。 至於國勢之日蹙; 邦本之日斲, 孰有一毫動念者哉, 幸値聖明存心學問, 垂念民生, 可以因時設法, 匡濟一世。 而自上虞邯鄲之步, 少更張之慮, 而爲臣者論人, 則恐有安石之患; 自愛則恐有己卯之敗, 莫敢以更張爲說。 試言今日之政, 則貢案守燕山虐民之法; 銓選遵權奸請托之規。 先文藝、後德行, 而行尊者, 終屈於小官; 重門閥、薄賢才, 而族寒者, 不展其器能。 承旨不入稟于御內, 近臣疎, 而宦官親, 侍從不參預於廷議, 儒臣輕, 而俗論重。 不久一官, 以歷敭淸顯爲榮; 不分職事, 以專委曹司爲務。 弊習、謬規, 難以縷陳, 而不始于己卯, 必成于乙巳。 而今之議者, 擬以祖宗之法, 不敢開更張之論, 此所謂不知時宜者也。 大抵雖聖王立法, 若無賢孫有以變通, 則終必有弊。 故周公, 大聖也, 治而不能振後日寢微之勢; 太公, 大賢也, 治而不能遏後日簒弑之萠。 若使賢孫, 善遵遺意, 不拘於法, 則寧有衰亂之禍哉, 我國祖宗立法之初, 固極周詳, 而年垂二百, 時變事易, 不無弊端, 猶可變通, 況後日謬規, 汲汲改革, 當如救焚拯溺者乎, 《傳》曰: “窮則變, 變則通。” 伏願殿下, 留念思所以變通焉。 所謂實功者, 作事有誠, 不務空言之謂也。 子思子曰: “不誠, 無物” 孟子曰: “至誠, 未有不動者也。” 苟有實功, 豈無實效哉, 今之治效靡臻, 由無實功, 而所可憂者有七。 上下無交孚之實, 一可憂也; 臣隣無任事之實, 二可憂也; 經筵無成就之實, 三可憂也; 招賢無收用之實; 四可憂也; 遇災無應天之實, 五可憂也; 群策無救民之實, 六可憂也; 人心無向善之實, 七可憂也。 上下無交孚之實者, 何謂也, 君臣交際, 猶天地之相遇也。 在《易》《姤》之彖曰: “天地相遇, 品物咸章也。” 程子之傳曰: “天地不相遇, 則萬物不生; 君臣不相遇, 則政治不興; 聖賢不相遇, 則道德不亨; 事物不相遇, 則功用不成。” 是故, 明良相遇, 肝膽相通, 密如父子; 合如符契, 骨肉之親, 不能間; 鑠金之口, 無所容, 然後言行策用, 庶績以成。 三代聖王, 皆由是道, 未有君臣不相深信, 而能成治效者也。 竊伏惟念, 殿下明睿有餘, 而執德不弘; 好善非淺, 而多疑未祛。 是故, 群臣務建白者, 疑其過越; 尙氣節者, 疑其矯激, 得衆譽則疑其有黨; 斥罪過則疑其傾陷。 加以發號之際, 辭氣抑揚, 好惡靡定。 至於頃日之敎有曰: “大言競進, 喜行無前之事, 宜乎風淳政擧,” 斯敎一出, 群惑彌增。 古人有言曰: “言善非難, 行善爲難。” 邵雍曰: “治世尙德, 亂世尙言。” 古今天下, 安有大言競進, 而能使風淳政擧者乎, 且殿下以大言爲是耶, 爲非耶, 如其是耶, 則其所謂大言者, 不過引君當道, 期臻至治而已。 殿下當採用之不暇, 不當以競進爲譏諷也。 有言而不用, 則雖美, 而無益。 故子思爲臣, 而魯繆之削弱滋甚; 孟子爲卿, 而齊宣之王業不興。 況今進言者, 旣非思孟, 而採用之實, 蔑聞者乎, 何怪乎時事之不治哉, 如其非也, 則此乃造言生事之流也。 殿下當抑浮躁、務敦實, 以安朝廷; 以鎭人心, 不當以大言爲美事也。 嗚呼! 以讜論尤其競進, 則士氣沮, 而邪徑開; 以浮躁美其大言, 則虛僞長, 而實德喪。 殿下必居一於此矣, 抑未知殿下實無深意, 而言辭偶失者乎。 殿下於群臣, 深信有所不足。 故群臣亦不知聖意之所在, 每於聖敎之下, 一言異常, 則莫不駭目怵心, 常若臨不測之淵。 昨者大臣之承召也, 只是一味惶恐而已, 無一策可以回天心、救世道者。

若使大臣全無識見, 則已矣, 如有所見, 則豈非預憂殿下之不傾四聰也哉, 至於出一郞官; 補一殘邑, 聖心憂民, 未必有他, 亦非異事。 而朝士之有善名者, 咸懷不自安之心, 豈非殿下之誠, 未能素孚而然乎, 古之聖王, 處心行事, 如靑天白日, 萬物咸覩, 至於蚩蚩下民, 亦莫不洞知上意。 故殺之而不怨; 利之而不庸。 今者近密之臣, 尙未曉聖心, 況他人乎, 昔者中廟之於趙光祖也, 可謂 ‘聖賢相遇’ 矣, 而陰邪忽入左腹, 如明鏡蔽于塵垢, 晝而唯諾於一榻之前; 夜而墜落於千仞之壑。 今之士林, 傷弓甫耳, 餘惴尙存。 小臣常以淺見爲說曰: “中廟固是聖主, 而過於虛受, 君子之言雖易進, 而小人之讒亦易入矣。 今上則不然, 察言必詳, 傾聽不苟, 君子雖悶悶難契, 小人亦不敢罔以非道矣。 聖明之代, 必無士林之禍, 但恐民窮國蹙, 變通無策, 終有土崩之勢耳。” 今之士類, 能信臣言者, 有幾人乎, 君臣交際, 誠信未孚, 而能保治平者, 自古及今, 未之聞也。 此其可憂者一也。 臣隣無任事之實者, 何謂也, 設官分職, 各有所司, 三公摠統機宜; 六卿分理庶務; 侍從有論思之責; 臺諫受耳目之寄, 下至庶司小官, 莫不各有其任。 監司宣化于外; 節帥領督于邊, 守令分憂; 鎭將監戍, 亦莫不各有其職。 今者三公, 固是人望所屬, 而亦不敢建白施設, 徒能恭愼畏忌而已, 殊無經濟邦國, 挽回世道之望, 他又何責焉, 大官悠悠於上, 惟瞻前顧後是務; 小官泛泛於下, 惟相時射利爲事。 紀綱專委之臺閣, 而不過摘抉一二奸細以塞責; 銓選專出於請托, 而不過安排一二名士以托公, 以至庶司之官, 漫不知所掌何事, 惟知積日累朔以求遷。 大小之官, 豈無一二奉公忘私者哉, 只是形單勢弱, 不能有所裨益。 監司巡遊自娛, 以廚傳豐約; 文書工拙爲殿最, 能明黜陟者, 有幾人乎, 節帥嚴刑以自威, 剝割以自奉, 撫綏、精練, 兩失其榮, 能不辱閫外之寄者, 有幾人乎, 守令只知斂民以自利; 行媚以干譽, 能以字牧爲心者, 屈指甚鮮。 鎭將先問軍卒之幾何, 以計綿布之多少而已, 能以防備爲虞者, 絶無幸有。 惟是胥吏之輩, 投間抵隙, 執其機要, 生民膏血, 殆盡於胥吏之手矣。 至於籍兵, 最是大事, 而賄賂交於路, 僞券亂其眞, 村民欲餽以牛, 色吏必求緜布, 以牛易布, 牛墾賤。 京外皆然, 衆口沸騰, 況於他事乎, 曺植嘗曰: “我國以胥吏而亡。” 此言雖過, 亦有理焉。 此由群臣不任事之過也。 官各稱職, 則安有以胥吏亡國者乎, 今若以爲, 所任非人, 而欲易之則一時人物不過如此, 賢才難以猝辦, 以爲刑法不嚴, 而欲重之則法重而奸益滋, 且嚴法, 非救弊之策也。 以爲無可奈何, 而置之則百弊日增; 庶績日敗; 民生日困, 而亂亡必隨。 此其可憂者二也。 經筵無成就之實者, 何謂也, 古者, 設三公之官, 師, 道之敎訓; 傅, 傅之德義; 保, 保其身體。 此法旣廢, 師、傅、保之責, 專在於經筵。 故程子曰:“君德成就, 責經筵。”經筵之設,非爲臨文講讀,不失章句而已,將以解惑而明道也;將以納誨而進德也;將以論政而制治也。故祖宗於經筵官,待之有禮;親之有恩,如家人父子,情意洞澈焉。

今之侍臣, 學問多缺, 誠懇多之, 或難於入侍, 至有規避者矣。 雖然, 豈無懷誠抱懇, 願親聖明者哉, 近者經筵不頻, 接見固疎, 而禮貌嚴肅, 辭氣罔舒, 酬答甚罕, 講問不詳, 政要時弊, 未嘗咨詢。 間有一二講官, 勸勉聖學, 則亦泛然俯聽而已, 殊無體驗踐履之實。 罷筵之後, 大內深邃, 瞻仰徒勤, 而殿下左右, 只有宦寺、宮妾而已, 未知殿下燕居之時, 所覽者何書; 所做者何事; 所聞者何語耶。 近臣尙不能知, 況外臣乎, 孟子, 亞聖也。 齊王之尊敬, 亦至矣, 尙有一曝十寒之歎。 況今侍臣, 有愧古人, 而疎外若是者乎, 此其可憂者三也。 招賢無收用之實者, 何謂也, 古之帝王至誠求賢, 如恐不及, 或感於夢寐; 或遇於漁釣者, 非特賢其人, 示其褒奬而已, 將與之共天位, 使之食天祿, 俾施澤於蒼生。 故詢之以輿議; 察之以接言; 試之以行事, 果知其爲賢, 則近其人, 而用其計, 使行其道焉。 夫是之謂, 王公之尊賢者也。 今殿下愛士求賢, 視古無愧, 幽貞隱德, 揚仄殆盡, 盛美之典, 近古所罕。 第以論薦之際, 泛言某人可用而已, 行跡之詳, 未嘗陳達。 有司旣失其宜矣, 自上亦不曾親見其人, 察其賢否, 但依例爵之而已。 夫修身篤行, 非以有求也, 山林之間, 豈無不屑爵祿者哉, 士之出處, 固非一端, 有不卑小官者; 有韞櫝不售者。 殿下之招賢, 只命以爵祿而已, 殊無接見、察試、擢用, 行道之實, 故今日以薦擧就職者, 或有爲親而屈者; 或有爲貧而仕者; 或有只爲謝恩而來者, 未嘗聞一人爲行道而出者也。 求賢最是美事, 而其歸不過虛文, 則治道何由可成, 此其可憂者四也。 遇災無應天之實者, 何謂也, 皇天之於人君, 若父母之於子也。 父母怒其子, 發諸辭色則子雖無過, 必倍加齊慄, 承顔順旨, 必得父母之底豫, 乃安於心, 況有過者, 尤當引咎哀謝, 革心改行, 起敬起孝, 必得父母愉悅之色可也, 不當但懷危懼, 拱手閉戶而已也。 帝王之遭天變, 亦如是焉, 反躬自省, 周察疵政, 身無愆矣; 政無闕矣, 亦當益加修勉, 欽若不已, 未嘗以無過自恕也, 況於身有愆, 而政有闕者乎, 必也求言, 以廣知見; 進賢, 以助不逮, 省民以勤撫摩; 革弊以興政治, 必務所以補前過、回天怒可也, 不當遑遑無策, 若有過之子, 拱手閉戶, 以俟父母之怒自息也。 頃年以來, 尋常有災, 人皆狃習, 不知可懼, 只緣白虹貫日之變, 極是陰慘, 故睿念驚惕, 倍加祇畏, 無乃回亂做治之幾, 闖發於今日乎, 因此幾會, 別無修治之擧者何耶, 夫避殿減膳, 畏災之文也, 末也; 進德修政, 畏災之實也, 本也。 文與末, 固不可廢也, 實與本, 今何事耶, 此其可憂者五也。 群策無救民之實者, 何謂也, 法久弊生, 害歸於民, 設策矯弊, 所以利民也。 聖敎有曰: “君依於國, 國依於民, 設百官, 分庶職, 只爲民生而已。 民旣擾蕩, 則國將何賴焉,” 臣伏讀再三, 不覺感激流涕。 大哉, 王言! 一哉, 王心! 此眞安庶民、回天怒之一大機也。 三代以後, 能知君臣之職, 只爲民生者, 有幾君乎, 但徒善非法, 不推; 徒法非善, 不行。 殿下愛民之心固是如此, 而愛民之政, 猶有未擧。 群下之獻策者, 只齊其末, 不揣其本, 故聽之若美, 行之無實。 今日進一計, 請除無名之稅, 而列邑之科斂自若; 明日建一議, 請均田戶之役, 而豪右之逭賦猶舊。 減選上, 將以蘇復公賤, 而偏受其苦者, 流離如昔; 禁防納, 將以不費民財, 而誅求其賂者, 刁蹬愈甚。 劾罷貪吏, 則繼之者, 未必愈於前人, 徒貽迎送之弊; 請擇邊將, 則望重者, 未必愈於新進, 反無忌憚之念。 其他良號之下; 美令之頒, 非一非再, 而州縣只傳數行書札而已, 村民不知其爲某事也。

夫是之故, 君子之進、議論之正, 與夫民生邈不相關, 但曰, 某人官高顯榮, 可羨而已, 未嘗聞某人被用, 其澤及民云爾。 善言之無效, 果如是則雖使滿朝, 讜論盈耳, 何補於民窮財盡, 而四境渙散者哉, 惟是議論一失, 則乃能害及生民, 無所遲滯焉, 嗚呼, 怪哉! 古今所未聞也。 譬如萬間大廈, 久不修理, 大而樑棟; 小而椽桷, 莫不腐朽, 支撑牽補, 僅僅度日, 欲修其東, 則西掣而傾; 欲改其南, 則北撓而壞, 衆工環視, 無所措手。 置而不修, 則腐朽日甚, 將至顚覆, 今日之勢, 何以異此, 此其可憂者六也。 人心無向善之實者, 何謂也, 敎化不明, 民散久矣。 秉彝雖存, 晦蝕殆甚。 聖明臨御之初, 人心聳然, 頗有向善之念。 若於此時, 聖德日進, 治化日昇, 則今日之人心, 豈止於此哉, 第緣初年大臣, 輔導失宜, 誤殿下以淺近之規; 納民生於卑汚之域。 間以本明之心, 發爲公論, 而淸議尙弱, 俗見猶痼, 其聞善言、見善人也, 或有爲人而歆羨者; 或有外悅而中忌者; 或有顯指而非笑者, 中心好之者絶鮮矣。 是故, 良實少而虛僞盛, 在縲絏而被衆救者, 未必無罪; 爲守令而獲衆譽者, 未必有績。 館薦, 本求學行, 而設酒饌而誘多士者; 或有之; 里選, 本求端良, 而棄行檢而昧廉恥者, 或與焉。 若使秉銓之人, 又從而不擇焉, 則淸獨混淆、賢愚雜糅, 弊將難救。 乃若下民飢寒切身, 本心都喪, 父子兄弟, 尙如路人, 他又何說, 綱常不能維持; 刑政不能檢制, 由今之道, 無變今之習, 雖聖賢在上, 施敎無地。 廣擧鄕約, 雖是美事, 臣愚竊恐以今之習, 徑行鄕約, 亦無成俗之效焉。 此其可憂者七也。 凡此七憂, 爲今世之沈痼, 紀綱之頹、民生之困, 職此之由。 七憂未除, 則雖聖心勞瘁於上; 淸議馳騁於下, 亦無保國安民之效矣。 自古以來, 人君失德, 自取敗亡者, 理勢然也, 無足恨者。 今日聖明, 有何失德, 而國勢如此其岌岌乎, 臣雖多病才疎, 自知無補, 而區區血誠, 不後恒人。 入瞻重瞳, 英姿洞澈, 睿議明斷, 而出顧四方, 殿屎愁苦, 蹙蹙靡騁, 未嘗不深怪永歎, 焦心隕涕也。 嗚呼! 病至膏肓, 神醫尙可救; 國至垂亡, 明王尙可興。 當今朝廷尙靖, 權孽屛跡, 四封尙完, 外釁不作, 及今猶可有爲也, 稍緩則後時而無及矣。 孟子曰: “國家閑暇, 及是時, 修其政刑。” 伏願 殿下, 留念, 思所以振起焉。

今進修己、安民之要, 爲祈天永命之術。 修己爲綱者, 其目有四。 一曰、奮聖志, 期回三代之盛; 二曰、勉聖學, 克盡誠正之功; 三曰、去偏私, 以恢至公之量; 四曰、親賢士, 以資啓沃之益。 安民爲綱者, 其目有五, 一曰、開誠心, 鎰群下之情; 二曰、改貢案, 以除暴斂之害; 三曰、崇節儉, 以革奢侈之風; 四曰、變選上, 以救公賤之苦; 五曰、改軍政, 以固內外之防。 所謂奮聖志, 期回三代之盛者, 昔者成覵景公曰: “彼丈夫也, 我丈夫也, 吾何畏彼哉,” 彼謂聖賢也。 夫以景公之資, 奮勵自强, 則可與聖賢同歸, 故成覵云然。 孟子梁惠齊宣, 非王道不言; 非仁政不勸。 夫以梁惠齊宣之質, 苟能實行王道, 實施仁政, 則亦可與三王比肩, 故孟子云然。 此豈好爲大言, 不度實效者哉, 伏覩, 殿下資質甚美, 仁足以保民; 明足以辨奸; 武足以斷制。 而惟是作聖之志不立; 求治之誠不篤, 以先王爲不可企及, 而退托自小, 迄無振發之念, 未知殿下, 何所見而然歟, 夫所謂志大才疎, 以敗事績者, 不務修己, 妄擧難行之政; 不度强弱, 妄挑難禦之敵之謂也。 若其修己有實功; 安民有實心, 則可以求賢而共治; 可以革弊而救時, 此豈志大敗事者乎, 程子嘗曰: “爲國而至於祈天永命; 養形而至於長生; 學而至於聖人。” 此三事, 分明人力可以勝造化, 自是人不爲耳。” 信乎斯言。 自古未聞實用其功, 而不見實效者也。 今世之人, 不彊於爲善者, 只是心志爲他物所移耳, 政敎風俗, 有以使之也。 敎化不明, 人欲無窮, 志乎富貴; 志乎嗜慾; 志乎避患。 爲學則道與時乖, 故志富貴者, 遠避焉; 爲學則閑邪窒慾, 故志嗜慾者, 退縮焉; 爲學則毁謗必興, 故志避患者, 求免焉, 此豈非政敎、風俗, 有以使之乎, 殿下則不然, 富貴已極而祉者, 豈非所以長守富貴者乎, 嗜慾必淡而所欲, 豈不在於安社稷、壽國脈乎, 禍患可虞而防患, 豈不在於修一身、靖萬民乎, 殿下何憚而志不立乎, 古語曰: “有志者, 事竟成。” 伏願殿下, 濯去舊見, 以來新意, 奮發大志, 期興至治。 此志旣立然後, 勖勵大臣, 使之糾率百官, 改心易慮, 勉稱其職, 則孰敢因循舊習, 以取不恪之罪哉, 夫如是則時事庶可救; 世道庶可回; 天變庶可弭矣。 所謂勉聖學, 克盡誠正之功者, 大志雖立, 必以學問實之然後, 言行一致; 表裏相資, 無負乎志矣。 學問之實, 布在謨訓, 大要有三, 曰窮理也、居敬也、力行也, 如斯而已。 窮理亦非一端, 內而窮在身之理, 視聽、言動, 各有其則; 外而窮在物之理, 草木、鳥獸, 各有攸宜。 居家則孝親、刑妻、篤恩、正倫之理, 在所當察; 接人則賢愚、邪正、醇疵、巧拙之別, 在所當辨; 處事則是非、得失、安危、治亂之幾, 在所當審。 必讀書以明之; 稽古以驗之, 此是窮理之要也。 居敬, 通乎動靜。 靜時, 不起雜念, 湛然虛寂, 而惺惺不昧; 動時, 臨事專一, 不二不三, 而無少過差。 持身, 必整齊嚴肅; 秉心, 必戒愼恐懼, 此是居敬之要也。 力行, 在於克己。 以治氣質之病, 柔者矯之, 以至於强; 懦者矯之, 以至於立。 厲者濟之以和; 急者濟之以寬, 多欲則澄之, 必至於淸淨; 多私則正之, 必至於大公, 乾乾自勖, 日夕不懈, 此是力行之要也。 窮理, 乃格物致知也; 居敬、力行, 乃誠意; 正心, 修身也。 三者俱修竝進, 則理明而觸處無礙, 內直而義形於外; 己克而復其性初。 誠意、正心之功, 蘊乎身而睟面盎背; 刑于家而兄弟足法, 達于國而化行俗美矣。 朱子曰: “文王正心、誠意之功, 薰蒸透徹, 融液周遍, 南國之人, 服文王之化。” 此豈朱子想像揣摩, 而有是說哉, 的知誠正之功, 必能周遍於國, 故云爾。

伏願殿下, 勿以高遠爲難行; 勿以細微爲可忽。 常於燕居, 不輟學問, 四書、五經及先賢格言、《心經》《近思錄》等書, 循環披讀, 深究其義, 非聖賢之心, 不敢存; 非聖賢之書, 不敢觀。 《玉藻》九容, 仔細體認, 念頭之發, 必審天理、人欲之幾。 如人欲也, 遏絶於未形; 如天理也, 善推而充廣。 放心必求, 己私必克, 衣冠必正, 瞻視必尊, 喜怒必愼, 辭令必順, 以盡誠正之功焉。 所謂去偏私, 以恢至公之量者, 矯治病痛之說, 略陳於前矣。 惟是偏私一事, 古今之通患, 故表而論之。 若偏私之念, 一毫未除, 則難入於之道矣。 今殿下淸明在躬, 病痛固寡, 而偏私一念, 猶未盡克, 恐不能與天地同其大也。 至如頃日內官呈手本之事, 臣在外休告, 未得其詳, 似聞以新生王子, 繫於中殿之下, 政院使改書云。 若然則名稱不可混也, 改書數字, 易於反掌, 宦官何爲不從乎, 後日伏覩傳敎則自上命勿改, 而直下政院云。 臣愚不識事體, 但政院, 旣名喉舌, 則大小之事, 莫不經由。 內殿、外廷, 豈有二體, 若是特出於上命, 則雖微細之事, 是乃傳敎, 何名手本, 旣是內官手本, 則不當不由政院, 而入也。 平心察之, 則其理自明。 政院安知特出聖意, 而不尤內官乎, 殿下不能平心, 大厲聲色, 是疎喉舌, 而親宦官, 使長輕蔑朝臣之漸也。 聖敎曰: “時事多誤, 君上不嚴之故也。” 嗚呼! 刑餘小竪, 敢抗喉舌之臣; 遐遠內奴, 敢希非分之恩; 貴戚乘馬, 遇敎書而不避, 殿下之政, 可謂不嚴矣。 殿下其亦以此自咎耶, 文帝時, 太子過司馬門不下車, 而公車令得以劾奏; 鄧通以寵臣無禮, 而丞相檄召將斬。 若以常情論之, 不敬太子, 無乃輕君上耶, 欲斬寵臣, 無乃擅威權耶, 然而文帝不失人君之威, 而治平之效, 固非今日所可比擬也。 今殿下莫親於近臣, 而乃以宦官爲私臣; 莫衆於庶民, 而乃以內奴爲私民, 此病未除則時事無由可正。 臣恐殿下愈嚴, 而時事愈誤也。 武帝不冠見汲黯, 而避帳中; 太宗臂鷂見魏徵, 而匿懷中。 斯二君者, 道雖不粹, 而政令嚴明, 信賞必罰, 貴戚、閹寺, 莫敢犯法, 亦今世之所不能及也。 然而以君畏臣, 有若不嚴何耶, 此非畏臣也, 乃畏義也。 徒嚴而不畏義者, 未有不敗者也。 殿下其亦自反而思義乎, 且近日憲府所爭之事, 臣雖未知首尾, 固疑憲府契勘不詳也。 何則, 殿下雖未免有私, 必不至毋問曲直, 而與匹夫爭一臧獲也。 群臣計未及此, 可謂智不明矣。 雖然, 殿下旣知其當屬內司, 而猶許竝給, 則尤足以欽仰聖度之宏廣矣。 累日堅執, 無乃臣民疑殿下私吝未消乎, 人君不患不嚴, 而患不公。 公則明, 明則嚴在其中矣。 伏願殿下, 行法始於貴近; 推仁達於衆庶。 宮府一體, 而毋使宦官, 恃近而輕朝紳, 兆民一視, 而毋使內奴恃私, 而窺非望。 內帑付之有司, 不以爲私物, 偏係之念, 絶於方寸; 公平之量, 包涵遍覆。 夫如是則府庫皆財, 何患無用; 率土皆臣, 何患無奴哉, 所謂親賢士, 以資啓沃之益者, 人君之學, 莫善於親近正士。 所見皆正事; 所聞皆正言, 君雖欲不正, 得乎, 若正人不親, 而唯宦官、宮妾是近, 則所見非正事; 所聞非正言, 君雖欲正, 得乎, 先賢之言曰: “天生一世人, 自足了一世事, 非借才於異代。” 今之賢者, 固難其人。 雖然, 極一世之選, 不論出身與否; 不分在朝在野, 則豈無一二可以補袞者乎, 伏願殿下, 博詢精擇, 必得其人。 出身者萃于玉堂, 不移他職; 未出身者, 授之閑局, 帶以經筵職名; 陞堂上者, 亦隨其職, 必兼經筵之官。 參於是選者, 輪日入侍, 使之展布所蘊, 而自上虛己和顔, 受其忠益。 講學則必窮義理; 論治則必求實效。 雖非進講之日, 源源召對于便座, 只令史官俱入, 質問所疑, 宣示淵衷。 至如承旨則例以所掌公事, 一日一度, 各得親稟聖旨; 如大臣及臺諫之言, 則不拘時日, 必入親達, 以復祖宗之規。 夫如是則上下之契日密, 而情意無間; 性理之說日進, 而聖學將就, 交歡有同於魚水; 邪穢罔干於天日矣。 凡此四者, 修己之目也。 大槪如斯, 其詳在殿下加意知行而已。 若夫所謂開誠心, 鎰群下之情者, 聖帝明王, 待人處事, 一以至誠, 知其爲君子, 則任之勿貳; 知其爲小人, 則斥之勿疑。 疑則不任; 任則不疑, 坦懷率下, 平平蕩蕩。 爲臣者亦仰之如父母; 信之如四時, 進之則懼不克任, 而益盡其忠; 斥之則自知罪戾, 而只責其身。

故其得人心也, 可以赴湯火; 可李白刃; 可以植遺腹, 朝委裘而不亂, 只知有君上, 而不知有其身。 無他, 至誠所感也。 後之人君, 誠意不足, 只以智力馭下, 所任未必賢, 取其合於己也; 所黜未必不賢, 惡其異於己也。 雖合於己, 而其中未可信, 故任之而不能無疑; 疑之而不能不任。 大臣當國盡職, 則衆情必歸重焉, 安能不疑其專權而擅政乎, 諫官面折廷爭, 則朝野必屬目焉, 安能不疑其賣直而沽名乎, 君子、小人, 以類相從, 安知其孰爲朋黨乎; 善策、邪論, 雜然幷進, 安知其孰爲誤國乎, 於是邪正難分, 是非難辨, 因循則悶其頹墮; 改革則嫌其騷擾。 君心波蕩, 恍然不樂之際, 必有大奸, 潛伺間隙, 隨君心有所左右, 而漸施其巧, 浸潤以入之; 逢迎以悅之; 恐動以惑之, 君心漸信, 陷于術中則良善必殲, 而邦國必喪。 此亦無他, 不誠所致也。 今殿下好善愛士, 固出於誠, 而只緣群臣才德不足, 少可倚信, 故似無委任之意。 至於發言之際, 未免有不信之心, 輕侮之辭, 群臣固所自取也, 聖明亦不可不自反也。 伏望殿下, 務以至誠待下, 心是則言亦稱是; 心非則言亦斥非。 進之則必賞其賢; 退之則必數其過, 聖心如門洞開, 使群下咸得仰見, 無少隔礙。 夫如是則群臣亦無疑畏之念, 務盡其情, 君子有輸忠之願; 小人絶售奸之謀矣。 所謂改貢案, 以除暴斂之害者, 祖宗朝用度甚約, 取民甚廉, 燕山中年, 用度侈張, 常貢不足以供其需, 於是, 加定以充其欲。 臣於曩日, 聞諸故老, 未敢深信。 前在政院, 取戶曹貢案觀之, 則諸般貢物, 皆是弘治辛酉所加定, 而至今遵用, 考其時則乃燕山朝也。 臣不覺掩卷太息曰: “有是哉, 弘治辛酉, 於今爲七十四年, 聖君非不臨御; 賢士非不立朝, 此法何爲而不革耶,” 究厥所由, 則七十年之間, 皆有權奸當國, 二三君子, 雖或立朝, 志不及展, 奇禍必隨, 何暇議及於此哉, 其必有待於今日乎! 且物産隨時或變; 民物田結, 隨時增減, 而貢物分定, 乃在國初, 燕山朝只就而加定耳, 亦非量宜變通之也。 今則列邑所貢, 多非所産, 有如緣木求魚、乘船捕獸, 未免轉貿他邑, 或市于京, 民費百倍, 公用不裕。 加以民戶漸縮, 田野漸荒, 往年百人之所納, 前年責辦於十人; 前年十人之所納, 今年責辦於一人, 其勢必至於一人亦盡, 然後乃已也。 今者語及改正貢案, 則議者必諉以祖宗之法不可輕改。 雖 祖宗之法, 民窮至此, 不可不變, 況燕山之法乎, 伏望殿下, 必擇有智慮可以曉事; 有心計可以推算; 有才能可以幹辦者, 俾之專掌其事, 以大臣領之, 悉除燕山所加定, 以復祖宗之故。 因考列邑之物産有無、田結多少、民戶殘盛, 推移量定, 均平如一, 必以本色, 納于各司則防納不禁自罷, 民生如解倒懸矣。 今日急務, 無大於此矣。 所謂崇節儉, 以革奢侈之風者, 民窮財盡, 今日已極。 貢物不可不減, 而若用度不法祖宗, 則不能量入爲出, 方底圓蓋, 理所不合。 加以風俗之奢靡, 莫甚於今日。 食不爲充腹, 盈案以相誇; 衣不爲蔽體, 華美以相競, 一卓之費, 可爲飢者數月之糧; 一襲之費, 可爲寒者十人之衣。 十人耕田, 不足以食一人, 而耕者少, 食者多; 十人織布, 不足以衣一人, 而織者少, 衣者多, 奈之何民不飢且寒哉, 古人曰: “奢侈之害, 甚於天災。” 豈不信哉, 若非自上先務節儉, 以救此患, 則刑法雖嚴、號令雖勤, 徒勞而無益。 臣嘗記故老之言, 曰: “成廟寢疾, 大臣入問, 則臥內所覆茶褐紬衾, 將弊而不改矣。” 聞者, 至今欽想不已。 伏願殿下, 命考祖宗 朝供奉規例, 宮中用度, 一依祖宗之舊儉約之制, 垂範中外, 以革民間之侈習, 使人羞陳盛饌、羞被美服, 以惜天財、以紓民力焉。 所謂變選上, 以救公賤之苦者, 選上本意, 非欲辦出綿布也。 在京典僕, 不足於立役, 故以在外公賤, 輪立京役, 名之曰選上。 貧殘公賤, 裹糧羈留, 侵苦多端, 有所不堪, 始以綿布償役, 今則只徵綿布而已, 無一人來役者矣。 民生日困, 戶口日耗, 公賤亦民也, 豈能獨完, 展轉流亡, 不能生息, 而一償選上之役, 則其免敗家者鮮矣。 二年納貢, 一年選上, 大率三年, 必一敗家, 而公賤之苦極矣。 加之以該曹色吏, 分定不均, 雖奴婢衆多之邑, 有賂則少定; 雖僅存數口之邑, 無賂則多定, 力不能支, 則侵及一族, 齊民亦被其苦矣。 旣困之後, 雖公明均定, 亦不能救矣, 若不變通, 後患無窮。 臣愚以爲: “改身役而受綿布, 已非《大典》之法, 則今亦可廢選上, 而加身貢也。” 伏望殿下, 命該官詳考奴婢之案, 據其現存之數, 每年奴貢納緜布二匹, 婢貢納一匹半, 都計幾何, 以其五分之二, 儲于司贍爲國用, 以其五分之三, 分給各司, 以準選上之役, 緜布不足則量宜減立役之數。 夫如是則公賤有定貢, 可以預備, 無猝辦之患; 收貢有定簿, 無所刪改, 絶奸吏之術, 號令不煩, 而民受實惠矣。

所謂改軍政, 以固內外之防者, 天變難測, 固不可指爲某事之應, 然以古史驗之, 白虹貫日, 多是兵象。 目今軍政廢壞, 四徼無備, 脫有緩急, 雖以運智; 統制, 無兵可將, 安能獨戰, 念及於此, 心寒膽慄。 時弊旣陳於前, 而軍政則未之詳也, 今請先陳其弊, 後設其策可乎。 我國法制, 多所欠闕。 只設兵使、水使、僉使、萬戶、權管等官, 而無廩養之具, 使之取辦於士卒, 邊將侵漁之弊, 濫觴於此矣。 法制漸弛, 貪暴轉盛, 加以銓選不公, 債帥接武公言曰: “某鎭之將, 其直若干; 某堡之官, 其價若干。” 彼輩徒知割剝軍卒, 以發其身而已, 他又何慮哉, 士卒苦於留防, 願納緜布, 以免戍役者, 必悅而從之, 其留鎭者, 則必督以難堪之役; 責以難辦之需, 使煎熬於膏火之中。 人非木石, 孰不愛身, 見免戍之人, 偃臥其家, 莫不歆羨, 亦效其爲。 若戍役多免, 鎭堡將空, 則必誘近處居民, 使於擲奸之時, 假名代點。 巡按之官, 只閱其數而已, 孰問眞贗, 免戍雖便, 緜布難備, 故數度留防, 家已懸磬, 不能支保, 逋亡相繼。 明年按簿督戍, 則本邑必以一族應役, 一族又逃, 則侵及一族之一族, 禍患蔓延, 無有紀極, 將至於民無孑遺。 而彼所謂債帥者, 方且志滿氣得, 稛載還家, 驕其妻妾, 而貧者以富, 行賂權門, 又圖陞授, 而賤者以貴焉。 今之議者, 不思矯革此弊, 而徒以軍額未充爲憂。 臣愚以爲: “假使軍額悉充, 此弊未革, 則不過添邊將所得綿布而已, 於防備何與哉,” 此, 一弊也。 水陸之軍, 不必留防於所居之地, 或赴於數日之程; 或赴於千里之外, 至有不習水土, 多發疾病者。 旣怵於將帥之侵虐, 又困於土兵之陵暴, 覉旅寒苦、飢飽失時, 南軍之戍北邊者尤甚, 羸瘁顚頓, 面無人色。 此等若遇虜騎, 雖欲逃避, 亦不可得, 坐受魚肉, 況可望控絃而禦敵乎, 臣聞, 黃海騎兵之戍平安者, 一行之費, 必不下三四十疋綿布。 夫三四十疋, 乃村民數家之産也。 一往, 必破數家之産, 安得不窮且盜也, 此, 二弊也。 六年成籍之法, 廢而不行, 癸丑年搜括於久廢之餘。 奉使之臣, 以嚴急幹辦爲能, 州縣承風, 猶恐不及, 只念搜括之或遺, 不計苟充之貽患。 丐乞之人, 無不備數, 鷄犬之名, 亦得載錄, 不出一二年, 太半爲虛簿。 于今二十餘年, 又擧大事, 軍額之闕, 甚於癸丑, 閑丁之鮮, 亦甚於癸丑, 搜括雖巧, 豈能造無麪之不托哉, 今之所刷出者, 非童稚則乞人; 非乞人則士族也, 閑丁之實者, 有幾人乎, 今雖籍軍不日又成, 空簿矣。 該曹非不聞見, 而方且硏硏然以必充爲說, 其不度理勢, 甚矣。 此三弊也。 內外良役, 名目甚衆, 不可枚數, 而其中所謂皂隷、羅將、諸員者, 最其苦役也。 此亦以綿布償役而已, 其所屬之司, 旣以他人代立, 而不時侵督邸吏, 使償役債。 邸吏出息以納, 而歷算所費, 徵其三倍於當身, 故一人每應三人之役, 有所不支, 例徵一族。 此, 四弊也。 凡此四弊, 及今不救, 數年之後,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伏望殿下, 更張舊制, 創立新規。 凡兵、水營及鎭、堡所在處, 必以其邑簿外之穀, 量宜優給邊將之糧, 其邑之穀不足, 則收傍邑之穀, 必使邊將, 有以自奉所需無闕。 而嚴明法制, 尺布斗粟, 使不得斂於軍卒, 只使精鍊器械, 敎習騎射。 兵、水使及巡按之行, 不徒呼名點閱, 必閱其器械, 試其騎射, 視其訓鍊能否, 以爲殿最。 若如前斂債、放卒而發覺, 則治以贓律。 僉使、萬戶、權管等官, 不論南北遠近, 皆付軍職, 使妻子受祿以資生。 初授之時, 必擇其人, 而旣授之後, 五考五上, 則由權管而陞萬戶; 由萬戶而陞僉使; 由僉使而授東班六品之職。 五考之內, 若居中者, 則平遷他鎭, 不得陞授, 使之自惜前程, 有所勸勉。 若其留防則必領其邑之卒, 其邑之卒不足, 然後乃定于傍邑, 而留防所在處, 則諸色良役皆廢, 只存留防之役, 使無遠赴之勞, 而分番迭休。 其在鎭之時, 亦無一毫費力傷財之事, 其應鎭將之使令也, 不過搬柴、運水而已, 他無所與, 使得專意於操弓習射焉。 若黃海騎兵北戍之役則命罷勿爲, 若虞邊備之疎, 則命沿邊守令, 敎民習射, 三月一試, 矢數多者, 厚其賞給, 二度居魁者, 復其家口之役, 若五度居魁者, 軍卒則特補軍官, 擇其中有知識可堪領衆者, 啓其名于該曹, 使補權管, 以試其可用與否。 若公、私賤則啓其名, 特許免賤, 私賤則優給其價于本主。 夫如是則五度居魁者, 其出甚罕, 而邊氓盡化爲精兵矣。 脫有邊警則人各自救, 孰不力戰乎, 上番之軍, 有司亦時試其武才, 其中最優者, 啓達論賞。 五度居魁則特補所居近處鎭堡軍官, 使有鍊業之志。 至如籍兵, 務得實軍, 不爲苟充。 閑丁未滿十五歲者, 但錄其名字、年歲于別簿, 使之待年入籍, 傭食、丐乞人則一切刊落。 列邑軍簿, 姑存舊額, 但錄幾名未充, 而命守令, 休養生息, 勞來不怠, 而隨得隨補, 不限年月, 期以悉充。 且於六年, 例必改籍, 俾無倉卒騷擾之患。

若虞軍卒不足, 不能應諸處之役, 則上番之軍, 量減其數, 猶不足則防歇之處量減其數, 猶不足則南方冬月之留防, 量減其數, 猶不足則步兵之納價布者, 除其半, 以補留防之闕。 留防旣無侵暴之害, 則步兵亦不至如避豺虎矣。 若所謂皂隷、羅將、諸員等則不必各有所屬, 悉廢其名, 皆變爲步兵, 納價布于兵曹。 兵曹量各司立役之數, 以給價布, 則邸吏免不時之侵督, 民間無三倍之暴斂矣。 軍政之善策, 此其大略也。 凡此五者, 安民之目也。 大槪如斯, 其詳在殿下博咨規畫而已。 竊觀, 今之時事, 日就謬誤, 生民氣力, 日就消盡, 殆甚於權奸用事之時。 其故何哉, 權奸之時, 祖宗遺澤, 尙有未盡, 故朝政雖亂, 民力尙支。 今日則祖宗遺澤已盡; 權奸遺毒方發, 故淸議雖行, 民力已竭。 譬如有人少壯之時, 縱酒荒色, 戕害多端, 而血氣方强, 未見所傷, 及其晩年, 戕害之毒, 乘時暴發, 雖謹愼調保, 元氣已敗, 不可支持。 今日之事, 實同於此, 不出十年, 禍亂必興。 匹夫以十間之屋、百畝之田, 傳於子孫, 子孫猶思善守, 以無忝所生, 況今殿下受祖宗百年社稷、千里封疆, 而禍亂將至者乎, 心誠求之, 不中不遠, 力雖不足, 猶可自救。 況今殿下總攬權綱, 明燭事理, 力能救時者乎, 小臣受國厚恩, 百死難報, 苟利於國, 鼎鑊斧鉞, 亦且不避。 況今殿下, 廓開言路, 容受不諱, 手敎之下, 詞旨懇惻。 臣若不言, 實負殿下, 衷情所激, 極言竭論, 而疾病之餘, 神惛手戰, 辭俚語複, 字畫僅成, 無足可觀。 雖然, 其意似遠而實近; 其策似迂而實切, 雖非三代之制, 實是王政之本, 行之有效, 王政可復。 伏望殿下, 詳觀熟閱, 徐究深思, 取舍旣定于聖衷然後, 廣咨廷臣, 議其可否而進退之, 幸甚。 殿下用臣之策, 付之能手, 行之以炤; 守之以堅確, 毋爲流俗守常之見所移奪; 毋爲醜正讒間之舌所搖惑。 如是者三年, 而國不振、民不寧、兵不精, 則請治臣以欺罔之罪, 以爲妖言者之戒。

上答曰: “省觀疏辭, 可見堯、舜君民之志。 善哉, 論也! 古之人無以加焉。 有臣如此, 何憂不治, 深嘉乃忠, 敢不書紳, 第緣事多更張, 不可猝然盡變。” 此疏示諸大臣議處, 且鵡疏以進。是時人心危疑,及見珥疏批答,衆情大安。

선수 8권, 7년(1574 갑술/명만력(萬曆)2년) 11월 1일(신미) 2번째기사

질정관 조헌이 경사에서 돌아와 올린 시무에 절실한 8조의 상소문

질정관(質正官) 조헌(趙憲)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다.

조헌은 중국의 성대한 문물을 익히 살펴보고 그것을 동방에 시행해 볼 생각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는, 시무(時務)에 절실한 것 8조와 근본에 관계된 것 16조등 상소문 두장을 초하였다. 이는 모두 중국의 제도를 먼저 인용한 다음 우리나라가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제도를 언급하여 그 득실의 이유를 갖추 논하고, 고의(古義)87)와 절충하여 오늘날 시행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었다. 먼저 8조 소를 올리자, 상이 답하기를,

“천백리 풍속은 서로 다른 것인데, 만약 풍기(風氣)와 습속이 다른 것을 헤아리지않고 억지로 본받아 행하려고 하면 끝내 소요만 일으킬 뿐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하니, 이때문에 조헌은 16조소를 올리지않고 말았다. 그 8조 소에,

“첫째, 성묘(聖廟)의 배향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가정(嘉靖)88)때에 공자의 위패에 쓴 문선왕(文宣王)의 칭호를 ‘지성선사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고 고쳐썼으며, 안자(顔子) 이하는 모두 작명(爵名)을 떼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문묘의 액호(額號)도‘대성전(大成殿)’이라하지않고‘선성묘(先聖廟)’라고 하였습니다.

위판(位版)의 길고 짧음은 감히 자세히 헤아려 보지 못하였습니다마는, 공자는 붉은 바탕에 금니(金泥)89)로 썼는데 길이는 약 1자 남짓하고 폭은 2치 남짓했으며, 사성(四聖)90) 이하는 조금 짧아 1자가 조금 못되고 붉은 바탕에 먹으로 썼습니다.

종사(從祀)91) 이하는 더 짧고 부방(趺房)도 쓰지않았으며 나무를 깎아서 대(臺)를 만들어 안치하여 놓았는데, 모두 독(櫝)92)이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금년 5월에 내리신 바 위판의 치수를 상고하여 아뢰라는 교지를 보고 생각건대, 신의 소견으로는 융경(隆慶)93) 연간에 나온《태학지(太學志)》에 기록된 척수(尺數)는 주척(周尺)이지 포백척(布帛尺)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태학(太學)의 동·서무(東西廡)에는 위(位)마다 각각 향로가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향로를 하나로 겸설(兼設)하였으나, 이런 일은 마땅히 의논하여 고쳐야 할 것입니다.

신은 살펴보건대 문선왕(文宣王)을 공자로 고쳐부른 내력은 이렇습니다.

한평제(漢平帝)때에 왕망(王莽)이 간계(奸計)를 부리기 위해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고 잘못되게 불렀으며, 당현종(唐玄宗)이 처음으로‘문선왕’이라고 시(諡)를 붙였는데 안자 이하는 차례로 공(公)·후(侯)·백(伯)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왕(王)과 공(公)으로 봉한 것은 부자(夫子)의 이른바‘군군(君君)·신신(臣臣)·부부(父父)·자자(子子)’의 도94)에 있어서는 일체가 어긋나는 것으로서 성인을 거짓으로 높여 천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어찌 가신(家臣)을 둔 거짓을 꾸짖고95) 대부(大夫)가 앉는 자리라고 하여 바꾸도록 하신96) 분들이 그 이름을 일각인들 마음 편히 누리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자신은 황제라 자칭하고 자기의 신자(臣子)에게나 봉하는 왕의 칭호를 강제로 가하는 것은 더욱 성인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정(嘉靖)10년97)에 태학사(太學士) 장부경(張孚敬)의 건의로 인하여 천년동안의 과오를 일시에 바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그 잘못을 답습하고 있으니, 마땅히 논의하여 고쳐야 할 것입니다.

신은 또 살펴보건대, 동·서무의 서열(序列)에 임방(林放)·거원(遽瑗)·공백요(公佰寮)·진염(秦冉)·안하(顔何)·순황(荀況)·대성(戴聖)·유향(劉向)·하휴(何休)·가규(賈逵)·마융(馬融)·정중(鄭衆)·노식(盧植)·정현(鄭玄)·복건(服虔)·범영(范寧)·왕숙(王肅)·왕필(王弼)·두예(杜預)·오징(吳澄) 등은 그 가운데에 있지 않았고, 후창(后蒼)·왕통(王通)·구양수(歐陽脩)·호원(胡瑗)·양시(楊時)·육구연(陸九淵)·설선(薛瑄)등은 그 열에 들어 있었습니다.

대체로 종사(從祀)의 전례(典禮)는 성문(聖門)에 공이 있는 것을 보답하고 후학(後學)의 추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진염과 안하는 상고할 곳이 없고, 임방과 거원도 승당(升堂)98)의 서열은 못 되고, 정중·노식·정현·복건·범영등도 순유(純儒)가 아니므로 종사에서 내보내었는데, 임방의 예를 좋아함과 거원의 허물이 적은 점은 남의 스승이 될 만하고 정중등 여러 사람들의 경(經)을 주해(注解)한 공은 기념하지 않을 수 없기때문에, 각기 그 지방에서 향사하고 있습니다.

공백요는 직접 성문(聖門)에 유학하였으나 도리어 부자의 도를 해치려 하였고, 순황은 인성(人性)이 악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사(子思)와 맹자가 천하를 어지럽혔다고 말하였고, 대성은 자신이 장리(贓吏)의 오명을 입었고, 유향은 신선(神仙)을 즐겨 말하였고, 가규는 참위설(讖緯說)을 견강부회하였고, 마융은 탐비(貪鄙)하여 권세가에 붙어 양기(梁冀)를 위해 조서(詔書)를 초하여 이고(李固)를 죽였고, 하휴는 《춘추》를 주해하면서 주실(周室)을 내치고 노(魯)를 왕으로 했고, 왕필은 노장(老莊)의 사상을 받들었고, 왕숙은 사마소(司馬昭)를 도와 위(魏)를 찬탈하였고, 두예는 관리가 되어서는 청렴하지 않고 장수가 되어서는 의롭지 않았으며, 오징은 출처가 바르지 않은데다 학술 또한 선(禪)으로 기울었으니, 이들은 마땅히 수사(洙泗)의 서열에서 거절당하여 다사(多士)의 모범이 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관(貞觀)99)·원풍(元豊)100)·정통(正統)101)연간에는 조정에 진유(眞儒)가 없어서 정밀하게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마단림(馬端臨)이 사실 일찍이 그것을 논의한 일이 있고 홍치(弘治)102) 제신(諸臣)들도 축출하기를 청한 자가 많았으나, 예부(禮部)의 저지로 그 논의는 끝내 행하여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종황제(世宗皇帝)가 태학사 장부경(張孚敬)의 말로 인하여 과감히 개정하여 단번에 전대의 잘못된 견해를 씻어버림으로써 후생의 이목을 혼란하게 하지않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그들이 종사의 열에 끼어 있으니, 마땅히 논의하여 축출해야 할 것입니다.

후창(后蒼)은《예서(禮書)》를 처음으로 주해하여 대·소대(大小戴)의 예학103)이 그에 힘입어 후세에 전해졌고, 왕통(王通)은 학술이 도(道)에 가까와 격언(格言)에 순황(荀況)이나 양웅(揚雄)이 미처 말하지못한 것이 있고, 구양수(歐陽脩)는 성도(聖道)를 부지하고 이단을 배격한 공이 있어 주자(朱子)가 인의(仁義)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였고, 호원(胡瑗)은 제 몸을 닦은 뒤에 남을 다스리는 학문으로 맨 먼저 수당(隋唐)의 이(利)를 추구하는 풍조를 씻어버렸고, 양시(楊時)는 동남지방에서 도를 제창하여 홀로 정씨(程氏)104)의 가르침을 받아서 나(羅)·이(李)105)에게 전함으로써 주자에게 미치게 하였고, 설선(薛瑄)은 도학이 끊겼을 때 떨치고 일어나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주력하였는데,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세워져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니 고풍대절(高風大節)이 급류에 우뚝한 지주산(砥柱山)과 같았고, 물러나 강학(講學)하니 척구미언(隻句微言)도 중천에 빛나는 일성(日星)과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홍치(弘治)때에 양시를 부묘(附廟)하고 가정(嘉靖) 때에 구양수·호원·설선을 추가하였던 것이니, 우리나라에서도 마땅히 강구하여 이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육구연(陸丘淵)의 학술만은 강문(講問)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돈오(頓悟)를 힘써 그 당시에 주자가 참으로 그 설의 해독을 우려하였는데, 유전되어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사람들이 더욱 심하게 빠져들어 온 세상이 휩쓸린 나머지 모두 선학(禪學)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어긋난 논의를 주장하고 주자를 비방한 왕수인(王守仁)과 같은 자를 오히려 종사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필시 강서(江西)의 사람들이 그 학설을 익히 보고 듣다가 조정에 벼슬한 자가 많아서 힘껏 육상산(陸象山)을 지지하여 위로는 조정을 그르치고 아래로는 사학(斯學)을 그르치게 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니, 이와 같은 사례는 그 잘못을 본받아 구차스레 따라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은 또 보건대, 성묘(聖廟)의 서북쪽에 계성묘(啓聖廟)가 또 있었는데, 계성공(啓聖公) 공씨(孔氏)는 북쪽에 있고, 선현(先賢) 안무요(顔無繇)와 공이(孔鯉)는 동쪽에 있고, 증석(曾晳)과 맹손씨(孟孫氏)는 서쪽에 있었으며, 동무(東廡)에는 선유(先儒) 정향(程珦)과 채원정(蔡元定)이 있고, 서무(西廡)에는 주송(朱松)만 있었습니다.

대체로 학궁(學宮)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안자·증자·자사는 묘(廟)안에 있으면서 버젓이 먼저 흠향하는데, 안노(顔路)·증점(曾點)·백어(伯魚)는 아득히 밑에 있으니, 이는 보통 사람이라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성현의 마음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웅화(熊禾)와 홍매(洪邁)가 일찍이 한 묘를 따로 설치하자는 논의를 하였고, 홍치때 정민정(程敏政)이 또 건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명세종(明世宗)때에 이르러 비로소 별묘(別廟)를 지어 춘추석전(春秋釋奠) 때 동시에 행사(行祀)하였으니, 이른바 ‘자식이 비록 성인이라도 아비보다 먼저 먹지 않는다’는 의리가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도 문묘의 서쪽에 비어있는 넓은 땅이 있으니, 만약 논의하여 별묘를 세워 춘추에 함께 행사한다면 인륜이 온전해지고 의리가 맞게 되어 한 나라의 부자관계가 정립될 것입니다.

신은 또 중국조정의 종향(從享)하는 일로 인하여 깊이 느낀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사습(士習)의 추향은 오직 윗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좌우되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지난번에 관학유생들이 제현을 종사하자는 계청을 여러번 올렸는데도 윤허하지 않으셨고, 근신(近臣)이 경연에서 아뢴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참으로 한 시대의 선을 지향하는 마음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신은 삼가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대체로 김굉필(金宏弼)은 처음으로 도학을 제창하여 선성(先聖)을 잇고 후학을 연 업적이 있고, 조광조(趙光祖)는 사도(斯道)를 이어서 밝혀 세상을 건지고 사람을 선량하게 한 공로가 있고, 이언적(李彦迪)은 도(道)를 지니고 순독(純篤)하여 기울고 위태로운 세도를 부지한 공로가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중국에서 찾아본다면 허형(許衡)과 설선(薛瑄) 이외에는 견줄만한 자가 없고, 우리나라에서 찾아본다면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유(安裕)같은 이도 그 경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황(李滉)은 동유(東儒)를 집대성하고 주자의 적통을 계승하여 조정에 나가서는 임금을 옳은 도리로 인도하는 정성이 소장(疏章)을 올릴 때에 간절히 나타나고, 초야에 물러나서는 후학을 각기 재능에 따라 가르치는 뜻이 강론할 때에 간절히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선한자는 그 말을 듣고 경모(敬慕)하고 악한자는 멀리서 그 풍모만 우러러 보아도 스스로 단속하였으니, 오늘날 선비들이 약간이나마 임금을 높이고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며 예의염치가 있게 된 것은 모두 그의 덕에 감화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그 생존시 크게 쓰지못하고 식자들이 태평시대를 보기 어려움을 탄식하였는데, 사후(死後)에까지도 숭장(崇奬)하려고 하지않습니다. 그리하여 현인을 시기하는 방탄(放誕)한 무리가 주위에서 보고 은근히 기뻐할 뿐만 아니라, 지난날 그 덕에 감화하여 일어났던 자들도 모두 실망하고 심지어는 직접 그 문하에서 배우고서도 성리(聲利)에 자취를 더럽힌 자가 있으니, 그 문하에 가지않은 자야 장차 무엇을 믿고 선을 행하겠습니까? 아, 제현의 종사를 청하는 소청은 따르고 따르지않는 일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지만, 사습(士習)의 사정(邪正)은 이미 그것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어찌 중난(重難)한 일이라하여 따르지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후창(后蒼)등 제현(諸賢)은 전대(前代)에 종사하던 이들이 아닌데도 세종황제가 어질다는 것을 분명히 알자 종향(從享)하며 의심하지 않았고, 공백요(公伯寮)등 제인(諸人)은 전대에 일찍이 종사하던 이들이었지만 세종황제가 어질지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자 출향(黜享)하는데 의심이 없었으며, 임방(林放)등 제인이 모두 취할 만한 한가지 장점이 있자 각각 그 고향에 제사지내게 하여 그 좋은 점이 민몰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기타 근세의 제현으로서 장무(章懋)·오여필(吳與弼)·진헌장(陳獻章)·호거인(胡居仁)·진진성(陳眞晟)·채청(蔡淸)같은 이들이 각기 사문(斯文)에 공이 있자, 황상(皇上)이 명하여 그 고향에서 제사지내게 하고 선조(先朝)에서 정하지않은 일이라고 하여 혐의하지 않았으며, 요동성중(遼東城中)에도 관영(管寧)·왕열(王烈)·이민(李敏)·장승(張升)·호심(胡深)·하흠(賀欽)을 서원(書院)에 사당을 짓게 하여 사액(賜額)하고 아울러 서책을 다 내려주었습니다. 따라서 숭장(崇奬)하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학문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높아서 후학을 일깨우고 격려할 만한가에 달려 있을 뿐, 그와 같이 조금도 시대의 고금(古今)에는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 김굉필 등 네 사람의 군자(君子)는 마땅히 종사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조정에서나 사류가 다 이론이 없는데도 이처럼 시일을 끌고 있으니, 과연 이 사람들이 어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사현(四賢)을 숭장하여 종사(從祀)의 서열에 넣으소서. 그리하여 그 사람을 존숭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말을 채용하실 것이며, 그들이 일찍이 진달했던 말을 전부 취하여 매일 앞에다 놓고 성치(聖治)에 도움을 받으시기를 그 사현(四賢)이 임금 앞에서 친히 아뢰는 것처럼 하실 것이며, 또 그 나머지도 추장(推奬)하여 팔방의 사자(士子)로 하여금 모범을 삼게 하신다면, 선현을 포숭하고 후학을 권장하는 일이 두 가지가 다 진선진미하게 되어 문왕(文王)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는 자들106)이 일반 백성들 속에서 많이 나올 것입니다.

둘째, 내외(內外)의 서관(庶官)에 관한 일입니다.

신은 관제(官制)에 대해서는 달리 상고할 길이 없었는데, 겨우《진신편람(縉紳便覽)》 두 책을 얻어 내용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대소의 경관(京官)및 외관(外官)으로 남북 두 직례(直隷)와 지부(知府)이상까지가 모두 이 책에 실려있는데, 기타의 외관은 일일이 실려있지않습니다. 천하의 서관(庶官)이 이와 같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주의(注擬)할 때는 한결같이 어렵게 여겨 신중을 기합니다.

혹시 결관(缺官)이 생기면 육부(六部)와 도찰원(都察院)이 모여 의망할 사람을 의논해서 중론이 다 정해진 다음에 이부(吏部)가 이망(二望)만을 갖추어 올리는데, 황산(皇上)은 의례 수천(首薦)에 낙점하곤 합니다.

대체로 중국의 그 많은 인물로 어찌 삼망(三望)을 갖출 만한 자가 없겠습니까? 참으로 인재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서관(庶官)중에 하나라도 혹시 바르지 않은 사람이 끼어든다면 그 피해가 생민에게 돌아가고 재앙이 국가에 미치기 때문에, 밑에서는 감히 좋지않은 인재로 구차히 천거하지아니하고 위에서는 감히 사사로운 뜻으로 구차히 임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단 뽑혀 제수되면 오래도록 논박을 받지 아니하며 부임하고 나서는 또 그 직책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되는데, 구재삼고(九載三考)107)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출척(黜陟)을 결정합니다.

교관(校官)이나 변수(邊帥)도 가족을 데리고 가서 대부분 오래지낼 계획을 함으로 서관(庶官)이 대부분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여 백성들이 거의 안정된 삶을 누려가고 있으니, 중국이 천하를 보전하고 안정을 누리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인재가 중국에 비해 20분의 1도 채 되지않는데 사화(士禍)를 여러번 겪은 나머지 사류의 추향이 잘못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삼강(三綱)이 밝지않아 의리(義利)를 분별할 수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경영하고 도를 논하는 자를 쉽게 만나기가 어렵고 국사를 책임지고 직책을 생각하는 자도 많이 볼 수없게 되었습니다.

정조(政曹)에서는 주의(注擬)할 때 논의할 대상을 미리 정하지 않고서 정청(政廳)에 좌기(坐起)한 다음에야 붓을 잡고 비로소 논의하므로, 삼망(三望)이 다 합당한 인물인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빈자리가 많아 인원이 모자랄 때는 일망(一望)만 겨우 갖추고 나머지는 다 구차하게 채우는데, 상께서 낙점하시는 것도 인망(人望) 밖에서 나오니, 군정(群情)이 만족해하지 않고 공론이 시끄럽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동쪽에서 빼내어 서쪽에 보충하고 아침에 제수하였다가 저녁에 교체하는 것을 면치 못하니, 경외관원이 자기가 맡은 일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며 앉은 자리가 미처 따뜻해지기도 전에 이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장부가 없어지고 재물만 도적질 당한 채 간리(奸吏)의 술책에 빠지는가 하면, 신임자를 맞이하고 전임자를 보내느라 인부를 차송하고 말을 보내 천리 밖에서 창황분주하여 잔약한 백성의 산업(産業)을 망치니, 이것 또한 중원(中原)에는 없는 폐단입니다.

그리고 새로 제수된 사람이 목민관(牧民官)에 합당하지않으면 빨리 의논하여 체차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반드시 떠나는 날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계청하여 파직하므로 처음에 1개월 먹을 양식만 가지고 멀리서 온 관속(官屬)이 월리(月利) 빚을 내어 새 관원이 출발할 때까지 머물러 기다리니, 집에 들어가서 전답을 팔아 겨우 월리만 갚고도 집은 망하고 맙니다.

1년동안에 폄파(貶罷)되는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의 관원을 위하여 서울로 와서 맞이하는 자가 백명뿐만이 아니니, 1년동안에 이로 인하여 생기는 실업자가 몇백명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아, 이조(吏曹)가 사람을 쓸 때에 잠시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사방의 사민(士民)이 그 해를 입지않는 자가 없으니, 어찌 작은 일이라고 하여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벼슬의 임용을 삼가서 하라는 이윤(伊尹)의 가르침을 받들고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공자의 탄식을 생각하시어 이조를 신칙(申勑)하심으로써, 반드시 적합한 인재를 논정하고 공론에 흡족하게 한 다음에 그 망(望)을 채우게 하되, 만약 사람이 모자라면 꼭 세사람을 갖추게 하지 마소서.

그리고 상께서도 항상 한사람을 잘못 쓰면 국사가 그만큼 망가지고 서관(庶官)을 자주 교체하면 백성이 그 해독을 받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시어, 친근한 자에게 주지말고 오직 유능한 자에게 주며 악덕(惡德)에게 주지말고 오직 어진이에게 주소서. 또 반드시 수선(首選)을 임용하여 그 직을 오래 맡겨서 분발하여 치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초천(超遷)한다면, 사람마다 열심히 직무를 수행할 것이고 백성이 그 안식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 귀천의 의관(衣冠)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삼가 중조(中朝)의 의관제도를 보건대, 복두(幞頭)108)의 연각(軟脚) 109)은 이름을 안시(鴈翅)라고 하는데, 그 제도가 구부러져 있고 그 끝은 좌우에서 복두의 몸에 가로 꽂았으며 굽은 곳이 위로 향해 있어 마치 새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형상이기 때문에 또한 전시(展翅)라고도 합니다.

홍포(紅袍)·청포(靑袍)·벽적(襞積)은 도포(道袍)와 같고 단령(團領)과는 달랐습니다. 기타 상복(常服)은 위에서부터 밑자락까지 부대(浮大)하지않고 땅과의 거리도 칫수가 모두 같았습니다.

신이 삼가 홍무(洪武)110)연간에 정한 규례를 보니, 문관의 옷은 땅까지 1치이고 무관의 옷은 땅까지 5치이며, 소매의 너비는 문무관이 다 1자쯤이었습니다. 소매통[袪]은 문관은 9치, 무관은 겨우 주먹이 들어갈 정도이고, 의살직령(衣撒直領)111)을 입은 것은 지금 문무관의 제도가 같기는 하나 그 정제되고 의젓한 모양은 본받을 만했습니다.

유건(儒巾)의 이름은 민자건(民字巾)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모양이 민(民)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제도는 대[竹]를 얽어 치포(緇布)112)로 싸기도 하고 종이에 풀을 발라 만든 뒤에 옻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쓰고서 안개나 빗속에도 그냥 다니는데 우리나라의 사건(士巾)처럼 이슬만 맞아도 쳐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모양도 단정하고 평평하여 그다지 뾰죽하거나 경사지지 않으니, 매우 잘못되었다고 할 팔도의 사건(士巾)을 이 제도에 따라 고치게 한다면 외관상 보기에도 좋을 것입니다.

국자감(國子監)에 있는 거인(擧人)이나 서정(西庭)에 참례(參禮)하는 무학생(武學生)113)은 모두 유건(儒巾)과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고 기타 학생은 중외(中外)가 모두 난삼(襴衫)을 입는데, 대체로 옥색(玉色)에다 청견(靑絹)으로 선을 둘렀으며 선의 너비는 2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청금(靑衿)114)은 이와는 크게 다른데, 그 제도를 따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청금을 시행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내시들의 건(巾)은 대[竹]로 얽고 베로 싼 것으로서 모양이 모자(帽子)와 같으며, 관직이 있는 자는 테[薝]가 있는데, 정수리 뒤로부터 위로 올라가서 모자보다 1치가 높아 마치 세워놓은 기왓장과 같고, 관직이 없는 자는 모자만 쓰되 다만 베로 앞에서부터 모자를 둘러싸고 그 끝은 정수리 뒤로 늘어뜨렸으며 길이는 거의 반자쯤 됩니다.

옷은 망룡철릭(蟒龍帖裏)이나 의살직령(衣撒直領)을 입었는데, 그 길이는 모두 복숭아뼈 부분까지 내려오고 띠는 가느다란 실끈으로 하였으며, 탑전(榻前)에 시립(侍立)하는자라 할지라도 이 옷만 입기때문에 봉록이 작은 내시들도 구비하기가 쉽습니다.

문무 서관(庶官)은 다 아패(牙牌)를 패용하여 자신의 직명(職名)을 기록하는데 그 끈은 모두 흑색이고, 내시는 아패의 끈을 적색으로 하여 일반관원과 구별하였습니다. 그 의복이 이와 같이 법도가 있었습니다.

요동(遼東)과 광령(廣寧)은 다 변군(邊郡)인데도 일을 맡고있는 연리(掾吏)는 건(巾)이 녹사(錄事)와 같고, 지인(知印) 이하의 건은 서리(書吏)와 같은데 조금 높고 모두 단령(團領)을 착용합니다.

작은 현(縣)인 무령(撫寧)과 풍윤(豊潤)의 아전도 모두 그와 같았습니다. 대체로 수령이 관대(冠帶)를 갖추고 청사에 좌기하면 아전은 감히 그러한 의복을 입지않는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외읍(外邑) 아전이 수령이 관대를 갖추고 있는 곳에 테가 넓은 호립(胡笠)을 쓰거나 혹은 평립(平笠)을 쓰고 있고 모두 예복이 없으므로 매우 사람꼴이 되지 않는데, 심지어 평양(平壤)과 의주(義州)등지의 아전 의복까지도 그와 같습니다.

각사(各司)의 아전과 지방고을아전의 의복을 만약 중국의 법에 따라 고친다면, 비록 천한 도필리(刀筆吏)라도 의젓하게 예복을 갖추어서 괴벽한 풍속이 없어질 것입니다.

사내아이는 머리를 따지않는데, 15세이하는 잘라서 드리우고 15세 이상은 목뒤에 묶은 뒤 모두 모자를 쓰며, 친족에 상사(喪事)가 있으면 흰모자로 상기(喪期)를 마칩니다. 경·(卿)·사(士)·서인(庶人)의 아들은 모두 20세가 된 뒤에 비로소 관을 쓰니, 빠른 성취를 바라지않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미 시집간 여인은 머리를 정수리에 묶고 붕계(鬅髻)115)를 얹는데, 그 제도는 북쪽사람은 철사로 묶고 남쪽사람은 대[竹]로 묶으며 남북이 다 비단으로 쌉니다. 또 비단을 걷고 수박(首珀)116)을 하기도 하는데 역자(鈠子)라고 부릅니다. 겨울에는 혹 모피(毛皮)로도 하는데 난액(暖額)이라고 하며, 이마에서부터 상투를 둘러 머리 뒷꼭지에 맺고 그 위에 비녀를 꽂습니다. 부인이 무슨 일로 밖에 나갈 때는 역자를 무늬비단으로 꾸미거나 혹은 금피(金皮)를 얹습니다. 신부를 친영(親迎)할 때에도 그것만 머리에 씌울 뿐이며 혹은 칠보(七寶)로 단장할 때도 있는데, 시속에서는 이것을 화관(花冠)이라고 합니다. 배자(背子)는 소매가 매우 넓고 장옷[長衣]은 없습니다.

긴 치마[長裙]는 주름을 잡지않고 짧게하며 화려하게 하지않습니다.

이렇듯 의관을 단장하기는 하나 오히려 검약한 풍속이 있습니다.

신이 도중에서 향화(向化)한 달자(闥子)의 부인을 보고 또 중국에 진공(進貢)하고 돌아가는 그들 무리를 보았는데,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사내아이 및 여인의 염발(斂髮)한 모습과 비슷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습속이 오래도록 유전되어 온 결과라 하더라도 지금 성주(聖主)께서 한번 변화하여 도에 이를 수있는117) 좋은 기회에 또 흐지부지 넘어간다면 후일에 중국 사가(史家)가 기록할 때 과연 조선은 관대지국(冠帶之國)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신은 삼가 듣건대 경사(卿士)의 집에서 간혹 그 제도를 본받아 남녀의 머리를 거두어 싸매게 하고는 싶으나, 아직 상의 명이 없기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고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약 사부(士夫)로 하여금 먼저 행하게 하고 백성도 따라서 차츰 고쳐가게 한다면, 중국의 풍속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뇌포(腦包)는 곧 우리나라의 이른바 이엄(耳掩)입니다.

그 제도는 비록 작지만 항상 착용하기에 편리하며, 여인은 늙고 병든 자만이 착용하는데 그 제도가 더욱 작아서 준비하기가 쉽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 사람은 이엄을 사치스럽고 큰 것을 좋아하여 상민(常民)도 오히려 2구(具)의 피륙을 쓰고 여인의 모관(毛冠)은 거의 3구의 피륙을 쓰며, 이른바 대이엄(大耳掩)이란 것은 거의 5구의 피륙을 씁니다. 이 때문에 피륙값이 매우 비싸서 가난한 노병자가 사서 쓰고싶어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중국의 제도에 의하여 고치고 사치스럽고 큰 것을 사용하는 풍습을 일체 금한다면, 피륙 값이 오르지 않아 노병자에게까지 두루 차지가 갈 것입니다. 중원(中原)에 삿갓을 쓰는 제도가 있기는 하나 사람마다 모두 갖추고 있지는 않습니다. 밖에 출행할 때에는 문관(文官)은 충정관(忠正冠)을 쓰고, 무관은 테가 있는 털모를 쓰고, 유자(儒者)는 유건(儒巾), 아전은 이건(吏巾)을 쓰고, 상인(常人)은 모두 모자(帽子)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공통으로 입자(笠子)를 쓰므로 많은 값을 헛되이 소비합니다. 만약 중국의 풍속을 따라 아전이나 사류는 각기 그들에게 맞는 건을 착용하고 서인(庶人)은 모자만 착용하게 한다면, 곤궁한 사람이 많은 값을 들여가며 입자를 사는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대체로 중원의 의관제도는 간략하여 쉽게 구비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천하가 같은 제도권에 있는 때에, 운남(雲南)과 귀주(貴州)같은 경우는 경사(京師)와 1만여리나 떨어져 있어 거친 머리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오랑캐 지역인데도 대소남녀가 하나같이 중국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 기방(箕邦)118)은 경사와의 거리가 4천리가 채 못되어 실로 오복제후(五服諸侯)119)와 다름이 없는데도 남녀의관에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신은 삼가 안시(鴈翅)·유건(儒巾)·붕계(鬅髻)·역자(鈠子)를 갖추어 올립니다.

전하께서 만약 시왕(時王)의 제도를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다면 청컨대 이것을 공조(工曹)에 내려 견본으로 삼도록 하소서.

그리고 뇌포(腦包)·건모(巾帽)·삼포(衫袍)·벽적(擘積)등에 대해서는 사행(使行)에 오래 따라다닌 통사(通事)로 하여금 공인(工人)을 자세히 가르치게 하여, 종이를 재단해서 견양을 만들어 널리 팔도에 나누어 준 뒤 그대로 차츰 고치게 한다면, 의관이 전부 중국제도를 따른다는 것이 실어(實語)가 될 것입니다.

넷째, 음식 연음(宴飮)에 관한 일입니다.

신은 삼가 보건대 중원사람은 절용(節用)하지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관원의 가공(家供)은 반찬이 두세 그릇 뿐이었고 사가(私家)의 음식은 더욱 검소하였습니다. 연음할 때에는 작은 잔에 따르고 순배 수를 정해 놓고서 감히 한계를 넘게 마셔 정신이 혼란하게 함으로써 맡은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니, 이것이 공사(公私)의 재력이 다 넉넉하고 서정(庶政)이 잘못되지 않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풍속은 오로지 풍성한 음식에다 많이 마시는 것을 힘써서 재물이 바닥이 나도 걱정할 줄 모르고 백성이 곤궁해도 구제할 줄 모르며, 위에서 명해도 따를 줄 모른 채 자연의 물산을 쓸데없이 소모하고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해치는 일이 끝이 없습니다.

내사(內司)의 서관(庶官)이 가공(家供)을 행하기는 하나 호사하는 무리가 찬품(饌品)120)을 성대히 갖추므로, 빈약한 선비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간혹 까닭없이 정병(呈病)하고 직무를 부지런히 하지않는 경우도 있으며, 이항(里巷)간에는 원대한 생각이 없어서 소비풍조가 더욱 심합니다. 아, 이것이 무슨 풍속인데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외방 열읍(列邑)에서는 비록 찬품의 그릇수를 한정한 분부가 있어도 오활한 말로 보아 전혀 봉행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조명(朝命)을 따르고 싶어하는 자가 있더라도 떳떳한 임무로 나간 사신(使臣)이 그 찬품의 풍약(豊約)을 보고 그 사람의 현부(賢否)를 정합니다.

그리하여 공억(供億)을 성대히 하면 아무 수령은 어질어서 윗사람을 공경한다고 하고, 자봉(自奉)을 박하게 하면 아무 수령은 본심을 속여 명예를 구한다고 하여 분분하게 비방하면서 논의가 끝이 없으니, 명색이 유식한 자라도 바야흐로 뜻을 굽혀 풍속을 따라서 남의 비난을 면하려고 꾀하는데 무지한 수령이야 나무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임금도 이유없이는 소를 죽이지않는 법인데 영리(營吏)와 추종(趨從)까지도 반드시 소를 도살하여 먹이며, 대부(大夫)라야만 세끼밥을 먹는 법인데 7세된 관아의 아이가 많은 찬품을 갖추어서 네끼를 먹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심지어는 중국사신이 올 때에만 큰 고을에서 이따금 구작(九爵)의 연회를 베푸는 법인데도, 사행(私行)의 무뢰배들까지 모두 잔치를 열어 풍악을 잡히고 밤새도록 취하여 마시니, 그와 같이 소비하는 술이며 고기는 또한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저절로 솟아난 것이 아닙니다.

읍리(邑吏)를 차례로 육례방(肉禮房)으로 삼아 한달에 소 세마리값을 주지만 관원이 먹는 것은 열마리까지 되기도 하고, 관비(官婢)를 차례로 주모(酒母)로 삼아 한달에 쌀 세가마를 주지만 관원이 마시는 것은 거의 스무가마에까지 이릅니다. 그리하여 객사장교(客舍將校)는 등석(燈席)의 주선에 시달리고 원두관노(園頭官奴)는 채과(菜果)의 지공에 시달린 나머지 전답을 팔게 되고 그런 다음에는 일족(一族)에게서 거두어들이며, 더 나아가 촌민(村民)을 침색(侵索)하다가 그래도 지탱하지 못하게 되면 옷을 찢어 거지 주머니를 만들어 차고는 서로 무리지어 도망갑니다.

아, 중원의 서관(庶官)은 닭 한마리 물고기 한마리도 감히 민간에게서 무리하게 거두지 아니하는데, 우리나라는 관원으로 있는 자가 자신의 구복(口腹)을 봉양하는 일로 조종(祖宗)의 적자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 몇 천만 가지나 되는지 모릅니다. 어찌 군신(君臣)이 서로 맹세를 하고 서둘러서 음식을 검소하게 함으로써 진공(進供)을 올바르게 하지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변방의 장사(將士)는 더욱 한자리에 모여 술마시는 일이 많습니다. 인경(隣境)의 수수(守帥)와 병사(兵使)·수사(水使)가 왕복할 때, 영송(迎送)하는 관례라고 명분을 삼아 소를 잡고 술을 빚으며 짐바리에 보화를 싣는가하면, 진(鎭)을 버리고 경계를 넘어가서 주거니 받거니 연일 통음(痛飮)하는데, 양계(兩界)와 양남(兩南)이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잔약한 병졸을 수탈하는 것이 염려스러울 뿐만이 아닙니다.

적이 그 헛점을 틈타 침범할 경우 그 누가 과연 막아 지키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우증(李友曾)이 몹시 취하여 부산(釜山)이 함락되는 것도 알지못했던121) 까닭인데, 후일 어려움이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 중원지방은 주화(酒禍)가 오히려 적은데 우리나라 사람은 술을 즐겨 마시다가 요사(夭死)한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이야 비록 구욕(口欲) 때문에 몸을 망쳤다하더라도 세상을 수역(壽域)으로 올려놓기를 추구하시는 성주(聖主)의 마음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가련한 일입니다.

모든 화의 근원은 면밀히 예방하지않으면 안되기때문에 신은 삼가 작은 술잔 10매(枚)를 갖추어 올립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찹쌀술을 금한 황조(皇祖)를 본받고 음주를 경계한 광묘(光廟)122)의 뜻을 받들어, 두 개는 경중(京中)에 여덟개는 각도에 견본으로 내려서 그것을 모방하여 술잔을 만들게 하소서.

그리하여 대빈(大賓)·대사(大祀)·향음(鄕飮)·향사(鄕射)123)하는 때에 한결같이 중국인의 예법을 따라 잔수를 엄히 정하게 함으로써 많이 취하여 몸을 망치게 하지마시고, 기타 제때가 아니거나 예가 아닌 연회와 사행(私行)에 술세잔을 초과하여 마신자는 한결같이 주고(酒誥)의 법124)대로 처벌하소서. 그러면 거의 재물을 허비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며 국정을 해치고 일을 망치는 화가 없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사부(士夫)의 읍양(揖讓)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예부(禮部)에서 좌기(坐起)하는 의식을 보았습니다.

당상(堂上)이 앉기 전에 낭중(郞中)·원외랑(員外郞)·주사(主事)·사무(司務) · 관정(觀政)·진사(進士)가 동서로 당위에 서로 향하여 서서 잠시 읍하고, 앞줄에 있는 사람은 뒷줄을 돌아보고 읍하며, 역사(歷事)와 감생(監生)은 동서의 섬돌 위에 서로 향하여 서고 당리(堂吏)는 그 뒤에 섭니다.

당상이 후합(後閤)으로부터 나와서 앉으면 낭중 이하가 모두 북으로 당상을 향하여 일어나서 읍합니다.

당상이 의자 위에서 약간 구부려 읍하면 낭중 이하는 동서로 나눠 서서 서로 향하여 한번 읍하고 나가고, 감생과 당리는 차례로 첨하(簷下)에 나아가 한번 읍하고 물러납니다. 낭중은 동쪽으로 동협실(東夾室)의 밑에 서고, 원외 이하는 서쪽을 향하여 마주보고 서며 진사는 모두 북쪽을 향하여 서쪽으로 올라가 서로 나란히 서서 읍합니다.

원외 이하가 또 낭중의 오른쪽에 나아가고 진사는 나란히 서서 서로 읍하는데, 낭중이 협실의 문으로 나가면 원외 이하는 모두 서쪽으로 섰던 제자리로 돌아가며, 진사는 두서너 걸음 물러나서 모두 낭중을 향하여 서로 읍하고 그 국(局)으로 물러납니다.

낭중 이하는 마주 앉아서 일을 의논하고, 일을 아뢸 것이 있는 외관(外官)은 뜰 밑에 섰다가 월대(月臺) 위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낭중 한사람이 손에 게첩(揭帖)을 들고 한번 읍하고서 당상의 책상위에 놓아두고, 당상이 일어나라고 말하면 외관은 일어나서 한번 읍하고 물러갑니다. 당상이 투문(投文)125)을 받아서 사사(四司)126)에 나누어주고 물러가 화방(火房)에서 쉬면 낭관들이 그 일을 상세히 논의하여 아뢰어서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공사(公事)를 주하(奏下)하는데 1∼2일이 지나지 않으며 민첩(民牒)을 복주(覆奏)하는 것은 그날로 결정하여 줍니다.

그 예모(禮貌)를 보면 온화하고 정숙하며 사무를 처리할 때는 가부를 논정하여 적체되는 일이 없게 하니, 이 한 부(部)만 보더라도 타사(他司)의 일을 따라서 알 만합니다.

아, 중조는 서관(庶官)이 예를 좋아하고 일에 부지런한 것이 이와 같은데 우리나라의 육조 등 처는 예모가 허술하고 폐풍이 만연해 있습니다.

희만(戲慢)하여 무리하게 처리하는 일이 지금은 조금 고쳐졌다고 하나 좌랑이 정랑에 대해서는 감히 머리를 들고 함께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공사(公事)를 조사(曹司)인 좌랑에게 일임하는데, 좌랑이 그 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나머지 계하(啓下)된 공사를 혹 순월(旬月)이 지나도 신복(申覆)할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며, 군민(軍民)의 송첩(訟牒)은 서리(書吏)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곧 판결하여 주지 않습니다.

신은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지않는 한 국사는 끝내 잘 다스려질 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또 사대부가 서로 대하는 예를 보았습니다.

좌석은 으레 왼쪽을 사양하여 먼저 오른쪽에 나아가 나란히 서서 서로 읍하고 왼쪽에 선 사람은 또 오른쪽 사람의 오른쪽에 나아가 함께 읍합니다.

문에서 만나면 반드시 문을 양보하고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길을 양보하는데, 당하관이 당상관을 만나더라도 말[馬]을 피하지 않고 말을 길옆에 세운 채, 채찍을 들어서 모자의 위에까지 올리고, 같은 등급을 만나면 채찍을 들어 눈썹까지 올립니다.

주인이 문에서 손님을 전송할 때에 손님은 반드시 세번 읍하고 사양한 뒤에 말을 타며, 말을 탄 사람이 채찍을 들어 눈썹까지 올린 뒤에야 주인은 읍하고 들어갑니다. 그 읍양(揖讓)하는 모습을 보건대 뜻이 간절하고 예절이 있었습니다. 신들이 중국인과 서로 대할 때에도 이런 예로 하였으나 미리 익히지 않은 탓에 전혀 생소하기만 하여 많은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국가가 사대(事大)할 때 예모가 가장 중요하니, 평소에 익혀 놓지 않았다가 사신갈 때에 임박해서야 통사(通事)에게 배우면 서투름으로 인한 수치를 면치못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는 일과(日課)를 치부(置簿)하는 좌기가 있고 문관(文官)은 매월 세번 모이는 규례가 있으니, 그 때에 학관(學官)과 통사중에서 그 예법을 오랫동안 익힌 사람으로 하여금 그 예를 가르쳐 익히게 하고 조정과 여항(閭巷)에서 이것을 전습하게 한다면, 후일에 사신을 탁타(槖馳)로 비유하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가 있으며, 진신(縉紳)이 서로 접하는 예도 구차스럽게 되지않을 것입니다.

여섯째, 사생(師生)의 접례(接禮)에 관한 일입니다.

신은 듣건대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가 처음 부임한 날과 정조(正朝) 및 동지(冬至)에는 제생(諸生)이 정중(庭中)에서 사배(四拜)하고, 삭망(朔望)127)에는 좨주가 그 요속(僚屬)과 제생을 거느리고 성묘(聖廟)에 배알한 뒤에 이륜당(彝倫堂)에 앉으면 제생이 월대(月臺)위에 한번 꿇어앉아 재배(再拜)하고 보통 때에는 한 번만 읍하는데, 좨주는 제생이 절하고 읍을 할 때에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는다고 하니, 우리나라 성균관의 관원이 내려서는 것과는 같지않습니다.

공(公)·후(侯)·백(伯)과 신진사(新進士)로서 알성(謁聖)128)하는 자도 모두 처마밖에서 사배하는데, 좨주와 사업(司業)은 역시 그대로 의자에 앉아있으니, 이는 사도(師道)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외읍(外邑)의 학생이 정지례(正至禮)129)를 수령과 교수에게 행할 때에도 사배를 행하며, 수령은 두 번 절한 것은 읍으로 답례하고 나머지 두번은 서서 받습니다. 수령과 교수가 으레 삭망 때 제생을 거느리고 알성한 뒤 강당(講堂)에 앉으면 늠선생원(廩膳生員)130)과 제생이 차례로 월대에 나아가 한번 꿇어앉아 두번 읍한 뒤에 늠선등이 의자앞에 나아가 섭니다.

그러면 수령은 늠선이 동몽(童蒙)을 가르친 책을 가지고 반달의 일과(日課)를 읽게 하는데, 그 뒤에 늠선이 읍하고 나가 그의 집에 돌아가면 동몽이 늠선에게 꿇어앉아 읍하기를 늠선이 수령에게 읍하는 것과 같이 합니다.

보통때에는 제생이 나란히 서서 읍하면 교수와 늠선은 그대로 앉아있으며, 휴일을 빼놓고는 책을 강론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산해관(山海關) 이서(以西)는 머리를 따고서 책을 끼고 다니는 자가 많았으며, 항간에는 책읽는 소리가 낭랑하였는데, 지극히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도 힘써 돈을 마련하여 반드시 아들을 학관(學館)에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 가르치는 것이 비록 삼대(三代)의 정도(正道)로 교양하는 법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예모(禮貌)로 검속하고 명교(名敎)로 격려하여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느껴 더욱 분발하게 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중국이 많은 선비를 배출하여 사방의 쓰임에 부족함이 없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사유(師儒)가 처음 강당에 나와서 앉을 때, 제생이 재배례만 행하면 정지(正至)에는 배하(拜賀)하는 예가 없고 삭망에는 알성하는 관원도 없으며, 성균관에 있는 유생도 초하루에 문묘에 절할 뿐 사생(師生)이 함께 절하는 의식이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못하였습니다. 종친으로서 처음 관례(冠禮)를 치른 자와 생원·진사·문무과에 새로 급제한 자들이 알성하는 예가 있으나, 대사성에게 절하는 규례는 없습니다.

동몽(童蒙)은 다행히 날로 배우는 무리가 있으나, 대체로 질서가 없고 지나치게 공손하기만 할 뿐 행렬을 차려 읍양하는 예가 없습니다.

외읍의 교관(校官)으로서 급료를 받는 사람도 모두 공름(公廩)만 허비할 뿐 성묘(聖廟)가 있는 줄을 모르는데, 급료없는 학장(學長)에게 어떻게 예로써 가르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명색이 유(儒)를 업으로 하고 과거에 합격한 자도 오히려 예양(禮讓)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교적(敎籍)131)에 몸을 의탁했어도 반줄의 글도 읽지못하는 자가 어찌 능히 윗사람에게 공손하는 풍속을 알겠습니까?

이것이 어릴 적부터 늙을 때까지 무식하여 윤기를 손상하게까지 되는 이유입니다. 이는 사유(師儒)가 힘써 가르치지 못한 잘못이긴 하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상의 교육 방침에도 미치지 못한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제 사생(師生)이 서로 대하는 예와 삭망에 알성하는 규례에 대해 반드시 내외(內外)로 하여금 한결같이 중조의 제도대로 따르게 하여야 하니, 그런 뒤에야 고거(考據)할 데가 있게 되어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학(外學)의 학장(學長)에게는 쓸데없는 곳에 소비하는 돈으로 그 월료(月料)를 주고 교독(敎督)을 책임지워 비록 《천자문(天字文)》을 처음 배우는 자라도 읍양의 예를 강명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책읽기를 생각하고 선비마다 예를 지켜서 쓸모있는 인재를 배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째, 향려(鄕閭)의 습속에 관한 일입니다.

신은 삼가 보건대 산해관(山海關)에서는 마을마다 향약소(鄕約所)가 있었습니다. 무령(撫寧)등처의 고을 사람에게 물으니 ‘매월 삭망에 약정(約正)·부정(副正)·직월(直月)이 모여 지현(知縣)을 알현하는데, 일배삼고두(一拜三叩頭)132)를 행하고 명을 듣는다’하였고, 영평(永平)사람에게 물으니 ‘약정·부정·직월등이 삭망에 모여 지부(知府)를 알현하는데 월대(月臺)위에서 사배(四拜)를 하면 지부가 의자에서 내려와 서서받고, 약정등이 지부의 의자 앞에 나아가 서서 함께 그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을 들은 뒤에 한번 읍하고 물러가며, 각기 그 향약소에서 향약에 든 사람들을 모아 서로 예양한 뒤에 들은 가르침을 강론하는데, 그 가르치는 것은 부모에게 효순(孝順)하고 장상(長上)에게 존경하고 이웃과 화목하고 자손을 가르치고 농상(農桑)을 부지런히 하고 불의를 저지르지않는다는 등의 일로서 고황제(高皇帝)가 정한 가르침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조목이 자상하기는 비록 여씨향약(呂氏鄕約)에 미치지 못하나 그 강령이 간결하여 쉽게 백성을 깨우칠 수 있기 때문에, 백성이 이를 모두 믿어 촌항(村巷) 곳곳의 담벼락에 제시해 두고 서로들 외고 익혔습니다.

그리하여 부자형제 간에 의견차이로 많이 틈이 벌어지더라도 차마 문호(門戶)를 나누지못하고 고부(姑婦)와 동서[娣姒]가 서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정조(正朝)·동지와 생일을 만나면 단칸 오막살이집에 사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사배례로 가장(家長)에게 하례를 올리며, 천한 남녀라 할지라도 길에서 서로 만나면 또한 반드시 읍하고, 혼인하는 예는 반드시 친영(親迎)으로써 하고, 친족 중에 상을 당하면 남녀노소가 다 백의(白衣)·백건(白巾)으로 그 달수를 마치며, 네살짜리 아이도 능히 읍을 하고 머리를 조아릴 줄 알고, 천한 노복들까지도 누구 하나 바르게 염발(斂髮)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서 있을 때는 반드시 공수(拱手)하고 발을 가지런히 하였습니다.

요동·계주(薊州)땅은 천백년동안이나 오랑캐 풍속에 젖어 있었는데도, 대명(大明)의 풍화(風化)로 새롭게 변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본디 예의지국으로서 열성(列聖)의 감화시킨 가르침을 받았고, 게다가 주상의 유신(維新)의 정사를 힘입어 해마다 내놓는 명령이 오직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힘써 왔으니, 당연히 집집마다 착한 사람이 있고 고을마다 후한 풍속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근년 이후로 민심은 날로 천박해지고 강상(綱常)의 도가 세상에 어지러워져서 아비로서 그 자식을 가르칠 줄 모르고, 자식으로서 그 아비에게 효도할 줄 모르고, 형으로서 그의 아우에게 크게 우애하지 않고, 아우로서 그의 형에게 크게 공손하지 않으며, 지아비는 그 지어미를 제어하지 못하고, 지어미는 그 지아비에게 순응하지 않으며, 이웃끼리는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날마다 싸우는 것으로 일삼고, 친구 간에는 아무리 달관(達官)이라도 날로 저해하는 것으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집에 있으면서 능히 그 행실을 닦지못하기 때문에 임금을 섬겨도 그 직분을 다하지못하고 임금의 명을 거슬려서 백성에게 학정을 하는 자가 내외에 깔려 있으니, 신의 소견으로 볼 때 신하는 신하 노릇을 못하고 자식은 자식노릇을 못한다고 말할 만합니다.

아, 신하로서 신하노릇을 못하고 자식노릇을 못하면 임금과 아비된 자가 어찌 나라와 가정을 두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른바‘아무리 곡식이 있어도 내가 먹을 수 없다’는 경우이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그 까닭을 따져보면 비록 세속의 추향이 잘못된 데서 나온 것이긴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상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오히려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으신 듯합니다.

신은 듣건대 기묘년133)에 영변(寧邊)백성가운데서 가난하여 그 아비를 봉양하지 못하고 산골짜기에 버린 자가 있었는데, 향약의 글이 조정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그날로 다시 모셔다가 있는 힘을 다해 봉양하였다고 합니다.

아, 이와 같이하여 마지않으면 어찌 좋은 풍속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제 비록 그 글을 인출하여 내려주긴 하였으나, 예방(禮房)의 책상자속에 방치해두고 수령이 마음을 두지아니하여 민간에 그런 소식을 듣고 보기를 원하는 자가 있더라도 글속의 뜻이 어떠한 것인지 전혀 듣지못하고 있으니, 어찌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선(善)으로 가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고황제께서는 교조(敎條)를 반포하여 이내 수령들로 하여금 부로(父老)를 모아놓고 알리게 하고도, 또 이정(里正)으로 하여금 목탁(木鐸)을 가지고 거리를 순회하여 계몽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양지(良知)·양능(良能)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선한말과 선한행동이 견문(見聞)에 익은 다음에야 분발할 것을 생각할 수있는 것인데, 국가에서 백성을 깨우치는 것을 미리 널리 알리지도 않고서 자기들 멋대로 하도록 방치하고 있으니, 이것이 곧 수령이 태만하고 선한사람이 일어나지않는 이유입니다.

의자(議者)가 혹 이르기를,‘양민(養民)의 정사를 먼저 하지않고 백성을 인도하는 계책만 거행한다면 시끄러움만 더하고 치화(治化)에는 도움이 없다’고 하는데, 이 말이 참으로 옳긴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양민의 정사를 이미 급급하게 논의하여 행하지도 않지만, 백성을 인도하는 계책 또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들이 아무리 얼어 죽을망정 아비의 옷을 빼앗으면 안되고 아우가 아무리 굶주려 죽을망정 형의 밥을 훔치면 안된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제 이 법을 범한 자가 있다면 결코 흉년이라는 이유로 용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빼앗지 않고 훔치지 않으며 효성과 공손한 마음을 일으키는 조목에 있어서는 유독 궁민(窮民)이라는 것에다 핑계되어 빼앗거나 훔치기 전에 미리 막을 것을 생각하지는 않고 죄의 함정에 빠진 뒤에 가서야 벌을 주니, 이는 실로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으로서 어진사람이 차마 할 일이 아닙니다. 옛날 송제(宋帝)가 애산(崖山)에 배를 대었을 때134) 망하는 것이 경각에 있었는데도 육수부(陸秀夫)는 오히려《대학장구(大學章句)》를 써서 날마다 제생(諸生)과 권강(勸講)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떠돌아다닐 때라도 사람이 윗사람을 친히 하고, 관장(官長)을 위해 죽는 도리를 모른다면 잠깐도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성명(聖明)이 임어하시고 나라가 한가한 때라서 조정에는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신하가 있고 초야에는 선을 지향하는 선비가 없지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반포된 글을 받들어 행하게 하려면, 그 권강(勸講)의 방법을 대강 중조의 제도를 따라서 수령과 교수가 으레 삭망에나 알성하는 때에 약정(約正)과 교생(敎生)을 함께 대하고서 그 뜻을 분명히 일러주고, 그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회합하여 가르치게 해야 합니다.

음식을 마련하는 일은 풍년이 드는 때를 기다려 시행하게 한다면 폐단이 많지않아 백성이 쉽게 따를 것이며, 장차 무너지려는 윤기도 다시 펼 수있고 이미 야박해진 풍속도 도로 순박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덟째, 군사(軍師)의 기율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계주(薊州)의 길에서 보졸(步卒) 수천명이 군량을 싣고가는 것을 보았는데, 감히 무리가 많은 것을 믿고 남의 재물을 노략질하지 않았으며, 또 나귀와 노새로 병거(兵車) 수십양(輛)을 끌고 가다가 밭가에 쉬면서도 감히 볏단하나를 가져다가 그 노새에게 먹이지 않았습니다.

신은 그 군대의 행진이 규율이 있는 것을 기특히 여겨 물어보니,‘달로(㺚虜)가 변방을 침범하여 계진 병관(薊鎭總兵官) 척계광(戚繼光)이 중군장(中軍將) 예선(倪善)으로 하여금 기현(畿縣)의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가게한 것이다’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주장(主將)의 위신(威信)이 평소에 드러났기 때문에 군사들이 그 영(令)을 두려워하여 감히 백성을 괴롭히지못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 일로 삼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듣건대 ‘서해평(西海坪)에서 오랑캐가 심은 화곡(禾穀)을 베어버리는 거사 때에, 내지(內地)의 군사들이 하나같이 통할(統轄)이 없어서 지나가고 머무는 곳마다 함부로 민전(民田)의 화곡을 가져다가 말을 먹였기 때문에, 지난 가을에는 수확도 하지못하고 금년 여름에도 가뭄이 들어 겨우 늦벼를 심어 추수를 기다리던 것이 전부 군사들의 침해를 입어 적지(赤地)가 되어버렸으므로, 원통히 울부짖는 형상을 차마 볼 수 없다’하였습니다.

이는 저들의 화곡을 베어버리기 이전에 먼저 우리 백성의 화곡을 해친 것입니다. 가령 저들의 화곡을 모조리 베어버렸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손상을 끼친 것이 그것의 백배 정도만이 아닌데, 더구나 그들의 것은 지푸라기 하나도 베지못하였습니다.

만일 모읍(某邑)의 수령으로 하여금 모주(某州)·모현(某縣)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할 경우, 계행(啓行)하는 날에 즉시 군령을 엄하게 하여 감히 털끌만큼도 사람들의 물건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한다면, 적과 대진하였을 때도 쓸만한 군사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앞서는 군령이 없고 나중에는 절제(節制)가 없어 마치 이리에게 쫓기는 양(羊)처럼 조금도 통기(統紀)가 없으므로, 교전하기도 전에 낭패할 징조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관서(關西)의 병마를 움직이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허약한 일개 부락의 오랑캐에게 위력을 펴보지 못하고, 혹시 강적을 만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토붕와해가 됩니다.

대체로 병사의 강약은 주장(主將)의 재열(才劣)에 있는 것이지 군사의 다과(多寡)에 있지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전에 김수문(金秀文)은 또한 여러번 깊이 들어갔는데, 내지(內地)의 군사를 멀리 움직인 적은 없고 강변의 토병(土兵)만 썼지만 패배하지 않았는데, 근년에는 더욱 원방의 군사를 동원하면서도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비웃음만 사는 형편입니다. 만일 싸움에서 진 뒤에 그 죄를 다스리기만 하고 미리 가르치는 일이 없다면, 죄를 범한 자만 날로 늘어나고 변방에는 편안한 날이 없을까 신은 염려됩니다.

신이 중조의 장수를 기르는 제도를 듣건대, 일단 무학생(武學生)을 두어 글을 가르치고 또 과거를 보일 때 비변삼책(備邊三策)으로 시험한 뒤에 선발하여 씁니다. 그러므로 변방을 방어하고 성을 지키는 직책에 있는 사람까지도 글을 알고 일에 익숙하여 그 직분을 다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 중에 총병 척계광(戚繼光)같은 사람은 비록 습직(襲職)이긴 하지만, 그 역시 일찍이 양개(梁价)에게 수학하여 식견을 허다히 길렀습니다.

신이 도로에서 들으니, 그는 마음가짐이 올바르며 나라만 걱정하고 사사로운 일은 모른다고 합니다. 지난날 남방에서 왜구를 방비할 때 처음으로 병정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데 힘써 군대를 감하게 만들었는데, 자기 아들이 군령을 범하자 잡아서 참수하면서‘네가 명을 따르지않으면 어느 누가 나를 두려워할 것이냐?’고 하였답니다. 이로부터 삼군(三軍)이 크게 두려워하여 마침내 태만한 버릇이 없어지고,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힘껏 싸워서 한창 기승을 부리던 오랑캐가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강남(江南) 연해지방이 아직까지 큰소란이 없는 것은 대개 척공(戚公)이 군법을 엄하게 하고 사기를 진작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뚝하게 옛 명장의 기풍이 있으므로, 목종황제(穆宗皇帝)가 계문(薊門)에 옮겨 배치하여 중요한 방어임무를 담당하게한 것입니다.

얼마 전 대적(大敵)을 맞아 관방(關防)을 신칙하여 비어방략(備禦方略)을 밝혔으며, 또 내지(內地)에 약속(約束)하는 방문을 크게 써서 두루 성문에 게시하였습니다. 평소에 사졸을 무양(撫養)하는 것이 지극하면서도 법을 범하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참장(參將)이하에게 친히 곤장 40대이상을 때리는가 하면, 야불수(夜不收)가 혹 허위보고를 전하여 군사들을 현혹시키면 구집(拘執)하여 죽임으로써, 전군으로 하여금 주장(主將)이 있는 것만 알고 달자(㺚子)가 있는 것은 모르게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강적이 눈앞에 닥쳐도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았는데, 관내(關內)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척계광이 총병이 되고 양조(楊照)가 총독이 되니 변방 사람들이 그 힘을 입어 근심이 적었다’하였습니다.

신이 이로 인하여 그가 지은 글 삼첩(三帖)을 보니, 전사한 사졸에게 모두 글을 지어 제향하였고, 행군할 때는 정성껏 신(神)에게 고하지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장주문기(漳州文記)를 지은 것은 예의(禮義)로써 병사를 기르자는 생각에서였고, 양개(梁玠)가 오랑캐를 만나 굴하지 않자 그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그 대절(大節)을 찬미하였으며, 삼충사(三忠祠)에 대하여는 경앙(景仰)하여 마지않았고, 필부(匹婦)가 절의를 지키자 비를 세워 사실을 남겼으며, 기타 평범하게 음영(吟詠)한 것도 어느 하나 나라를 위하고 임금에게 보답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충정이 간절하고 품식(品式)이 구비된 것은 비록 고대의 양장(良將)이라도 그보다 낫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국가의 간성(干城)을 맡은 자가 처음에는 힘써서 청렴하지만 배우지 못하여 계책을 세울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지위가 높아지고 녹(祿)이 후해지면 스스로 바라고 원했던 것이 이미 다 되었다고 여긴 나머지, 사력을 다해서 국사에 목숨을 바칠 것은 생각지않고 오직 사사로운 이익이 있는 것만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하여 성취합니다.

이러므로 병졸은 한마(悍馬)135)와 같아 군위(軍威)가 서지않고, 변방은 결제(決堤)136)와 같아 국세가 부진한 것입니다. 장래 유망한 자들도 오직 현재의 노장(老將)들로만 목표를 삼을 뿐 긍지를 갖고 분발하여 고대의 맹장(猛將)을 따라가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후일에 혹시 근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필시 수습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척공의 글은 본보기로 삼을 만하기 때문에, 신이 삼가 그 삼첩(三帖)을 갖추어 올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양조(楊照)와 척계광의 일을 가지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전(傳)을 짓게 하시고, 아울러 그 글을 인출하여 널리 중외의 장사(將士)에게 나눠줌으로써 운명에 맡기고 스스로 단념하는 무리로 하여금 감모(感慕)하여 일어나게 하소서. 그러면 그들은 지금 세상에도 과연 이러한 명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비록 회계(回溪)에서 날개를 드리운 사람이라도 끝내는 능히 면지(澠池)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게 될 것입니다.137)

이상 몇 가지는 비록 미세한 일인 것 같지만 사습(士習)과 민풍(民風)의 약해진 것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바로 잡는데에 관계되는 것이 매우 절실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신이 스스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보고들은 일을 다 아룁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천신(賤臣)의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국사가 잘못되는 것만을 생각하시어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여 빨리 조치할 것을 추진하신다면, 동방의 사민(士民)이 다행하기 그지없겠습니다”하였다.

올리려던 그 16조는 하늘에 닿는 정성[格天之誠], 근본을 생각하는 효도[追本之孝], 능침의 제도[陵寢之制], 제사의 예절[祭祀之禮], 경연의 규례[經筵之規], 조회의 의식[視朝之儀], 간언을 듣는 법[聽言之道], 사람을 뽑는 법[取人之方], 음식의 절제[飮食之節], 국가의 곡식을 알맞게 쓸 것[餼廩之稱], 생산을 늘릴 것[生息之繁], 사졸의 선발[士卒之選], 조련을 부지런히 하는 것[操鍊之勤], 성지를 견고하게 하는 것[城池之固], 출척을 밝게 하는 것[黜陟之明], 명령을 엄하게 하는 것[命令之嚴], 끝으로 군상(君上)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모범을 보이는 도를 총론(總論)하였다.

또 말하기를,

“《주자어류(朱子語類)》는 권질(卷帙)이 많지만 분류가 매우 정밀하여 임금은 임금대로 쓸모가 있고 신하는 신하대로 쓸모가 있으니, 청컨대 각사(各司)와 각도의 대아문(大衙門)에 각각 한 본을 수장하게 하여 일을 처리하는 여가에 필요한 유목(類目)을 골라서 보게 한다면, 주자가 미처 시행하지 못했던 것을 거의 우리 동방에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조헌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뜻을 지녀 글을 읽거나 이치를 궁구할 때 현실에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한차례 중국에 들어가 몇개월 간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여러가지를 알아보고 물어서 거의 빠뜨린 것이 없었으니, 그 정근(精勤)하고 충직한 말은 과거에도 없었던 일이다.【국조(國朝)에서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使行)에 으레 질정관(質正官)을 보내어 중조(中朝)에 화훈(華訓)을 질문하였는데, 그 사람은 반드시 박문(博文)·상아(詳雅)한 선비로 충원하였다. 나중에는 사신이 화훈을 익히고 언어와 이문(吏文)까지 익히지 않은 것이 없어서 질정관이 비록 가더라도 물을 만한 것이 없고 인원수만 채울 뿐이었으므로, 근래에는 다시 보내지 않았다.】

註87]고의(古義):옛법.註88]가정(嘉靖):명세종(明世宗)의 연호註89]금니(金泥):금을 녹인 물.註90]사성(四聖):안자·증자·자사·맹자 註91]종사(從祀): 후유(後儒)를 공자 및 그의 제자 72현을 모신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것. 당태종(唐太宗)21년에 좌구명(左丘明)등 21인을 공자사당에 배향한 것이 종사의 시초이며, 후대에 내려오면서 계속 명유(名儒)를 추가 종사하였다. 《통전(通典)》권53 예13(禮十三) 공자사(孔子祠).註92]독(櫝):신주를 덮어씌우는 궤.註93]융경(隆慶):명목종(明穆宗)의 연호.註94]부자(夫子)의 이른바‘군군(君君)·신신(臣臣)·부부(父父)·자자(子子)’의 도:군군·신신·부부·자자는,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 아비는 아비의 도리를 다하고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서, 공자가 정사하는 법을 묻는 제경공(齊景公)의 물음에 답한 말이다.《논어(論語)》안연(顔淵).註95]가신(家臣)을 둔 거짓을 꾸짖고:공자의 병세가 위독하자 자로(子路)가 문인(門人)을 시켜 공자의 가신(家臣)이 되어 치상(治喪) 준비를 하게 하였는데, 병세가 호전된 뒤 공자가 그 사실을 알고 말하기를,“너무 오래되었도다. 중유(仲由)의 거짓 행위여. 본디 가신이 없었는데 함부로 가신을 두었으니 내가 누구를 속일 것인가? 하늘을 속일 것인가?”하였다.《논어(論語)》자한(子罕).註96]대부(大夫)가 앉는 자리라고 하여 바꾸도록 하신:증자(曾子)가 임종시에 그가 깔고있는 대자리[簀]가 대부가 쓰는 물건이어서 너무 화려하다는 동자(童子)의 말을 듣고는 자기가 미처 몰랐음을 깨닫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게 한 뒤에 임종하였다고 함.《예기(禮記)》단궁(檀弓).註97]가정(嘉靖)10년:1531중종26년.註98]승당(升堂):출중한 제자.註99]정관(貞觀):당태종(唐太宗)의 연호.註100]원풍(元豊):송신종(宋神宗)의 연호 註101]정통(正統):명영종(明英宗)의 연호 註102]홍치(弘治):송효종(宋孝宗)의 연호.註103]대·소대(大小戴)의 예학:대대(大戴)는《대대례기(大戴禮記)》의 편저자인 한선제(漢宣帝)때의 대덕(戴德)이고, 소대는《소대례기(小戴禮記)》의 편저자인 대성(戴聖)인데 대덕의 조카이므로, 세상에서 대·소로 구분하였음.註104]정씨(程氏):정이(程頤)를 말함.註105]나(羅)·이(李):나종언(羅從彦)과 이동(李侗).註106]문왕(文王)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는 자들:임금의 훌륭한 정치를 보고 숨어있던 자들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 문왕이 어진이를 예우하여 해가 중천에 뜨도록 밥도 먹지않고 선비들을 접대하자 선비들이 그에게 많이 돌아갔는데, 특히 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육자(鬻子)·신갑대부(辛甲大夫 )등이며, 백이(伯夷)·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에 있을 때,“들으니 서백(西伯)은 노인을 잘 봉양한다하니, 어찌 그에게 돌아가지않을 것인가?”하기도 하였다.《사기(史記)》권4주본기(周本紀).註107]구재삼고(九載三考 :9년에 세차례 치적을 고사하는 것으로 인사(人事)의 출척(黜陟)을 신중히 하는 것.《서경(書經)》순전(舜典)에“3년에 한번 치적을 고사하고 세번 고사가 끝난 뒤에 능·불능(能不能)에 대한 출척을 분명히 한다”하였음.註108]복두(幞頭):관모(冠帽)의 일종. 사모(紗帽)의 원형으로서 그 모양이 비슷하나 모부(帽部)가 2단으로 턱이 져있는데 앞턱이 낮다. 모두(帽頭)는 평평하거나 둥글고 좌우에는 각(角)을 부착하였다. 일명 절상건(折上巾)이라고도 함. 각(角)은 연각(軟脚)이다.註109]연각(軟脚):복두의 날개 註110]홍무(洪武):명태조(明太祖)의 연호 註111]의살직령(衣撒直領):앞은 철릭과 같고 뒤는 직령(直領)인데, 좌우 양쪽에 각각 주름이 있음.註112]치포(緇布): 검은 베.註113]무학생(武學生):무학에 들어가 각종 병법을 배우는 사람. 무학은 송신종(宋神宗)때 무성왕묘(武成王廟)에 처음으로 설치한 기관으로 태학(太學) 종학(宗學)과 함께 삼학(三學)으로 불리었다.《송사(宋史)》직관지(職官志).註114]청금(靑衿):성균관 사학(四學)등의 유생의 복장.註115]붕계(鬅髻):쪽.註116]수박(首帕):머리동이.註117]한번 변화하여 도에 이를 수 있는:많은 힘을 들이지않고 보다 더 좋은 상황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 《논어(論語)》옹야(雍也)에“제(齊)나라가 한번 변화하면 예교(禮敎)를 존중하는 나라에 이를 수 있고, 노나라가 한번 변화하면 인정(仁政)을 시행하는 선왕(先王)의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한데서 온 것임.註118]기방(箕邦): 기자조선 註119]오복제후(五服諸侯):왕기(王畿)를 중심으로 5백리마다 한 구역씩 설정했던 곳의 제후. 오복은 후(侯)·전(甸)·수(綏)·요(要)·황(荒), 또는 후(侯)·전(甸)·남(男)·방(邦)·채(采)라고도 한다.《서경(書經)》익직(益稷)·강고(康誥).註120]찬품(饌品):음식의 가짓수.註121]이우증(李友曾)이 몹시 취하여 부산(釜山)이 함락되는 것도 알지못했던:1510년(중종5년) 4월 4일에 우리나라 삼포(三浦)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이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정성(宗貞盛)의 군사원조를 받아 폭동을 일으켜 제포·부산포·염포를 함락한 삼포왜란 당시, 부산진 첨사 이우증이 그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않고 방심하여 결국 진을 뺏기고 자신도 적의 칼에 난자당한 사건이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권11 중종5년(경오)4월 註122]광묘(光廟):세조(世祖).註123]대빈(大賓)·대사(大祀)·향음(鄕飮)·향사(鄕射):대빈은 중국의 사신등 국빈(國賓)의 접대이고, 대사는 종묘(宗廟)·사직단(社稷壇)등에 제사하는 국가적인 제사이고, 향음은 온 고을의 유생(儒生)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향음주례(鄕飮酒禮)이고, 향사는 시골 한량(閑良)이 모여 편을 갈라 활쏘기를 겨루는 일임.註124]주고(酒誥)의 법:주고는《서경(書經)》의 편명. 주무왕(周武王)은 은(殷)의 주(紂)를 정벌한 뒤에 강숙(康叔)을 은의 고도(古都)에 봉하였는데, 그 지방 백성이 주(紂)의 영향을 받아 술을 즐겨 마시므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의 명으로 경계한 글이다. 그 가운데“백성들이 명을 듣지않고 떼지어 모여 술을 마시면 빠짐없이 체포하여 서울로 보내라. 그러면 내가 그들을 다 사형에 처하겠다”한 내용이 있다.註125]투문(投文):우리나라의 소지(所志)와 같음.註126]사사(四司):명나라 예부산하에 있는 의례청리사(儀禮淸吏司)·사제청리사(祠祭淸吏司)·주객청리사(主客淸吏司)·정선청리사(精膳淸吏司)등의 네부서를 말함. 각 부서의 장(長)은 각기 낭중(郞中)과 원외랑(員外郞)임.《명사(明史)》직관지(職官志).註127]삭망(朔望):초하루와 보름 註128]알성(謁聖):공자의 신위(神位)에 참배하는 것.註129]정지례(正至禮):정조와 동지의 예.註130]늠선생원(廩膳生員):제생중에서 경의(經義)를 가장 우수하게 해독하는 자.註131]교적(敎籍):교생의 명부.註132]일배삼고두(一拜三叩頭):한번 절하고 세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 註133]기묘년:1519 중종14년 註134]송제(宋帝)가 애산(崖山)에 배를 대었을 때:송제는 남송(南宋)의 마지막 왕인 위왕병(衛王昺).1278년 4월에 원(元)의 대군(大軍)에 계속 밀려 단종(端宗)이 죽자, 신하들이 도종(度宗)의 세째 아들 위왕병을 군주로 옹립하였는데, 계속 궁지에 몰려 6월에 애산으로 옮긴 일을 말한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279년 2월에 결국 망하였다.《송사(宋史)》권47 본기(本紀).註135]한마(悍馬):고집이 센 말.註136]결제(決堤):무너진 둑 註137]회계(回溪)에서 날개를 드리운 사람이라도 끝내는 능히 면지(澠池)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게 될 것입니다:군사들이 처음에는 사기가 꺾였더라도 척계광같은 명장에게 감명을 받고 크게 용기를 얻을 것이라는 뜻임. 후한(後漢)의 풍이(馮異)가 적미(赤眉)와 싸울 때 회계판(回溪阪)에서 대패한 뒤에 다시 진용을 정비하여 면지(澠地)에서 크게 승리하여 항복을 받아내자 광무제(光武帝)가 풍이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내용의 일부를 인용한 것인데, 군사를 새에 비유하였음. 《후한서(後漢書)》권7 풍이전(馮異傳).

○質正官趙憲, 還自京師。 諦視中朝文物之盛, 意欲施措於東方, 及其還也, 草疏兩章, 切於時務者八條; 關於根本者十六條。 皆先引中朝制度, 次及我朝時行之制, 備論得失之故, 而折衷於古義, 以明當今之可行。 先上八條疏, 上答曰: “千百里風俗不同, 若不揆風氣、習俗之殊, 而强欲效行之, 則徒爲驚駭之歸, 而事有所不諧矣。” 由是, 不復擧十六條。 其八條疏:

一曰聖廟配享。 臣竊見, 嘉靖中改題文宣王之號爲至聖先師孔子之位, 顔子以下俱改去爵名, 故廟額不曰大成殿, 而曰先聖廟。 位版長短, 不敢揣摸矣, 但孔子則朱漆而書以泥金, 長疑一尺餘, 廣二寸强; 四聖以下則稍短, 疑不滿尺, 朱漆而書以墨字。 從祀以下則又短, 下不用趺房, 刻木爲臺以安之, 俱無櫝。 臣伏覩今年五月所下, 位版寸尺考啓之敎而想, 臣所見則隆慶年間出來《太學志》所記尺數, 定是周尺, 而不爲布帛尺也明矣。 且太學東西廡中, 位各有爐, 而我國則兼設一爐, 此事恐當議改者也。 臣謹按, 文宣王之所以改稱孔子者, 蓋以平帝時, 王莽騁其奸謀, 謬稱爲褒成宣尼公, 玄宗始諡爲文宣王, 顔子以下秩稱公、侯、伯。 其封公封王者, 於夫子所謂君君、臣臣、父父、子子。” 之道則一切悖亂, 而佯尊聖人, 以欺天下。 曾謂責家臣之詐, 而易大夫之簀者, 其肯安享斯名於一刻乎, 況自稱皇帝, 而以其所以封其臣子者, 强加以王, 非所以尊聖人。 故嘉靖十年, 因太學士張孚敬之建言, 一改千載之誤。 而我朝久猶襲陋, 恐當議改者也。 臣又按, 東西廡之列, 林放蘧瑗公伯寮秦冉顔何荀况戴聖劉向何休賈逵馬融鄭衆盧植鄭玄服虔范寗王肅王弼杜預吳澄等, 不在其中, 后蒼王通(歐陽脩)〔歐陽修〕胡瑗楊時陸九淵薛瑄等, 皆與于列。 蓋從祀之典, 所以報聖門之有功, 而示來學之趨向也。 秦冉顔何則未有所考矣。 林放蘧瑗不是升堂之列, 而鄭衆盧植鄭玄服虔范寗, 亦非純儒, 故出于從祀, 而之好禮; 之寡過, 則可爲人師, 鄭衆諸人翼經之功, 不可不紀, 故各祀于其鄕。 公伯寮身遊聖門, 而嘗欲反害夫子之道, 荀况謂性爲惡, 而謂爲亂天下, 戴聖身陷贓吏, 劉向喜談神仙, 賈逵傅會讖緯, 馬融貪鄙附勢, 爲梁冀草詔, 以殺李固, 何休《春秋》, 黜, 王弼宗旨《老》《莊》, 王肅司馬昭, 杜預爲吏不廉, 爲將不義, 吳澄出處不正, 而學又歸禪, 是宜見擯于之列, 不可表章乎多士者。 而貞觀元豊正統之際, 朝無眞儒, 擇之不精。 馬端臨固嘗有議, 弘治諸臣亦多請黜, 而禮部沮格, 議竟不行。 世宗皇帝以太學士張孚敬之言, 斷然改正, 一洗前代之謬見, 不能眩後生之耳目, 而其在我朝, 尙列于從祀, 恐當議黜者也。 后蒼始註禮書而《大》《小戴》之禮學, 賴以傳世。 王通, 學近於道, 而格言極有荀楊道不到處, (歐陽脩)〔歐陽修〕扶聖道、闢異端之功, 朱子稱其爲仁義之人, 胡瑗修乎己、治乎人之學, 首洗趨利之習, 楊時倡道東南, 獨承程氏之緖, 而下傳, 以及朱子, 薛瑄奮乎絶學, 篤志力學, 迨其道成德立, 進仕于朝則高風大節, 砥柱乎奔流; 退而講學則隻句微言, 日星乎中天。

所以弘治中附以楊時; 嘉靖中益以歐陽者也, 而我朝似當講究而從之者也。 獨陸九淵之學, 不事講問, 專務頓悟。 當時朱子, 固憂其說之爲害, 而流傳益久, 人惑愈甚, 擧世靡然, 胥歸禪學。 如王守仁之敢爲橫議, 詆謗朱子者, 而尙請其從祀, 則是必江西之人, 習熟見聞, 而筮仕者衆, 力佑象山, 以至上誤朝廷; 下誤斯學。 如此之流, 臣恐不可效尤而苟從者也。 臣又見, 聖廟西北, 又有啓聖廟啓聖公孔氏在北, 先賢顔無繇孔鯉吊, 曾晳孟孫在西, 東廡有先儒程珦蔡元定, 西廡只有朱松。 蓋學宮, 所以明人倫也。 顔子曾子子思, 在於廟中, 偃然先饗, 而顔路曾點伯魚, 杳然居下, 於常人, 亦有所不安, 況聖賢乎, 故熊禾洪邁, 曾有別設一廟之議, 而弘治中, 程敏政又嘗建白。 至于世宗朝, 乃作別廟, 春秋釋奠, 同時行事, 所謂 “子雖齊聖, 不先父食” 者, 至是無遺憾矣。 臣愚竊念, 我國文廟之西, 有地閑敞, 若議立廟, 而春秋同祀則庶乎倫全義安, 而一國之爲父子者定矣。 臣愚又因中朝從享之事, 而深有所感焉。 蓋士習之趨, 一視其上好之所在, 而殿下頃於館學儒生, 諸賢從祀之請, 屢陳而不允, 近臣經席之啓, 亦不頷可, 是實沮一世向善之心也, 臣竊悶焉。 夫金宏弼肇倡道學, 而有繼往開來之業; 趙光祖繼明斯道, 而有拯世淑人之功; 李彦迪體道純篤, 而有扶顚持危之力。 玆三人者, 求之中朝, 則許衡薛瑄之外, 鮮有倫比, 而求之東方, 則薛聰崔致遠安裕之徒, 未有及其見到處者。 況如李滉, 集東儒之大成, 而紹朱子之嫡統, 進則引君當道之誠, 懇懇乎章疏之間; 退則因才設敎之意, 切切於講論之際, 善者聞言而景慕; 惡者望風而自戢。 當今之士, 稍知尊君愛親, 而有禮義廉恥者, 皆薰其德, 而興起者也。 但國家旣不能大用於生時, 識者已歎太平之難見, 而又不肯崇奬於死後。 不惟媢嫉放誕之輩, 旁觀竊喜, 而昔之興起者, 咸有沮喪之心, 甚有登其門, 而泹跡于聲利者, 不及其門者, 將何所賴而爲善乎, 嗚呼! 從違之際, 若不大關, 而士習之邪正, 已判于此。 殿下其可謂重難, 而不之從乎, 夫后蒼諸賢, 雖非前代之所嘗祀, 而世宗皇帝明知其賢, 則從享而不惑, 公伯寮諸人, 雖是前代之所嘗祀, 而世宗皇帝明知其不賢, 則黜去而無疑, 林放諸人, 俱有一長之可取, 則各祀于鄕, 而不沒其善。 其他近世諸賢如章懋吳與弼陳獻章胡居仁陳眞晟蔡淸, 各有功於斯文則皇上命祀于鄕, 而不以先朝之所未定爲嫌, 遼東城中亦以管寧王烈李敏張升胡深賀欽, 立祀於書院, 無不賜額降書。 其所崇奬, 惟在於其人之學成行尊, 而可以風勵乎後學者耳, 略不拘攣於古今如此。 況此金宏弼四君子, 所當從祀之議, 朝無異言、士無異論, 而尙此遲留者, 謂斯人爲不賢乎, 伏願殿下, 亟奬四賢, 列于從祀。 不徒尊其人, 而又必用其言, 盡取其所嘗啓沃之說, 而日陳于前, 以資聖治, 如四賢之親達于冕旒, 而又推其餘, 使八方士子, 知所矜式, 則庶乎褒崇嚮用, 兩盡其美, 而待文王而興者, 蔚起乎凡民矣。

二曰、內外庶官。 臣於官制, 他無所考, 謹得《搢紳便覽》兩冊, 粧䌙以進。 大小京官及外至兩直隷、知府以上, 都載于此, 其他外官, 不盡載錄。 天下庶官, 如此其多, 而注擬之際, 一皆難愼。 或有缺官, 則六部、都察院會議, 擬望之人僉論皆定然後, 吏部只擬二望以進, 而皇上所點, 例於首薦。 夫以中夏人物之盛, 而豈無三望之可擬者哉, 誠以人才難得, 而庶官之中, 一或非人而間之, 則害流於生民, 而禍及於國家。 故下不敢以非才苟充, 而上不敢以私意苟任。 一被選授, 永無劾駁之議, 旣到其任, 又皆久於其職, 九載三考, 乃定黜陟。 校官、邊帥, 亦以家累自隨, 率爲經遠之計, 故庶官多盡其職, 而百姓多得其所。 中朝之所以保大享安者, 有由然矣。 臣竊惟, 東方人才之盛, 視中夏, 不滿二十分之一, 而屢經斬伐, 士趨隨訛, 以至于今, 則三綱不明, 義利莫分。 求其經邦論道者, 蓋難屢遇, 而求其當局思職者, 亦不多見矣。 政曹乃於注擬之際, 論不豫定, 坐于政廳, 然後執筆始議, 三望全合者無幾矣。 至於闕夥員乏之際, 僅備一望, 餘皆苟充, 而上之所點, 乃出於人望之外, 群情所以不厭; 公議所以喧騰。 而不免抽東補西, 朝授夕換, 京外官員, 未諳所職之爲何事, 而或有坐席之未煖者。 絶簿盜財, 秪陷於奸吏之術, 而迎新送舊, 差人發馬, 奔走千里之外, 以破殘民之産者, 又中原所無之弊也。 且其新除之人, 不合牧民之官, 則速議遞差可也。 而必於當行之日, 乃始啓罷, 遠來官屬之初持一月糧者, 又出月利, 留待新官之發, 則歸家賣田, 僅償月利, 而家已告絶矣。 一歲之中, 貶罷者不止一二, 而爲一官來迎者, 不啻百人則一年之中, 以此而失業者, 不知其幾百人哉。 嗚呼! 吏曹用人, 止於暫時之不察, 而四方士民, 無不被害, 其可謂細事而不之改乎 伏願聖明, 體伊尹其愼之訓; 思孔子才難之嘆, 申勑吏曹, 使之須先論定, 洽於公議然後, 乃充其望, 如其乏人, 不須塡三。 而自上恒懼誤用一人, 而國事一以僨, 數易庶官, 而赤子被其毒, 罔及私昵而惟其能; 罔及惡德而惟其賢。 必用道選, 而久任其職, 待其奮庸熙載而後, 乃加超遷, 則庶乎人人知勸, 而民獲其所矣。

三曰、貴賤衣冠。 臣竊見, 中朝衣冠之制, 幞頭軟脚, 名曰雁翅, 其制句曲, 其端橫揷之, 而曲處向上, 有若擧趐奮迅之象, 故又名展趐。 紅袍、靑袍、襞積, 一如道袍, 而不如團領。 其他常服, 自上達下, 不尙浮大, 而距地寸數如一。 臣竊考洪武間所定之規, 文官之衣, 距地一寸; 武官之衣, 距地五寸。 袖闊俱一尺袪口, 文則九寸, 而武則僅容出拳, 穿衣撒直領, 今雖文、武同制, 而其整齊端嚴之象, 宜若可傚也。 儒巾之名, 或曰民字巾, 蓋形如民字故也。 其制或竹結, 而裹以緇布, 或糊紙爲之而着漆。 雖常着而行于烟雨之途, 不如我國士巾之遇露輒垂。 其體端平, 不甚尖斜, 八道士巾之極訛者, 若令倣此改之, 則庶合於瞻視矣。 擧人之在監者及武學生之參禮于西庭者, 俱服儒巾、黑團領, 其他學生, 中外俱服襴衫, 蓋玉色而緣以靑絹, 緣廣二寸。 東士之所謂靑衿者, 與此大異, 旣不能盡從斯制, 則不若勿施靑衿之爲愈也。 宦者之巾, 竹結布裹, 形如帽子, 有職者有簷, 自頂後上起, 高於帽一寸, 形如立瓦, 然無職者, 止着帽子, 但以布自前裹之, 垂其餘于頂後, 長幾半尺。 所服之衣, 或穿蟒龍帖裏, 或穿衣撒直領, 其長俱至于踝, 帶用細絛兒, 雖侍立於榻前者, 止服此衣, 祿薄之宦, 亦所易備者也。 文武庶官, 皆佩牙牌, 以記職名, 而俱黑其緩, 宦者牌綬則赤以別之, 其衣服之有章如此。 遼東廣寧, 俱是邊郡, 而任事掾吏, 巾如錄事, 知印以下, 巾如書吏而稍高, 俱服團領。 小縣如撫寧豐潤之吏, 莫不如是。 蓋守令冠帶坐廳事則吏不敢不服其服。 而我國外邑之吏, 於守令冠帶之處, 或戴深簷胡笠、或戴平笠, 而俱無禮服, 甚不如人形, 平壤義州等處吏服尙同。 各司之吏、他邑吏服, 若令依此改之, 則雖刀筆之賤, 儼具禮服, 而庶無怪僻之習矣。 男童不編其髮, 十五以下, 則剪以垂之; 十五以上, 則總於項後, 俱戴帽子, 族人有喪, 則白而終期。 卿、士、庶人之子, 俱待二十, 然後乃冠, 其不求速成如此。 女人旣嫁者, 束髮于頂, 而加以䯻, 其制北人結以鐵絲; 南人用竹爲之, 俱裹以絹。 又捲絹爲首帕, 名曰鈠子。 冬月則或以毛皮爲之, 名曰暖額, 自額繞䯻, 結于頂後, 而上橫以䈂。 婦人因事出外, 則开鈠子以文絹, 或加金皮。 新婦親迎之際, 亦止戴此, 而或施七寶粧嚴, 俗所謂花冠也。 背子之袖甚闊, 而無長衣。 其長裙不施趲短, 而不務豊豐飾。 其衣冠靚莊, 而猶有儉約之俗如此。 臣路見向化㺚子之婦, 又見其進貢廻還之輩, 我國童男及女人斂髮之容, 不幸而近之。 是雖習俗流傳之久, 而於聖主一變至道之幾, 若又因循, 則異時華史之筆, 謂朝鮮爲冠帶之國乎, 臣竊聞, 卿士之家或欲效此, 以斂男女之髮, 而曾無上命, 故未敢擅改。 若令士夫先行, 而民改以漸, 則庶乎變之不難矣。 腦包卽我國之所謂耳掩也。 其制雖小, 而便於常着, 女人則惟老病者服之, 而其制尤小易備。 臣愚竊念, 國人耳掩, 好尙侈大, 常民則猶用兩具之皮, 女人毛冠, 幾用三具之皮, 其所謂大耳掩者, 幾用五具之皮。 以故, 皮價甚高, 貧而老病者, 雖欲貿着, 而不得。 若令依此改之, 一禁侈大之習, 則庶乎皮價不踊, 而遍及于老病之人矣。 中原雖有笠制, 而人不能備。 其出行之際, 文官着忠正冠; 武官着毛帽而有簷, 儒用儒巾, 或着方巾, 吏用吏巾; 常人皆着帽子。 而東方之人不論貴賤, 通戴笠子, 虛費重價, 若從華俗, 使吏、士, 常着其巾; 庶人止戴帽子, 則窮人庶無費價買笠之患矣。 大抵中原衣冠之制, 不惟簡約易備, 而如今天下同文之日, 如雲南貴州, 距京師萬餘里, 曾是椎䯻、侏離之域, 而大小男女, 一遵華制。 況我箕邦, 距京師不滿四千, 實與五服諸侯無異, 而男女衣冠, 多有可羞者。 臣謹具雁翅、儒巾、䯻、鈠子以進。 殿下若謂時王之制, 不敢不遵, 則請以此, 下于工曹, 使其視爲式樣。 如腦包、巾帽、衫袍、擘積之類, 令久行通事, 詳敎工人, 裁紙爲樣, 廣頒于八道, 使其改之有漸, 則衣冠之悉從華制者, 庶爲實語矣。

四曰、飮食宴飮。 臣竊見, 中原之人無不節用。 官員家供, 止以數器自從, 私家所食, 尤尙儉素。 宴飮之際, 酌以小鍾, 限其行數, 不敢踰節亂性, 荒廢厥事, 所以公私咸裕, 庶政不墜。 而我國之俗, 專以豐饌崇飮爲務, 財盡而不知憂; 民窮而不知恤; 上命而不知從, 暴殄天物, 而斲傷國本者, 罔有紀極。 內司庶官, 雖行家供, 而豪奢之輩, 盛備饌品, 貧約之士羞不能及, 或有無故呈病, 而不勤職事者, 里巷之間, 不計遠慮, 而糜費尤甚焉。 嗚呼! 此是何等風俗, 而不思改之乎, 外方列邑, 雖有限品定器之敎, 而視若迂言, 專不奉行。 間有欲遵朝命者, 而經行使臣, 視其饌品之豐約, 以定其人之賢否。 盛其供億則以爲: “某倅賢而敬上也,” 薄於自奉則以爲: “某倅矯情而干譽也。” 紛紜詆罵, 論議靡定。 名爲有識者, 方且屈而從俗, 圖免人言, 無知守令, 又何足責, 是以, 君無故不殺牛, 而營吏、趨從, 亦必屠牛以饗之。 大夫然後, 乃得三飯, 而七歲衙兒, 或具多品以四飯。 甚至如天使之來, 止於大邑, 間設九爵之宴, 而私行無賴, 亦皆張筵設樂, 窮宵酣飮, 彼酒與肴, 亦非天隕而地湧也。 輪定邑吏爲肉禮房, 月給三牛之價, 而官員所食, 或至十牛; 輪定官婢爲酒母, 月給三石之米, 而官員所飮, 幾至二十石。 以至客舍將校, 困於燈席; 園頭官奴, 困於菜果, 賣田徵族, 侵索村氓, 而猶不能支, 則裂衣爲囊, 相率而逃之。 嗚呼! 中原庶官, 一雞、一魚, 不敢橫斂于民間, 而我國爲官員者, 以養口腹之故, 而病及于祖宗之赤子者, 不知其幾千萬, 則可不君臣相誓, 汲汲乎菲食, 以正供也哉, 而況邊方將士, 尤多崇飮。 於其隣境守帥及兵、水使之往還也, 名爲迎送之例, 而推牛釃酒, 載貨執寶, 棄鎭越境, 而浮觴倒觥, 劇飮連日, 兩界、兩南, 莫不如是。 此不惟剝割殘卒之爲可慮, 而賊乘其虛, 則誰復防守, 此, 李友曾之所以昏醉, 不知釜山之陷, 而他日之患, 不可謂必無也。 嗚呼! 中原之地, 酒禍猶少, 而我國之人崇飮夭死者, 不可勝記。 雖彼以欲敗身, 而在聖主躋世壽域之心, 定所矜悶。 凡百禍源, 不可不周防, 故臣謹具小鍾十枚以進, 伏願聖上, 法皇祖之禁秫; 體光廟之戒酒, 二以垂樣於京中; 八以垂樣於各道, 使其倣爲白鍾。 於大賓、大祀、鄕飮、鄕射之際, 一從華人之禮, 刻定爵數, 俾勿縱醉以喪身, 其他非時、非禮之宴及與私行, 飮過三爵者, 一依《酒誥》之法, 則庶無糜財病民、妨政廢事之禍矣。

五曰、士夫揖讓。 臣到禮部, 見其坐起之儀, 堂上未坐之前, 郞中、員外郞、主事、司務、觀政、進士, 東西相向, 立于堂上而暫揖, 在前列者, 又顧後列而揖, 歷事、監生, 相向立于東西階上, 堂吏立于其後。 堂上自後閤出坐, 則郞中以下, 俱北向堂上立而揖。 堂上於椅上微揖, 郞中以下分立東西, 相向一揖而出。 監生、堂吏以次進于簷下, 一揖而退。 郞中東向立于東夾室之下, 員外以下, 西向對立, 進士俱北向西上, 相與齊揖。 員外以下, 又就于郞中之右, 進士連立而相揖, 郞中進于夾室之門, 員外以下, 俱還于西向立位, 進士退數步, 俱向郞中, 相揖而退于其局。 郞中以下同坐議事, 外官曰事者, 立于庭下, 進跪月臺上。 郞中一人, 手持揭帖, 一揖而置于堂上之案, 堂上曰起來, 外官乃起, 一揖而退。 堂上受投文, 分付于四司, 退歇于火房, 郞官詳議其事, 白而決之。 以故, 凡奏下公事, 不過一二日, 而覆奏民牒, 則卽日決給。 其爲禮貌, 雍容整肅, 而其治事務, 商確可否, 不使積滯, 卽此一部, 而他司之事, 從可知矣。 嗚呼! 中朝庶官之好禮勤事如此, 而我朝六曹等處, 禮貌疎而弊風滋。 戲慢無理之事, 今雖少革, 而佐郞之於正郞, 猶不敢仰首與言。 凡有公事, 一付之曹司佐郞, 佐郞不能盡治其事, 啓下公事, 或經旬月, 而不思申覆, 軍民訟牒, 不賂于書吏, 則不卽決給。 臣恐不除此弊, 則國事終無可治之日矣。 臣又見士大夫相接之禮, 例讓其左, 先就其右, 齊立而相揖, 立于左邊者, 又就右邊人之右而同揖。 遇門必讓; 遇路必讓, 堂下官遇堂上官, 亦不避馬, 立馬于道傍, 擧鞭至帽, 其遇等夷, 則擧鞭至眉。 爲主者送客于門, 必三揖以讓, 然後乘馬, 乘馬者擧鞭至眉, 然後主人揖入。 觀其揖讓之意, 懇切而有文。 臣等與華人相接, 亦以此禮, 而不能夙習, 到底生疎, 多被人笑。 臣愚竊念, 國家事大之際, 禮貌最關, 不於平日相習, 而臨使价, 學於通事, 未免有扞格之羞。 承文提調, 日課置簿之坐, 文官月有三會之例。 若於此時, 令學官、通事之久諳其禮者, 導而習之, 朝行、閭巷之間, 以此傳習, 則他日爲使臣者, 得免橐駝同譬之恥, 而搢紳相接之禮, 亦不苟率矣。

六曰、師生接禮。 臣聞, 國子祭酒, 初赴任日及正朝、冬至, 諸生四拜于庭中, 朔望, 祭酒率其僚屬, 與諸生拜聖之後, 坐于彛倫堂, 則諸生一跪兩揖于月臺上, 常時止行一揖, 而祭酒於拜、於揖, 皆坐椅自如, 不如成均官員之降立。 雖公、侯、伯及新進士之謁聖者, 無不四拜于簷外, 而祭酒、司業, 亦坐椅自如, 蓋尊師道也。 惟外邑學生之行正、至禮于守令、敎授也, 亦行四拜, 守令答兩拜以揖, 而立受兩拜。 守令、敎授例以朔望, 率諸生謁聖, 而坐于講堂, 則廩膳生員及諸生, 以次就于月臺, 而一跪兩揖訖, 廩膳等進立于椅前則守令將廩膳所敎童蒙之書, 讀過半月日課後, 廩膳揖出, 退于其家, 則童蒙跪揖于廩膳, 一如廩膳之跪揖于守令。 常時則生徒齊立一揖, 而敎授、廩膳坐自如, 除休日外, 無有不講之朝。 是以, 山海以西, 垂髫而挾冊者, 甚多有之, 閭巷之間, 誦聲洋洋, 雖至貧至賤之人, 力辦銀錢, 必欲送子于學。 其所以爲敎者, 雖非三代養正之方, 而自少至長, 拘束以禮貌; 激礪以名敎, 使一世之人, 莫不觀感而思奮。 此, 中朝之所以多士濟濟, 而用之於四方, 不患不足者也。 臣愚竊念, 我朝師儒之初坐講堂也, 諸生止行再拜之禮, 而正、至無拜賀之節, 朔望無謁聖之官, 在泮儒生, 但於朔日拜廟, 而師生同拜之儀, 則寂寥乎無聞。 宗親始冠者及新中生進、文武科者, 雖有謁聖之例, 而無拜于大司成之規。 童蒙幸有日講之徒, 而類皆草草無序, 僕僕過恭, 無排行揖讓之禮。 外邑校官之受料者, 皆徒費公廩, 而不知有聖廟, 學長之無料者, 又何能責以禮敎, 是以, 名爲業儒, 而得中科擧者, 猶不識禮讓之爲何事, 託身校籍, 而不讀半行者, 能知遜弟之風乎, 所以從幼抵老, 蠢然無識, 以至傷倫而敗紀者。 雖彼師儒訓誨不力之過, 而竊恐上之所以爲敎者, 猶有所未至也。 今若師生相接之禮、朔望謁聖之規, 必令內外, 一依中朝之制然後, 乃能有所據依可行。 而外學學長, 須以費耗之積於無用者, 給其月料, 責以敎督, 雖初學《千字》者, 莫不講揖, 則庶乎人思讀書, 士皆由禮, 而有用之才, 可得培養矣。

七曰、鄕閭習俗。 臣竊見, 山海以西, 每村立鄕約所。 問于撫寧等縣人則曰: “每月朔望, 約正、副正、直月, 會見于知縣, 一拜三扣頭, 而聽命。” 問于永平人則曰: “約正、副正、直月等, 以朔望, 會見于知府, 四拜于月臺上, 則知府降椅立受, 約正等進立于知府椅前, 同聽其敎。 聽訖, 一揖而退, 各於其所會, 其約中之人, 相與爲禮, 而講其所聽之敎。 所敎者, 是孝順父母、尊敬長上、和睦隣里、敎訓子孫、勤作農桑、不爲非義等事, 而高皇帝所定之敎也。” 其目詳備, 雖不及於《呂氏鄕約》, 而其綱簡切, 易以牖民, 故民咸信之, 村巷之間, 多有列書于墻壁, 而相與誦習。 是以, 父子、兄弟, 雖多異釁, 而不忍分門割戶, 婦姑、娣姒, 不相勃磎。 如遇正、至及生日, 則雖一間小屋之人, 必以四拜禮, 賀于家長。 雖賤男、賤女, 相遇於道, 亦必作揖。 婚姻之禮, 必以親迎, 族人有喪, 則男女、長幼, 俱以白衣、白巾, 終其月數。 四歲童子, 亦能作揖扣頭; 厮夫、走卒, 一無斂髮之不正者, 而立必拱手齊足。 之地, 雖被千百年俗之染, 而大明之化, 所作新者如此。 我國之地, 本以禮義之邦, 加以列聖漸摩之敎; 重蒙主上維新之政, 歲歲命令之所發, 惟化民成俗之是務, 宜乎戶有善人; 鄕有厚俗。 而頃年以來, 民心日漓, 綱常之道板蕩于世, 父而不知敎其子, 子而不知孝其父; 兄而大不友于弟, 弟而大不克恭其兄; 夫不能制其婦, 婦不能順其夫。 爲隣里者, 雖是切親, 而日以鬪狠爲事; 爲朋友者, 雖是達官, 而日以狙詐相高。 在家而不能修厥行, 故事君而不能盡其職, 方命而虐民者, 遍於內外。 以臣觀之, 可謂臣不臣, 而子不子矣。 嗚呼! 臣不臣, 而子不子, 則爲君父者, 可謂有其國家乎, 所謂雖有粟, 吾不得而食諸者, 誠可寒心。 究其所以然, 則雖由俗尙之澆漓, 而竊恐上之所以爲敎者, 猶有所未至也。 臣聞, 己卯之歲, 寧邊之民有貧不能養其父, 而棄之於壑者, 聞鄕約之書, 降自朝廷, 卽日迎歸, 而竭力以養焉。 嗚呼! 若此不已, 則幾何而不爲善俗乎, 今雖印頒其書, 徒藏於禮房之笥, 而不經于守令之心, 民間雖有竊聞願見之人, 而一不聞書中之意如何, 則寧有不待敎而之善者乎, 臣聞, 高皇帝頒敎條, 旣使守令, 集父老而告之, 又令里正, 執鐸徇路, 而遍曉之。 雖有良知、良能者, 必待善言、善行之習於聞見然後, 乃可思奮, 而國家之所以牖民者, 播告不豫, 聽其自爲, 所以守令之怠惰, 而善人之不興也。 議者或以爲: “不先養民之政, 而徒擧導民之術, 則只益紛擾, 而無益於治。” 此言誠是矣。 今者養民之政, 旣不汲汲然議行, 而導民之術, 亦付相忘之域。 臣之愚意竊以爲 “子雖凍死, 不可奪父之衣; 弟雖餓斃, 不可攘兄之食。” 今有犯此者, 則決不以窮年而宥之。 而所以不奪不攘、興孝興悌之目, 則獨諉之窮民, 而不思豫防於不奪不攘之前, 及陷於罪然後, 從而刑之, 是實罔民, 而非仁人之所忍也。 昔者宋帝之泊舟於崖山也, 亡在呼吸之頃, 而陸秀夫猶書《大學章句》, 日與諸生勸講, 誠以流離顚沛之際, 人不知親上死長之道, 則不可與一朝居故也。 況今聖明臨御, 國家閒暇之時, 巖廊之列, 猶有望治之臣; 草野之中, 不無向善之士。 已頒之書, 若令奉行, 使其勸講之方, 略依中朝之制, 守令、敎授, 例於朔望謁聖之時, 同對約正、校生, 而明諭其義, 使之私會而敎之。 設食一事, 俾待豐年而乃行, 則弊不煩, 而民易從, 將斁之倫, 庶可復敍, 而已薄之俗, 庶可還淳矣。

八曰、軍師紀律。 臣於薊州之路, 見步卒數千, 荷兵糧以行, 不敢恃衆而掠人之物, 又以騾驢, 駕兵車數十兩, 憩于田旁, 而不敢取田禾一束, 以秣其驢。 臣奇其師行有律, 而問之則曰: “㺚虜寇邊, 薊鎭總兵官戚繼光, 令中軍將倪善, 領畿縣軍三萬以赴之。” 蓋以主將威信之素著, 故軍畏其令, 而不敢擾民也。 臣因此而竊聞西海坪伐穀之擧, 平安內地之軍, 一無統轄, 而所經、所止之地, 恣取民田之禾, 以飼其馬。 前秋失收, 今夏又旱, 纔付晩種, 以待西成者, 一被師毒, 便爲赤地, 繞田冤呼之狀, 有不可忍見, 是則不待伐彼之穀, 而先害吾民之穀也。 假令伐盡彼穀, 而所傷於我者, 已不啻百倍, 況一藁之伐, 又不可得乎, 若令某邑守令, 帶領某州、某縣軍而來, 啓行之日, 卽嚴軍令, 使不敢一毫掠人, 則庶乎臨敵對陣, 而可得用衆也。 今則先無號令; 後無節制, 如驅狼羊, 略無統紀, 不待交兵, 而狼狽之勢已形。 故歲動關西兵馬, 一不得伸威於一部落之羸胡, 脫遇勁敵, 則土崩瓦解, 定在須臾之間矣。 蓋兵之强弱, 在於主將之才劣, 而不在衆之多寡。 故頃如金秀文者, 亦屢深入矣, 而未嘗遠動內地之軍, 止用江邊土兵, 而不至敗事。 近歲愈勤遠兵, 而愈未見功成, 祗益取笑而見侮。 若於敗事之後, 徒治其罪, 而不有以豫敎, 則臣恐犯罪者日積, 而邊無奠枕之期矣。 臣聞, 中朝養將之制, 旣置武學生, 敎之讀書, 而又於科擧之際, 試以備邊三策, 然後乃拔而用之。 故雖爲備禦、守堡之職者, 亦多知書諳事, 而思盡其職者。 其中如摠兵繼光者, 雖是襲職, 而亦嘗受學於梁玠, 以長許多知見。 臣於道路, 聞其爲人, 秉心持正, 憂國忘私。 頃嘗備於南方也, 始勤募練, 變弱爲强, 子犯軍令, 收而斬之曰: “爾不用命, 孰肯畏我,” 自是三軍股慄, 遂無懈頑之習, 莫不以死力戰, 而方張之虜, 乃潰而散。 江南沿海之迄無大警者, 蓋緣戚公之所以嚴軍法, 而振士氣。 屹有古名將之風, 故穆宗皇帝移置葪門, 倚爲鎖鑰。 頃臨大敵, 申飭關防, 以明備禦方略, 而又於內地, 大書約束之文, 周揭于城門。 其在平日, 撫養士卒, 雖極其至, 而及其犯法, 不少容貸, 參將以下, 親決四十以上, 夜不收或傳虛報以惑衆, 則執以殺之, 使一軍之人, 知有主將, 而不知有㺚子。 是以, 勍寇當前, 而人不動搖, 關內之人咸曰: “爲總兵、爲總督, 邊鄙之人賴以少憂。” 云。 臣因是而觀其所爲文三帖, 其戰亡士卒, 莫不爲文以祭之; 其行師戒塗, 莫不虔誠而告神。 《漳州文記》之作, 則思以禮義養士; 梁玠遇寇而不屈, 則詳記而歎其大節, 三忠有祠, 景跂之不已; 匹婦守義, 勒碑而不遺, 其他尋常所吟詠者, 無非所以許國而報主者。 其忠誠懇切, 而品式備具, 雖古之良將, 無以過此。 臣竊計, 國家之所以任干城者, 始雖勉而淸白, 由其不學而無術, 故及其位重祿厚, 則自謂志願之已極, 而不肯鞠躬盡瘁, 思所以畢命於王事, 惟其私之所在, 則必極力而遂之。 是以, 卒如悍馬, 而軍威不立; 邊如決堤, 而國勢不競。 將來有望者, 惟以卽日老將爲限, 不思矜奮, 以及於古之烈將, 則他日或有可虞之事, 而定無人收拾矣。 如戚公之文, 可以爲法, 故臣謹具三帖以進。 伏願聖明, 以楊照戚繼光之事, 命儒臣作傳, 而竝印其文, 廣布于中外將士, 使倚命自畫之徒, 有所感慕而興起, 則彼知當今之世, 果有如許名將, 雖垂翅回溪之人, 終能奮翼於澠池矣。 凡玆數條, 雖若微末之事, 而有關於士習、民風蘇殘補弊者, 爲甚切, 故臣愚不自揆, 取悉見聞。 伏願殿下, 勿謂賤臣之言, 而惟念國事之非, 議于大臣, 亟謀所以區處者, 則東方士民, 不勝幸甚。

其十六條; 曰格天之誠, 曰追本之孝, 曰陵寢之制, 曰祭祀之禮, 曰經筵之規, 曰視朝之儀, 曰聽言之道, 曰取人之方, 曰飮食之節, 曰餼廩之稱, 曰生息之繁, 曰士卒之選, 曰操練之勤, 曰城池之固, 曰黜陟之明, 曰命令之嚴, 末乃總論君上正心表率之道。 又言: “《朱子語類》, 卷帙雖多, 分類甚精, 君有君用、臣有臣用, 請於各司、各道大衙門, 各藏一本, 使於治事之暇, 擇其類而觀之, 則朱子之所未行者, 庶可明於東方矣。” 憲有經濟之志, 讀書窮理, 要以施諸事爲。 一入中國, 數月途店之次, 求訪咨詢, 殆無遺漏, 其精勤忠讜, 前所未有也。【國朝於朝燕使行, 例送質正官, 質問華訓于中朝, 必以博文詳雅之士充之。 其後漸習華訓, 言語, 吏文, 無不及者, 質正雖往, 無可問, 備數而已。 故近來則不復遣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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