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조선시대

강홍립과 그림 두쪽

작성자송훈(松薰)|작성시간18.05.27|조회수131 목록 댓글 0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과 후금군의 전투를 그린 <사진검격도>와 조선군의 투항 장면을 그린 <양수투항도>...55쪽

여야 모두에게 고립된 광해군은 파병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도원수 강홍립은 광해군 11년(1619) 2월 1만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조선군은 3월 2일 심하의 첫 전투에서 후금군 600여 명을 격퇴했으나 3월 4일 후금의 주력부대를 만나 패배한 후 포위당하고 말았다. 

함께 종군했던 이민환의 <책중일록>에 따르면, 후금은 '우리가 명과는 원한이 있으나 너희 나라와는 그렇지않다. 그런데 왜 우리를 치러왔느냐?'라고 비판하면서도 화약을 맺자고 청했다고 한다...58쪽

칼날위의 역사, 이덕일, 2016년, 인문서원

명에 대한 태도는 북인과 서인 사이의 차이가 없었다.

고립된 광해군으로서는 파병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없이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 도원수로 삼았다.

강홍립은 문과급제자였지만 어전통사까지 겸할 정도로 중국어에 능통했다.

강홍립은 광해군 11(1619) 2 1 3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창성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강홍립이 접해본 명군은 이미 후금의 상대가 아니었다...

선천부사 김응하가 이끄는 좌영은 화포로 후금의 기병을 격퇴했으나,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면서 화약을 잴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후금의 막강한 철기군이 공격해왔다. 조선군은 패할 밖에 없었다.

강홍립은 전원 전사의 길을 택할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다 항복을 택했다.

광해군일기 11 4 8일조에서 사관은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과 몰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심하의 싸움에서, 오랑케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이것이 광해군 축출의 명분이 사전 각본에 의한 항복론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료를 종합해보면 후금에서 먼저 수차례 투항을 권유했고 강홍립은 막다른 궁지에서 자신과 부하들의 생존을 택했을 뿐이었다.

광해군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를 싸움이 청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예견한 조선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광해군은 재위 13(1621) 12 6 명나라가 크게 승전했다는 보고를 듣고 '중국인들의 허풍은 전부터 한두번이 아니니 어찌 경솔히 믿을 있겠는가?'라고 일축했다. 허나 허풍 중국인들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서인들은 광해군의 현실적 외교관을 황제의 은혜에 대한 불충이란 명분으로 몰면서 쿠데타를 준비했다...126 - 128 

조선왕을 말하다, 이덕일역사평설, 2010, 역사의 아침

광해군은 국내의 형편을 들어 파병을 미루던지, 아니면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강홍립을 도원수 삼아 파병할 때도 이런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조선이 억지로 참전한 것이며, 후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라' 밀지를 내렸다는 설은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노력하라' 한점을 보면, 밀지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쟁에 임하는 광해군의 태도는 밀지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강홍립에게 내린 하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린고 심하전투 후인 광해군 11 4 2, 강홍립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신이 배동관령(背東關嶺)에 도착하여 먼저 호역(胡譯) 하서국(河瑞國)을 보내어 노()에게 밀통하기를 ‘비록 명나라에게 재촉을 당하여 여기까지 오기는 하였으나 항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전(接戰)하지않을 계획이다’고 하였기 때문에 전투에 패한 후에도 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화친이 속히 이루어진다면 신들은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강홍립은 명이 압박하여 참전했을 뿐이지 싸움은 하지않을 생각이라고 했고, 전투에 패한 뒤에도 지내고 있다고 보고했다. 후금과 화친이 이루어 진다면 돌아갈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전했다.

밀지의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위의 광해군의 하유, 강홍립의 장계에 이어, 광해군 11 4월경 후금에서 국서에서도 이런 논조는 이어진다.

너희 조선이 군대를 일으켜 명을 도와 우리를 친것에 대해, 우리는 너희가 이번에 온것은 조선 군대가 원하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바로 명나라 사람들에게 압박을 받아, 일본의 침략 너희를 구한 은덕을 갚기 위하여 왔을 뿐이리라...

넓은 천하에 없어야 나라가 있겠는가. 어찌 큰나라만 남고 작은 나라는 멸망해야 하겠는가.

조선의 국왕 너는 우리 나라가 평소 원한이나 틈이 없었으니 지금 우라 나라가 함께 모의하여 명에 대해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이미 명나라를 도왔으니 차마 명을 배반할 없다고 생각하는가? 너의 대답을 듣고 싶다.

국서의 앞부분은 강홍립의 장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국서에서는 강홍립의 항복을 근거로 조선 국왕 광해군에게 명의 편을 것인지, 후금의 편을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강홍립의 말에 근거하여, 광해군의 태도를 최종 확인받으려는 후금의 국서라고 판단된다.

광해군은 줄곧 밖으로는 기미책을, 안으로는 자강책을 추구한 것처럼 말을 했지만, 그의 후금 정책은 몇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심하전투에서의 실리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전사한 조선 군사가 1 3천명중 9천명 정도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농업노동에 노예로 동원되었고, 강홍립은 인조5 정묘호란 후금 침략의 길잡이로 왔다.

항복이라는 실리주의의 결과치고는 너무나 처참하다.

둘째, 광해군은 자신의 입장이 후금과 화친하는게 아니라고 극력 부인했다...

국왕에게 올리는 장계에 이런 (화친) 쓰는 것이, 과연 국왕과 사전 교감이나 논의가 없이 가능했으리라고는 믿기는 매우 어렵다.

사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지금까지 살편본 (과도한 궁궐짓기 ) 의하면 광해군의 대후금 정책은 기조나 원칙, 그리고 상황을 제어할 능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숱한 옥사가 벌어지다 보니 조정에서 일한 인재가 없고, 대동법은 흐지부지되고, 궁궐 공사에 국력을 낭비하다 보니 자원과 군비가 허술해졌기에 나타날 밖에 없었던 결과였다...339 - 341

광해군 그위험한 겨울, 오항령, 2012, 천일문화사

계월향은 평양성의 무관이던 김응서(1564 - 1624) 연인 관계였다.

그녀는 매일 평양성 서문 근처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던 연인 김응서를 만나 비밀리에 내통했다.

1592 12 드디어 이여송의 4 8천명의 대군이 도착하면서 조명 연합군은 본격적인 평양 수복작전을 폈다. 그녀는 고니시 히에게 술을 먹여 깊은 잠에 빠지게 김응서를 방으로 불러들였고, 김응서는 고니시 히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김응서는 천민출신이었다.신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그는 출신을 속인 무과에 급제해 감찰을 제수받았지만 발각돼 해임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군관이 절대적으로 부족, 운좋게 다시 기용됐고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천민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안도 방어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무관의 요직을 두루 섭렵했다.

유성룡이 징비록에는 김응서가 이순신과 원균을 위기에 몰아넣은 장본인으로 묘사된다.

김응서는 일본 간첩을 통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한반도를 건너오는 경로를 입수해 조정에 전했다.

조정은 말을 믿고 이순신에게 진격명령을 내리지만 이순신이 정보의 진위를 의심해 출전하지 않다가 처벌받고 백의 종군하게 된다. 이순신도 난중일기에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김응서에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전쟁이 끝난 김응서는 김경서로 이름을 바꿨으며 2 포도대장에 올랐다.

광해군 즉위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해 원병을 요청하자 평안도 병마절도사겸 부원수로 원수 강홍립과 함께 출전했다. 두차례 전투 끝에 강홍립이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해 역시 포로가 된다. 비밀리에 적정을 기록해 고국에 보내려다가 강홍립의 고발로 처형됐다. 후일 우의정에 추증됐다.

 

' 논개, 계월향'이란 말이 있을 만큼 나라를 구한 기생으로 계월향을 높게 평가하지만 사실 김응서가 계월향을 이용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계월향이 연인의 탈출을 돕기 위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응서가 서둘러 빠져나가기 위해 계월향을 죽였다는 설도 전한다...283-285

초상화에 감춰진 옛이야기,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배한철, 2016, 생각정거장

광해군은 명의 요구를 회피하려다가 어쩔수 없이 도원수 강홍립이 이끄는 15 명의 병력을 파견한다... 강홍립의 조선군이 패했던 싸움을 따로 심하전투라고 부른다....

서광계, 황인우, 염숭년 명대부터 최근까지 사르후 전투를 연구했던 학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당시 원정군인 명군이 후금군을 이기기란 애초부터 거의 불가능한 이었다. ..

오랫동안 팔기라는 공동체에 편제되어 조련된데다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후금군을 당해낼수 없었다.

명군의 무장 또한 열악했다.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이 배속되었던 유정의 부대는 대포조차 없었다...

서광계는 병력, 무기, 장비, 작전, 기율, 정탐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모든 요소를 고려할 , 명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황인우는 명군이 애초부터 후금군이 실수를 저지르기만을 바랄 밖에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는 나아가 사르후 전투 패전을 황제의 태정, 격렬한 당쟁, 환관의 발호, 재정의 고갈 당시 명이 안고 있던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점에서 비롯된 필연의 결과로 결론지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사르후 전투 이후 상당수 조선관료들은 패전의 모든 책임을 강홍립과 광해군에게 돌렸다.

1623 심광세는 '강홍립이 군사 기밀을 후금에 누설함으로써 명군이 패하게 되고, 궁극에는 요동 전체를 후금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주장했다. 인조 또한 명사 맹양지에게 '광해군과 강홍립때문에 명이 원정을 망쳤다고 강조한 있다.

'후금과 화친하여 명을 배신했으므로 광해군을 몰아낸다' 인조반정의 명분을 뒷받침하기 위해 '명이 광해군과 강홍립 때문에 사르후 전투를 망치고 요동을 빼앗겼다' 황당한 '기억' 만들어 진것이었다...24 - 27

한편 이괄의 남긴 여파 또한 후금의 조선 침략을 자극 측면이 있었다. 반란이 진압된 직후 주모자였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조선을 탈출하여 후금으로 투항했다.

한윤은 후금에서 당시 억류되었던 강홍립을 만나 '강씨 일족이 죽었다' 무고했다고 한다. '새로 들어선 인조정권이 흔들리고 있다' 정보도 후금에 흘렸다.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한윤의 후금 투항과 그가 건네준 정보가 홍타이지가 조선 침략을 결심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에선 정묘호란을 '강홍립이 후금을 사주하여 일으킨 전쟁'으로 단순하게 규정하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송시열이 '삼학사전'에서 정묘호란을 '강홍립이 오랑캐을 인도하여 국경을 침범한 사건'이라고 했던 것을 비롯하여 서인계 인물들은 대부분 '강홍립이 오랑캐를 부추겨 도발한 전쟁'으로 정의했다.

정묘호란을 아예 '강노의 침입'이라고 부기기도 했다. '강노' 물론 강홍립을 가리킨다...156 -157 

만력 무오년에 건주의 오랑캐가 화란을 얽어 천조를 어지럽혔는데 천조는 격문을 보내, 우리나라에서 병력을 징발했다. 조정은 강신의 아들 강홍립을 발탁하여 원수 삼아 명을 돕도록 했는데 홍립은 마가재에 이르러 싸우지 않고 오랑캐에 항복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갑자년에 이르러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탈출하여 오랑캐 땅으로 들어가 홍립을 만나 '우리 조정이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속여 홍립의 흉악한 마음을 자극하고, 함께 칼을 거꾸로 잡고 조선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정묘년 1월에 철기를 규합하여 의주로 들이 탁치니 흉봉이 이르는 곳마다 닭과 개의 씨까지 말리고 잇따라 평양과 항주까지 함락시켰다...<양호거의록 - 강노입구시기사> 

한마디로 광해군의 신하였던 강노가 주도적으로 후금군을 끌어들여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후금 자체의 침략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을 이끌었던 사령관은 엄연히 아민이었고 후금 또한 투항자의 사주에 따라 동병 여부를 결정할 정도의 간단한 나라가 아니었다. 강홍립 스스로도 '자신은 원정에 차출된 봉황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선으로 향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술한 있다.

그렇다면 정묘호란을 '강노입구' 운운하며 '강홍립의 복수전' 설정하여 모든 책임을 강홍립에게 돌리려 했던 것일까?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 교서에서 보이듯이 '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한 '이야말고 인조 정권이 '반정을 일으킨 명분'이자 '입국의 근거'였다.

그런데 정묘호란을 맞아 '오랑캐' 형제관계를 맺고, 이어 병자호란 당시 무릎을 꿇고 항복함으로써 인조 정권의 '명분'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곤경'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된 것은 서인계 인물들이 '심하전투 당시 강홍립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강조하는 부분이다. 심하전투는 형편없는 전력을 지녔던 명군이 자멸했던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반정 이후 인조와 서인들은 '광해군이 강홍립을 사주하여 기밀을 유출시킴으로써 명이 원정을 망치고 궁극에는 요동까지 상실하게 만들었다' 황당한 기억을 만들어 냈다.

정묘호란을 '강노입구' 정의하는 또한 같은 '만들어진 기억' 연장선에 있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근원적인 책임을 광해군과 강홍립에게 돌리고, 나아가 광해군 정권을 후금과 '같은 부류' 매도함으로써 자신들이 처한 명분적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던 것이다...157 - 159

 

역사 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2013, 도서출판 푸른역사

여야 모두에게 고립된 광해군은 파병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광해군 11(1619) 2, 1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명나라 군사들과 합류한 강홍립이 ' 명군 진영에 나가보니 기계가 허술하고 대포와 대기도 없었으며,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이라고 광해군에게 보고한 것처럼 명나라는 이미 청나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군은 3 2 심하의 전투에서 후금군 600 명을 격퇴했으나, 3 4 후금의 주력부대를 만나 패배한 포위당하고 말았다.

함께 종군했던 이민환의 <책중일록> 따르면, 후금은 '우리가 명과는 원한이 있으나 너희 나라와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우리를 치러 왔느냐'라고 비판하면서도 화약을 맺자고 청했다고 한다.

이상 싸울 방도가 없었던 강홍립은 3 5 흥경으로 들어가 후금 국왕 누르하치에게 항복한 억류되었고, 나머지 군사들은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그러자 군량 수송업무는 등한시했던 평안감사 박엽은 강홍립의 가족들을 붙잡아 가두었으며, 조정의 신하들은 가족들을 주살해야 한다 주장했다.

강홍립의 가족들을 희생양 삼으려는 이런 주장에 대해 광해군은 '경들은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추호라도 막을 형세가 있다고 여기는가'라고 일갈했다.

억류된 강홍립은 청나라에 광해군이 전쟁을 원치않는다는 뜻을 전하는 한편 광해군에게도 '화친을 맺어 병화를 늦추자는 비밀 장계를 종이노끈 등에 싸서 보래 보내왔다. 광해군과 강홍립의 견해가 일치한 결과 조선은 전쟁의 재앙에서 벗어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 15(1623) 선조의 손자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일으키자 상황은 돌변했다. 조명동맹이란 사대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서인들은 광해군의 국익 우선 외교정책을 상국에 대한 배신이라고 한탄하면서 후금과 관계를 단절했고, 결과는 인조 5(1627) 정묘호란으로 나타났다.

인조가 '군병의 숫자를 아는가?'라고 묻자 병조판서 이정구가 '모릅니다'라고 답변했다.

인조는 '판서가 군병의 숫자를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힐난했으나, 이것이 숭명반청 이념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르킨 인조정권의 현실이었다.

그나마 정묘호란은 강홍립의 주선으로 형제관계를 맺는 선에서 끝을 맺고 청군은 더이상 남하하지 않고 물러갔다. 강홍립은 그해 7 세상을 떠났는데, 후에도 서인들은 계속 청나라와 결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 사대부들의 숭명노선은 현실 정세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조선이 숭명반청 정책을 고수하며 결전의 의지를 드러내자 청나라는 인조 14(1636) 12 재차 남하했고,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 나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군신 관계를 맺어야 했다.

광해군의 국익 우선 외교를 조명동맹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며 쿠데타를 일르킨 사대주의자들이 자초한 국난이었다...57 - 58 

칼날위의 역사, 이덕일, 2016, 인문서원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