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제>안회남(필승) 그는 누구인가?
1.안회남 작품활동
안회남은 1931년 「조선일보」 신춘현상문예에 「발(髮)」이 3등으로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 소속 문인들과 함께 1948년 월북하기까지, 80여 편의 중·단편소설 및 85편 정도의 평론을 발표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안회남은 흔히 신변소설 작가로 불릴 만큼, 그동안 발표된 작품의 상당수는 자신의 유년 기억과 일상생활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매개하며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를 적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1930년대 발표된 그의 초기 소설들은 ‘나의 연애 이야기’, ‘가난한 이야기’, ‘결혼 이야기’, ‘아내 이야기’, ‘생남하는 이야기’, ‘동무 이야기’, ‘돌아가신 나의 선친 이야기’ 등 작가의 분신인 ‘나’의 가족 구성원과 주변 인물들의 실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작품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한다. 주인공 ‘나’가 장티푸스에 걸린 친구의 아내를 애인과 함께 간호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연기(煙氣)」(1933), 아내의 상자에서 패물을 몰래 꺼내어 전당포에 맡긴 후 죄책감으로 방황하는 지식인의 내면을 그려낸 「상자」(1935), 연작 형식으로 1936년에 잇달아 발표된 「악마」, 「우울」, 「고향(故鄕)」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화원」, 「처녀」, 「모자」, 「장미」, 「겸허」 등의 단편소설들을 거론할 수 있다. 이들 작품은 모두 어린 시절 동무들과의 아스라한 기억을 생생하게 재현하거나 가난과 궁핍으로 점철된 작가의 사실적 체험들을 뚜렷하게 부조한다. 이 중에서도 「겸허」는 작가의 휘문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자, 「봄봄」, 「동백꽃」의 저자로 유명한 김유정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안회남
또한 1937년 1월 「조광」에 발표된 「명상」은 ≪금수회의록≫과 ≪공진회≫의 작가이자 그의 아버지인 안국선에 대한 추억과 회고의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2. 안회남의 작품 특징이처럼 데뷔 시기부터 안회남은 작가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을 둘러싼 일제강점기의 굴곡진 삶을 환기하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창작했다. 이제까지 한국 근현대문학사가 1930년대의 대표적인 신변소설 작가(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로 박태원과 함께 안회남을 꼽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안회남의 소설은 분명 신변소설, 자서전적 소설, 또는 ‘수필 형식으로 변형된 소설’ 등으로 규정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도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밝힌 바 있다.
가령, 소설집 ≪전원≫의 발문에서 그는 자신의 신변 문학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식민지 정책에 쫓기어 자기 자신 속으로만 파고들어 간 문학이라고 고백한다.한편, 신변소설은 그 특성상 현실의 모순 구조 및 부조리한 체제를 총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지엽적이고 단편적으로 파악한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신변소설은 자칫, 우울하고 비극적인 식민지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위안 또는 자기만족의 차원으로 나아갈 요소가 다분하다. 1930년대 신변소설을 발표한 작가들에게 작가의 윤리 의식이나 태도의 문제가 중요시되는 것도 이러한 사실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안회남의 경우, 신변소설의 형식적 한계를 노정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작가적 소신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먼저, 안회남의 소설은 여러 평자들의 지적대로 “객관세계를 단념하고 주관 속으로만 파고들어 간 문학” 내지는 “그 자신이 역사적 시각 속에서 그 실체를 천착한 이후에 고도의 내밀한 고뇌를 거쳐서 육화된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감정적이고 즉물적이 성격이 강렬했던 문학”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는 안회남의 소설이 출발 지점에서부터 “외람한 말인지 모르나 나는 소위 기성문단, 특히 기성작가를 멸시하는 자다”와 같이 기존의 소설 창작 방법을 철저하게 부정했다는 점, 그러면서 동시에 신변소설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역설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작가적 진정성의 문제가 제기되기에 충분하다. 결과적으로 그의 문학은 궁색한 자기변명의 논리이자 자기방어적인 문학으로 규정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반면, 신변소설의 제약 요소를 분명하게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의 실험을 통해 30년대 소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작가적 고집, 또는 작가의식의 순수성 역시 그의 문학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대상이다. 이런 사실은 그의 산문 곳곳에서 육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신변적 사실이 더군다나 사회의 표면에 부딪쳐 나가지도 못하고 내성적으로 심경에 흐르고 말 때 그것이 우리가 문학에서 보고 느끼고 싶어하는 사실의 세계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은 빤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모름지기 신변소설에서 떠나서 본격적인 문학에로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조그마한 고루를 지키기에 제 딴엔 정성을 다하였습니다”라고 쓴 부분은 그 한 예라 할 것이다.
3. 안희남의 동정
해방 직전 충남 전의에 머무르고 있던 안회남은 1944년 그곳의 농민들과 함께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탄갱(炭坑)으로 끌려간다. 일제의 탄압이 극대화된 이 무렵 그는 비극적인 징용 체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안회남의 네 번째 창작집 ≪불≫은 그의 징용 체험을 주로 형상화 한 작품집이다. 이 소설집을 계기로 안회남의 소설은 기존의 창작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문학의 대사회적 역할을 강화해 나간다. 이 시기 그의 소설은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주제와 형식의 측면에서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이른바 ‘징용 문학’으로 일컬어지는 「불」을 비롯한 그의 몇몇 소설들은 징용이라는 독특한 체험을 소재로 현실 인식의 확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각별한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작년 北九州 炭坑 속에서 8월 15일을 지내고 내가 현해탄을 건너간 지 공교히도 만 1년이 되는 9월 26일에 귀국하였다”로 시작되는 작품집의 서문에는 이즈음 안회남의 소설적 고민이 투명하게 개진되어 있다.이와 같이 해방 이후 안회남의 문학은 시대적 현안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민족적 모순과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해 저항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해방 이후에 발표된 그의 많은 작품들, 가령 「불」, 「쌀」, 「소」, 「사선(死線)을 넘어서」와 같은 소설들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이 시기 그의 소설은 초기 작품이 지녔던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고 민족적 아픔과 혼탁한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며 현실 비판적인 작가 의식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집 ≪불≫의 주요 소재가 징용에 나갔을 때의 탄갱 체험을 비롯한 작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작품 역시 안회남 특유의 신변소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안회남의 소설 세계는 김동석의 분석대로 이후에 발표된 「폭풍(暴風)의 역사(歷史)」(「문학평론」, 1947. 4), 「농민(農民)의 비애(悲哀)」(「문학」, 1948. 4)에 와서야 비로소 작가로서의 구각을 벗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1947년 그는 많은 김유정유품을 지닌채 월북하였으나 작품활동은 계속치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4. 김유정과의 우정
휘문고등보통학교 3학년이 되어 유정은 안회남과 단짝이 되어 학교를 자주 빠졌다. 두사람이 친하게 된 것도 자유분방한 사춘기의 설레임을 주체할 수 없어 학교를 자주 빠진다는 데서 동류의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외로운 두 소년이 서로 결석하는데도 의지가 있었다. 유정은 이무렵 바이올린 하모니카 등을 배웠고 소설읽기 영화감상에 열중했다 아령 야구 축구 스케이팅 권투 유도등도 열심히 하였고 지식에대한 욕구가 높았다. 그는 한창 자아발견에 광분했었다.(그의 조카 영수의 회상에 따르면 다정다감햇고 끝까지 착했던 멱설이는 일찍 부모를 여위 이후 뭔가 부족한 것을 느껴 아무리 배불리 먹고 한껏 호사를 해도 허깃증과 허전함을 금치 못하였다)
형님의 난봉으로 가산이 기울고 그나마 자신에게는 잘해주었다 한들 누님들을 때리고 소란을 피우는 형이 싫었던 유정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 회남이 있었기에 그나마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정서적 불안정. 문학을 하기 위한 축복? 회남의 김유정전 영광이다 영광이다 아무일 없다 하고 외치며 일기에 까지 기록하여 둔 것은 항상 이러한 위협에 쪼들려 지낸 탓이 아니었던거 한다. 그가 나를 동무하여 함께 학교를 베어 때리기 비롯한 것도 이를 테면 한 개 투쟁의 형식이요 반항의 형식이었으며 자기 자신을 위하여 즐겁고 아름다운시간을 가져 보려는 자연한 노력이었다.
회남의 집 젊은이들의 사랑방에서 YCK 하모니카 서클을 만들어 매일밤 하모니카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들의 우정은 문단에 등단한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유정의 마음속에는 가정과 혈육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증오하는 감정이 불타오르는 듯 하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정과 혈육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가졌다. 이는 그가 방탕하는 못난 형님을 모시고 있지만 어릴 때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데 있다 유정의 마음속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뚜렷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유정은 그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1926년 휘문고보를 휴학하게 된다. 1928년 유정의 형 유근은 고향 실레마을로 이사를 가고 유정은 봉익동에 사는 삼촌집에 맡겨진다. 다시 4학년으로 복학 당시 휘문고보는 전국의 영재들이 몰려 들었다. 이후 1929년 휘문고보를 졸업 삼촌댁에 얹혀지낼 체면도 명분도 없어 사직동 둘째 유형누님 댁으로 거쳐를 옮김 회남과 둘의 만남은 여기서도 이어지고 둘째누님의 히스테리가 있기도 하였다. 1927년 19세 청년 유정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하루 아침에 삼촌댁에 얹혀사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절망했던 것이다.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21세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그가 세상을 헤치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끝)
5. 김유정이 안회남에게 쓴 편지(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