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 시 읽기

분멸 / 김소연

작성자장민정|작성시간26.06.05|조회수47 목록 댓글 0

 

분멸 / 김소연
 
그녀는 성냥을 한 장 사진의 꼭짓점에 가져다 대었다 불이 붙었다 세 장의 사진을 불 속에 던졌다 열 장의 사진 스무 장의 사진 혼자서 찍은 사진 모두 함께 찍은 사진들이 불길 속에서 그녀의 얼굴들이 불길 속에서 일그러졌다 아기였던 얼굴 청년이었던 얼굴 면사포를 쓴 얼굴 눈을 감은 얼굴들이 불길 속에서 잠시 환했다가 금세 검은 재가 되었다 얼굴이 지워졌을 뿐인데 생애가 사라지는 것 같군 사라지는 걸 배웅하는 것 같군 불길 같은 이런 기쁨 조용하게 출렁이는 이런 기쁨 정성을 다해 추락하는 황홀한 기쁨 검정 같은 깨끗한 기쁨 불 속에서는 재가 된 것과 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두 가지만 남겨져 있었다 입에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눈에는 불이 담겨 있었다 주문진의 바다와 노고단의 구름과 비둘기호의 창문 바깥이 차례차례 깨끗하게 타들어갔다 사진에 담아 보았을 리 없는 그녀의 작은 미래가 빨간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그 불씨들마저 꺼졌을 때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그녀가 오래 기다려온 장면이었다 그 속에서 그 안을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온기마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혼자 남았다는 것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은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