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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사춘기 2 외 4편/ 최인호

작성자장민정|작성시간26.06.09|조회수44 목록 댓글 0

사춘기 2 / 최인호
 
 
돌 위에 도롱뇽이 붙어있다
파충류의 피부는 쉽게 돌을 닮아간다
마른 돌 위에 오래 있을수록 도롱뇽은 미끄러워진다
돌 위에 눌어붙지 않도록
몸은 점액을 쏟아낸다
아마도 두려운 것이다
너무 오래 사랑을 나누다가
뒤엉킨 몸이 등나무 한 그루가 되었다는
어느 신화처럼.
파충류의 체온이 돌 위에 자국을 남긴다
y는 자꾸 죽는 꿈을 꿔서 베개 밑에 칼을 베고 잔다고 했다
겨울이 온 것 같아
그래서 겨울이 어느 정도 왔는데?
눈을 깜빡이는 동안에도 세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비가 온 지 오래다
수면을 뚫고 돌이 솟아있다
 
—계간 《시와 편견》 2023년 여름호
 
 
밤눈 / 최인호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가만히 눈 감고 귀 기울이면
까마득히 먼 데서 눈 맞는 소리
흰 벌판 언덕에 눈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못 듣는가
저 흐느낌 소리
흰 벌판 언덕에 내 우는 소리
 
잠만 들면 나는 거기엘 가네
눈송이 어지러운 거기엘 가네
 
눈발을 흩이고 옛 얘길 꺼내
아직 얼지 않았거든 들고 오리라
아니면 다시는 오지도 않지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체로키 / 최인호
 
 
장갑에 손을 넣으면 팔의 가장 마지막은 장갑이 됩니다
내가 불쑥 남의 여자 뱃속에 들어가 남의 아들이 되었듯이
자꾸만 신경 쓰이게 될 겁니다
 
17세기 인디언들에게 없었던 것은 신발장과 성경책 그리고 환율에 대한 이해. 말발굽 소리가 나면 손을 입에 대고 하바바바
소리를 내었습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독감이 유행하고
새로운 매너가 자라납니다
결국엔 조금 더 적도에 가까운 감정으로
인디언들은 갑자기 우리의 다정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지구는 공전했습니다
 
익숙해질수록
장갑이 된 손은 맹목적입니다
안녕하고 손을 흔들면
하루 종일 안녕해야 할 것 같은 기분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이 의자에 체온을 뺏기고
신발 신은 사람들이 복도를 오래도록 걸어 다닙니다
창피하지 않으려고 입을 가리고 하품합니다
하바바바
눈물이 고입니다 닦아내지 않으면 흘러버릴지도 모릅니다
손이 사라진 자리에 장갑이 나타나고
젖은 손을 흔들어 말리고
 
 
⸻계간 시 전문 《애지愛知》 2020년 겨울호
 
 
디카페인 / 최인호
 
 
사기야 사기
당신과의 첫 만남은 빨간 머플러와 경양식 돈까스였는데
혈액형을 물어보며 서로를 다 아는 것처럼 굴었는데
빵가루에 묻힌 죽은 돼지와 나이프
유럽에서 건너온 식사예절에 대하여
말끝을 올렸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는데
그거 알아요? 카멜레온은 체온에 맞게 피부색이 변한대요 다시 태어나면 파충류가 되고 싶었어요 땀이 많은 편이거든요
그때는 지금보다 긴 혀가 필요하겠네요
집에 갈 때 비가 내렸어
우산을 써도 양말은 젖었어
사춘기 같았어
 
언젠가 꿈에 아주 길고 휘날리는 빨간색을 보았는데
당신이라 믿어버렸어 사실 말이야 나는 아직도
몽정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워
욕을 섞는다면 좀 낫지
비겁한 거야 산 돼지에게
빵가루를 뿌리지는 않잖아 머플러 속에 숨긴
당신의 목은 어떤 모양일까 있잖아
사람의 혀는 대부분 목구멍에 들어있대
탐정만화처럼 목을 매도 길게 빠져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대, 사기야 사기
유럽에서 건너온 식사예절처럼
여전히
 
당신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의 색깔이 계절에 맞게 변한다
 
알고 있어?
자장가가 원래는
죽은 아이들을 위한 노래라는 거
 
⸻계간 《모:든시》 2020년 봄호
 
 
과일 좀 드세요 / 최인호​
 

사과를 자른다 반쪽이 또 반쪽이 되고
사과였던 부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누군가 손톱을 깎다 말고 이곳이 아마
사과였을 겁니다 하면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혀 밑에 침이 고이거나 마른침을 삼키거나
사과를 생각하지 않아도 사과를 느끼는 사람처럼 네 그렇겠지요 하고
사과가 아닌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매 맞고 도망친 미숙이 이모 에기를 할 것이다
나는 국경을 넘을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사는 곳으로
사과가 사과를 닮아 동그랗게 자라지 않는 곳으로
사과는 포크에 찍히지 않고
사과는 토끼를 닮지도 않아서
어느 저녁 문밖에서 개 짖는 소리 누구세요 물어보면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 저녁 별다른 것 없이도 현관에 잠금장지 채우는 저녁 할 줄 아는 것은 다만
사과를 깎는 일이라
사과를 자른다 껍질은 사과를 잃고
오랫동안 다른 곳으로 썩어가고 있다
 

블랙홀의 자리 / 최인호
 

갈릴레오는 노년에 태양 흑점을 관측하다 눈이 멀었다고 하는데
그건 그냥 백내장을 알지 못했던 시대와
사람들의 낭만
 
오리온 겨울철 별자리의 왕이라고 한대요
사실 오리온은 장군일 뿐이었는데 말이야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측량 가능한 것들만 사랑이라 부르자
y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
 
언제 부터인가 공을 던지면
달려가서 공을 물어 오는 강아지와
강아지의 입 속에서 공을 꺼내
다시 허공에 던지는 사람
 
가끔 시간 이 멈춘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헤어지는 순간의 나는
살면서 y와 가장 비슷한 궤도로 걸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날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세계는 일단
유의미한 변화 없음
 
다 마신 콜라 캔을 쓰레기통에 넣을 때
텅 빈 곳에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비로소 버려지는 것 같습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닮지도 않은 동물들을 떠올리던 그리스인처럼
 
언젠가 말들이 몸에서 멀리 떠나고
내가 다시 가난한 행성이 되면
검은색에 제일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y에게 가야지
나는 지구에 관심이 많은 외계인이고
노년에 태양흑점을 관측하다
눈이 멀었다고 얘기해야지
 
오래된 농담이 생각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딸꾹질 같은 옷음이었다
 

 

약력

1988년 서울 출생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졸업

2019 동아일보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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