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뒷면
송은숙
구름이 묽은 수프처럼 떠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강가에서 바라보는 저녁은
수프와 대구 머리가 놓인 단란한 식탁을 향해
귀가를 서두른다 가장 푹신한 의자와
불가의 따스한 자리를 향해
새들은 전속력으로 숲으로 날아들고
강은 온몸을 끌며 내닫는 것이다
나는 먼 마을에 등불이 내걸리는 것을
꽃잎이 제 몸을 둥글게 말아
노란 등불을 감싸는 등피가 되는 것을 본다
거미가 알집을 껴안고 세계의 중심에서
가만히 웅크리는 것을 본다
수면을 치던 실잠자리가 날개를 접고
고요히 밤의 뒷면에 매달리는 것을 본다
감자와 대구의 살점을 헤집는 포크처럼
저녁이 오고 있으므로
저녁 안개가 살충제처럼
낮고 축축하게 살갗 속으로 파고들므로
오래 들끓다 식어가는 웅덩이 위에
고양이 눈빛 같은 별로 떠서, 저녁이
—시집 『얼음의 역사』 (2017 한국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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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우리에게 양면적 감정을 일으키는 시간대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식구들과 마주 앉아 식사하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양의 시간대이자, 다가올 밤이 주는 공포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음의 시간대이기도 하다. 저녁은 밝음과 어둠이 합쳐지는 회색의 시간이자 밝음에서 어둠으로 이행하는 유동 지대이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최대한 빠르게 움직인다. 사람들은 식구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새들은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든다. 심지어 강물조차 바다에 이르기 위해 빨리 내달리는 것 같다.
보금자리가 있는 것들은 보금자리를 찾아가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식물들은 어떨까. 꽃이랄지, 나무랄지, 풀잎 같은 것들. 그들은 제 몸이 보금자리가 되어 뭇 생명체를 받아들인다. 꽃잎 속엔 딱정벌레가, 나무엔 새들과 다람쥐가, 풀잎 뒤엔 실잠자리가 깃든다. 그리고 그 위에 저녁이, 어둠이 내린다.
밖은 어둠이 짙어지지만, 저녁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따뜻한 불빛 아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 식탁엔 왠지 감자와 대구요리가 있을 것 같다, 감자는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주는 이미지이다. 고된 노동 끝에 감자를 먹고 차를 따르는 소박한 사람들. 대구의 이미지는 뭉크의 그림에서 가져왔다. 지난해 한가람 미술관에서 뭉크 전을 보았는데, 말년에 그린 <대구 머리 요리를 먹는 자화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 뭉크는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잇따른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극도의 불안과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다. <절규> <마돈나> <사춘기> <병든 아이>와 같은 걸작이 탄생한 것은 그 시기이다. 뭉크는 결국 신경쇠약으로 인해 정신병 치료를 받게 된다. 하지만 치료 후의 작품들은 그 이전의 강렬함과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뭉크의 정신이 평범해졌듯이 작품도 평범해진 것이다.
<대구 머리 요리를 먹는 자화상>은 뭉크가 77세에 그린 작품이다. 식탁 위에 대구 머리 요리를 놓고 나이프와 스푼인지 포크인지를 든 뭉크가 앉아 있다. 배경은 푸른색과 녹색으로 칠해져 있다. 대구 머리는 퀭한 눈과 흰 색깔로 인해 왠지 해골 같은 느낌을 준다. 주목할 것은 뭉크의 시선이다. 뭉크는 요리를 보지도, 그렇다고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자를 보지도 않는다. 화가의 시선은 요리 접시를 지나 식탁의 끝이나 맞은 편 벽쯤에 해당하는 어떤 장소를 바라보고 있다. 골똘히 응시하는 것도 아닌,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자신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되돌려 보는 것이지, 아니면 순간 떠오른 어떤 생각의 실마리를 더듬는 것인지. 그 표정은 바로 “오래 들끓다 식어가는 웅덩이” 같다. 뭉크는 그로부터 4년 뒤,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시에서 뭉크를 암시하는 어떤 단어도 상징도 넣지 않았다. <대구 머리 요리를 먹는 자화상>에서 ‘대구’를 따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 시에서 굳이 뭉크를 찾을 필요는 없다. 다만 저녁이 주는 밝음과 어둠, 편안함과 불안 같은 양면적 감정을 드러내고자 했다. 단란한 식탁과 푹신한 의자, 따스한 자리와 포크와 살충제, 낮고 축축한 살갗의 충돌.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