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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와 동시

[스크랩] 명사초대석 -윤수천 시인

작성자함영연|작성시간23.12.09|조회수104 목록 댓글 1

 






먼 곳, 먼 사람

                                            윤수천
 
 

먼 곳은 나를 설레게 한다
먼 하늘
먼 지평선
먼 바다
 
먼 사람은 나를 그립게 한다
먼 이름
먼 얼굴
먼 입술.
 
 
 
 
 
12월 앞에서


 
저무는 것은 세월만이 아니네
함께 살아온 당신의 그림자도 저무네
우쭐대던 여름날의 푸름도
기활 좋던 다리의 근육도 풀리는
12월
 

마지막 한 잔의 술을 마저 따르고 나면
떨리는 손만큼 저려오는 회환과
타는 노을빛 속의 저 강물
당신의 눈물을 보네
 

아, 돌아보지 말게나
인생은 누구나 빈껍데기
두고 갈 것은 봄날의 추억뿐
그리운 것들아!
아름다운 것들아!
 
 


 

가을이 오면

 

지상에 머무는 동안
우린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람과 헤어지지
그 가운데서 누군가와는 사랑도 하지
잠시뿐이지만 눈부신 사랑도 하지
아, 이렇게 잎 지는 날이면
그 사람이 생각나
촉촉이 젖은 눈빛이 그리워
마지막 주고 간 입술이 그리워.
 

   
 
 
 
공사工事없는 세상을 위하여


 
집을 나서면 도로 곳곳에서 마주치는
저 ‘공사 중’이란 팻말.
하루에도 수없이 만나는 저 지긋지긋한 팻말.
 

공사 중 팻말 때문에 우린 가까운 길을 놔두고
이리저리 돌아서 가기도 하고,
어느 땐 공사 중 팻말 때문에
만날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이 안타까움.


왜 우리가 사는 도시에는
공사를 해야 할 곳이 이리도 많은가.

 

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저 산을 보아라.
꽃들이 지천으로 피는 저 들녘을 보아라.
산과 들엔 공사 중 팻말이 보이지 않는다.
밤하늘엔 공사 중 팻말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이 무례한 공사 중 팻말 앞에서
공사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고향은


 한 번 떠나온 고향은 가지 않아야 한다
가지 않아야 고향은 옛 모습 그대로 거기 있다
버들강아지 노래하는 시냇물
황소울음 퍼지는 언덕
아이들 줄달음치는 동구 밖 길

가지 않아야 친구들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 거기 산다.
 
 
 
 
 
따뜻한 밥

 
 
우린 아무나하고 밥을 먹지 않습니다
둘이서 먹는 밥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부부는 평생 밥을 같이 먹는 사이입니다
 
마주 앉아 먹는 밥은 따뜻합니다
마음을 나누며 먹는 밥은 더욱 따뜻합니다
서로를 위로하며 먹는 밥은 더더욱 따뜻합니다
 
살다 보면 속이 상할 때도 있지요
살다 보면 미울 때도 있지요
그럴 때일수록 밥을 먹어야 합니다
따뜻한 밥한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알고 보면 행복이란 것도
따뜻한 밥 한 그릇에서 피어나지요
 
부부는 평생 밥을 같이 먹는 사이입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서로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되어주는 거지요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식지 않을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되어주는 거지요.
 
 



먼 훗날에도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이토록 좋아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감사해야 할 일인지
 
먼 훗날에도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까
오늘처럼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아니, 잠깐만이라도 스쳐지나갈 수 있을까
저 들녘의 바람으로라도.
 
 
 
 
 
 
고마운 바람

 
집안에만 틀어박혀 글만 쓰지 말고 가끔은
산에도 다녀와야 한다는 친구의 꾐에 넘어가
오랜만에 가을 산행에 따라나섰겠다
 
그런데 웬걸 그게 아니다
몇 걸음 못가 숨이 턱을 치민다
허, 이거 큰일이로구나
까마득한 산정을 올려다보는데
누가 등을 떠밀며 속삭인다
“어서 오르게나. 뒤는 돌아다보지 말게.”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말에
나는 발등만 내려다보며 육신을 옮겼다
 
바위 사이로 산꽃들이 얼굴을 내밀고
비탈에서는 돌멩이들이 굴러내린다
산까치의 울음소리가 수정처럼 맑은 한낮
어디선가 내 어린 날의 푸른 기차소리가 들린다
 
아, 여기까지 왔구나
산정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누가 등을 밀어주었을까
슬그머니 뒤를 돌아다보니
“날세, 힘이 부치거든 언제라도 부탁하라구.”
바람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고래


 
어릴 적 내 가슴 안에도
고래 한 마리가 살았네
푸른 몸집의 눈부신 고래가 살았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고래가 보이지 않았네
고래의 숨소리만 간간이 들렸네
 
아, 나의 고래는 지금
어느 바다를 헤엄치고 있을까
 
나는 오늘도 바닷가에 나와
먼바다를 바라보네
허연 머리와 주름투성이 얼굴로
먼바다를 바라보네.
 
 
 
 
 
못에 대하여

 
 
벽에 못을 치다 보면
고분고분 잘 들어가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들어가다 말고 슬며시 몸을 비트는 녀석도 있어
 
젊었을 적엔 그런 녀석을 보면
저 바보 좀 보게, 하고 놀렸지만
나이를 먹은 뒤론 그러지 않아
 
남의 살을 헤집고 들어가는 게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저랬을까 싶거든.




윤수천

충북 영동 출생
.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1976).
시집 늙은 봄날, 당신 만나려고 세상에 왔나 봐.
동화집 꺼벙이 억수》 《고래를 그리는 아이.
현재 초등 4-1 국어 교과서에 동화 <할아버지와 보청기> 수록.
2023년 제2회 이창식수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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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도식마르티노 | 작성시간 23.12.10 두고두고 음미하면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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