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여(西餘) 민영규 선생의 「담론 노트」 중 일본관계 기사 사기(私記)
김호성 / 동국대 교수
서여 선생님과 나
서여 민영규(1915-2005) 선생님은, 이제야 고백하지만 제가 젊은 시절에 사숙(私淑)했던 선생님 중의 한 분입니다. 사숙이라고 하면,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분의 글을 통해서, 마음 속으로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무렵까지의 일입니다.
애당초 서여 선생님을 알게 되는 데에는 아마도 장봉(莊峰) 김지견(1931-2001) 선생의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직접 소개를 해주신 것은 아니지만, 이 분은 뵈올 때마다 이런 저런 공부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분인데 --- 세속적인 대화는 거의 없고, 당신이 공부하는 내용을 말씀해주시는 분으로는 저의 기억에는 유일합니다 ---, 서여 선생님 말씀을 자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서여 선생님의 책을 찾아서 읽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서여 선생님은 출판된 저술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 『예루살렘입성기』(연대출판부, 1976)라는 여행기 하나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 책을 구해서 읽었고, 지금도 제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저는 송광사에서 나오는 사보 『불일회보』의 기자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은 직접 서여 선생님을 인터뷰해서 『불일회보』에 글을 쓴 일도 있습니다.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자택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야부끼 게이끼(矢吹慶輝, 1879-1939)의 『삼계교의 연구』(학술원 은사상 수상)라는 책을 펼치셔서 우리의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이라는 말이 원래는 삼계교에서 유래한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제가 이런 저런 일을 여쭈었는데, 그 중에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선생님, 왜 책을 안 내시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였습니다. "내가 아직 살아 있잖아"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내가 쓴 많은 글들을 보완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을 내놓게 되면 고정되지 않느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은 이미 정년퇴직 하신 뒤였습니다. 참으로, 학자의 완벽추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선생님의 글이 전집으로 나옵니다. 제자이신 조흥윤(한양대) 교수의 간곡한 청과 주선으로 나온 것입니다. 『강화학 최후의 풍경』과 『사천강단』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이미 제가 복사를 해서 읽은 것들이 태반을 넘었습니다. 전집으로 나온 것을 다시 한번 더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집들은 이제는 제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누구를 주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장봉 김지견 선생은 저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고 좋아하였습니다. 늘 격려를 해 주셨고요. 하지만 서여 선생님은 직접 찾아뵙고 다니지 않고, 그저 '사숙' 수준이었기에, 아마도 선생님은 저를 '오당(吾黨)' --- 도서관학 하는 사람들을 서여 선생님은 '오당'이라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에서는 『원형석서』의 저자 고칸 시렌(虎關師鍊, 1287-1346)스님이 이 말을 썼습니다. 다른 의미이지만 말입니다. --- 의 하나로 생각은 못하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장봉 선생님으로부터 많이 받았지만, 저는 서여 선생님을 더욱 따랐습니다. 그러나 학자는 스승이 간 길을 따라서 걸어가지만, 언젠가는 그 스승의 길과 갈라지게 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학자는 탄생합니다. 새로운 학문은 출발합니다. 그래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갈라짐은 저의 책 『경허의 얼굴』(불교시대사, 2014) 첫 번째 논문에서였습니다.
경허에 대해서 쓴 글 중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미문은 장봉 선생님의 글 「경허당 산고(散稿)」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그 뿌리가 서여 선생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서여선생의 그러한 생각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만, 글로써 결정된 것은 「경허당의 북귀사(北歸辭)」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분 사제의 글을 비평했습니다. 비평은 비판과는 다릅니다. 비판은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나 비평은 긍정적인 것은 인정하면서 수용하고, 부정적인 것 --- 혹은 동의하지 않는 것 --- 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양면을 다 고려하는 것을 비평이라고 저는 말합니다.
서여 선생이 불교사를 바라보는 것은 역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입니다. 불교사를 철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여 선생은 철학자입니다. 근래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진정한 철학자는 시인이고, 진정한 시인은 철학자라고" 말입니다. 철학자와 시인, 모두 직관적인 것이 있습니다. 창조적으로 상상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여 선생님이나 장봉 선생님은 모두 시인이고 철학자입니다. 시인 철학자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은 사상을 두고서, 사상사를 두고서 시를 씁니다. 철학을 합니다. 그분들의 글은 모두 산문이라도 시입니다. 그만큼 시적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되기를 노력합니다. 역사를 철학하고, 그를 통해서 얻은 통찰력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저의 꿈입니다.
어떤 점에서 제가 서여 선생님이나 장봉 선생님과 갈라지는지는 『경허의 얼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 책 이후에 저는 『경허집』(한암육필본)도 갖고 있지 않고, 『한암일발록』고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 누군가에게 선물하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연말에 민족사 윤창화 사장님께서 이 『서여 사랑방 작은 인문학』(조흥윤 정리, 엮음, 민족사, 2015)이라는 책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담론노트」가 있었습니다. 서여 선생님 말씀을 제자이신 조흥윤(한양대) 선생이 기록한 어록입니다. 그 부분을 정독하였습니다. 오류 오자가 많은데, 16곳을 적어서 윤창화 사장님께 보냈습니다.(이후 2군데 더 발견!) 그러한 곳은 잘못된 사실의 확인일 뿐이고, 서여 선생의 생각에 대해서 저의 생각을 피력한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은 너무나 방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시기에 감히 저는 다 따라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 부분은 앞으로 인연이 된다면 공부하기로 하고, 우선 근래 저의 관심사인 "일본, 혹은 일본불교" 관계 기사에 대해서만 저 나름의 주석을 사기(私記)의 형태로 붙여두고자 합니다.
일본관계 기사 사기
1. 향적사香積寺는 정토계인데, 일본인들이 절 하나 지어주고는 정토종 2조로 불리는 선도善導와 일본 정토종 개조인 법연法然이 서로 마주보며 대면하는 대형 족자를 그려 걸어 놓은 것이다. 이런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일본에는 망월望月의 계통을 비롯하여 세 가지 정토종이 있다.(93쪽)
사왈(私曰) : 향적사라는 절이 중국의 어디에 있는 절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선도스님을 정토종 2조라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부터 치면 담란->도작->선도의 맥이므로 3조라고 하든지, 아니면 그 위에 인도를 넣어서 생각하면 용수->천친(세친)을 더 넣어서 5조라 말해집니다. 그런데 더욱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정토종에서도 그런 법통설을 말은 하는데 아무래도 선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선종만큼은 아닙니다. 선종에서는 사이사이가 뜨게 되면 원사(遠嗣)와 같은 방식으로 족보를 정리합니다. 정토종에서는 그런 것은 없이, 그저 정토종에 큰 공로가 있는 분들을 시대 순으로 말할 뿐인 것 같습니다. 정토신앙의 본질은 그 중간이 중요하지 않고, 아미타불과 나 사이의 핫라인 형성이 중요하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일본 정토종 개조 호넨스님은 선도대사의 저술 『관무량수경소』를 읽다가 자신의 길을 찾았습니다. 오직 염불만 하자는 전수(專修)염불의 입장을 선택합니다. 그러니 선도대사가 너무나 고마운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꿈에서도 만납니다. 그 두 분이 꿈에서 만나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아마도 향적사에서도 그런 그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 정토종의 입장에서는 향적사 - 아마도 선도대사가 주석하였던 - 가 너무나 고마운 고향 같은 절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뭔가 집이라도 하나 지어놓고, 호넨스님과의 인연을 그린 그림이라도 걸어놓고 함으로써 일종의 '뿌리찾기'를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불교에서는 정토종 말고도 천태종이나 조동종이나 다 그런 일을 합니다. 그것을 서여선생 말처럼, 굳이 "아름답지 못하다"라고만 평가해야 할지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망월의 계통을 비롯하여’ 라는 말은, 뭔가 오류가 있는 듯 합니다. 다 아시다시피, 일본의 정토문에는 정토종, 정토진종, 그리고 시종이 있습니다. 그 세 종파의 조사들 중에 ‘망월’을 성으로 가진 분은 없습니다. 어쩌면 이때 서여 선생님께서는, 정토종 출신학자로서 정토교에 대한 저술을 남긴 모치즈키 신코우(望月信亨)이 언급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망월불교대사전』의 편자입니다.
2. 회창파불會昌破佛 때 임제는 하북河北 절도사 밑에 있었다. 원인圓仁의 기록에 저간의 사정이 밝혀있다. 우이 하쿠주(宇井伯壽)의 『선사상사 연구(禪思想史硏究)』에는 피모被毛나 이류異類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다. 야나기타 세이잔(柳田聖山)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에서는 그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끝에 가서 어록語錄만 열거, 번역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무의미하다.(100쪽)
사왈 : 피모는 피모대각(被毛戴角)의 줄임말이고, 이류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의 줄임말입니다. 피모대각은 털을 뒤집어쓰고 머리에 뿔을 인 것을 말합니다. 짐승을 가리키는 형용입니다. 이류라고 하는 것 역시, 인간과 다른 부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역시 짐승을 가리킵니다. 육도윤회에서는 짐승, 즉 축생이 있습니다. 축생이 된다는 것은, 즉 다음 생에서 짐승이 된다는 것은 피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 피해야 할 길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살이겠지요. 그러한 길이야말로 종교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삼계교가 그렇고, 선종의 흐름 중에서는 임제선에서는 "입전수수(立전垂手)"가 있고 --- 서여 선생님의 이번 책에서는 ‘입전수수’라는 말이 안 나옵니다. 임제종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 애써 피한 것인지 어떤지는 좀더 알아볼 일입니다 ---, 조동종의 흐름에서 피모대각이니 이류중행이라고 하는 말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에서 피모대각과 이류중행이라는 말을 쓴 대표적 저술이 일연(一然, 1206-1289)스님의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이고, 그에 뒤이어서 매월당/설잠(1435-1493)의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가 나옵니다. 이 책들은 둘 다 서여선생이 재발견한 책입니다. 선생님은 스스로 이 두 권의 책을 지은 저자들, 즉 일연과 설잠의 재발견자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서여선생님이 말하는 선종사 연구라는 것은, 피모대각과 이류중행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와 관련된 것, 그와 정신적으로 통하는 것을 선생님은 중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선종사 연구서에서는 그런 것이 중시되지 않고 있다는 불만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일본 만이 아니라 서여 선생님 외에는 부각시키지 않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일본에서는 그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다"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의 선종 전통은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임제종이고, 또 하나는 조동종입니다. 둘 다 천태종에서 발원하지만, 임제종은 에이사이(榮西, 1141-1215)가 개조이고 조동종은 도겐(道元, 1200-1253)가 개조입니다. 이들 둘은 모두 천태종으로부터의 반발입니다만, 그 의미에는 국가불교, 권력과 가까이 하는 불교로부터의 탈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점은 임제종 보다는 도겐의 조동종이 더욱 더 올곳습니다.
하지만 이 선종들에서는 저 밑바닥 민중들까지 가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정토종입니다. 그러니까 서여 선생님이 기대하는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서 더불어함께 하는 피모대각과 이류중행의 불교는 일본에서는 선종 계통이 아니라, 정토종 계통에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쿠야(空也, 903-972)스님이 그렇고, 호넨(法然, 1133-1212), 신란(親鸞, 1173-1262), 그리고 잇펜(一遍, 1239-1289)스님이 다 그런 분들입니다. 이렇게 이류중행하는 스님들을 일본에서는 '히지리'(聖)이라 불렀습니다. 저자거리로 내려 오신 성인이라는 뜻이지요.
저는 『경허의 얼굴』에서 경허를 히지리의 한 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었던 것도, 일본불교를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서여 선생님은 선 중심으로 생각하신 분입니다. 일본불교 안에서도 정토종의 흐름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랬더라면 더욱 기뻐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3. 위당은 정만조鄭萬朝와 8촌간으로 그의 덕을 본 적도 있다. 그는 30세 전후에 대신(대제학)으로 일본에 2-3주 가서 경도학파京都學派도 만나보았다.(106쪽)
사왈 : 여기서 일본으로 가서 교토학파를 만났다는 분이 정만조인지 위당인지 애매모호합니다. 누가 되었든지 이 관계 자료가 좀 더 발굴되었으면 합니다. 교토학파의 누구와 교류를 했다든지, 아니면 교토학파의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4. 오늘날의 선종禪宗은 "선산善山장에서 갓 쓴 이만 보면 아버지라 부는 아이" 꼴이다. 야부끼(矢吹慶輝)는 정토종이다. 그래서 종통적이다. 예컨대 "당시 천태天台, 삼론三論 등이 삼계교에 동정적이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곤란하다. 동조적同調的이었다고 했어야 했다.(110쪽)
사왈 : 이 말씀도 매우 애매합니다. 앞 부분과 뒷 부분이 다른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앞의 선종이야기와 야부키가 종통적이라는 것은, 종통적인 것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이후의 이야기는 단순히 야부키가 '동조적'이라 하지 않고 '동정적'이라 말한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더욱이 혼란스러운 것은, 야부키가 정토종이기 때문에 마치 종통적인 것처럼 서술된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정토종 소속이라서 더욱 종통적, 즉 법통설 같은 것에 예민했다고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아마도 선생님의 말씀을 메모했다는 특성상 그 사이사이에 뭔가 많은 말씀이 잘린 것 같기도 합니다.
5. 일연의 『중편조동오위』는 성종 때 일본에 건너갔을 것이다. 성종 연간에 일본 승려들이 근 100차례나 왔다. 일본은 고려 이래 한국에 와서 "대장경" 등을 극심히 요구했다. 경비가 또 심했다. 성종은 심지어 겨안을 주라고 했을 정도였다. '한일문화교류사'의 큰 주제다. 『조동오위요해』는 그때 준비 중이었다.(115쪽)
사왈 : 성종 때 근 100차례나 일본 승려들이 왔는지, 저로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조선시대에 일본으로부터 대장경 요청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귀찮아서 경판을 주어버리자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도 그렇습니다. 이 분야에는 카이(貝)라고 하는 일본 북쿄(佛敎)대학 교수님의 논문이 있습니다. 우리 학교와 공동연구를 통해서,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고려대장경의 연구』라는 책에 실린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계환스님과 정승석 교수가 동참해서 만들었던 책입니다.
6.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의 어휘와 언어가 경허와 상통하였다.(123쪽)
사왈 :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 ---」를 보면,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 역시 민중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침략주의적 성격 역시 있습니다. 침략주의 법화신앙의 단체 국주회(國柱會) 회원이기도 하였습니다.
7. 마츠모토 분자부로(松本文三郞)는 "속장경續藏經" 편이었다. "고려대장경"도 내려다 보았다. 수기守基도 낮게 평가하였다. 워낙 깐깐하고 또 최고로 깐깐하여 학위를 안 주었다.
<인도불교 최후의 광경>이 그의 논문집 중 한 편으로 나와 있다. 꽤 장편이다. <강화학 최후의 광경>이라는 내 논문 제목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그는 가나자와(金澤) 출신이다.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도 마찬가지다. 경도대학(京都大學)을 만든 이 가운데 한 사람이다.(124쪽)
사왈 : 마지막 부분, "경도대학을 만든 이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는 말은, 스즈키 다이세츠가 아니라 마츠모토 분자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좀 애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스즈키 다이세츠는 정토진종 대곡파의 종립대학인 오타니(大谷)대학 교수를 했습니다.
8. 일본불교는 불행히도 662년 이후 현수賢首의 체제불교가 된다. 일본 정토종이 타력他力인데, 경허당은 자력自力이다.(131-132쪽)
사왈 : 662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수의 체제불교는 현수에게서 볼 수 있는 체제불교라는 의미이겠습니다. 일본불교가 실제로 현수에게서 볼 수 있는 체제불교였는지 알 수 없으나, 국가불교였으니까 그렇게 체제불교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한 체제불교, 즉 국가불교로부터 벗어나서 민중에게 한없이 낮게 다가간 것, 즉 이류중행을 한 것이 곧 타력의 정토 불교입니다. "일본 정토종은 타력인데, 경허당은 자력이다."라는 말씀이, 일본 정토종이 타력이고 경허당이 자력이라는 차이는 있어도 그 둘에서 공히 이류중행을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라면 대단한 것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서여 선생님에게서 일본 정토종 전통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미약합니다.
9. 1895년 을미乙未년, 일본 조동종의 젊은 승려가 고종 앞에서 조선 승려의 경성京城 4대문 출입을 놓고 호령을 한다.(153쪽)
사왈 : 조동종이 아니라 일련종입니다. 이른바 '도성출입해금'을 건의한 것인데요. 일련종의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건의한 것입니다.
10. 고려 광종光宗이 법안法眼의 제자로 수십 명을 보내 배워오게 했으나 저들은 일본의 천동天童에게서 배웠다. 일본 조동종의 시조라는 도겐(道元)은 그 말류末流이다. 그는 천동을 하늘같이 모셨다. 도겐의 조동종은 지관타좌 只管打坐의 실천불교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조동오위'를 못 보게 했다.
사왈 :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우선 서여선생님의 선종사가 갖는 의미는 전복(顚覆)에 있다고 봅니다. 종래의 법통설이 허위라는 것을 드러내고, 신화를 해체(解體)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좋습니다.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현재까지 정통으로 내려온 법통이 허구라는 점을 깨부수는 데는 힘을 기우렸습니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법통 이라는 제도가 비본질적이고 권력적인 것이며 선적(禪的)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본류와 말류가 구별된다면, 그러한 생각은 여전히 법통설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저는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차근차근 생각해 봅니다. 우선 명백한 오류가 하나 있습니다. "일본의 천동에게서 배웠다"는 잘못입니다. 중국에 일본의 천동이 갈 수 없지요. "일본의"라는 말은 삭제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천동은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스님으로부터 하도 많이 비난을 받았기에,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잘 알려진 천동정각(굉지, 天童正覺/宏智, 1091-1157 )이 아닙니다. 천동여정(天童如淨, 1163-1228)선사입니다. 여정선사가 도겐스님의 스승입니다.
도겐스님의 스승 천동여정선사는 대혜종고선사와 같은 분이 아닙니다.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권력지향적이 아닙니다. 철저히 권력추구를 방하착하도록 가르칩니다. 도겐스님이 귀국할 때, 그 점을 간곡히 타이릅니다. 물론, 도겐스님 자신이 이미 일본에 있을 때부터 그런 자세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제가 만난 것도 계합(契合)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법정(法頂, 1932-2010)스님을 울립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선과 문화』 창간호에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지금 서여선생님은 도겐스님이 말류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이류중행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도겐스님은 정토종의 스님들만큼 민중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이류중행을 강조하는 맥락에 탈(脫)권력적인 측면이 있다고 본다면, 그 점은 도겐스님이나 여정선사와 통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 점에서 서여선생님을 통해서 이류중행을 높이 평가하게 된 저로서는, 일본의 도겐스님이나 정토계통의 스님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같은 조동종 안에서인데,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도겐스님이 "조동오위를 못 보게 하였다"는 점에서 못 마땅하게 생각하신다면 할 수 없습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중국의 조동종에서도 조동오위를 중심으로 한 흐름과 여정선사 -> 도겐스님과 같은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도겐스님 마음이 이해됩니다. 그분은 "지관타좌(只管打坐)"를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으로써 깨달음과 수행이 하나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신심탈락(身心脫落)"입니다. 신심은 아(我)를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탈락은 곧 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탈락은, 선가에서 흔히 하는 말로 "통 밑이 빠지는" 것입니다. 신심탈락은 자기해체이고 자기부정입니다. 이류중행하고 피모대각할 때 자기가 해체되지 않고서 그냥 남아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저는 ‘조동오위’를 안 읽어보았습니다만, 장차 읽게 되면 조동오위와 이류중행이 반드시 같이 가야 하는지 그 관계를 한번 살펴볼 생각입니다. 서여선생님은 같이 가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로서는 그 양자는 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11. 경허당은 무언가 남길 수 없는 이다. 그에 비해 일본 도겐(道元)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은 70 몇 권을 100권으로 채우려 했던 것이다.(175쪽)
사왈 : 그렇습니다. 경허는, 파계 이후 원효(元曉, 617-686)가 걸었던 길을 갔습니다. 그도 북행하기 전에는 글을 많이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로는 시 외에는 전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허집』 하나 정도로 묶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의 생산은 정주(定住)해야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도겐스님은 의상(義相, 625-702)스님 같은 분입니다. 정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맺음말
앞으로 서여 민영규 선생님과 같은 학자는 안 나옵니다.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학자는 대학에 몸을 담을 수밖에 없는데, 지금 대학의 구조가 서여 선생님의 학문방법론이나 학문적 태도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걸친 그 당시, 제가 서여선생님 글을 복사해서 읽고 다닐 때와 같은 열정이나 사모의 염은 이제는 많이 엷어졌습니다. 하지만 모처럼 선생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선생님 연표에 보면, 1939년에 연희전문을 졸업합니다. 그리고 1941년 12월 일본 대정大正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42년 4월에는 대정대학 사학연구실의 부수(副手, 현 전임강사)로 근무합니다.(225쪽) 그 당시의 사정을 좀 자세히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 당시 일제 하에서 사셔서 그런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지금 제가 일본불교를 생각하는 것과는 다소 다른 것같습니다. 그런 다름이 일본불교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우리 불교의 이해나 중국선종사의 이해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몇 가지 소견을 사기 -- '사왈'이라는 형식은 보조지눌스님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 활용되는 방식입니다 -- 를 붙여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직계제자분들이나 다른 동학, 연구자들의 비평을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2016년 1월 1일)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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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우천1 작성시간 16.01.02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사왈은 私가 아닌 師로 자꾸 읽혀지려고 합니다. 고문의 문법 사왈보다는 평왈 논왈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천 이성운 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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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호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1.02 아, 그렇습니까? 제목에 "비평"이라고 하려니, 어른 글이라서 좀 예의가 아닌 듯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사기'라고 했는데, 사기에는 지눌스님이 "사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최초에는 그 한자를 괄호 속에 넣었습니다. 계속 넣기도 그렇고 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이해해 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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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호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1.02 수정본을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