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 선생의 책 "나무아미타불"의 가장 큰 특징은 정토종 호넨스님, 정토진종 신란스님, 그리고 시종의 잇펜스님을 각각 종파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종래 정토종은 호넨스님만 말해왔고, 정토진종은 주로 신란스님만 말하면서 가끔 호넨스님을 이야기하는 정도였고, 시종은 잇펜스님만을 말해왔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조사들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데 야나기는 이 세분을 밀접하게 관련짓습니다.
한 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호넨스님 없이 신란스님과 잇펜스님은 없으며, 신란스님 없이 호넨스님과 잇펜스님도 없으며, 잇펜스님 없이 호넨스님과 신란스님도 없다는 것입니다. 호넨스님이 없었다고 한다면 신란스님과 잇펜스님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명약합니다. 또 잇펜스님이 없었다고 한다면, 호넨스님과 신란스님의 가르침이 궁극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도 야나기 선생의 관점에 따른다면, 맞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란스님이 없었다고 한다면, 과연 호넨스님과 잇펜스님이 없었을 것인가 하는 점은 쉽게 설명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역시 일리 있는 평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란스님은 스스로는 호넨스님의 가르침을 잇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호넨스님과 잇펜스님 사이에서 그 두 스님이 다시 만날 수 있는 데 중간매개가 되어준 것이 신란스님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나기 선생의 관점은 변증법적으로 일본 정토사상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중간매개 역할을 하게 되는 신란스님입니다. 변증법에서는 정, 반, 합의 전개과정을 보입니다. 정은 정토종의 호넨스님이고, 반은 정토진종의 신란스님입니다. 이 관계는, 비록 스승 호넨스님에 대해서 한없는 감사와 순종의 뜻을 신란스님이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분의 정토신앙에 있어서의 차이 역시 지적됩니다. 차이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행과 신의 문제에서입니다. 이 때 행은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이고, 신은 염불 이전에 대한 믿음입니다. 염불 이전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아미타불의 본원이고, 그 본원 - 18원 - 속에 담겨져 있는 아미타불의 자비, 중생에 대한 사랑을 수용하고 믿는 것입니다. 종래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정토신앙, 그리고 호넨스님의 정토신앙에서는 아미타불에 대한 중생들의 응답으로서 행, 즉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정토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란스님에 이르러서 이러한 시각은 역전됩니다. 중생이 극락을 향해서 앞으로 앞으로 노래 부르면서 나아가는 대신에, 그것을 강조하고 나서는 대신에, 그에 앞서 아미타불이 우리 중생들을 향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오신 것에 눈을 주게 됩니다.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런 신심이야말로 정토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행과 신의 문제는 문제꺼리이기는 합니다. 야나기 선생이 "나무아미타불" 제15장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논리는 변증법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이해 속에서 본다면, 호넨스님의 행은 정이고, 신란스님의 신은 반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합은 잇펜스님의 염불사상에서 회통이 됩니다. 과연 잇펜스님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중생으로부터 아미타로 나아가는 방향도 아니고, 아미타불이 중생으로 나아오는 방향도 아닙니다. 그 어느 경우이든지, 문제는 중생과 아미타불이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대립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신란스님의 경우에는 믿음 속에서 중생을 지우고 아미타불만 남겨놓는 측면이 있지만 역시 이원적이기는 합니다. 일본 동양대학 총장 다케무라 마키오(竹村牧男) 교수의 "신란과 잇펜"을 읽고서, 저의 독후감 중 하나는 "신란스님이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하는 점입니다.
신의 불교를 확립하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고뇌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비하면 잇펜스님은 너무나 편한 길을 갔습니다. 고생 하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신란스님이 문제로 삼았던 "믿음"의 문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 알다시피, 구마노의 신으로부터 현몽을 받을 때, 그 신이 말했던 것입니다.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깨끗하냐 깨끗하지 않느냐"를 문제삼지 말고, 그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라(권유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잇펜스님에게는 중생이 부처를 향해서 가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부처가 중생에게 오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다 내다버리고서 오직 "나무아미타불"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리는 것 속에서, 부처도 존재하지 않게 되고 중생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것은 오직 "나무아미타불"만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잇펜스님 역시 "나무아미타불"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것은 호넨스님의 행, 즉 호넨스님 역시 강조했던 "나무아미타불" 그 자체와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잇펜스님은 다시 호넨스님과 만나게 됩니다. 다만 하나 남는 문제는, 야나기 선생이 "나무아미타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신란스님에게서 염불의 위상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야나기 선생에 따르면, 신란스님의 불교는 믿음의 불교이므로 "나무아미타불"은 곧 감사의 뜻으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 나는 야나기 선생의 이야기를 다시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정토진종에서 염불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는지? 염불을 꼭히 감사의 뜻으로만 하는 것인지 하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정토진종 사람들에게 문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로서는 예를 들면, 정토진종 안에서도 "탄이초"에 대한 평가는 종파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같습니다만, "탄이초"를 보면 염불의 의미가 적극적으로 강조되고 있기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볼 때, 믿음과 행은 서로 이시(異時)적 사건인가? 아닙니다. 저로서는 동시(同時)적 사건일 수 있다고 봅니다. 믿는 순간, 아미타불의 본원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염(念)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신행동시(信行同時)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나기 선생은 신과 행, 즉 행과 신을 변증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야나기 선생의 생각과 다르게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생각하듯이 신행동시라고 한다면, 호넨스님과 신란스님, 그리고 잇펜스님의 상호관계는 변증법적이기 보다는 본질적으로는 같은 맥락이 아닌가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같은 맥락은 염불입니다. 결국 정토신앙은 "나무아미타불"로 회통할 수 있습니다. 잇펜스님이 다시 제시하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겉으로 본다면, 호넨스님의 "나무아미타불"과 같습니다. 이 점에서 호넨스님은 신란스님을 거쳐서 잇펜스님에게 이르러, 다시 호넨스님으로 되돌아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호넨스님이 신란스님을 거치면서 얻은 것은, 즉 달라진 것은 중생과 아미타불 사이의 거리를 없앴습니다. 믿음 속에서 중생은 아미타불과 하나가 되었고, 그 하나가 되는 바탕 위에서, 다르게 말하면 하나가 되는 그 자체로 아미타불을 염(念)하게 되었습니다. 야나기 선생은 이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잇펜스님에게서 절정을 이루었다고는 말하지만, 다시 호넨스님으로 돌아왔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신은 염이 되었고, 신과 염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비로소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염불을 하게 됩니다. 아닙니다. 염불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믿음 속에서 염불되는 경지를 거쳐서, 마침내 잇펜스님에게 이릅니다.
신행동시라는 말이 잇펜스님에게서는 곧 신행탈락(信行脫落)이라는 말이 됩니다. 신행탈락이라는 용어는 신행동시와 마찬가지로 제가 만들어 낸 말입니다만, 믿음이든 행이든 다 탈락되고 남은 것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뿐입니다. 그러므로 잇펜스님에게서 "나무아미타불"은 호넨스님의 "나무아미타불"과 겉은 같지만, 속은 다릅니다. 호넨스님에게 "나무아미타불"은 "나무"도 남아있고, "아미타불"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잇펜스님의 "나무아미타불"은 "나무"와 "아미타불"이 하나가 되어서, "나무"도 사라지고 "아미타불"도 사라집니다. 0도와 360도는 위치는 같지만, 그 질은 360도의 차이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결국 정토신앙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관경"에서 위제희 부인이 극락을 보고서 극락을 가고 싶다고 할 때는 '정토종'입니다. 하지만, 잇펜스님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제 '염불종'입니다. 그러므로 '정토종'으로부터 출발해서 '염불종'으로 가는 것이 정토신앙의 흐름이 아니었던가 저는 생각합니다.
잇펜스님은 신란스님의 믿음의 불교에 의해서, 극복되고 지양되었던 호넨스님의 행의 불교를 다시 되살리게 된 것으로 저는 봅니다. 다만 "오직 염불만 하라"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의 의미 --- 오직 "염불"만 하라 --- 가 호넨스님 때에는 횡적(橫的)이었습니다. 선이나 계율이나 다른 수행과의 선택지 속에서 오직 염불만을 선택해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잇펜스님의 '전수염불'은 종적(縱的)인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전수염불은 "오직" 염불만 하라, 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저는 야나기 선생으로부터 정토사상을 배웠습니다만 야나기 선생과 달라지는 부분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그 핵심에 "믿음"과 "행"의 문제가 놓여있고, 신란스님과 잇펜스님의 거리를 그렇게 넓게 - 반(反)적인 것으로 - 볼 필요가 있는가? 실제로 그렇던가? 하는 의문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좀더 연구해서 논문으로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만, 일단 현재로서는 제가 생각하는 정토신앙의 핵심이라는 생각에서 저의 사색을 풀어놓기로 한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