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스님들의 편지43-학명이 日 임제종 관장 소오엔에게
반농반선 가풍 일군
식민지의 선지식에
日 조실 스님도 조복
지난해 가난은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 가난은 송곳조차 없더이다.
(去年貧 無卓錐之地 今年貧 錐也無)
학명(白鶴鳴, 1967~1929)은 백파긍선의 7대 법손으로 10년간 명산대찰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공부한 선과 교에 두루 밝은 선승이었다. 특히 그는 1902년 본격적인 참선수행에 돌입해 뼈를 깎는 십여 년간의 정진으로 1913년 마침내 부처와 조사가 입명한 그 경지를 온 몸으로 체득하고 ‘백양산가’라는 긴 깨달음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런 학명이 일본에서 편지 한 통을 받은 것은 1914년 겨울 월명암에 주석할 때였다. 일본 임제종 총본산인 원각사(圓覺寺) 관장 소오엔(釋宗演, 1859~1919)이 보낸 것이었다. 편지봉투 안에는 달마대사가 갈대를 타고 강을 건너는 그림과 함께 ‘나는 묵은해를 보낼 터이니 그대는 부디 새해를 맞으소서(我送舊年 汝迎新年)’라고 정성껏 쓴 연하장이 들어있었다. 편지를 열어 본 학명은 빙그레 웃었다. 지난 일년간 이국천리를 떠돌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학명이 해외 고승들을 찾아 길을 나선 건 그해 봄이었다. 학명은 자신의 깨달음이 얼마나 올곧은지 확인하고, 또 위기로 치닫는 조선불교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명감에서였다. 그는 먼저 중국의 유명 수행도량을 찾아다니며 그곳 선원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중국 당대의 선지식이라는 비은 선사를 비롯해 많은 수행자들과 불꽃 튀는 법거량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학명은 일본에 소오엔이라는 세계적인 선승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곧 현해탄을 건널 것을 다짐했다. 소오엔은 소문처럼 교리에도 밝고 선기도 대단히 뛰어나 34세에 이미 우리나라의 조실격에 해당하는 관장에 오른 인물로, 스리랑카에서도 3년간 공부함으로써 대소승의 교학과 수행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특히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종교대회에 일본대표로 참석한 것을 계기로 서구에 선을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베르그송 등 세계적인 석학들과 토론을 벌여 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또 세계적인 선사상가 스즈키 다이세츠와 일본의 대문호로 훗날 일본 화폐에도 등장하는 나스메 소세키도 그의 제자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학명은 발우 하나 들고 소오엔이 있다는 교토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렇게 수십 일을 걸어 학명은 원각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소오엔은 원각사를 떠나 인근 묘심사(妙心寺)에 잠시 머무르고 있음을 알았고, 이에 학명은 다시 묘심사로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마침내 학명이 묘심사의 문을 두드렸을 때는 긴 여행으로 그는 스님이라기보다 걸인에 가까워보였다.
학명은 문을 막고 서있는 이들에게 소오엔을 만나러 왔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일본인 수행자들도 만나기 어렵다는 대본산의 관장이 말도 통하지 않는 식민지 조선의 선객을 쉽게 만나줄리 만무했다. 학명은 일본인들이 관장을 만나기 위해서는 7일간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 정진해야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고 그 즉시 사찰 입구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묘심사 승려들은 그런 학명을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고, 먹을 것은커녕 머리에 물을 쏟아 붓는 등 그를 내쫓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정좌를 하고 있는 학명은 마치 태산이라도 된 양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고 학명은 마침내 객승들이 기거하는 지객료(知客寮)로 안내됐다. 하지만 객실까지 왔다고 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거나 당장 관장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학명은 또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런 학명에게서 나약하고 피곤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 하루 이틀이면 슬며시 도망갈 거라 생각했던 묘심사 대중들도 나중에는 학명의 고고함과 기백에 극진한 존경의 예를 표했다. 그리고 열흘의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학명은 마침내 소오엔과 마주앉게 됐다. 그 자리에는 때마침 묘심사를 방문한 아사히신문 기자도 배석하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학명과 소오엔은 붓으로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다. 먼저 학명이 하얀 종이에 ‘白鶴鳴’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써 건넸다.
누더기 승복을 걸치고 있는 학명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오엔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이름은 흰 학인데 어찌 먹물 옷을 입었는고?’
학명이 곧 답을 썼다.
‘화상께서는 어디서 흰 학을 보셨소?’
그대가 보는 흰 학의 본성이 무엇이냐를 묻는 즉각적인 반론이다.
그러나 소오엔은 학명의 글을 받기가 무섭게 되받아쳤다.
‘산하대지 모두 흰 학의 자리 아닌 곳이 없으니 화상은 마땅히 학의 울음소리를 내어보시오?’
‘세계가 모두 흰 학뿐이라면 노화상께서는 어느 곳을 향해 안심입명(安心立命)할 수 있겠소이까?’
서슴없이 맞받는 학명의 답변에 소오엔은 움찔했다. 자신의 호흡이 덜꺽 그치는 순간 무엇을 할 것이냐고 되받아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갑을 앞둔 소오엔 또한 백전노장의 선승이었다.
‘안심입명하는 일이야 차 마시고 밥 먹는 일 같이 쉬운 것이니 화상은 향상일구(向上一句)를 어서 내놔보시오?’
학명은 흔들리는 소오엔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소나무가 늙고 구부러져 학이 깃들기 어렵겠소이다.’
깨달음을 논하는 자리에 무엇 하나 향상일구 아닌 게 있느냐는 날카로운 비판이었다. 소오엔은 학명의 선기(禪機)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좋은 일구요. 가히 외로운 학이 가을하늘에서 우는구료.’
그제야 학명도 서슬 퍼런 취모검(吹毛劍)을 내려놓고 ‘소승의 죄가 크오이다’라며 겸손의 예로써 한 걸음 물러섰다.
이에 소오엔은 그 자리에서 학명을 찬탄하는 게송을 지었다.
영산회상에서 일찍이 서로 만났더니
오늘 다시 찾으심에 도인의 용모 뵙는구나.
몇 마디 내지 않아도 그 뜻 알아 깨닫는지라
가을바람 부는 옛 절에 학의 일갈 쩌렁하구나.
(靈山會上曾相逢 今日再來見道容
未發片言意先解 秋風古寺鶴一聲)
두 사람의 법거량이 신문을 통해 일본 전역에 알려지자 학명을 보려는 사람들로 묘심사가 북새통을 이뤘고, 이에 번잡함을 꺼려하던 학명은 곧 귀국했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지 몇 달 뒤 소오엔으로부터 연하장을 받은 것이다. 학명은 잠시 후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전등록』에 나오는 향엄지한(?~914)의 게송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불이(不二)문중에 나와 너, 묵은해와 새해가 어디 있을까만 학명은 이를 모를 리 없을 대선사 소오엔의 글에서 자신에게 거는 기대와 신뢰를 보았던 것이다. 학명은 겉치레 인사보다는 주관과 객관이 무너진, 찰나의 번뇌조차 여읜 자신의 경계를 보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학명은 향엄이 앙산에게 견처(見處)를 보였던 게송과 함께 ‘봉래월명백학명(蓬萊月明白鶴鳴)’이라는 자신의 이름만 기입해 답장을 보냈다.
학명은 그후 소오엔이 예견했던 것처럼 농사를 지으며 화두를 참구하는 반농반선(半農半禪)의 독특한 선풍을 제창하고 몸소 실천함으로써 한국선종사의 한 획을 그었다. 또 교육사업과 함께 참선곡, 왕생가, 해탈곡 등 주옥같은 가사들을 남겼으며,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눈밭에 활짝 피어난 매화처럼 암울한 시대에 맞서 조선수행자의 기상을 만방에 떨쳤던 대선사 학명. 그는 소오엔이 입적한지 꼭 10년 되는 1929년 3월 27일 달마상 여섯 장을 그리고 고요히 앉은 채 시적(示寂)했다. 그가 세연을 다하던 날부터 호랑이가 3일 내내 애달프게 울었으며 한 줄기의 흰 광채가 서쪽까지 길게 뻗었다고 당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전 조계종 종정 서옹은 “백학명 대종사는 근세에 희유하신 대선장(大禪匠)으로 한국에서 불조명맥을 부흥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주유하시면서 한국선이 현대에 와서도 활발발하고 조사가풍이 지속적으로 융성함을 널리 과시하였다”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한밤 중 달 밝은데 흰 학이 울다가
동방에 해가 뜨니 멀리 날아가 버리도다.
한없는 구름바다 곧바로 뚫고 지나가니
맑은 바람 늠름하여 하늘과 땅 떨치네.
(夜半月明白鶴鳴 東方日出遠飛去
雲海無限直透過 淸風凜凜拂乾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2005-03-30/797호>

소오엔 스님이 직접 그려서 학명 스님에게 보낸 노엽달마도.

백학명 스님이 그리고 쓴 노엽달마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