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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유산"을 읽고(무상심)

작성자김호성|작성시간10.11.07|조회수116 목록 댓글 1

 

언제부턴가 독서는 그저 단조로운 내 일상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소품이었다. 그냥 그렇게 생활 언저리에 놓인 정물화의 배경 같은 것일 뿐, 내 삶의 풍광에 어떠한 떨림이나 흔들림의 의미를 줄 수는 없었다. 내 정신이 겉늙고 무미건조한 허물어짐에 대해 오래전에 이미 체념하고 살았던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러한 나의 무신경하고 무관심한 방관과 체념을 호되게 꾸짖는 채찍을 만난 것이다. 도대체 공허하기만 한 선(禪)문답과 공안, 그리고 납득이 안 되는 좌선 같은 것들이 우리의 무엇을 해결할 수 있는가. 굶주린 우리 창자에 어떤 배부름이 될 수 있으며 춥고 아픈 이 현실에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라는 끊임없는 회의와 불만과 울분에 대한 한 적절한 답을 얻었다고나 할까?

작품『겨울의 遺産』은 한․일(韓日) 혼혈의 아버지를 가진 일본인 다찌하라 마사아끼(玄原正秋)의 자전적(自傳的) 소설이다. 작품 속에 흐르는 사상이라든가 그 공간적․ 정신적 배경이나 작품 전편에 나타난 선시(禪詩), 선문답은 이 글을 선(禪)소설이라 규정하는데 약간의 주저도 없도록 해 주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은 주인공인 ‘나’가 여섯 살 때 무량사(경북 안동의 봉정사)의 승방으로 공부하러 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는 혼혈로서 조선말기의 양반출신이다. 한 때 교오또대학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군인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당시 무량사의 승려로 있었다. 나는 무량사의 큰스님으로부터는 사서오경 등 유교적 한문서적과 불경(佛經)을 공부하며 청안선사에게서는 선(禪)수행을 익히게 된다. 가끔씩 마주치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강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거나 지친 듯한 얼굴이다. 그런데 내가 무량사에 올라간 그해 겨울에 아버지는 배우고 익힌 것의 부질없음과 이 세상 모든 것의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음을 읊조린 시 한 수를 남긴 채 자살하고 만다. 그 후 내 삶을 줄곧 지배하는 것은 아버지의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상(無常)감이다. 그리고 너무 커서 알 수 조차 없는 것 같은 큰스님의 가르침과 비열한 것, 추한 것에 대한 용서없는 준엄한 시선을 가지게 한 청안선사의 가르침 등이 내 정신의 지주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후, 어머니의 모습은 눈에 띄게 부정한 흐트러짐을 보여주더니 마침내 재혼하여 일본으로 떠난다.

나는 구미에 사는 외숙에게 맡겨져 소학교에 다니는데,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놀림감이 되고 또 정신적 고독감과 무상감을 절실히 체험하게 된다. 그 후 외숙은 제주도의 병원으로 전출가고 이제 완전히 홀로 남겨져 2여년을 배고픔과 추위라는 물리적, 현실적 어려움과 싸우게 된다. 그러면서도 방학 때는 무량사의 승방에 올라가 생활하게 된다. 소학교 5학년 학기말에 비로소 나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어 무량사와 조선에서의 생활을 끝낸다.

일본에서 어머니와 동생을 다시 만나게 되긴 했지만 함께 지내진 않는다. 선사의 아내답지 못한 부정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이미 오래전에 지웠다. 그래서 또한 핏줄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나 안타까움뿐 아니라 원망까지도 물 흐름처럼 흘려보낸 것이다. 청년이 되고 장년에 들어서기까지 나를 굳건히 서게 하고 나를 지배하는 것은 선(禪)수행의 생활이다. 그러는 중 나는 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어머니의 죽음도 담담하게 맞는다. 그리고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 앞에서 나는 다시금 새로운 창조의 출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세상의 실상이 무상임을 알게 해준 아버지였지만, 그러나 그의 그 싸늘한 자살의 최후는 결코 공감할 수 없기에 아버지보다는 한 차원 더 초월된 인식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갈망으로 이 글을 끝맺는다.

앞의 줄거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소설은 매우 단순한 구성의 글이다. 특이한 갈등구조나 절박한 위기감이나 애틋한 사연 같은 건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이 지닌 강점이라면 역시 그 담백하고 은은한 깊은 향기의 여운이다. 어느 산사에서 처음 맛보았던 작설차의 잊을 수 없는 기억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가슴에 스미는 것이다. 영화 “벤허”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가슴 뜨겁고 격렬한 감명은 내가 비기독교인인 것조차 잊게 했던가? 그런데 『겨울의 유산』은 그와 너무나 대비된 감동으로 잔잔하고 담담하게 나를 사로잡고 만 것이다.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고통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아픔으로 신음하는 우리 현실과는 언제나 너무 먼 이야기로만 보여서 스스로 불자라 이야기하기가 망설여지곤 했던 회의에 찬 부끄러운 날들이 실은 내게 많았었다. 그런데 이제 이 나이에 와서야, 소학교 저학년 학생인 주인공이 생활로서 체득했던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것이다.

경전의 말씀과 내 현실, 선(禪)과 내 생활이 결코 분리 혹은 유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겨울의 遺産』은 1975년 신죠오사(新潮社)에서 간행 되었으며 1986년에 『하얀 겨울의 遺産』이라는 제목으로 김형숙씨가 옮긴 우리만 번역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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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호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1.07 일본불교사 공부방 제5에 실은 글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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