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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결사와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

작성자김호성|작성시간10.11.08|조회수211 목록 댓글 0

                             

 

  2007년은 현대 한국불교의 형성에 하나의 모태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받는 봉암사 결사 60주년이었다. 나 역시 평소 결사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봉암사 결사를 기념하는 세미나에서 발표를 요청받았다. 이를 계기로 결사에 대해서 내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다시금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을 결사라고 부르는가, 또 “결사정신으로 돌아가자”라고 하지만 실제 그 정신의 핵심은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스님의 정혜결사 정신을 살펴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 나는 「정혜결사의 윤리적 성격과 그 실천」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 적이 있다.

 

      ‘정혜결사’라고 약칭하더라도 본래 정혜결사가 삼학겸수(三學兼修)의 결사운

    동임을 간과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혜결사의 이념에 대

    한 이해사(理解史) 속에서 계학은 너무나 오랫동안 외면당해 온 감이 없지 않

    은 것이다. 교단의 윤리적 병을 고치기 위해서 계도 정도 혜도 하나의 약으로

    서 함께 처방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보조스님이 보셨던 교단의 윤리적 병은 무엇이었을까? 정혜결사의 논리적 이유를 담은 『정혜결사문』에는 여러 가지가 언급되고 있으나, 그 핵심은 명리(名利)의 병이다. “이양의 길에서 구구(區區)하며 풍진세상에 골몰하고”,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구하여 헛되이 세월을 보내면서”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명예와 이익, 또는 풍진세상에 골몰하는 것을 범상하게 이해해서는 아니된다. 명리라고 하는 불교의 술어를 현대어로 옮기면, 권력이 된다. 즉 보조스님은 권력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는 것이며, 권력의 길에 골몰하고 있는 당시 권승(權僧)들의 존재양식을 비판하고, 그와는 다른 길(=본래면목의 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혜결사가 일어나기 이전의 불교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고려사절요』 제12권, 명종 4년 정월의 기록이다.

 

      춘정월(春正月) 귀법사(歸法寺) 승려 백여명이 북문을 침범하여 선유승록(宣

    諭僧錄) 언선(彦宣)을 죽였다. 이의방(李義方)이 군사 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승려 수십여명을 쳐죽이니, 그 나머지는 다 흩어져 가버렸으며, 병졸들 역시 죽

    고 상한 자가 많았다. 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귀법사, 홍화사(弘化寺)

    등 여러 절의 승려 이천여명이 성의 동문에 집결하므로 문을 닫자, 성 밖의 민

    가를 불태워서 숭인문(崇仁門)을 연소시키고 들어와 의방형제를 죽이고자 하였

    다. 의방이 이를 알고 부병(府兵)을 징집하여 쫒아버리고 승려 백여명을 참살하

    였는데 부병도 역시 많이 죽었다. 이에 부병을 시켜서 각자 성문을 나누어 지

    키게 하여 승려의 출입을 금하게 하고, 부병을 보내어 중광사, 홍호사, 귀법사,

    용흥사(龍興寺), 묘지사(妙智寺), 복흥사(福興社) 등을 파괴하니 이준의(李俊儀)

    가 말했다. 의방이 노하여, “만약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일은 이루지 못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그 절들을 불태우고 재물과 그릇들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

    가는데, 승도들이 중간에 기다리고 있다가 마주쳐서 다시 빼앗아 갔으며, 부병

    들도 역시 많이 죽었다.

 

  이렇게 개경의 중요사찰들은 권력다툼의 와중에서 어느 한편에 편입되어 있었다. 사찰 자체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이익집단화되어 있었으며, 그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계율인 “불살생계”마저 어기는 일을 여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인가? 출가자의 참된 모습이라 할 것인가? 불교는 자기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불교는 방법론이다. “불교에 의해서”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갈 때, 불교는 삶의 기술(The Art of Living)이 된다. 이를 위해 불교는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면서 중생에게 봉사하자고 말하지 않던가. 결사정신의 핵심이 명리, 즉 권력의 길을 떠나는 것이라 주장하는 이유이다. 여기 ‘권력’은 세속권력과 교단권력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결사는 그 두가지 권력에의 길을 포기하고 본래면목의 길을 가자는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일본불교사에서도 『고려사절요』 제12권이 전하는 바와 같은, 권력화된 승단의 모습을 읽게 되었다. 바로 편자 미상의 역사소설(軍記物語)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오한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6)에서다. 『헤이케 이야기』는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의 세도가 다이라(平)씨 일가의 몰락과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源)씨의 등장과정을 그리고 있다. 불교적 입장에 서서 세속의 정치사를 서술하면 어떤 사관(史觀)으로 기술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범이라 해도 좋을 것같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저 유명한 오프닝 멘트 속에 잘 녹아있다.  

 

      기원정사 무상당(無常堂)의 진혼의 목소리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를 일

    깨워주고, 석존(釋尊)의 입적(入寂)을 지켜보던 사라(娑羅)나무 꽃들은 성자필쇠

    (盛者必衰)의 섭리를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듯 제 세상 만난

    양 으스대는 사람도 오래가지 못하니 권세란 한낱 봄밤의 꿈처럼 덧없기 그지

    없고, 아무리 용맹해도 결국은 죽고마니 사람의 목숨이란 바람에 흩날리는 티

    끌처럼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명문(名文)이 아닌가. 불교사관이 이렇다면, 그것은 다시 무상사관(無常史觀)이라 이름해도 좋을 것이다.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악행으로 비롯하여, 그 가문이 멸망해 가는 과정(남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을 그리는 이 역사소설에서도, 저 고려 때와 같이 승병(僧兵)들이 활약한다. 대표적으로는 천태종의 엔죠지(園城寺)나 나라의 사찰들이다. 이들 사찰은 기본적으로 관사(官寺)라고 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한다. 관승(官僧), 즉 공무원 신분을 갖고 있는 스님들의 거주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가짐을 정결히 하면서 천황가나 세도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의무였을 뿐, 일반 백성들에 대한 구제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니, 백성들에 대한 포교는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관승 사원 자체가 점차 권력의 향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 역시 거대한 하나의 권력집단이 되어갔던 것이다. 그 상징적 존재가 바로 ‘승병’이었다. 『헤이케 이야기』에 나타나는 승병들의 활약상 중에서, 역시 압권은 엔죠지 승병들과 다이라노 군사들의 싸움일 것이다. 모치히토 왕자가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치려다가(당시 이는 逆謀에 해당함), 일이 여의치 않자 엔죠지로 피신하였던 것이다. 엔죠지의 승도들은 모치히토와 뜻을 같이 하면서, 곧 들이닥칠 다이라씨의 토벌대를 맞이하여 일전을 불사하고자 한다. 물론, 그들의 항전에는 그들 나름의 명분이 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불법과 왕법의 쇠퇴가 실로 극에 달한 것같다. 기요모리의 횡포를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언제 또 기회가 오겠는가.” 하는 것이다. 엔죠지의 승도들은 승병들을 불러 모으고, 엔죠지를 요새화한다. “해자를 파고 방패로 방벽을 만들거나 목책을 두르는 등 대비”하였던 것이다.

 

      양군은 아침 6시에 효시를 쏘아 개전을 알린 다음 전투를 개시해 하루 종일

    싸웠는데, 승병들은 300명이나 전사하고 말았다. 야전으로 이어져 어두워 적이

    잘 보이지 않자, 다이라 군은 절에 불을 질렀다. ( --- ) 모두 합해 불당과 탑

    묘가 637채, 절 주변의 오쓰(大津)의 민가가 1,850여채, 이 절의 개조 지쇼(智

    證)대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일체경(一切經) 7천여권, 불상 2천여권 등,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연기로 화해 소실되고 말았으니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나라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수학여행단들이 반드시 찾게 되는 나라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 역시 이때 불에 타 녹아버렸다 한다. 이것이 관승의 세계였다. 물론, 『헤이케 이야기』 자체는 사찰을 파괴한 사람들이 어떠한 응보를 받는지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승병들의 행동양식에 대해서도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관승의 명분론은 “왕법과 불법의 쇠퇴를 막고 수호”함을 내세우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법과 불법”인데, 이러한 주장은 사실 불교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세속적인 왕법(rājadharma)과 출세간적인 해탈법(mokshadharma)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힌두교이며, 불교는 왕법을 추구하지 않고 해탈법만을 추구한다. 왕법과 불법을 동시에 추구하는 속에 폭력의 정당화가 깃든다. 그것이 힌두교의 『마하바라타』의 세계이고, 일본의 『헤이케 이야기』의 세계이다. 또 관승과 용병의 세계이다.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보조스님의 정혜결사이고, 일본불교사의 둔세승(遁世僧)의 불교이다. 『헤이케 이야기』에서도 잠깐 등장하지만, 가마쿠라 신불교를 열어갔던 호넨(法然)스님을 비롯한 둔세승들의 불교가 갖는 의미 역시, 그 전제가 되었던 관승의 세계를 보다 잘 파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일본불교에서 우리의 정혜결사와 같이 교단의 윤리적 정화를 위한 결사운동은 없었던 것이지만, 그 내실에서 본다면 ‘둔세’의 행위 자체가 곧 우리의 ‘결사’와 정신적으로는 일맥(一脈)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다만 양자의 차이는 우리의 결사는 결코 다른 종파의 성립으로 귀결되지 않으나, 일본의 둔세는 다른 종파의 성립을 결과하였다는 점이다.

  이제 “결사로 돌아가자”라든가, “결사정신을 계승하자”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왕법과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거기에 결사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대선(大選) 때에는, 조계사를 찾으려는 대선후보의 방문을 정중히 사양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왕법은 불법을 보다 어렵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왕법과 거리를 두면서, 해탈법(=불법)의 추구만으로 자생하는 불교, 그것이 바로 결사의 꿈이지 않았던가.

 

                                                                  (2008. 2. 9)    

       

 

 

*** 일본불교사 공부방 제5호 권두언으로 쓴 것입니다.

 

우리 연구소 출범 이전의 글이고요.

 

제 주제 중에 "결사"가 있어서, 애착이 가는 글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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