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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쟈와 겐지(宮澤賢治)와 국주회(國柱會)

작성자김호성|작성시간10.11.09|조회수1,086 목록 댓글 0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선생의 책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동국대 출판부, 2005)가 갖는 미덕 중의 하나는 근, 현대의 인물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의 일본불교사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인물도 언급하고 있다. 제6장 근대와 일본불교가 바로 그러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동양대학의 설립자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 1858~1919), 정토진종 교단의 개혁사상가 기요자와 만시(淸澤滿之, 1863~1903), 대승비불설론의 주창자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 1851~1929), 그리고 서양세계에 불교를 전한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 등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 혁혁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과 함께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1896~1933)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異彩)롭다는 것이다. 마츠오 겐지 선생의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미야자와 겐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사실은 『법화경』을 신앙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불교정신을 그의 문학활동 속에 용해시켰다는 정도이다. 그는 동화를 짓기도 하는 등 아동문학에도 많은 공로가 있었던 것같은데, 『은하철도의 밤』 같은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널리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던 것은 그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일 것이다. 나 역시 이 작품은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번역인지 알 수 없으나,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갖고

      욕심은 없으며

      결코 화내지 않으며

      언제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약간의 야채를 먹고

      모든 일을

      자신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잘 보고 듣고 행하고 이해하며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솔숲 그늘  

      삼간초가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간병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

      사소한 일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 때는 눈물을 흘리고

      냉해의 여름에는 벌벌 떨며 걷고

      모두에게 멍텅구리라 불리고

      칭찬도 받지 않고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대승 보살의 마음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한 문학작품은 다시 찾기가 싶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어로서 불교사상을 표현하여 널리 알린  공덕으로 말미암아서 마츠오 선생은 미야자와 겐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그랬다고 한다면, 나로서도 별다른 이의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비에도 지지 않고」 역시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에 몇 행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전체적인 서술 기조는 미야자와 겐지가 국주회(國柱會)의 회원이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문학의 선구자로서 미야자와 겐지가 아니라 국주회의 열렬한 회원으로서 미야자와 겐지를 마츠오 선생은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작부터가 그러하였다.

 

      미야자와 겐지가 열렬한 『법화경』 신자였음은 최근에 알려졌습니다. 겐지는 18세

    때부터 열렬한 『법화경』 신자가 되며, 1920(大正 9)년 12월에는 다나카 치카쿠 田中智

    學가 주재하는 국주회(國柱會)에 들어갔을 정도입니다.(『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

    184~185쪽)      

 

  나는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를 번역하면서, 이 부분에서 강한 저항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이노우에 엔료 등은 다 그 나름대로 일본불교의 근대화에 바람직한 방향에서 이바지한 바가 적지 않은 인물이지만, “문학자 미야자와 겐지”가 아니라 “국주회원 미야자와 겐지”라는 인물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비판받을 수 밖에 없는데, 왜 마츠오 선생은 함께 다루고 있는가? 나로서 이렇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국주회(國柱會)가 바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니치렌(日蓮) 사상의 입장에서 옹호하였던 단체였기 때문이다.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에서 마츠오 선생은 국주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국주회의 설립자 ---- 인용자) 다나카 치카쿠는 천황을 『법화경』 진리의 구현자

    로서 위치짓고, 일본 중심의 입장에 서서 니치렌의 가르침을 전세계에 넓히고자 했습니

    다. 그런 까닭에 천황중심의, 일본에 의한 세계통일을 목표로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국

    주회의 주장을 일련주의라고 부릅니다.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로서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을 주도한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1886~1949), 테러리스트 이노우에 닛쇼(井上日

    召) 등도 이 국주회원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련주의는 일본의 중국 침략에 사상적인 배

    경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대외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던 것입

    니다.(185~186쪽)

 

  다나카 치카쿠는 “법화경을 국교로 한 일본이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를 법화종화한다”고 하는 원대한 목표를 내세운 인물로서, 대동아공영권 주장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던 “팔굉일우(八紘一宇)”라고 하는 말도 만들어 냈던 인물이다. 팔굉일우라는 말은, “전세계를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로 통일한다”고 하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상식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정상적인 심리구조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이면에 니치렌의 삶과 사상이 놓여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화경』까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법화경』의 본래 가르침이 그러한 것인가 다시금 회의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법화경』에 대한 국가주의적 해석을 배제해야 할 필요를 새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제국주의 단체인 국주회와 그 설립자인 다나카 치카쿠에게 미야자와 겐지는 충성을 다하겠다는 심정을 한 지인(知人)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번에 나는 국주회의 신행부에 입회하였습니다. (중략) 이제야 니체렌 성인을 시봉하

    는 것처럼 다나카田中 선생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겠습니다. 명령하신다면 저는 시베리      아의 얼음밭이나 중국의 내륙에라도 가겠습니다.(185쪽)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아름다운 시 역시 이러한 시인의 사상적인 배경을 깔고서 재해석하게 되면, 또 엉뚱하게 “시베리아의 얼음밭이나 중국의 내륙에라도 가겠습니다”라는 마음을 표방하고 있는 것같기도 하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해 보지만 말이다.

  나는 지난 5월 방한(訪韓)한 마츠오 선생에게 바로 이러한 나의 소감을 말하면서 “왜 미야자와 겐지를 다루고 있는가” 물었다. 선생은 꽤 충격을 받는 모습이었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도 한국의 독자는 일본의 독자와 다르게 읽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한다. 이제는 일본의 독자들만이 아니라 한국의 독자들마저 배려하면서 글을 써야겠다는 소감을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가 미야자와 겐지를 말한 이유에 대해서 “일본의 독자들은 그가 국주회 회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 점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국주회가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는 단체임을 말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의 의도가 “국주회 회원 미야자와 겐지”를 찬양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 것보다는 언급함으로써 일본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해주고자 한 마츠오 선생의 시도를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국주회가 아직도 도쿄에 존재하고 있으며, 신자 역시 2만이나 된다고 하는 사실을 듣고서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들의 묘원(墓園)에는 미야자와 겐지가 죽음에 즈음하여 노래한 것을 새긴 비문(“宮澤賢治の辭世”碑)이 세워져 있다 한다. 그는 죽어서도 국주회 회원인 셈이다.

***  일본불교사 공부방 제2호의 권두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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