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불교(2) - 『천우학』 소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적 중편인 『천우학』은 ‘천 마리의 학’을 의미하는데, 가마쿠라에 위치한 엔가쿠지(円覺寺)란 절의 다회(茶會)를 배경으로 작품은 시작합니다. 엔가쿠지는 다치하라 마사아키의 작품인 『겨울의 유산』에 등장하는 건각사의 모델로 유서 깊은 임제종 사찰인데, 이 절에서 기쿠지 아버지의 생전 불륜상대였던 구리모토 지카코가 여는 다회에 주인공인 기쿠지가 초대를 받아 가는 장면으로 소설은 전개됩니다.
제약회사 주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기쿠지의 아버지는 다도를 취미로 삼았는데, 그 다도를 매개로 다도를 배우던 구리모토 지카코와 불륜을 저지릅니다. 또 다도 친구인 오타가 죽으면서 명품인 다구를 부탁했는데 기쿠지 아버지는 다구 뿐만 아니라 미망인이 된 친구 부인과도 관계를 맺어 그 미망인까지 맡게 되고 됩니다. 그런 남편의 외도로 고통 받던 엄마를 보며 어린 시절의 기쿠지는 트라우마를 가집니다. 4년 전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엄마도 그 후 돌아가신 뒤, 다도 선생으로 자리 잡은 구리모토 지카코가 주인공 기쿠지에게 맞선을 주선해준다며 자신의 다회에 초청하게 되는데, 그 다회에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기쿠지는 다회에서 만난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오타부인과 패륜의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런 자책감으로 오타부인이 죽은 후에는 그 딸인 후미코와도 관계를 맺으면서 일반적인 상식이나 도덕규범에서 벗어난 소위 마계의 늪에서 빠져 구원을 희구하게 됩니다.
이 때 기쿠지에게 구원의 상징으로 떠오르는 인물은 두 명의 여성인데, 한 명은 치유 또는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닌 ‘천 마리 학’모양의 보자기를 들고 다회에 참석했던 이나무라 유키코입니다. 기쿠지의 맞선상대였던 이나무라 유키코는 아름답고 순결하고 성스러워 영원의 여성이란 이미지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기쿠지는 범접하기 어려운 이나무라 유키코보다는 ‘사랑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비상식적인 자신의 엄마’를 용서해달라며 기쿠지에게 용서와 이해를 요구하는 후미코에게서 오히려 위로를 얻으며 소생의 희망을 품게 됩니다. 즉 이나무라 유키코는 번뇌와 망상으로 뒤얽힌 이런 속계를 벗어나 이미 저 피안의 세계에 안착해있는 영원의 여성으로 삼독(三毒)에 절어있는 기쿠지가 감히 다가서지 못하는 대상인데 반하여, 또 한 명의 여성인 후미코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모로 인해 고통 받는 동병상련의 괴로움을 안고 있으면서도 이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용서와 이해의 힘을 주는 구원의 길을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천우학』이란 작품이 ‘세상에서 속악하게 변해버린 다도에 대한 의문과 경계를 나타낸 것으로 현실의 다도를 오히려 부정한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는데, 이는 원래의 다도가 지향해야할 세계가 다선일미의 불계(佛界)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가와바타가 지향하는 구원이 무엇인가도 엿보게 합니다. 다회는 명품인 다기에 치우치거나 번잡한 사교장이 아닌 진정한 인간 구원의 장(場)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 구원은 닿기 어렵고 가기 어려운 피안이 아닌 바로 지금의 현실에서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망념의 존재인 채, 그 망념 속에서 구원을 노래하라고 일러주는 요가와 법어가 생각납니다.
원래 범부는 망념 속에 있기 마련이니, 망념 외에 따로 무슨 마음이란 것이 있겠는가.
죽는 순간까지 망념 투성이 범부라고 하더라도, 온 마음을 기울여 염불한다면 내영을
받아서 연화대에 오를 것이니, 그때에야 비로소 망념을 털어버리고 깨달음에서도
벗어나리라. 망념 속에서 우러나오는 염불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결정코
왕생하리니, 의심하지 말지어다
작가로서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중생이 벗어날 수 없는 번뇌와 망상이라는 마계 속을 파헤치느라 결국 출구를 찾아내지 못하지만, 그가 남긴 『후지산의 첫 눈』이란 작품 속에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항상 어디나 계시지만, 현실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슬프도다
그러나 사람이 조용히 잠들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새벽녘에 어렴풋이 꿈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신다 (『梁塵秘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지금 여기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나 자력의 禪을 지향한 까닭에 부처님께 구원의 손길을 뻗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