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
김찬성 |
|---|---|
| 생존기간 | 1871.12 ~ 1929 |
| 출생지 | 평남 안주 |
| 운동계열 | 안동임시의사회 |
| 사망지 | |
| 훈격(연도) | 애족장 (90) |
| 공적내용 | 평남 안주(安州) 사람이다.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안주에서 목사로서 활동하면서 항상 교포들에게 민족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질 계획임을 알고 안주에서도 서울과 같은 날 거사하기로 결심하고 아들 화식(化湜)을 비롯한 교회 청년들을 자택에 소집하여 극비밀리에 선언서를 등사 제작하는 등 시위계획을 주도하였다.3·1독립운동 후에는 남만 안동현(安東縣)으로 망명하여 김승만(金承萬)·오순근(吳淳根)·김두만(金斗萬)·이영식(李英植) 등과 안동현임시의사회(安東縣臨時議事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그리고 1919년 10월 3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발과 더불어 박은식(朴殷植)등 각계대표 30명과 더불어 상해에서 제2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의 철수를 요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1919년 11월에는 각지의 산발적인 청년운동을 통일하기 위하여 안동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를 조직하고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추대하고 그는 부총재로서 각 청년회를 지도하며 독립군과 연락을 취하던 중 본회의 중앙기관을 관전현(寬甸縣) 홍통구(洪通溝)로 옮겼다. 이때 상해임시정부 연통제 평북독판부 연합기관이 관전현 향로구(香爐溝)에 있었으므로 그는 평북독판부 직무를 겸임하면서 청년단연합회 사업을 확장하였다.1920년 2월에는 재만독립운동단체를 단일화하기 위하여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표로서 독립단대표 김승학(金承學), 평북독판부 대표 조병준(趙秉準)·김승만(金承萬) 등과 같이 통합 5원칙 결의 조항을 채택하고 관전현 홍통구에다 단일기관인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을 설치한 후 임정 평북독판부와 긴밀한 연락하에 국내진입,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1920년 9월에는 청년단 연합회 국내지단 중 평남 안주(安州)의 조순화(趙順花)여사가 군자금 100원을 모금하여 송부하였으며, 그의 장남이 검거됨에 따라 단장 조순화 이하 36명의 단원이 1921년 5월에 모두 체포되기도 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註·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94면 ·무장독립운동비사 58면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44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52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5·844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708면 ·조선민족운동년감 46·67·70·78·79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57·43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423·42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24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65·28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72·30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28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42·46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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