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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대의 인물

[독립운동가]김태동[金泰東]

작성자★無孔笛|작성시간12.04.18|조회수38 목록 댓글 0

성명

김태동

생존기간 1908;20세 ~ 미상
출생지 서울
운동계열 의병
사망지
훈격(연도) 애국장 (95)
공적내용 서울 사람이다.남상목(南相穆)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충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우리나라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더니,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 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재개하여 갔고, 특히 그것은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이같은 시기에 김태동은 대한제국 시위대(侍衛隊) 출신인 김재선(金在善) 및 송주상(宋柱祥)·김경화(金景化)·이시영(李時永) 등 동지들과 의기투합하여 의병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용인(龍仁)군 용천곡(龍泉谷)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던 남상목 의진에 투신하였다. 남상목 의진은 이들이 참여하자, 송주상·김태동은 종사, 김재선을 좌익장, 강춘선(姜春善)을 후군장, 김경화·이시영을 포군으로 삼아 진영을 확대 개편하였다. 그런 다음 남상목 의병장의 지휘 아래 충북 음성(陰城)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그리고 죽산(竹山)에서 활동하고 있던 전봉규(全奉奎)·민병찬(閔丙贊) 의진과 합세하여 안성(安城)으로 진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하였다.이 안성전투에서 연합의진은 큰 승리를 거두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의진간의 분규로 연합의진이 와해되자 그는 상경하여 덕어(德語)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를 공부하다가 1908년 3월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1908년 7월 13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유형(流刑) 10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註·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1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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