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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산책

보리 - 한흑구

작성자김정화|작성시간10.02.03|조회수789 목록 댓글 0

보리
                                                                   수필가/ 한 흑구(韓 黑鷗) 지음.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다.
차가움이 엉긴 흙덩이를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차가운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던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고, 이제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지 오래고, 날게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 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보리 속에 간직하며, 차가운 허리도 잊고 집으로 돌아오고 했다.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매미들도 다 제 집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 가에는, 온 여름동안 키만 자랐던 속새 풀 더미가 갈대꽃 같은 솜꽃들만 하늘에 날리고 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어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 솔잎 끝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 속의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읽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 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 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지금 어둡고 차디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 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삼월의 맑은 하늘 아래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듯 남향 언덕 위에 누른 잔디가 솔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이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덮는다.
보리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에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 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 대고, 너의 깊고 아늑한 품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 놓는다.

 

어느 듯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공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그윽한 향기를 온 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덥썩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농부는 너를 먹고살고, 너는 또한 농부들과 함께 자란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전문/全文>   끝.

   
지은이:한 흑구 (1909-1979) 수필가.소설가.번역가. 본명/세광(世光).
       평양 출생. 1931년 <동광>에 단편 "황혼의 비가"로 등단. 이후 수필에 전념하였는
       데,시적 구성의 아름다움과 작품에 일관하면서 인생을 관조하여 한국 수필문학이
       자리를 굳히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저서로(현대미국시선),수필집<동해산문>과
      <인생산문>이 있다.

 

분석(갈래): 경 수필.


제재: 보리


성격:의인화,예찬적,교훈적 입니다.

 

구성: 1단락: 보리가 가진 덕성과 농부가 늦은 가을 보리를 심음.
         2단락: 보리가 추은 겨울을 이기고 자람.
         3/4단락: 봄을 미리 알리는 전조(前兆)와 봄의 모습.
         5단락: 보리의 수확
         6단락: 보리에 대한 찬미입니다.

 

주제:고진감래(苦盡甘來)


출전; 동해산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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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감상 :

********

 

보리의 강인함과 순박함을 농부와 함께 등잔시켜 이야기한 수필로서,모두 6단락으로 되
어 있습니다.


봄에 만물이 소생하는 모습을 보면 죽은 것만 같던 세계가 갑자기 부활하는 생명의 용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 아니라 잠복기요 휴식기였음을 알게 됩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생명의 잠복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꿋꿋이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문체상의 특징이라면 보리를 2인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활유법이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수필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 글에 사용된 활유법들의 의미를 알아내야 합니다.
득히 "너 보리는"과 같은 문투는 보리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보리는 다른 농작물과는 달리 늦은 가을에 씨를 뿌려서 초여름에 거둡니다.
한 흑구 선생은  이런 보리를 겨울의 차가움으로 표상 되는 고난을 견디며 끈질기게 살아나는 생명력의 표상으로 보았습니다.
보리는 매서운 바람과 얼음같이 차가운 눈, 그리고 그 속에 덮인 어둠과 같은 시련과 고난을 견디면서, 억센 생명의 힘으로 결실에의 희망과 기다림으로 살아 마침내는 환희의 봄날을 맞이합니다.
뿐만 아니라,결실 하여 고개를 숙이는 겸손함과 사명의 완수를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흑구 선생은 이런 보리의 일생을 통해서 끈질김으로 고난을 견디어 내면 환희의 보람이 반드시 따른다는 생의 교훈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에 곁들어 순박하지만 억세고 참을성  있게 살아가는 농부의 삶과 노동의 가치를 예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좋은 감상이 되시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끝.

  
 2005.11.7. 가촌  이 용 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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