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壽衣)
이영도
5월 8일이 ‘어머니날’이라고 해서 멀리 외국에 가 있는 딸아이가 돈 50불을 보내 왔다.
어머니날의 선물이란 것이다.
먼 나라에 가서 제 손으로 학비를 벌어 공부하는 아이의 형편에서 보내 온 50불은 부유층의 오만금보다 내게는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돈으로 어떻게 쓰는 것이 보람스럽겠는가 생각을 백 가지로 견주어 보다가 결국 수의(壽衣) 마련을 하기로 했다.
항상 앓아 눕기만 하는 나의 건강 상태, 더구나 지난해는 몇 굽이의 죽는 고비를 겪었던 터이고 보니 이러다간 언제 어느 때를 기약할 수 없는 목숨이라 갑작스런 죽음에의 준비를 스스로 해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인 혈육이래야 만리이역에 가 있고 누구 한 사람 책임져 줄 알뜰한 손길 없는 외톨이고 보니 막막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뒷일을 생각할 때, 아이의 애정 어린 송금(送金)으로 마지막 옷을 내 손으로 마련해 두고 싶었던 것이다.
사 온 명주를 정결히 빨아 손질하고 친구인 K여사를 청해 함께 옷을 지었다.
여학교 수예 선생인 K여사는 꽃을 만들고 나는 재봉틀을 돌려 너울을 만들고…….
시집 가는 신부가 혼수 바느질을 하듯 두 여인은 종일을 도란도란 속삭이며 옷을 지었다.
국화꽃을 한 아름 뿌린 듯 옷자락 전면을 장식한 길고 하얀 너울 위에 장미꽃으로 엮어 만든 화관을 쓰고 거울 앞에 서 본다.
스스로 보기에도 눈부시도록 정결한 모습!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이렇듯 화사한 나의 마지막 차림새를 보아 주었다면 얼마나 뜨거운 연민과 목멘 애정으로 아껴 줄 것이겠는가 생각하니 인정의 덧없음이 가을바람처럼 가슴을 스쳐 간다.
마지막 날에 나는 이 옷을 입고 나의 하느님께서 예비해 둔 그 나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겠는가?
향수에다 몸을 씻고 어여쁜 신부처럼 하늘나라로 올라가 다소곳이 서면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 자비하신 손길을 내리시어 이끌어 주실 것이라 믿어진다.
너무나 애달픈 생애였기에, 너무나 아프게 살아온 목숨이었기에, 너무나 슬픈 애정을 감당하며 견뎌 온 여인이었기에 나의 하느님께선 더욱 가까이 불러 위로해 주실 것이라 믿어진다.
뜨거운 눈물이 빙 돌아난다. 무언가 한 아름 지나온 세월이 가슴을 메우며 그 숱한 가시밭길도 인제 종점이 바라뵈는 고개 마루에 선 듯 일종의 안도감의 흡족에서 일어나는 마음 뜨거움인지 모르겠다.
다 지은 옷가지를 다림질하여 챙기니 외투 한 벌의 부피보다 가볍다.
인생 한평생의 마지막 차림으로는 지극히 초라한 이 수의가 오늘의 내게 있어선 어쩌면 이토록 고맙고 만족스러울까?
영원의 충족!
이 옷에는 혈육의 애정이 담겨 있고 이 옷은 고운 우정의 손끝에 지어졌고, 이 옷을 입고 갈 그곳은 영원의 안식처요, 슬픔도 외로움도 배신(背信)도 없는, 원통함도 없는 오직 낙원으로의 행차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마지막 철은 오월이나 시월이었으면’ 하고 평소 늘 원하고 있다.
장미꽃이 화안히 필 무렵, 장미꽃으로 장식된 관 속에 장미 향기에 묻혀 떠나갈 종언(終焉)의 날! 국화꽃이 필 무렵, 국화 향기에 싸여 떠나갈 나의 영구…….
어느 계절이라도 좋다. 꽃향기에 싸여 떠나는 길이라면 몇 만 리를 가도 서럽지 않을 천국에의 여정인 것이다.
흔히들 육신과 더불어 영혼도 없어진다고 죽음을 허무해 하는 말들을 한다. 얼마나 신(神)의 음성에 귀를 막은 허술한 인간의 지혜이겠는가?
나의 영혼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영생의 보좌에서 지극히 온전하신 분을 받들며 때 묻지 않은 영(靈)의 세계를 누릴 것이다.
그리하여 오월의 화창한 계절이 오면 잠시 나들이 오듯 말미를 얻어 이슬의 촉촉한 초원의 한 떨기 풀꽃에 쉬었다 가기도 하고, 지상(地上)의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도란도란 속삭이는 창가에서 가만히 축복도 하여 주고…….
어머니날에 딸아이의 선물로 수의를 지으며 카네이션의 꽃빛 같은 꿈이 종일 화사하게 가슴에 고여 든다.
《한국수상록 12호》, 금성출판사, 1990
<이영도 연보>
1916년 10월 22일 경북 청도군 내호동 259번지에서 아버지 이종수 씨와 어머니 구봉래 여사 사이에 4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남.
1936년 대구의 대부호 집안의 막내 아들 박기주 씨와 결혼
1939년 외동딸 박진아 출생.
1945년 부군과 사별. 대구에서 시 동인지 『죽순(竹筍))』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옴. 경남 통영여중고 교사 취임.
1953년 부산 남성여중고 교사취임.
1954년 시조집 『청저집(靑苧集)』 상재.
1964년 부산아동회관 관장 취임.
1966년 수필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상재. 제8회 《눌원문화상》수상.
1968년 시조집 『석류(石榴)』를 오빠 이호우 씨와 함께 오누이 시조집으로 상재.
1971년 수필집 『머나먼 사념의 길목』 상재.
1974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강사 취임.
1975년 한국 시조작가협회 부회장, 한국 여류문학인회 부회장
1976년 3월 6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