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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산책

나무 - 이양하

작성자김정화|작성시간10.02.08|조회수1,898 목록 댓글 1

나무
이양하(李敭河)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滿足)할 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과 불만족(不滿足)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處地)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孤獨)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 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義理)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以心傳心) 의사(意思)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쟁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올 뿐 아니라, 어떤 때에는 쏘삭쏘삭 알랑거리고, 어떤 때에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에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노래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厚待)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薄待)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다 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多幸)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不幸)해하는 법이 없다.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同情)하고 공감(共感)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一生)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나지 않는 참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黙禱)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있다. 온갖 나뭇잎이 우거진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嚴肅)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理由)도 여기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天命)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 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 보고, 흔히 자기(自己) 소용(所用) 닿는 대로 가지를 쳐 가고 송두리째 베어 가곤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怨望)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리어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 간 재목(材木)이 혹 자기를 해칠 도끼 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孤獨)의 철인(哲人)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賢人)이다.
불교(佛敎)의 소위(所謂) 윤회설(輪回說)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작품 해설>
이 수필은 나무를 의인화하여 그 성격을 예찬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면 독자는 나무를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생각하게 된다. 지은이는 나무를 대상(對象)으로 바라보기보다 인격화하여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 세우고 있다. 이러한 자연 친화 사상은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정서에 핵을 이루고 있다. 윤선도의 ‘오우가’에서는 자연을 이상적인 친구의 유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 감상의 길라잡이
1964년에 나온 수필집 <나무>의 표제작이다. 이양하의 이양하다움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그의 고독한 생활, 소박한 자세, 자연과 친구에 대한 사랑, 감사하는 마음들이 나무 위로 잘 겹쳐 있다.
뿐만 아니라 나무에는 그가 인간에 대해 소망하는 인간성의 모든 조건들이 드러난다. 나무가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욕망에 사로잡혀 허덕이는 인간의 본성과 대비되는 것이요, 나무가 고독하다는 것은 인간 또한 나무처럼 의젓하게 그것을 견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달과 바람과 새가 나무의 친구라는 것은 주변사람들에게 두루 너그러워지리라는 경구인 것이다.
나무를 의인화하고 빼어난 대조법이 구사되어 읽는 맛이 경쾌하기 짝없는 이 글은 현대인의 가벼운 삶을 통찰하고 질책하는 의미도 들어있다. 아무로부터 바람직한 인간성을 유추해 놓은 것도 재미있지만 구름이나 새 또한 그런 경향의 인간형들을 상징케 한 것 같다.
나뭇가지가 위로 뻗힌 것을 하늘을 향해 묵도하고 찬송하는 것으로 읽은 것도 시인다운 눈이다. 끝 구절에 <무슨 나무가 될지는 가리지 않으련다>라고 살짝 방기해놓은 맛 또한 입에 웃음을 띠게 하는 재미요 여유로 느껴진다.

나무는 실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평범하고 범속한 대상이요, 사물이다. 이렇듯 평범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과 마음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보고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이 수필 ‘나무’는 아주 평범한 소재를 고결한 인간적 삶에 비유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관점과 태도를 보여 준다. 곧 대인 군자와도 같은 나무의 품성에 대한 바람이나 새의 변덕과 수다는 소인과도 같은 인간들의 품성을 풍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독자적인 발견이며, 인생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이양하는 나무를 의인화하여 독특한 솜씨를 엿보이는 수필들을 즐겨 썼다. 이는 나무를 중요한 사색의 재료로 삼은 결과이다.

♣ 작품의 해제
작자 이양하[(李敭河/1904~1963.2.4) 수필가. 영문학자. 평남 강서(江西) 출생. 일본 도쿄[東京]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 34년부터 연희전문(延禧專門)에 출강하면서 영문학에 관한 논문과 수필 등을 발표했다. 42년 동교 문학과 교수 및 과장을 역임하고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 문리과대 교수로 옮겨 50년 도미하여 하버드대학 대학원에서 2년간 영문학을 연구하였다. 54년 학술원회원, 58년 서울대학 문리과대 학장서리로 취임하여 재직하다가 위암으로 사망했다. 48년 《이양하수필집(李敭河隨筆集)》, 60년 수필집 《나무》를 간행했고 권중휘(權重輝)와 공저로 《포켓 영한사전》을 펴냈다. 30년 최재서(崔載瑞) 등과 함께 주지주의(主知主義) 문학이론을 소개하고 스스로 《문장(文章)》지 등에 시(詩)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갈래 경수필
성격 주지적, 논리적, 사색적, 경세적, 예찬적, 관조적
문체 우유체
표현 소재의 의인화. 대조적 표현.
제재 나무
주제 나무가 지닌 덕
출전 <나무>(1964)

♣ 구절 연구 및 분석
#.․후박(厚薄)-후함과 박함. ․생채기-할퀴어 생긴 작은 상처. ․후대(厚待)-후하게 대접함. ․묵도(黙禱)-묵묵히 기도함. ․견인주의-금욕주의 ․철인(哲人)-학식이 높고 사리에 밝은 사람. 철학가 ․안분지족(安分知足)-분수에 편안하고 만족함을 앎. 분수를 지키고 욕심을 부리지 않음 ․현인(賢人)-어질고 총명함이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
#. 소나무는 소나무대로~스스로 족하다 ; 나무는 소나무이건 진달래이건 간에 다른 나무가 되었더라면 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 함박눈 펄펄 날리는~한밤의 고독도 안다. ; 눈 내리는 겨울 아침이나 숨막힐 듯한 더위에 사람의 거동이 모두 정지된 때의 질식할 듯한 고독, 그리고 매서운 추위 속에 별도 얼어붙고, 돌도 얼어 터질 듯한 겨울밤의 고독도 안다.
#. 나무는 훌륭한~안분지족의 현인이다. ; 나무는 자기를 해쳐도 원망하는 법이 없고 고통을 참고 견딜 줄 아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을 견디고 이기고 즐길 줄 아는 고독의 철인이요, 탐욕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분수에 만족해 하는 덕을 가졌으니 현인이다.

♣ 요점 정리
1. 소재를 의인화하여 그 속성을 인간의 속성과 비교하면서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생각해 봅시다.
1. 이 글이 나무의 속성으로 제시한 것을 인간의 속성으로 대치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 보자.
▶ 먼저 나무가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늘 욕망에 사로잡혀 허덕이는 인간의 본성을 비판하고 있으며, 나무가 고독하다는 것은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자신에로의 침잠이 사람에게 요구된다는 것이며, 나무가 친구가 없다는 것은 특정한 기호에 따라 친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변의 사람들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질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마침내는 운명의 커다란 흐름에 편안하게 몸을 맡겨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2. 이 수필 첫 번째 단락의 의미를 담고 있는 한자 성어를 찾아보자.
▶ 안분지족(安分知足)

3. 이 글로 미루어 작자가 바라는 참다운 인간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참을성 있고 분수를 알며 자기만의 세계를 가꿀 수 있는 덕을 지닌 사람이 바람직한 인간임을 말하고 있다.

♣ 이것만은 알아야
1. 이 글의 표현상의 특징을 살펴보자.
▶ 감정이나 주장, 논리를 앞세우지 않고 구도자의 고백적 태도를 보여 주는 관조적인 글이다. 소재를 의인화하고, 그 속성을 인간이 속성과 비교하면서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범속한 생활 주변의 소재에서 자연과 인생의 깊이를 통찰하려는 지은이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2. 이 작품에 나타난 ‘고독’을 찾아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자.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앞뒤를 분간할 수 없고 내일을 전망할 수 없으므로 느끼는 고독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지난 하루의 삶이 우울하고 내일의 전망이 불투명하므로 느끼는 고독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황혼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그러한 고독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이웃과 아무 대화도 있을 수 없을 때 느끼는 고독
․파리 움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한여름의 대낮, 아무 시원스런 일이 보이지 않을 때 느끼는 고독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춥기만 한 한밤, 잠마저 들 수 없을 때 느끼는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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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토마토 | 작성시간 10.02.08 해설이 있으니 공부가 되오. 고마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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