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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양

작성자辰泉(具滋文)|작성시간26.06.18|조회수17 목록 댓글 0

7. 김양 교재 44 쪽

김양(金陽)註 221은 자(字)가 위흔(魏昕)이고, 태종대왕(太宗大王)註 222의 9 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주원(金周元)註 223 이찬(伊湌)이고, 할아버지는 종기(宗基)註 224 소판(蘇判)註 225이며, 돌아가신 아버지는 정여(貞茹)註 226 파진찬(波珍湌)이다. 모두 세력 있는 가문 사람으로서 장군(將軍)과 재상(宰相)이 되었다.

김양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용기와 기상이 뛰어났다. 태화(太和) 註 227 2년인 흥덕왕(興德王) 註 228 3년(828)에 고성군(固城郡) 註 229 태수(太守) 註 230이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중원(中原) 註 231 대윤(大尹) 註 232에 임명되었다가 잠시 후에 무주(武州) 註 233 도독(都督) 註 234로 옮겼다. 임지에 갈 때마다 잘 다스린다는 칭찬을 들었다.

개성(開成)註 235 원년〔인 흥덕왕 11년〕 병진(丙辰)년(836)에 흥덕왕이 죽었다. 왕위를 이을 적자(嫡子)가 없어서, 왕의 사촌 동생 김균정(金均貞)註 236과 사촌 동생註 237의 아들 김제륭(金悌隆)註 238이 왕위를 다투었다.
김양은 균정의 아들 아찬(阿湌) 우징(祐徵),註 239 균정의 매제[妹壻]인 예징(禮徵)註 240과 함께 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모시고, 적반궁(積板宮)註 241에 들어가 족병(族兵)註 242를 거느리고 숙위(宿衛)하였다. 제륭의 무리인 김명(金明)註 243과 이홍(利弘)註 244 등이 와서 포위하자, 김양이 군사를 궁문에 배치하여 그들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새 왕이 여기에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흉악한 반역을 저지르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김양이〕 활을 쏴 10여 명을 죽였으나, 제륭의 부하 배훤백(裵萱伯)註 245이 활을 쏘아 〔김양의〕 다리를 맞혔다. 균정이 〔김양에게〕 말하기를, “저들의 숫자가 많고 우리 편은 적어서, 막을 수 없는 형세이다. 그대는 잠시 물러나 후일을 도모하라.”라고 하였다.
김양이 이에 포위망을 뚫고 나갔는데, 한기(韓歧)註 246 한기(漢祇)라고도 하였다.의 시장〔韓歧市〕註 247에 이르렀을 때, 균정이 어지러운 난병(亂兵)에게 죽었다. 김양이 하늘을 보며 소리 높여 울고 밝은 해에 맹세하며 산야(山野)에 숨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개성(開成)註 248 2년(837)〔인 희강왕 2년〕 8월에 이르러, 전 시중(侍中)註 249 김우징(金祐徵)이 남은 병사들을 데리고 청해진(淸海鎭)註 250에 들어가, 대사(大使)註 251 궁복(弓福)註 252와 결탁하여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아버지의〕 원수[不同天之讎]를 갚으려는 계획을 세웠다.註 253 김양이 그 소식을 듣고 모사(謀士)와 병졸을 모집하였다.
〔개성〕 3년(838) 2월에 〔김양이〕 바다〔에 있는 섬에〕 들어가 우징을 만나서 더불어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註 254 〔개성 3년(838)〕 3월에 강한 군사 5,000명으로 무주(武州)註 255를 습격하였는데, 성 아래에 이르자 무주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다음 〔이어〕 남원(南原)註 256으로 진격하여 신라군을 만나 더불어 싸워 이겼다. 우징은 군사들이 오랫동안 싸워 피곤하다고 여겨,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병마(兵馬)를 쉬게 하였다.
〔개성 3년(838)〕 겨울에 혜성이 서방에 나타났는데,註 257 광채 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켰다. 여러 사람이 축하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옛 것을 없애고 새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을 상서로운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김양이 평동장군(平東將軍)註 258의 칭호를 얻어, 12월에 다시 출진하였다.
김양순(金亮詢)註 259이 무주(鵡洲)註 260 군사〔鵡洲軍〕註 261을 데리고 왔고, 우징은 또한 날래고 용맹한 염장(閻長), 註 262 장변(張弁), 註 263 정년(鄭年), 註 264 낙금(駱金), 註 265 장건영(張建榮), 註 266 이순행(李順行)註 267 등 여섯 장군을 보내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군대의 위용이 아주 성대하였는데, 북을 치며 행진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註 268 북천(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대감(大監)註 269 김민주(金敏周)註 270가 군사를 지휘하여 맞서 싸웠다. 장군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3,000기로 적진에 돌격해 들어가, 〔적군을〕 거의 대부분 살상(殺傷)하였다.註 271
개성(開成)註 272〕 4년(839) 정월註 273 19일에 〔김양의〕 군대가 대구(大丘)註 274에 이르렀다. 〔민애〕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맞서 싸웠는데, 그것을 역습하니 왕의 군대가 패배하였다.註 275 사로잡거나 목을 벤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때 왕이 앞으로 구르고 뒤로 넘어지면서 이궁(離宮)註 276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병사들이 〔민애왕을〕 찾아서 죽였다.註 277
김양은 이때에 좌우의 장군들에게 명하여 기병[騎士]을 거느리고 돌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본래 원수를 갚으려 한 것이다. 지금 괴수[渠魁]가 죽었으니, 귀족들[衣冠士女]과 백성들은 마땅히 각자 편안히 있으면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마침내 왕성을 되찾고, 백성들은 안심하였다.
김양이 훤백(萱伯)註 278을 불러 말하기를, “개는 각기 그 주인이 아니면 짖는다. 네가 그 주인을 위하여 나에게 활을 쐈으니, 의사(義士)라 할 수 있다. 나는 따지지 않겠으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훤백에 대하여도 이와 같이 하니, 다른 사람들이야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감동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개성 4년(839)〕 4월에 궁궐을 깨끗이 치우고, 시중(侍中)註 279 김우징(金祐徵)을 받들어 맞아 즉위시키니, 註 280 바로 신무왕(神武王)註 281이다.

개성(開成)註 282 4년(839)〕 7월 23일에 이르러 대왕註 283이 돌아가시자,註 284 태자가 왕위를 이으니, 바로 문성왕(文聖王)註 285이다. 〔문성왕은 김양의〕 공을 추가로 인정하여, 〔그에게〕 소판(蘇判)註 286 겸 창부령(倉部令)註 287의 직위를 제수하였고, 곧 시중(侍中)註 288 겸 병부령(兵部令)註 289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다.註 290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어 안부를 물어보고 겸하여 그에게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註 291 직을 제수하였다.

대중(大中)註 292 11년(857)〔인 문성왕 19년〕 8월 13일에 〔김양이〕 자택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을 듣자 〔문성〕대왕이 슬퍼하며 통곡하고, 〔그를〕 서발한(舒發翰)註 293에 추증하며 부의(賻儀)와 장례를 모두 김유신의 옛 사례註 294에 따라 하도록 하였다.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릉(太宗大王陵)註 295에 배장 하였다.註 296


교재 46쪽 하단
대중(大中)註 292 11년(857)〔인 문성왕 19년〕 8월 13일에 〔김양이〕 자택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을 듣자 〔문성〕대왕이 슬퍼하며 통곡하고, 〔그를〕 서발한(舒發翰)註 293에 추증하며 부의(賻儀)와 장례를 모두 김유신의 옛 사례註 294에 따라 하도록 하였다.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릉(太宗大王陵)註 295에 배장 하였다.註 296

김양(金陽)〕의 사촌 형[從父兄] 김흔(金昕)註 297은 자(字)가 태(泰)이고, 아버지는 장여(璋如)註 298인데, 그 관직이 시중(侍中)註 299 파진찬(波珍湌)에 이르렀다. 김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경(長慶)註 300 2년(822)〔인 헌덕왕 14년〕에 헌덕왕(憲德王)註 301이 당으로 사람을 파견하려 하는데, 보낼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어떤 사람이, 김흔(金昕)이 태종(太宗)註 302의 후예로註 303 정신이 밝고 빼어나며 그릇이 커서 선발할 만하다고, 추천하였다. 마침내 〔헌덕왕이 김흔이 당에〕 입조하여 숙위(宿衛)註 304 하게 하였다.註 305

1년 정도 지나서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황제註 306가 조서(詔書)를 내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註 307 시태상경(試太常卿)註 308에 제수하였다. 돌아오게 되자, 왕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하여, 발탁하여 남원(南原)註 309 태수(太守)註 310에 제수하였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강주(康州)註 311 대도독(大都督)註 312가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이찬(伊湌) 겸 상국(相國)註 313의 직위가 더해졌다.

개성(開成)註 314 〔4년〕 기미(己未)년(839) 윤정월에 대장군(大將軍)註 315이 되어,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註 316 대구(大丘)註 317에서 청해진(淸海鎭)註 318 군사를 막다가 패하였다. 〔김흔은〕 스스로 싸움에 진 군사라 하고 또 죽지도 못하였다고 하면서,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소백산(小白山)註 319에 들어가 거친 옷을 입고 채식만 하며, 중들과 더불어 노닐었다.

대중(大中)註 320 3년(849)〔인 문성왕 11년〕 8월 27일에 이르러, 병이 들어 산에 있는 집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 47세였다. 그해 9월 10일에 나령군(奈靈郡)註 321의 남쪽 언덕에서 장사 지냈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부인이 상장례를 주관하였으며, 〔끝난〕 후에 〔부인은〕 비구니가 되었다.

8. 흑치상지

흑치상지(黑齒常之)註 322는 백제 서부(西部)註 323 사람이다. 키가 7자〔尺〕註 324 남짓이었고, 굳세고 용감하였으며 지략이 있었다.
백제의 달솔(達率)註 325이 되었고, 註 326 풍달(風達)註 327 군장(郡將)註 328을 겸하였는데, 〔이는〕 당(唐)의 자사(刺史)註 329와 같았다고 한다.
소정방(蘇定方)이註 330 백제(百濟)를 평정하니, 흑치상지는 휘하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註 331 소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병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였다. 흑치상지는 이를 두려워하여 주위의 추장(酋長) 10여 인과 함께 달아났고, 도망친 이들을 불러 모아註 332 임존산(任存山)註 333에 의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다. 열흘이 되지 않아 〔도망쳐〕 돌아온 자가 3만이 되었다.註 334 소정방은 병사를 이끌고 흑치상지를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니 마침내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註 335
용삭(龍朔)註 336 연간(661~663)에 〔당〕고종(高宗)이 사신을 보내 회유하자, 이에 유인궤(劉仁軌)註 337에게 나가 항복하였다.
당에 들어가註 338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註 339 양주자사(洋州刺史)註 340이 되었다. 여러 차례 정벌에 종군하여 전공을 쌓았으니, 작위와 상을 받은 것이 특별하였다.註 3
오랜 후註 342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註 343이 되어 이다조(李多祚)註 344등과 함께 돌궐(突厥)註 345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좌감 문위(左監門衛) 중랑장(中郞將)註 346 찬바벽(爨寶璧)註 347이 끝까지 추격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니, 〔당 황제는〕 조서를 내려 흑치상지와 함께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찬모벽은 홀로 진격하였다가, 오랑캐[돌궐]에게 패배하였고 전군(全軍)을 잃었다. 찬모벽은 하리[獄吏]에게 넘겨져 처형[誅]되었고, 흑치상지도 연좌되어 전공이 없어졌다.
마침 주흥(周興)註 348 등이 흑치상지가 응양장군(鷹揚將軍)註 349 조회절(趙懷節)註 350과 함께 모반하였다고 모함하여, 조옥(詔獄)註 351에 갇혔다가 교수형을 당하였다.註 352
흑치상지는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은혜가 있었다. 그가 타던 말이 병사에 의해 매질을 당하였을 때, 어떤 이註 353가 그를 죄주기를 청하자 〔흑치상지는〕 “어찌 개인의 말로 관병(官兵)을 매질하겠느냐”라고 답하였다. 여러 차례 상품을 휘하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재물을 남기지 않았다. 〔흑치상지가〕 죽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9. 장보고와 정년

장보고(張保皐)註 355 신라본기에서는 궁복(弓福)註 356이라 하였다. 와 정년(鄭年)註 357 연(年)은 혹 연(連)이라고도 하였다. 은 모두 신라 사람이다. 다만 〔그들의〕 고향이 어디인지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모두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鄭年)은 또 바다 속에서 잠수하여 50리를 다녀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날래고 씩씩함을 겨루면, 장보고(張保皐)가 〔정년에게〕 조금 미치지 못하였다. 정년이 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 보고는 나이로, 정년은 기예로 항상 서로 경쟁하며, 서로 〔상대방의〕 아래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장보고와 정년〕 두 사람은 당나라에 가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註 358이 되었는데, 말을 타고 창을 쓰면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장보고(張保皐)가 신라로 돌아와 〔흥덕(興德)〕대왕註 359을 뵙고 아뢰기를, “중국을 두루 다녀보니 우리나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부디 청해(靑海)에 진(鎭)을 설치하여, 註 360 적도[賊]들이 사람들을 중국[西]으로 잡아갈 수 없게 하십시오.註 361”라고 하였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 지금 [고려]은 그곳을 완도(莞島)註 362라고 한다. 〔흥덕〕대왕이 보고에게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군사〕 10,000명을 주었다.註 363 이후 바다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노비로〕 파는 사람이 없었다.
장보고(張保皐)는 이미 〔신라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 정년(鄭年)은 〔당에서〕 관직을 잃고 사주(泗州)註 364 연수현(漣水縣)註 365에서 춥고 배고프게 살고 있었다. 하루는 〔정년이〕 변방을 지키는 장수인 풍원규(馮元規)註 366에게 말하기를, “나는 신라[東]로 돌아가,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 〔그러자〕 원규가 말하기를, “〔그대와〕 보고의 사이가 나쁘지 않은가? 어찌 〔그에게〕 가서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정년이 말하기를, “굶주림과 추위에 죽는 것은 싸우다 통쾌하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서 죽을 수 있다면!”이라고 하였다. 드디어 〔정년이 신라로〕 가서 보고를 만났다.
〔보고는〕 그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극진히 환대하였다. 술자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희강(僖康)〕왕註 367이 시해되면서 나라가 어지럽고 왕이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보고가 병사를 나누어 〔그 중〕 5,000명을 정년에게 주고는, 정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네가 아니면 환란[禍難]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년이 〔군사를 이끌고〕 왕경에 들어가 반역자를 죽이고 〔신무(神武)〕왕을 세웠다. 〔신무〕왕이 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註 368 정년이 대신 청해(靑海)를 지키게 하였다 내용은 신라의 전기(傳記)와는 자못 다르지만, 註 369 두목(杜牧)註 370이 지은 〔장보고와 정년의〕 전(傳)에 있으므로, 둘 다 남겨 둔다註 371.
논하여 말한다. 두목(杜牧)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註 372 “천보(天寶)註 373 연간(742~756)에 있었던 안녹산(安祿山)註 374의 난 당시, 삭방절도 사(朔方節度使)註 375 안사순(安思順)註 376이 안녹산의 사촌 동생이었기 때문에 사사(賜死)되었고, 조서를 내려 곽분양(郭汾陽)註 377이 그 직임을 대신하게 하였다.
10일 후에 다시 이임회(李臨淮)註 378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을 지니고[持節] 삭방(朔方)의 병력을 반을 거느리고 동쪽 조(趙)註 379·위(魏)註 380 지역으로 출진하게 하였다. 안사순이 절도사를 담당했던 시절에 곽분양과 이임회는 모두 이문도장(牙門都將)註 381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비록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더라도, 항상 서로 흘깃흘깃 보면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곽분양이 안사순을 대신하자, 이임회는 도망가려 하였으나 계획을 미처 실행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이임회에게 조서를 내려 곽분양의 병력 반을 나누어 거느리고 동쪽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임회가 〔곽분양이 있는 관청에〕 들어가 청하여 말하기를, ‘나 하나의 죽음은 달게 받겠으니, 부디 아내와 자식을 살려 주시오.’라고 하였다. 곽분양이 달려 내려가서 그의 손을 잡고 건물[堂] 위로 데리고 올라가 마주 앉고 말하기를,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황제가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 있는 상황인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을 정벌할 수 없소. 어찌 사사로운 원망을 가질 때이겠소?’라고 하였다.
작별할 때에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충의(忠義)로서 서로를 격려하였다. 큰 도적을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것을 안 이후에야 마음에 의심함이 없어서 병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생 분한 마음을 쌓아간다면, 그러한 마음을 가지기 어렵다.
원망하면 반드시 단점을 보게 되니, 그 재능을 아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장보고(張保皐)와 곽분양의 현명함은 같은 것이다. 정년(鄭年)이 장보고에게 투탁하면서 반드시 생각하기를, ‘그는 귀하고 나는 천하니, 내가 그의 아래로 들어가면, 분명히 옛날의 원망으로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과연 장보고가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정리(情理)이다. 이임회가 곽분양에게 죽음을 청한 것 역시 사람이라면 가지는 마음이다. 장보고가 정년에게 일을 맡긴 것은 〔장보고〕 자신이 원하여 결정한 것이고, 정년은 또한 배고픔과 추위로 고생하여 〔장보고에게〕 감동하기 쉬웠다.
〔그에 비해〕 곽분양과 이임회는 평생을 대립하였으며, 이임회에게 병사를 나누어주는 것은 〔곽분양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천자가 내린 명령이어서, 장보고의 일과 비교하면 곽분양이 더 나은 것이다. 이것은 곧 성현도 성패(成敗)를 의심하여 망설이는 부분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인의(仁義)의 마음이 잡정(雜情)註 382와 함께 섞여 있는데, 잡종이 이기면 인의가 없어지고, 인의가 이기면 잡종이 사라지는 것이다.
저 〔장보고와 곽분양〕 두 사람은 인의의 마음이 이미 이겼고, 또 그것을 밝혀 실천하였기에 마침내 공을 이룬 것이다. 세상에서는 주공(周公)註 383과 소공(召公)註 384을 백대(百代)의 스승이라 하나, 주공이 어린 성왕(成王)註 385를 옹위하자 소공은 그를 의심하였다. 주공의 성스러움과 소공의 현명함으로, 〔같이〕 젊어서는 문왕(文王)註 386을 섬기고 늙어서는 무왕(武王)註 387을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였지만, 주공의 마음을 소공 또한 알지 못하였다.
진실로 인의의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밝게 쓰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소공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속담에 이르기를, ‘나라에 한 사람만 있어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무릇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망하고 있을 때에 현명한 사람을 쓰지 않아서이다. 진실로 현명한 사람을 쓴다면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
송기(宋祁)註 388가 이르기를, “아아! 원한으로 서로 미워하지 않고, 나라에 대한 걱정을 앞세운 사람은, 진(晉)註 389에 기해(祁奚)註 390가 있고, 당(唐)에 곽분양(郭汾陽)과 장보고(張保皐)가 있었다. 누가 〔동〕이(夷)에 인물이 없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10 사다함

사다함(斯多含)註 391은 진골(眞骨) 집안 출신이다. 나밀왕(奈密王)註 392의 7대손인데, 아버지는 구리지(仇梨知)註 393 급찬(級湌)이다. 본래 명문 귀족 가문의 후예로, 풍채가 맑고 뛰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바르고 점잖았다.
당시 사람들이 화랑(花郞)註 394으로 받들기를 청하였으므로, 〔사다함은〕 어쩔 수 없이 화랑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가註 395 무려 1,000명이었는데, 그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진흥왕(眞興王)註 396이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註 397에게 명하여 가라 국(加羅國)註 398 또는 가야국(加耶國)이라고도 한다. 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사다함(斯多含)은 나이가 15~16세였지만,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그가 어리다고 여겨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가 열심히 청하고 그 뜻이 확고하였기에, 마침내 〔왕이〕 명하여 귀당(貴幢)註 399 비장(裨將)註 400으로 삼았다.
낭도로서 그를 따라 출전하는 사람 또한 많았다.註 401 그 국경에 이르자, 〔사다함은〕 원수(元帥)註 402에게 청하여 휘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旃檀梁)註 403 전단량은 성문의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門)을 양(梁)이라 하였다고 한다.으로 들어갔다.註 404 그 나라 사람들이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병사가 들이닥치자 깜짝 놀라 막을 수 없었다. 대군이 기세를 타서 마침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註

군대가 돌아오자, 〔진흥〕왕은 공적을 책정하여 〔사다함(斯多含)에게〕 가라(加羅) 사람 300명을 〔노비로〕 주었다.註 406 〔사다함은〕 이를 받아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또 전(田)을 하사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왕이 억지로 권하자, 알천(閼川) 주변의 불모지註 407을 달라고 청할 뿐이었다.註 408
사다함(斯多含)이 처음에 무관랑(武官郞)註 409과 더불어 사우(死友)註 410이 되기를 약속하였다.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사다함이〕 크게 통곡하다가, 7일 만에 역시 죽었다. 이때 나이가 17세였다.

11. 을파소

을파소(乙巴素)註 001는 고구려 사람이다.
국천왕(國川王)註 002 때 패자(沛者)註 003 어비류(於畀留)註 004·평자(評者)註 005 좌가려(左可慮)註 006 등은 모두 외척으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고, 행동에 의롭지 못한 점이 많았다. 국인(國人)註 007이 원망하고 분하게 생각하였다.註 008 왕이 노하여 그들을 죽이려 하자, 좌가려 등이 모반하였고註 009, 왕이 그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註

마침내 다음과 같이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요즘 총애로 관직을 주고 덕(德)이 없는 자를 관위(官位)에 나가게 하니,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우리 왕가(王家)를 흔들리게 하였다. 이것은 내가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 4부(部)註 011은 각각 현명하고 어진 아랫사람註 012를 천거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4부(四部)는 모두 동부(東部)註 013 안류(晏留)註 014를 천거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국정(國政)을 위임하려고 하였는데, 안류가 왕에게 말하기를, “저는 남보다 못나고 어리석으니, 진실로 나라의 정사(政事)註 015에 참여하기에 부족합니다. 서압록곡(西鴨淥谷)註 016 좌물촌(左勿村)註 017의 을파소는 유리왕(琉璃王) 〔시기의〕 대신(大臣) 을소(乙素)註 018의 후손으로 성격이 강직하고 지혜와 생각이 깊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고, 힘써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註 019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겸손한 말로 예의를 다하여 을파소를 초빙하였다. 〔을파소를〕 중외대부(中畏大夫)註 020에 임명하고 관작을 더하여 우태(于台)註 021로 삼으며 말하기를, “나는 외람되게도 왕위(先業)를 받아 신민(臣民)의 윗자리에 있지만, 덕이 없고 재주가 부족하여 다스리는 데 어려움이 있소. 선생은 능력을 감추고註 022 외진 곳에 계신지 오래되었소. 지금 나를 버리지 마시고 바로 와주시니, 비단 나만 기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직(社稷)과 백성의 복이오.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공(公)은 그 마음을 다해 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을〕파소는 비록 나라를 위해 일할 생각이 있었지만, 받은 관직이 일을 도모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註 023 말하기를, “저는 재능이 없고 미련하여 감히 지엄한 왕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현명하고 어진 이를 뽑아 높은 관직을 주시어 큰 성과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 뜻을 알고, 이에 〔을파소를〕 국상(國相)註 024로 임명하고, 영(令)을 내려 정사(政事)를 맡아보도록 하였다.註 025
이에 조정의 신료〔朝臣〕와 국척(國戚)註 026은 〔을〕파소가 신진(新進) 관료로 구신(舊臣)을 헐뜯는다고 생각하고 그를 미워하였다.註 027 왕은 교서(敎書)를 내려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진실로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족(族)을 멸하겠다!”라고 하였다.
을〕파소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둔하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도리이다. 지금 왕께서는 나를 깊은 뜻으로 대우해 주시고 계시니, 어찌 예전의 은둔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정성을 다하여 나라의 일을 수행하고,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니, 백성들이 편안하였고 온 나라가 무사하였다.
왕이 안류에게 “만약 그대의 한 마디가 없었다면 나는 〔을〕파소를 얻어 함께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러 공적이 쌓인 것은 그대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안류를〕 대사자(大使者)註 028로 삼았다.
산상왕(山上王)註 029 7년(203년) 가을 8월 〔을〕파소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통곡하였다.註 030


12 김후직

김후직(金后稷)註 031은 지증왕(智證王)註 032의 증손(曾孫)이다. 〔그는〕 진평대왕(眞平大王)註 033을 섬겨 이찬(伊湌)이 되었다가, 병부령(兵部令)註 034로 승진하였다.註 035
진평(眞平)〕대왕은 자못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김후직(金后稷)이다음과 같이 간언 하였다. “옛날의 왕도인 사람은, 반드시 하루에 만 가지 정사를 돌보는데, 註 036 깊고 멀리 생각하고 좌우에 있는 바른 신하의 직간(直諫)을 받아들여, 부지런히 힘쓰고 감히 편안하게 쉬거나 놀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야 덕정(德政)으로 풍속이 순후하고 아름다워져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매일 정신 나간 사람이나 사냥꾼과 함께 매와 사냥개를 풀어 꿩과 토끼들을 몰면서 산과 들을 휩쓸고 다니는 것을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고 있으십니다. 노자(老子)가 이르기를,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사냥하는 것[馳騁田獵]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註 037’라고 하였고, 『상서(尙書)』註 038에 이르기를, ‘안에서 방탕하게 여색을 밝히거나 밖에서 방탕하게 사냥을 일삼거나, 이 중에 하나가 있으면 혹시라도 망하지 않을 수 없다.註 039’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안으로는 마음이 방탕해지고 밖으로는 나라가 망하게 되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그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진평〕왕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김후직이〕 다시 간절히 간언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김후직(金后稷)이 병이 들어 장차 죽으려 하자, 그의 세 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왕의 신하가 되어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아 구하지 못하였다. 〔진평〕대왕께서 유희를 그만두지 못하시어 패망에 이를까 두려운 것이 내가 걱정하는 바이다. 비록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군주를 깨우치고 싶다고 생각하니, 반드시 나의 유골을 대왕이 사냥하러 다니는 길의 옆에 묻어라.”라고 하였다.
아들들이 모두 그 말대로 하였다. 다른 날에 왕이 〔사냥하러〕 나가는데, 반쯤 갔을 때 먼 곳에서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가지 마십시오.”라고 하는 듯하였다. 왕이 주위에 물어보기를, “저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가?”라고 하였다. 시종 하는 사람이 고하여 아뢰기를, “저기 김후직 이찬(伊湌)의 무덤註 040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시종이〕 김후직이 죽을 때 한 말을 아뢰었다.
대왕이 말없이 가만히 눈물을 흘리다가 말하기를, “그대는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간언 하는 것을 죽어서도 잊지 않았으니, 나를 사랑함이 이토록 깊구나. 만약 〔내가 잘못을〕 끝내 고치지 않는다면, 그 어찌 죽어서나 살아서나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하였다. 마침내 죽을 때까지 다시 사냥을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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