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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대상이 된 권위

작성자辰泉(具滋文)|작성시간26.06.23|조회수26 목록 댓글 0

🌀廢棄對象이 된 權威

글 - Soo Joh Chae
[물리학자 : 서울대 82학번]
物理쟁이인 내가 잠실 투표소 示威 報道를 보며 가장 먼저 느낀 것은 職業的 本能이었다.

데이터와 結論 사이의 間隙을 疑心하는 本能 말이다.

분명 일어날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한 곳이 아니라
수십 군데에서.

그렇다면 당연히 疑心하고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한국 言論은
約束이라도 한 듯, 이를
단순한 ‘投票管理 不實’과
‘暴力 示威’라는 라벨로
덮어 버렸다.

事件의 本質을 파고드는 代身, 그 본질을 糊塗하는 데
더 열심인 모습이다.

나는 事件 自體보다 그 사건을 덮기 위해 움직이는 言論의 態度에 더 嘔逆질이 나고
이에 同調하는 놈들에게도 난다.

현장에서 加工되지 않은 채 흘러나온 原本 映像들은 전혀 다른 信號(signal)를 보여준다.

理論 豫測과 데이터가 어긋날 때, 科學을 하는 사람은 먼저 데이터 形成 過程을 疑心한다.

그리고 데이터 형성 과정에 異常이 없다고 判斷되면, 그제야 理論을 疑心한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사는 市民이라면, 다음 의문 앞에서 가장 먼저 언론의 信賴性을 의심하는 것이 正常이다.

그렇게 暴力的이었다면서,
그 폭력으로 다친 警察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器物 破損이라도 있었는가?

반대로 平和的으로 抵抗하던 시민들이 一方的으로 다친 場面은 왜 그토록 깔끔하게 編輯되어 사라지는가?

25일간 이어진 民主勞總의 道路 不法 占據와 대규모 衝突은 한없이 너그럽게
‘集會의 自由’로 품어주더니,
왜 잠실의 投票權 守護
籠城에는 이토록 칼같이 公權力의 잣대를 들이대는가?

이 명백한 非對稱 앞에서도 常識的인 疑問 하나 품지 못하면서, 언론이 던져주는 가짜 權威를 檢證 節次 없이 통째로 삼켜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旣成世代 言論
盲信者들은 청년을 향해
“요즘 20대는 反抗的이고
철이 없다”,
“가짜뉴스에 煽動당한다” 며 짐짓 어른인 척 訓戒를 늘어놓는다.

錯覺하지 마라.

이들 靑年은 反抗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平生 宗敎처럼 떠받든 旣存 言論의 權威를 반증(falsification) 하고
있을 뿐이다.

科學은 權威에 절하지 않는다.

영국 왕립학회의 모토는
300년 전부터 단 한 文章이었다.

Nullius in verba.

“누구의 말도 곧이 곧대로
믿지 마라.”

이것은 佛經이나 聖經 이야기가 아니라,
科學의 最小 倫理다.

假設은 職銜으로 證明되지 않는다.

데이터로, 再現 可能性으로, 反證을 견디는 强靭함으로 證明된다.

노벨상 受賞者가 말해도
틀린 것은 틀린 것이고,
無名의 大學院生이 말해도 맞는 것은 맞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의 世界觀에는 正反對의 公理가 박혀 있다.

“민주화 운동을 했으니 옳다.”

“교수·기자 職銜이 있으니 사실이다.”

“정의를 외치던 시민단체가 하는 말이니 檢證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認識論이 아니라
信仰이다.

그리고 신앙을 사실이라
우길 때, 社會는 반드시
代價를 치른다.

좋은 과학자는 自己 假說이 틀렸을 때 깨끗이 廢棄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權力을 거머쥔 主流들이 끝내 撤回하지 않은 失敗한 假說들이 있다.

그들이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撤回한 적이 있는가?

狂牛病: “腦송송 구멍탁”이라는 怪談을 곧이곧대로 삼키고 廣場을 채웠던
그 恐怖는, 데이터로 단 한번도 再現되지 않았다.
檢證 結果가 나온 뒤에도
謝過는 없었다.

사드 電磁波 : 測定값은 基準値에 한참 못 미쳤다. 물리학에서 電磁波의 세기가 거리 제곱에 反比例한다는 것은 중학생도 아는 사실이다.

후쿠시마 處理水 : 三重水素 濃度, 稀釋 後 線量(radiation level), 自然 放射線과의 比較 등 따져야 할 숫자는 明確했다.
그러나 報道는 숫자가 아니라 煽動을 택했다.

科學的 檢證에는 至毒하게 게을렀고, 刺戟的 煽動에는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세 번의 明白한 誤報.

세 번의 沈默.

단 한 번도 없었던 撤回.

이 정도면 偶然이 아니라, 철저히 망가진 시스템으로
廢棄되어야 한다.

그 광우병 煽動에 動員되었던 어린 학생들이 지금의 20~30대가 되었다.

이들 靑年 世代는 本質을 꿰뚫는 단 한 文章을 던진다.

“그럼 당신들이 盲信하는 그 뉴스는 왜 항상 진짜인가?”

이 질문에 당신들은 답하지 못한다.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情報源(news sourece)이란
과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情報가 아니라
偶像에 대한 盲信이다.

20대는 더 이상 過去의 勳章에 權威를 自動 賦與하지 않는다.

過去에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해서, 지금의 獨善과 政策 失敗가 免責되는가?
아니다.

敎授·記者 職銜을 달았다고 해서, 確證偏向과 엉터리
主張이 事實로 遁甲하는가? 아니다.

正義를 외치던 시민단체가 새로운 旣得權 카르텔이 된 것을 보면서도 沈默해야 하는가? 絶對 아니다.

이것이 지금 20대가 차가운 理性으로 世上에 던지는
質問이다.

言論 盲信者들은 여전히 ㅎ自身이 時代의 主人公이며 正義를 獨占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젊은 世代는 理性을 통해 훨씬 더 透明한 窓으로 世上을 본다.

이들은 뉴스를 一方的으로 注入받지 않는다.

직접 檢索하고, 原本 資料를 交叉 比較하고, AI로 分析하고, 1차 데이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야말로 科學者가
平生 訓練하는 節次다.

텍스트 몇 줄과 앵커의 悲壯한 表情만으로 사람을 움직이던 主流들의 幼稚한 煽動
公式은, 젊은 世代 스마트폰 손바닥 안의 原本 映像 하나 앞에서 虛妄하게 무너진다.

이런 靑年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啓蒙이 아니다.

自身의 삶을 망가뜨린 現實에 대한 正直한 答이다.

왜 집값은 미쳐 날뛰어 우리의 出發線을 통째로 지워버렸는가.

왜 年金은 우리에게 枯渴의 恐怖만 남기는가.

왜 쓸 만한 일자리는
해가 갈수록 蒸發하는가.

이 本質的 質問 앞에서는
단 한마디도 내놓지 못하면서, 言論이 떠먹여 준 프레임 그대로 靑年을 향해

“極右化됐다”,

“無知하다”고 손가락질하는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醜하다.

이들 젊은 세대는 無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言論을 經典처럼 모시는 主流들보다 훨씬 많이, 그리고 훨씬 正確하게 알기 시작했다.

言論의 權威는, 스마트폰으로 찾아낸 原本 映像 단 한 編을 끝내 이기지 못한다.

이제 20代는 注入받지 않는다.

보고, 比較하고, 檢證하고, 스스로 判斷한다.

그 판단이 당신들의 마음을 不便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靑年이 틀려서가 아니다.

主流 勢力들이 너무 오랜 歲月, 言論이 지어준 가짜 幻像과 確證偏向 속에서
腦를 닫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敢히, 그 無能하고 게으른 理性으로 지금의 靑年을 訓戒하려 들지 마라.

檢證을 通過하지 못한 權威는 權威가 아니다.

그저 오래된 習慣일 뿐으로 廢棄 對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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