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 토요 칼럼 (2026.6.6)^
(제3장 ) 박정희 대통령의 방산 추진의 굳은 의지와 강력한 기구설치
병기는 부품의 결합체라는 제1단계 추진인 ADD의 시제추진 실시
1.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방산 추진비전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광공 전 차관보가 건의한 "병기는 부품의 결합체"라는 기계공학 윈리가 한국이 방위산업을 추진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임을 확신하셨다.
박정희 대통령은 다년간의 병기 장교로서의 지혜와 비전이
확신을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방산을 대통령 자신이 몸소 다스리는 프로젝트로 추진하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박정희는 병기는 부품의 결합체라는 허무맹랑한 풍설을? 믿고 방산 실무상 모든 권한과 책임을 공대출신 화공 엔지니어로서 실무 경험이 풍부한 상공부 광업, 공업, 전기 오원철 차관보를 박정희 대통령의 참모로서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셨다.
대한민국에 정부가 생긴 이래 기술자를 경제 수석비서관을 임명한 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경제 2 수석실은 여타 수석비서관실인 여명의 10여 명의 직원이 있는 정부의 담당 부처가 있는 비서실이 아니고 Task Force Team만으로서 청와대 내의 자체 대통령 팀워크로 업무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정부의 모든 기관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된 강력한 특별기구였다.
오원철 수석은 상공부 화학과장 시절 때부터 능란한 브리핑과 전시된 수출입 물자 설명을 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 국보가 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오국보"라고 부르셨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6개월의 재임기간에 방산을 시작으로 박정희의 1,2급 극비 안보관계 지시를 오원철 수석에게
지시한 바 있다. (내용은 추후에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원철 광공차관보가 건의한 "병기는 부품의 결합체"라는 원리로 방위산업을 할 수 있다는 원리를 절대로 믿은 또 한 사람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김정렴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전 상공부 장관으로 오원철 수석의 상관이어서 오원철 광공차관보가 전화로 보고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김점령 실장이 실망하고 계신 박정희 대통령을 틀림없이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집무실에 계신 각하께 구내 직통 전화로 보고 드려 오원철 차관보가 청와대로 와서 각하께 보고 드렸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방산에 착수하여 성공시킬 수 있었던 제3의 인물은 당시 청와대 김정렴 비서실장이다.
기술계 테크노 크라트가 기존고시파 조직에 의한 강력한 분야를 뚫고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적지 않은 권한을 가진 김정렴 비서실장의 덕분이었다.
(필자가 상세내용을 기술할 수 있는 것은 상공부 석유화학과장 당시 오차관보실에서 필경사 보고서를 찬성했기 때문이다)
김정령 실장이 이내용을 필자의 저서 하나에 추천서에 써주셔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2 국방과학 연구소 기구 강화와
試製 試射 완수
청와대 지시한 71년 당시의 국방과학 연구소(ADD, Agency for Defence Development)는 특명으로 능력 있는 연구관이긴 했으나 실제의 병기제작에는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ADD 소장에 KIST 부소장인 활동가 심문택 박사를 임명하고 연구소장의 직급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승격시켰다
연구원의 급료도 KIST의 2배를 지불토록 하여 한국 제일의 연구소로 만들도록 해주셨다.
ADD의 시제는 전국가적인 관심하에 1차 시제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청와대는 계속하여 72년 1월 초 3월 말을 목표일로 하는 2차시제를 지시하였다.
청와대의 두 번의 시제 지시에는 모두 완성기간이 있었다. 1차시제는 71년 말에 끝내는 45일간이었고 2차시제는 73년 1월에 시작해서 3월 말에 끝내는 90일간이었다.
따라서 시간과 싸워 번개처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 문어 " 번개사업"이라는 작전명령을 붙였다.
병기를 처음으로 제작하려면 제작 설계도면이 있어야 했다. 미국의 병기이므로 미군에 제작도면을 요구했으나 비밀이라고 주지를 안 했다.
ADD 기술진은 제품을 가지고 설계도면을 만드는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로 도면을 만들어 해결하였다.
시제를 할려니 원자재도 없고 공구도 없고 원자재도 없었다. 윈자재는 청계천 철물상과 일선 부대에 가서 퇴물병기를 얻어 해결하고 어떤 품목은 일본에서 긴급 도입하였다.
ADD의 시제는 제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능을 시험하는 시사회를 거쳐야 하는데 1차 자체시사, 2차 공개 시사, 3차 VIP 시사를 거쳐야 했다.
2차 공개 시사회에는 청와대 담당 비서관이 참석하여 시사결과를 보고 하게 되어 있어서 이석표 비서관과 필자가 참석하였다.
시사 총! 하고 사격했는데 20mm 발칸포 한대가 불발이었다. 모두 포대 앞에 모였다.
ADD 연구관이 덮개를 열었다.
펑하고 폭발하면서 가열됐던 파편하나가 사겨격대 주위에 둥그렇게 있던 대원가운데 이석표 비서관 가슴에 꽂혔다.
저와 같이 갔던 동료가 순직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아시고 살려야 된다고 하셨지만 눈을 감은 지 사흘 만에 가셨다.
ADD의 시제 시사 시 일어난 사고는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그의 묘소는 지금도 ADD 본관 정문 앞에 있다.
박정희는 ADD의 병기 시제에 절대적 관심을 가지시고 VIP 시사회에 반드시 참석하셨다.
시제품이 만들어지면 대통령 집무실 옆에 전시하여 두고 출입하는 장관들에게 자랑하셨다.
이리하여 ADD가 주동이 되어 우리 손으로 완벽한 시제병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ADD의 병기의 시제의 목적은 군의 전력증강에 도움이 되는 병기와 장비를 양산하는 방산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3. 한국의 방위산업에 대한 미군의 반대
박정희는 방산육성에 대하여 미국의 대폭적 협조를 기대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왜냐하면 닉슨의 괌독트린이 아시아 각국의 방어책임은 각국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자체생산읕 도와 줄줄 알았다.
한국이 시제를 시작으로 방산육성에 착수한다고 하니까 주한 미군 사령관 명의로 반대했다.
미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의거 미국이 방어를 해주니까 한국의 방산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이 방산을 하는 것은 북한을 공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ADD는 어찌할 줄 몰랐다. 오원철수석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 하였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한국의 방산은 250만 향토예비군을 위해서 자체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여 설득하고 계속하라고 하셨다.
이 얼마나 박정희 대통령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슬기로운 지혜인가!
시제와 시사는 ADD가 자체 실력으로 시험하여 성능이 완벽한가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시는 VIP 시사회에서 최종적으로 검증하였다.
새로 만든 방산 육성법인 군수조달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한 병기와 장비생산은 현역군과 예비군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하였다. (2026.6.6 김광모 )
(국방부가 발주하는 양산체제인 栗谷사업에 따른 방위산업으로 진군하다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