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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원 여행5 - 향현원 정원을 보고 민속관에서 전족을 구경하다!

작성자지 안|작성시간19.05.12|조회수113 목록 댓글 0



무원 여행5 - 강만진 마을에서 정원인 향현원을 보고는 민속관에서 전족을 구경하다!

 



10월 24일 우위안 婺源(무원) 리캉 李坑(이갱) 마을에서 승용차를 타고 왕구촌 (汪口村) 을

거쳐 10분을 달려 장완전 江弯镇(강만진) 에 도착해 숙강종사 肅江宗祠 사당을 보고는

 패루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 강영기념관 과 강만인가 와 강씨조거 등 옛 집들을 구경합니다.



오래되었으면서도 아기자기한 강만촌 마을 골목길을 걸어 옛 집으로 들어가 내부에

생활상을 구경하고 나와 이제는 무느져 내린 집들 까지 하나하나 둘러봅니다.




그러고는 좀 더 걸어 여기 장완전 江弯镇(강만진) 마을 북쪽 변두리인

산 아래에 조성된 정원 향현원(鄕賢園) 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긴 회랑 다시말해 長廊(장랑) 이 나타나는데... 여름철에 햇볕을 피하고 또 비나

눈으로 부터 보호되니 예전에 베이징 이화원 에 들렀을때 보았던 장랑이 떠오릅니다.




장랑 을 걸어가노라니 안쪽으로 연못을 파고 연꽃 을 비롯한 여러 꽃을 심었으며 정자

에서 쉬면서 경치를 조망할수 있도록 해 두었는데... 오래된 나무가 많아

자세히 보노라니... 유명 인물들이 여기 장완전을 방문해 기념식수 한 것들인가 봅니다.



그러고는 한바퀴를 도노라니 장랑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말을 탄 돌 조각상

나타나고 그 옆쪽으로는 많은 인물들의 조각상이 보이니....

아마도 여기 장완전 江弯镇(강만진) 출신으로 유명인사 들인 모양입니다.



이 작은 마을 무원현 江弯村(강만촌) 에서는 송나라 시대에 강이린 (江一麟) 장군

궁정 태의 (太医) 강이도(江一道)청나라 학자 강영(江永)

강겸(江谦)"38명의 대신과 21명의 학자" 를 배출했으며 최근에는 중국의

전 국가주석 장쩌민(강택민) 의 할아버지 대 까지 그 조상들이 살았던 마을입니다.



저 인물들 중에 강영(江永) 은 청나라 고증학을 일으킨 사람이고 강겸(江谦) 은 1910년에

자결한 조선 선비 황현(黃玹) 의 저작 매천집(梅泉集) 이 1911년 김택영(金澤榮) 에 의해

중국 상하이에서 7권 3책으로 간행될때 서문을 썼으니 조선과 무슨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요?



매천 황현 선생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죽으면서 남긴 절명시입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생각해 보니 /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구나.”



황희 정승과 황진의 후손 매천(梅泉) 황현(黃玹) 은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데

1855년 광양현에서 태어나 1888년 34세로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과거장의 폐해

목격하고는 낙향하여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처사형 선비 로 생활하게 됩니다.



이건창(李建昌) 및 김택영(金擇榮) 등과 교유하였으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

학문적으로 흠모하고는 ‘경세치용’의 연암 학문이 당대까지

이어지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였으며 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방례초본”, “전제고” 가 전무후무한 작품이라 평했습니다.



1886년 구례로 이사해 시와“매천야록”“오하기문”을 저술했는데 19세기  흥선대원군

집권기 부터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되기 까지 47년간의 정치,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을 자신의 입장에서 서술한 근대사 관련 중요 자료니 매천야록이

역사전반 을 서술한 것이라면 오하기문은 동학 농민전쟁 에 중점을 두어 기술한 것입니다.



황현은 1905년 을사조약후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등 관리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오애시

(五哀詩)”를 지어 추모하였으니 조병세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대신이 국난에 죽는 것은

여러 벼슬아치들 죽음과는 다르네

큰 소리내며 지축을 흔드니

산악이 무너지는 것 같아라



인생은 늦은 절개를 중히 여기고

수립하는 일은 진실로 어렵고 삼가야 한다

낙락장송은 오래된 돌무더기에서

송진 향기 천 년을 가리라



황현 은 중국에 망명했던 친구 김택영 이 잠시 귀국하자 1909년 서울에서 만나

“입도(入都)” 라는 시에서 망해가는 나라의 현실을 표현하였습니다.




“남산에 올라 한번 굽어 본 서울 땅/보는 것마다 더욱 처량하고 혼미해라/큰 거리는

수레바퀴로 가을 먼지만 그득하고/ 두 대궐은 침침해서 대낮도 짧은 듯하다/

폐백으로 맹세했던 벼슬아치들 잘 못 되어가고/서울거리 탈이 없지만 판국이 벌써 글렀구나/

예전에 망한 나라가 다 이 모양이었던가/ 망한 것이 분명하니 슬플 수도 없구나.”




그는 죽음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니 동생 황원(黃瑗) 에게....

“세상 꼴이 이와 같으니 선비라면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오늘 안 죽는다면

장차 반드시 날로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마다 비위에 거슬려 못견뎌서 말라빠지게

될 것이니... 말라빠져서 죽느니 보다는 죽음을 앞당겨 편안함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맞자 그는 9월 8일 “절명시”

유서쓰고는 소주에 아편을 타서 마시고 죽었습니다.



황현 선생은 “자식들에서 남기는 글”에서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위로는 황천(皇天) 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라 하였습니다.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요사한 기운 뒤덮어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라 낮 누수(漏水)소리만 길고나

상감 조서(詔書) 이제부턴 다시 없을 테지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니

그저 내 마음 차마 말 수 없어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라

기껏 겨우 윤곡(尹穀)을 뒤따름에 그칠 뿐

당시 진동(陳東)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그러고는 鄕賢園(향현원) 을 나와 한바퀴 돌아 民俗館(민속관) 으로 들어가니.....



 

 부엌이 나오고 말재갈이며 도자기에 방석과 천에 수를 놓은 것이며

새와 꽃이며 닭과 다람쥐 그림 등이 보이는데 단연 압권은 "전족(纏足)" 입니다.




"작은 발 한 쌍을 가지려면 한 항아리의 눈물을 쏟아야 한다." 전족의 고통 을 잘

표현하는 말이니 전족(纏足) 은 송나라 때 시작되어 명· 청 시대에

유행하였던 것으로 여성의 발을 천으로 꽁꽁 동여매어 성장을

멈추게 하는 풍습이니 세살에서 다섯살 사이에 시작해야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10센티미터 발 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하니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 이었을 것인데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 발은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오그라들어 보기에 몹시 흉측한 모습이었습니다.





발끝으로 종종거리며 걸어야 하였고 등뼈가 기형적으로 튀어나와 서있는 자세도

이상해졌지만 이런 모습니 당시에는 인기 있는 여성상 이었다고 합니다.





전족은 여성을 안방에 가두어 놓고 남성의 성 욕구를 채우려는 목적 에서 시작된 것이니

전족을 하지 않은 여성들은 미인 축에 끼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혼조차 하기

힘들었다는데 청나라 때에는 전족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후 여성운동이 일어나면서 줄어들고 현재는 완전히 사라졌으니 이런 풍습은

사회에 퍼져있던 잘못된 여성관 때문에 생긴 것인데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단지 성노리개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전족하지 않으면 수치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여기 민속관 앞에는 붉은색과 녹색이며 검정색등 갖가지 "우산" 이 많이

보이는데 듣기로는 무원현의 마을 이름에서 딴 甲路(갑로) 표

우산 진열관 이 있다고 해서 둘러보는데..... 이곳은 아닌 모양입니다. 



 

 마을을 뒤로 하고 입구를 찾아 나가는데 장완전 江弯镇(강만진) 마을은 강이 여러

갈래라 마치 운하 도시 같은 느낌이 드니 길 좋고, 산 좋고 물 좋은

아름다운 마을이라는생각이 드는데 서안문 광장의 전각에서 결혼식

재연과 서유기 공연 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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