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서단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공모전과 초대작가제도입니다.
어느 예술단체에서 초대작가제도가 있습니까?
문학의 경우에는 한번의 추천으로 신인작가의 등용은 끝나고 작품으로 작가의 자리매김이 됩니다.
오늘날 초대작가제도의 뿌리는 일제시대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조선미전)입니다.
삼일운동 등 조선인의 자발적인 독립열기가 일어나자 이를 무마시키고,
오세창(吳世昌)· 고희동(高羲東) 등이 조직한 서화협회가 결성되어 전시회를 열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창작활동을 개최하자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1922~44년(23회)에 걸쳐 해마다 개최한 대규모 종합전람회였지요.
처음에는 1부 동양화, 2부 서양화 및 조각, 3부 서예로 구분했고,
10회에 결쳐 열렸던 서예는 1932년에 없애고 공예부를 신설했지요.
이 시절도 서예가 미술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이 많았지요.
조선미전의 운영방법은 1949년부터 1981년(30회)까지 열렸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로 이어졌습니다.
이름도 비슷한 관주도의 이 공모전은 미술대학이 미술인을 배출하기 전 많은 작가를 배출하고
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 대한민국 미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인 작가 등용을 위한 공모전 외에도
초대작가전과 추천작가전을 혼합해 실시한게 문제였습니다.
관 주도의 국전은 한계에 부딪히고 본래 취지였던 신인작가 부문보다
기성작가 부문이 비대해지는 문제점이 있었고,
국전을 둘러싼 잡음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공화국 초기인 1981년 30회 국전을 끝으로 문공부가 개선안을 내어놓았습니다.
국전이 폐지된 뒤 신인작가 발굴만을 담당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이 1982년 창설되었습니다.
관전에서 민전으로 무늬만 바뀌었습니다.
기성작가를 위해서는 국림현대미술관 현대미술초대전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열렸던 미술대전도 사라진 국전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미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 서예, 건축, 사진 등 미술 각 분야에서 입상자를 뽑았고,
공모전 입상은 신인작가에게 등용문역할을 하였습니다.
미술대전 역시 잡음이 끊이지 않아 1989년 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 활동하던 일부서예인들이
한국서예협회를 창설하면서 미협과 서협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이 두 단체에서 똑 같은 이름인 '대한민국서예대전'을 개최해 오고 있습니다.
이 때부터 서예는 미협과 서혐으로 갈렸고,
1992년 서가협회가 생기면서 3개단체로 춘추전국시대가 되었습니다.
서가협회는 국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서예전람회'라는
공모전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지루하게 서단의 역사적인 과정을 소개한 것은
공모전 역사를 되새겨 보자는 의미입니다.
원래 공모전은 신인발굴이라는 취지가 제일 컸습니다.
그런데 신인발굴 외에 그 공모전을 통해 배출된 기성작가들의 초대작가제도가 문제입니다.
여러 번을 거쳐 출품하면 일정한 점수를 얻어 초대작가로 등단하는 제도인데
이 과정에서 금품수수가 만연하고
인맥(주로 도제식)에 따라 자기 문하를 우선적으로 등단시키는 폐해가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지방에서 인맥이 없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10년 이상 출품해도 초대작가 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방식은 조선미전때부터 누적되어 온 대표적인 문제거리였습니다.
조선미전을 주물렀던 김돈희에게서 서예를 배워 조선미전에서 이름을 날린 손재형이
조선미전을 본보기로 해서 만든것이 국전이었고,
그는 여기서 심사 혹은 운영으로 국전을 좌지우지 하였습니다.
손재형을 통하지 않고서는 국전에서 큰 명성을 얻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낙선전이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국전에서 낙선전은 4번 열렸는데 서양화 구상위주에 반발해서 비구상화가들이,
동양화 수묵위주로 한것에 대해 채색화가들이, 낙선전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서예에서도 낙선전이 열렸습니다.
1971년 10월 24~28일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제20회 국전 서예작가평가전이 그것입니다.
이 해 심사에 참여한 박세림·구철우의 제자들이 입상하고,
김충현·유희강·김응현의 제자들과 부산지방 작가들이 도외시되자,
부산작가 김용옥이 주동이 되어 서예평가추진위원회를 구성,
김충현·유희강 등이 국전 입상작 55점을 제외한 228점을 다시 심사하여
최고상과 특선을 주었던 것입니다......
각설하고,
위에서 말한 공모전과 초대작가제도에 대해 논의할 것을 제의합니다.
지금 서단의 문제는 이 공모전이 신인들의 공모를 위한 공모전이 아니고
기성작가들의 밥으로 기능한다는 데 있습니다.
서예공모전이 메이저급 3개단체 외에 군소공모전까지 3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전국의 모든 공모전마다 초대작가제도를 두고 있으니 가히 한국서단은 초대작가천국입니다.
3개단체 초대작가만 해도 2000명이니 나머지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몇 년 출품해서 초대작가가 되면 그 사람들이 심사나 운영으로 공모전에 관여하게 되고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미협(서협, 서가협)은 선거단계에서 부터 끼리끼리 모여서 모의(?)를 합니다.
선거에서 권력을 얻게되면 몇 년동안 자기들이 사용한 선거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공모전이 이용됩니다.
공공연히 특선 얼마, 입선 얼마라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름을 가리고 심사를 해도 모텔에서 심사위원들이 모여서 이름을 외우고,
점수제든 어떤 방식으로 심사를 한다고해도 사전에 정보를 주고받아서
몇명만 짜면 공모전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지도해 준 스승에게 감사차원의 인사는 논외로 하더라도
수백만원이 오가는 사례비는 분명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하나같이 이미 없어진 국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국전의 향수에 기대려고 할까요. 국전이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에 편승해 보려는 술수일 뿐입니다.
명칭도용이니 제발 없어진 국전이라는 말 이제 그만 사용하세요.
아무튼 초대작가로 등단하면, 마치 서예인으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면허증과 같이 사용합니다.
국내 수천명의 초대작가가 있으니 엄청난 서예대국이 된 것입니까.
서단의 문제는 이 초대작가제도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가지 개선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개선책에 대해서 논의를 하였으면 합니다.
역설적으로 공모전이 없어져야 서예가 살아납니다.
수많은 작가들의 프로필을 보면,
아무개대전 초대작가, 심사, 운영을 별의식없이 자랑스럽게 올립니다.
그 만큼 은연중에 중요시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 고쳐져야 서단이 삽니다.
과문한지는 몰라도 타분야 예술인들이 그런 프로필을 사용하는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아직도 조선미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서단입니다.
큰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 최고의 작가입니까?
한번 등용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평생동안 보장됩니까?
긴 서예술의 과정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작가가 개인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단체전에서 눈에띄는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각 단체의 선거에 개입하여 무슨 이사장이나 그 하부의 책임을 맡아 심사나 운영에 관여하고
그 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댓가를 요구하는 반복적인 일을 일상으로 삼고 있을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칭 유명작가이고
이런 사람들이 언론플레이도 잘하는 편입니다.
지나치게 일방적인 주장일까요?
편협된 생각일까요?
강호 고수들이 많은 서예세상에서
여러님들의 견해와 해결책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