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수도 개경은 사천성 개현이다.

작성자마사부|작성시간13.07.23|조회수361 목록 댓글 0

고려사 지리지

 

 고려는 공양왕 2년(1390) 경기를 좌, 우 도로 나누어  장단, 임강, 토산, 임진, 송림, 마전, 적성, 파평 현을  左도로,

개성, 강음, 해풍, 덕수, 우봉 등 현과 군을  右도로 만들었다.

 

 원래 '경'(京)이라는 글자는 천자(天子)가 도읍한 지역이란 뜻이고, '기'(畿)는 왕성을 중심으로 주변 500리를 뜻하는 말이다.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라는 명칭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인 995년(성종 14) 개경 주변을 6개의 적현과 7개의 기현으로 나누었는데, 1018년(현종 9) 이들을 묶어 경기라고 한 것이 시초이다. 1390년(공양왕 2) 경기도란 명칭을 부여하여 경기 좌·우도로 나누었다가 조선 초기에 경기도로 합쳤다.

 

또한 문종의 옛제도에 따라

(문종 23년 (1069) 정월에  양광도의 한양, 사천, 교하, 고봉, 풍양, 심악, 행주, 해주, 견주, 고봉, 풍양, 심악, 행주, 해주, 포주, 봉성, 금포, 양천, 부평, 동성, 석천, 황조, 황어, 부원, 과주, 인주, 안산, 금주, 남양, 수안과  교주도의 영흥, 토산, 안협, 승령과 삭령, 철원과   서해도의 연안, 백주, 평주, 협주, 신은, 우봉, 통건, 안주, 봉주, 서흥등의 주, 현을  경기에 소속시켰다.)

 

 양광도의 한양, 남양, 인주, 안산, 교하, 양천, 금주, 과주, 포주, 서원, 고봉과  교주도의 철원, 영평, 이천, 안협, 련주, 삭령을  경기 左도에,

 

 양광도의 부평, 강화, 교동, 금포, 통진과 서해도의 연안, 평주, 백주, 곡주, 수안, 재녕, 서흥, 신은, 협계를 경기 右도에 각각 소속시켰다. 

두 도에 도 관찰 출척사를 두고 수령관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이 고려시대의 경기도는 어디 인가?

우선 경기의 좌, 우도는 황도 개경에서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앉아서 좌측과 우측을 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지명을 설명하는 글을 보면서 이곳이 어디인지 살펴보자.

 

 황도皇都의 진산鎭山은 송악松嶽(일명 숭악崧岳, 산마루에 신사神祠가 있다.)이며  이외에

용수산龍岫, 진봉산進鳳山, 동강東江(정주에 있다.), 서강西江(즉 禮成江이다.),

 

벽란도碧瀾渡(푸른 병풍 같은 절벽와 거친 여울이 구비치는 곳에 있는 나루이다.  이것은 대륙의 양자강 중류,  사천성의 장강 삼협을 가장 잘 설명한 지명이다.) 가 있고 본 부에 소속된 군이 1 개 현이 12개 있다.

 

벽란도에 대한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시가 한 수 있어 읊어본다.

조수가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도다

아침에 배가 이 누(樓) 밑을 떠나면

한낮이 못되어 남만(南蠻)에 이르도다

사람들은 배를 물 위의 역마라고 말하는데

바람처럼 달리는 준마도 이만 못하네

만약 돛단 배 바람 속에 달리듯 한다면

순식간에 봉래(蓬萊) 선경(仙境)에 이르리니

어찌 달팽이 뿔 위에서 아웅다웅 다투리요

배타면 어딘들 가지 못하랴

 

이 시가 벽란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주는 역사의 증거이다.

바로 양자강 지금의 중경시(옛 이름이 임강시이며 맞은편 장단도가 벽란도이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한나절이면 운남에 도착한다.

즉 남만이 운남지방인 것이다.

벽란도를 설명한 기록에 " 강 양쪽 기슭에 푸른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어서 수십리 밖에서 바라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고 했다.

 

 

1)개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동비홀인데 신라 경덕왕 15년 (756)에 개성군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개성부를 없애고 개성현령을 두어 정주, 덕수, 강음 등 3 개현을 관할하게 하면서 상서 도성에 직속시켰다.

 

 이 현에 대정이란 우물이 있고 岐平渡가 있다.

기평도는 나루로 강을 건너는 요지라는 말이다.  岐는 가림기로 강이 갈라지는 곳 이란 뜻이다.

 

2)우봉군은 원래 고구려의 우잠군(우령또는 수지익이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이 우봉으로 고쳤다.  현종 9년 평주의 소속현이 되었다가,  문종 16년(1062)에 본 개성부에 소속시켰다.  예종 원년 (1106) 감무를 두었다.

九龍山이 있고,  朴淵 이 있다.( 상 하 두개의 못이 있는데 둘 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가뭄에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면 즉시 비가 온다.  웃 못 가운데에 올라 가서 구경 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편편한 바위가 있다.   문종이 어느때 이 곳에 와서 그 바위에 올라 갔더니 갑자기 바람이 일고  비가 쏟아져서 바위가 진동 하였다.   황제가 놀라고 겁에 질렸다.  

  이 때 李靈幹이 황제을 모시고 있다가 龍의 죄상을 지적하는 글을 써서 못에 던졌더니 龍이 즉시 그 등을 물위에 들어내므로 곧 이를 곤장으로 두들겨서 물이 온통 빨개졌다고 한다.)

 

사천성 대파산의 본래 명칭이 구룡산이다.

 

다음은 중국 지명을 현지에서 설명해 놓은 자료이다.

 

대파산(大巴山)
사천, 섬서의 성경계를 서북 동남으로 달리는 산맥. 구룡산맥이라고도 한다. 미창산(米倉山), 대파산이 주요봉이며 한중분지의 북산면은 급하고, 남산면은 밋밋하다. 유명한 촉의 잔도가 이 산맥의 일부에 있다.

강진(江津)
사천성의 남동부 양자강 남안에 위치한 도시. 양자강의 지류인 기강(?江)과의 합류점에 있어서 양자강의 수운에 의하여 중경과 여주(濾州)로 통하며, 사천성 동부의 양조업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가릉강(嘉陵江)
사천성에 있는 양자강의 주요 지류 중의 하나. 상원(上源)은 감숙성의 남동부에서 발원하는 서한수(西漢水)인 백룡강(白龍江), 사천성 합천(合川) 부근에서 거강(渠江) 및 부강( 江)을 합하며 중경의 북동부에서 양자강에 이른다. 뱃길이 편하다.

구당협(瞿塘峽)
장강 삼협 중의 하나. 양쪽 기슭이 가파르고 그 절벽 사이를 급류가 흘러 위험한 곳.

복룡담(伏龍潭)
사천성 관현의 서문밖에 있는 못. 원이름은 이퇴(離堆). 촉의 전설 상 군주였던 이빙(李氷)이 치수를 하면서 만들었는데 후에 얼룡(孼龍)을 이곳에 가두었다고 한다.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굉장히 깊다고 한다.


삼협(三峽)
양자강 상류 사천성 봉절의 백제성에서 호북성의 의창(宜昌)의 남진관(南津關) 사이를 통과하는 대협곡의 총칭.구당협, 무협, 서릉협의 3협을 포함하여 귀협(歸峽), 우동협(右洞峽), 명월협(明月峽), 온탕협(溫湯峽) 등의 오백리에 달한다. 서안을 절벽을 이루고 하도(河道)는 좁고 굴곡이 심하고 물결이 급하며 경치가 좋다. 서릉협은 황묘(黃 ), 등영(燈影), 황우(黃牛), 우간마폐(牛肝馬肺), 병서보검(兵書寶劍), 철관(鐵棺)협으로 되었고 구당협은 하마(下馬), 장군(將軍), 보자탄(寶子灘), 황장배(慌張背), 흑석탄(黑石灘)으로 이루어졌으며, 무협은 구룡(九龍), 우구(牛口), 석문(石門), 청죽표(靑竹標), 설탄(洩灘; 자료집에는 예탄으로 되어있음)으로 되어 있다. 우가 무산삼협을 치수할 때 수로를 열고 있던 용 한 마리가 그만 잘못하여 협곡을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 협곡은 하등의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우는 화가 나서 절벽에서 우둔한 그를 죽여 다른 용들에게 경종을 울렸다고 하는데 지금도 무산에는 착개협(錯開峽)과 참룡대(斬龍臺)가 남아 있다고 한다. 삼협으로부터 칠백리 사이에는 양쪽 언덕으로 산이 연달았고 높은 바위가 첩첩히 쌓였는데 하늘의 해를 가리울 정도고, 내내 원숭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골짜기에 퍼진다고 한다.

충주(忠州)
사천성의 동부, 양자강의 좌안에 있는 도시. 본래 한대의 임강(臨江)현이며, 당나라때 충주를 두고, 송나라에 이르러 이것을 함순부(咸淳府)로  승격시키고, 원대에는 다시 충주로 되고, 명대에도 그대로 두었다가 청조에 이르러 충주 직례주(直隷州)를 설치하여 그 밑에 풍도( 都)기타 3현을 관할하고 있다. 부근에는 치평사(治平寺), 사현당(四賢堂), 파대(巴臺), 서루(西樓), 병풍산(屛風山) 등의 명승이 있다.

이 충주가 지금의 중경시가 되었다.

고려사지리지의 기록대로 임강현이 이곳이다.

 

3)정주는 원래 고구려의 정주인데 현종 9년에 개성현의 속현이 되었다가  문종 16년 에는 개성부에 속 하였으며 예종 3년(1108)에 승천부로 고쳐서 지부사를 두었다.  충선왕 2년(1310) 해풍군으로 낮추었다.

백마산, 장원정(도선의 송악명당기에 이르기를 서강가에 성인이 말을 타고 있는 듯한 명당자리가 있는바 태조가 국토를 통일한 병신년(936)으로부터 120년 간에 이르러 이 곳에 정자를 정하면 고려왕조가 오래 유지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문종이 태사령 김종윤에게 명하여 서강의 餠岳 남쪽에 궁궐을 건축하였다.)

河源渡(이 주의 남쪽에 있다), 重房堤(중방비보였다고 한다. 매 년 봄과 가을에 반주가 부병을 데리고 와서 이를 수축한다.)등이 있다.

서강의 餠岳 남쪽에 궁궐을 건축하였다....라는 고려사의 기록을 생각해보자.

서강은 사천성 민강의 고려시대 지명이며, 예성강이라고 불렸고, 그곳에 현재 도강언이라는 고대 수리시설이 있는데 고대 사천의 왕국인 촉의 유능한 장수가 축조한 것이라는데, 그 후촉 왕의 이름은 왕건이며 그 왕릉이 사천성 성도에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중방비보가 바로 지금의 도강언이다.

도강언의 특징은 강물을 두 흐름으로 가르는 두 개의 거대한 둑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이다.

 

다음은 100 년전 사천성 양자강유역을 여행하고 " 양자강 저 너머 " 란 여행기를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기록이다.

" 민강의 위협적인 협곡위로 나무숲이 울창하고 거대한 둑을 지닌 너비 약 1 백 80 여 미터 되는 땅에 대나무 부교를 통해 티베트로 향하는 길이 나 있는 바로 그곳에 대륙에서 가장 웅장한 사원이 하나 서 있었다. 훌륭한 정원과 빼어나게 아름다운 정자들 그리고 사원 뒤쪽의 절벽을 따라 올라가 산 정상의 삼나무숲으로 사라지는 첨탑들이 이 웅대한 사원의 경관에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이 웅장한 사원은 구석구석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운치있는 예술작품들 사이로 이국의 양치식물인 고비로 둘러싸인 연못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고 살아 숨쉬는 듯한 물줄기가 돌로 조각된 뱀의 입을 통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구에서 시작되는 거대한 돌계단은 단구에서 단구로 이어져 있었다. "

이 기록은 바로 서강 병악의 남쪽에 건설된 궁궐 규모의 長源亭에 대한 설명이.

 

 

4)덕수현은 원래 고구려의 덕물현(인물현)으로 신라 경덕왕이 개칭하다. 문종 10년(1056) 이 현에 흥왕사를 창건하면서 현소재지를 양천으로 옮기다.  祖江渡引寧渡가 있다.

引寧渡는  장강삼협의 상징적 나루터이다.  즉 강 양쪽, 혹은 한쪽에서 줄을 배에 매어 끌어 당겨서 이동시키는 곳이 인영나루이다.

5)강음현은 원래 고구려의 屈押현( 일명 강서)이다.

 굴압이란 장강 삼협의 굴곡지고 물의 압력이 거센 곳을 의미한다.

 

6) 장단長湍현은 고구려의 장천성長淺(야야耶耶또는 夜牙야아 라고도 한다.- 그 그림같은 경치에 사람등이 놀라 감탄사가 지명이 될 정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말한다.)으로 경덕왕때 개칭하였고 우봉군 관할로 하였으며 목종 4 년(1001)湍州로 고쳤고 長湍渡(강 양쪽 기슭에 푸른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어서 수십리 밖에서 바라 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 세간에 전하기를 태조가 이곳에 와서 놀고 간 일이 있다고 하는데 민간에서는 지금까지도 당시의 노래 곡조를 전한다.)가 있다.

 

위의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을 음미 하여보자.

바로 장강 삼협의 풍경을 설명 하는 그대로이다.

장단長湍현은 장강의 거센 여울이 있는곳을 말해준다. 장천성長淺은 장강의 얕은 여울이 급하게 흐르는 것을 말하며, 아예 단주湍州라고 할 만한 곳이다.

 

7)臨江현은 원래 고구려의 獐項현(혹은  古斯也忽次 라고도 한다. 장항은 노루 목덜미를 의미한다.).

신라 경덕왕이 임강으로 고쳐 우봉군 관할현으로 하다.  靈通寺가 있다.(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점에서 송도 도성에서 첫째가는데 즉 아간인 강충 보육성인이 살던 마아갑摩阿岬(산허리를 갈아 놓은듯한 언덕 이란 뜻으로 장강삼협을 의미한다.)지역이다

 임강은 현재 중경시로 충주의 한나라때 이름이라는 설명이다.

한나라때란 말은 고구려와 동시대 이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후한 말에 이르러 삼국지의 동탁, 조조 등이 난세를 만들어 결국 멸망한다.

 대륙의 황하유역은 유방이 세운 전한(-206~ 8년)이 멸망한후  후한이 건국 (25~ 220년)한지 얼마 되지않아 혼란기인데, 후한 광무제 30년간 정도가 조정의 위신이 섯을뿐 내내 어린 황제와 외척의 횡포와 내시의 위세로 220년 동탁과 조조가 한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혼돈속에 빠져 있었던 곳이다.

이때 이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고구려 이었다.

 

8)토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오사함달현인데 경덕왕이 개칭,

 

9)臨津현은 원래 고구려의 津臨城현인데(혹은 烏阿忽)경덕왕이 개칭, 신경의 옛터가 있고 臨津渡가 있다.

임진,  임강은 모두가 사천성 양자강유역의 고려시대의 지명으로 현재도 그 지명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10)松林현은 원래 고구려의 若只豆恥현(之蟾또는 朔頭 라고도 한다.)인데 경덕왕이 여파如罷로 개칭하였고 광종은 이 현에 佛日寺를 창건하였다. 五冠山(효자 문충이 이 산 밑에 살았다고 하며 악부에 오관산곡이 있다.)이 있다.

    木頭雕作小唐鷄(목두조작소당계)

    저子砧來壁上棲(저자침래벽상서)

    此鳥膠膠報時節(차조교교보시절)

    慈顔始似日平西(자안시사일평서)

        나무를 깎아 작은 닭 한 마리 만들어

        젓가락으로 집어다가 벽 위에 앉혀 놓았네.

        이 닭이 꼬끼오 꼬끼오 시간을 알리면

        어머니 얼굴이 그제서야 서산에 지는 해처럼 되리.

 

이 노래를 부른 문충은 고려 시대 사람으로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개성과 30리 정도 떨어진 오관산 영통사동에 살았는데,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벼슬을 했다. 아침에 나갈 때는 반드시 목적지를 아뢰고 갔으며 저녁에 돌아올 때 반드시 얼굴을 뵙고 인사를 했다.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피고 새벽에는 문안하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늙은 것을 탄식하여 <목계가>를 지었는데, <오관산곡>이라는 노래로 악보에 전하는 것을 이제현이 한시로 번역했다.

* 서산에 지는 해 → '죽음'의 이미지

 

11)마전麻田현은 원래 고구려의 麻田淺현(혹은 泥沙波忽)인데 경덕왕은 임단臨湍으로 고쳐 우봉군 관할에 두었다.  후에 적성현에 합쳤다.

임단臨湍 - 이 지명도 임진, 임강과 함께 양자강의 흐름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천성 중경시에서 호북성 의창시 까지의 장강삼협의 거센 여울을 말해준다, 탄이라고 하는데 신탄진이 대표적인 지명이다.

 

12)적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칠중성인데 경덕왕은 중성으로 고치고 래소군의 관할현으로 정했다. 고려초 다시 적성이라 부르고 장단현에 속했다가 개성부로 바꿨으며 후에 감무를 두었다.   곤악이 있다.(신라 이래 소사이다.  산 위에 사당이 있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 황제가 향과 축문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  현종 2년 (10110) 거란 침략군이 장단악 사당까지 이르니 군기와 군마들이 있는듯 보여서 거란병이 겁을 먹고 감히 더 침입하지 못 하였으므로 황제는 이 사당을 복구하여 신령의 보호에 보답하게 하였다. )

이글은 장강 삼협의 협곡의 형상을 적성으로 표현 하고 있다.

 

13)波平현(坡)은 원래 고구려의 波害平史현으로 경덕왕이 개칭하여 래소군 관할현으로 하였다. 鈴平이라고도 한다.

파평이란 물결이 거세 피해를 입으니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지은 지명이다.

파해평사현이란 물결이 거세 피해를 입는 일이 역사에 기록된 지역이란 뜻이다.

 

단 湍 ; 여울 단

찬 淺 ; 얕을 천

파 波 ; 물결 파 등은 장강삼협의 거센 물쌀이 여울져 흐르는 지형임을 나타낸다.

신탄진 新灘津 ; 병서보검협은 신탄과 향계 사이의 4km구간으로 제갈량의 '병법서'라고 전해지는 바위와 보검모양의 바위가 있는 협곡.

 

이상의 모든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은 고려의 수도 개경이 양자강을 끌어 안고 우뚝솟은 구룡산맥(사천성 대파산)을 등에 진 배산 임수의 오백년 고려의 도읍지로 지금 현지 지명이 개현, 개강으로 그대로 천년을 이어온 지역임을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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