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가톨릭농민회사건’의 주인공 오원춘
“땅은 거짓말을 안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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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이 종말을 향해 치닫던 1979년 여름,
정국을 들끓게 했던 ‘가톨릭농민회사건’의 주인공 오원춘씨.
가톨릭계와 정권이 정면충돌하는 가운데
현직 신부가 구속되고 두봉 주교가 추방령을 받는 등
회오리의 중심에 섰던 당시 서른 한살의 청년 오원춘씨는
50을 넘긴 지금도 고향을 지키는 농부로 살아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 없는 농촌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씨의 ‘그후 20년’을 취재했다.
경상북도의 가장 북쪽에 자리한 영양군은
예로부터 산이 생활의 터전이자 삶의 무대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가장 오지(奧地)로 손꼽히는 이곳은
10여년 전만 해도 화전(火田)이 드물지 않았고,
일교차가 심한 산악지역에서 잘 자라는 고추가
군의 대표 농산물로 돼 있다.
글을 읽고 시를 읊기 적합한 이 지역의 심산유곡으로
정착해온 옛 선비들이 많았던 까닭에
문사(文士)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과 작가 이문열이 모두 영양 출신이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79년 가을,
다분히 정적(靜的) 분위기의 영양을
정국(政局)의 한 가운데로 등장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름하여 ‘오원춘 납치사건’이었다.
‘가톨릭농민회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사건은
우리나라 농민운동은 물론 유신정권의 말기사에도
일대 분기점이 됐다.
오원춘(吳原春)씨는 재야와 공권력, 가톨릭계와 정권이
정면으로 충돌했던 당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오씨는 당시 영양군 청기면 청기1동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가톨릭농민회 청기지회장을 맡고 있던 오씨가
‘사건’에 휘말린 발단은 그 한해 전인 1978년에 있었던
‘시마바라 감자사건’이었다.
그해 청기면 주민들은 군청으로부터 공급받은
시마바라라는 씨감자를 파종했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심은 감자의 80%가
싹이 나지 않는 ‘불량감자’로 판명난 것이었다.
농사를 망친 주민들은 당시
가톨릭농민회 청기지회장을 맡고 있던 오씨를 중심으로
‘청기감자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청을 상대로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오씨가 납치된 것은 적은 액수나마
군청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이듬해 여름이었다.
1979년 5월5일, 오씨는 영양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서
정체불명의 청년 두사람에게 납치돼 포항으로 끌려갔다.
그가 끌려간 곳은 모 정보기관의 분실이었다.
이후 오씨는 이 사무실과 울릉도에서
15일간 감금·감시상태에서 지내다 집으로 돌아왔다.
오씨는 그해 7월 자신이 다니던 성당의 주임신부에게
기관원에게 납치돼 구타와 협박을 받은 사실을
‘양심선언’을 통해 폭로하기에 이른다.
경찰은 오씨의 폭로를 ‘자작극’이라고 반박하고
오씨 본인은 물론 오씨의 양심선언을 언론에 알린
영양성당 주임신부와 농민회 총무를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구속했다.
성직자 구속사태는 전 가톨릭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긴급조치 시대에 가위눌려 있던 재야세력이
총결집해 정권과 맞서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안동교구장으로 있던 프랑스 출신 두봉 주교에게
추방령이 내려지고, 이에 프랑스 정부가 항의하는
국면으로까지 치달으면서
‘오원춘 납치사건’은 국내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 수감중인 상태에서 생방송 기자회견 갖기도
이에 당국은 대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오원춘씨를
교도소장실로 불러내 기자회견을 갖도록 만들었다.
수감중인 피의자가 교도소에서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기자회견을 하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오씨는 당시의 기자회견은 물론 그후 열린 재판과정에서도
‘양심선언’의 내용을 부인하고
납치 주장은 자작극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주교측과 변호인들은
이를 ‘고문과 협박에 의한 허위 주장’이라며 반박했고,
그러한 공방 속에 오씨는
1979년 10·26이 일어나기 열흘 전에 열린 1심 선고심에서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그후 오씨는 항소를 포기했고, 79년 12월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한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오씨 사건은
10·26 사태, 12·12 쿠데타, 이듬해의 광주항쟁 등
그 직후 닥친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잊혀져 갔다.
그리고 어언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설 연휴 직후인 지난 2월7일, 자택으로 찾아간 기자를 만난
오씨는 “지금 와서 그 일을 다시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애써 21년 전의 사건을
떠올리기를 꺼렸다.
오씨는 석방 후 몇차례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처음 끌려갔을 때는 물론 구속 후 조사받을 때와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도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오씨는 이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육체적으로 한계상황에 다다르면서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그런 상황에서는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항소를 포기하려 했던 것도 더이상의 법정싸움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일단 목숨부터 부지하고 보자’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는 게 오씨의 얘기였다.
당시 사건에 대한 기억은 결코 떠올리기 싫은 악몽으로
아직 생생히 남아 있지만,
20년이 넘는 세월이 가져온 변화는 확연했다.
사건 당시 31세의 젊은이였던 오씨는 52세의 중년이 됐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 여섯살이던 장남이
이제는 군대까지 갔다온 27세 청년이 됐다.
사건 당시 구타 후유증으로 고막이 터져 고생했던 오씨는
이제는 왼쪽 귀의 청력을 거의 잃어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데 애로를 겪을 때가 많다.
가혹행위 끝에 얻었던 관절염은
어느새 지병으로 굳어져 버렸다.
오씨는 “몸 구석구석 성한 데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20년 전의 납치사건이 이처럼 눈에 보이는
변화만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농민회 활동을 한 지 3년 조금 지나 그 일을 겪으면서,
어떻게 사는 게 옳고 의미있는 삶인지를
내 나름대로 생각하게 되더군요.
‘이러다 무슨 변고를 당하는 것 아니냐’는
공포감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참 신기합디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게 무슨 거창한 이념 따위는 아니었어요.
그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남한테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지금도 그것을 실천하려 애쓰며 살고 있어요. ”
오원춘씨는 전형적인 농사꾼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상 때부터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집안이라
학창시절부터 ‘농사를 한번 멋드러지게
지어보는 것’이 꿈이었다.
학창시절 농사를 지으면서도 다른 무슨 의미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를 고민할 즈음 성당에 열심히 나가는 친구를
사귀게 된다. 지금은 안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 친구를 따라 성당에 나간 것이
그후 ‘농사꾼 오원춘’의 삶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석방후 빨갱이로 인식돼 마음고생
오씨는 결혼후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이 ‘불량감자’문제를 놓고 군청과 맞서다
결국 옥살이까지 하게 된 시발점이 된 셈이었다.
1979년 10월 석방된 후 오씨는
한동안 고문과 수감생활보다 더한
마음고생을 하면서 지내야 했다.
자신을 ‘빨갱이’로 여기는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지은 죄가 있으니 감옥살이하다 온 것 아니냐”며
냉랭한 눈초리로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미운털이 박혀 억울한 일 당했다고
이해해 주는 집안 친척들조차
석방 이후 오씨 주변을 맴도는
형사들의 눈초리를 의식해 발길을 끊었다.
석방후 한동안은 집안 친척들조차
오씨의 집 드나들기를 꺼렸다.
오원춘씨는 그러한 숨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질곡과도 같은 분위기를
그는 일과 신앙으로 견뎌냈다.
우선 “일 당하더니 사람 달라졌다”는 얘기를
듣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전보다 더 열심히
농사에 매달렸다.
이 무렵부터 시작한 ‘유기농 고추재배’였다.
유기농법이라고 해서 달리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확량에 연연하지 않고 농약 치는 회수부터
줄여보는 것이었다.
줄어드는 수확량은 파종 단계에서
거름을 많이 주는 방법으로 보충해 보았다.
거름의 종류와 양을 조절해가며 발아 시기와
모종의 성장 속도를 재 보았다.
이렇게 해서 한해 두해 경험이 쌓인 후부터는
고추씨를 담그면서 파종 후의 수확량을 예상하고
조절하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오씨의 유기농 고추 재배는
올해로 15년이 넘었다.
그동안 순전히 경험으로 얻은 ‘노하우’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오씨의 한해 고추농사 규모는 7,000평 정도다.
이 가운데 2,000평 가량을 농약을 최대한 줄이면서
거름만으로 재배하는 유기농법을 택하고 있다.
유기농법으로 재배하는 고추는 손이 많이 가는 반면,
수확량 자체가 적어 일반 고추보다 값을 더 받아야 한다.
문제는 소비자들이 유기농에 관심은 많으면서도
‘가격’에는 민감해, 공들여 재배해 얻은 고추를
조금 비싸다는 이유로 잘 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추 농사 전부를 유기농법으로 지을 수 없는 게 이 때문이다.
■ 88년엔 고추시위 주도해 관심 모으기도
오씨의 유기농 고추는 계약재배를 통해 판매된다.
미리 얼마 정도를 사주리라는 예상을 하고
그에 맞춰 농사를 지어야 손실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수확한 고추는 천주교 관계자,
가톨릭농민회 일을 하며 안면을 익힌
이러저러한 단체에 관계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소개해 주는 곳으로 팔려나간다.
가끔은 오원춘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주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고추재배 현장을 구경하러 왔다가
‘고객’이 되기도 한다.
고향 출신 문인들이나 농활에 나선 대학생들이
팔순 노모와 아직 출가하지 않은 1남 2녀와 함께
생활하는 오씨 부부의 집을 들르는 경우도 왕왕 있다.
석방 이후에도 오씨는 틈틈이 농민회 활동을 해왔다.
오씨의 ‘활동’이 또한번 세간의 관심을 끈 사건이
바로 지난 1988년 가을에 있었던 ‘고추시위’때였다.
당시 고추가격 폭락사태와 수매량 확대 문제를 놓고
전국의 고추 재배 농민들이 시위를 벌인 일이 있었다.
이 고추시위의 발발지가 바로 영양이었다.
당시 오씨는 가톨릭농민회 영양군협의회장으로 있으면서
이 시위를 주도, 납치사건 이후 잊혀져 가던
자신의 이름 석자를 다시 한번 세간에 알렸다.
그가 치밀한 준비를 거쳐 성사시켰던 고추시위에는
군민 거의가 참여했다.
‘그때 그 오원춘’이 다시 등장한 데 놀란 공안당국은
대규모 경찰병력을 영양으로 집결시키는 등 바짝 긴장했다.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내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영양성당에 몸을 피해 있던 오씨를 만나러 내려오기도 했다.
이 시위는 정부가 수매 물량을 무제한 늘리기로
약속함으로써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됐다.
이 시위 후 오씨는 농민회 일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운동의 전면에서 물러났다.
“젊은 사람들이 일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지만, 무엇보다 집안 식구들
먹여살리는 일이 급했지요.
또 내가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자꾸 그런 데 나서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한테서
더이상 오해받기도 싫었습니다.
고추시위 때 서울에서 내려온 국회의원들이
한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압니까.
‘당신 정치할 생각 없느냐’는 겁니다.
먹고 살아보겠다며 길거리로 나선 사람들한테
그따위 얘기나 하는 정치인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만,
더이상 그런 오해를 받으면 정말 사람 꼴이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더구만요.”
‘농사를 멋드러지게 지어보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농민회 일도 하고, 그 과정에서 옥살이까지 해보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농촌의 현실은 그 꿈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납치될 당시만 해도 300가구가 넘었던
고향 마을은 20여년의 세월 속에서 110여 가구로 줄어들었다.
농사에 인생을 걸어보겠다는 젊은이도 드물어,
나이 52세인 오씨가 마을에서는
‘젊은이’로 분류될 정도다.
아직도 전근대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농산물 유통체계로 인한 문제는
영양고추의 산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어느 농산물이나 풍년이 들어 몫돈을 만져볼라치면
물량이 넘친다는 이유만으로 값이 떨어져버린다.
농협은 농산물 유통보다 농민들한테
돈 빌려주고 얻는 이자 수입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이처럼 악순환의 결실인 농가부채도 심각하다.
오씨도 5,000만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다.
한해 고추 농사 지어도 종자대금, 농약값, 인건비 등으로
적잖은 돈이 사라져 버린다.
그 돈으로 생활비 쓰고, 학비 대고 이듬해 농사 준비하고,
연리 10%에 달하는 이자 갚다 보면
수중에 남는 돈은 몇푼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웬수같은 빚은 세월이 가도
원금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 농촌과 농민 귀한 줄 알아야 하는데…
수입이 좋다는 대체작물을 새로 해보고 싶어도
시설투자에만 기천만원대의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마저 여의치 않다.
‘6시 내고향’에 나오는 살기좋고 돈 잘 버는 농촌은
TV 방송용으로 적당히 포장되고
과장된 모습의 농촌일 뿐이다.
오씨는 한때 농삿일이 워낙 힘들고
빚문제도 해결하기 위해 궁리를 해보았다.
농사를 대폭 줄이면서 빚도 갚을 수 있는 길은
눈 딱 감고 전답을 처분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투자가치가 떨어지는 오지의 전답을
사겠다는 사람도 드물고,
간혹 가격을 물어오는 사람이 있어도
조상 대대로 물려온 땅을 내다판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오원춘씨는 “그런 거 일일이 생각하다 보면
농사 못짓는다”고 말한다.
농삿일 틈틈이 동양학 서적을 읽으며
그 속에서 세상사는 지혜를 찾고자 노력해 본다는 오씨는,
기회가 닿으면 납치사건 당시의 정황 등을 담은
책을 써볼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올 겨울에는 김용옥 교수가 TV에 나와서 하는
‘노자 강의’ 덕분에 농한기를 제법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
“평생 농사지으면서 깨달은 게,
땅은 거짓말을 안한다는 겁니다.
땅에서는 정성을 쏟고 부지런을 떠는 만큼
반드시 결과가 나오거든요.
그런 점에서 보면 농사야말로
원리와 공식이 살아 있는 최고의 과학이지요.
농사란 얼마든지 오묘하고 재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농민들이 다 그런 신명 속에서 일할 수 있도록
농촌과 농민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하는데,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그렇지 않아요. 나 참….”
▲200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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