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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지기 소설

강가에 울다

작성자고영 김동근|작성시간26.06.05|조회수0 목록 댓글 0

                  강가에 울다

                                                                김 동 근

 

청명(淸明) 절기여서 산하가 밝고 깨끗하다. 아침에 일어나 평소의 버릇처럼 아침운동을 간단히 한다. 그리고 집의 앞뒤를 돌며 흩어진 가재(家財)를 정리한다. 청소를 하고나니 마음이 상쾌하다. 거실(居室)에 들어와 TV 앞에 자리를 했다. 마침 이름 있는 가수 3명이 그룹을 지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들어보니 흥미있는 우리의 가요가 아니고 팝송 즉 외국에서 유행하는 노래인데 내가 평소에 관심을 두었던 가사이다.

    

바빌론 강가에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네

약한 자를 억지로 데려와 노래를 부르라니 

어이 거룩한 주님을 생각해 노래를 하리나

우리의 소망을 이밤에 주님에게 전하소서

오늘 바빌론 강가에서 주님을 향해 울었네 

                                                         노래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의 내용      

 

위의 노래는 1978년 중미(中美) 카리브해의 섬나라인 자메이카 출신이고 독일에서 그룹을 지어 활동하는 여지 가수 보니엠이 불러서 유행이 되었다. 흑인이던 여자 가수는 우리나라에도 다녀갔는데 노래의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인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에 끌려가서 노예로 살아가며 고국인 시온의 언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했다.

이스라엘 사람은 셈족의 여러 지파(支派)중에 한 종족이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3세기 지금의 팔레스타인지역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새우고  에루살렘에 성전(聖殿)을 건립했다. 이때 지금의 이락 국가인 메소포타미아지역의 바빌로니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기름진 땅을 배경으로 문명이 발달한 나라였다. 기원전 587년에 바빌로니아는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으로 분열되고 약해진 사이에 쳐들어와서 나라를 파괴하였으며 유대인들 8천여명을 강제로 데려가 노예로 삼았다. 위의 가사는 이때 이국(異國)인 바빌로니아에서 노예로 서럽게 살아가며 강가에 나와 노래를 불렀다. 끌려간지 49년 후인 기원전 538년에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이 바빌로니아를 치고 노얘생활을 하는 유대인을 고국으로 돌려보낸다. 유대인들은 귀국을 하지만 일부는 바빌론에 남았고, 이란으로 가서 떠돌아 다니며 살아가는 유대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유대인이 고국을 등지고 고통을 겪게된 경위를 바빌론의 유수(幽囚)라 하고, 이후에 뿔뿔히 나라를 버리고 이국(異國)을 떠돌아다니며 살아가는 민족의 모습을 그리스어로 '뿌리다. 흩어지다.'라는 의미의 디아스포라라고 했다.              

꿈에 그리는 고국에 돌아온 유대민족은 실망했다. 고토(故土)이던 그곳에서 누구도 그들을 반겨주지 않는다. 옛날의 유다왕국의 국민들은 민족간의 갈등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그곳과 주위에는 아랍 민족들의 분쟁이 끊이지를 않는다. 아름다운 성전이던 에루살렘이나 서쪽에 있는 시온의 언덕도 황폐하고 정겨운 옛날의 모습이 아니다. 거기에 마케토니아의 알렉산더와 이웃나라인 에집트로부터 계속해 시달림을 받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렇게 실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이리저리 밀리던 유대인들은 고국의 잔여(殘餘)세력과 힘을 합하여 기원전 141년에 가까스로 이스라엘나라를 재건하였다. 몇백 만명의 소수민족이 4억이 넘는 거대 아랍연합에 시달리며 살아오지만 이스라엘의 민족성은 강하고 좋은 점이 많았다. 엣부터 탈무드라는 전통의 율법(律法)을 열심히 배우고 따르는 민족이기도 하다. 탈무드는 유대교의 경전이나 생활의 지혜를 망라한 가르침이다. 먼저 유대인을 생각하면 단결력이 강하고 물질에는 구두쇠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들을 한다. 영국의 작가 찰스디킨스의 작품 크리스마스캐롤의 주인공인 스쿠리치가 유대인이고 세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도 유대인이다. 그렇지만 자기 민족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아끼지를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분쟁이 심한 발칸반도 주위와 강대국이던 그리스와 로마와 에집트들의 국가에 언제고 시달리면서 살아온 인내력이 강한 민족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거대 아랍국가들과 대립을 하였고 11세기에 십자군의 침입을 받았으며 16세기 초에 오스만의 속국이 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유일신인 야훼를 신앙하고 시온은 이스라엘 도시 에루살렘의 서쪽에 있는 작은 언덕의 이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시온이 에루살렘 성전의 가까운 곳에 위치한 언덕이었으나 세월이 흐르고 유대인들이 이국의 하늘아래에 살아가며 시온은 그들의 하나님인 야훼가 계신 곳이고 유대인들에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시온이 유대인의 상징이고, 이스라엘 국가이고 한편 그리움의 대상인 것이다. 19세기 유대인 기자가 시온주의를 제안(提案)하고 그 시온주의가 세계 각곳의 유대인들에게 공감을 얻는다. 옛날의 화려하던 솔로몬 시절을 재현하자는 주장이다. 유대인은 개략해 1700만명이라고 한는데 이스라엘에 `700만이 그리고 미국에 그 숫자만큼  거주를 하며 그중에 금융인과 고위직에 있는 유대인이 많다고 한다. 그러므로 미국은 언제고 이스라엘에 일이 있으면 나서서 돕고 그리고 중동에 미국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외에 유대인은 유럽과 아프리카와 동남아 지역에 분포해 살아가는데 그들의 가슴에는 언제고 시온주의 사상이 가득하다. 그들은 야훼의 가르침인 자본주의의 정신에 성실하므로 잘 살아간다. 반면에 거대 아랍연맹인은 무슬림의 전통을 놓고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져있다. 어느 지면(紙面)의 내용인데, 고국(故國)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유대인은 있는 재물을 챙겨가지고 고국에 가서 아낌없이 헌신을 하고, 아랍 사람들은 개인이 피해를 입을가봐 멀리 도망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분쟁이 있으면 언제고 이스라엘이 아랍국에 승리를 한다는 것이다. 세계 1차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17년에 강대국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를 하던 영국의 외무장관인 벨푸어가 유대인이 국가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선언을 한다. 한편 아랍인들에도 영국은 보호를 한다는 언질로 이중정책을 피력했다. 2차대전을 겪으며 유대민족은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자인 나치 힛틀러의 반 유대정책으로 번제(燔祭)방식의 홀로코스트를 당해 폴란드에서 570만 여명이 학살되고 다른 지역에까지 훨씬 많은 희상자가 발생을 했다. 그렇게 유대민족이 아랍연맹과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들의 영토를 두고 분쟁하며 명맥을 이어오다가 1948. 5월에 그 지역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한다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이웃의 레바논이나 시리아와 아프리카의 에짚트국가들과 국토의 경계를 놓고 계속해 분쟁을 하고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반 이스라엘 단체인 하마스와 레바논의 과격단체 헤즈볼라들의 저항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지고 아랍과의 중동전쟁이 4회에 걸쳐서 있었다. 1948. 5월과 이후 20여년 사이에 이스라엘은 에짚트와 아랍의 연랍국들을 대상으로 전쟁을 했는데 원인은 주변의 이스라엘 가자지구와 가까운 에짚트의 시나이반도 등을 놓고 분쟁을 했으며 여러나라들이 양측을 도운 큰 전쟁이었다. 그때마다 미국과 유대인 우방들의 도움을 받은 이스라엘이 승리를 했다고 할 수가 있겠다.이스라엘과 아랍의 여러나라가 분쟁을 하고있는 중동의 하늘에는 지난 세계대전 말고는 언제고 짙은 전운(戰雲)이 드리워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허약한 국력때문에 타의(他意)에 의해 중국이나 일본으로 그리고 근세에는 미국 등지로 흩어져가 사는 국민들이 많았다. 중국의 몽고와 청나라의 침입으로 그리고 일본의 임진왜란에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국의 하늘아래를 떠돌며 고난의 삶을 살았으며 근세에는 왜인들의 침략으로 연변과 러시아와 미국과 서구에 많이 흩어져나가서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사람들이 고려 여인의 비단 옷을 보려고 구름처럼

궁중으로 몰려드는데, 집에 돌아가서 앵돌아진

내자(內者)를 어이 달래는가 나는 모르겠네

                                         원나라 말기 서정시인 장욱의 고려모습 전문

 

13세기 몽골인들이 중화를 통일하고 원나라를 세운 다음에 고려를 침입한다. 7회에 걸쳐 고려를 쳐들어 와서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양국이 불평등의 화의(和議)를 맺었다. 그리고 원은 고려국에 젊은 여자들을 징발해 보내라고 한다. 400여명의 공녀(貢女)를 요구해 많은 여인이 원에 끌려가서 어렵게 살아가는데 그 외에도 고려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20여만이 상주를 하게 된다. 그로 인해 고려의 풍정(風情)들이 원나라 사회에 여러 모습을 보이는 것을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했다. 위의 시는 고려 여인에 남편의 마음이 기울어질까 걱정을 하는 부인을 달래려는 남자들의 마음을  노래했다.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간 젊은 여인들은 가비(家婢)나 후첩으로 들어가 학대를 받으면서 비천한 삶을 살아간다. 원나라에 끌려간 남자들도 환관(宦官)으로 관청의 시설물을 보호하거나 관원들의 심부름을 하는데 고생이 되기는 남녀가 같다고 하겠다. 고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흩어져 서럽게 살아가며 모두 고통을 겪지만 더러는 특이한 삶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 개성에서 낳은 기여인(奇女人)은 1333년 14세의 꽃다운 나이인데 원나라에 공녀로 갔다. 원에 간 그녀는 베이징의 궁중(宮中)에서 환관으로 일하는 고려인인 고용보의 주선으로 왕궁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는 원나라 5대임금 순제 때인데, 다시원(茶侍院)에서 순제의 차를 끓이고 심부름을 하였다. 다시원에서 차심부름을 하다가 기소녀는 젊고 예뻐서 여자를 좋아하는 순제의 눈에 들었다. 젊고 예쁜 여인에 반한 순제는 곧 기여인을 후비(后妃)로 들였다. 당시의 북방민족은 성의 도착증(倒錯症)을 지닌 남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변태 성행위란 관음(觀淫)이나 구음과 상대의 학대행위로 정상적인 남녀의 성행위가 아닌 여려가지의 형태를 이른다고 하는데, 기여인은 이를 잘 참아내고 순제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순제의 정이 기황후에 기울자 제 1 정비(正妃)인 타나실리의 강샘과 이에따른 그녀의 압박은 가혹했다. 기여인에게 마편(馬鞭)을 휘두르고 그리고 화저(火箸)로 온몸을 지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영리한 기여인은 이를 굳게 참아내고 순제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다가 기여인이 순제의 아들인 애유식리달엽을 출산하고 그리고 1953년에는 그녀의 기지(奇智)로 아들이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한편 기여인은 궁내의 요직에 고려인과 가까운 몽고인을 배치하고 원나라 궁내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자 향리(鄕里)의 기여인 오빠인 기삼만과 기자오들은 기여인의 배경으로 기고만장을 한다. 모두 요직을 꿰어차고 임금인 공민왕을 능멸을 하는 것이다. 이때인 1365년 기여인은 대원제국의 정후(正后)에 오르고 실권을 장악하지만 대원제국도 쇠락의 길에 접어들 때이다. 고려국의 공민왕은 기씨 일가의 행태에 그들을 모두 제거하고 배척을 하였다. 이에 기황후는 고국에 감정을 가지고 군사를 일으키지만 고려도 이에 강력하게 대응을 한다. 원나라 역시 홍건적아 활개를 치고 민란이 자주 일어나며 혼란해질 때인 1369년인데 기여인은 이승을 하직하였다. 이후에 순제도 사망하고 아들인 애유실리달엽이 대원제국의 왕위에 오르지만 만난을 일으킨 주원장에 의해 원나라는 망하고 명나라가 세워졌다. 고려 역시 원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압록강으로 출병하던 이성계와 조민수들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조선을 창업하므로 고려도 망하였다. 기여인의 주검은 향리로 운구되었다하고, 경기 연천에 기황후의 묘소가 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조남기는 1927년 충북 청원에 낳았다. 왜정의 억압과 가정의 빈궁으로 13세가 되던 해에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리어 만주 연변의 길림성으로 이거(移居)를 했다. 그가 23세 되던 해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남기는 중공지원군에 징집이 되어서 평북 대유동의 중공 지원군 사령부 사령관 팽덕희 52세에 조선어 통역병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때 거대 중화의 주석인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 장령 28세가 소련어 통역장교로 조남기와 같이 근무를 하게 되었다. 둘은 형과 아우로 부르며 절친이 되어서 밤이면 모안영은 잠자리에서 자신의 결혼 1년차 새댁인 유송림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고, 그렇게이 지냈다. 1950. 11월 하순경에 미 공군 F86 폭격기가 압록강 철교의 폭파임무를 띄고 대유동 상공을 오가고, 그러다가 중공사령부의 가건물을 발견하고 상공을 선회하며 살피고 간다. 이에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가 위험을 알고 옆의 금광갱안으로 사무실을 옮기자고 제안을 하는데 팽덕희는 '군인이 무에그리  겁을 내는가, 일없다.;고 반대를 한다. 그래도 홍학지는 겁이 나서 야간에 직원들을 동원해 금광갱안으로 사무실 집기를 옮겼다. 다음날 25일 아침인데 안영이 남기에게 목조 가건물에 계란을 구워먹으려 가자고 제의를 했다. 김일성주석이 중공지원군의 파견에 고마운 답례로 계란을 선물하였고, 그 계란을 갱 밖의 목조건물에 보관을 했다. 참모인 안영 성보 고서흔 셋이서 계란을 먹으려 가건물에 가고, 남기는 배탈이나서 거절을 하고 뒷산에 올라가 앉아서 쉴 때이다. 남기의 머리위에로 악명 높은 미군폭격기가 굉음을 내지르며 산을 넘어와 목조건물로 내려꽂이듯이 하며 가히 아스팔트도 녹여버린다는 네이팜탄을 쏟아붓고 공중으로 올라서 다시 한번 공중을 선회하고 산을 넘어가 버린다. 팽덕희와 참모들이 갱안에서 회의를 준비하다가 빆에서 벼락치는 소리를 듣고 나가보니 가건물은 화염에 휩싸이고 불덩이 하나가 튀어다니며 '애고, 애고 저기, 저기 아닝이 - 애애고 아닝이 -'라고 소리를 친다. 수습해보니 옷에 불이붙은 참모인 성보이고 안영과 서흔은 화염속에서 불타고 있다. 팽덕희는 어이가 없어 하늘을 바라보며 망연히 서있다. 시간이 흐르고 한참의 후에 대원들은 불꺼진 잿더미를 헤집어서 안영과 서흔의 불타고 남은 숱덩이 2개를 찾아냈다. 조남기는 배탈이 나서 살아난 셈이다.

안영과 서흔의 유해는 평북의 열사능에 운구가 되어 안치했다. 팽덕희는 난감해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만을 내쉬고 있다. 모안영의 비보를 그의 부친인 모주석에게 전할 용기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중공지원군 파견의 자리인 장행회(壯行會)가 끝나는 자리에서 아들인 안영을 딸려보내며 모가 '잘 주탁한다.' 말하고, '걱정 마시라.'고 팽이 대답릏 했는데 - 팽은 몇달후 국공내전에서 공산화운동으로 같이 고생을 하던 외교부장 주은래에게 안영의 소식을 전하고 주은래가 가까스로 비보를 모에게 연락했다. 소식에 접한 모택동은 놀라서 마당으로 뛰어나가 '내가 안영을 파견에서 뺏더라면 이런 일이 없을 건데 주석의 아들이라고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뇌이며 한나절이나 한숨만 내쉬고 먼산바라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에 유송림이 안영의 유해를 고국으로 가져오자고 하지만 모는 '모두가 거기에 있는데 내 아들만 그럴 수가 있는가,라며 거절을 했다. 이후 팽덕희는 모택동에 밉보이고, 팽 역시 모택동의 선진화운동을 비판하다가 모가 조종하는 홍위병에 조리돌림을 당하고 감옥에 가서 앓다가 곧 타계했다. 모택동은 1893년 중화 후난성에 낳아 잠시 교직에 있다가 1920년경에 공산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모는 교직에 있을 때 교장인 양창제의 딸 양계회와 결혼해 안영 안청 안용 세 아들을 두었다. 이후 공산화운동에 처인 양계회는 군벌인 하건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죽고 안영은 2차대전때 소련에 기갑장교로 참전후 귀국해 한국에 파견이 되어서 그렇게 되었고. 거리를 부랑하다가 안청은 불량배들에 매를 맞아 머리를 다치고 장에인이 되었며 안용은 거리에서 행불이 되었다고 한다. 거인 모택동도 가정이 그래서 불우하다. 조남기는 모택동의 보살핌으로 승승장구해 중공군에서 가장 높은 상장(上將)에까지 오르고 전역 후에도 중화전국위원화 부주석을 하며 흩어져사는 연변족중에 가장 출세한 자로 꼽힌다. 이후에 그는 금의를 걸치고 향리에 오갔는데 그도 무정세월에 떼밀려 어쩔 수없이 2018년 91세로 이승을 하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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