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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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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鳳凰)
후세에 들어서 이 봉황은 용과 대치되어 용은 황제를, 봉황은 황비를 뜻하기도 한다.봉황 한마리가 우주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머리는 태양, 등은 초승달, 두날개는 바람, 꼬리는 나무와 꽃, 다리는 대지에 해당한다.
봉황의 앞모습은 기러기, 뒷모습은 사슴 또는 뱀 목에 물고기 꼬리, 황새 이마에 원앙새 뺨, 제비 턱에 닭 부리, 올빼미 귀, 용 무늬에 거북 몸통을 갖췄다고 한다. 깃털빛은 빨강,파랑, 노랑, 흰색, 검정의 5색이다.봉황은 원래 상고시절의 한 민족을 일컫는 동이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의 동물이다. 태평성대가 되면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새로서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배가 고파도 쪼아먹지도 않는다는 영물로 묘사되었으니 지고의 염치와 도덕을 갖춘 새로 각되었던 것이다.하늘을 한번 날면 구천리를 난다는 전설속의 영수로,군왕이 갖출 모든 조건을 상징적으로 갖추었다하여 군왕인 천자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다.오늘날에는 대통령의 휘장으로 한 쌍의 봉황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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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봉황형 장식(고구려) |

만봉스님의탱화 '봉황도'

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 국보 287호 (제일위에 봉황이 있다.)

백옥 봉황 향로
중국 고대의 상상 속의 동물. 줄여서 인(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수컷을 기(麒)라고 하고, 암컷을 인(麟)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용·봉황·거북과 함께 사령수(四靈獸)의 하나로 꼽혀 왔다. 처음에는 사슴을 닮은 일각수(一角獸)였으나 차츰 신비적인 요소가 더해져 복잡괴기한 모습이 되었다. 소의 꼬리, 말의 발굽, 오색찬란한 몸매를 가진 기린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며, 무기인 기린의 뿔은 앞끝이살덩이로 감싸여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없게 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인은 仁獸이다. 왕자가 있으면 곧 이른다(麟仁獸也有王者則至)>하여 성천자(聖天子)의 치세에 한해서 나타나는 상서로운 짐승이라고 생각하였다.
기린은 용이 모든 동물을 상징하며, 봉황이 모든 조류를 상징하고, 거북이 모든 바다 짐승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모든 네 발달린 육지 짐승을 상징한다. 또한 기린은 살아 있는 모든 생물에 대한 완벽한 사랑, 친절, 자비심을 나타낸다.
전하기를 기린은 조심스럽게 살아 있는 곤충이나, 풀을 피해다니며 걸음걸이는 예의 범절에 맞춰 조절하며, 기린은 옳지 못한 것(죽은 고기나, 남이 먹다 놓은 것)을 먹지 않으며, 더러운 일체의 것을 먹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도 기린의 성품을 알기에 결코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한다.
채옹(蔡邕. 133~192)은 기린은 五行의 화신이라고 했다. 즉 기린은 5원소 (세계를 구성하는 5행 : 木, 火, 土, 金, 水)과 5德의 구체적인 상징으로 앞서 말한 5가지의 색을 가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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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기린흉배 석주선 기념민속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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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고요가 기르던 산양. 푸른 털이 나있고 몸은 거대한 곰처럼 생겼다. 여름에는 늪가에 살고 겨울에는 소나무숲에 살았으며 성품이 충직하고 정직했다.시비(是非)·선악(善惡)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 해치라고도 한다. 사자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머리 가운데 뿔이 하나 있다.
해태는 중국 요(堯)임금대에 태어났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옛 부터 신선사상이 발달한 중국에는 현실에 없는 환상적인 짐승을 많이 만들어 놓고 있다. 이런 성스러운 환수(幻獸)가운데 하나가 해태이다.
중국 문헌 《이물지(異物誌)》에 <동북 변방에 사는 짐승이며, 뿔이 하나 있고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이 다투는 것을 들었을 때는 옳지 않은 사람을 받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유신지(庾信誌), 후한서여복지(後漢書與服誌), 회남자(淮南子)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상의 동물인 만큼 이름도 여러가지로 불려겼다. 해치, 해타(海駝), 개호, 신양(神羊), 식죄(識罪 : 죄가 있고 없음을 잘식별함)둥 다양한 이름이 그것이다. 일반에서 흔히 부르고 있는 해태라는 말은 오히려 그 어원이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예로부터 정의를 수호하는 동물로 믿어져 고대중국에서는 법을 심판하는 사람에게 해치관이라 하여 해태가 새겨진 관모를 쓰도록 하였다. 한국에서는 대사헌의 흉배 무늬로 장식되었다. 또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여겨 석상을 만들어 궁전 등 건축물 좌우에 세우기도 하였다.
해태의 특징과 성격
또 다른 문헌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전국(戰國)시대 제(劑)나라 선왕(宣王)이 애자(艾子)를 불러 물었다. "옛날에 해태란 짐승이 있었다던데 그것이 어떤 짐승인가?" 애자가 답하기를 "요순(堯舜)시대의 신수(神獸)이온데 조정안에 살면서 신하들 가운데 사악한 행위를 하거나 사특한 마음을 먹은 자가 있으면 대어들어 잡아먹어 버린답니다. " 애자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그 짐승이 있다면 따로이 먹이를 줄 필요가 없을 것이옵니다. " 고 부패했던 당시 조정을 풍자하고 있다. <애자잡설(艾子雜說)>
이런 각종 문헌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해치라는 짐승의 모습은 뿔을 하나 가진 동물로서 기린 얼굴에 발톱을 가진 형상으로 푸른 비늘이 돋치고 두툼한 꼬리가 달린 환상적인 동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설(一說)에는 해태의 얼굴이 기린이 아닌 소를 닮았다는 우수마면(牛首馬面)의 모습을 띄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한 힘이 어찌나 억센지 백수(百獸)가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전반적인 외양에 이 짐승의 속성은 충(忠)하고 곡직(曲直)하여 옳고 그름을 능히 판별하며 구덕(九德)을 고루 갖추었다고 한다. 특히 대단히 영물스럽고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령스러운 재주가 있어 만일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뿔로 덤비어 받아넘기는 정의의 동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궁궐에 살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로 성군(聖君)을 도와 현명한 일을 많이 하였음을 느껴볼 수 있다.
해태가 정의의 상징이란 속성은 중국이나 한국 등 동양의 문화에 다양하게 이용 반영되었다. 우선 중국 고대의 묘족은 분쟁이 생겼을 때 신의 뜻을 물어서 행하는 신의재판(神意裁判), 해태결송(決訟)이란 말이 있는데 이때는 해태라는 동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즉, 재판관 앞에 두 당사자를 세우고 뿐 하나 가진 해태라는 짐승을 데려오면 해태는 그 본성대로 반드시 죄지은 자에게로 가서 그 하나인 뿔로 떠받는다는 고사가 있다. 또한 초(楚)나라에서는 해태를 법수(法獸)로 사법(司法)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하는 말이 전한다. 따라서 임금님을 비롯 법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들은 이 해태 모습을 한 관(冠)을 쓰도록 했다. 이를 해치관이라 하였으며 한나라 때는 이 해치관을 혜문관(惠文冠)이라 부르기도 했다.
초나라 임금이 금관 대신 해태관을 쓰고 국사(國事)를 다스린 것이 본이 되어 그 후부터 법을 다스리는 수령(守令)이나 어사(御使)들의 관복으로 이해태관과 해태를 흉배에 수놓은 옷을 입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한(漢)나라 때부터는 궁(宮)이나 관아(官衙)앞에 해태상을 놓아 드나드는 사람들이 부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특한 마음을 씻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 해태라는 짐승이 등장하는 기록은 신라시대부터이다. 신라시대의 관직에 해치부가 있다. 또한 중국의 경우처럼 오늘날의 사법부라 할 수 있는 대사헌의 법모나 흉배에 가식(加飾)되기도 함으로써 정의를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해치관에 담 긴 뜻을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릇 관리의 공적과 과오를 기록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것이니, 헌부(憲府)에 있어서는 관계가 더욱 중한 것이다. 지금부터 계속하여 해치관을 높이 쓰고 백필(白筆 사 관이 가지는 붓으로 항상 사모에 비녀처럼 꽂았다)을 꽂고 앉아 누구는 어질었고, 누구는 충성하였고, 누구는 아첨하였고, 누구는 간사하였다고 해서 착한 법을 삼고 악한 것을 경계한다면 나라는 맑게 될 것이다.
" <신동국여지승람> 또한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복 사령관 앞에 해태를 붙인다고 되어 있다.
이는 비행의 규정권(糾正權)이 있는 암행어사를 해태의 의미가 전사된 치사라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종 8년에 개정된 흉배표시 제도를 보면 당상관 이상인 문관의 것은 쌍학(?鶴)으로 하고 무관은 쌍호(?虎)로 하였으며 당하관인 문관은 단학(單鶴), 무관은 단호(單虎)의 흉배로 통일하였으나 대사헌의 흉배만은 해태를 가식케 함으로써 암행어사에게 해태관 을 쓰게 하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圖說 寒國美術五千年) 근년까지 우리나라 법관이 중국의 해태관을 변형시킨 변모와 해태문양의 검은 법복을 입었던 것은 바로 초나라 이래의 전통이었다.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이런 정의의 상징으로서 해태의 이용은 조선시대 임금님이 근무하던 근정전 앞에 해태상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세시풍속에 호랑이 그림은 대문에, 개는 광문, 닭은 중문, 해태는 부엌에 붙여 벽사용 그림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을 먹고 산다는 해태는 일반적으로 호랑이처럼 무서운것이 특징인데 가정집에서 사용되었던 민화의 해태는 친숙한 모습이다.
해태는 선과 악을 간파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덕분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서 악한 사람은 뿔로 받아 응징한다고 한다. 이 같은 속성 때문에 해태는 재판과 관계지어졌으며, 후세에는 해태의 모습이 재판관의 옷에 그려졌다.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을 감찰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헌부를 지켜주는 상징으로, 사헌부의 우두머리인 대사헌이 입는 관복의 흉배에 해태를 새겼다. 또한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국회의사당과 대검찰청 앞에 해태상이 세워져 있다. 이는 해태처럼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항상 경계하며, 정의의 편에 서서 법을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로 인해 다른 전설상의 동물들은 훌륭한 왕이나 성인이 태어나거나 크게 활약을 할 때 나타났지만, 해태는 왕의 재판이 공정하게 행해지는 시대에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잦은 화재로 공사가 지연되자 남쪽의 관악산이 휴화산인 이유로 그 불기가 빌미가 된다는 지관의 주장에 따라 광화문의 좌우에 해태상을 설치하여 화재를 막고 길운을 빌었다고 한다.
해태가 이런 화마(火魔)를 제압하는 영물로서의 의미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놓여있는 일명 '광화문 해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화문 앞 해태가 서울의 방화풍수 때문에 건조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박제형(朴濟炯) 의 조선근세정감(朝鮮近世政鑑)에 적혀있다.
이 기록에는 "대원군이 음양 풍수설을 믿어서 새 궁궐이 예부터 자주 화재를 당하는 것은 모두 불형체인 관악산이 안산으로 된 데에 연유한다. 이에 흰 돌로써 물짐승 형상을 새겨서 궁문 앞 양쪽에다 두었다. 또 관악산 제일 꼭대기에다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우물에다 넣어서 화기를 진압하였다." 고 적혀 있다. 여기에는 해태가 물에 사는 수성(水性)의 짐승이라는 이야기와 따라서 수제화(水制火)의 오행설에 맞추어 관악과 바라보게 했다는 이야기다.
악몽을 물리치고 사기를 쫓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굴뚝에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 밑부분에도 이 불가사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 역시 굴뚝을 통해 사된 것이 침입하는 것을 막으라는 뜻이 담겨져있다고 합니다.
얼른 보면 코끼리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는데, 코끼리와는 다른 여러가지 신격의 조건이 충족되어 있다고 한다. 목조 건축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화재인바, 경회루의 돌난간에 이 불가사리를 세워 불길의 접근을 막았다.
6.25때 포탄파편이 난비한 중에서도 경회루가 무사하였음은 불가사리 덕일까? 불가사리는 파편에 맞아 코 부분이 떨어져 나가있다. <경복궁-설화당>
한편, 처남집 다락방에 몇날 몇일 숨어지내다 심심하고 무료해져서 먹다 남은 밥알 찌꺼기를 뭉쳐 괴물모양의 인형을 만들 게 된다. 그런 데 이 괴물모양의 밥알인형이 처음에는 바늘을 먹더니 점점 못, 숟가락, 젓가락, 그리고는 집 안의 모든 쇠붙이를 다 먹게되고, 먹을 때마다 이 괴물의 덩치는 커져만 간다.
급기야 이 괴물은 승려가 숨어있던 집안을 나가 전국을 돌며 모든 쇠붙이를 먹었고 그 때마다 이 괴물을 잡기위해 병사들이 출동하지만 이 괴물은 피부가 쇠로 이루어 진지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병사들이 던지는 창, 칼 등의 무기들까지 먹으면서 덩치를 계속 키워나간다. 이 때문에 이 괴물에 '불가사리'라는 이름이 붙게된다.
승려는 처남집을 나가면서 문제가 있을때 펴 보라며 종이쪽지를 처남에게 주었고 불가사리가 나타나 사람들이 공포에 떨자 왕이 명을 내려 불가사리를 없애는 자에게 벼슬을 내리겠다고 한다. 처남은 그 소문을 듣고 매형인 승려가 준 종이쪽지를 펴 보았는데 거기에는 '불가살이(즉, 불로 죽이는 것이 가능하다)'가 적혀 있었다. 결국 처남은 불가사리를 유인해 불을 지펴 쇠로 이루어진 불가살이의 몸을 녹여 없애 벼슬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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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이貊耳
아래 내용은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맥이(貊耳)"라는 책에서 발췌 편집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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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은 고대조선족의 한 일파인 맥(貊)족이 신성시하던 동물입니다..맥족과 예족을 합쳐서 예맥족이라고 하죠.. 맥족과 예족은 다른 민족이 아니라 맥을 숭배하던 예족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득한 옛날 장백산에서 인간이 처음 났을 때부터 이 땅에는 맥 이라는 신령한 짐승이 있어 우리 조상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혜를 심어 줬으므로 우리 조상들은 그 짐승을 신수(神獸)로써 숭상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이 우리를 가리켜 맥족이라 하였으니 하늘의 뜻을 이어서 법을 세운 환인, 복희, 신농, 치우, 소호, 단군, 대련, 대순, 천을이 다 우리 맥족의 조상이었으며, 하늘의 입이 되어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한 공자 또한 맥족의 후예였다.......("맥이" 서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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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에 맥은 쇠를 먹고 살며 이 동물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곰의 형상을 닮았지만, 코끼리의 코를 하고 있고, 발은 호랑이의 발, 꼬리는 소, 눈은 무소의 모습을 닮았다고 합니다. 이 신성한 짐승은 항상 인간 곁에 있으면서 인간의 질병을 막아주고, 생명을 보호하며, 지혜를 심어주었는데, 사람이 밖에 나갈때는 항상 곁에 다니면 독충을 제거했고, 또한 맥이 쇠를 찾아 먹기위해 돌을 깰 때 일어나는 불꽃을 보고 불을 사용하는 지혜를 얻어냈다고 합니다. 이 동물은 평소에는 깊은 산 속이나 동굴과 같은 어두운 곳에서 생활하며 밤이면 인가에 내려와 인간이 꾸는 악몽을 먹고 산다고 한다.
본초강목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뱀 독사를 혀로써 핥아먹고, 그 골절이 강직하고 속이 두터워 골수가 적다' 고 했으며,
썼는데, 동철로 된 그릇에 놔두면 그릇이 녹아서, 오직,,그 맥의 뼈에 담아 두어야 새지 않고, 맥의 똥은 동철이 뱃속에 들어간
자에게 먹이면 소화되어 물이 된다.
현무
현무
(玄武)는 사신(四神)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상상의 동물이다. 암수가 한 몸이고 뱀을 몸에 칭칭 감아 얽혀 뭉쳐 있는 다리가 긴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암컷인 거북의 머리와 수컷인 뱀의 머리가 원을 그리며 교차하는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는데, 이는 암수가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일반적으로 현무는 생명의 끝, 곧 죽음을 알리는 북쪽(北)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며 북쪽이 검은색을 나타낸다는 사실에서 ‘현(玄)’이라 하며, 거북의 두꺼운 등껍질을 등에 이고 방어에 뛰어난 점과 뱀의 날카로운 이빨이라는 점에서 ‘무(武)’라고 한다고 알려져 있다. 오행 중에서는 물(水)을 상징하며, 계절 중에서는 겨울을 관장한다. 또한 현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360종류의 갑각류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현천상제(玄天上帝), 上帝翁, 상제공(上帝公)이라고도 불리어지며, 청대에는 북극우성신군(北極佑聖?君)에 봉해졌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다른 사신들과 같이 그려져 있다. 또한 경복궁의 북쪽 문인 신무문(神武門)의 천장에도 현무의 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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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龍)
용(龍)은 동아시아의 신화 및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신성한 동물, 즉 영수(靈獸)라고 하여 매우 귀하게 여겼다. 한국에서는 용을 가리켜 ‘미르’라는 고유어로 불렀었다.
중국의 문헌인 ≪광아 廣雅≫ 익조(翼條)에 용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놓았다. “용은 인충(鱗蟲) 중의 우두머리〔長〕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용의 모습은 중국 한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9가지 종류의 동물의 모습을 합성한 모습을 하고 있다. 즉, 머리〔頭〕는 낙타〔駝〕와 비슷하고, 뿔〔角〕은 사슴〔鹿〕, 눈〔眼〕은 토끼〔兎〕, 귀〔耳〕는 소〔牛〕, 목덜미〔項〕는 뱀〔蛇〕, 배〔腹〕는 큰 조개〔蜃〕, 비늘〔鱗〕은 잉어〔鯉〕, 발톱〔爪〕은 매〔鷹〕, 주먹〔掌〕은 호랑이〔虎〕와 비슷하다. 입가에는 긴 수염이 나 있고 동판을 두들기는 듯한 울음소리를 낸다. 머리 한가운데에는 척수라고 불리는 살의 융기가 있는데, 이것을 가진 용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다.
아홉 가지 모습 중에는 9·9 양수(陽數)인 81개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銅盤〕을 울리는 소리와 같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턱 밑에는 명주(明珠)가 있고,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逆鱗)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 : 공작꼬리무늬같이 생긴 용이 지닌 보물)이 있다.”
용은 날씨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마음대로 먹구름을 동반한 번개와 천둥, 폭풍우를 일으키고 물을 파도치게 할 수도 있다. 또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인간들에게 가뭄을 내려 고통을 안겨 준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가뭄이 오래 지속되면 용의 기분을 풀어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냈다.
또한 물고기나 뱀 등 비늘을 가진 360종류의 동물들의 조상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물 속을 통치하는 왕으로 여겨졌다.
뱀이 500년을 살면 비늘이 생기고 거기에 다시 500년을 살면 용이 되는데, 그 다음에 뿔이 돋는다고도 한다.
용은 입에서 기를 내뱉어 불꽃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용은 신통력을 써서 하늘 꼭대기나 지하 깊은 곳까지 순식간에 도달하거나, 몸의 크기와 형태를 마음대로 바꾸는 능력도 있다. 이러한 용의 능력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여의주라는 신비한 구슬을 통해 발휘한다고 여겨졌다. 이 여의주는 주인의 소원은 모두 들어주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것을 손에 넣으려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통력 때문에 용은 천계를 통치하는 옥황상제의 사자로 받들어졌다. 그런 까닭에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용의 위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용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황제를 용에 비유하여 황제의 얼굴을 ‘용안(龍顔),’ 황제의 옷을 ‘용포(龍袍),’ 황제의 보좌를 ‘용좌(龍座),’ 황제의 눈물을 ‘용루(龍淚),’ 황제의 덕을 ‘용덕(龍德),’ 황제가 타는 수레를 ‘용거(龍車)’라고 부르게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조선의 역대 군주들을 칭송한 서사시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란 제목을 붙인 이유도 다 여기서 비롯된다.
특히 발톱이 5개인 오조룡(五爪龍)은 황제를, 발톱이 4개인 사조룡(四爪龍)은 황태자 및 제후를 상징하였다. 조선 역시 왕은 오조룡복(五爪龍服)을, 왕세자는 사조룡복(四爪龍服)을, 왕세손은 삼조룡복(三爪龍服)을 입었으나, 말엽에는 모두 오조룡복으로 통일하였다. 다만 경복궁 근정전의 왕좌의 천장에는 예외적으로 발톱이 7개인 칠조룡(七爪龍)이 그려져 있다.
용은 불교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八部神) 중의 하나가 되어 불법을 옹호하는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다. 고구려 고분의 수호신 사신도 방위신(황룡이 중앙으로 이동한 방위신)
(북)현무
(우)백호
주인
(좌)황룡
(남)주작 →
(북)현무
(우)백호
황룡(황제)
(좌)청룡
(남)주작
황룡
중국에서는 황룡이 황제를 상징합니다 .
고구려 고분 벽화 에는 사방신으로 황룡을 그렸습니다. 특히 강서 대묘에는 고분벽화 좌측벽면에 황룡 그림이 잘 남이있습니다. 중앙에는 무덤의 주인또는 임금이 있고 사방으로 4방향을 지키는 사방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중국이 황제로 칭하면서 상징동물은 황룡으로 하였으므로 주인자리에 황룡이 들어가고 그자리에 청룡으로 바뀐듯 한데....







청룡
사방신장(황룡을 빼고 부르겠습니다)중 여러 동물들이 복합한 한마리의 영수로 그 생김새는 사슴의 뿔 말의 얼굴 호랑이의 목털, 뱀의 몸통, 물고기의 비늘, 닭의 다리, 메기의 수염으로 이루어진 용의 대표적인 생김새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룡과는 달리 청색의 몸을 가지고 있어 바람을 다스리며 오행 중 목(木)을 주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푸른색으로 상징이 되고 잇습니다. 또한 청룡은 동방을 다스리는 으로도 통하고 동방칠수(東方七宿)를 대표한다. 백호와 같이 풍수지리설 중 왼쪽을 나타냅니다. 백호가 죽은자를 다스리는 데 비해서 청룡은 생명의 탄생을 다스린다고도 합니다. 또한 청룡은 목성을(태세신(太歲神;태세는 목성과 같음) 다스린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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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 |
목 (木) |
화 (火) |
토 (土) |
금 (金) |
수 (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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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五帝) |
청제(靑帝) |
적제(赤帝) |
황제(黃帝) |
백제(白帝) |
흑제(黑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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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方位) |
동방(東方) |
남방(南方) |
중앙(中央) |
서방(西方) |
북방(北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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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동물 |
청룡(靑龍) |
주작(朱雀) |
황룡(黃龍) |
백호(白虎) |
현무(玄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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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季節) |
봄(春) |
여름(夏) |
긴여름(長夏) |
가을(秋) |
겨울(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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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五色) |
푸른색(靑) |
붉은색(赤) |
노랑색(黃) |
흰색(白) |
검은색(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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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五性) |
생성.성장 |
분열.조화 |
완성.수렴 |
결실.휴식 |
응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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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는 용과 뱀의 중간자적 존재로서, 민간전설에서는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도 보입니다. 요즘도 시골에 계신 어른들은 집안에 있는 구렁이를 그 집의 수호신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무기는 1000년을 묵어야 용이 되는데, 용이 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이무기로 남아 있으면 그 원한이 쌓여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나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서해 용왕의 아들 이목이 나오는데, 이 이목이 바로 이무기를 한자로 쓴 말이라고 합니다. 또 앞서 이야기한 용의 아홉 아들 또한 아직 완전한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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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례 호박소의 이무기 이야기 당장면 골짜기에 시례 호소박라는 沼가 있는데, 그 소에 용이 한 마리 들었다는 유래가 있다. 옛날 그 골짜기에 이미기(이무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떤 선생 밑에서 수학했는데 어찌나 영특한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였다. 하루는 제자가 저녁에 "오줌 누러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하자 스승은 허락하고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도중에 깨어 일어나 보니 아직도 제자는 돌아와 있지 않았다. 이런 일이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여서 선생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뒤를 밟아보기로 하였다, 사흘째 되는 밤 한시경에 이르자, 선생이 수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제자는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뒤를 밟아보니 한 마을에 있는 소로 가더니 곧 물에 들어가 노는 것이었다. 선생이 유심히 살피니 분명 그 제자는 사람이 아니고 이무기였다. 그가 한참 물 속에서 놀다가 나와서 다시 둔갑을 하여 사람으로 되돌아오자, 선생을 급히 돌아와 자는 척하였다. 얼마 후에 제자가 돌아와서 슬그머니 옆에 누워 자는데, 선생이 몸을 만져보니 몸이 매우 싸늘하였다. 그 때 마침 마을에 비가 오지 않아 무척 가물었는데 선생은 옛말에 "사람이 용이 되면 가문다."는 말이 있듯이 아마도 그 제자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마을 주민들이 선생에게 찾아와 비가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간청하자 선생은 제자를 불러서 "애야, 백성들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데 네가 비 좀 내리게 할 수 없느냐?" 라고 했지만 "선생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하면서 제자는 시치미를 떼고 거절하였다. 그러다 선생은, "네가 무슨 재주가 있는지 밝히지 않아도 되니 비만 내리게 해다오." 이렇게 계속 제자를 재촉하였다. 거듭되는 선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승낙하고 붓글씨를 쓰다가 먹을 손가락에 찍어 하늘에 튕기자 먹비가 막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제자는 옥황상제가 오년간 수양하라는 명을 내린 이무기였다. 그 이무기가 명을 어기고 비를 내리게 하자 옥황상제는 저승사자를 내려보냈다. 하늘에서 뇌성병력이 치며 선생 앞에 저승사자가 나타나 "여기 이미기라는 사람이 있느냐?" 묻자 이미기는 선생 뒤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 선생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뒷산에 이미기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갑자기 그 나무에 벼락이 내리치고는 날씨가 다시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 후 아무도 이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아마 등천을 못해서 그 길로 시례 호박소로 들어간 것이라고도 한다. 간혹 선생이 그 소로 찾아가면 이무기가 눈물을 흘리더란 이야기가 전한다. |
백호
상상속의 백호는 각 방위를 관장하여 지키는 신. 오방신(五方神)·오방신장(五方神將)·십이지신(十二支神)·사신(四神) 등으로 나타난다. 오방의 신은 주작(朱雀)·백호(白虎)·현무(玄武)·황룡(黃龍)·청룡(靑龍)으로, 청룡은 동쪽의 목(木)기운을 맡은 태세신(太歲神)을 상징한 짐승으로서 왼쪽이며, 주작은 남쪽으로서 앞쪽, 백호는 서쪽으로서 오른쪽, 현무는 북쪽으로서 뒤쪽이며, 황룡은 중앙이다. 따라서 청·백·흑·주색은 각각 동·서·남·북을 의미하며 황색은 중앙을 뜻한다. 그 중 청룡·주작·백호·현무는 사신으로서 상징적 동물의 표현이며 사신총(四神塚)을 비롯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 벽화에 주로 보인다. 또한 청룡·백호는 좌청룡·우백호라 하여 주산(主山)에서 찢겨나간 좌우의 산맥을 이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에서 터의 명소(名所)를 중심으로 하여 지칭하는 것이고 이 명소 역시 유택(幽宅)으로 삼고 있어 이 때의 방위신은 유택의 방호신(防護神)으로 인식된다. 한편 오방장군·오방신장은 무속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데, 무신도(巫神圖)에 나타난 오방신장은 붉은 복장에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든 장군상이며, 색깔·기운·방향·동물 등으로 표현된다. 십이지신으로 쓰이는 십이지는 자(子;쥐)·축(丑;소)·인(寅;호랑이)·묘(卯;토끼)·진(辰;용)·사(巳;뱀)·오(午;말)·미(未;양)·신(申;원숭이)·유(酉;닭)·술(戌;개)·해(亥;돼지)로서 각 방위와 시각을 의미하며, 통일신라시대 무덤의 판석에는 방위에 맞춰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수호신적(守護神的) 기능도 엿보인다.
서쪽에는 28수(宿) 중 규(奎) ·누(婁) ·위(胃) ·묘(?) ) ·필(畢) ·자(?) )·삼(參)의 7개 성좌(星座)가 있는데, ‘묘’성좌는 호랑이가 다스린다고 한다. 일설에는 ‘삼’성좌가 백호였다고도 한다. 《시경(詩經)》은 백호를 의로운 짐승으로 보고 있는 반면, 《인원비광경(人元秘?經)》은 흉신(兇神)으로 기록하고 있다. 백호를 그린 백호기는 천자(天子)가 거둥할 때 사용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초기(4세기 중반 ~ 5세기 중반)에는 머리와 세부가 호랑이와거의 비슷하게 표현되었는데, 단지 목과 몸통 꼬리가 가늘고 긴 파충류같이 그려져 그 구별이 가능했다. 그러나 여전히 백호는 익살스러운 얼굴에 이상하리만큼 길고 볼륨 없는 신체 때문에 수호신으로서 위협적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중기(5세기 중반 ~ 6세기 중반) 이후에는 과장된 아가리와 부릅 든 붉은 눈, 위와 아래로 뻗은 희고 날카로운 송곳니, 앞으로 내밀어 쳐들어 올린 앞발 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사실성을 지닌 존재로 호랑이와는 별개의 모습으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후기(6세기 중반 ~ 7세기 중반)에 이르러 백호는 호랑이와는 완전 별개의 동물로 그 상서로운 특성이 고루 갖추어진 수호신으로서의 백호의 모습이 갖춰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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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중묘 백호도
고구려 평양 호남리 사신총 서쪽 벽면의 백호
![]() 경북궁 북쪽문인 영추문에 그려진 백호 |
주작
주작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의 고대 문헌은 대부분 주작이 곳 봉황이라고 언급하고 있어서 주작은 봉황에서 유래 한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 그 구체적 모습에 있어서 각 문헌은 그형태는 닭과 같고,뱀,사슴,용,거북 등의 각 부분을 떼어다 합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이는 단순이 서수(상스러운 동물)의 의미를 강조한 표현이다. 초기(4세기 중반~5세기 중반)벽화 무덤에서 주작은 아직 피부감이나 무게감이 전혀 들어나지 않는 선묘로 그려져 있으며 그모습에 있어서도 닭과 매우 닮아 있어 상스러운 동물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중기(5세기 중반~6세기 중반)를 지나 후기 (6세기 중반~7세기 중반)에 이르러 주작은 화려한 색체와 치밀한 선묘로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군데 군데 상스러운 동물임을 상징하는 표현들이 곁들여져 있어 주작 표현의 변화를 한번에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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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잡는 개
전형적인 토종개의 모습에 목에 검은 방울을 달고 있는 벽사용 네눈박이 개의 모습이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비바람이 몰아쳐도 멀리서 오는 도둑이나 귀신의 소리까지도 듣고 보아야 하므로, 벽사용 개나 호랑이는 두눈으로는 모자라 네눈, 네귀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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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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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새
붕새가 만리를 날아감. 즉, 머나먼 여로나 앞길이 양양한 장래를 뜻하는 말이다. 또는 범인으로서는 생각도 미치지 못하는 원대한 꿈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 ‘소요유’편에서 시작된 말이다.
붕자를 사전에서 보면 ‘큰 새’, ‘상상속의 새’ 등으로 쓰여져 있다. 전국시대 도가의 대표자 장자는 <소요유>편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북해의 끝에는 곤이라는 이름의 큰 물고기가 살고 있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가 되는지 모른다. 그 곤이 변해서 붕이라는 새가 된다. 붕의 등도 몇 천리의 길이인지 모른다. 이 새가 한번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구름처럼 하늘을 덮어버리고, 바다가 출렁거릴 큰 바람이 일어나는데 단번에 북해 끝에서 남해의 끝까지 날아간다.
제해라는 이 세상의 불가사의를 잘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붕새는 바닷물을 차 올리는데 3천리나 되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오르며 9만리를 여섯달 동안 쉬지 않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날개를 한번 접고 쉰다고 한다.
한번에 9만리를 나는 대붕을 보고 작을 새가 이를 비웃으며 말했다.
“대관절 저것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기껏해야 대여섯 자 숲 위를 날뿐인데 은근히 재미가 나는데.”
이는 평범한 사람은 위대한 뜻을 품은 이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장자는 자연속에 묻혀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꿈꾸던 인물이다. 그가 이 엄청난 새를 이야기한 것은 세속의 상식을 뛰어넘어 무한한 자유의 세계에 거니는 위대한 자의 풍모를 말하려던 것이다.
여기서 유래되어 ‘붕곤’ 또는 ‘곤붕’이라 하면 상상 할수 없을 만큼 큰것을 의미하게 되었고, ‘붕도’, ‘붕정’은 웅대한 계획이나 포부를 의미하게 되었다.
오늘날에 청운의 꿈을 품은 젊은이에게 ‘앞길이 구만리 같다’라고 말한다. ‘붕정만리’에서 파생된 표현이다. 속뜻은 평범한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은 심오하고 원대한 목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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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철이 (깡철이)
‘꽝철이’는 경상도일대에서 들어볼 수 있는 말이다. 옛 어른들이 가끔 하던 말에 ‘꽝철이’라는 게 있었다. “이 꽝철이 같은 놈” “저 꽝철이를 어째야 좋겠노”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지목되는 대표적인 대상은 집에 끊임없이 걱정을 몰고 오는 아주 못난 자식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허술하면서도 정감 가게 행동하는 아랫사람 또한 그렇게 불렸다. 역설로도 구사될 만큼 오랜 세월 우리네 삶과 함께해 온 상상 속 생물체가 꽝철이였다.
하지만 그 이름이 정작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역시 가뭄 때였다. 논밭과 함께 농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갈 즈음, 밤 시간 마을 넓은 마당에 모여 함께 더위를 식히던 어르신들은 으레 꽝철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놈이 마을 인근에 날아와 앉음으로써 가뭄이 찾아들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그걸 내쫓아야 비가 온다며 꽹과리를 들고 나서고, 할머니들은 또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축출 방법을 구사한다며 연대감을 과시하곤 했었다.
그럴 때 어른들은 꽝철이가 온몸이 환한 불덩이로 돼 있고 꼬리 부분은 공작새의 날개같이 활짝 펴진 빗자루 모양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가물 때마다 아이들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런 생물체를 찾아내려 용쓰곤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민속학 쪽 자료에 보니 꽝철이는 과연 움직이면 불처럼 뜨거운 가스가 몸에서 발산돼 구름이 증발되고 땅이 메마르게 되는 불의 신이라고 설명돼 있다. 구름과 비를 몰고 다니는 물의 신 용과는 반대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자료는 용이 되려다 실패한 구렁이인 ‘이무기’를 가리키는 경상도식 이름이 꽝철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어떤 이는 용과 꽝철이는 출생부터가 다르다고 이견을 보이는 바, 용은 陽物인 잉어가 오래 묵어 되는 것인 반면 꽝철이는 陰物인 지네`뱀 등이 화한 요괴라는 것이다.
여름날 장마철 홍수가 나서 강물이 넘처나고 날이 개이기전에 어른들이 하늘을 보면서 장마가 끝난다는 말로서 이제 꽝철이가 올라온다고 하였다. 꽝철이가 강을 따라 내려가면 비가오고 올라오면 비가 거친다고 하였다. 어릴때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꽝철이가 어디 올라오고 있는지 하늘을 아무리 살펴 보아도 보이지 않고 파란 하늘에 두둥실 더가는 흰 구름만 했살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것만 어린 나에게 보일 뿐이였다.
상양[商羊]
중국 농민들은 용 이외에도 상양이라는 비를 부르는 새가 있다고 믿었다. 상양은 한쪽 다리밖에는 없는데, 옛날에는 상양이 뛰어 다니는 것을 보아서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오래전에 아이들이 눈썹을 찌푸리고 한쪽 다리로 뛰어다니며 "천둥이 치고 비가 올거야. 상양이 여기에 다시 왔으니까"라고 노래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상양은 강물을 입에 머금고 날아와서 그것을 메마른 대지에 비처럼 뿌린다는 것이다.
한 고대의 현인은 그 새를 집에서 길렀다. 그는 때로는 소맷부리에 새를 넣어가지고 다녔다. 이 상양이 한번은 제나라 세자의 옥좌 앞을 날개를 흔들며 깡충깡충 걸어갔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놀란 세자는 신하를 노나라 궁전에 있는 공자에게 보내어 자문을 구하였다. 공자는 상양이 그 지방 인근에 홍수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따라서 운하와 제방을 만들어서 홍수에 대비하라고 충고하였다. 세자는 공자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커다란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 고분 강서중묘 벽화 주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