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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작품 소개

[스크랩] 김기창-성당과수녀와비닭이

작성자호산|작성시간11.10.01|조회수626 목록 댓글 0

 

                           “고맙습니다.”

                                    -. 김기창의 드로잉「성당과 수녀와 비둘기」 

 

 

  어찌알았으랴. 내가 미술을 이토록 좋아하게 될 줄을. 신기할 따름이다.

 

미술과 관련된 유년의 추억이란 「선데이 서울」속 사진을 먹지 대고 그린 뒤 색깔만 교묘히 칠해 선생님께 된통 혼난 초등학교 방학 숙제에 대한 기억, 온통 새파랗게 칠해놓은 나의 하늘 그림을 본 뒤 “관찰력 제로, 표현력 제로, 구성력 제로.”하며 혀를 쯧쯧 차고 날 안쓰럽게 쳐다보시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그 눈빛. 이것이 미술과 관련된 내 기억의 전부이다. 게다가 내 주위엔 미술은커녕 예술을 하는 사람조차 작대기 휘둘러 하나 걸리는 사람이 없다. 그런 내가 미술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아마 그 때인 듯하다. 출장 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회사에 일찍 들어가야 혼나기만 하겠다싶어 어슬렁거리던 차에 마침 눈에 뜨인 곳이 화랑이었다. 그곳에서 본 그림이 김기창의 문자도(文字圖) 판화였다. 그때만 해도 김기창이 누군지도 몰랐다. 단지 글씨가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국문과 출신인 내게 글씨란 소통의 도구이지 그림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문자가 그림이 되다니. 그림이란 원래 멋진 풍경이나 예쁜 정물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의문에 앞서 희한하게도 그 그림이 편안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림을 보고 있는 순간 꼬이고 꼬인 회사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걱정도 되지 않았다. 굵은 먹선 몇 줄기가 빨간 바탕에 휙휙 그어진 그림일 뿐인데 그 그림을 보고 있자니 엉킨 출장일을 당당하게 풀어낼 자신감이 들었다. ‘까짓 한 번 부딪혀보자’하는 용기마저 갖게 했다. 그림에서 힘찬 기운이 뻗치는 듯했다. 물론 용기보다 현실의 벽은 더 단단해 끝내 출장일을 제대로 해결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무렵 우연히 보게 된 그림을 통해 그림도 삶의 위안이 되고 평안을 가져다줌을 알게 되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난 종종 시간을 내서 전시장을 둘러보게 되었고 끼고 다니는 책도 소설책에서 그림책으로 서서히 바뀌게 되었다. 바로 김기창 때문에.

 

   

                       문자도/1984/69x88                                    점과 선 시리즈/1993/181x337

 

하지만 김기창은 먼 산과 같은 존재였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박봉의 봉급쟁이 처지에 김기창의 그림을 소유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뻗어봤자 잡히진 않고 그 거리감만 확인하며 한숨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좋은 걸 어쩌랴. 도록을 뒤적거리거나 화랑 전시장에 걸린 그림으로라도 대리만족 하는 수밖에.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2007년 입동을 막 넘긴 늦가을 무렵, 생긴 것과는 딴판으로 가을을 심하게 타는 나는 그날도 쓸쓸함을 달래려고 옷깃을 세우고 인사동으로 갔다. 이곳저곳 화랑가를 기웃거렸지

만 가슴 한켠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 헛헛함은 그림 감상으로는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아니 달래지기는커녕 내 쓸쓸함이 도리어 배가되었다. 이유인즉 그림 때문이었다. 벽에 걸리지도 못하고 비좁은 상업화랑 한구석에 처박히듯 던져져 있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그림. 운보 김기창의 작은 드로잉이었다. 몇 년 그림판을 기웃거렸으나 운보의 연필 드로잉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 놀랄 만도 하건만 놀라기에 앞서 그림 내용이 내 가슴속을 아리게 파고들었다. 이 늦가을에 걸맞게.

   그 그림은 지금은 바티칸 교황청에 가 있는「성당과 수녀와 비둘기」의 밑그림인 듯한 드로잉이었다. 내리닫이로 그려진 드로잉은 그림이 아래쪽으로 삼분의 이 정도 차지하고 위쪽 왼편에 길게 「聖堂과 修女와 비닭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사인이나 도서(圖署)는 없었다. 그래서인가 화랑주는 친절하게도 어디서 구했는지 큼지막한 김기창의 도서를 그림 아래쪽과 연결해 표구를 해놓았다. 빨간색 인주가 선명한 도서는 작품 감상하기에 지나칠 정도로 눈에 거슬렸다. 화랑주 입장에서야 판매를 위해선 꼭 필요할는지 몰라도 믿음이 사라진 미술시장이 떠올라 쓴 웃음이 나왔다.

  

                                 태양을 먹는 새/ 1968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1957/119.5x239.5

 

   부인이면서 같은 화가의 길을 걷는 우향 박래현이 막내딸 ‘영(瑛)’을 임신하였을 때 영감을 얻어 운보는「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를 그렸다. 비록 청각장애인이지만 운보에게는 또 다른 감각이 있었던 것일까. 훗날 막내딸은 ‘아빠보다 더 심한 장애인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수녀가 되었다. 수녀가 되겠다고 길을 나서는 막내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봤을 운보의 눈빛이 드로잉 위에 실루엣처럼 걸쳐져 나는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곱 살 때 장티푸스에 걸려 귀머거리가 된 운보 김기창. 그림에 재주가 있음을 알아본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이당 김은호에게 사사(師事) 받게 된다. 열일곱(1931년)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선 운보는 채색, 수묵, 추상, 구상 등 어느 한 곳 머물지 않고 모든 분야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어 ‘한국의 피카소’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이당 문하에 있을 때 운보의 호는 운포(雲圃)였다. 친일에 대한 사죄일까? 해방과 함께 그는 포(圃)에서 답답한 테두리라 여긴「큰 입 구(口)」자를 떼어내고 운보(運甫)로 호를 바꿨다. 작품도 이당에게서 사사받은 일본풍의 세필화에서 힘찬 먹 선의 수묵화로의 변화를 꾀했다. 아마 그때 운보가 벗어버린 것은 입 구자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답답한 청각장애마저 벗어버리려 한 것을 아닐까하고 생각을 확장하니 웬지 더 쓸쓸해졌다.

 

      

                                             전복도(戰服圖)/1934                     아악의 리듬/1967/86x98

 

 

    

                                 청산도/ 1967/ 85x100.5                        바보화조/ 1987/56x56

 

    그해 늦가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달래려고 난 망설임 없이 운보의 드로잉을 구입했다. 지금 당장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작품은 우선 가져가고 작품값은 차후에 달라는 화랑주의 세심한 배려를 난 단호히 거절했다. 바로 현찰로 지급하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 은행으로 향했다. 내가 부리나케 은행으로 달려가 통장 속 만 원짜리를 박박 긁어 출금한 것은 만 원 권 지폐속의 세종대왕을 보고자 함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장애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화의 거장이 된 운보 김기창을 한 번 더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만 원권 지폐속의 세종대왕이 운보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가을을 탓하며 쓸쓸해하지 않기로 했다. 회사일이 힘들 때 김기창의 그림에서 자신감과 용기를 얻었는데 그해 늦가을 또 한 번 운보는 내게 위안과 힘을 주었다. 만약 내 앞에 운보가 살아 돌아온다면 난 그에게 두 손 가지런히 모아 절이라도 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제 삶에 힘을 주셔서.” 그렇게 말한다면 청각장애인인 운보가 알아들을 수는 있을까. 내 생각엔 아마 히죽 웃어줄 것 같다. 아주 멋들어지게.

그해 늦가을 운보를 만나 나의 가슴앓이는 봄기운에 눈 녹듯 스르르 치유되었다.

 

 

                                                     성당과 수녀와 비닭이

 

 

운보 김기창 (雲甫 金基昶 1914-2001)

 

1914 서울 출생

1930 서울 승동 보통학교 졸업

 

개인전

1970 「김기창 화전」(현대화랑 )

1972 「운보 김기창 화백 신작 감상회」(서울화랑)

1976 「김기창 화전」(서울 화랑)

1977 「운보 김기창 - 성화전」(경미화랑)

1980 「화도 50년 기념 운보 김기창 초대 회고전」(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1983 농아복지 기금마련 자선전 「운보 김기창 풍물 스케치전」(국립현대미술관)

「김기창 작품 전시회」(롯데 미술관)

1985 L.A. 운보 김기창 작품전 ( L.A. 한국 문화원)

1989 「김기창전」(송원화랑)

1991 「운보 김기창 화백의 어제와 오늘」(롯데백화점 잠실점 그레이프홀)

「운보 김기창 황금백자전」

1993 「운보 김기창 팔순 기념 대회전」(예술의 전당) / 「김기창전」(현대화랑)

1995 롯데화랑 부산점 개관기념 초대전.

1997 롯데화랑에서 '운보 김기창 예술 60년-미공개 작품전'

 

단체전

1931-40 제10∼19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및 특선

1936-43 제1∼6회 후소회전

1950-93 제7회∼제 20회 후소회전

1941-44 제20∼23회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48, 50, 56, 61, 63, 65, 66, 71 부부전

1955-61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제 4, 5, 6, 8, 10회)

1957-77 제1∼26회 백양회전

1958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 초대 「한국현대미술전」

1960 제4회 「현대작가 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

1972 「한국 근대 미술 60년전(1900∼1960)」(국립현대미술관)

1977 한국화 구주 순회 전시회 초대 (스웨덴 스톡홀름 왕립동양 박물관/

네덜란드 라젠시 싱리 미술관/ 독일 슈트트가르트 문화교류관/

프랑스 파리 세르니스미술관)

1980 「운보 김기창·송남 신상호 도화전」(롯데백화점 화랑)

1983 「이탈리아 한국 현대 미술전」(이탈리아 밀라노 비스콘티아홀)

1985 「6대가 중진 작가전」(관훈동 동원화랑)

1991 「현대 한국화의 뿌리」(송원화랑)

1992 「한국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전」(부산한국미술관) 외 다수

 

수상

1931-40 제10∼19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및 특선

1963 제2회 5월 문화상 수상, 문교부 예술원

1971 제12회 '상일문화상' 수상, 상일문화재단

1981 국민훈장 모란상 수상

1986 서울시 문화상 미술부문

경력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후소회·백양회 창립 회원

제2회 국제아동미술제 심사위원

제19회 상일문화상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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