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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작품 소개

[스크랩] 주태석 - 꿈꾸는 나무, 몽환적인 숲

작성자호산|작성시간12.09.17|조회수185 목록 댓글 0

 

자연.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0cm_2006

 

자연.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0cm_2007

 

자연.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0cm_2007

 

자연.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5×110cm_2007

 

자연.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0cm_2007

 

자연.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300cm_2006

 

 

자연 이미지. 주태석이 시종 자신의 그림에 부치고 있는 주제며 제목이다. 주제며 제목이 그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다만 암시적이고 추상적으로만 그림의 성격을 에둘러 지시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작가의 경우에 주제와 제목은 비교적 그림의 성격과 일치하고 있어서 주제와 제목을 이해하는 것이 곧 그림의 성격을 이해하게 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 이미지란 말 속엔 자연과 이미지가 들어있다. 이렇게 그 말을 떼놓고 보면 의미는 좀 더 분명해진다. 즉 작가는 자연을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이미지 곧 자연에서 받은 인상과 느낌을, 그리고 자연이라는 관념을 그린다. 자연을 이미지 쪽으로 끌어오는 것이며, 자연의 객관적 지평을 그대로 옮겨놓기보다는 자연을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해석한, 자연에 대한 주관적 전망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엔 자연과 작가가 만나지는 경험과 그 경험에 작용되어지는 어떤 메커니즘이 들어있다. 즉 자연의 지평과 작가의 지평이 융합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자연이란 텍스트는 작가에게 있는 그대로 건네지지가 않는다. 마치 텍스트의 의미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지점이 작가가 아닌 독자에게서 이듯, 자연의 의미는 작가의 독해과정을 거치면서 주관적으로 변용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친 그림에서 확인되는 자연은 그러므로 사실은 주태석이라는 인격에 포착된 자연이며, 그 특정 정서에 붙잡힌 자연이다. 그렇다면 그 인격, 그 정서는 자연을 어떻게 해석하고 자연으로부터 무엇을 욕망하는가. 작가도 밝히고 있듯 정적, 고요, 평안이다(안락의자 같이 편안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티스를 연상시킨다). 작가에게 자연은 바로 이렇듯 적요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어떤 경지를 표현하게 해주는 메타포였던 것이다. 자연은 살아있다. 자연은 천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인간의 관념이 그대로인 자연으로부터 천태만상을 끄집어낸다. 인간의 관념 속에서 자연은 이를테면 두려움과 경배의 대상인가하면(토테미즘과 샤머니즘, 범신론과 물활론, 선령과 악령, 주술과 신비주의를 아우르는), 변신의 귀재이기도 하고(신화는 온통 변신하는 자연의 백과사전을 방불케 한다),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적요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경지에 대한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욕망의 대상?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는 자연의 이런 경지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욕망은 상실감의 짝패다. 욕망의 이면에는 상실감이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자연이 욕망해야할 대상이 되었다는 것, 현실 속에 자연이, 적어도 적요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경지로서의 자연이 부재하다는 것, 이런 반성이 작가의 그림 속에 들어있고, 그 반성은 작가의 반성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는 현대인 모두가 공유하는 반성이기도 하다. 작가의 그림이 공감을 얻는 것은 먼저 자연의 닮은꼴을 확인하는 것에서 오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가 그 닮은꼴에 탑재해 놓은 욕망을 확인하는 것에서 온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현대인이 자연을 상실했음을 주지시키고, 만약 사실상 상실한 것이 맞다면 그렇게 상실된 자연을 일종의 인공적인 비전 내지는 이미지로 바꿔서라도 자연을 통한 욕망하기가 계속되어져야 함을 주지시키고, 이로써 자연과 함께 상실된 치유력과 복원력(정적, 고요, 평안)을 되돌려놓으려는 기획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이 의미론적으로 자연을 통해 휴식과 쉼의 계기를 얻고 싶은 현대인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라면, 형식적으론 회화의 본질 문제를 건드린다. 이를테면 멀리 보이는 흐릿한 숲을 배경으로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묘사된, 화면의 전면에 위치한 나무 한 두 그루와 아마도 그 나무의 것이지 싶은, 역광으로 인해 실제보다 더 어둑해 보이는 나뭇잎과의 현저한 대비, 그리고 그 대비가 만들어준 공간감, 그리고 여기에 그림자까지 더해진 작가의 그림은 설핏 자연 그대로를 옮겨놓은 재현적인 그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첫인상(혹 자연에 대한 선입견일지도 모를)을 걷어내고 보면 그림은 불현듯 낯설어지고 생소해진다. 심지어 작가는 이렇듯 낯설고 생소한 성질이나 요소를 공공연하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배경화면의 숲은 숲대로, 전면의 나뭇잎은 나뭇잎대로, 나아가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마저 온통 평면의 실루엣으로 그려져 있다. 자연을 실제로 보면 배경화면과 전면이, 그리고 그기에 속해있는 모티브들이 유기적인 관계 아래 놓여 있어서 분리할 수 없는 전체라는 인상을 준다면, 작가의 그림에선 마치 자연의 실제를 여러 겹의 평면의 실루엣으로 잘라낸 단면들을 하나의 층위로 중첩시켜놓은 것 같다. 마찬가지지만 실제 자연의 경우에 공간감이 요소들 상호간의 유기적인 관계와 연속성에 연유한 것이라면, 작가의 경우에 공간감은 다만 평면의 슬라이스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포갤 때 생겨난 사이 공간의 물적 형식 같다.

작가는 나무와 숲, 빛과 그림자가 그림의 키워드라고 했다. 그 대상이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이거나 풍경의 경우에 이 말은 어떤 특정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일반적인 관심사를 표명한 것 이상일 수는 없겠지만, 작가의 경우에 이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이를테면 (전면에 사실적으로 그려진) 나무와 (배경화면에 흐릿하게 그려진) 숲과의 관계를,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상호작용을 표현하는데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적어도 도식적으로(환원적인 입장에서) 볼 때 관계와 상호작용을 드러내는데 대비만큼 분명한 것도 없다. 대비(요새 말로 치면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관계와 상호작용이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며, 요소들을 평면의 실루엣으로 단순화한 것이나, 이로 인한 평면성, 모두가 이렇듯 대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면서 작가의 그림을 보면 나무와 숲을 나무와 숲이라는 실재로서보다는 다만 빛과 그림자의 관계로 환원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화면의 전면에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최소한의 공간감과 원근감을 실현하고 있는(그마저도 실제로서보다는 회화적 장치 같은) 한 두 그루의 나무를 제외한 나머지 나무들, 숲을 이루는 나무들 전체가 실루엣이며 사실상의 그림자가 아닌가. 그리고 그 나무들 사이로, 그 숲 사이로 빛이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나무와 숲과의 대비는 빛과 그림자와의 대비로 치환된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그림에서 나무와 숲, 나아가 하늘마저 모두가 평면의 실루엣으로 환원된다. 빛과 그림자 역시 평면 아닌 것이 없다. 이 도저한 평면성과 환원주의야말로 모더니즘의 유산이 아닌가.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자연의 감각적 닮은꼴을 겨냥한 자연주의자의 면모와 함께, 사실은 그 이면에 이렇듯 회화의 본질을 묻는, 조형과 형식요소에 천착한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를 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자연 이미지란 주제로 돌아가 보자. 자연을 이미지화 한다, 즉 자연을 이미지로 옮겨놓는다는 이 말은 그저 수사적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자연을 회화의 자장 안쪽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며, 그래서 자연을 회화의 본성을 실현하고 강조하기 위한 구실로 삼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분명 자연이 있지만 그 자연이 더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잘해야 한갓 도구적 차원에 머물 뿐이라면 그때의 자연은 사실상 상실된 것이며 최소한 무의미한 것이다. 현대인은 조화가 생화보다 더 생생한 시대에 살고 있고, 이미테이션 폭포 아래 자리를 깔고 누워(마치 자연 속에서처럼) 삶의 배터리를 충전한다. 모니터를 통해 보는 바다가 여행의 번잡스러움을 피하게 해주고, 자연은 점차 관광지와 유원지로 변질된다. 산행은 근원적 존재와 만나는 고독한 경험으로서보다는 왁자한 주말행사며 생활모드로 자리 잡았다.

주태석의 숲 그림은 자연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의 관념과 정서의 프리즘을 통해 필터링한 것이다. 컬러를 사용할 때조차 그의 그림은 모노톤의 단색조를 유지함으로써 정적이고 관조적인 인상을 준다. 마치 노랗고 빨간, 때로 연녹색과 파란색 렌즈를 통해 보듯, 암실에서 사물을 보듯 광학적인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그의 그림에 나타난 빛은 자연광 그대로라기보다는 인공적인 빛에 가깝고, 이런 연유로 그의 그림은 왠지 인공적인 색감과 질감을, 미디어적인 생리를 떠올려준다. 혹 그의 그림은 자연을 미디어의 시대적 감수성으로 해석한 것이며, 그 시대적 요구에 어울릴 만한 자연의 비전이며 이미지를 제안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상 자연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그 비전이며 이미지를 매개로 잃어버린 자연의 본성을, 이를테면 적요하고 고요하고 편안한 어떤 경지를 꿈꾸게 해주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술평론,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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