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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2 1400여년 전 신라 왕릉의 대형 석물들이 경주 낭산 기슭에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낭산 동북쪽 황복사터 부근의 경작지에서 발굴된 신라 왕릉급 무덤의 대형 석물 40여점을 옛 원형대로 아귀를 짜맞춰 이어놓았다. 잘게 깬 돌들을 펴놓고 그 위에 복원한 석물들은 신라 왕릉의 얼개와 축조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지름 22m에 달하는 왕릉의 전체 규모는 물론 탱석, 면석, 지대석, 상대갑석 등 봉분 둘레를 싸면서 망자의 혼을 지켰던 신라 석물들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치밀한 수학적 곡률 계산에 따라 면석과 상하대 갑석의 앞면을 부위에 맞춰 둥그런 원호의 곡면으로 다듬는 ‘라운딩 기법’을 구사하여 배치하였다.전체 석물들이 다 수습된 것은 아니지만, 발굴된 석물들을 맞춰 보니 봉분을 지탱하는 탱석과 둘레를 싸는 면석이 각각 36개씩 딱 들어맞게 짜인 것으로 드러났다. 고도의 수학 지식이 뒷받침된 신라인의 건축·토목 기술 실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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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06 이 석물들은 신라 34대 효성왕(737~742)의 왕릉을 두르려고 만들었던 호석 시설의 일부로 보인다. 공사가 중단되면서 한동안 방치됐으며 이후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 관청 등의 건물 기반재 용도로 달리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신자였던 효성왕이 유언대로 유골을 화장함에 따라 왕릉 공사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무덤을 조성하려 한 터는 아직 찾지 못했다. 애초 석물이 발견된 유적 옆 공터였던 현재 복원 현장을 왕릉 터로 지목하고 조사했으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했다. 개당 1톤에서 1.5톤에 달하는 무거운 석물들을 먼 곳에서 옮겨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유적에서 좀더 동쪽에 있는 보문들 어딘가에 만들다 만 왕릉 터가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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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06 발견된 갑석과 지대석, 면석과 탱석으로 계산한 왕릉의 지름은 약 22m다. 전(傳) 경덕왕릉(765년)과 비슷한 규모다. 왕릉 관련 석재 다수가 미완성으로 출토된 점, 후대에 조성된 8~9세기 건물지 시설에 재활용된 점, 석실 내부를 만들기 위한 부재가 확인되지 않은 점, 탱석의 십이지신상이 잘려나간 점 등 여러 정황으로 판단할 때 사전에 왕릉을 준비하다가 축조공사를 중단한 가릉 석물로 추정된다. 가릉의 주인공은 발굴조사 결과와 십이지신상 형식으로 볼 때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742)으로 추정된다.